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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오대사 진서에서는 심빈(沈贇)으로 표기되며, 신오대사에서는 심빈(沈斌)으로 표기된다. ※ 58권 ~ 60권은 考에 해당. 신오대사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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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文蔚 | 장문울 |
성 | 장(張) |
이름 | 문울(文蔚) |
자 | 우화(右華) |
부친 | 장석(張裼) |
출생 | ? ~ 908년 |
출신 | 영주(瀛州) 하간현(河間縣) |
국적 | 당(唐) → 후량(後梁) |
당나라,
오대십국시대 후량의 재상이다. 자는 우화(右華).
영주(瀛州) 하간현(河間縣) 출신의 장문울은 장석(張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장문울은
희종 건부 연간 874년 ~ 879년 에 진사로 급제하였고, 판염철순관(判鹽鐵巡官)으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중화 연간
[1]에
황소가
반란을 일으키고 희종이 성도로 피난을 갈 때, 이도(李都)를 염철판관으로 삼으면서, 장문울은 전운판관으로 임명되었다. 황소가 몰락한 이후, 장문울은 감찰어사로 제수되었고, 좌보궐, 시어사, 기거사인, 사훈원외랑, 이부원외랑, 사훈낭중, 지제고, 중서사인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모친상을 당한 뒤 장문울은 다시 중서사인으로 임명되었고, 한림원으로 소집되어 한림학사승지로 임명되었다.
소종이 즉위한 뒤, 장문울은 소종의 조령을 맡아 올바름을 잃지 않았기에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뒤에 장문울은 호부시랑으로 전임되었고, 904년에는 중서시랑, 평장사로 임명되었으며, 판호부(判戶部)를 겸임하였다.
천우 연간의 재상은 유찬(柳璨)이었다. 하지만 당시 재상이었던 유찬은 성품이 포악하였고, 재덕이 출중한 이들을 해쳤다. 관리들은 이를 목도하고도 감히 유찬을 비판하지 못하였지만, 장문울은 유찬을 제지하여 관리들의 지지를 받았다. 유찬이 죽은 뒤, 장문울은 탁지염철사를 겸임하였다.
907년
애제가
주전충에게 선양을 하여 당나라가 멸망하고 후량이 건국된다. 장문울은 후량이 건국되어도 그 지위가 변하지 않았으며, 908년에 사망하여 우복야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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