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오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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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舊五代史
중국의 24사 중 하나이다. 본래는 《양당진한주서》(梁唐晉漢周書)라고 불렀다. 《오대사》는 일종의 속칭이었다. 설거정(薛居正) 등이 송 태조 조광윤의 조서를 받들어 편수하여 974년에 완성했다. 이후에 구양수에 의해 편찬된 《신오대사》와 구분하기 위해 '구'를 붙였다. 별칭으로 설거정의 성을 따서 《설사》(薛史)라고도 부른다.
2. 구성[편집]
구성은 <본기> 61권, <열전> 77권, <지> 12권 등 총 150권으로 되어 있으며, 이 중 《양서》(梁書)가 24권, 《당서》(唐書)가 50권, 《진서》(晉書)가 24권, 《한서》(漢書)가 11권, 《주서》(周書)가 22권이다.
2.1. 《양서》(梁書)[편집]
2.2. 《당서》(唐書)[편집]
2.3. 《진서》(晉書)[편집]
2.4. 《한서》(漢書)[편집]
2.5. 《주서》(周書)[편집]
2.6. <열전>[편집]
《구오대사》의 <열전>은 크게 <세습 열전>, <참위 열전>, <외국 열전>으로 나눈다. 10국의 사정은 대체로 <세습 열전>과 <참위 열전>에 각각 수록되었으며,[1] <열전> 말미에 <외국 열전>을 두었다.
3. 의의와 평가[편집]
《구오대사》는 완성까지 걸린 시간이 1년 반으로 짧은 편이다.[2] 《구오대사》가 신속하게 편찬된 이유는 당나라 때부터 정비된 사서 편찬 제도가 5대 10국시대에도 이어져 5대 왕조들의 《실록》이 갖추어졌고, 5대 10국시대에 활동했던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편찬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편찬 시기가 5대 10국시대와 너무 가까웠고, 편찬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후대 송나라의 사대부들이 5대의 실상에 대해 정확한 인식과 평가를 가질 수 없었다. 그래서 《구오대사》가 편찬된 이후, 《구오대사》의 구조적인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오대사궐문》과 같은 사서가 나오기도 했다.
이후 구양수가 《신오대사》를 사찬하면서 《신오대사》가 더 유명해졌다. 급기야 금나라의 제5대 황제인 장종은 1207년에 공식적으로 《신오대사》만 가르치도록 규정하면서, 《구오대사》는 제대로 된 전승이 힘들었다.
이 때문에, 사실 《신오대사》가 편찬된 이후, 《구오대사》는 원•명 시기를 거치면서 원본이 소실되어 현존하지 않는다. 청나라의 학자인 소진함(邵晋涵)이 명대 초기《영락대전》(永樂大典)에 남아있는 《구오대사》를 인용하고, 재정리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원사료의 가치는 《신오대사》보다 《구오대사》가 더 높고 풍부하다. 또한, 《구오대사》는 역대의 중국 정사를 중심으로 사실주의에 입각하여 편찬되어 있어서 중립적인 면에서 큰 가치가 있다. 또한 당대의 문체가 고스란히 남아있어 《신오대사》보다 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또한, 후삼국시대와 고려사 연구에 있어서도 당대에 쓰여진 사료이기 때문에 한국사 연구자들에게 있어서도 가치있는 사료이다.[3]
4. 관련 고사성어[편집]
- 만사휴의(萬事休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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