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동사변 (r20210301판)

 


冀東事變
East Hebei Incident

파일:기동방공자치정부수립.jpg
기동방공자치위원회의 수립을 선포하는 인루겅

1. 개요
2. 배경
3. 전개
3.2. 일본의 노골적인 내정간섭
3.3. 자치정부 수립 음모
3.4. 인루겅의 등장
3.5. 기찰정무위원회의 수립
4. 결과
5. 참고문헌
6. 관련문서


1. 개요


1935년 11월 25일, 일본 제국한간 인루겅을 포섭하여 기동방공자치위원회를 수립한 사건을 말한다.


2. 배경


1931년의 만주사변, 1932년의 제1차 상하이 사변, 1933년의 열하사변을 거치면서 일본은 동북삼성과 열하를 점령하고 베이핑의 지척까지 전진했다. 1933년 당고정전협정의 체결로 일본의 전진은 일단 정지되었고 오카다 게이스케 내각이 출범하면서 대중유화론자 히로타 고키가 외무상에 취임, 중일 사이에는 친선의 분위기가 감돌았지만 화북을 중국으로부터 분리하여 제2의 만주국을 수립해 장악하려는 관동군의 과격한 장령들의 도발은 멈추지 않고 있었다.

1935년 5월, 톈진의 일본 조계지에서 국권보 사장 호은부와 진성보 사장 겸 만주국 중앙통신사 기자 백유환이 암살당하는 하북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은 이를 구실로 군사위원회 베이핑 분회 대리 위원장 허잉친을 찾아가 남의사가 암살을 저질렀다고 주장하며 책임질 것을 요구했다. 결국 허잉친은 허잉친-우메즈 협정이라 불리는 하매 협정을 체결하여 일본의 감시와 규찰을 용인했다.

이어 6월에 차하얼 성에 잠입한 일본군 특무기관원 4명이 체포된 장북사건을 구실로 일본은 쑹저위안, 친더춘을 위협해 친더춘-토이하라 협정이라 불리는 진토 협정을 체결, 쑹저위안의 철수와 배일기관 해산 등을 관철시켰다. 하매협정과 진토협정 모두 정식 군사협정이 아니라 통지에 불과했지만 일본은 이것이 정식 협정인 것처럼 선전하며 국민정부를 압박, 화북 분리공작에 박차를 가했다. 이런 깽판을 저지해야 할 일본 외무성은 도리어 이런 현지 해결을 적극적으로 승인하며 부추겼다.


3. 전개



3.1. 화북분리공작


1935년 3월 30일, 관동군은 다음과 같은 대중국 정책을 결정했다.

  • 1. 화북 지역에 당고협정 및 부속 체결 사항 등에 의한 일본의 기득권을 신장하고 이로써 화북의 정권을 절대복종으로 이끈다.

  • 2. 화북 지역에 장래, 민중을 대상으로 하는 경제관계를 밀접하게 하기 위해 면, 철도 등의 산업개발 및 거래를 급속히 촉진시킨다.

  • 3. 서남 지역에 중앙 측에 대항할 수 있도록 물질적 원조를 비밀리에 행한다.

  • 4. 서남 지역에 장래 중국 남부의 경제계를 일본의 손에 넣기 위한 제일보로써, 필요한 경제적 설비를 시설한다.

관동군은 우선 중앙군과 국민당을 화북에서 철수시켜 화북을 진공상태로 만드는 것을 1단계로, 허수아비를 옹립하는 것을 2단계로, 마지막으로 일본이 화북 5성의 지도적 지위를 국민정부로부터 정식으로 받아내는 것을 3단계로 설립하고 1단계의 포석으로 하매 협정진토 협정을 체결했다. 2단계를 군벌 쑨촨팡의 포섭이 시도되었으나 쑨촨팡은 이를 거부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죽인 시종빈의 딸 스젠차오에게 암살당했다.

하지만 일본은 포기하지 않고 1935년 6월 27일, 우페이푸의 부하 백견무를 선동하여 베이핑 교외의 풍대에서 폭동을 일으키게 했다. 하지만 하북성 주석 겸 진고 보안사령관 상진과 만복린이 이를 단호히 진압하고 북지청년동맹회를 해산해버렸다. 일본은 산서성의 옌시산에 대한 포섭을 시도하고 전 차하얼 주석이자 29군 군장인 쑹저위안, 산동성 정부주석 한푸쥐, 염계군벌 상진 등을 부추겨 중앙에 반기를 들게 하려 했지만 이들은 모두 일본에 아첨하면서 일본의 기대만 높이면서 정작 반장행동은 거부함으로 일본 군부를 열받게 했다.

1935년 7월 17일, 국민정부는 쑹저위안, 친더춘, 풍치안, 장자충, 유여명 등에게 청천백일장을 수여하여 크게 치하하고 행정원 베이핑 정무정리위원회를 해산하고 쑹저위안을 평진 위수사령에 임명하여 화북 사수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이에 중국 주둔군 사령관 타다 하야오 소장[1]은 9월 24일 타다 성명을 발표, "일중만 공존의 바탕이 될 화북의 안녕을 저해하는 국민당 및 장제스 정권을 화북에서 제거하기 위해서는 위력 행사도 부득이한 것 아닌가."라고 폭언하며 국민정부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이에 일본 정부는 타다의 발언이 지나쳤음을 인정하고 이를 취소하게 했다.

일본의 등쌀에 이기지 못한 베이핑 정무정리위원회 위원장 황푸는 요양을 위해 베이핑을 떠나 사임해버렸고 8월에 베이핑 정무정리위원회도 폐지되었다.


3.2. 일본의 노골적인 내정간섭


1935년 10월 30일, 관동군은 다롄에 중국 주둔군 사령관 타다, 참모본주 제2부장 오카무라 야스지 등을 불러들여 화북 분리 방침을 재확인, 상하이와 톈진의 일본군 장교들에게 이를 전달하여 화북분리에 박차를 가했다. 관동군은 톈진에서 중국인 유민과 한간들을 매수하여 화북인민자치회, 화북인민급진회 등 괴뢰단체들을 조직했고 10월 21일 하북성 향하현에서 만주국 군사고문과 일본인들이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1935년 8월 4일 하북성 정부 전구특경 제3총대장 유좌주가 난주에서 암살당한 난주 사건을 구실로 이것이 국민당 군사위원회 베이핑 분회의 특무수류탄대의 소행이라 주장하며 당고정전협정이 위반되었다고 베이핑 정무정리위원회 참의 도상명을 무단으로 체포하여 10일이나 감금했다. 이는 도상명이 행정감철전원 시절에 일본군의 요구를 거부한 원한 때문이었다. 중화민국 외교부의 엄중한 항의로 도상명은 석방되었으나 일본군부의 야욕은 그치지 않았다.

10월 29일, 주중 일본 대사관 부무관 다카하시, 중국 주둔군 참모 사카이 대좌[2]가 하북성 주석 상진에게 난주 사건은 중국의 조직적인 항일 운동이라고 항의하면서 상진이 하북 각 기관을 대표해 유감의 뜻을 표하고 범인을 신속히 체포할 것이며 군사위원회 베이핑 분회를 폐지하고 베이핑 시장 원량을 면직시키고 장래 반일, 반만 기관을 북상시키 말 것을 중앙에 권고하라고 요구했다. 국민정부는 이것이 내정간섭이라고 당연히 거부했다. 이에 11월 1일 밤, 다카하시와 나카이가 다시 상진을 방문해서 "당초 귀국 정부의 체면을 존중하여 짐짓 자주적인 실행을 권고한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 군은 즉시 자유행동으로 실현할 수밖에 없다."고 적반하장으로 위협했다. 결국 11월 3일 베이핑 시장 원량이 자발적으로 사직했고[3] 11월 26일 군사위원회 베이핑 분회도 철폐되었다.

때마침 중화민국 11월 1일부터 법폐개혁에 들어가서 대대적인 경제개혁에 착수하고 있었다. 중국의 통일이 강화되어 간섭이 어려워질것을 우려한 일본은 이를 방해하고자 했으나 미국과 영국의 지원으로 화폐개혁은 대성공으로 끝났다. 이에 실망한 일본은 더욱 노골적인 간섭에 들어갔다. 다카하시는 다시 쑹저위안을 찾아가 다음과 같이 협박했다.

"백은의 국유화와 현은의 상하이 집중은 화북경제를 궁지에 빠뜨려 일본의 이익을 방해한다. 만일 당신이 자주적으로 이를 방지하지 않으면 일본은 실력을 행사하겠다."



3.3. 자치정부 수립 음모


11월 12일 도이하라 겐지가 베이핑으로 와서 쑹저위안에게 11월 20일까지 화북5성 자치정부 수립에 동의하라고 요구했다. 만약 거부한다면 일본이 무력으로 화북과 산동을 침략할 것이라는 협박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관동군이 산해관과 호북구에서 전차, 중포를 앞세워 무력시위를 벌이고 뤼순, 칭다오에서 순양함, 구축함과 전투기들이 파견되어 베이핑을 위협했다. 하지만 쑹저위안은 일본의 협박을 묵살하고 11월 19일 오후 1시 베이핑을 떠나 톈진에 은거해버렸다. 이에 도이하라는 쑹저위안을 쫓아가 동의를 얻어내려 했지만 실패했고 일본의 협박은 다행히도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한편 일본군은 산동성의 한푸쥐, 하북성 주석 상진 등에게도 강제로 동의를 얻어내려 했으나 한푸쥐는 거부했고 상진도 바오딩의 병원으로 칭병하고 드러누워 도이하라를 피해버렸다. 11월 19일 장제스가 5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대외 관계 보고'를 실시했다.

"국제 간의 사건은 우리 국가의 생존과 부흥의 길을 끊어놓는 게 아닌 한, 국가와 민족의 전체적인 이해를 위하여 일체의 지엽적인 문제에 대해 최대한의 인내를 계속 견지하고, 또한 주권이 침해받지 않는 한도 내에서 각 우방과의 정치적 협력을 꾀하여야 한다. 호혜평등의 원칙에 따라 각 우방과의 경제협력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된다. (...) 화평이 아직 절망의 단계에 이르지 않았으매 결코 화평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희생이 아직 최후의 관두에 이르지 않았으매 결코 가벼이 희생을 운위하지 않는다. 그러나 화평에도 한도가 있다. 최후에는 희생을 치를 각오를 가지고 하평에 최대의 노력을 기울이자."


도이하라는 톈진에서 쑹저위안을 찾아가 근성있게 동의를 요구했고 나카이가 바오딩의 병원에 누워있는 상진을 찾아가 쑹저위안과 한푸쥐는 이미 동의했다고 거짓말까지 하면서 어르고 위협하길 반복했지만 쑹저위안도 상진도 완고히 저항했다. 이때 화북에서는 쑹저위안이 굴복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퍼져 학생들이 통곡하며 구국투쟁을 전개했다.


3.4. 인루겅의 등장


파일:은여경.jpg
인루겅의 모습

이 시점에서 등장한 것이 50세의 인루겅이었다.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인루겅은 일본인 아내를 두었으며 과거 궈쑹링반봉사건을 일으켰을 때 외교부장을 지낸 인물인데 이 시점에서 난유구 행정감찰전문위원을 맡고 있었다. 11월 23일, 도이하라는 일본 조계지의 술집에 인루겅을 초대하여 구슬렸는데 인루겅은 대번에 넘어가 일본과의 협력을 약속하였다.

11월 25일, 일본군이 사주한 깡패와 불량배들이 시위를 벌여 자치를 주장하는 동안 인루겅이 베이핑 동쪽 20킬로미터 지점인 통현에서 기동방공자치위원회의 조직을 선포하고 국민정부로부터 이탈했다. 이에 하북성 동부 22개 현, 차하얼 성 동부 3개 현, 500만에 달하는 인구와 하북성 총 세입의 22%를 차지하는 막대한 지역이 일본의 수중에 들어갔다. 인루겅은 졸개들을 파견하여 해당 지역의 세입을 접수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12월 5일에는 텐진에서 일본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이 정치를 인민에게 돌려주라는 구호를 외치며 폭동을 일으켰다. 장제스는 격노의 감정을 담은 일기를 남겼다.

일구는 역적 인루겅을 유혹하여 난동에서 반역적인 독립을 시키고 한간이나 불량배를 부추겨 톈진 시정부와 사령부의 추방을 강요시켰다. 그들은 일본의 헌병에 의해 해산되었다고는 하나, 시내의 도서관에서 집합하여 시위, 난동을 계속하고 있다.
1935년 11월 25일 장제스의 일기

11월 25일, 장제스는 쑹저위안에게 전보를 보내 사태 방지를 요구했다.

난동이나 철원시에서 잇달아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보아 다른 지방에서도 반드시 책동이 이어질 것임. 형은 엄중 경계를 해주기를 바람.

11월 26일 국민정부는 인루겅을 국적으로 선포하여 체포령을 하달했으나 난징 총영사 슈마 야키치로가 외교부를 방문, 인루겅을 체포하는 것을 화북 인민의 의지를 탄압하는 것으로 여겨 묵과하지 않겠다고 경고함에 따라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도이하라는 도리어 쑹저위안에게 12월 30일까지 자치를 선포하라고 계속 윽박질렀다. 11월 30일 쑹저위안은 '정세 급박, 인민의 감정은 점점 더 격앙되고 있다. 자치를 제창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자결을 주장하는 자도 있어, 이미 제어할 수 없는 상황에 있다.'라고 전보를 보냈고 국민정부는 허잉친을 파견하여 쑹저위안을 독려하게 했다. 허잉친의 도착에 용기를 얻은 쑹저위안은 일본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에 일본은 15대의 비행기를 동원헤 베이핑에 자치에 호응할 것을 촉구하는 인루겅의 삐라를 뿌리며 선동했다.

인루겅은 일본을 위해 관세를 기존의 25%로 인하하고 일본 및 만주국과의 무역을 대대적으로 지원, 1933년 시점에서 일본 제국의 무역에서 8.6%를 차지하던 관내 무역은 1938년 61.2%까지 급증했다. 1930년 만주-관내 무역에서 만주-화북 무역은 15%로 60%를 차지하던 만주-화중에 비해 매우 적었으나 1935년 시점에서는 만주-화북 무역이 51%로 증가하였다.[4]


3.5. 기찰정무위원회의 수립


12월 12일, 국민정부는 내정부장에 장작빈, 외교부장에 장췬, 정치부장에 허잉친을 임명하고 화북처리에 대한 4가지 원칙을 발표했다.

  • 1. 정세가 허락한다면 즉시 허잉친이 행정원 베이핑 주재 판사장관에 취임한다. 그것이 가능해지면 서남 정무위원회의 실정에 따라 기동 정무위원회를 설립한다.

  • 2. 기동 정무위원회의 조직은 북방의 특수 정세에 적합토록 하며, 위원은 중앙에서 위임하고 쑹저위안을 위원장으로 한다.

  • 3. 기동의 일체의 내정, 외교, 군사, 재정은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하며 중앙 법령의 범위를 이탈하지 않는다.

  • 4. 자치의 명의나 독립 상태는 절대로 피한다.

12월 18일 국민정부는 기찰정무위원회를 설치하고 쑹저위안을 위원장으로 삼아 17명의 정부위원과 함께 지역의 사무를 처리하게 했다. 허나 일본의 눈치를 보아 친일적인 왕읍당, 왕커민, 치셰위안, 조여림 등 7명의 친일파가 정무위원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친더춘, 장자충, 만복린 등 열하사변 때 일본에 항거한 여러 맹장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펑위샹과 옌시산을 군사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하여 북방의 지휘계통을 정리하였다. 1936년 1월 1일 행정원장 겸 군사위원장 장제스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국민에게 구국을 촉구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국가정세는 시시각각으로 위험이 닥쳐오는 위급존망 속에 처해 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의 운명은 모두 우리 전 동포가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4억 동포의 공유물인 중화민국을 구해,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지닌 영광스러운 중화민국을 부흥시켜야 하는데, 여기에는 방법이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다름 아닌 우리 중화민국 자신의 노력이다. 바꾸어 말하면, 4억의 전국 인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강의 노력을 하는 것이다."


1936년 1월 13일, 장제스는 일본 정치가 나가노와 만나 대화를 통해 해결할 의지가 있음을 타진했다.

"나 장제스는 중일문제 해결을 위해 무엇보다 먼저 양국 간에 존재하는, 그러나 존재해서는 안되는 2가지 심리를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일본인은 중국인을 두려워하고 중국인을 의심하는 마음이다. 이를 타파하지 않는 한 양국관계는 호전되지 않는다. 중일문제 해결을 위해 확실하게 책임질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중국에 있어서는 나 장제스가 책임을 지고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할 결심을 굳혔다. 지금이야말로 중일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여 영원한 평화적 관계를 수립할 좋은 기회라 행각하고 있다."


쑹저위안도 도이하라를 만나 기동방공자치정부 문제를 논했으나 일본은 기찰정무위원회와 기동방공자치정부의 합병을 요구하는 헛소리만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4. 결과


이후 일본은 2.26 사건이라는 정치적 대혼란을 맞이하였고 대중 확장정책에 반대했던 황도파가 숙청되고 통제파가 군의 주류가 되면서 수동사변 등을 통해 계속 중국에 대한 침략을 멈추지 않았다. 1935년 12월 26일, 일본은 기동방공자치위원회를 기동방공자치정부로 개조하고 22개 현을 다스리게 했다.

이에 중국의 항일 여론이 비등하여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12.9 운동이라는 대규모 항일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것에 큰 영향을 받은 장쉐량은 1936년 12월 12일 서안 사건을 일으켜 장제스에게 국공합작을 강요하게 되었고 불과 몇달 후 1937년 일본과 중국은 운명을 건 전면전에 돌입하게 된다.

5. 참고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서안사변, 나가노 히로무, 일월서각.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3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중국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중일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 일본군사사 상, 후지와라 아키라, 제이앤씨.
  • 히로히토 평전, 허버트 빅스, 삼인.
  • 일본근현대사 시리즈 5권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가토 요코, 어문학사.
  • 남경 국민정부의 항일정책 전환 배경 : 항일 여론의 추이를 중심으로, 김용운, 순천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6. 관련문서



[1] 지금은 이렇게 깽판을 치지만 이래 봬도 중일전쟁 불확대파의 일원. 나중에 1937년 9월 참모본부 차장이 되는데 이시와라 간지의 매제이기도 하다.[2] 후일 중장까지 진급하고 1943년 예편하지만 중일전쟁 이후 국민정부의 손에 잡혀 처형된다.[3] 후임은 친더춘.[4] 만주-화중 무역은 33%로 축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