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어준/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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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성장기 (1968 ~ 1990)
3. 대학과 포스코 재직 시절 (1990 ~ 1995)
4. 딴지일보 창간 (1995 ~ 2003)
5. 딴지일보의 리즈시절 이후 (2003 ~ 2011)
6. 나꼼수 출연과 그 이후 (2011 ~ 현재)




1. 개요[편집]


방송인 김어준의 생애를 정리한 문서.


2. 성장기 (1968 ~ 1990)[편집]


경상남도 진해시[1] 출신이다. 모친의 직업이 유치원 교사였으며 굉장한 방임주의 가정에서 자랐다고 한다.[2] 이 방임주의란 것이 어느 정도였냐면 김어준이 고교생 시절 담배를 피울 것인지 말 것인지가 아니라 집에서 대놓고 피울 것인지 밖에 나가서 피우고 들어올 것인지를 두고 부모님과 설전을 벌였을 정도였다고. 이때 김어준은 난생 처음으로 부모의 간섭을 받았다고 하는데, 끝끝내 방에서 담배를 피우겠다는 김어준의 고집에 모친은 뺨을 한 번 후려치고는 "그래 피워라 인마"라고 말했다고 한다.

지금 외모와 다르게 청소년기까지 큰 키에 날씬한 체형이라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하는데, 나꼼수를 할 때 정봉주가 김어준의 과거 지인을 만나서 조사해서 방송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출처] 유년기에 미국에 가서 1년간 살다가 중학교를 다니던 중에 한국에 돌아왔다고 하는데, 중학생 때 이미 키가 180에 가까운 훤칠한 외모에 공부를 잘해서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한국 중학교로 전학오자마자 처음으로 본 학교 시험(중간고사 혹은 기말고사)에서 전교 1등을 하는 바람에 '얼마 전에 전학온 키 크고 잘생긴 애가 공부도 잘 한다'고 소문이 나서 별명이 테리우스가 되어버렸다고 한다. [3][4]

3. 대학과 포스코 재직 시절 (1990 ~ 1995)[편집]


고등학교 당시 우등생이었는데 서울대학교를 목표로 삼수까지 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홍익대학교 전기제어공학과로 진학하였다.[5] 스스로 술회한 바에 따르면 사수해서 서울대를 가고 싶었으나 군대 때문에 홍익대에 머물렀다고 한다. 삼수를 했을 당시, 탈락하면 입영통지서가 발급되고 그러면 더 이상 병역을 미룰 수 없어서 얄짤없이 군복무를 해야만 했다. 지금이야 직업훈련원(폴리텍대학교 등)이 병역을 강제로 1회 연기를 시켜주고 이런저런 방법으로[6] 연기가 가능하지만 그 당시에는 대학교 재학이 유일한 병역연기 방법이었다. 훗날 본인의 저서 '건투를 빈다(p.26~29)'에서 서울대에 갔더라면 세상의 수많은 가치 중 겨우 공부 하나 잘하는 걸 가지고 스스로 존재 자체가 우월하다고 믿는 어린 편협하고 유치한 멘탈리티에 사로잡혔을 것이라며 "서울대에 떨어진 것이 다행이다"고 했다. 중학교 시절 사진과 시. 이때 계속 서울대 입시에 떨어져서 하루는 집에서 화장실에서 문 잠그고 울고 있는데 모친은 시크하게 (문짝을 부수고 들어와) "네가 대학 떨어졌다고 내가 하루라도 뭐라 그런 적 있냐"고 "그만 울고 얼른 튀어나와서 밥 식으니까 빨리 먹으라"고 핀잔을 줬다고 한다. 병역은 대한민국 육군 방위병으로 마쳤다. 90년대 초반 당시에는 청년인구가 많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3급만 받아도 방위로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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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배낭여행 시절.

대학생 시절에는 아직까지는 운동권의 영향력이 꽤 남아있던 시절임에도 학생운동에는 별 관심이 없던 것인지 그냥 저냥 평범한 대학생활을 지냈다. 대학생활 중 흔히 말하는 사고를 친 적도 없고 그렇다고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것도 아닌 평범한 모습을 견지했다. 하지만 이 대학 시절 배낭여행을 대단히 많이 했으며, 근 50여 개국 이상의 나라를 여행하면서 많은 경험과 견문을 넓혔다고 스스로 자술한다.[7]

배낭여행 중의 경비는 전부 현지조달. 비행기티켓도 여행사에다가 홍보용 사진촬영과 리뷰를 해주겠다는 명목으로 구하였다. 회고에 따르면 파리-로마에서 생활하는 동안에는 호텔 '삐끼'로 시작하여 매니저도 지내는 등 사업 수완이 좋았다고 한다.[8][9] 귀국 당시 그렇게 수중에 모인 6천만 원을 들고 딴지일보 발간에 노력하였다고.

졸업 후 1995년 포항제철에 입사해 해외영업팀에 근무했으나 8개월 만에 자기 발로 박차고 나왔다. 이러한 결정을 하게 된 이유는 서류 복사나 하는 신입 시절 자기가 하는 일에 비해 너무 많은 돈을 받는 거 아니냐는 자괴감과 직장 내에서 겪은 끔찍한 경험 때문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새벽까지 이어진 기나긴 회식 후 (부장으로 추정되는) 중년의 회사 간부가 김어준을 포함한 신입들에게 회사에 일찍 나오라고 무리한 요구를 했던 사건이었는데, 당시 김어준은 시간상 2~3시간 밖에 없어서 잠을 아예 안 자기로 하고, 집에 가서 샤워만 하고 옷을 갈아 입고 회사로 갔다고 한다. 근데 그걸 요구한 그 간부가 자기보다 먼저 출근해 있어서 놀랐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 간부도 잠 안 자고 회사에 온 것이다. 게다가 뭔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신입직원인 자신을 쳐다봤다고 한다.

사원들의 군기를 잡기 위해서 본인이 더 먼저 회사에 나와서 분위기를 조성하던 간부가 스스로 그런 자기 행동에 대해 진심으로 만족하는 표정과 태도를 보인 걸 느끼던 순간이 너무나 끔찍했다고 한다. 직장 후배들의 휴식 보장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권까지 파괴하면서도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 인지하지 못하는 데다가, 그런 정신상태를 후배에게 세뇌시키려는 태도 자체에 스스로 만족하기까지 하는, 순수 노예 앞잡이 근성을 보여 줘서 징그러웠다는 뜻이다. 자신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 비참하다 못해 너무 무서웠다고 한다.


4. 딴지일보 창간 (1995 ~ 2003)[편집]


1995년 11월 사표를 낸 후 10여 평의 오피스텔에 사무실을 내고 플래넷(PlaNET)이라는 인터넷 해외연수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기업체에서 실시하는 해외연수가 획일적이고 흥미가 떨어지는 점에 착안, 배낭여행 형식으로 현지 가이드 대신 인터넷으로 여행정보와 일정을 제공하는 방식을 고안했다. 그러나 대부분 기업이 해외연수를 휴가 개념으로 여기는 풍토에 불황까지 겹쳐 어려움을 겪었다. # 1998년 딴지일보를 시작했다. 원래 딴지일보는 김어준 개인 사이트로 시작을 했고, 스스로 기사를 만들고 홈페이지 디자인을 하고 코드를 짜는 등 혼자서 모든 것을 만들었다고 한다. 김어준이 훗날 유명세를 가지게 된 이후에도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한 호칭을 '총수'로 요구하는 결정적인 이유. 비교적 권위적이고 부정적인 느낌의 표현임을 알고도 평생 고집하는 이유는, 초기 딴지일보는 자기 혼자 시작해서 장기간 노력하여 유명하게 만들었으니 자신이 영원한 '총수'이며, 대형 언론들처럼 자신의 위에 다른 사람(광고주)[10]이 없으니 계속 남에게 요구받지 않는 자신의 소리만 내겠다는 의미. 처음에는 아무도 방문 안 해서 스스로 조회수를 올리는 짓을 했다고 하나, 결국 입소문을 타고 방문객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당당히 1999년 언론사 영향력 순위에서 당당히 17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B급 정서로 대변되는 대한민국의 초창기 인터넷 문화 형성에 나름의 공이 있다. 이 점은 디시인사이드김유식에 비할 만하다.[11] 명확한 정치지향이 없다가 이후에 보수 쪽으로 커밍아웃한 김유식과 달리 김어준은 확실히 처음부터 진보-개혁세력 지향이었고, 특히 조선일보에 대한 적대적 포지션을 분명히 했다. 다만 이쪽이 좀 더 빨랐으며 초창기에는 날카로운 정치 평론과 유력 정치인, 대권 주자들에 대한 신선한 형식의 인터뷰로 유명했다. 유명 정치인들과의 인터뷰 자리에서 빤스가 사각이냐, 삼각이냐는 어이없는 질문을 하는 사람이었다. 2012년 새롭게 시작한 웹 월간지 더딴지에서도 파토 등의 주요 필진이 물어본다.

딴지일보의 직설적인 논조(음담패설과 욕설을 운영자 자신이 인터넷 수면 위로 끌고 올라온 첫 세대 매체다)와 과감하게 당시 기성언론에서 다루지 않은 부분까지 거침없이 다루었기 때문에 매우 큰 관심을 받았다. 예를 들어 그동안 하급문화 취급을 받아 아무도 심도 있게 다루지 않았으며 저평가되었던 국산애니나 고전만화에 대한 관심을 일으켜 발굴운동을 일으킨 일은 꽤 높이 평가 받을 만하다. 1990년대 후반은 묘하게 고급 필진들이 모여드는 시기였다.[12]

딴지일보의 성공으로 기성언론에 대한 비꼼과 날카로운 풍자를 내세우며 인터넷 문화와 언론을 이끄는 선두주자로 매김한다. IT 버블이 한창이던 리즈시절에는 국내 모 벤처기업에서 800억 원에 딴지를 인수하겠다는 오퍼도 있었는데 거절 했다고 한다. 하지만 딴지일보가 서서히 지면서 같이 내려가기 시작한다. 딴지일보 외에 여러 풍자 사이트와 유머 사이트가 등장했던 것. 특히 디시인사이드를 비롯한 여러 사이트들은 이용자끼리 생산-소비를 하는 형태로 사용자들의 지속적 참여로 성장을 거듭한 반면 일방적으로 생산한 결과물을 소비하는 포맷의 딴지 일보는 이들 사이트들에 이용자를 많이 빼앗기게 된다. 이후 상황은 딴지일보 항목 참조. 딴지 커뮤니티가 엄청나게 흥했지만 그것을 성장동력으로 삼지 못했고, 소수 필진이 있는 소리 없는 소리 하고 싶은 말 다 쓰고는 보완없이 - 애초에, 필진도 독자도 컨텐츠를 즐기는 곳이었다 - 다음 주제로 넘어가는 식이라 점점 정보보다는 잡설을 보는 곳이라는, 재미있게도 처음 시작하며 내건 이미지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이것과 함께 정치적인 지형도 딴지의 몰락에 한몫했다. 소위 개혁세력이 집권할 때 딴지의 주적인 보수세력이 야당이었는데, 원래 풍자와 해학은 권력을 까는 데서 재미가 나오는 법이지만 딴지의 주적은 그 당시엔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이었으니...비슷한 진보적 정치풍자 사이트인 미디어몹도 개혁세력이 위기에 몰렸던 탄핵정국까지 그 인기가 피크를 이루다가 이후 열린우리당이 국회 과반수를 차지하자 거기에 휘말려 인기가 떨어졌다. 미디어몹, 한겨레가 그랬듯이.


5. 딴지일보의 리즈시절 이후 (2003 ~ 2011)[편집]


딴지일보의 몰락 후(2000년대 중반) 엄청나게 힘든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혼도 이 시절. 딴지가 리즈시절일 때 지나친 확장을 해서리 그게 다 빚으로 돌아왔다. 그러다 보니 돈을 벌기 위해 딴지일보에서 여성용 성인기구를 팔기도 했다. 그러나 딴지 몰락하에서도 진보적 논객으로 활약하면서 김어준의 지명도는 오히려 높아진다. 스스로 야매 상담가라고 자칭하기도 했으며, 한겨레 신문에서는 "그까이꺼"라는 상담 코너를 연재하기도 했다. 이를 묶어 "건투를 빈다"라는 저서로 펴냈다. 이와 함께 대학이나 기관의 각종 강연에도 얼굴을 내밀었는데, 주된 논지는 "남의 눈에 구애받지 말고 과감하게 자기 하고 싶은 것을 하라"는 것이다. 자주 불려다닌 것으로 봐서는 이런 연사로서 평가는 꽤 좋은 편. 의외로 이런 데 나와서는 "씨바" 같은 욕을 안 한다. "존나"는 한다. 그런데 어쩌다가 가카 얘기할 때는 좀 했다
바른 언어 사용에 관심 많은 시민 학술 단체가 이 욕에 대해서 비판하며 "세종대왕이 벌떡 일어나시겠다"라고 한 적 있는데 김어준은 "일어나거든 연락하시라고 해라! 크하하"라고 했다.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나는 가수다 품평으로도 유명하다. "두시의 데이트 윤도현입니다"의 한 코너에 출연해서 나가수의 열풍에 힘입어 크게 이슈에 오르기도 했다. 김어준은 라디오에서 당시 진행되던 시즌에서 1등과 7등(탈락자)을 단 한 번 빼고 다 맞혔다. 틀린 것 하나는 6등을 탈락자로 예상한 것. 3회의 출연 뒤 MBC 라디오국이 윤도현을 하차시키면서 함께 퇴장.


6. 나꼼수 출연과 그 이후 (2011 ~ 현재)[편집]


이 나는 가수다 품평에 모티브를 얻어, 알고 지내던 정봉주의 제안으로 팟캐스트라는 새로운 매체를 이용해 2011년 런칭한 나는 꼼수다는 선풍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이때부터는 인터넷에서 이상한 소리나 하던 아싸 털보 아저씨가 아닌 주류언론과 정치권이 주목할 수 밖에 없는 대안 언론인으로 성장했고 그 동력으로 2016년에 김어준의 뉴스공장으로 대안 언론인이 아닌 정식 언론인이 되었다. 여러 저서 등과 활동을 볼 때 상당히 정치지향적인 인물이며 정치논리로 움직이는 인물이다. 스탠스는 본인은 꾸준히 중도라고 말하곤 하는데 사실상 친문성향(민주당, 국민참여당 쪽)으로 평가받으며, 다른 이들이 주장과 행동 사이의 괴리를 지적하면 이를 굳이 부정하지 않는다.

2011년 10월 24일 MBC 라디오 개편과 더불어 색다른 상담소가 폐지됨에 따라 해당 방송에서 하차하게 되었다. 이를 두고 나는 꼼수다 때문에 외압이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색다른 상담소는 팟캐스트에서도 상위권에 포진해있는 나름대로 인기코너이기 때문에 그 의혹은 더 불거졌다. 허나 이러한 의혹에 대해 김어준 본인이 프로그램 시작 전부터 6개월만 찐하게 하고 끝내자고 제작진과 이야기 했다고 하며 일축했다...라고는 하는데, 이게 뭐 6개월만 하고 자기가 뜨겠다는 게 아니라 어차피 자신은 김미화 퇴출로 촉발된 진보 성향 연예인의 퇴출을 수습하기 위한 일종의 방패막이니 수명이 길지 않을 거라 예측했다는 것. 김어준의 인터뷰에서도 이런 표현이 나온다. 참고로 색다른 상담소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한 프로그램은 배한성, 배칠수의 고전열전 재방송이다. 본인 왈 "내가 재방에 밀렸어!"

2011년 10월 28일, 열애설이 터졌다. 상대는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 아일랜드의 작가로 상당한 마니아층을 거느리고 있는 작가 인정옥. 이혼 후 2004년 김어준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인정옥이 게스트로 출연한 것이 계기가 되어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고 한다.# 이후 최근까지도 공개석상이나 모임 자리에서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것이 종종 목격되었으나 결혼 여부는 공개되지 않았다가 2021년 부친상을 당했을 때 유족 명단에 며느리로 발표되면서 결혼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2014년 3월 14일 한겨레 하니tv에서 김어준의 KFC라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론칭하였다. 1주일도 안 되어 조회수가 20만을 돌파하는 등 나꼼수의 인기가 여전함을 보여 주었다. 여기서 치킨은 박근혜의 동의어라한다. 하지만 12화부터 프로그램 제목이 김어준의 파파이스로 바뀌었는데 KFC 본사에서 항의했기 때문이다. 한겨레에서 고소에 할애한 자금이 다 떨어져서 어쩔 수 없이 제목을 변경했다고 한다. 2017년 10월에 막을 내렸다.

2015년 1월 프로젝트 不 다큐멘터리 3부작의 제작자로 참여, 펀딩을 시작했다. 그리고 45일 만에 목표액인 10억 원에 도달하였다. 감독은 김지영을 기용하였다.

2016년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으로 컴백해 다시 지상파 언론인으로 올라왔다.

2016년 6월 30일, 언론인의 선거운동을 금지한 공직선거법에 대해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신청한 지 3년 7개월 만에 7:2로 헌법재판소에서 위헌결정을 받았다. 딴지일보에선 김어준 총수가 감옥에 들어가지 않아 매우 실망스럽다며 헌재를 비판하는 기사를 냈다. 물론 장난에 가까운 반어법. 김어준, 주진우 무죄는 물론, 헌재의 위헌 결정 속에 담긴 의도마저 규탄한다

2016년 9월 26일부터 TBS에서 김어준의 뉴스공장으로 5년여 만에 지상파 라디오에 복귀했다. 홈페이지 복귀한 김어준의 뉴스공장이 일일 팟캐스트 다운로드 몇 백만을 찍고 지상파 라디오 청취율 전체 2위에 등극하는 등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고, JTBC와 함께 최순실 게이트에서 이어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에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후 레거시 미디어 출신이 아닌 언론인으로서 시사저널의 연간 리서치,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의 2017년 영향력 있는 언론인 부문에서 손석희 JTBC 총괄사장[13]에 이어 2위에 오를 정도로 영향력 있는 언론인이 되었다.[14]

2017년 8월부터 김어준의 파파이스와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주진우가 "다스가 김경준에게 140억을 돌려받도록 하기 위해 이명박 정부 당시 청와대가 나섰었다"는 정황에 대해 입수한 자료를 공개하자 5년 만에 BBK 주가조작 사건 관련 의혹을 주목하기 시작했고, 김어준의 파파이스가 종영하기 직전[15]에 김어준이 다스는 누구 겁니까라는 유행어를 만들어 퍼뜨려 달라[16]고 했고, 국회의원들도 모자라 그것이 알고싶다[17] 같은 프로그램에까지 나온 대유행어가 되었다. 그 전까지 국민적 관심사로 만들기 위해 "(이명박과 BBK에 대해) SNS에 올려달라", "검색해 달라" 등 여러가지 시도가 있었으나 별 효과를 보지 못했는데 "다스는 누구 겁니까"가 나오자 신드롬이 일어났고, 결국 그 실소유주 의혹자가 다스 신드롬 5개월만에 감옥에 가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2017년 11월, SBS <김어준의 블랙하우스>로 8년 만에 지상파로 복귀했다. 일단 파일럿 방송으로 시작했으며, 날짜는 주말인 2017년 11월 4일과 5일 밤 11시 15분[18]에 파일럿 방송으로 2회 방영되었다. 시간대 대비 시청률이 높았고, 다른 시사방송과 다른 패턴으로[19] 소재와 진행방식의 신선함이 호평을 받아, 이후 2018년 1월에 목요일 정규방송으로 결정되었다.

2017년 12월 7일 박근혜 5촌 살인사건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열린 재판에서 대법원 무죄 판결을 받았다. 딴지일보에서는 '젠장 헌법은 죽었다'라며 성토하고 있다.

2017년 12월 15일 민주시민언론상 본상을 수상하였다. 수상 소감에서 '나에 비해서 손석희의 뉴스룸이 저렇게 잘 나가는 건 중소기업에 대한 대기업의 횡포와 같다. 대기업의 횡포를 막고 언론 골목상권을 지키겠다'라는 말을 하여서 청중들을 폭소하게 만들었다. 해당 영상

2017년 11월부터 팟티에서 과거 나꼼수 멤버인 주진우, 김용민과 ('가카 헌정 방송'을 표방하던) 나꼼수 시즌2격 방송이자 '가카 배웅 방송'을 표방하는 다스뵈이다를 시작하였다. 일단 제목이 다스베이다의 패러디이지만 개별 뜻이 있는데, 바로 '다스에 대해 (일반대중들에게) 뵈 주다'라는 뜻. 그러나 방송 소재가 가카위주[20]라는 것만 제외하면, 실질적으로 4명이서 계속 떠들던 나꼼수가 아니라, 관계자를 불러서 인터뷰나 강연을 하는 김어준의 파파 이스의 틀을 가지고 있다

2018년 5월 뉴스공장은 점유청취율 12.8% 단독 1위(기존 1위는 SBS 두시탈출 컬투쇼) 첫 방송 이후 1년간 누적 다운로드 수 약 9억 2천만회, 온라인에서도 높은 영향력을 보이고 있다. 시사프로그램이 라디오 청취율 1위를 차지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넓은 인맥과 섭외력으로 핵심 이슈의 핵심 인물이 많이 출연하는 편인데, 타 언론에서 이를 인용 시 프로그램 초기에는 'tbs', 혹은 '모 라디오 방송' 이라고만 언급하였으나, 점차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 으로 풀네임이 소개되고 있다.

2019년 2월 다스뵈이다 49회에서 손석희에 대한 의혹들의 헛점을 지적하였으며,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 견인차 기사가 경찰조사에서 '동승자를 보지 못했다'고 진술하여 손석희에 대한 의혹을 해소함과 동시에 김어준의 주장이 대체로 사실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민식이 법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은 이기적인 어른들이라고 한다.

2020년 3월, 21대 총선 더불어민주당 후보들이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대거 출연하면서 조선일보의 공격을 받았다.

21대 총선을 앞두고, 한때 나꼼수를 같이 했던 정봉주열린민주당 편을 드는 반면, 김어준은 더불어시민당 편을 들면서 두 사람은 갈라졌다. 김어준은 자신의 방송에 더불어민주당과 더불어시민당 소속은 출연시키지만, 열린민주당 소속은 출연시키지 않고 있다. # 심지어 정봉주는 "김 총수의 열린당 까는 정도가 도를 넘고 있다"며 김어준을 비난하기도 했다. # 그러나 김어준의 모친상 때 정봉주, 주진우, 김용민이 같이 상주 역할을 해준 것을 보니 당사자들끼리 어찌저찌 잘 풀어낸 모양.[21]

2021년 4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오세훈이 서울시장으로 당선되며 (공약 한대로 - 뉴스공장 폐지)그의 방송활동에도 차질이 생길 것으로 예상되지만, 박원순 시장 시절 TBS를 방송법인으로 독립시킨 상황이기 때문에 이를 실행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방송을 하는 동안 출연료를 받으면서 계약서를 쓰지 않았다는 논란이 선거 이후에 나왔다. 조선일보는 기사를 통해 회당 200만원의 출연료를 서울시가 구두계약만으로 지급하고 있으며, 이를 연 단위로 환산하면 22억이라고 보도하였다. 이에 대해 TBS 측은 연예인이 아닌 일반 진행자의 출연료는 구두로 계약하는 것이 관행이라고 밝혔으나, 실제 출연료가 얼마인지는 공개하지는 않겠으나 적법한 절차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이후 국민의힘에서 줄곧 김어준을 때려왔지만 이후 국민의힘 최고의원 김재원이 김어준에 대해 물론 한편이 되겠다는 뜻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으면서도 "모처럼 선수를 만난 짜릿함을 선사해 주는 분이다. 훌륭하다"고 적는가 하면, 홍준표 국민의힘 의원은 김어준에게 왜 아직도 안질리고 방송하고 있냐고 비난하면서도 김씨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다스뵈이다' 출연 의사도 밝혔다.## 김어준의 지적받은 논란들과 별개로 김어준이 방송인으로서는 꽤나 탁월하다는 것을 보여 준 장면이다.[22]

2021년 10월, 이낙연 대선후보에 대해 선거 기간이 되면 평상시에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분들이 하나같이 일정 정도 미친다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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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2]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어릴 적부터 맛있는 게 있으면 부모들이 항상 먼저 챙겨먹으며 "너희들은 맛있는 거 먹을 날이 많이 남았잖냐"라고 했다고. 그리고 김어준은 이 말에 설득당했다고 한다.[출처] 나꼼수 22회[3] 다만 얼굴 자체는 꽤 준수한 편이었고 나중에 나꼼수에서 다른 패널들이 송승헌에서 지상렬이 되었다며 놀렸고 거기에 씨바를 비롯한 특유의 여러 리액션으로 유머러스한 분위기를 연출했다.[4] 중학교 동창인 리얼미터 이택수 대표가 김용민TV에 출연해 김어준이 중학생 시절 때 키도 크고 공부도 잘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5] 당시는 학력고사 시절로 전기와 후기로 입시가 구분되어 있었으며 전기에 서울대학교 입시에 불합격하고 후기로 홍대에 지원해서 합격하였다.[6] 행정고시를 비롯한 각종 고시 등[7] 이라크와 이스라엘 중동지역을 방문할 때 반군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의 모습이 궁금해서 그의 집을 한참 찾다가 만나기 직전까지 갔으나 생각해보니 무작정 만나고 싶었을 뿐 아라파트에게 하고 싶은 말은 정작 없어 그의 집 벽에서 사진 한 장 찍고 돌아왔다고 한다. 그의 저서에서는 '생각해보니 아라파트가 본인을 만나줄 이유가 없었기에 집을 배경으로 사진만 찍고 돌아왔다'고 밝혔다.[8] 그런데 이러한 행위는 불법행위로 간주될 여지가 있다. 배낭여행이면 무비자로 입국하였을 가능성이 높은데(1970년대에 대한민국영국, 서독, 프랑스 등 주요 유럽국가들과 무비자 협정이 체결되어 있었다), 외국에서 외국인이 적법한 노동허가 없이 수입을 동반한 노동활동을 하는 것은 그 어떠한 나라에서도 허용되지 않으며, 적발시 최대 영구추방까지 될 수 있는 사안이다.[9] 어떤 나라에서든지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불법취업 이라는 법률이 존재한다.[10] 대형 언론들은 항상 광고주나 투자세력 등에게 논조가 흔들린다는 비난을 받는다.[11] 그러니까 현재 21세기 인터넷 커뮤니티의 통념적 형태를 확립한 사람들이라고 보면 된다. 방향은 다르지만 '자유'라는 가치 아래 거침없이 반말을 하거나, 욕을 섞거나 키배를 뜨는 등 PC통신 시절에는 생각하기 어려웠던 행태들을 주류화한 것. 더 쉽게 말하면 '인터넷에서 노는 방식'의 개념을 바꿨다.[12] 사실 1998년 정도면 아직 PC통신이 전성기일 때라, 인터넷 매체는 많지 않았고 갈 곳도 적었으며, 그 비싼 인터넷 자원 (미국의 인터넷이 상업화되는 시기에도 많은 논쟁이 있었다) 을 가지고 황색저널을 표방하는 데 쓸 생각을 한 사람은 더 적었다. 시기를 아주 잘 탄 것.[13] 2017년에는 보도담당 사장.[14] 둘을 동시에 칭하는 표현으로 주털야손이 있다. 아침에는 김어준의 뉴스공장, 저녁에는 손석희의 JTBC 뉴스룸. 지금은 손석희가 JTBC 메인 앵커에서 내려오고 대신 YTN 라디오의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가 새로운 저녁 인기 프로그램으로 뜨면서 진보 성향 시청자·청취자 사이에서는 주털야동(...)이라는 표현이 새로 생겼다.[15] 즉 마지막회의 바로 직전 회차.[16] 일상생활에서 김흥국처럼 아무 맥락없이 마구잡이로 가족과 친구들과 포털사이트, SNS에 물어보라고 시켰다. "오늘 국물이 맛있네. 근데 엄마, 다스는 누구거에요?", "야 어제 그 방송 재밌더라. 근데 다스는 누구거냐?", "(연예인 열애설 포털기사 댓글로) 어 쟤네 둘이 사귀었다고? 근데 다스는 누구 거냐?"하는 식의 예를 들어줬다. 무서운 점은 단 2일만에 수만명의 청취자들이 실제로 대형포털사이트와 SNS에 실행하기 시작해서 일주일만에 수십만명으로 번졌다는 것이었다. 이게 유행이 된 뒤에는 가히 다스판으로 변해 SNS에 쿠크다스, 아디다스 드립같은 패러디 게시물이 판을 쳤을 지경.[17] 명백한 팩트로, 다스 특집때 김상중이 했던 엔딩 멘트였다. 김상중은 "그런데 대체, 다스는 누구 겁니까?"라고 말하고 방송을 마무리했다.[18] 그것이 알고싶다 시간대였다. 따라서 해당일에는 결방.[19] 세월호사건 소재 코너에서 유병언의 아들을 만나서 인터뷰하거나, 쿠르드족에 대한 한국 언론의 일방적인 부정적 보도에 대한 비판을 직설적으로 하는 등.[20] 첫회에는 박근혜 관련 문제의 관계자도 나왔었다.[21] 사실 정치적으로 다른 입장을 지니더라도 사석에서 친하게 지내는 언론인이나 정치인의 사례가 꽤 많다.[22] 이미 홍준표는 이미 김어준에게 천재적 재능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박수칠 때 떠나야 한다"면서 김어준의 방송인으로서의 재능과 김어준의 논란들 모두를 애둘러 거론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