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피트(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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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영국의 제10대 총리. 별칭은 위대한 평민(The Great Commoner) 혹은 대(大) 피트[1]
2. 생애[편집]
웨스트민스터에서 태어나 이튼 칼리지와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27세에 서민원에 입성했으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때는 재무성의 영국 육군 담당 회계장관을 역임했다. 7년전쟁 발발 당시인 1756년 남부장관(現 내무장관)에 임명될 당시 "나는 이 나라를 그 누구보다 확실하게 구할 수 있음을 자신한다."라는 호기로운 말로 취임했는데 과연 그의 말대로 영국은 피트가 고안해 낸 전략에 힘입어 승리를 쟁취했다.
그는 영국이 유럽 내 영토전쟁보다 식민지에 치중하도록 이끌었으며 이를 위해 대륙의 프로이센을 지지했다. 한편으로 그는 유럽에서 프랑스를 주요 타깃으로 삼고 프랑스와의 식민지 싸움에서 이기고자 했다. 결국 인도, 북아메리카 등지에서 식민지를 넓혀 대영제국의 기초를 세워 위대한 평민이라는 말도 듣게 된다. 조지 2세가 죽고 그를 싫어했던 조지 3세가 즉위하면서 1761년 강제로 남부장관에서 해임됐지만[2] 그럼에도 상당수 전황은 피트의 예상대로 흘러갔고 7년전쟁은 결국 영국의 승리로 마무리됐다.(1756)
대 피트는 7년전쟁의 공로를 인정받아 1766년 평민 신분으로 총리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귀족원만 등극할 수 있었던 장관급인 옥새상서(Lord Privy Seal)를 겸임하고자, 피트는 채텀 백작 작위를 받아 총리로 취임한지 5일 만에 귀족 신분이 되었고 이 점에서 당시 민중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2년 후 영국 의회가 곡물법, 설탕조례, 인지조례, 항해조례, 홍차조례를 시행하자 이에 반대하다가 건강 문제도 겹쳐 후임인 오거스터스 피츠로이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1768년 사임하였다. 실제 그는 식민지 독립은 반대했으나 13개 식민지나 기타 식민지들과 영국의 유대 관계를 중시하였다.
이후 피트는 1778년 5월 11일 그에게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중 헥토르의 장례식 장면을 읽어주던 아들 소(小) 윌리엄 피트의 품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장관을 이룬 장례 행렬과 국민들의 슬픔을 뒤로 하고 생전에 원했던 대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3. 여담[편집]
- 하노버에 대한 태도를 보아 그가 단순히 국익을 위해서 하노버를 버리자고 한건지 민족주의적 생각으로 버리자고 한 건지에 대해서는 정확하지 않다. 전자에 가깝기는 하지만 피트 말고도 영국 정계 등에서도 하노버를 암묵적으로 배제하려 하는등 하노버를 짐짝 취급했었던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영국에서 슬슬 민족주의가 생겨난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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