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농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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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12규약
4. 전개
5. 이후



1. 개요[편집]





(1524년 ~ 1526년)[1]

독일 농민전쟁, 독일 농민항쟁, 독일 농민혁명 등으로 불리우는 16세기 유럽 농민들의 항쟁. 그 이전부터 있었던 후스 전쟁 등의 종교사건이 이어지고 이어지며 마르틴 루터가 교황을 비판함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난 대항쟁이다.


2. 배경[편집]


13세기를 흘러가며 이미 노예제, 봉건제등의 대한 저항 의식은 농노들에게도 생겨났었다. 특히 농노들의 코뮌이 권력을 쥐어 귀족과 협상판에 앉아 세금의 양 등을 실질적으로 정할 수 있었던 프랑스와 다르게 신성 로마 제국내의 농노들은 귀족들과의 협상이 일절 불가능했고 그렇기에 농노들의 저항은 예견된 순서라고 봐도 무방했다.

개중에는 11세기부터 바이킹의 저항을 농노들이 스스로 무장하며 막으며 또한 그당시 유럽 주요 무역로를 담당하며 부유한 농민들이 많았던 탓에 군주로부터 자립권을 얻을 수 있었던 동프리슬란트의 프리지아의 자유(Friesische Freiheit)라고 불리우는 농민공화정이나 애초에 지배력 자체가 닿지 않았던 하멜른의 땅(Land Hadeln)이나 습지대의 특성상 봉건제의 지배가 직접적으로 닿지 않았던 디트마르센도 있었다. 그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농노들의 상황은 그리 좋지 못하였으며 특히 교황으로 대표되는 기존 가톨릭의 면죄부로 대표되는 부정부패는 농노들의 분노를 자아내기 충분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마르틴 루터교황을 비판하며 종교개혁의 시발점을 알리고 그들에게 억압, 착취당했던 농노들이 마르틴 루터토마스 뮌처의 사상의 감명을 받아 일어났다.


3. 12규약[편집]


1525년 3월 농민들은 슈바벤 농민조합을 중심으로 자신들이 어떻게 세상을 이끌어 나갈지에 대한 규약을 작성하고 이를 귀족들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실제로도 규약은 만들고 발매한지 2개월 만에 25,000부나 팔릴 정도로 인기였었다.

규약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우리 농민 자치지역(코뮌)내의 성직자의 임명권은 우리에게 있으며 그 성직자들이 옳지 못한 짓을 하면 우리는 그를 파직시킬 권리가 있다. 성직자는 아무런 조건없이 될 수 있으며 또한 성직자들은 성경에 대해 추가적으로 이상한 해석을 붙이는 것이 아닌 성경의 내용을 그대로 전해야 한다. 오직 성경과 참된 믿음만으로 하느님의 왕국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2. 십일조는 오직 큰 십일조(성경에서 나오는 십일조)만을 내며 그 외의 작은 십일조들(성경에서 말하는 십일조가 아닌 영주들, 교권측에서 따로 만든 십일조. 즉 삥뜯는 용)는 사라져야 한다. 왜냐면 그 것은 후대의 인간들이 '창조'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 하느님께서는 이 땅에 있는 가축들은 모두 인간의 것이라고 말씀하였고 그분께서는 우리들에게 '값'을 받지 않기로 하셨다.

3. 하느님께서는 귀족들의 의해 자신의 피로써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셨다. 그런 해방인들이 다른 동포를 노예로(농노로)삼는 것을 그 분이 허락하신 적이 있는가? 우리는 성경에 따라서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또한 자유로워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2]

4. 가난한 이들은 사냥도, 어업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은 누구의 생각인가? 이들이 참을성도 없는 하느님의 말씀을 어긴 자들이라고 보는가? 하느님은 그런 말을 하신 적이 없다. 또한 그런 생각은 '형제'로써 할 생각이 아니다. 하느님은 이 땅에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부터 새, 물고기, 동물의 대한 권리와 권세를 인간에게 기부하셨다.

5. 귀족들은 언제나 숲을 가지고 있었다.[3]

가난한 이들이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면 그들은 그 것을 두배의 값을 주며 사야 했다. 이는 옳지 못하며 팔리지 않은 목재들은 모든 사람들이 소유하여 건설, 건축 혹은 장작 등으로 쓸 수 있게, 즉 모든 이들이 자신들의 요구에 맞게 쓸 수 있게 반환되어야 한다.

6. 날마다 강제노동이 과해지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노동의 양은 줄어야 한다.[4]

7. 귀족은 우리들이 정한 노동량을 강제로 늘리면 안된다.

8. 모든 밭에서 필요한 만큼의(사실상 그들이 원하는 만큼의) 소작료(임대료)를 낼 수 없다. 정직한 이들이 땅을 조사하여 불필요한 임대료를 없애 농민들이 착취당하지 않게 해야 한다.

9. 그대들은 신성모독에 의한 벌금을 얻기 위해 계속해서 법을 만들어 왔다. 그들은 죄의 유무가 아닌 그들의 이익만을 고려하여 거짓으로써 처벌을 내렸다.(당시 영주와 같은 기득권층은 농노들을 상대로 재판에서 본래보다 높은 벌금을 매기기도 하였다.) 이것이 옳은 처벌이라고 보는가? 우리는 정당한 처벌을 받기 위해서 오래된 옛 법률(즉 성경)에 따라 정당하게 판단되어 처벌받아야 함을 주장한다.

10. 본래 농민들이 공동으로 소유했던 경작지들이 영지들에게 강제로 할당되었다. 우리는 할당(사실상 강탈)당한 경작지들을 다시금 반환받고 싶다.

11. 죽음세(Todfall. 일종의 상속세. 그러나 당시 가난했던 농민들에게 있어서 상속세는 현대와 꽤나 다른 의미를 지님)를 면제하라. 더이상 과부와 고아들이 하느님이 주신 명예에 반하여 그들에게 수치스럽게 강탈당하지 않게하라.

12. 이것이 우리의 최후의 결정이다. 하느님 말씀과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근거'를 우리에게 보여준다면 우리는 해당되는 규약을 삭제할 것이다...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이 규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다른 누군가가 이 조약에 대해 불만사항을 품는다면 수정할 수 있음을 조건으로 걸 것이다.


농민들은 이 규약을 가지고 루터에게 다가가 우리를 지지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루터는 농민들의 규약은 너무나 의로워서 예수님조차 수치스러울 지경이라며 거부했다. 사실 루터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카를 5세의 탄압을 피해 독일 영방제후들의 보호를 받고 있었는데, 자신을 보호해주는 영주들에 맞서 일어선 농노들을 두둔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루터 본인도 "신분제는 신께서 정하신 것이니 지켜야 한다."라는 식으로 매우 보수적인 성향을 지녔기에, 농민 반란을 가리켜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폭도라고 부정적으로 여겼다.

농민과 루터는 그렇게 사이가 틀어졌고, 루터의 빈 자리를 채운 자가 뮌처였다.


4. 전개[편집]


루터를 스승으로 여겼던 토마스 뮌처[5]는 루터를 강력하게 비판하며 농민들을 지지하였고 루터에게 실망감을 느낀 농민들도 1525년 슈바벤 등을 거점으로 대대적으로 일어나니 농민들의 대항쟁인 독일 농민전쟁이 시작되었다.

이에 기존 농민공화국이었던 디트마르셴 등도 이들과 함께 하기를 택하는 등 지원이 있었지만 역시 훈련이 잘 된 신성 로마 제국기사들과 귀족들에겐 역부족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괴츠 폰 베를리힝엔이나 플로리안 가이어 폰 기벨슈타트[6] 등의 귀족들이 농민들을 지원하며 농민들은 나름대로 잘 싸워갔으며 특히 가이어가 창설한 흑군은 당시 농민군의 정예군으로 활동하며 귀족들을 무찌르고 다녔다.

튀링겐 등지에서는 농민들의 자치조합인 Werrahaufen 등이 생기기도 하였으며 농민들은 자신들이 선언한 12규약을 바탕으로 활동하였다.

이 농민전쟁에 참가한 농민군의 숫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들이 엇갈리고 있는데, 카를 5세의 동생이자 훗날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페르디난트 1세인 페르디난트 대공은 형인 카를 5세한테 보낸 편지에서 (반란에 가담한) 농민들의 수가 200,000명이라고 썼고, 마리오 사누토스의 다이아디는 그 숫자를 300,000명으로 기록했다. 또 다른 소식통은 콘스탄츠와 아우크스부르크 사이에 100,000명의 농민군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나마 가장 믿을 수 있는 기록은 라이프하임 전투 후 슈바벤 연맹[7]이 작성한 농민군의 명부에 의한 것인데, 이것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전쟁 중에 독일 남서부 전역에 동원된 농민이 120,000명에서 150,000명 사이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9]

하지만 이러한 농민들의 행진은 결국 압도적인 무력으로 무장한 귀족층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베를리힝엔은 먼저 패배한 채 흩어졌으며[10] 뮌처는 프랑켈하우젠 전투에서 패배하고 처형당했다.[11] 마지막으로 남은 가이어의 흑군은 뮌처가 승리했다는 오보를 받고 그들을 맞이하러 가다가 기습당해 패배하여 흩어졌고 가이어는 재기를 노리다가 그의 처남매부 빌헬름 폰 그룸바흐에게 살해당했다.

농민군이 압도적인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끝내 패배한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한테 기병이 거의 없었고, 어쩌다 가끔 기병이 있어도 전투용으로는 사용하지 않고 기껏해야 정찰용으로만 사용했다는 점이었다.[12] 또한 농민군은 과거 신성로마제국의 기사들을 물리친 얀 지슈카의 마차 요새 전술을 사용했으나,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동원된 귀족 연합군인 슈바벤 동맹군은 백년전쟁 시기의 프랑스 군대처럼 무작정 기병 돌격만 했던 게 아니라, 먼저 포병으로 적을 공격하고 나서 적이 약해지면 기병을 투입하는 고도의 세련된 전술을 사용했다. 마차 요새 전술은 기동성이 전혀 없었고 적의 대포 공격을 받으면 큰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농민군은 여러 전투에서 슈바벤 동맹군한테 참패를 거듭하였다. #

디트마르센은 그들에 의해 물러났던 홀슈타인 공작이 대대적 연합군을 끌고 와 마지막 불화라고 불리는 최후의 결전을 벌였으나 끝내 패배하였다. 이로서 디트마르센은 약 30년만에 다시금 영주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다만 덴마크 왕국과 신성로마제국의 사이에 있다는 특성상 자유농민으로서의 권리는 19세기까지 누리게 된다.


5. 이후[편집]


이 전쟁에서 공식적으로만 무려 7만명의 사람들이 처형당했으며[13] 지도자들은 뜨겁게 달군 쇠로 만든 의자 위에 강제로 앉혀져서 산채로 화형을 당하는 등 잔인하게 처벌당했으며 귀족들은 신문 등을 통해 반항적이었던 농민들을 조롱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항쟁은 몇백년 이후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등의 공산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재조명받았으며 특히 이들에게 있어서 이 전쟁은 최초의 계급투쟁적 항쟁이라고 할 만큼 의의가 컸다. 엥겔스는 그들의 항쟁을 책으로까지 썼을 정도였으며[14] 이들이 내걸었던 12규약은 훗날 1848년 혁명 당시에 사용되었을 정도로 세계 혁명사와 자유투쟁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이후 동독에서는 뮌처를 기리며 기념 우표, 화폐까지 만들 정도였다. 지금도 독일에서는 농민전쟁 행사를 여는 등으로 그들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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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식적으론 25년에 끝났으나 일부 잔존 세력이 세력을 이어갔다가 티롤과 기타 선제후 지역에서 완전히 진압되었다.[2] 다만 독일 역사에서 지주인 융커들은 19세기까지 동포인 독일인들을 농노로 잘만 부려먹었다.(...) 심지어 1871년 독일 제국의 성립에 큰 기여를 한 재상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조차 젊은 시절에는 자기 집안에서 부리던 농노들을 불러와 무장시켜 의회를 습격하려는 쿠데타 계획을 꾸몄을 정도였다.[3] 당시 원래 공동체가 소유하며 사람들이 사용하던 숲을 영주가 '강탈'하여 개발한 뒤 더 비싼 값으로 농민들에게 팔았었다.[4] 중세 유럽에서 농노나 농민들은 영주와 귀족들이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따라야 했다. 대표적인 예가 사냥 몰이인데, 어느 농노는 자신들이 이른 아침부터 영주의 명령에 따라 짐승들을 몰아주는 몰이꾼 역할을 하느라 무척 고된 하루를 보낸 대가로 받은 선물이 사냥감을 생각보다 적게 잡았다면서 분노한 영주의 욕설과 채찍질 뿐이라고 한탄하였다.(...)[5] 뮌처는 종교, 사회개혁가로 급진적인 기독교공산주의 개혁가였다. 그는 단순히 성경 중심 개혁으로는 이 부패한 사회를 바꿀 수 없다고 믿었고 그의 신비주의적 성향과 그가 스승으로 여기던 루터한테서 영향을 받은 인본주의적인 성향이 결합되며 점차 급진적으로 변하였다. 독일 농민전쟁이 발발할 당시 뮌처는 농민의 정신적 교주로서 활동하였다.[6] 우리는 가이어의 흑색 창병대라는 노래에 나오는 그 가이어다.[7] 다른 말로는 스와비아 연맹. 농민군 토벌을 위해 활동했던 독일 귀족들의 연합군[8] 주군을 섬기지 않고 일정한 영지가 없이 떠돌아다니며 약탈을 일삼았던 기사들[9] 다만 이 수치에는 산발적으로 농민전쟁에 참여하는 마을 사람들이 포함되지 않았다. 또한 농민 전쟁에 가담한 농민군 중에서는 사실 일용 노동자, 장인, 마을 사람들, 불만을 품은 지주와 강도 기사[8], 란츠크네히트스위스 용병도 포함되었기 때문에 농민 전쟁이라는 이름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10] 베를리힝엔은 후에 귀족군의 포로가 되어 3년간 억류되었다가 귀족군에 참가하겠다고 서약하여 풀려났다. 이후 그는 농민군의 적이 되었는데, 사실 애초에 베를리힝엔이 농민군 편에 붙었던 이유는 농민들에게 죽기 싫어서였다.[11] 뮌처는 화형당했으며 이때 그는 유언으로 "모든 것은 공공의 것이 되어야 하며(Omnia sunt communia), 필요에 따라 분배를 받아야 한다. 이를 거부하는 영주, 공작, 부농에 대해서는 처음에 경고를 주되, 같은 악행을 반복하면 참수하거나 교수형을 시켜야 한다."라는 유언을 남기며 죽었다.[12] 16세기유럽에서는 여전히 군대의 주력이 중무장을 한 기병이었으며 농민군 토벌에 나선 슈바벤 동맹군도 귀족들로 구성된 중무장 기병에 의존했다. # 또한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5세의 군대도 독일인 중기병을 선호했다. #[13] 비공식 사망자를 합치면 죽은 사람이 10만 명이라는 주장도 있다.[14] 그의 책에서는 농민전쟁을 이 전쟁은 독일인들이 일으킨 가장 위대한 혁명적 시도라며 극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