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 로마 제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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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프랑크 왕국부터 독일 제국까지 독일과 그 주변의 봉토들의 변천사.

1. 개요
2. 프랑크 제국
2.1. 오토 1세 이후의 제국과 별개라는 관점
2.2. 카롤루스의 제국을 계승했다는 관점
4. 교황과의 갈등
5. 대공위시대와 황권의 약화
7. 제국의 해체




1. 개요[편집]


신성 로마 제국의 역사를 정리해놓은 문서.


2. 프랑크 제국[편집]


신성 로마 제국의 시작에는 두 가지 중요한 시점이 있다. 첫 번째는 800년 카롤루스 1세교황 레오 3세으로부터 (서)로마 황제 대관을 받은 것이며, 두 번째는 962년 오토 1세가 교황으로부터 황제 대관을 받은 것이었다.

800년 프랑크 왕국의 왕 카롤루스 1세가 교황으로부터 '서로마 제국 황제' 대관을 받자 동로마 제국은 로마의 정통 황제는 자신들의 황제뿐이라며 강하게 항의했고 카롤루스 1세 본인도 교황의 대관으로 황제가 되는 것을 내켜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덕분에 카롤루스 1세는 카롤루스 대제가 되고, 프랑크 왕국도 제국이 되었다. 당대의 동로마 황제였던 여제 이리니와 카롤루스 1세가 혼인할 뻔한 일도 있었지만 무산되었고[1], 812년 미하일 1세가 카롤루스 1세를 '로마 황제'가 아닌 단순한 황제로 인정하면서 유럽에는 두 명의 황제가 공존하게 되었다. 이것을 니키포로스의 평화(Pax Nicephori)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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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탈리아 왕국(중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카롤루스 대제 사후 프랑크 왕국과 황제위는 루도비쿠스 1세가 물려받았으며, 그 뒤 그의 장남 로타리우스 1세도 아버지와 함께 공동 황제로 임명되었다. 루도비쿠스 1세 사후 프랑크 왕국이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분할된 후에는 로타리우스 1세가 물려받은 중프랑크 왕국과 그 후신인 이탈리아 왕국의 왕위를 얻는 자가 황제위에 올랐다. 동프랑크 국왕 카를 3세가 중프랑크와 서프랑크 왕위까지 접수하고 제위에도 오르면서 프랑크 왕국이 잠시 통일되었지만 888년 카를 3세가 사망하면서 제국의 영토는 다시 쪼개졌다. 이후 이탈리아 왕국에서는 여러 명이 군주를 자처하는 혼란의 도가니가 되었고, 교황이 이들에게 황제 대관을 해주면서 제위 역시 왔다 갔다 했다.

북이탈리아의 국력은 서프랑크나 동프랑크보다 상대적으로 작았고, 이탈리아 남부를 차지하고 있던 동로마 황제의 영향력과 간섭도 심했다. 하지만 교황에게 인정받는 것은 여전히 명예로운 일이었으며, 동프랑크 국왕 아르눌프와 프로방스 국왕 루이 3세(맹인왕 루이) 같은 다른 지역의 군주들도 이탈리아를 차지하고 교황의 대관을 받았다.

한편, 교황에게 대관 받는 수동적 이미지와는 반대로 이탈리아의 황제들은 교황권을 쥐락펴락하였다. 황제 귀도는 교황 포르모소에게 자기 아들 람베르토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라 강요하였고, 귀도 사후 람베르토는 로마로 가서 포르모소에게 자기의 제위를 인정하라고 요구하였는데 퇴짜를 맞자 포르모소를 감금하였다. 동프랑크 국왕 아르눌프가 이탈리아에 와서 포르모소를 구출하고 황제 대관을 받기는 했지만, 그가 동프랑크로 돌아가고 포르모소도 죽자 다시 권력을 잡은 람베르토는 새 교황 스테파노 6세를 시켜 전임 교황 포르모소의 시체를 재판대에 앉혀놓고 능욕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로마노테오도로 2세 등 여러 교황이 쥐도 새도 모르게 의문사하였다. 부관참시 외에도 람베르토는 로타리우스 1세의 '로마 헌장(Constitutio Romana)'을 부활시켰는데, 이게 뭐냐 하면 교황의 선출에 황제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로써 황제는 교회에 막대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이탈리아의 황제들은 이탈리아 밖에서도 어느 정도 권한이 남아있었는데, 일례로 이탈리아 국왕 베렝가리오 1세는 황제가 되고 나서 독일 왕국의 영토였던 리에주 교구의 대주교 선출에 분쟁이 생기자 자기가 직접 개입하여 대주교를 임명하였다.

이후 924년 베렝가리오 1세가 암살되면서 카롤루스 왕가에서 시작된 황제위는 완전히 대가 끊긴다.


2.1. 오토 1세 이후의 제국과 별개라는 관점[편집]


일반적으로 오토 1세의 대관(962년)부터 신성 로마 제국으로 치는 경우가 많지만, 일부는 카롤루스 1세의 대관식(800년)을 신성 로마 제국의 시작을 보기도 한다. 오토 1세가 대관을 받을 때 카롤루스 대제의 후계자를 자처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그러나 카롤루스 1세의 대관이 오토 1세 대관의 중요한 선례가 되기는 했지만, 카롤루스 1세의 대관이 오토 1세에게 직접 이어진 것이기 아니고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두 제국을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주장이 많다.

우선 카롤루스 대제의 제위가 중간에 단절되었다는 점이다. 카롤루스 대제의 제위는 중프랑크로 계승되다가 924년 완전히 소멸되었다. 게다가 카롤루스 대제의 제국과 오토 1세 이후의 신성 로마 제국을 같은 나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여러 가지 차이점이 있다.

그중 하나로 영토상 차이가 있다. 비록 이후에 영토가 분할되었지만, 카롤루스 왕조 때 황제들은 명목상으로나마 프랑크 전역의 황제였다. 그러나 오토 1세 때는 서프랑크와 아를 왕국은 황제의 영역 밖에 있었다. 아를 왕국은 후에 다시 제국의 영토가 되었지만, 서프랑크는 제국의 영역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또한 황제 선출 방식에서도 큰 차이가 있다. 카롤루스 왕조 시절 제위는 순수하게 혈통에 의한 상속이었다. 반면 카롤루스 왕조 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은 세습과 제후들에 의한 선출이라는 두 가지 기준이 적용되었고 이 점은 단순히 혈통에 의한 상속과는 분명한 차이점이었다.

그리고 황제의 실권이 달랐다. 카롤루스 1세의 제위는 실권이 없는 완전한 명예직이었다. 카롤루스 대제의 업적은 전적으로 프랑크 왕국의 군주로서 힘에 근거한 것이었다. 카롤루스 대제 시절 그의 제국 = 그의 직할 왕국이었으므로 자신의 직할 영지와 제국의 영역이 일치하지 않은 나중의 사례와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상황은 그의 손자인 로타리우스 1세 시절에 시작된다. 즉 로타리우스 1세는 명목상 중프랑크, 서프랑크, 동프랑크를 아우르는 황제였지만 그의 직할 영지는 중프랑크에 한정된 것이었다.

반면 오토 1세와 그의 직계인 작센 왕조 시절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은 역시 명문화된 권한은 없었지만, 황제의 권위를 바탕으로 실제 제후들에게 영토를 빼앗거나 하사하고 작위와 통치권을 하사하거나 빼앗는 등 큰 실권을 행사했다. 당장 오토 1세의 아들 오토 2세 때 제국 내 최대의 제후국인 바이에른과 마찰을 일으키다가 결국 바이에른 공국을 쪼개 분할을 명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또 카롤루스 1세가 '서로마' 황제의 대관을 받은 것이라는 점도 거론된다. 이것은 오토 1세 이후의 '신성 로마'와는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신성 로마 제국이란 이름도 오토 1세 때부터 확립된 명칭이 아니라 역사적 과정을 거치며 그 이름을 확립되었다는 반론이 존재한다. 오토 1세의 대관도 카롤루스 왕조 이후 흐지부지되었던 프랑크 왕국의 정통성을 다시 세운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카롤루스 1세의 제국을 오토 1세 이후의 신성 로마 제국과 분리하여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궁예가 고구려를, 견훤이 백제를 계승한다고 주장했다고 해서 이들의 국가가 기존의 고구려, 백제와 같은 나라로 취급 받는 건 아닌 것처럼 오토 1세가 카롤루스 대제의 후계자를 자처했다는 이유만으로 카롤루스 대제의 제국과 오토 1세 이후의 신성 로마 제국을 지속되는 하나의 연속체(continuum)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란 때문에 서구에서도 카롤루스 1세의 제국을 오토 1세 이후의 신성 로마 제국과 구별하여 '카롤루스 제국'(Carolingian Empire, 800년~888년)으로 부르기도 한다.

현재 영문 위키피디아에서는 962년을 신성 로마 제국의 시작으로 표기해 놓고, 800년을 각주 표기하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의 중학교, 고등학교 교과서와 미국의 고등학교 교과서, SAT 교재, AP 교재를 비롯하여 대다수의 나라의 교과서에도 962년으로 표기되어 있다.


2.2. 카롤루스의 제국을 계승했다는 관점[편집]


파일:Albrecht_Dürer_-_Emperor_Charlemagne_and_Emperor_Sigismund_-_WGA06997.jpg
카롤루스 대제와 황제 지기스문트(Karl der Große und Kaiser Sigismund) – 알브레히트 뒤러
왼쪽 그림은 카롤루스 대제 이야기할 때 많이 쓰는 그 그림이다. 당대 사람들이 카롤루스 대제를 신성 로마 황제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러나 연속성만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을 설명할 수 없다. 연속성이 끊긴 대공위시대 이전과 이후의 제국을 완전한 별개의 나라라고 할 수 있는가? 이처럼 오토 1세 대관 이전의 공백기도 대공위 시대처럼 일시적인 계승 중단으로 볼 수도 있다. 또한 서로마의 멸망 이후 오도아케르가 동로마 황제에게 서로마 황제의 제관 및 깃발과 의복 등을 갖다 바치며 자신은 반란을 일으킨 게 아니라고 해명한 후 '파트리키우스'라는 칭호를 받음으로써 명목상 동로마의 신하로 들어갔으며, 교황에게는 카롤루스 1세에게 서로마 제위를 수여할 권한 따위는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황제를 자칭하다가 동로마와의 전쟁을 통해 인정받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토 왕조 역시 동로마의 황제로부터 황제로 인정받았기에 가문의 교체만 있었을 뿐 제위는 그대로였다.

사실 독일 왕국에서 시작된 신성 로마 제국과 옛 카롤루스 제국과의 연관성이 크게 강조된 것은 룩셈부르크 왕조 때의 일이었다. 위에 나와 있는 카롤루스 대제와 지기스문트의 초상화를 함께 그린 것도 룩셈부르크 왕조였으며, 황제 넘버링을 할 때, 카롤루스 대제를 1세로 시작하여 서프랑크왕인 대머리왕 샤를을 소급하여 카를 2세라 하고, 동프랑크왕인 비만왕 카를을 카를 3세로 만들고 나서 자신을 카를 4세로 칭했던 황제 역시 룩셈부르크 왕조 출신이었다. 대머리왕 샤를이나 비만왕 카를은 당대는 물론, 지금도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2세, 3세 넘버링없이 부르는 경우가 많다.


3. 오토 왕조[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독일 왕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external/jettandjahn.com/ottopope.jpg
카롤루스 대제 사후 843년 프랑크 왕국은 베르됭 조약으로 3분할되었다. 그중 독일 지역은 동프랑크 왕국이 차지하였다. 911년 동프랑크 국왕 루트비히 4세(유아왕 루트비히)가 후사없이 죽으면서 카롤루스 왕조의 대가 끊기자 귀족들은 루트비히의 친척인 프랑켄 공작 콘라트 1세를 국왕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콘라트 1세 역시 후사없이 죽었고, 후계자로 당시 가장 유력한 세력을 보유했던 작센 공작 하인리히 1세를 지명했다. 그러나 5대 공작령 중 슈바벤바이에른이 하인리히 1세의 선출에 반대했기 때문에 한동안 하인리히 1세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정치적 협상을 통해서 슈바벤과 바이에른도 하인리히 1세를 국왕으로 인정했다. 일반적으로 하인리히 1세 시절부터 독일 왕국이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카롤루스 왕조가 단절된 이후 독일 왕국의 왕들은 5대 공작령 대표들의 선출에 의해 왕위를 물러받게 된다. 콘라트 1세와 하인리히 1세의 경우 이전 왕들의 후사가 없었기 때문이라 치더라도, 하인리히 1세의 아들인 오토 1세 역시 선출을 통해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사실 이러한 전통은 고대 게르만족으로 부터 이어온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전통은 오토 1세부터 시작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위를 선출하는 전통으로 이어졌다. 사실 엄밀하게 말해서 귀족들이 선출한 것은 독일왕(로마왕)이며, 독일왕(로마왕)으로 선출된 이후 교황으로부터 대관을 받아야 정식으로 황제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었다. 교황이 대관하는 절차를 없애고, 선제후들의 선출만으로 바로 황제위에 오르게 된 것은 1493년 막시밀리안 1세 황제 때 부터다.



하인리히 1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오토 1세가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오토 1세는 왕권을 강화하고 슬라브족과 마자르족의 침입을 격퇴하였다. 962년 이탈리아 왕국의 군주 베렝가리오 2세가 교황령을 침략하자 오토 1세는 이탈리아 왕국을 정벌하고 그 공로로 동년에 교황으로부터 로마 황제의 대관을 받게 되었다. 교황 입장에서는 명목상으로나마 유럽 세계 전체의 지배자를 자처하는 동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권위로써 누군가를 내세워야 하는 판이었는데, 이때 큰 활약을 보이는 오토 1세를 (서)로마의 황제(정확히는, '로마인의 왕')로 내세운 것이었다.

그렇지만 오토 1세 때만 해도 신성 로마 제국, 혹은 로마 제국이라는 칭호보다는 그냥 "제국(Imperium)"으로 불렸다. 이후 오토 1세의 뒤를 이은 오토 2세 때부터 로마 제국이라 칭했고, 로마 제국의 부흥을 기치로 내걸고 왕위를 받아낸 오토 3세에 의해서 일반적으로 로마 제국이라 불리게 된다. 오토 1세가 황제의 대관을 받은 후 제위는 (중간에 끊긴 적도 많았지만) 대대로 계승되어갔다. 하인리히 공에 의해서 시작된 작센 왕조는 오토 1세부터 이어지다 잘리어(Salier) 왕조로 계승되었고 잘리어 왕조는 다시 호엔슈타우펜 왕조로 계승되었다.


4. 교황과의 갈등[편집]


오토 1세는 늘 분열의 위험성을 안고 있던 제국을 안정시키고 황제권을 강화하기 위해 황제가 성직자를 영주로 임명하는 소위 "제국교회정책"을 시행하였다. 황제가 임명하는 고위 성직자가 각 지역의 영주를 겸하는 구조로서 이는 황제가 성직자를 임명할 수 있는 서임권을 전제로 한 구조였다. 이에 교황 그레고리오 7세하인리히 4세와 서임권 분쟁에 들어가고 뒤이어 카노사의 굴욕(1077) 사건이 일어난다. 서임권 논쟁으로 촉발된 분쟁은 보름스 협약(1122)으로 수습되었지만 이는 오히려 독일의 각 지역 영주들과 도시들이 각자의 영지의 지배권을 강화했다. 이를 영방국가 체제라 부른다.


5. 대공위시대와 황권의 약화[편집]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들어선 후 프리드리히 1세프리드리히 2세는 황권의 강화를 시도했고, 진정한 로마 제국의 후계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이탈리아를 장악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호엔슈타우펜 황제들의 이러한 노력은 결국 대공위시대를 야기하고 말았다.

프리드리히 1세(제위 1155~1190)는 "신성 제국"을 칭하며, 황제이면서 동시에 남독일을 중심으로 영지를 확장하는 황제영방국가 정책을 취했다.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획득한 시칠리아에서 태어난 프리드리히 2세(왕위 1212~1220, 제위 1220~1250)는 시칠리아에 자신의 궁궐을 가지고, 신성 로마 제국의 역대 그 어떤 황제보다도 이탈리아 경략에 큰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프리드리히 2세는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토대로 황권의 강화를 시도했으나 교황과의 잦은 대립으로 여러 차례 파문을 당하고 이에 따른 각지의 반란에 직면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프리드리히 2세의 사후 1254년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단절되고, 대공위시대의 혼란기에 접어들게 된다. 1256년 대립왕 홀란트 백작 빌헬름이 죽자 제국의 정세가 불안해지게 된다. 라인 지방의 영주들은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헨리 3세의 영향으로 그의 동생인 콘월 공작 리처드를 황제로 추대했고, 다른 세력은 프랑스 왕국 국왕의 지지 아래 카스티야 왕국의 국왕 알폰소를 옹립하여, 제위가 비는 사태가 발생한다. 대공위시대는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의 요청으로 열린 프랑크푸르트 선제후 회의에서 합스부르크 가문루돌프 1세를 황제로 뽑음으로써 종식된다.

대공위시대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영주들의 투표에 의해 뽑히게 되었고 황제는 자기 영지 외에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돼버린다. 특히 1356년 카를 4세에 의해 공포된 《금인칙서》는 황제를 투표에 의해 선출하고, 선제후(選帝侯)들에게 사실상 자신의 영지를 독립국가처럼 다스릴 수 있도록 특권을 부여했는데, 선제후들에게 부여된 특권은 나중에 가서는 모든 영주들과 도시들에게 적용되어 결정적으로 독일의 분열을 가져오게 된다.


6. 합스부르크 왕조[편집]


15세기 중반에 가서는 여러 행운들이 겹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황제위를 계속 이어받는다. 막시밀리안 1세의 혼인동맹정책의 결과 최전성기인 16세기의 신성 로마 제국의 판도는 스페인나폴리 왕국까지 포괄하며 역대 최대를 자랑하였다. 다만 엄밀히 말하면 이건 신성 로마 제국의 영역이 넓어진 건 아니다. 카를 5세는 신성 로마 제위 외에도 엄청나게 많은 왕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카를 5세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를 받는 땅이 늘었을 뿐. 그래서 카를 5세 사후에 황제위는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해외 식민지나 스페인 왕위는 아들인 펠리페 2세에게 넘어가 제국은 다시 찢어진다. 하여튼 카를 5세 시절 황제의 권위는 대단해서 사코 디 로마 등의 수난으로 인해 교황조차 그 권위 밑에 고개를 숙여야 할 정도였다. 동시에 이때부터 독일 정체성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벌어진 종교 개혁으로 말미암아 제국은 대내적 분열과 대외적 충돌로 홍역을 치르게 됐으며 페르디난트 2세가 폭정과 실정을 저지르면서 그 결정판인 30년 전쟁을 사실상 일으키고 말아 국민들의 3분의 1이 죽고 제국 전체가 황폐화되었다. 결국 이 30년 전쟁을 종결시킨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각 지역의 영방들이 독립국가에 가까운 자립이 허용됨에 따라 사실상 독립했고 합스부르크 왕조는 지방 통제력을 상실하였다. 또 네덜란드가 독립하고 벨기에가 프랑스에 합병되면서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도 줄어들었다. 그래서 합스부르크 왕조는 구 제국 영토보다는 보헤미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등 동유럽 지역으로의 확대를 주로 꾀했으며, 합스부르크 왕조의 실제 왕권 및 국력의 수준과는 별개로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한 영향력 자체는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이러다 보니 17세기 이후 이렇듯 부침을 겪는 모습에 볼테르는 형식밖에 없는 이 제국을 '스스로 신성 로마 제국이라 칭하였고 아직도 칭하고 있는 이 나라는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고, 제국도 아니다' (ce corps qui s'appelait et qui s'appelle encore le saint empire romain n'était en aucune manière ni saint, ni romain, ni empire) 라고 평할 정도로 위상이 추락했다. 특히 볼테르가 살았던 18세기의 독일 지역 내 영방국가들은 이미 독립국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기에 신성 로마 제국은 사실상 멸망한 나라로 취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영방국가들이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하지 않은 것은 단지 그 세계국가적인 분위기가 자신들의 존속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 시기의 제국을 지탱한 것은 제국대법원(Reichskammergericht)인데 제국대법원은 권한의 행사에 일부 제한이 있긴 했지만 제국의 유지 및 로마법의 확산에 상당한 공헌을 했다.


7. 제국의 해체[편집]


그렇게 제국은 명맥만 이어오던 중 프랑스가 대혁명으로 군주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되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필두로 호기롭게 프랑스를 침공했으나 역으로 프랑스한테 털려버리고 라인 강 서안의 제국 영토를 몽땅 잃어버린다. 그 와중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는 코르시카 촌놈이 프랑스 권력을 잡고 여러 차례 대프랑스 동맹군을 박살내버리면서 그 결과 1801년 뤼네빌 조약으로 신성 로마 제국은 라인 강 서안의 모든 영토를 포기하였다. 더군다나 나폴레옹에 줄선 제국 내 군소국가들이 황제를 지지하는 주요 세력인 주교령 및 기사단령을 갈라먹으면서 황제 프란츠 2세는 제국의 영향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데다가 1804년 레겐스부르크에서 나폴레옹이 선제후 자리가 대거 비었다는 이유로 나폴레옹에 충성하는 군소 위성국들을 선제후로 대거 임명하면서 차기 황제위는 나폴레옹이나 나폴레옹의 하수인에게 넘어갈 가능성이 높아진다.[2]

그런데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는 법적으로 하나의 나라도 아니고 그냥 영지들이 모인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대표 작위조차 오스트리아 대공[3]에 불과했기 때문에 차기 황제 선거에서 패배하면 나폴레옹이나 프랑스의 괴뢰국인 독일 듣보잡 제후의 신하로 전락할 위험이 있었다. 이에 합스부르크가는 제위를 잃더라도 자신이 보유한 영지들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대표 타이틀이 필요했고, 이에 1804년 오스트리아 제국을 선포해서 보험으로 삼았다.

그러자 1806년 6월, 신성 로마 제국을 그저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에 불과하다고 여긴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를 향해 3개월 안에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하지 않으면 선전포고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고, 7월 파리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 소속의 16개 영방들이 나폴레옹을 보호자로 하는 라인 동맹을 결성했으며, 이들은 8월 1일을 기해 송식적으로 제국을 탈퇴해버려 완전히 독립했다. 결국 더이상 버틸 수가 없었던 프란츠 2세는 8월 6일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 및 제국에서의 기타 지위를 포기한다고 선언했고, 이로서 1000여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던 신성 로마 제국은 공식적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후일담으로 이 시기 제국의 해체를 두고 괴테는 "나의 마부가 언쟁을 벌이는 일보다 더 관심없는 일이다"라고 말했으며관심없다면서 언급은 왜? 해체되던 날의 일기에는 "독일 제국이 해체되었다는 신문기사를 보았다"라고 담담하게 적었다. 이것을 보면 이미 신성 로마 제국은 멸망해도 이상할게 없었던 상황.

다만 무늬만 제국이었던 체제라 해도 당시 독일인들은 제국이라는 외피를 갖추지 못한 독일을 상상조차 못했기 때문에 제국의 전직 판사이자 프로이센의 총리였던 카를 폰 슈타인은 빈 회의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부활을 제안했고, 훗날 오토 폰 비스마르크 역시 독일의 재통합을 완수한 후 이를 계승한 독일 제국을 만들었을 정도였다.

[1] 원래는 카롤루스 1세가 이리니한테 청혼을 했지만, 동로마 귀족들이 거부하여 무산되었다. 이 사건을 두고 현대 역사가들은 "우간다의 잔인한 군사 독재자인 이디 아민이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한테 청혼을 했다고 생각하면, 왜 거부당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유머스럽게 해석한다. 사실 당시까지만 해도 동로마인들은 서유럽을 가리켜 미개하고 야만적이라고 멸시했기 때문에, 청혼이 성사되기는 어려웠다.[2] 팔츠 선제후는 바이에른의 비텔스바흐 가문이 소멸하면서 같은 비텔스바흐 가문인 팔츠 선제후가 바이에른을 통합할 때, 팔츠-바이에른 통합 1표만 행사하는 조건으로 상속하면서 자연스럽게 통폐합되었고, 친합스부르크파인 쾰른, 마인츠, 트리어 선제후는 영지를 프랑스가 먹어치우면서 소멸했으며, 반프랑스파인 영국 국왕이 가지고 있는 하노버 선제후는 프로이센이 하노버를 먹어치우면서 사라져버렸다. 이들을 대신하여 나폴레옹이 선제후로 임명한 나라들이 바로 친프랑스파인 레겐스부르크, 헤센-카셀, 바덴, 뷔르템베르크, 잘츠부르크였다. 남아있는 선제후들도 친합스부르크파인 것은 아니라서 바이에른은 프랑스 편으로 갈아탔고, 프로이센은 프랑스와의 밀약으로 하노버를 먹어치운 후 입 딱 다문 상태였으며, 작센은 어디에 붙을까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 때문에 보헤미아 선제후 딱 하나만 가지고 있는 프란츠로서는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3] 오스트리아 대공은 보헤미아 국왕이나 헝가리 국왕도 겸하고 있었으나 보헤미아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 구성국 중 유일한 체코계 국가인지라 이질성이 강했고 헝가리 왕국은 아예 신성 로마 제국 관외의 독립 국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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