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아말리아(작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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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스페인 카를로스 3세의 왕비.
작센 선제후이자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아우구스트 3세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요제파의 장녀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 마리아 루도비카, 카를로스 4세, 양시칠리아 왕국의 국왕 페르디난도 1세의 어머니이다.
2. 생애[편집]
2.1. 어린시절[편집]
1724년 11월 24일, 작센 선제후국 드레스덴 드레스덴 성에서 태어났으며,프랑스어, 무용, 미술을 배웠다. 마리아 아말리아는 음악에 재능이 있어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연주했다고 한다.
2.2. 결혼[편집]
1737년, 13세가 된 마리아 아말리아는 당시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국왕이었던 카를로 3세[1] 와 약혼했다. 이 약혼은 카를로 3세의 어머니이자 펠리페 5세의 왕비인 엘리사베타 파르네세가 주선했다. 이전에 카를로 3세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아나 여대공[2] 의 결혼에 주선하는 데 실패한 뒤, 카를로 3세가 루이 15세의 장녀인 프랑스의 루이즈 엘리자베트와의 결혼을 거절하자 마리아 아말리아와의 혼담이 진행되었다. 이 혼담은 빈에서 진행되었으며, 결정적으로 마리아 아말리아의 외조모인 빌헬미네 아말리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1737년 12월 교황이 결혼을 승인했고, 1758년 5월 8일, 마리아 아말리아는 드레스덴에서 카를로 3세의 대표로 오빠인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과 대리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12세는 이 결혼에 대해서 매우 호의적인 반응을 드러냈으며 카를로 3세와 교황의 외교적 갈등을 완화시키기도 했다.
2.3.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비[편집]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비가 된 마리아 아말리아는 나폴리에 도착해서 환영을 받았으며, 6월 19일에 이 두사람은 처음 만나게 된다. 정략결혼임에도 불구하고 카를로와 마리아 아말리아는 매우 금슬이 좋았다고 한다.[3] 마리아 아말리아는 아름다움과 능숙한 기수로 알려져있었으며 남편 카를로와 함께 사냥에 동행했다. 또 왕비로서 잦은 병치레에 불구하고 정치에 큰 영향력을 불러일으켰고 국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마리아 아말리아 왕비는 나폴리에 대한 스페인의 영향에 대해 반발했고, 1742년, 영국이 나폴리를 폭격하겠다고 위협했던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 하는 동안 스페인의 의지에 반하여 나폴리 왕국의 중립을 선언하도록 남편 카를로 3세를 설득했으나 1744년에 전쟁 선포에 동의할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보다 영국을 좋아했다.
마리아 아말리아는 매우 교양이 있었으며, 카세르타 궁전의 건축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포르티치 궁전, 산 카를로 극장, 카포디몬테 궁전 등 왕궁에 개조하는데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한 남편 카를로 3세도 이에 동의하였다. 담배를 핀 흡연자였고, 나폴리 궁정에서 가장 총애하는 작곡가 지안 프란체스코 포르투나티의 후원자였다고 한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에 누군가에게 너무 신앙심이 깊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미사에 두 번 정도 참석했으며 하루에 네 번 참석을해 수녀와 수사에게 헌신을 했다고 한다.
2.4. 스페인의 왕비[편집]
1758년 말에 이르러 당시 스페인 국왕이었던 페르난도 6세는 우울증 증세가 있었지만 1758년 8월, 페르난도 6세의 왕비였던 포르투갈의 바르바라가 사망하자 상심했다. 1758년 12월 10일, 카를로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마드리드를 떠나 비야비시오사 데 오돈에서 1759년에 사망하자 남편 카를로는 스페인의 국왕으로서 카를로스 3세로 즉위함에 마리아 아말리아는 스페인의 왕비가 되었다. 카를로스 3세와 마리아 아말리아 부부는 나폴리를 떠나 마드리드로 들어갔고, 두 자녀는 카세르타에 남겨두었다.
카를로스와 마리아 아말리아의 아들들의 경우 장남 칼라브리아 공작 펠리페는 정신적인 장애가 있었기에 계승이 제외되었고, 차남 카를로스는 아스투리아스 공이 되어 스페인의 국왕이 되었고, 삼남 페르디난도 1세는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의 국왕이 되어 나중에 양시칠리아 왕국의 초대 국왕이 된다. 마리아 아말리아와 카를로스는 1759년 10월 7일에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마리아 아말리아는 왕궁을 꾸미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는데 남편 카를로스와 함께 레알 파브리카 델부엔 레티로라는 이름으로 명품 자기 공장을 만들었다. 또 스페인이 잘 관리되지 않고 개발되지 않았다고 비판했으며, 시어머니인 이사벨 왕대비도 비난했다.[4] 또한 무지하고 교육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스페인 왕실에 대해 불평을 드러냈다.[5] 이에 대해 마리아 아말리아는 스페인 개혁에 대한 계획을 시행했다.
2.5. 사망[편집]
마리아 아말리아는 마드리드에 도착한 지 1년 만인 1760년 9월, 수도 밖에 있는 부엔 레티로 궁전에서 향년 35세의 나이로 결핵으로 인해 사망했다. 시신은 엘 에스코리알에 안장되었다. 이후 남편 카를로스 3세는 마리아 아말리아가 죽은지 28년 후에 1788년에 사망하여 합장했다.
3. 가족관계[편집]
3.1. 조상[편집]
3.2. 자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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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를로 3세는 훗날 스페인 국왕이 되어 카를로스 3세로 즉위한다.[2] 카를 6세의 차녀이자 마리아 테레지아의 여동생. 후에 로렌의 샤를 알렉상드르 공자와 결혼했다.[3] 카를로 3세는 마리아 아말리아를 처음 만났을때 기뻐했다는 편지를 어머니인 이사벨 왕비한테 보내기도 했다.[4] 이사벨 왕대비는 비단 며느리에게뿐만 아니라 당시 스페인에서 평판이 굉장히 나빴다.[5] 마리아 아말리아는 스페인 궁정에 대해 우울하고 히스테리적이라고 묘사했다.[6] 작센의 왕비 마리아 테레지아, 프란츠 2세, 토스카나 대공국 대공 페르디난도 3세, 테셴 공작 카를 대공 등[7] 펠리페 5세의 손녀이자 루이 15세의 외손녀이다.[8] 포르투갈의 왕비 카를로타 조아키나, 에르투리아의 왕비 마리아 루이사, 페르난도 7세, 양시칠리아의 왕비 마리아 이사벨 등.[9] 프란츠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10녀이다.[10]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 마리아 테레지아, 프란체스코 1세, 사르데냐의 왕비 마리아 크리스티나 테레사,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아멜리 등[11] 페드루 3세와 마리아 1세의 장녀이다.[12] 카를로스 4세의 차녀이다. 숙질간의 결혼이라서 말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