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석(교수)

덤프버전 :



[ 펼치기 · 접기 ]
제1·2대
고병간
제3대
김상열
제4대
계철순
제5대
박정기
제6·7대
김영희
제8대
서돈각
제9대
한명수
제10대
서원섭
제11대
천시권
제12대
김익동

제13·14대
박찬석

제15대
김달웅
제16대
노동일
제17대
함인석
제18대
김상동
제19대
홍원화








역임한 직위
[ 펼치기 · 접기 ]





제13·14대 경북대학교 총장
박찬석
朴贊石 | Park Chan-seok


파일:박찬석총장.jpg

출생
1940년 9월 5일 (83세)
경상남도 산청군 신등면 양전리 봉계마을[1]
본관
반남 박씨[2]

대산(大山)
종교
천주교(세례명 : 마티아)
학력
산청 단계초등학교 (졸업)
신등중학교 (졸업)
진주농림고등학교 (졸업)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지리교육학 59 / 학사)
경북대학교 대학원 (지리학 / 석사[3])
하와이 대학교 대학원 (지리학 / 박사)
가족
아들 박민우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17
경력
경북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지리학과 교수
경북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제13·14대 경북대학교 총장
전국국립대학교 총장협의회 회장
제17대 국회의원(비례대표)
열린우리당 최고위원
열린우리당 대구시당위원장
대한지리학회 부회장

1. 개요
2. 생애
3. 총장 재임기 행적
4. 정치 활동
5. 선거 이력
6. 사건
7. 여담
8.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교육자 출신 정치인. 본관은 반남(潘南). 경북대학교 제13·14대 총장(1994~2002년)과 제17대 국회의원(열린우리당, 비례대표)을 역임하였다.


2. 생애[편집]


  • 1940년 9월 5일 경상남도 산청군 신등면 양전리 봉계마을에서 소작농이었던 아버지 박명순(朴明淳, 1919. 3. 18 ~ 2010. 4. 27)[4]과 어머니 창녕 조씨 조성춘(曺聖春, 1923. 3. 5 ~ 2007. 7. 25)[5] 사이에서 2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67년 경북대학교 대학원에서 지리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1972년 네덜란드 국립사회과학대학원에서 지역개발 과정을 수료, 뒤이어 미국 국무부로부터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고 하와이 대학교 대학원으로 유학해 1981년 그곳에서 지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 주요 연구 분야는 주요 연구 분야는 도시지리학, 지역개발론, 경제지리, GIS 등이다. 단행본으로『계량지리학』(형설출판사, 1992), 『박찬석의 세계지리 산책』 전2권 (이신, 2014) 등을 출간하였고, 많은 논문들을 게재하였다.


  • 전국 국립대학교 교수협의회 의장, 경북대학교 사회과학대학 학장, 경북대학교 학생부처장, 한국대학사회봉사협의회 회장, 교육인적자원부 지방대학육성위원회 위원장, 대구.경북지역 정보화추진협의회 의장, 방송위원회 대구지역 방송자문위원회 위원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3. 총장 재임기 행적[편집]


  • 제12대 김익동 총장에 이어 1994년 9월 1일부터 2002년 8월 31일까지 제13·14대 경북대학교 총장직을 수행한다. 1990년 ‘총장직선제’가 도입된 시기 유일한 재선 총장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총장 재임 시절 영호남 교류학생 제도를 도입하고 정부로부터 예산 지원을 이끌어내기도 했다.[6]

  • 국립대 자율화, 지방인재 채용 목표제, 지역대학간 공동사업 추진, 대학의 ‘세계적 표준’에 맞추는 정책 등을 추진했다.

  • 1997년 대학 정보화 평가 순위에서 6위에 오르기도 했고 이 시기에 종합정보시스템, 학사행정, 시설관리, 도서관, 각종 통신시설, 컴퓨터 소프트웨어 등을 전산화하였다. 교내의 모든 업무를 통합 관리하는 경북대학교 종합정보시스템(KNUGIS)을 교수, 대학원생, 학부생들이 직접 제작 설치하였다. KNUGIS는 총무처와 대한상공회의소가 개최한 「97 민관 경영 사무혁신사례 발표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하였다.

  • 1998년 교육개혁 연구부문 최우수대학으로 선정되어 교육부로부터 지원금 5억 4000만원을 받기도 하였다.

  • 1999년 국내 대학 가운데 처음으로 'Post-doc'제도를 도입하였다. 박사학위를 받은 연구생들에게 연구비 지원을을 해주는 제도이다.

  • 총장 재임시절 영남권 교수로는 처음으로 이인제 후원회에 가입했었고 민주평화통일회의 자문위원으로 참여했었다.[7]



4. 정치 활동[편집]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줄곧 교육부총리 후보로 하마평에 오르내리고, 열린우리당 대구시장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8] 2004년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6번으로 공천되어 국회에 입성하게 된다. 국회 국방위원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열린우리당 최고위원, 대구시당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2008년 5월 고향 산청군으로 돌아가 농업에 종사했다.

2021년 9월 9일 더불어민주당 제20대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이종걸 전 원내대표 등 전직 의원과 지자체장 42인과 함께 이재명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5.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열린우리당|
파일:열린우리당 로고타입.svg
]]

8,145,824 (39.97%)
당선 (6번)



6. 사건[편집]


  • 충남 논산 육군훈련소 제29신병교육연대에서 중대장이 훈련병의 화장실 청소 상태 미흡을 지적하며 화변기의 배설물을 먹인 육군훈련소 인분사건 당시 훈련병에게 배설물을 먹도록 강요한 중대장을 두둔한 적이 있다. 심지어 이를 비난 받고 사과문을 작성하면서 다시 비호하고 중대장을 용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사과문에서 교사의 학생 체벌도 잘 가르치려다 하는 실수라고 두둔하였다.[9] 박찬석이 교육부 장관으로 거론되던 사람인걸 생각하면 교육부 장관이 되지 않은 것이 다행스러울 정도.

  • 2014년 아들의 공공기관 부당채용 및 재심사에 개입하여 계속 근무하게 한 사실이 감사원에 의해 적발되었다.


7. 여담[편집]


  • 교수, 대학총장, 국회의원 시절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수성구 지산동에서 북구에 있는 경북대까지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고, 국회의원이 되어서 서울에 살 때도 서울 강남구 개포동에서 25㎞ 떨어진 여의도 국회의사당까지 자전거로 오갔다고 전한다. ‘자전거 의원’이라는 별명이 붙을만큼, 자전거와 관련한 법안을 만드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 지역균형발전과 지방대학, 교육문제에 대해서 많은 목소리를 내왔다.

  • 어렸을 때 아버지와의 일화가 감동적이다. 중학생 박찬석은 부모님의 기대속에서 대구로 유학을 갔으나, 성적이 나빠서 성적표가 나오고 성적표를 조작해서 아버지에게 가져갔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1등을 했다고, 아무것도 모른 채 집의 유일한 재산인 돼지를 잡아서 잔치를 벌였고, 이에 충격을 받은 본인은 각성해서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했다고 한다. 교수가 되고 몇 년이 지나서 아버지에게 진실을 털어놓으니, 아버지는 아들의 거짓말을 알면서도 모른 척을 해 주었다고 밝혔던 훈훈한 미담이다. 하지만 정작 본인의 아들을 편법으로 임용하는 짓을 하면서 이 일화도 빛이 바랬다.

  • 경북대 총장 시절 모발이식을 했다. 집도의는 대한민국 모발이식분야 최고 권위자인 경북대 김정철 교수.

  • 혈액형은 A형이다


8. 둘러보기[편집]


파일:열린우리당 흰색 2차 로고.svg 파일:열린우리당 로고타입.svg 제17대 국회 비례대표

[ 펼치기 · 접기 ]
장향숙
홍창선
김명자
김혁규[B]
이경숙
박찬석
홍미영
조성태
박영선
정의용
김현미
박명광
김영주
조성래
강혜숙
정덕구[B]
이은영
민병두
윤원호
박홍수[B]
유승희
장복심
김재홍
서혜석[C]
신명[C]
김영대[C]
[B] A B C 임기 중 사퇴.[C] A B C 승계.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15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15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9 23:22:22에 나무위키 박찬석(교수)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2] 집의공파(執義公派) 26세 찬(贊)◯ 항렬.[3] 석사 학위 논문 : 大邱(대구)능금地域(지역)의 硏究(연구)(1967).[4] 족보명은 박성서(朴性緖). 자는 인호(仁浩).[5] 조한기(曺漢基)의 딸이다.[6]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을 앞두고 김대중 후보가 경북대학교를 방문했었는데, 당시 박찬석 총장이 김대중 후보자와의 면담 자리에서 ‘지역인재할당제’를 제안했었고, 김대중 후보가 이를 대선공약으로 삼은 것으로도 알려져있다.[7] 이인제 후원회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정치적 중립 논란이 제기된 적도 있었다.[8] 실제로 교육부총리 제안을 받았으나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자리라고 판단하여 고사했다는 후문이 있다.[9] "잘 가르치려다 실수", 박찬석 '인분옹호 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