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선사

덤프버전 :



[ 펼치기 · 접기 ]
직할교구
제2교구
제3교구
제4교구
제5교구
조계사
용주사
신흥사
월정사
법주사
제6교구
제7교구
제8교구
제9교구
제10교구
마곡사
수덕사
직지사
동화사
은해사
제11교구
제12교구
제13교구
제14교구
제15교구
불국사
해인사
쌍계사
범어사
통도사
제16교구
제17교구
제18교구
제19교구
제20교구
고운사
금산사
백양사
화엄사
제21교구
제22교구
제23교구
제24교구
제25교구
송광사
대흥사
관음사
선운사
봉선사

군종특별교구 · 해외특별교구




봉선사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파일:봉선사.컬러 사진.png}}}
1920년대 봉선사

1. 개요
2. 상세
3. 남양주 봉선사 동종
4. 봉선사를 거쳐간 스님
5. 교통
5.1. 버스
5.2. 지하철
6. 여담
7. 같이보기

한자 : 奉先寺 / 로마자 : Bongseonsa
홈페이지


1. 개요[편집]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있는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이며, 주지는 호산스님이다.


2. 상세[편집]


969년(고려 광종 20년) 법인국사 탄문이 창건하여 운악사라 하였다. 그 후 1469년(조선 예종 1년) 정희왕후 윤씨가 광릉세조를 추모하여 89칸으로 중창하고 봉선사라고 하였다. 1551년(명종 6년)에는, 문정왕후에 의해 교종의 중심된 절로 지정되어 여기서 승과를 치르기도 하고, 전국 승려와 신도에 대하여 교학을 진흥하는 중추적 기관 역할을 하였다.[1] 임진왜란 때 불타 여러 번 수축했다. 그러나 1951년 6.25 전쟁 때 다시 법당과 함께 14동 150칸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파일:봉선사 큰법당 2015년 문화재청.jpg}}}
봉선사 큰법당
1969년에는 주지 운허(耘虛, 1892~1980)가 큰법당 등의 법당을 중건했다. 경내에 납골당이 있고 연못과 카페 등이 자리하고 있어서 가족단위 방문객이 많다. 약사여래불상에 신도들이 직접 금박을 하며 기도하는 개금불사가 진행중이다. 1만원을 시주하면 순금종이 2장을 받을수 있는데, 불상의 얼굴 부분만 빼고 자유롭게 금박을 입힐수 있다.

특이한 사항으로 보통 사찰에서 대웅전의 기능을 하는 전각의 현판이 봉선사에서는 한글로 그냥 '큰법당'이라고 되어 있다. 봉선사를 재건한 운허는 경전의 뜻만 알면 되는데 경전을 보기 위해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이 굳이 한문을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많이 했다. 이런 운허의 뜻으로 우리나라 사찰 중 최초로 한글 현판이 탄생했으며 여기서 더 나아가 큰법당은 주련[2]에도 한글을 사용했음은 물론, 내부에도 화엄경과 법화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동판에 새겨 벽면에 붙여놓았다. 또 이 큰법당은 재건 당시 콘크리트를 사용했는데 언뜻 생각하면 가치가 없을 것 같지만 한글 현판을 사용한 운허의 뜻과, 콘크리트를 사용한 것이 오히려 당시 기술을 대표하는 사례로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522호로 지정되어있다.


3. 남양주 봉선사 동종[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남양주 봉선사 동종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절 종각에 보존되어 있는 동종은 조선 전기의 것으로 보물 제397호로 지정되어 있다.


4. 봉선사를 거쳐간 스님[편집]


봉선사와 인연이 있는 스님을 다루는 장이다.
  • 월초 거연(1858 ~ 1934)
  • 운허 용하(1892 ~ 1980)
  • 운경 기홍(1904 ~ 2000)
  • 월운 해룡(1929 ~ 2023)
  • 밀운 부림(1934 ~ 현재)
  • 두산 일면(1947 ~ 현재)

5. 교통[편집]



5.1. 버스[편집]


봉선사입구(23-258[3]/23-259[4])
일반버스

마을버스




5.2. 지하철[편집]




6. 여담[편집]


일제강점기 소설가 최서해가 이곳에 승려로써 잠시 머물렀던 적이 있다. 1924년 10월 춘원 이광수의 소개로 약 3개월 동안 승려로서 봉선사에 기거하며 『탈출기』를 수정하고 일문으로 된 서구 문학을 번역하기도 했다고.

절 입구에 여러 부도탑이 있는데 그 끝에 1975년에 세워진 춘원 이광수 기념비가 있다. 봉선사에 이광수의 기념비가 있는 이유는 이광수가 속세의 운허와 동갑에, 8촌 친척이라는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친일 이력 때문에 해방 무렵 갈 곳이 없었던 이광수를 거둬준 이가 운허였는데 그는 이광수가 인근 사릉 근처에 터를 잡고 살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었다. 이광수는 사릉에서 1944~1948년까지 살았는데 해방 직후인 1946년에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운허의 도움으로 봉선사에 들어가 은거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사릉과 봉선사에서 생활하는 동안 이광수가 쓴 작품이 <도산 안창호>, <나의 고백>, <돌베개>이다.

기념비는 이광수의 전처인 허영숙이 세운 것으로 그녀는 홀로 자녀들을 키우고 말년인 1971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생활하였는데 납북된 이광수의 생사를 알기 어렵게 되자 추모비 건립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1975년 5월 귀국하였는데 갑자기 여러 병을 얻어 기념비를 세우기 직전인 9월에 사망하였다. 사실 이런 기념비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잘 알기 어려운데 경기도에서 친일 문화 잔재 청산을 위한 조사를 하고 있고 이 기념비가 경기도에 소재한 대표적인 친일 잔재물로 꼽히고 있어 향후 청산 대상이 될 지, 보존 대상이 될 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일반 대중들에겐 가수 유현상이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린 장소로도 유명하며 가왕 조용필 역시 첫 번째 결혼식을 올렸던 장소이기도 하다.



7. 같이보기[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1 01:54:40에 나무위키 봉선사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유사하게 봉은사선종 수사찰이 되어 승과를 치루었다.[2] 기둥에 세로로 쓴 글[3] 진접, 오남 방면[4] 포천, 의정부 방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