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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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형식
3. 여담



1. 개요[편집]


임금의 식사를 일컫는 말. 밥의 높임말인 진지의 왕실 한정 극존칭어다. 고려 말에 몽골어로 음식을 지칭하는 '슐라'에서 넘어왔다고 하며 이게 수라()로 변형되었다. 임금에게 올리는 식사를 올려놓는 상을 수라상이라고 한다.


2. 형식[편집]


조선시대 궁중에는 임금의 식사를 담당하는 기미나인과 수라상궁이 있었다. 왕이 수라를 드는 것을 "젓수다"라고 하였으며, 기미나인이나 수라상궁은 음식에 독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항상 임금의 식사 전에 자신이 먼저 한 젓가락씩 먹어본 후, 이상이 없으면 왕에게 "젓수십시오."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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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임금은 하루에 총 5번의 수라를 받았다. 이 중 12첩 정식[1]은 오전 10시와 오후 5시의 두 번이며, 이를 전후로 하여 아침은 초조반상(혹은 일어난 자리에서 바로 먹음을 뜻하는 자릿조반), 점심은 낮것상, 밤에는 야참이라 하여 국수나 미음, 약식 등 간단한 상을 차렸다.

그 양은 엄청나게 많아서 왕 혼자서는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양이었다. 조선 왕조 최고의 미식/대식가였던 세종대왕조차 반도 못 먹을 듯한 분량을 자랑한다. 이는 '물림상'이라고 해서 일부만 먹은 뒤 남은 반찬은 왕이 식사를 마친 뒤 밥만 새로 퍼서 왕 밑의 신하들이나 궁중 나인들이 먹었기 때문인데, 이 물림상은 신분의 차가 있는 식사 자리에서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공경하여 귀한 재료를 아낌없이 차리고,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배려하여 귀한 식재를 적당히 남겨 모두가 먹을 수 있게 베푸는 상호배려의 문화로 신분차와 식단차가 확실한 노비를 부리는 관아와 상류층 양반가에도 비슷한 풍습을 시행하였고 이에 따라 개화기 근처까지 조선의 평균 식사시간은 몇시간을 넘나들곤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현대인의 기준에서 좀 이상한 풍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윗사람들은 반찬도 아랫사람들을 생각해서 손을 최대한 깨끗하게 댔으며, 흔히 묘사되는것과 달리 수라상을 드는 임금도 올려진 찬을 그 접시에 그대로 먹는 게 아니라 개인용 접시에 일일이 덜어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도 집에서 밥먹을 땐 락앤락 같은 용기에 반찬을 담고 식사가 끝나면 용기 그대로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도로 꺼내먹기도 하기 때문에 당대가 세균이란 개념과 존재도 밝혀져 있지 않았던 시대임을 감안하면 꽤나 위생적이었다.

이는 조선만 그랬던 것은 아니라 과거 신라 태종 무열왕의 식사 기록에서도 수라상의 엄청난 양에 대한 기록이 나오고,[2] 아랫사람에게 음식을 남겨주는 것은 유럽에서도 비슷한 풍습이 있어 빵을 요리를 담는 그릇으로 쓰고, 왕이 요리를 먹은 뒤 남은 고깃국물 머금은 일회용 식기는 영주가 가난한 영민들에게 베풀었다. 중국의 경우 청나라에서는 대륙 스케일답게 매일같이 수라상에 48가지 요리가 나왔는데, 그 양이 위낙에 푸짐하다보니 황실뿐만 아니라 신하, 환관들과 궁녀, 심지어 시종들까지 먹고도 남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아예 남는 음식을 식당에 재판매하였다. 상태가 좋은것은 음식점에서 재조리했고, 상태가 별로인것은 무슨 영양죽이나 꿀꿀이죽 마냥 한솥에 끓여팔았다.[3] 참고로 중국 수라상은 청나라 기준으로 한 음식에 세번만 젓가락질해서 가져가는것이 예법이었다. 암살방지를 위해서 제정된 예법인데, 어차피 양이 위낙에 넘쳐나기 때문에 편식하지 않는 이상은 배가 터질 지경이 되는지라 가능한 예법이었다. 참고로 황제가 한번도 손에 대지 않았던 음식은 황궁에서 재료값을 아끼기 위해서 상하지 않으면 재가열해서 다음 수라상에 올려놓기도 했다고.(...)

현대인에게 반찬 12가지는 "왕이 먹는 반찬치고는 종류가 좀 적은 것 아닌가?"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이건 현대인이 차려먹는 밥상에 원래 들어가는 반찬은 첩수만 늘었지, 퀄리티가 떨어지기 때문에 드는 착각이다. 사실 현대인의 식탁에 접시나 그릇 12가지를 올리는 것도 쉽지 않지만, 원래 전통 반상은 첩수가 올라가면 양만 느는게 아니라 질도 하나하나가 서양으로 치면 전채요리 급으로 돌변하며, 수라상 급까지 오면 반찬 하나하나가 대단한 수준으로 바뀐다.

현대는 기술의 발달로 농업 생산량 자체가 늘어나서 대량생산을 통해 단가가 낮아졌고 정 부족한 식자재는 수입할 수 있어서 단가를 더욱 낮출 수 있지만 당시 식자재는 농약이고 양식이고 없는 100% 유기농 국산 식자재밖에 없던 시기다. 현대에서도 저런 좋은 재료로 한상 차리려면 돈 꽤나 드는데, 심지어 식자재의 수급과 관리, 조리과정 모두 현대처럼 기계화, 냉장 보존이 불비했던 당대에는 전 과정이 수작업의 연속이였다. 즉 현대 기준으로도 사치스러운 상차림인데 하물며 평균 소득이 더 낮은 그 당시 기준에선 정말 왕의 품격에 걸맞는 상차림이 아닐 수 없는 셈.

게다가 12첩이란 각기 다른 음식을 놓는 그릇이 12개라서가 아니라 밥, 국, 찌개, 김치, 찜, 전골, 장류는 첩수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을 제외한 사이드 메뉴만 12가지라는 뜻이다. 근데 이 반찬 분량과는 별개로 밥의 양은 막걸리를 떠먹을 듯한 국그릇 스케일의 그릇에 꽈악 채웠다. 수라상의 경지에 와도 밥상의 주인은 원칙적으로 이지만, 수라상 수준은 커녕 7첩 수준만 와도 밥상의 주인인 밥이 묻힐 정도다. 이 반상이란 게 딱 보면 3첩 조차도 어지간히 부유한 양반이 아니면 못 해먹을 상차림이다. 사실 3첩은 서민 밥상, 5첩은 경제능력이 좀 되는 평민 밥상으로 부류되는데 5첩이 경제력 되는 평민 밥상인건 경우에 따라선 가능했겠으나 3첩이 서민 밥상인건 불가능에 가까웠을것이다. 3첩은 국과 김치가 기본 반찬인데 당시엔 하루하루 먹고사는것도 힘든게 조선시대 서민이었다. 출처 이게 겨우 3첩이다. 5첩만 와도 코스 요리 수준이며 7첩을 넘어가면 호화스러움이 안드로메다로 떠나기 시작한다. 심지어 수라상에는 그 밥도 종류별로 올린다.

당시 고기가 부족해서 3첩, 5첩상이 소박해 보이는 것일 뿐, 만약 당시에 고기가 지금처럼 흔했다면 5첩상만 와도 스테이크가 국이나 김치처럼 기본반찬으로 날아다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조선시대 왕의 업무량은 정말 무지막지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이 정도로 먹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었다고 한다. 단, 한민족의 식사량 문서에 나와있듯 일반 백성들도 대식하는 습관이 있었으므로 호화로운 것이 맞지만 그리 특별할 건 없었다. 격무에 시달렸다고 해도 업무상의 격무지 운동선수나 군인처럼 몸을 많이 움직여야 하는 일도 아니었고.

수라상 차림의 기본 이념은 '조선 팔도'에서 올라온 음식을 담는다는 것으로, 이는 왕이 식사중에도 나라를 살핀다는 의미 역시 담고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각 지역의 특산물인 진상품으로, 그것도 재료가 겹치지 않도록 반찬을 만들었는데, 해당 반찬이 양이 줄거나 빠지거나 바뀜으로 해당 특산물이 나는 지역에 뭔가 문제(대표적으로 흉년)가 발생함을 왕에게 알리고 또한 살핀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즉 찬의 가짓 수가 준달지 극단적으로는 이나 미음이 올라와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 수라상이다.

다만 나라에 큰 흉년이 들거나 자연재해, 전쟁 등으로 나라 살림이 어려울 때는 임금이 자발적으로 수라상의 반찬 가짓수를 줄이는 감선(減膳), 혹은 고기를 올리지 않는 철선(撤膳)을 했다. 극단적일 때는 말 그대로 죽 한 그릇만 올리기도 했다. 이는 신하들에게도 암묵적인 압박이었다. 이 말은 '나라가 어려워 나도 이렇게 먹는데 니들은 호화로운 밥이 넘어가냐?'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임금이 아예 수라 자체를 거부하면? 그 때는 궁궐과 조정 전체가 발칵 뒤집힐 정도의 대형 사고. 그래서 조선 임금의 단식은 일종의 파업이자 시위이기도 했다.[4] 비단 임금 뿐 아니라 임금의 어머니인 대비, 할머니인 대왕대비도 아들이나 손자에게 시위할게 있으면 곡기를 끊고 버틴다. 다른 왕족도 마찬가지.

수라상은 크게 3개의 상을 쓴다. 주된 상인 대원반에는 흰수라(백미밥)와 국, 각종 장류와 김치, 반찬, 토구[5]를 올렸고 곁반에는 팥수라(팥밥과는 다르다. 팥을 넣은 게 아니라 팥을 끓인 물로 밥을 지어 붉은 색을 입힌 것이다.), 곰국, 기타 별식 등을 올렸다. 마지막으로 책상반에는 찜과 조치(찌개), 전골류를 올렸다. 물론 임금도 사람인지라 세부적인 반찬들의 종류는 임금의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바뀌기도 하였다. 가령 세종의 경우 고기 반찬이 항상 빠지지 않은 반면, 영조정조는 서너 가지의 채소 반찬으로 단촐하게 차린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연산군은 정력에 좋다고 한 민물장어말고기 육회를 즐겨먹었으며, 대한제국고종순종은 서양 요리를 먹기도 했다.


3. 여담[편집]


대장금 등 대중매체의 영향으로 수라상을 100% 궁녀들이 차린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론 전혀 아니며 대령숙수라 부르는 남자요리사들이 수라상을 차렸고, 궁녀들은 숙수들이 퇴근한 야간에 급히 식사가 필요할 때나, 왕실 어른들의 간식 정도만을 만들었다고 한다.[6] 100% 궁녀들이 차렸다는 오해는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남자 숙수들은 궁을 떠나 요릿집에 취업하여 궁에 남아있던 궁녀들이 어쩔 수 없이 수라상을 전담하게 되었는데, 이 궁녀들이 해방 이후 궁중한식을 전수하게 되면서 생긴 오류였다고 하며,[7] 궁녀가 아니라 남자 요리사들이 실제로 음식을 담당했다는 사실은, 드라마 대장금이 방영될 당시에도 많은 전문가들에게 지적되었던 부분들이다. 뿐만 아니라 풍속화 '선묘조제재경수연도'에 나오는 한 고관의 잔칫집 풍경을 보면 민가에서도 대부분이 남성들이 요리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여기에 내시부의 수장인 상선(판내시부사)이 수라상을 담당했는데, 이는 수라상을 비롯한 왕실의 음식 준비를 총감독 및 책임지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별식이 있었다. 바로 아이스크림, 떡볶이, 수박이다. 대한제국 시점에 가서야 커피가 추가된다.
  • 아이스크림은 우유를 주재료로 하지 않았고 빙수와 같은 형식으로 조리됐는데, 에 꿀을 섞은 셔벗 형태로 시원한 맛에 먹는 별식이었다. 눈이 내리지 않는 여름에는 서빙고에 보관했던 얼음을 대패로 갈아서 만든 빙수에 꿀을 섞었다. 대한제국기에는 우리가 지금 먹고 있는 아이스크림에 좀 더 가깝게 근대화된 형태의 아이스크림도 상에 올랐다.
  • 떡볶이는 가래떡간장을 부어 끓여 만든 것이었다.
  • 수박은 무등산 수박을 최고로 쳐서 진상품 목록에 있었다.
  • 커피는 고종이 그렇게나 좋아한 별식이었다. 이렇듯 즐겨 마셔서 커피 맛을 잘 알다보니 김홍륙 독다 사건 당시 커피 맛이 이상한 것을 눈치채 바로 뱉어서 화를 면할 수 있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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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12첩 반상은 대한제국 수립 후 곤룡포, 면류관, 곤복 등을 국왕용에서 황제용으로 승격할 때 함께 승격된 것이고, 대한제국 수립 전에는 9첩 반상을 수라상으로 받았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2] 하루에 쌀이 여섯 말, 술이 여섯 말, 그리고 꿩이 열 마리 분량이었다고 한다. 인간이 혼자서는 물리적으로 먹을 수 없는 양이고, 애초 전제가 물림상으로 하사하기 위해 일부러 많이 차리는 것이라 남아서 버릴 일이 없었다.[3] 지금 기준으로 보면 위생상으로 영 좋지 않고, 영양죽의 경우에는 식중독 위험도가 높아서 함부로 먹으면 안될음식이지만, 그래도 수양제가 수행도중에 자기에게 올려진 음식을 먹다가 남은것들을 재활용도 아니고, 그냥 버리기만 한것보다는 개념찬 일이기는 했다(...)[4] 유명한 왕의 단식 기록으로는 폐비 윤씨의 사연을 들은 연산군이 단식을 한 사례가 있다. 또한 정조도 이복동생 은언군을 살리기 위해 단식을 한 적이 있다. 이건 고려시대에도 의종이 신하들에게 단식투쟁을 한 적이 있을 정도로 아주 유서 깊은 전통이다. 다만 의종의 단식투쟁은 뭔가 대단한 일 때문은 아니고, 최측근 환관이자 간신배정함에게 그전까지 문관에게만 내리던 합문지후 벼슬을 내리려 해서 대간들의 반대에 직면하자 이거 강행하겠다고 떼쓴 것...[5] 생선의 가시나 고기의 뼈 등 음식을 먹은 뒤 생긴 이물질을 담는 그릇을 말한다.[6]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일반 가정집 주방일은 여자들이 도맡았던건 사실이나, 좀 급이 높은 음식을 제공해야 하는 곳들은 남자들이 주방일을 도맡았다. 주방일이 통념과는 달리 근력이 드는 일이기 때문.[7] 궁녀들을 통해 궁중요리가 전수된 것은 사실이다. 한희순, 황혜성 문서로.[8] 하지만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은 전혀 모르고 있다가 독에 의해 이빨이 빠지고 건강을 크게 해치는 변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