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사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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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tresa-Front_1935.svg

스트레사 체제의 구성국(파랑)
1. 개요
2. 배경
3. 붕괴



1. 개요[편집]


1935년 4월 14일, 이탈리아의 휴양지 스트레사에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왕국 3자간 체결된 안보보장체제이다.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3국 간의 동맹으로, 영어 명칭 'Stresa Front'를 반영하여 '스트레사 전선'이라고도 부른다.


2. 배경[편집]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한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공군의 보유와 징병제 시행을 금지당하고, 육군의 규모도 7개의 보병사단과 3개 기병사단, 총합 인원 10만명 이하로 제한되어 사실상 팔다리가 모두 잘린 비무장 상태가 된다. 그러나 1933년 독일아돌프 히틀러나치당이 집권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게 되는데, 그들은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으로 독일이 잃어버린 자긍심을 되찾기 위해 독일군을 재무장시키길 원했고, 이로 인해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부터 베르사유 조약을 약간씩 어겨가며 조금씩 진행되던 독일의 재무장화에 박차가 가해지게 된다. 초기에 메포어음과 같은 은밀한 수단으로 비밀스럽게 재무장을 진행하던 나치 독일은 점점 더 대담해져서 1935년 2월 26일에는 공군 '루프트바페'를 공개하며 공군의 보유를 천명하더니, 약 2주 뒤인 3월 16일에 이르러선 아예 독일군의 재무장화를 공표하며 육군의 규모를 베르사유 조약이 제한하고 있는 인원 이상으로 확대하고, 징병제를 시행하면서 베르사유 조약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인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왕국은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을 위반하고 독일군을 재무장시키겠다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독일을 군사적으로 점령하여 베르사유 조약의 이행을 강제하는 방법이있겠으나, 당시 영국과 프랑스로써는 도저히 독일과의 전쟁을 진행할 여력이 안 되었다. 이에 3국의 총리 램지 맥도널드, 피에르 라발, 베니토 무솔리니는 1935년 4월 14일, 이탈리아의 스트레사에 있는 마조레 호수에 모여 독일에 대항하기 위한 전선을 구상하는데 이것이 바로 스트레사 전선이다. 스트레사 전선은 대독일 포위망을 형성하여 독일에게 로카르노 조약베르사유 조약을 준수할 것을 압박하는 목적이 있었다.

훗날 나치 독일에 의해 주권을 침해당하는 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가 스트레사 전선에 참가하였다면 독일을 동서남북으로 포위하는 아주 강력한 포위망이 형성되었겠지만... 조약을 체결한 3국 총리 중 2명의 이름이 나치의 협력자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동맹은 오래가지 못했다.[1]


3. 붕괴[편집]


그러나 영국은 스트레사 전선을 통해 독일을 군사적으로 압박하고,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것보다는 독일과의 외교적 타협을 원했다. 히틀러 집권 전부터 이어져 온 독일과 폴란드의 군사적 긴장상태를 히틀러가 외교적 수단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함으로써, 영국은 히틀러를 외교적 타협이 가능한 인물로 평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1935년 6월 18일, 영국은 독일과 영국-독일 해군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 해군 '크릭스마리네'에 걸고 있던 제약을 일부 해제하고, 독일이 합법적으로 해군을 재무장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영국은 협의의 진행 과정에서 스트레사 전선의 회원국인 프랑스와 이탈리아에게는 조약의 체결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리지 않았다. 본래 스트레사 전선은 독일의 불법적인 재무장을 막자고 형성된 것인데, 영국이 독일의 해군 재무장화를 합법화해버렸으니 스트레사 전선은 흐지부지될 수밖에 없었다.

영국이 영국-독일 해군조약을 체결하자 이탈리아 왕국의 베니토 무솔리니는 매우 분노하였다고 전해지는데, 그는 스트레사 전선을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위한 초석으로 활용하려는 흑심이 있었기 때문이였다. 미국이 고립주의적 외교 노선을 유지하고 있던 당시, 프랑스와 영국을 스트레사 전선에 끌어들여 동맹으로 삼는다면 에티오피아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킬 수 있고, 자신을 방해할 수 있는 열강은 거의 없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의 침공을 지지하지 않았고, 영국은 심지어 에티오피아의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의 망명을 허락하기까지 했다. 영국과 이탈리아의 관계는 급속히 냉각되었고, 이탈리아는 오히려 자신이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이탈리아의 외교 노선이 반독일 외교 노선에서 친독일 외교 노선으로 변경되는 결과를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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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랑스피에르 라발비시 프랑스의 총리가 되어 친독일·반유대정책을 시행하였고, 베니토 무솔리니는 추축국에 가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