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遼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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耶律欲穩
(? ~ 926)
요나라의 인물. 자는 할랄간(辖剌干)이며 돌려불부(突呂不部) 사람이다. 조부 야율대압(耶律台押)은 요련(遙輦)에서 북변예랄(北邊拽剌)을 지냈다.
한 때 간헌황후(簡獻皇后)
[1]가 모든 아들들이 병에 걸려 난처해하자 야율대압이 비호했던 일이 있었는데
태조(太祖)가 그 공을 잊지 않고 그의 손자인 야율욕온을 중용하여 인근 여러 부를 관장하게 하고 모든 일족들의 정세를 살피게 하였다. 태조가 야율욕온의 소질을 소중하게 여기자 감격하여 더욱 분발하였다. 이윽고 태조가 야율욕온에게 궁을 지키도록 하자 문객을 이끌고 궁궐 호위의 필두가 되었다.
태조의 동생인 야율라갈(耶律剌葛) 등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야율욕온이 난을 진입하는데 공이 있음으로 해질랄부이리근(奚迭剌部夷離堇)에 임명하였다.
천찬(天贊) 4년,
발해(渤海)를 정벌할 때도 종군해 공이 있었다.
천현(天顯) 초에 사망하였다.
야율욕온의 후손들은 대대로 궁궐에 중용되어 팔방(八房)으로 불리었다.
동생 야율하리(耶律霞里)는 해육부토리(奚六部吐裏)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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