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연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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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韓延徽
(882 ~ 959)
요나라의 인물. 한연휘는 자는 장명(藏明) 유주(幽州) 안차(安次) 사람이다. 아버지 한몽은(韓夢殷)은 삼주(三州)[1] 의 자사(刺史)를 역임했다고 한다.
2. 생애[편집]
한연휘는 젊을 적 재능이 뛰어났는데 노룡절도사(盧龍節度使) 유인공(劉仁恭)이 그를 기이하게 여겨 유도부문학(幽都府文學), 평주녹사참군(平州錄事參軍)으로 삼고 풍도(馮道)와 함께 지후원(祗候院)으로 삼았으며 유주관찰탁지사(幽州觀察度支使)를 수여하였다. 후에 연왕(燕王) 유수광(劉守光)의 사신으로 요나라로 갔는데 그가 절하지 않자 태조(太祖)가 분노하여 억류하였다. 그러나 순흠황후(淳欽皇后)가 간하여 태조가 그를 불러들여 자신의 군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당항(党項)과 실위(室韋)를 쳐 복종시켰는데 한연휘의 전략이 대부분이였다.
한연휘는 고향을 그리워하다가 마침내 요나라에서 도망쳐 후당(後唐)으로 향했는데 장수 왕함(王緘)과 사이가 틀어져 다시 요나라로 향했다. 그의 친구 왕덕명(王德明)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였지만 한연휘는 태조가 자신을 보면 기뻐할 것이라고 장담하며 돌아갔다. 한연휘가 돌아오자 태조가 크게 기뻐하며 갑렬(匣列)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갑렬은 요나라 말로 '다시 돌아오다' 라는 뜻이다. 곧 정사령(政事令) 숭문관대학사(崇文館大學士)로 임명하여 나라 안과 밖의 모든 일에 대한 결정에 참여하도록 했다.
천찬(天贊) 4년, 발해(渤海)를 정벌할 때 종군하여 대인선(大諲譔)의 항복을 받아냈다. 얼마안가 다시 배반하자 여러 장수들과 함께 성을 깨트려 그 공으로 좌복야(左僕射)의 벼슬을 받았다. 또 강묵기(康默記)와 함께 장령부(長嶺府)를 쳐서 공략하였다. 군대가 돌아갈때 태조가 붕어하니 좌우에서 슬퍼하였다. 태종(太宗)조에 노국공(魯國公)에 봉하고 정사령(政事令)으로써 그대로 따르게 하였다. 후진(後晉)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남경삼사사(南京三司使)가 되었다. 세종(世宗)조에 남부재상(南府宰相)으로 옮겨갔다.
천록(天祿) 5년 6월, 하동(河東)에서 사신이 와 책례(冊禮)를 청하자 황제가 한연휘에게 정하도록 하였는데 태종 때에 후진(後晉) 황제를 책례한 일을 따르도록 아뢰니 그대로 따랐다.
응력(應曆) 연간에 나이가 많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9년, 78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황제가 듣고 놀라 슬퍼하였다. 그에게 상서령(尚書令)을 추증하고 유주(幽州) 노(魯) 외곽에 장사지내게 하였으며 대대로 숭문령공(崇文令公)을 잇게 하였다.
3. 기타[편집]
좌명공신(佐命功臣) 중 한명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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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명이 아니다. 3곳의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