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遼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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耶律羽之
(890 ~ 941)
요나라의 인물. 자는 인저신(寅底哂)이고 어릴 적 자는 올리(兀里)이다.
태조(太祖)가 처음 기초를 다질 때 많은 군사 전략에 참여하였다.
천현(天顯) 원년, 태조가
발해(渤海)를 평정하자 황태자(皇太子)
야율돌욕(耶律突欲)을
동란왕(東丹王)으로 봉하고 야율우지를 중대성(中臺省)의 우차상(右次相)으로 삼았다. 그때 아직 민심이 안정되지 않았는데 좌대상(左大相) 야율질라(耶律迭剌)가 한 달이 채 안되어 사망하자 야율우지가 민심 안정에 힘썼다.
태종(太宗)이 즉위하자 표문을 올려 발해인들을 양수(梁水) 땅으로 옮길 것을 간하였다.
후에
인황왕(人皇王)이
후당(後唐)으로 달아나자 야율우지가 사람들을 통치하고 보살폈는데 일체 그전처럼 하였다. 그 공으로 태부(太傅)를 더하고 중대성 좌상(左相)으로 옮겼다.
회동(會同) 초, 책례(冊禮)에 참여하기 위하여 궁궐에 나아오자 특진(特進)을 더하여 주었다. 표문을 올려 좌차상(左次相)
발해소(渤海蘇)의 탐욕과 불법한 일을 아룄고 그 후 죽었다.
어려서부터 호탕하였고 자라서는 학문을 좋아하여 여러 부족의 언어에 통달하였다.
형제 관계로
야율갈로(耶律曷魯)와
야율적렬(耶律覿烈)이 있다.
아들 야율화리(耶律和里)는 동경유수(東京留守)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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