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쉰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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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쉰들러
Oskar Schindler


파일:오스카쉰들러프로필.jpg

출생
1908년 4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스비타비
사망
1974년 10월 9일 (향년 66세)
서독 힐데스하임
묘소
이스라엘 예루살렘 시온 산 가톨릭 프란체스코 공동묘지
직업
기업인
정당
주데텐 독일인당 (1935~39)

(1939~45)
부모
아버지 한스 쉰들러
어머니 프란치스카 루저
배우자
에밀리 쉰들러 (1928년 결혼)
자녀
2명
종교
가톨릭
명예칭호
열방의 의인

1. 개요
2. 생애
3. 그에 대한 왜곡
4. 기타
5.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Der Unvergessliche Lebensretter 1200 Verfolgter Juden

박해받았던 1200명 유대인들의 잊을 수 없는 생명의 은인

예루살렘에 위치한 오스카 쉰들러의 묘비명.

이스라엘, 그것도 예루살렘에 묻힌 유일한 나치 당원이다.


독일계 체코인 사업가.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주인공으로도 유명하다.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법에 의한 표기는 '오스카어 신들러'.

유대인에 대한 탄압이 자행되던 나치 독일 휘하에서 자신의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모든 재산을 바쳐서 유대인 1,200명의 목숨을 구원한 업적으로 유명하며 이러한 그의 일화는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로 나왔다. 수많은 유대인들의 목숨을 구해준 의인이기는 하지만 생전에 파티, 여자를 좋아하는 방탕하고 쾌락을 중시하는 속물의 전형으로, 아내 외에도 애인이 여럿 있었던 흑역사도 존재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더 의의가 있는 것이, 광기가 몰아치던 20세기에서 무고한 자들을 구한 인물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영웅적인 사람'이나 '특별한 선인'이 아닌, '부패하고 속물적인 기회주의자 기업가\'였기 때문이다.


2. 생애[편집]



2.1. 제2차 세계 대전 이전[편집]


1908년 4월 28일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스비타비(Svitavy) 지방[1]에서 태어났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벌어진 뒤 스비타비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가 되었으나, 쉰들러 일가는 16세기에 빈에서 모라비아로 이주한 독일/오스트리아계였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독일인으로 여기고 있었다.

1935년에 체코슬로바키아 내 독일계 민족주의 조직인 '주데텐 독일인 당(Sudetendeutsche Partei)'에 가입, 활동하면서 독일 국방부 첩보부와 접촉하여 간첩이 되어 체코슬로바키아의 철도 정보를 독일 측에 누설했다. 이 혐의로 체코 당국에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때마침 뮌헨 협정이 체결되어 형벌은 중지되었다.[2]

이후 1939년 2월에 나치당에 자원 입당하였다.


2.2. 제2차 세계 대전 당시[편집]


같은 해 9월에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뒤 점령하자 한밑천 챙겨보려는 목적으로 폴란드로 갔으며, 10월에는 나치 독일로부터 법랑 용기를 만들고 있던 유대인 소유의 공장을 불하받았다. 이 공장은 점점 확대되어 45,000m² 부지에 800명 이상의 노동자가 일하는 거대한 군수 공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쉰들러는 나치당 친위대 슈츠슈타펠로부터 유대인 노동자를 공급받았다. 말하자면 강제 노동의 일환으로 수용소에 수감된 유대인들을 차출해 공장으로 데려온 것이다. 그런데 쉰들러는 이 특권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어린이나 여성, 대학생들을 숙련된 금속공이라 속이고 자신의 공장에 데려와 은밀히 보호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암시장을 이용해서 모자라는 물자를 조달하거나 유대인을 우대해 뉘른베르크 법을 위반한 혐의 등으로 게슈타포에게 조사를 받았으나 돈, 보석, 예술 작품 등을 뇌물로 바쳐서 무마시켰다. 그는 뇌물로 바친 물품들을 장부에 꼼꼼히 정리해 두었는데, 악명 높은 게슈타포를 매수해야 하는 만큼 정말 어마어마한 액수의 물품을 뇌물로 바쳐 구워삶았다.

1944년에 소련군의 진군으로 동쪽의 수용소가 해체되자, 많은 유대인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쉰들러는 약 1,100여 명에 달하는 유대인의 목록을 작성하고, 자신의 고향인 스비타비 지방에 군수 공장을 세운 다음 이들을 이곳으로 모두 빼돌리는 식으로 약 1,200명을 구해내고, 목록으로 차출했던 여성 유대인 근로자들이 행정 착오로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자 이들을 다시 데려오면서 아우슈비츠 쪽에서 약 150명 정도의 장정을 추가로 구출했다. 그러고서 자신의 모든 재산을 소모해 가며 약 7개월간 이들을 보호했다.

분명 그는 원래 물질적으로 탐욕스러운 성향이 더 강한 사람이었고, 나치 독일에 동조한 부패한 기업가였다. 애초에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들을 직접 노동자로 끌어들인 것도 그저 돈을 수월하게 벌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유대인들을 데려오고 난 이후 이들을 점점 더 인간적으로 대우해 주더니, 결국은 자신의 재산을 쏟아부어 가며 나치로부터 보호하기까지 한다. 서서히 그의 행동이 단지 돈벌이가 목적이라고 설명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수백만 마르크에 달하던 자신의 재산을 모두 소모해 가며 유대인들의 생명을 구하는 데 힘썼다. 어찌보면 속물주의적인 탐욕에서 시작된 행위가 쉰들러가 잃어버린 인간성을 되찾은 계기가 된 셈이라 볼 수 있다.


2.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편집]


종전 후 그는 몇 가지 사업을 시작했지만 모두 파산하였다. 다행히도 쉰들러에 의해 목숨을 건진 유대인들이 도움을 줘서 근근이 살 수준은 되었다고 한다. 1949년에 쉰들러 부부가 아르헨티나에 가서 살다가 1958년에 오스카만 독일로 돌아갔고, 1964년에 심장마비로 입원하였는데, 이 소식을 들은 '유대인 보호 위원회'에서 병원비로 15000달러를 기부하였다.

1962년에 쉰들러의 이름을 딴 나무가 야드바셈의 거리에 자리잡았고, 1965년 11월 5일에는 독일 정부로부터 '제 1등 공로훈장'을 받았다. 1993년에는 이스라엘 야드바셈에서 오스카 쉰들러와 에밀리 쉰들러[3]에게 열방의 의인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이후 1974년 10월 9일 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시신은 예루살렘 기독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묘지는 유대인들의 성지인 시온 산에 있는데, 쉰들러는 그곳에 묻힌 유일한 나치 당원이다. 아내 에밀리 쉰들러는 계속 아르헨티나에서 살다가 2001년 7월에 독일로 돌아왔지만 3개월 뒤에 뇌졸중으로 숨을 거두었다. 2008년 4월 10일에 쉰들러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독일에서 우표가 발행되었다.

세계 곳곳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매우 존경받는 사람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쉰들러를 추모하는 유대인들이 그의 묘지를 참배하고 있다. 유대인이 아닌 인물들도 그를 위인으로 여긴다. 상술했듯 체코슬로바키아 등 좀 안 좋게 보는 곳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3. 그에 대한 왜곡[편집]


사실 쉰들러는 본인의 의지로 유대인을 구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을 부려먹기 위해 빼돌린 것뿐인데, 이게 졸지에 유대인들을 살린 게 되어 영웅 취급을 받았다는 주장이 나와 논란이 되었는데, 그 주장에 대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 쉰들러는 공장에 온 유대인들의 돈과 귀중품을 빼앗고 그것으로 술을 사 먹었다.

* 쉰들러는 호색한인 데다 도덕적으로 좋은 사람이 아니다.

* 쉰들러의 행동은 자신의 사업을 위한 것이었다.

* 쉰들러가 유대인을 탄압한 것을 본 증인들이 있다.

* 전쟁이 끝나자 살아남은 유대인들을 무장시켜 소련군과 싸우게 하고 자신은 도망쳤다.


하지만 바로 아래의 반박에 나와 있듯이, 이 주장들은 전부 터무니없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위의 주장은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나온 것인데, 애초에 이 프로그램은 흥미 위주 프로그램이다 보니 내용에 신빙성이 거의 없다. 참고로 쉰들러가 구해준 당사자 유대인들은 전쟁 이후에도 쉰들러에게 고마워하며 쉰들러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사진1사진2

  • 쉰들러는 자기 공장에 온 유대인들의 돈과 귀중품을 빼앗고 그걸 팔아서 유흥비로 썼다?
유대인들은 가지고 있던 돈과 귀중품을 전부 나치 독일군에게 압수당하고 수용소로 보내졌던지라 겨우 지급된 옷 말고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일단 가진 것이 있어야 뭔가를 빼앗지 않겠는가?[4] 그 당시 수용소에서는 유대인들의 금이빨까지 뽑아갔었다는걸 상기하자. 쥐에 나온 블라덱 슈피겔만처럼 철저하게 숨긴 귀중품으로 외부에서 공사를 하러온 폴란드인과 거래를 한 사례도 있긴하다.

  • 쉰들러는 호색한으로, 도덕적으로 좋은 사람이 아니다?
쉰들러 리스트에서도 묘사되듯이, 전쟁 초기 그의 행보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이며 복잡한 이성관계 등 개인적인 문제를 많이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쉰들러는 목숨의 위협을 무릅쓰고 재산까지 탕진하며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했다. 이런 자기희생은 그의 도덕적 치부를 만회하고도 남을 정도로 큰 업적이다. 오히려 이러한 점은 성인군자가 아니라 도덕적 결함이 많은 사람이라도 최소한의 인간성(양심)을 지키며 정의를 실현하고 인류애를 실천하는 숭고한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준 것이다.

  • 쉰들러의 행동은 자신의 사업을 위한 것이었다?
영화에서처럼 유대인들을 구출한 이후부터 일부러 불량품을 납품하였고, 독일군들이 계속 반품하는 바람에 곧 적자에 빠졌다. 이 때문에 쉰들러의 지인들이 공장을 폐쇄하고 사업을 접어 더 이상 빚을 늘리지 말라고 만류했지만, 그는 오히려 유대인들을 위해 많은 빚을 져가며 공장을 유지하였다. 실제로 쉰들러는 전쟁이 끝난 뒤 많은 빚 때문에 파산했다. 그가 오직 자신의 이득만을 위했더라면 절대 저런 이유로 파산하지 않았을 것이다.

  • 쉰들러 본인도 유대인을 탄압했다?
그가 유대인을 탄압하는 걸 봤다고 증언했던 사람들은 쉰들러(와 다른 유대인들)의 증언으로 나치의 전범 행위에 가담한 것이 증명되어 처벌받은 사람들이라 신빙성이 거의 없다. 만약 그 증인들이 실제로 쉰들러가 유대인을 탄압하는 것을 봤어도 오히려 나치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연막이었을 수도 있다.[5] 결정적으로 그가 구해준 유대인들은 쉰들러가 자기들을 정말로 탄압하거나 괴롭혔다는 발언을 한 적이 없다.

  • 전쟁이 끝나자 살아남은 유대인들을 무장시켜 소련군과 싸우게 하고 자신은 도망쳤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해방시키러 온 소련군과 싸울 이유가 없었다. 만약 쉰들러가 진짜로 그랬다면 오히려 무장한 유대인들이 그를 소련군에 넘겼을 것이다.[6] 해당 주장은 아마추어들이나 홀로코스트 부정파 측에서 제기한 터무니없는 소리고, 실제로 쉰들러에 의해 구출된 유대인들은 그런 일이 없었다고 말했다. 쉰들러가 악랄한 나치였다면 모사드를 통해서라도 어떻게든 처벌 또는 처단을 받았을 것이다. 그 전에 쉰들러가 유태인이 소련군과 전투를 하도록 사주했다면 소련은 어떻게든 쉰들러를 시베리아로 유배 보냈을 것이다.


4. 기타[편집]


  • 실제 '쉰들러 리스트'는 총 7종이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총 5종이다. 미국 워싱턴 홀로코스트 기념관과 독일 코블렌츠의 연방 기록 보관소에 각 1부, 이스라엘의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기념관에 2부, 민간에 1부가 보관되어 있다. 그 중 민간에 보관된 1부가 2010년 220만 달러에 이베이에서 경매에 붙여졌다.

  • 쉰들러 리스트는 한동안 전후 혼란과 1974년 쉰들러의 사망 등 시간이 지나며 유실된 것으로 여겨졌으나 독일 힐데스하임의 한 가정집 다락에서 1999년에 발견되었다. 이를 보도한 독일 일간지 슈투트가르터 차이퉁은 1천2백명의 유대인 생존자 명단을 비롯해 생존자들이 쉰들러에게 보낸 감사 편지, 쉰들러의 연설문 등이 들어 있는 가방이 발견됐다고 알렸다. 이 문서들은 1974년 쉰들러가 죽을 때까지 거주하던 힐데스하임에서 사망할 당시 친구에게 넘겨준 것으로 그 친구 역시 1984년에 사망하여 문서의 존재가 잊혀졌으나 그의 자녀들이 다락을 청소하다가 발견했다고 한다. 발견된 문서의 일부는 이스라엘 야드 바셈 기념관의 홀로코스트 연구자들에게 전달되었다.

  • 쉰들러가 구해준 유대인들은 전쟁 후에도 쉰들러와 좋은 사이였다. 쉰들러가 구해준 유대인들을 '쉰들러의 유대인'이라는 뜻인 신들러유덴(schindlerjuden)이라고 한다.

  • 쉰들러가 전쟁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독일 정권에 의해 핍박받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위에도 나와있듯이 독일 국방부 첩보부, 즉 아프베어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단순 가담자나 도움을 주는 조력자가 아니라 중견급으로, 1939년에 이미 자신의 부대 내에서 2인자였고 1940년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잠깐 주터키 독일 대사관에 아프베어 요원들의 부패를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적까지 있었다. 그런데 참으로 쉰들러스럽게도, 아프베어에 들어간 이유가 독일민족의 독일 통합같은 거창한 뜻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알코올 중독 때문에 빚을 져서 돈이 없어서였다.

  • 쉰들러 리스트 실질적인 작성자 개인 비서 미미 라인하르트가 2022년 4월 8일 별세했다. 향년 107세.#


5.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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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 체코에 속한다.[2] 체코슬로바키아는 연합군에 가담한 승전국이었으니 이들 입장에서 오스카 쉰들러는 매국노로 보일 수도 있으며, 그를 나쁘게 생각하는 여론도 존재한다. 따라서 체코슬로바키아 두 나라에서 오스카 쉰들러를 함부로 언급하면 봉변을 겪을 수도 있다. 다만, 이 두 나라에서도 후술할 영웅적인 행적때문에 무조건 나쁘게만 보는 건 아니고, 되려 자국의 위인으로 숭앙하는 여론도 종종 있다.[3] (Emilie Schindler, 1907~2001). 오스카 쉰들러의 아내로 1928년에 오스카와 결혼했고, 그가 유대인을 구출하는 데 동조했으며,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도 직접 출연했다.[4] 쉰들러가 돈과 귀중품을 빼앗고 그걸 나치에게 뇌물로 주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럴 바에야 자기네들이 뺏어가는 게 더 이득이다. 어차피 쉰들러는 단지 공장주 정도밖에 안 되니 나치들이 뺏어가도 뭐라 할 수 없다.[5] 쉰들러 리스트 영화에서도 좁은 열차 화물칸에 갇혀 더위와 갈증으로 괴로워하는 유대인들 보고는 넌지시 돈을 쥐어주며 나치 병사들에게 저놈들에게 물을 쏴보는건 어때? 하면서 구슬리고 병사들은 장난처럼 낄낄대며 소방호스로 화물칸에 물을 끼얹는 장면이 나온다.[6] 만약 소규모 사업가에 불가한 쉰들러조차 이런 식으로 유대인을 구워삶아 소련군과 싸우게끔 할 수 있었다면 독일에선 진작에 유대인으로만 구성된 부대를 만들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