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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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홀로코스트(The Holocaust) 또는 쇼아(השואה)는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주도하고 그 협력자들이 동참하여 벌인 유대인에 대한 제노사이드를 뜻한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유대인 민간인과 포로들은 가스실, 총살, 강제 노동, 계획된 영양실조, 생체실험 등의 방법을 통해 조직적으로 살해되었고, 이로 인해 약 6백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어 당시 유럽 내 약 9백만 명의 유대인 중 2/3가 사망했다.
2. 상세[편집]
반유대주의적 음모론을 기반으로 한 나치즘을 바탕으로 아돌프 히틀러는 1933년 나치당이 집권하자 유대인들을 향한 탄압과 차별을 제도적으로 도입했다. 1933년에는 유대인들이 운영하는 사업에 대한 국가적 보이콧이 이뤄졌고, 1935년 도입된 뉘른베르크 법을 바탕으로 유대인을 향한 법적 차별이 가해졌다. 이러한 전국적 차별 아래 1938년 수정의 밤 등의 반유대적 폭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유대인과 롬인을 몰아넣은 구역인 게토가 형성되어 사회적 배척과 격리가 이뤄졌다.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하고 독일이 동쪽으로 확장하며 특수작전집단이 동유럽 점령지의 유대인과 정치범들을 학살하는 역할을 맡아 총 130만여명의 민간인을 대량총살했다. 또한 나치 독일의 점령지와 파시스트 동맹국들의 영토에 강제수용소가 지어졌으며, 이곳에 수감된 유대인들은 열악하고 비인간적인 환경에서 강제 노동에 투입되어 과로사, 아사, 병사하였다. 1942년 반제 회의에서 '최종 해결책'으로서 모든 유대인의 절멸이 결정됨에 따라 수감자들은 가스실을 이용한 방법을 중심으로 하여 대량학살되었다. 그러한 강제 노동·절멸 수용소로는 나치 점령 폴란드에 설치된 아우슈비츠, 트레블링카, 베우제츠, 마이다네크, 소비보르, 헤움노 등이 있었다. 이러한 공식적 기소와 학살은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유대인 외에 나치당이 보기에 우생학적으로 열등한 자들, 혹은 반(反)나치즘적이라고 여겨진 사람들 또한 함께 기소 및 학살되었다. 그러한 예로 1938년 시행된 장애인 학살인 T4 작전의 경험을 거친 인력들이 독소전쟁 발발 이후 홀로코스트에 본격적으로 투입되었다. 폴란드인 등 슬라브족 또한 학살당하여 약 180~190만 명의 비(非)유대계 폴란드인들이 사망한 것으로 추측된다.[1] 소위 '집시'라고 불리는 롬인들도 주요 학살 대상 중 하나였으며, 최대 50만여명이 학살되어 유럽 롬인의 절반 가량이 사망하였다.[2] 이 롬인 학살은 롬어로 '파괴'를 뜻하는 '포라이모스(Porajmos)'라고 불리기도 한다.[3] 연합군이나 레지스탕스의 포로, 특히나 유대인, 슬라브인, 유색인 포로의 경우 현장에서 처형되거나 강제 노동·절멸 수용소로 보내졌다. 나치당을 정치적 이유로 거부한 공산주의자 등의 정치범들도 함께 학살되었다. 남성 동성애자를 위시한 성소수자들 또한 학살 및 수감되었고, 생존한 이들은 해방 이후에도 동성애를 불법화한 동서독 정부에 의해 나치의 기록을 바탕으로 다시 수감되었다. 이러한 나치의 기소에 의해 사망한 총 희생자의 수는 홀로코스트로 사망한 유대인 600만여 명을 포함하여 약 1,100만 명이다. 좀 더 넓게 정의할 경우 동부전선에서 군사작전 중에 죽은 민간인을 제외한 나치 점령지에서 조직적으로 학살당한 소련인까지 포함해 약 1,700만 명까지 추정하기도 한다.[4]
이를 기획하고 주도적으로 학살한 주체는 히틀러를 주축으로 한 나치 독일 정부와 그 군대임이 분명하지만, 그 외의 추축국들이나 추축국의 괴뢰국, 점령지의 자생적인 파시스트들로 이루어진 나치 독일의 괴뢰 정권과 '풀뿌리 부역자들' 또한 학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직접적으로 살인에 관여되지 않은 독일의 단체나 민간인들 또한 반유대주의에 깊게 경도되어 유대인을 향한 차별, 탄압, 추출 등 학살에 참여했다. 유대계 미국인 사학자 마이클 베렌바움은 "독일 교회와 내무부는 유대인들의 출생기록을 제공하였고, 우체국은 추방과 시민권 박탈 명령을 배달했으며, 재무부는 유대인의 재산을 몰수하였고, 독일 기업들은 유대인 노동자를 해고하고 유대인 주주들의 권리를 박탈하였다."라고 기록했다.[5] 또한 대학교는 유대인 교수 해고, 철도 회사는 수용소행 열차 운영, 화장(火葬) 회사는 수용소의 대규모 화장터 지원, 제약 회사는 수감자를 대상으로 한 생체실험 참가 등 학살에 대한 대규모 동조가 이뤄졌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구조적 악이 나치의 전체주의를 기능하게 했다는 악의 평범성을 주장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강제 노동·절멸 수용소가 연합군에 의해 해방되며 그 실상이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근대의 첨단이었던 서구 기계 문명의 기술력과 행정력이 철두철미하게 특정 부류의 인간을 말살한다는 발상에 쓰였다는 사실은 전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홀로코스트는 역사적 반면교사로 남게 되었다. 이에 1945년 종전 이후 유엔의 세계 인권 선언이 1948년 발표되는 등 인권 수호와 차별 반대라는 국제적 합의가 맺어졌다. 현재의 독일연방공화국은 학살의 주범인 나치가 민주적인 절차로 정권을 장악했다는 점을 들어 방어적 민주주의 운영에 적극적이며 홀로코스트 부정론이 위법이다.[6] 또한 철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는 야만이다"라고 말한 바 있듯, 홀로코스트는 인간 이성의 합리성, 그리고 기술의 발달에 대한 낙관주의를 철저히 부정시킨 점에 있어 실존주의, 비판 이론,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현대 인문학 사조에 큰 영향을 준 사건이 되었다.
3. 명칭과 어원[편집]
- 홀로코스트(The Holocaust)
- 쇼아(השואה, Ha Shoah)
- 최종 해결책(Endlösung, Final Solution)
4. 진행[편집]

5. 가해 주체[편집]

6. 수용소[편집]
6.1. 절멸 수용소(Vernichtungslager)[편집]
죽음의 수용소(Todeslager)라고도 한다. 나치가 세운 수많은 수용소가 있지만,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절멸수용소(Vernichtungslager)는 아래의 6곳이고 그 외는 강제 노동 수용소(Arbeitslager)이다.
다른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도 부차적으로 인체실험이나 학살 등의 홀로코스트 행위가 이루어졌으나, 절멸수용소는 1차적인 목적이 노동이나 교화, 형벌이 아니라 살인(절멸)을 목적으로 운용되던 곳이라는 점에서 다른 강제 수용소와 차이가 있다.#
독일 영내
독일 점령지 수용소
- 폴란드 지역 (폴란드 총독부)
-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 사망자 110만 명 이상
-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 - 사망자 70~90만 명 이상
- 헤움노 절멸수용소 - 사망자 15~20만 명 이상
- 소비보르 절멸수용소 - 사망자 17~20만 명 이상
- 마이다네크 절멸수용소[9] - 사망자 6~8만 명 이상
- 우크라이나 지역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부)
- 베우제츠 절멸수용소 - 사망자 43만 명 이상
6.2. 강제 노동 수용소(Arbeitslager)[편집]
강제 노동 수용소(Arbeitslager)는 나치가 점령한 각국에 소재하였으며, 1차적인 목적은 나치에 반하는 인물들의 형벌 및 교화, 노동이라는 점에서 절멸수용소(Vernichtungslager)와 차이가 있다. 이러한 강제 노동 수용소는 부차적으로 인체실험, 총살 등이 행해지긴 했어도 주된 운영목적은 아니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형이나 기아, 질병, 피로때문에 사망률이 높은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일부 수용소의 사망인원은 절멸수용소에 비견할 정도이나, 목적과 경향성 등에서 차이가 있어 절멸 수용소와 구분된다.
독일 영내
- 부헨발트 수용소[10] - 사망자 5만 명 이상
- 다하우 수용소 - 사망자 3만 명 이상
- 베르겐-벨젠 수용소[11] - 사망자 3만 7000명 이상
- 플로센뷔르크 수용소 - 사망자 3만 명 이상
- 그로스-로젠 수용소 - 사망자 4만 명 이상
- 힌체르트 수용소 - 사망자 1000명 이상
- 마우트하우젠 수용소[13] - 사망자 12만 명 이상
- 구젠 수용소[12] - 사망자 3만 5000명 이상
- 미텔바우-도라 수용소 - 사망자 2만 명 이상
- 나츠바일러-스트로토르프 수용소 - 사망자 2만 2000명 이상
- 노이엔감메 수용소 - 사망자 4만 2000명 이상
- 라벤스브뤼크 수용소 - 사망자 3만 ~ 9만 명 이상
- 작센하우젠-오라니엔부르크 수용소 - 사망자 5만 명 이상
독일 점령지
- 네덜란드 (네덜란드 국가판무관부)
- 헤르초헨부쉬 수용소 - 사망자 700명 이상
- 우크라이나 지역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부)
- 야노프스카 수용소 - 사망자 4만 명 이상
- 크로아티아 지역 (크로아티아 독립국)
-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 - 사망자 10만 명 이상
7. 방식[편집]

8. 희생자 수[편집]
나치 독일은 유대인 절멸에 관한 명령과 보고를 서면으로 기록하는 것을 꺼렸기에 학살 명령 다수는 구두로 전달되었다. 그럼에도 생산된 수많은 문서들은 1944년경부터 조직적으로 삭제되었으며, 학살과 관련된 여러 시설들 또한 의도적으로 해체되거나 파괴되었다. 이 외에도 광범위하게 벌어진 집단 학살 사건들과 그 희생자들에 대한 기록은 매우 단편적이다.
그렇기에, 홀로코스트의 정확한 피학살자 수를 집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현재의 홀로코스트 희생자 집계는 주요 집단 매장지에서 발굴된 희생자 수, 독일 제국철도의 운송량과 운송 횟수, 그리고 전후 집계된 인구를 이민자 숫자와 전쟁 전 인구수와 비교하는 연구 등을 토대로 한 추정치에 기반한다.
미국 홀로코스트 박물관에서 발표한 희생자 숫자는 다음과 같다. 해당 박물관은 전후의 인구 집계 결과를 토대로 추산하였다.
또한 해당 박물관에서는 유대인들의 사망 장소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통계를 제시한다.
9. 전후 반응[편집]

10. 유대인 분류 기준[편집]

11. 홀로코스트 증언 영상[편집]

12. 알려진 피해자들[편집]
12.1. 희생자[편집]
12.2. 생존자[편집]
- 로만 폴란스키 - 폴란드계 유대인 영화감독
- 마르틴 니묄러 - 독일인 루터교회 목사, 신학자
- 말라 슈피겔만 - 폴란드계 유대인 주부
- 빅토르 프랑클 - 오스트리아인 심리학자
- 브와디스와프 슈피겔만 - 폴란드계 유대인 사업가
- 시몬 비젠탈 - 유대인 나치 사냥꾼
- 아냐 슈피겔만 - 폴란드계 유대인 주부
- 에르브슈타인 에르뇌 - 헝가리의 전 축구 감독
- 엘리 비젤 - 루마니아계 유대인 작가
- 오토 프랑크 - 독일계 네덜란드 유대인 사업가이자 안네 프랑크의 아버지
- 프리모 레비 - 이탈리아계 유대인 작가
- 설러미터 헤이먼 - WWE의 프로듀서 폴 헤이먼의 어머니
- 브로니아 브랜드맨- 저술가, 유대인, 자신의 오빠와 함께 살아남았다 오빠의 이름은 멘데크 브랜드맨.
13. 기타[편집]
- 홀로코스트 덕분에 건국에 급물살을 탄 이스라엘은 정작 홀로코스트 생존자를 박대하고 있다. '나약해서 나치에 붙잡혔다', '도살장에 가는 양처럼 아무 생각 없이 기차를 탔다' 등의 비난을 하면서 '비누'라고 놀렸다. 현재도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은 이스라엘 정부의 박대 속에 1/3이 빈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 산업적 학살을 위해 독가스를 사용한 최초의 국가가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아니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통령[17] 이던 당시의 프랑스 제1공화국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클로드 리브(Claude Ribbe)[18] 이 2005년 저술한 '나폴레옹의 범죄들: 히틀러를 위한 청사진'에 따르면, 1801년 나폴레옹의 명을 받고 출동한 르클레르의 프랑스군은 아이티 혁명을 잔혹하게 진압하곤 포로들을 가스실로 개조한 함선의 선창에 처넣어 이산화황으로 질식시켜 살해했다. 학살에는 아이티 화산지대에서 자연적으로 생성되는 유황 덩어리들을 이용했다. 그리고는 가스선을 먼 바다로 몰고 나가 시체들을 바다에 갖다 버린 뒤 다시 돌아와 다음 희생자들을 살해했다.
단, 논란은 존재한다. 당시 르클레르의 프랑스 진압군이 아이티에서 인종 청소 수준의 대량학살을 벌이고 있었던 것 자체는 사실이지만 '가스실'에 관한 주장은 근거가 매우 약하다. 역사학자 대부분은 이를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가령 아이티 혁명사에 관하여 가장 큰 권위자인 로랑 뒤부아(Laurent Dubois) 버지니아 대학 교수가 2012년에 출판한 역사서인 '아이티: 역사의 후폭풍(Haiti: the Aftershocks of History)'에 가스실 관련 내용은 실려 있지 않다.
리브의 주장은 투생 루베르튀르의 전기작가였던 빅토르 쇨쉐르(Victor Schoelcher), 19세기 사학자 토마 마디유(Thomas Madiou) 안토인 메트랄(Antoine Métral) 그리고 주스트 샹세라테(Juste Chancelatte) 네 명의 주장에서 근거하나 이들 모두 다 자신들의 서적에서 가스실 학살의 정확한 근거나 출처를 제시하지 않았다. 이들의 주장을 이어받은 리브 또한 심화된 조사 결과를 내놓지 못했다. 또한, 설령 나폴레옹의 가스실 학살이 사실이라 한들, 그것이 10만에 달하는 희생자를 냈다는 주장과 히틀러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리브의 주장은 인과관계가 밝혀지지 않은 비약이다. 때문에 이 주장은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 유대인을 수용소로 보내기 위한 운송수단은 철도였는데 가축을 싣는 화물칸에 말 그대로 가축수송과 같이 운송했다. 그 와중에 나치가 정식으로 열차표를 팔아서 철도운임비를 뜯어낸건 덤.
- 아트 슈피겔만의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는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인 자신의 아버지 블라덱 슈피겔만과 전후 세대인 그 아들(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충격적인 실화가 나오는데 전쟁이 끝난 후 유대인들이 수용소에서 해방되었는데도 유대인 학살이 계속되었다. 그 이유는 나치는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보내면서 귀금속과 돈, 돈될 만한 물건들은 나치가 갖고, 가질 수 없는 토지나 집, 공장은 폴란드인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전쟁이 끝나면서 유대인들이 돌아오자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이 차지한 집과 토지를 돌려주기 싫었던 폴란드인들은 돌아온 유대인을 죽이거나 추방시켰다. 작중 나오는 대사가 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 "이런 꼴을 당하려고 그 지옥을 빠져 나온 거죠." 이런 일들은 전쟁이 끝난지 1년이 지나서야 폴란드가 안정을 찾자 중단되었다. 다큐멘터리 "아우슈비츠"에서는 살아돌아온 유대인이 고향에 있는 자기 집을 되찾으려고 하자 그 유대인의 집을 차지하고 있던 새 주인은 그 집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고 보물을 찾기 위해 그 집을 철거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이런 일들은 폴란드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에 지배당하거나 협력했던 모든 국가들에서 있었다.
- 탈출, 혹은 연합군에 의해 수용소가 해방되자 굶주려 있던 유대인들은 연합군이나 민간인들이 주는 음식을 먹다가 토사곽란으로 사망하는 경우도 많았다. 오랫동안 못먹어 작아져 있던 위장이 갑자기 많은 음식을 섭취하게 되니까 놀란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고칼로리 음식을 먹이기보다는 죽이나 수프같은 몸이 소화하기 유동식을 먹인 다음에 기운을 차리게 만드는것이 정석이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도 나치의 만행에 분노한 이지 중대원들이 유대인들에게 독일 민간인들에게서 징발한 빵과 치즈를 나눠주다 군의관에게 제지받는 장면이 있다. 그나마 서방 연합군은 이 정도였지만 의료체계 및 수준이 뒤떨어지는데다 작전 환경 특성상 기름이 매우 많은 전투식량을 보급받았던 소련군은 유대인들에게 먹을 것을 지급했다가 유대인들이 그걸 먹고 죽어서 당황했다는 기록이 간간히 있다. 대숙청으로 굴라크에 끌려갔었던 소련군들마저도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보고 경악했다. 소련의 굴라크는 가혹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합리적인 면은 있었다. 그러나 나치는 "수용소=사형장"이라는 공식이 적용되어 소련보다 더 비인간적으로 운영되었다.
- 1944년 7월 소련이 마이다네크 절멸수용소를 점령하면서 처음으로 홀로코스트의 실상을 알게되었다. 이런 학살극을 보고 소련은 놀라서 별도의 조사위원회를 꾸려서 조사했고, 모든 자료를 기록하고 영상으로 만들어서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소련과는 별개로 1943년에는 폴란드 국내군 요원으로 아우슈비츠를 탈출한 비톨트 필레츠키가 아우슈비츠에 대한 정보가 담긴 비톨트 보고서를 제출했고, 1944년엔 아우슈비츠를 탈출해 스위스에 도착한 슬로바키아 유대인들[20] 이 헝가리 유대인 기자 죄르지 만들[21] 를 통해 아우슈비츠의 실상을 알리기도 했다. 의외로 서방 측에선 보도가 소련보다 늦었는데, 너무 어마어마한 내용이라 연합군의 지원을 더욱 요구하려는 프로파간다 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이었고, 서방 연합군이 실상을 알게 된 것은 해를 넘겨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해서, 오드루스 수용소와 부헨발트 수용소에 도달하게 되면서였다. 연합군도 이런 참극에 놀랐고, 사령관들이었던 아이젠하워, 패튼, 브래들리는 그걸 믿지 못해서 오드루스 수용소를 직접 보러 방문하기도 했다.[22] 그 보고가 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된 연합군은 기자들에게도 이를 보게하고, 대대적으로 보도하게 했다.
- 홀로코스트로 인해 아르헨티나가 헌법을 개정했다. 아르헨티나 정부에서는 홀로코스트를 피해 도주한 유대인을 보호하기 위해서 아르헨티나 국적은 한 번 취득하면 영원히 포기를 못하도록 헌법을 개정했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아르헨티나 정부는 자국으로 향한 유대인들에게 자국 국적을 준 뒤 철저히 보호했다.
- 홀로코스트의 최고령 생존자인 앨리스 헤르츠좀머 씨가 2014년 2월 24일에 11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 앞서 언급된 것처럼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는 유대인뿐만이 아니다. 동성애자, 집시, 공산주의자, 여호와의 증인, 장애인들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특히 집시들은 '포라이모스(Porajmos)'라는 단어가 있을 정도로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로 유명한데, 적어도 80만 이상이 죽거나 이로 인해 유럽내 집시 인구가 소수민족 중에서도 존재감이 미미한 수준으로 줄었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로 많다. 다만 집시들은 유대인과 다르게 홀로코스트가 아니라 국방군 등에 의한 무자비 학살의 대상으로 희생당한 사람도 많고, 정확한 기록이 부족하여 사망자수가 유대인보다 훨씬 부정확하다. 그래도 많은 피해자가 발생한 것은 사실이고 1944년 8월 2일 하루에만 4,000여 명의 집시들이 학살됐다. 지금도 살아남은 집시들은 '집시들의 날'을 제정해서 이들의 희생을 추모한다. 하지만 홀로코스트 희생에 대한 동정여론은 모두 유대인들에게 돌아갔고, 독일과 스위스의 배상금은 유대인 희생자도 아닌 시오니즘 단체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건국비용으로 소모되었다.[23]
- 동성애자들도 마찬가지로, 희생자들은 5,000명에서 15,000명 사이로 추정되고 있다. 주로 게이들이 많이 학살되었다.[24] 전후 배상도 가장 차별받은 케이스였는데, 당시 동성애자들에 대한 유럽, 아니 세계의 사회적 시선은 그야말로 벌레 보듯한 시선이었기 때문이다(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한 영국의 앨런 튜링도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화학적 거세를 받았을 정도다.). 1960년대 후반에야 동, 서독에서 관련법이 제정되었다. 나치는 이들에게 분홍색 역삼각형 문양을 붙였는데, 이것을 뒤집은 분홍색 삼각형은 핑크 트라이앵글(Pink Triangle)이라고 하면서 게이 인권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 대량 학살이야 인류 역사상 흔히 일어난 일이었지만, 수백만 명을 조직적으로 학살했다는 사실은 전세계에 충격을 주었고,[25] 영화와 미디어 사업을 꽉 쥐고 있는 게 유대인들이었던 만큼 2차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소재로 나왔다. 하지만 중동에서는 요새국가화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탄압이 점점 심해지는 데다가 해외의 유대계들도 이에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짓을 터뜨려서, "지금의 이스라엘이 과거 나치랑 다를 바가 뭐냐."라는 비난의 소리가 나올 정도이다. 덕분에 홀로코스트는 부정하지는 않더라도 "불쌍한 유대인"이라는 이미지는 날아가버려서 홀로코스트 관련 영화가 나오면 호불호가 갈리는 등 예전만한 평가를 못 받는다. 대표적인 예가 디파이언스와 1943년 유대인 게토 봉기를 다룬 영화 업라이징.[26]
- 사실 홀로코스트에 앞서 벌어진 멸절 학살의 시초로 보는 게 있으니 바로 아르메니아 대학살이다. 1915~1918년 사이에 오스만 제국에서 아르메니아 및 아시리아인, 아랍 무슬림들을 절멸하려는 계획을 잡아 150만 가량 아르메니아인들이나 60만 이상 아시리아인들과 아랍인들이 마구잡이로 학살당했다. 하지만, 철저하게 잊혀졌고 1933년 히틀러는 연설에서 지금 아르메니아 학살을 기억이나 하냐고 홀로코스트도 얼마든지 넘어잘 수 있다고 주장할 정도. 결국 이 학살은 1965년에서야 우루과이가 인정했고 세월이 지나 1990년대에 오면서 아르메니아가 독립하면서 비로소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얄궂게도 아르메니아와 사이가 안 좋은 이스라엘이 이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 게다가, 아르메니아인 학살로만 인식되어 아랍권 무슬림 학살은 넘어가냐고 분노하고 2020년 아제르바이잔과 전쟁을 벌이던 아르메니아에 대하여 아랍권과 이스라엘의 외면 및 이스라엘의 아제르바이잔 강력지원 등이 곁들어 아르메니아가 패하고 말았다.
- '정말 600만이 죽었나'라는 책에선 실제론 이 수치가 매우 부풀려졌다고 주장했다. 최대로 추산해봐야 40만이 넘지 않는다고 하는데…문제는 이거 저자가 영국민족전선(British National Front)의 부의장과 당 기관지 편집장을 지냈던 사람이라는 것. 이 영국민족전선은 쉽게 말해서 영국의 네오나치들이다. 정당은 백인만 가입할 수 있고, 정책도 백인을 제외한 사람들의 이민을 금지한다는 등 극우 파시스트에 인종차별 성향을 보인다. 당연히 이 책에도 객관적인 시각따윈 없고, 그 어떤 역사학자도 그들의 주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 다만 학살자 수가 부풀려져 있다는 주장이 위에 네오 나치 같은 또라이가 아닌 이들도 제기한 사항이다. 이를테면 1950년대 이스라엘에서도 200~400만 정도로 추정했다는 것. 그런데 학살자 수를 더 늘려서 배상금을 더 받았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한 사람은 바로 유대인이자 조부모가 아유수비츠에서 학살당한 노르만 핀켈슈타인이다. 당연히 나치에 대해서는 이를 갈고 있으며 학살극의 존재를 분명히 인정한다. 다만 이스라엘이 홀로코스트를 돈벌기 사업으로 쓰며 피해자 상당수에게 돈을 안 주며 엉뚱한 사람이 가로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핀켈스타인은 <홀로코스트 산업>이라는 책자로 피해 보상금을 일부 시오니즘 극단주의자들 배를 채우게 했다고 비난하며 나아가 팔레스타인에서 나치가 하는 짓을 유대인이 벌인다고 비난하고 있다. 놈 촘스키 또한 유대인이지만 그도 1950년대 200~400만이 갑자기 수가 늘었다면서 돈 더 달라고 하곤 그걸로 이스라엘 건국과 일부만 배를 채운 더러운 보상금이 되었다고 비난하고 있다. 실제로 2010년대에 이스라엘은 학살 피해자가 더 있다고 주장하며 돈 더달라고 했지만 이번에는 독일이 그동안 준 돈은 뭐냐며 이번에는 안 준다고 맞서고 있고 노엄 촘스키도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산업이라고 비난했다.
- 2015년 10월 21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홀로코스트는 팔레스타인이 히틀러에게 사주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발언하여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당시 팔레스타인 인사인 하지 아민 알 후세이니가 친나치 활동을 벌인 것은 사실이지만 네타냐후는 아예 대놓고 팔레스타인 때문에 유대인 학살이 발생했다고 주장해 버린 것.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냥 묻혀졌다. 미국에서도 이렇더라 보도하고 그랬냐? 넘어갔으며 극단적인 일부 유대인들만 옹호했다. 놈 촘스키는 "아랍 모두가 나치를 지지했다고 늘려서 엉터리 주장해라"고 비난했다.
- 홀로코스트 여파는 폴란드의 민족 구성을 완전히 바꿔 놓을 정도였다. 폴란드는 홀로코스트가 일어나기 직전만 하더라도 유대인이 약 3백만 명 가량 거주하여 유대인 비율이 상당히 높은 나라였다. 그러나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일찍 나치 점령지가 되었고, 대규모 수용소를 건립하는 등 가장 혹독하게 학살이 이루어지면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수용소의 죽거나 외국으로 도피했기 때문에 종전 직후에는 이전의 1%인 3만 명조차 남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현재 폴란드는 인구의 대부분이 폴란드계이며 유대인은 극소수인종이 되었다.[27]
- 이러한 유대인 학살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명백한 범죄행위이지만, 그것이 과장됨과 함께 잘 알려지지 않은 찜찜한 진실 또한 존재한다. 우선, 독일은 유대인 학살에 대해 애도하는 모습을 많이 보인 방면, 제1차 세계대전 이전 독일 제2제국이 식민지에서 저지른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이나 마지마지 운동 당시의 초토화 작전에 관해서는 2010년대까지 '미안하기는 한데 배상이나 공식적 사과 같은 건 좀 그런데...' 식의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현재 이스라엘과 유대인이 상대적으로 국제 사회에 영향력이 크다는 점(반대로 오늘날의 나미비아와 탄자니아가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덜하고 저개발국인 점)과, 유대인 또한 백인인 반면 중남아프리카에는 흑인이 많은 점을 고려하면, 이 또한 일종의 국가적/인종적 차별이 아닌가, 또한 오늘날 이스라엘이 저개발국이거나 유대인의 영향력이 오늘날처럼 막강하지 않았으면 독일이 진정한 사과를 했을까 의심스러운 면이 있다는 시선도 있지만 독일이 자신들이 거의 전멸시킨 집시들의 보호에 유럽 국가중 제일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는 점이나 체코 침공날이나 2차대전 발발일인 9월1일과 종전기념일날 폴란드와 체코 그리고 벨기에 러시아 등이 추모를 하는 것을 보아 앞선 시선에 대한 반론이 강한 편이다. 물론 이런 독일의 모습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을 위한 가면이라고 비난하는 시선이 가장 큰 피해를 본 동유럽에서 강하게 있다는 것도 유념해야 한다.
- 연합군의 전쟁 중 벌인 범죄나 다른 독재자들의 학살을 빌미로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물타기 하려는 자들도 있다. 아니, 꽤나 많다. 하지만 여타 독재정권에 의한 희생자는 그들이 직접적으로 지시한 학살 또한 정치적인 의미의 학살로, 자신의 체제에 반하는 자나 또는정적이라는 '계층'또는 '정치집단'을 타깃으로 했다. 따라서 이는 사실 역사적으로 계층 간의 반목이나 정치적인 대립이 발생했을 시에 우발적으로, 또는 계획적으로 숱하게 일어났던 학살들과 본질적으로 유사하다. 이러한 학살은 보통 대립 상황이 수그러질 시 중단되었다. 그러나 나치의 경우 어느 한 인종 자체를 유전적으로 열등하다는 이유만으로 태생적인 '존재 가치'를 부정했다는 점에서 그 성격이 전무후무하다. 강도살인과 묻지마 살인을 다르게 취급하는 것처럼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다른 학살들과는 다르게 취급하는 이유는 바로 이 학살의 동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치의 홀로코스트는 타국을 침공하면서 이루어졌지만, 결정적으로 본국에 살던, 독일 국적을 가졌고 자신을 스스로 독일인으로 여기던 유대인들까지 학살한 사례는 나치가 유일하다.
- 네오 나치들이나 영국과 윈스턴 처칠에 대한 반감을 가진 좌익들에의해 벵골 대기근이 자주 거론되며 물타기가 이루어지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완전히 왜곡된 것이다. 보통 '독일로부터 영국을 구한 윈스턴 처칠은 세계대전 당시, 미얀마를 점령한 일본의 인도 침략을 우려해 벵골 지역의 쌀을 모조리 뺏어가고, 수백만의 벵골 지역의 주민을 굶겨 죽임으로써 학살한 적이 있다. 심지어 인도가 영국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처칠은 이를 묵살하고, 미국과 호주가 벵골 지역에 대해 도움의 손길을 뻗었으나 처칠은 상륙 불허로 대답해 무려 700만의 인구를 굶겨 죽인 적이 있다.'라는 말들이 나도는데,[28] 이것은 악의적인 왜곡이다. 당시 대기근이 일어난 1943년은 일본 해군이 인도양과 동남아시아 해역에서 전력을 완전히 상실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안전한 수송루트가 보장되지 않은 상태였고 일본군의 버마 공세로 인해 육지 수송로도 위험한 상황이었다.[29] 심지어 42년에는 작물 병충해와 태풍이 같이 발생한 최악의 자연재해까지 겹쳤다. 영국 정부도 식민지 인도를 상실할 수 없었기 때문에 43년 9월부터 기아를 막으려고 했으나 탁상행정이었고 이렇게 지원을 온 식량들도 지방 지주와 상인들의 매점매석으로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전통적으로 지방분권적이던 인도의 지방관들이나 인도 제국의 제후국들 사이에 소속감 따위는 없었기에[30] 원조 물자를 공평하게 분배하기보다는 제 하나 살기 위해 식량을 마구 빼돌린 것. 심지어 위에서 식량 수송을 거부했다는 말과 다르게 처칠은 루즈벨트에게 보낸 서신에서 호주를 통한 물자지원을 요청했고 전선에 투입되는 물자를 줄여서 기아 대책을 추진했지만 부족해서 미국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출처] 홀로코스트처럼 특정 인종의 말살을 위해서 국가적인 역량을 총동원하여 의도적으로 대기근을 발생시켰다고 볼 여지는 전혀 없다. 게다가 공식적인 기록에 나타나는 300만 내외의 희생자를 유대인 학살 피해자 수보다 많은 700만으로 부풀리는 것에서도 악의적인 의도가 엿보인다.
- 유명한 프로레슬링 매니저 폴 헤이먼의 모친이 생존자들 중 한명이다.
- 2020년에 네덜란드가 홀로코스트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였다.#
- 대한민국 출입국관리법 제11조 1항에 따르면 홀로코스트 가담자는 대한민국 입국이 금지될 수 있다.[31] 일본 정부와 동맹 관계에 있던 정부의 지시를 받아 인종, 민족을 이유로 사람을 학살, 학대하는 데 관여한 사람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 홀로코스트가 벌어지던 당시 이런 유대인 절멸정책에 대해 대놓고 반대는 못해도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던 독일인들이 꽤 있었다.[32] 그런데 사실 그들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된 이유는 유대인이 불쌍하다거나 인권에 대한 것이 아니라[33] 다름아닌 유대인들의 보복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연합군의 보복을 두려워한 것인데, 당시 나치 독일의 군인과 민간인들 다수가 영국과 미국은 유대인 자본가들에게, 소련은 유대인 공산당원에게[34] 지배당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35] 또한 홀로코스트의 강도에 대해서도 견해 차이가 있었는데 한 독일군 포로는 전쟁 당시 아버지와의 대화를 회상하면서 자신은 독일 내 유대인들을 추방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것은 동의하지만,[36] 이렇게까지 잔혹하게 죽일 줄은[37][38] 몰랐다고 말했다. 이에 아버지는 이런 짓을 계속 벌이면 언젠가는 보복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14. 관련 어록[편집]
14.1. 가해자[편집]
유대인들은 하나의 인종인 것은 틀림없으나 인간은 아니다.
인종적 오염을 거부하는 국가가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 나의 투쟁
... Und wenn die jüdischen Zeitungen heute noch glauben, durch versteckte Drohungen die nationalsozialiste Bewegung einschüchtern zu können, wenn sie heute glauben, unsere Notverordnungen umgehen zu dürfen, sie sollen sich hüten! Einmal wird unsere Geduld zu Ende sein, und dann wird den Juden das freche Lügenmaul gestopft werden.
... 그리고 아직도 유대 언론들이 국가사회주의 운동을 위협할 수 있고 우리의 방어 조치를 회피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들은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의 인내심도 바닥날 것이고, 유대인들의 거짓되고 건방진 주둥이를 닥치게 할 것입니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 (1933년 2월 10일 포츠담 스포츠궁전 나치당 집회 개회사)
당신에게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1천만 명의 유대인, 아니 세상의, 지구상의 모든 유대인을 죽여야만 나와 동료들은 만족했을 것입니다. 그랬어야만 나와 내 동료들이 적을 절멸했다고 말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난 단순하게 명령을 수행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난 그저 멍청한 놈에 불과했을 겁니다. 나는 나치 당원들과 똑같이 생각했으며, 함께 지구상에서 유대인을 지워버리고 싶었던 이상주의자였습니다.
총통 각하께서는 유대인의 물리적인 말살을 명하셨다.
강제수용소가 우리에게 안 좋은 인상을 심어준 것은 확실하다.
It is certain that concentration camps had a bad reputation with us.
오늘날 아돌프 히틀러 최고사령부 독일군이 벌이고 있는 전쟁은 엄청난 개혁의 전쟁이다. 그것은 프랑스 혁명 사상의 세계를 극복할 뿐만 아니라,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견제 없이 발전할 수 있었던,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의 유대인과 그들의 악당들의 인종 감염 세균을 모두 직접적으로 근절하는 것이다. 2000년 동안 유럽 국가들이 해결하지 못한 유대인 문제는 이제 독일과 전유럽을 위한 국가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해결될 것이다.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1941년 3월 28일 라디오 연설)#
전 제가 한 행동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전 의도적으로 누군가를 해치려고 한 적이 없어요. 하지만... 저는 그곳에 있었지요.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의 소장, 프란츠 슈탕글
아우에: "우리가 늘 옳았던 건 아닌 거 같습니다. 동부에서 유대인을 집단으로 죽였을 때 말이에요."
슈나이더: "그건 분명 잘못이었어요. 아니, 잘못까지는 아니더라도 외교적으로 좋지 않았어요. 나중에 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아우에: "우리가 탄탄한 기반을 닦은 후에 말이죠."
슈나이더: "그 일은 나중을 위해 남겨 둘 수도 있었어요. 유대인은 아직도 영향력이 세니까요. 특히 미국에서요."
두 독일군 장교가 1944년 8월 7일 포로수용소에서 나눈 대화를 영국군이 도청한 내용.
유대인을 쫓아내자고 하면 저는 제일 먼저 참여합니다. 기꺼이 동참하지요. 그들을 독일 바깥으로 몰아낼겁니다! 하지만 왜 이렇게 때려죽이는 거지요? 전쟁이 끝난 뒤에도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땐 이렇게 말할 수 있지요. "자, 이제 우리가 권력과 힘을 가졌고 전쟁에서 이겼으니 이렇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누가 영국을 지배하는지 알죠? 유대인이에요. 미국은 누가 지배하죠? 유대인이에요. 그리고 볼셰비즘, 그것이야말로 유대교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죠.
에르빈 외스팅 대령, 마인츠핀텐 공군 기지 사령관. 1945년 4월 포로수용소에서 한 말. 위의 대화와 함께 당시 홀로코스트에 '반대'하던 독일인들의 심리가 어떠했는지를 드러내고 있다.
미니오이어: 그들은 내의만 남기고 옷을 몽땅 벗었고, 여자들도 속옷만 빼고 옷을 벗었어요. 그 다음에 게슈타포가 총질을 했어요. 유대인은 모조리 처형되었습니다.
하르텔트: 속옷만 입고요?
미니오이어: 네.
(...)
하르텔트: 기관총으로 쐈나요?
미니오이어: 기관단총으로도요. (...) 우리는 어떤 예쁘장한 여자가 총살당할 때도 거기 있었어요.
하르텔트: 애석하군요.
미니오이어: 무자비하죠! 그녀는 자신이 총살당할 걸 알고 있었죠.(...)
하르텔트: 그리로 갈 때 옷을 입고 있었어요?
미니오이어: 네, 아주 예쁘게 옷을 입었어요. 근사한 여자였어요.
(...)
하르텔트: 그 여자와 물론 빠구리도 떴겠지요?
미니오이어: 빠구리도 떴죠. 하지만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죠. 그건 늘 있는 일이에요. 일이 지나치면 안되니까요[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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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12월 영국군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크릭스마리네 기술하사 헬무트 하르텔트와 이병 호르스트 미니오이어의 대화 중 일부. 여기서 나오는 학살은 리투아니아 빌뉴스에서 벌어진 유대인 학살이다. 죙케 나이첼과 하랄트 벨처의 "나치의 병사들"(김태희 역, 민음사, 2015)에서 발췌.
14.2. 피해자[편집]
여자들과 노인들이 거리에서 깡패들에게 두들겨 맞았다.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우리에겐 아무 힘이 없고, 길거리에서 우리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만큼 우리는 고독하다. 우리는 너무나 약하다.
폴란드 유대인의 회상
“캠프에서의 첫날 밤은 절대로 잊지 못한다. 나의 인생을 긴 밤으로 물들여버린 그날, 일곱 번 저주하고 일곱 번 회개했다...나의 신을 죽이고, 나의 영혼을 짓밟고, 내 꿈을 먼지로 만들어버린 그날 밤을 잊지 못한다. 절대로 이것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 설령 내가 신만큼 오래 산다고 해도.”
난 내 눈을 의심했다. 20세기에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치도 못했다. 마치 중세를 보는 듯 했다. (중략) 우리 젊은 유대인들은 비와 추위에 떨며 나라를 지켰다. 이러한 일을 역겨워할 전우들은 없는가? 우린 길가를 걸으며 과거에 함께 좋은 일들을 많이 했던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이제 만족스런 미소를 숨김없이 얼굴에 드러냈다. (중략) 이런 변화는 불과 몇 시간 안에 일어났다. 지금까지 내가 사랑하고 아껴 온 이 나라와 사람들이 갑자기 적으로 돌변했다. 난 더 이상 독일인이 아니었다. 아니, 최소한 독일인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몇 시간만에 이루어진 것이 아닐 것이다. 내가 갑자기 깨달은 것일 뿐이다. 한때나마 이들(독일인)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적의를 감춰왔던 이들을 신뢰한 것이 부끄러웠다. 순간 이 거리, 아니 전 도시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 때 기분은 형언하기가 어렵다.
에드빈 린다우[43]
[44]
구덩이가 커서 마치 여기 파인즈 호텔[45]
의 수영장 같았지. 그리곤 헝가리 유대인들을[46] 실은 열차가 계속 도착했단다. 그래도 이 구덩이에 쳐 넣어지기 전에 가스실에서 끝을 본 사람은 운이 좋은 편이었어. 다른 사람들은 살아서 무덤 속으로 뛰어들었어야 했으니까. 거기서 일하던 죄수들은 산 사람, 죽은 사람 가릴 것 없이 휘발유를 퍼부었지. 그리고 불타는 시체에서 나온 기름을 다시 퍼부어 가지고 더 잘 타게 했단다.
이미 일어난 사건은 바꿀 수 없다. 단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역사를 통해 배우고 무고한 사람들을 박해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깨닫는 것이다.
14.3. 목격자[편집]
라인강을 건너 독일에 들어서자 갑자기 중세시대에 온 것 같았다. 나는 20세기 대명천지에 그 잔혹한 범죄들이 어떻게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어느 미군 병사의 증언[47]
[48]
근처에 수용소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죠. 하지만, 너무나도 잘 위장해놔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건 전혀 몰랐어요. 저도 저기 바로 밑에 마을에 살고 있었지만 하나도 몰랐거든요.
우리는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아서 무덤을 파게 했다. 그 독일인들도 모두 거기에 묻어버리고 싶었지만 억지로 참았다. 바로 코앞에 있었는데도 자기들은 정말 모르는 일이라고 빡빡 우기길래 나는 당신들도 똑같은 살인마라고 소리쳐줬다.
14.4. 관련인[편집]
미친 생각이라는건 알지만 때때로 난 내가 부모님과 함께 아우슈비츠에 같이 가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실제로 알아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그분들보다 편안한 삶을 살았다는 일종의 죄책감 같은 거겠지. 내 칠흑같은 꿈보다 더 비참했던 현실을 재구성하려는게 얼토당케 여겨지는 때가 많아. 그것도 만화로 말이야! 내가 소화해낼 수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어쩐지 다 잊어버려야할 것 같아. 내가 결코 이해할 수도, 형상화할 수도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것 같아. 내 말은, 현실이 만화로 하기에는 너무 복잡하다는 거야... 너무 많은게 누락되고 왜곡되는거지.
15. 홀로코스트를 다룬 매체[편집]

16. 관련 문서[편집]
- 여호와의 증인/역사
- T4 작전[51]
- 광기
- 나치 - 히틀러
- 니콜라스 윈턴
- 독일의 전쟁범죄
- 드레퓌스 사건
- 명령을 따랐을 뿐
- 반제 회의
- 수정의 밤
- 시오니즘
- 집시
- 아시안 홀로코스트
- 우생학
- 우스타샤[52]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요제프 멩겔레
- 의미치료[53]
- 이스라엘
- 이르마 그레제
- 일제 코흐
- 파시즘 - 군국주의
- 툴레 협회
- 하인리히 힘러
- 홀로코스트 부인론
-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 아돌프 아이히만
- 슈츠슈타펠
- 국방군 무오설
- 게토
- 유대인 경찰
- 카포
- 엘리 비젤[54]
- 오스카 쉰들러
- 허펑산
- 스기하라 지우네
17. 둘러보기[편집]
가. 일본 정부
나. 일본 정부와 동맹 관계에 있던 정부
다. 일본 정부의 우월한 힘이 미치던 정부[32] 내용출처 죙케 나이첼, 하랄트 벨처, 《나치의 병사들》, 민음사.[33] 당시 유럽의 반유대주의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당장 출처인 책에 나오는 내용 중에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갇힌 독일군들의 대화들이 적혀있는데, 그 중 하나에서 독일군 포로들은 히틀러의 무능함을 비판하면서 그가 잘한 일은 유대인 정책밖에 없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34] 독일은 공산주의를 창시한 카를 마르크스가 유대인이라는 점을 활용하여 소련을 유대볼셰비키즘이라고 부르며 독일군을 아시안 몽골로이드와 유대 볼셰비키즘으로 부터 인류에서 가장 우월한 아리아인의 문화를 지키는 군대라고 포장했다.[35] 《나치의 병사들》에 나온 어느 두 독일군 장교 포로들의 대화를 보면 동유럽에서 벌인 유대인 학살을 두고 전쟁에서 승리한 다음에 해도 되는 일을 너무 성급하게 저질렀다며 외교적인 불이익이 클 거라고 걱정하는 말이 나온다. 특히 유대인의 영향력이 강한 미국의 개입을 우려하고있다.[36] 나치집권 시기 카톨릭 주교들이 주도하는 T-4 프로그램 반대 시위가 자주 일어났지만 유대인 추방에 반대하는 시위는 없었다.[37] 수용소를 얘기하는게 아니라, 동유럽 점령지에서 무장친위대가 벌인 유대인 민간인 학살을 두고 얘기한 것이다.[38] 단 독일의 일반인들은 홀로코스트가 어떻게 이뤄지는가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말살수용소 현장을 직접 보라고 미군이 독일인들을 끌고 왔을 때 자기들은 몰랐다고 변명한 사람들이 많았던 건 유대인을 거기 끌고 가서 강제노역시키다 필요없어지거나 저항하면 죽인다는 걸 몰랐다는 의미가 아니라, 처음부터 분류기준에 따라 노약자와 아이들을 가스실로 보내고 나머지도 처음부터 죽이는 걸 목적으로 노동력만 잠시 쥐어짜는 수준이었다는 걸 몰랐다는 의미이다. 나치는 유대인 수용소에 대해 겉으로는 강제노동수용소라고 선전했고, 학살도 SS가 주도하고 국방군은 외곽경비만 맡아서 자세한 실상은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나중에 많은 나치 전범들이 유대인 학살수용소에서 근무했음에도 자기는 자세한 건 모른다고 말한 게 이런 이유 때문이다.[39] 히틀러빠이기 이전에 극단적인 인종주의 선동가였던 율리우스 슈트라이허도 이 말을 한 바 있다. [40] 홀로코스트가 시행되게 한 반제 회의를 직접 주도한 나치 인사다.[41] 당시 나치 독일은 유대인을 인간 취급하지 않아 유대인 여성을 강간할 경우 '인종 오욕'죄로 처벌하였으나, 대부분의 독일군들은 강간한 후 유대인 여성을 죽이거나, 학살하기 전 다 벌거벗긴 상태에서 강간한 뒤에 '처리'하는 편법을 썼다. 이 때문에 유대인 학살을 주로 하던 친위대나 국방군 부대들의 경우 다른 부대에게 호색한이라는 놀림을 받기도 했다.[42] 생몰년: 1928 ~ 2016. 실제로 아우슈비츠 수용소 비극을 통해서 양친과 여동생과 사별하였던 아픔이 있으며 그 비극담을 통해서 '흑야(원제 : NIGHT)'와 '새벽(원제 : DAWN)'을 펴냈다. 국내에서는 가톨릭출판사에서 한국어 번역본으로 출간한 적이 있다. 그러나 시오니즘을 주장하며 팔레스타인인을 죽여야 한다느니 발언으로 결국 나치랑 비슷해졌다는 비난을 받았고 1987년 로널드 레이건이 서독을 방문하여 2차대전 참전군인 추모 묘지를 참배한 것을 나치에 대한 숭배라고 비난하다가 미국에서도 나치가 아니라 강제 징병당해 나가 싸워야하던 이들을 추모하는 묘지를 참배한 것을 나치라고 하다니? 아예 독일인 모두를 나치라고 다 죽이자고 할 거냐는 비난을 듣었다. 이러다보니 노벨평화상 수상이 잘못되었다고 비난도 많이 듣었다. 그런 가운데 2000년에는 버나드 메이도프의 사기로 수백억이 넘는 재산을 다 잃는 등 늘그막에 심각하게 고생하다가 2016년 7월 2일 병사했다.[43] 출처 : Germans No More: Accounts of Jewish Everyday Life, 1933-1938[44] 서프로이센(West Prussia) 지역에서 가게를 운영했던 유대인이다. 훈장이 있었다는 것을 볼 때 1차 대전 당시 공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되므로 당시 독일에 대한 배신감이 어떠했는가 짐작할 수 있다.[45] 홀로코스트로 인하여 지독한 구두쇠가 되어버린 1980년대의 블라덱 슈피겔만이 손놈 행각을 부리는 호텔을 의미한다.[46] 살러시 페렌츠의 집권 이후 30만에 달하는 헝가리 유대인들이 학살을 당한 것을 의미한다. 고로 이때의 증언은 홀로코스트의 말기였던 1944년 8월 이후에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47] 알기쉬운 세계 제 2차세계대전사 중.[48] 실제로 대부분의 학살 수용소는 독일 영토에 세워졌고, 그 외에 일부가 폴란드에 세워졌기에 외부에 알려지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으므로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설마 홀로코스트 같은 조직적 말살이 이뤄질 거라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조직적인 말살 시설이 있다는 것이 비밀이었을 뿐이고, 유대인을 끌고 가서 죽인다는 건 유럽인들은 대부분 알고 있었다.[49] 직접적인 수용소 관리는 친위대 병력들이 맡았지만 외곽 경비나 수송 작업에는 친위대 뿐만 아니라 국방군도 관여되어 있었다. 자세한 건 몰라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대략 짐작은 가능했을 것이다. 관련 서적들을 보면 "소각 연기가 마을 쪽에 나오지 않게 해 달라" 등의 민원 기록들이 남아 있으므로 쉬쉬하지만 다들 알 건 아는 상황임을 충분히 방증하고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유대인이라면 모조리 학살하는 것은 몰랐을 수 있다. 독가스용 재료인 치클론 B가 대량으로 수용소에 들어가는 걸 보고 소독약품을 반입하는 줄 알고 '수용소가 매우 위생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라고 나치는 지속적으로 선전하였으니 말이다. 당대 사람들도 '노동수용소 = 죽음' 이란 건 알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제 21기갑사단 대대장으로 복무한 한스 폰 루크의 회고에 따르면 여자친구의 아버지가 수용소로 끌려갔을때 게슈타포와 친위대의 연줄로 빼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손을 쓰는 모습이 나온다. 나치가 집권한 이후 게슈타포가 체포한 반체제 인사들이 수용소에서 반신불구가 되거나 아예 영영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에 당대 독일인들은 수용소에 들어가면 사실상 살아나오기 힘들다는 것까지는 매우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조직적으로 죽이는 건 몰랐을 수 있다.[50] 학살을 방조 내지는 동조했던 민간인들을 제3자인 미군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대목.[51] 홀로코스트를 맞먹을 정도로 장애인을 대상으로 잔인하게 죽인다.[52] 사실 이쪽도 나치에 빌붙었던 세력이니 간접적인 나치즘 홀로코스트라고 볼 수 있다.[53] 홀로코스트를 체험한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이 고안한 심리치료 기법이다.[54] 홀로코스트 생존자로 이에 관련된 많은 작품을 남겼다. 후에 노벨평화상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