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크 왕조
덤프버전 :
분류
1. 개요[편집]
잉글랜드의 역대 왕조 중 하나이자 플랜태저넷 왕조의 방계 가문.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이자 초대 요크 공작인 랭글리의 에드먼드에서부터 시작됐다. 총 3명의 잉글랜드 국왕을 배출.
2. 역사[편집]
2.1. 초창기[편집]
초대 요크 공작이자 케임브리지 백작인 랭글리의 에드먼드에게는 두 아들인 장남 노리치의 에드워드(Edward of Norwich)와 차남 코니스버러의 리처드(Richard of Conisburgh)가 있었다. 이중 장남 에드워드는 1402년에 요크 공작위를 계승하여 2대 요크 공작이 됐지만, 후계자조차 남기지 못하고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전사했다. 케임브리지 백작위를 계승받은 차남 리처드는 1415년에 반역죄로 헨리 5세에게 처형당했다. 그러나 케임브리지 백작 리처드는 앤 드 모티머(Anne de Mortimer)와[1] 결혼하여, 훗날 제3대 요크 공작이 되는 리처드라는 아들을 두었다.
요크의 리처드는 백부 에드워드의 요크 공작령과 아버지 리처드의 케임브리지 백작령을 상속받았으며, 또한 외삼촌인 5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드 모티머(어머니 앤 드 모티머의 형제)가 후사없이 사망하자 마치 백작령까지 상속받았다. 리처드의 외할아버지인 로저 드 모티머는 에드워드 3세의 3남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외손자로, 요크의 리처드는 부계와 모계 모두 플랜태저넷 왕조의 후손이었다. 따라서 모계 계승까지 인정한다면 리처드의 왕위계승권이 랭커스터 왕조에 비해, 앞선다고 해석할 수도 있어서 그는 랭커스터 왕조의 경계 대상이 되었다. 심지어 요크의 리처드는 초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외손녀인 세실리 네빌과 결혼하면서, 두 사람의 자식들은(에드워드 4세, 클라렌스 공작 조지, 리처드 3세) 랭커스터 왕조의 혈통까지 이어받게 되었다.
2.2. 장미 전쟁[편집]
2.2.1. 전쟁의 원인[편집]
헨리 6세의 왕비로 프랑스 출신인 앙주의 마거릿은 병약한 남편을 대신해 정치를 좌지우지하며 국정을 운영했다. 그 중에서도 마거릿은 영지, 작위, 왕위계승권까지 가진 요크 공작 리처드를 경계했고, 제2대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와 함께 요크 공작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결국 요크 가문과 보퍼트 가문의 사이는 험악해졌다. 헨리 6세가 병에 걸리자 요크 공작 리처드는 호국경(Lord Protector)의 자리에 올랐지만, 헨리 6세가 회복하자마자 보퍼트 가문에 의해 정권에서 밀려났다.
1460년에 요크 공작 리처드는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고 자신의 두 아들을 후계자로 삼았다. 10월에 요크 가문은 랭커스터파와의 노스햄튼 전투에서 승리해 헨리 6세를 생포했다. 하지만 12월에는 오히려 요크 공작 리처드와 그의 차남 에드먼드가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패배하고 처형당했다.
2.2.2. 여러 내분[편집]
요크 공작 리처드의 장남 에드워드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고, 워릭 백작 '킹메이커' 리처드 네빌의 지원을 받아 랭커스터파를 몰아붙혔다. 그리고 헨리 6세와 앙주의 마거릿이 북부에 있는 사이에, 타우튼 전투에서 랭커스터파의 세력을 괴멸시키고 에드워드 4세로 즉위했다. 그런데...
에드워드 4세가 프랑스 발루아 왕가와의 정략결혼 대신 부유한 미망인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하고[2] , 네빌 대신 우드빌 가문 사람들을 중용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한 번 왕권에 혼란이 왔다. 결국 워릭 백작 리처드는 에드워드 4세를 배신하고 랭커스터파의 영수인 앙주의 마거릿과 손을 잡아 1470년에 헨리 6세를 복위시켰다. 하지만 에드워드 4세는 누이의 남편인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에게 의탁하여 권토중래를 노리고, 결국 샤를로부터 지원군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1471년 다시 잉글랜드에 상륙한 에드워드 4세는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런던에 무혈입성했고, 바넷 전투에서 워릭 백작을 전사시키며 승리한 이후, 튜크스베리 전투에서도 랭커스터 왕조의 마지막 왕자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를 전사시키고 승리했다. 이후 헨리 6세 또한 런던탑에서 사망했는데, 랭커스터 가문의 후계자가 사망하면서 거리낄 것이 없어진 에드워드 4세가 죽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에드워드 4세가 사망할 때까지의 12년 동안 요크 왕조의 잉글랜드 지배는 흔들리지 않았다.
1483년에 에드워드 4세가 사망하고 왕위는 에드워드 4세의 어린 아들 에드워드 5세가 이어받았다. 하지만 에드워드 4세의 동생이자 에드워드 5세의 섭정이었던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는 형이 원래의 약혼자와 결혼하지 않았기에 두 아들은 사생아라는 논리를 내세우며 런던탑에 가두고 스스로 리처드 3세로 즉위했다.[3]
2.3. 튜더 왕조[편집]
한편, 랭커스터 지지파들은 제2대 리치먼드 백작 헨리 튜더를 중심으로 새로운 세력의 뼈대를 구축했다. 1483년의 쿠데타는 실패했지만, 1485년에 리처드 3세는 리치먼드 백작에게 보즈워스 전투에서 패배해 전사했다. 리치먼드 백작은 요크와 랭커스터의 화합의 상징으로 에드워드 4세의 장녀 엘리자베스를 왕비로 삼고 헨리 7세로 즉위해 튜더 왕조를 창건했다.
3. 가문원[편집]
3.1. 왕권 성립 이전 (요크 공작가)[편집]
- 랭글리의 에드먼드: 제1대 요크 공작, 에드워드 3세의 4남.
- 노리치의 에드워드: 제2대 요크 공작, 에드먼드의 장남. 아쟁쿠르 전투에서 전사.
- 코니스버러의 리처드: 제3대 케임브리지 백작, 에드먼드의 차남. 반역죄로 처형됨.
- 요크의 리처드: 제3대 요크 공작, 코니스버러의 리처드의 아들로 에드워드 4세와 리처드 3세의 아버지
- 요크의 에드워드: 요크의 리처드의 장남, 제4대 요크 공작
- 에드먼드 플랜태저넷: 요크의 리처드의 차남, 러틀랜드 백작.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아버지와 함께 사망.
- 조지 플랜태저넷: 요크의 리처드의 3남.
- 리처드 플랜태저넷: 요크의 리처드의 4남.
3.2. 왕권 성립 이후[편집]
3.2.1. 역대 국왕[편집]
3.2.2. 역대 왕비[편집]
3.2.3. 그 외[편집]
- 에드워드 4세 & 엘리자베스 우드빌 소생
- 조지 플랜태저넷 & 이사벨 네빌 소생
- 리처드 3세 소생
- 미들햄의 에드워드 - 요크 왕가의 마지막 프린스 오브 웨일즈.
- 글로스터의 존 - 사생아.
- 캐서린 - 사생아.
3.3. 계보[편집]
4. 보유 작위[편집]
- 잉글랜드 국왕
- 프랑스 국왕자칭
- 프린스 오브 웨일스
- 아일랜드의 군주
- 요크 공작
- 클라렌스 공작(Duke of Clarence): 에드워드 4세의 동생 조지의 작위
- 글로스터 공작(Duke of Gloucester): 에드워드 4세의 동생 리처드(훗날 리처드 3세)의 작위
- 캠브리지 백작(Earl of Cambridge)
- 마치 백작(Earl of March)
- 러틀랜드 백작(Earl of Rutland)
- 얼스터 백작(Earl of Ulster)
5. 여담[편집]
-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6세》와 《리처드 3세》는 요크 가문의 여러 에피소드를 다뤘다.
- 《얼음과 불의 노래》에 나오는 스타크 가문은 여기에서 따왔다.
- 바이올렛 에버가든 외전: 영원과 자동수기인형의 주요인물인 이자벨라 요크(에이미 버틀렛)의 가문 이름 역시 이 왕조에게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0 21:57:33에 나무위키 요크 왕조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외동딸 필리파의 친손녀이자, 4대 마치 백작 로저 드 모티머(Roger de Mortimer, 4th Earl of March)의 딸.[2] 프랑스 발루아 왕가와의 혼인은 리처드 네빌이 추진한 정략결혼이었으나, 에드워드 4세는 자신이 이미 우드빌과 결혼했다며 이를 거절했다. 자신에게 알리지도 않고 결혼한 상태였다는 것에 네빌은 모욕감을 느꼈다.[3] 이후 탑에 갇힌 두 왕자들은 실종됐다. 정황상 암살이 유력하다.[4] 남편이 앤 사후에 작위를 받게 됨으로 서레이 백작부인과 노퍽 공작부인 작위를 받지 못했다.[5] 헨리 7세와 결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