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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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더
Her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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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
Johann Gottfried Herder
출생
1744년 8월 25일
프로이센 왕국 모룽겐[1]
사망
1803년 12월 18일 (향년 59세)
신성 로마 제국 작센-바이마르 바이마르
국적
독일 파일:독일 국기.svg
모교
쾨니히스베르크 대학
직업
역사철학자, 작가

1. 개요
2. 생애
3. 사상
3.1. 역사철학
3.1.1. 개체성
3.1.2. 역사의 진보적 발전
3.1.3. 인간성
3.2. 인식론
4. 평가
5. 어록
6. 여담



1. 개요[편집]


독일철학자, 비평가, 작가. 질풍노도 문학 운동의 주역이자, 역사주의의 창시자. 민족의 상대적 개체성을 주장하면서도 역사 발전은 보편적 인간성을 최종 목표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여, 괴테, 셸링, 슐레겔, 헤겔 등 동시대의 수많은 철학자와 문학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2]

2. 생애[편집]


모룽겐이라는 작은 마을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헤르더는 어릴 때부터 문학, 신학, 철학에 관심이 많았다. 열여덟이 되던 1762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 입학하여 칸트의 제자되면서부터 지리학, 인류학에 대한 비판적 연구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또한 칸트의 친구 하만을 통해서 시와 평론을 본격적으로 접하고 문학에서 감정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해 여름 카톨릭 학교 보조 교사로 리가에 간 그는 이곳에서 목사이자 교사로서 활동한다. 그러다 스물셋에 첫 저서 《새로운 독일 문학에 대한 단편》을 익명으로 출간한다. 이후 사회적 불만족과 왕성한 상상력으로 이제까지 간과해왔던 세계를 체험하기 위해 리가를 떠난다.

파리와 독일의 여러 도시를 여행하면서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생각하고, 교육, 철학, 문학, 종교의 미래를 위한 거대한 윤곽을 그려본다. 그리고 인류 역사의 기원, 진행 과정, 목표 등을 연구하기로 결심한다. 스트라스부르에선 젊은 괴테를 만났으며, 감정을 강조한 헤르더의 문학 비평은 이후 괴테의 작품활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 여행을 마치고 독일 뷔케부르크에 머문 그는 민족 문학과 관련된 새로운 문학 운동을 격려하고, 논쟁적인 종교 저작과 철학 저작들을 발표한다. 이때의 활동은 질풍노도라고 불리는 독일 문학의 부흥을 알리는 운동의 서막이라 평가된다. 이후 괴테의 도움으로 바이마르에 정착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는 모든 국가와 시대가 발견할 수 있는 인간성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면서 문학의 도덕적 가치를 강조한다. 동시에 칸트의 정신 과정의 분석적 분리는 물론 종교에 대한 위협, 그리고 인간은 근본적으로 악하다는 칸트의 견해를 비판한다. 이에 분노한 칸트의 제자들은 그에게 적대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말년에 그가 인기가 없이 고립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헤르더의 역사철학, 중세에 대한 관심, 동양학, 언어에 대한 관심, 비교 문학 연구, 본능에 대한 강조, 민요 예찬, 비판적 방법 등은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특히 독일 관념론과 낭만주의에 속하는 횔덜린, 장 파울, 노발리스, 슐레겔, 셸링, 헤겔, 슐라이어마허 등 많은 철학자, 문학자들에게 영향을 줘서 독일의 철학 사상과 정치 사상의 기본적인 틀을 바꾸어 놓았다. 이러한 공로로 1802년 바이에른 제국의회에서 귀족으로 선출[3]되었으나 1년 뒤 1803년 5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3. 사상[편집]



3.1. 역사철학[편집]



3.1.1. 개체성[편집]


이집트인을 제대로 보려면 이들을 오로지 그들의 위치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특히 유럽의 관점에서 그들을 바라보게 되면 지극히 일그러진 얼굴을 보게 된다.


모든 구슬이 각기 중심점을 지니고 있듯이 모든 민족은 자체에 행복의 중심을 지니고 있다.[4]

헤르더는 볼테르적인 계몽주의 철학이 각 시대가 제각각 문화적 다양성을 이루고 있음을 무시하고, 일반적인 것, 즉 보편성만을 주장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세계를 아우르는 이념, 즉 보편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민족마다 특유의 개체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자연의 계획에 의한 보편적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고찰한 칸트의 역사관은 모든 시대와 민족을 하나의 보편적인 개념으로 통틀어 평가하는 위험성을 초래한다고 헤르더는 경고한다. 서로 다른 시대의 각각의 사람들은 서로 같을 수가 없으며, 달리 생각하고 다르게 느끼기 때문에 그 개별적인 가치를 존중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시대와 지역의 고유한 가치를 어느 시대에나 적용되는 보편적인 척도로 평가해선 안되며, 그 지역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 지역의 역사를 살펴야 된다는 '역사 상대주의'를 헤르더는 주장한다. 여기서 '개체성을 지닌 민족'들을 나누는 것은 '인종'이 아니라 '언어'이다.

3.1.2. 역사의 진보적 발전[편집]


계몽주의자들은 객관적 이성과 교육을 통해 인간의 역사가 발전된다고 주장한다. 반면 헤르더의 '진보적 발전'이란, 인간 존재가 자신의 목적을 향해 노력함으로써 역사는 진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만, 그것은 일직선상의 진보가 아니며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발전과 쇠퇴를 거듭하는 '진보'인 것이다.

한 가닥 가느다란 실이 매순간 끊어지려는 인류를 새롭게 연결될 수 있도록 이어준다. 세월을 겪으면서 현명해진 노인은 무덤에 묻히고, 노인이 겪었던 길을 그 후손이 어린아이로서 똑같이 시작한다. 그리하여 어리석게도 선조의 성과를 파괴하여,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시간을 허비하며 헛된 땀을 흘리게 할 수도 있다. (...)

이러한 모든 것 속에서 진보를 관찰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 놀라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어느 지점에서 그러한 진보를 발견할 수 있는가? 우리는 파괴를 통해 새롭게 생긴 것이 파괴된 것보다 더 좋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채 역사 속 모든 곳에서 발생하는 파괴를 본다. 국가가 번영하고 쇠퇴한다. 그러나 쇠퇴한 국가는 더 아름다운 꽃은커녕 새로운 꽃조차 피우지 못한다. 문명은 앞으로 나아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 완벽해지지는 않는다. 새로운 장소에서는 새로운 것이 받아들여진다. 오래된 장소의 오래된 것들은 어쩔수 없이 사라진다. 로마인이 그리스인보다 더 현명하고 행복했는가? 우리는 로마인과 그리스인보다 더 현명하고 행복한가?[5]

헤르더에게 있어서 이러한 역사를 진보하게 만드는 힘은 '자연적 필연으로서의 내적인 힘'과 '인간의 목적 지향적 실천 노력'이 동시적으로 작용함으로서 이루어진다. '내적인 힘'은 자연이 '유기적', '발생적', '생동적'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산출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즉, 외부의 힘에 상관없이 자체적으로 알아서 발전 변화해 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만으로 작동되는 것이라고 본다면, 역사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은 무의미하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 헤르더는 적극적으로 '목적'을 향해 실천하는 인간의 노력을 간과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서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류의 행복'이며, 헤르더는 이것을 '인간성 이념'이라고 정한다.

3.1.3. 인간성[편집]


인류의 진보의 최종 이상향, 즉 역사발전의 목적은 '인간성 (Humanität)'이다. 헤르더에 따르면, '인간성'은 인간 내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뛰어난 것이며 우리는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이것보다도 더 뛰어난 것을 파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인간성보다 더 뛰어났다고 생각되어지는 '천사' 혹은 '신'에 대해서 말할지라도, 그것은 '인간 내(內)'에 있는 것이 아니라 '초인간적'이거나 '이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6] 그의 인간성 이념은 그리스 사상에서 유래한 '덕성', '완전', '행복' 등을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다. 특히 '완전'과 '행복'의 조화로운 합일로써 나타나는 것이 '인간애'라고 설정하고, 인간애를 자신의 '인간성 이념'의 핵심 내용 중 하나로 파악했다. 그리고 인간이 이성과 정의를 통해 인간성을 증진시키지 않는다면 그 대가로 고통을 받게 된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그 댓가는 당대의 각 인류공동체뿐만 아니라 후대에게도 전가되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부모의 잘못으로, 국민은 통치자의 어리석음으로, 그리고 후손은 선조의 게으름으로 고통을 겪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악을 고치려 하지 않거나 고칠 수 없다면, 그들은 수세기 동안 그 아래에서 고통을 겪어야 된다.[7]

헤르더는 "이처럼 역사 속에서 형성된 모든 훌륭한 것은 인간성을 위해 행해진 것"이라고 말하면서, "역사의 진행에서 우리는 진정한 인간성이 증진함에 따라 인류내의 파괴적인 악마의 수가 감소해왔음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로써 헤르더는 인류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 바로 인간성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 추구해야 할 최종 목적지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생길 것이다. 인간성이라는 이념을 말하는 것은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이며, 이것은 앞서 개체성을 말하면서 보편성을 부정한 것과 모순되지 않는가? 헤르더는 '타인 혹은 타민족과 서로 달라질 자유와 감정이 있고 이 때문에 악을 저지르고 퇴보하기도 한다'는 개체성을 부정하진 않는다. 다만 현실에 매번 좌절하면서도 앞으로 진보하고자 목표를 세우는 것이 인간이며, '개별성'을 가진 우리가 단 하나 추구해야될 '보편적'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성'이라는 보편적 이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 인간은 끝없는 고통에서 빠져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8]

3.2. 인식론[편집]


헤르더는 '감각'과 '이성'으로 구분되는 칸트식 분류에다 '생리학적인 인식영역'을 덧붙인다. '생리학적인 인식'은 '자극(Reiz)' 개념에 근거한다. 자극은 '감각을 일깨워주는 최초의 타오르는 작은 불꽃'[9]같은 것이다. "수 천의 살아 움직이는 작은 끈들을 수 천 배의 투쟁 속으로 그리고 그만큼의 접촉과 저항으로 엮어 넣는데" 그것은 '고통의 법칙'이며, '낯선 것의 접촉'이 수축작용을 일으킨다. 헤르더는 접촉시 고통(Schmerz)이라는 감정에 의해 감각이 작동하기 때문에 현재를 느끼는 그 자체의 감정이 우리의 신경 내부 속에 있다고 보아 이를 '촉각적 감정(das tastende Gefühl)'이라고 부른다.

'감정'은 칸트가 말하는 '감각'과 다르다. 칸트의 감각은 시각적 감각이며 시각은 사물을 떨어져서 파악하는 반면, 감정[10]은 실재를 직접적으로 경험하려 한다. 그리고 감정은 실재를 개체 자신의 활력에 반작용하는 힘으로서 파악한다. 그러나 동시에 개체는 자신의 몸속에서 어떤 활력이 세계에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경험한다. 인간이 세계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세계가 부과한 한계를 깨닫는 순간에, 개체와 실재 사이에는 힘의 균형이 이루어져 개체의 몸은 '세상을 온전히 느끼고 있다'는 특별한 상태를 경험하게 되는데, 헤르더는 이를 개체와 실재 사이의 일치가 이루어지는 '미학적 경험'이라고 부른다.

4. 평가[편집]


헤르더는 합리주의적 계몽주의에서 반합리주의적 낭만주의로의 이행이 이루어진, 소위 질풍노도의 시대의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전기 낭만주의의 맥락에서, 개체성과 역사적 변화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수반하는 새로운 역사의식을 최전선에서 대변한 사람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를 역사주의의 창시자라고 부른다.[11]

역사주의는 인간의 삶을 바라볼 때 역사로 접근하는 특별한 태도와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역사 감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을 일깨워줬다. 역사주의에 이르러서야, 역사는 철학과 사상의 틀이자 기본 전제 조건이 되었다. 나아가 역사 서술(historiography)은 지배적 학문이 되면서 다른 인문학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후의 인문학들은 말그대로 "역사화"되었다. 즉 인문학들은 문학사, 예술사, 종교사, 언어사 등과 같이 역사적 지향성을 갖는 학문이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주의가 '현실을 보는 일정한 방식이자 동시에 인문학적 연구 프로그램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5. 어록[편집]


"우리들 가운데에 신이 있다"

《인간의 혼 속에 있는 인식과 감정에 대하여》 (1774)


"여러 민족의 모든 역사는 우리에게 이러한 점에서 인간성과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가장 아름다운 관을 획득하기 위한 경쟁의 도장이 된다."

《철학에 대한 견해》


6. 여담[편집]


  • 그가 비록 그가 속한 시대 상황에 따라 인종적 편견을 지녔던 것은 사실이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자연은 지구 위에 다양한 인류를 편성시켰다. 니그로(흑인)와 원숭이는 거의 비슷한 위치를 차지했다." [12] 헤르더는 여기서 흑인을 원숭이에 가까운 존재로 파악함으로써 인종주의적 편견을 드러낸다.[13] 그러나 몇몇 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헤르더를 상대주의자, 비합리주의자, 배타적 민족주의자로 폄하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가 계몽 사상의 보편주의 사상을 근본적으로 부인하면서 개체성만을 강조했다면 분명 이런 평가는 타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개체성 이외에도 '진보적 발전' 사상, '인간성' 이념 등을 계속 이야기함으로써, 역사 전반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 태도를 보여주고자 했다.[14]
[1]폴란드 바르민스코마주르스키에 주 모롱크[2] 헤르더에게 영향을 받은 이들은 이후 독일 낭만주의를 결성한다.[3] 귀족이 되면 이름 가운데 "von" 을 붙인다.[4] 헤르더 저. 『인류의 교육을 위한 또 하나의 역사철학』[5] 『인류의 역사철학에 대한 이념』 헤르더 지음. 강성호 옮김. p.15~16[6] J.G. Herder, 《Ideen》, p.208[7] 『인류의 역사철학에 대한 이념』 p.67[8] 다만 헤르더의 인간성 이념은, 보편성을 추구해 민족국가 차원을 벗어나긴 했으나 이는 전 세계적 보편성이 아니라, 당시 18세기에 있었던 유럽의 세계 식민화 과정을 필요악으로 합리화하는 '유럽적 보편성'이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 자체가 헤르더가 세운 인간성 이념 자체의 근본 의도마저 해친다고 보아서는 안된다. 어쨌든 그의 인간성 이념이 지니는 '상대적' 진보성과 보편성은 최소한 각 시대, 각 민족, 각 사회가 지니는 독특한 개체성을 강조하는 가운데 나타날 수 있는 상대주의의 폐해를 규제하는 데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ㅡ 『인류의 역사철학에 대한 이념』 p.106~108[9] "das erste glimmende Funklein zur Empfindung"[10] 촉각적 감정을 말한다. 독일어 Gefühl는 '감정'이라는 뜻과 함께 '촉각'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11] 군나르 시르베크, 닐스 길리에 『서양철학사 2』 이학사. 2016. p.646[12] 『인류의 역사철학에 대한 이념』 강성호 옮김. 2002. 책세상. p.23[13] 『인류의 역사철학에 대한 이념』 강성호 옮김. 2002. 책세상. p.118[14] 『인류의 역사철학에 대한 이념 (Ideen zur Philosophie der Geschichte der Menschheit)』 강성호 옮김. 2002. 책세상.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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