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르 레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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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이고리 표도로비치 '예고르' 레토프(Игорь Фёдорович 'Егор' Летов, 1964-2008)[3] 는 러시아의 예술가로, 러시아의 유명 포스트 펑크/사이키델릭 락 밴드인 '민방위(Гражданская Оборона)'와 '예고르와 좆병신들(Егор и Опизденевшие)'[4] 그리고 전위예술 음악 프로젝트 '코무니즘(Коммунизм)'으로 유명하다.[5] 싱어송라이터였으며, 시인[6] , 사운드 엔지니어, 아방가르드 예술가로도 활동하였다.
2. 생애[편집]
2.1. 유년 시절[편집]
Жизнь в России, как вечный концерт группы "Гражданская оборона", с которого нельзя уйти.
-러시아에서 산다는 것은 마치 끝나지 않는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의 공연과 같다. 그런데,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공연 말이다.
1964년 시베리아의 옴스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독소전쟁에 참전한 전쟁 베테랑이었으며 어머니(카자흐스탄 출신 코사크)는 의사였다. 가족 혈통을 따져보면 러시아인, 코미인, 모르드바인, 튀르크인 계열이 혼재되어 있다고 한다. 유년 시절 집 근처 환경이 열악한데다[7] 선천적으로 몸이 허약했던 편이라 어릴 적 자신의 형과 함께 몇 번이나 임상사[8] 를 겪었을 정도로 몸이 허약했다고 전해진다[9] . 그의 형 세르게이는 노보시비르스크에 위치한 물리학 및 수학 학교에 재학하며 알게 된 더 후 등 영국 락 음반들을 예고르에게 소개해 주었으며 예고르는 강렬한 사운드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1980년대 초반부터 레토프는 시와 가사, 각종 단편 소설들을 쓰기 시작했으며, RIO[10] 및 프리 재즈 계열 음악에 심취하였다. 이 외에도 그는 철학 분야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많은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며 상당한 지식을 쌓았다.
1982년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예고르는 모스크바 화학기술대학교에 재학하던 세르게이를 찾아가 같이 살게 되었다. 당시 세르게이는 재즈 색소포니스트로 아크바리움, 알리사, 데데테 등과 활동하고 있었다. 예고르는 락 음악에 심취해 수많은 음반을 사들였으며, 드럼과 베이스 기타 연주법을 배우고 당시의 언더그라운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 몇몇과 교류를 가지며 음악 활동을 시작하였다[11] . 기술 전문 학교에 들어가 미장이 일을 배우다가 1983년 3월 잦은 결석과 낮은 성적으로 인해 퇴학당하고 옴스크로 돌아가 경비원 및 선전 화가[12] 등의 일을 했다.
2.2. 포세프 및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의 결성과 강제 해산[편집]
1982년 레토프는 자신의 친구인 안드레이 바벤코(Андрей Бабенко)와 함께 개러지/하드/사이키델릭 락 밴드 '포세프(Посев)'[13][14] 를 결성하였다. 바벤코가 일렉 기타를 맡았고, 예고르가 보컬, 드럼[15][16] , 베이스를 맡았다. 이 외 포세프 결성 이전 레토프는 "자파드"(ЗападЪ)라는 밴드에서 활동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1989년 앨범 "포세프"에 해당 밴드 시절 작곡했다고 알려진 몇 곡이 실린 것 이외 알려진 정보는 극히 적다.[17]
1982년 포세프는 두 개의 인스트루멘탈 앨범을 녹음하였으나[18] 이 둘은 현재 내용은 물론 제목조차 유실된 상태이다. 1983년에도 "전략과 전술(Стратегия и тактика)", "프놈펜(Пномпень)", "머나먼 도시 옴스크에 보내는 편지(Письма в далекий город Омск)" 등 세 개의 앨범을 녹음하였으나 이 셋은 제목을 빼고 전부 유실된 상태이다.
1년 뒤인 1984년 예브게니 데예프(Евгений Деев, 베이스)가 합류하였고, 밴드는 추가로 두 개의 앨범 "갖가지 풍경들(Всякие картинки)" 및 "병영에 내리는 비(Дождь В Казарме)"을 취입하였다. 8월에는 올렉 이바노프스키(베이스, 어쿠스틱 기타)가 합류하였고, 두 개의 앨범 "늙은 사환의 이야기(Сказки Старого Юнги)"와 "사랑의 음악(Музыка Любви)"을 녹음하였다. 9월에는 포세프의 사실상 마지막 앨범이자, 훗날 레토프가 "포세프의 앨범 중 최고"라고 평가한 "레게, 펑크 그리고 락앤롤(Reggae, punk & rock’n’roll)"이 나왔다.[19]
이후 포세프에 콘스탄틴 랴비노프(Константин Рябинов)[20] 가 합류하며 1984년 11월 8일 그 유명한 그라지단스카야 오브로나[21] 를 결성하게 되었다. 1985년 8월, 이바노프스키를 제외한 3명(레토프, 바벤코, 랴비노프)이 "스스로 해라(Сделай сам)"를 낸 것을 마지막으로 포세프의 역사가 마무리된다.[22]
포세프와 초기 민방위는 공식 무대에 선 적이 없으며 단순 락 지망생들의 "홈 밴드"에 가까웠다. 허나 여러 라이브 공연을 통해 그롭은 점차 인기를 얻어가기 시작했고[24] 1985년 그롭의 첫 앨범인 "썩어빠진 젊은이"와 "낙천주이"가 예고르의 집에서 제작되어 마그니티즈다트 형식으로 유포되었다.[25] 하지만 민방위의 저속하고 반권위스러운 음악은 당시 소련 체제와 공존할 수 없는 음악이었다. 민방위의 음악을 들은 바벤코의 모친은 소련 공산당원이었고, 자신의 아들이 반사회주의적 음악을 한다고 당에 신고했다. 이에 지역 당국은 이 훌륭한 먹잇감을 놓치지 않고 민방위 멤버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게 된다. 그렇게 '낙천주이' 앨범을 녹음하고 있던 민방위는 "테러적 행위"를 조직한 죄로 줄줄히 잡혀 들어갔다. 같이 활동하던 다른 음악가들과 일가친척에게 가해진 협박은 덤이었다.
전기 민방위(1984년 - 1990년)의 노래는 소련 당국과 억압적 체제에 대한 분노와 비판, 풍자와 조롱이 섞인 것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포세프부터 극초기 민방위 시절, 즉 1984-85년 무렵 민방위의 노래에서는 특별한 정치적 메시지나 소련 체제에 대한 비판, 풍자가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노이즈가 가득 낀 조악하고 조악한 음질, 그리고 '아이들 옹알이를 떠올리는' 가사는 권위적이던 소련 정부에 있어 곱게 보이지는 않았단 것은 자명하다. 심지어 시기조차 이들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당시로 말할 것 같으면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가 잇달아 사망하며 소련 정국이 이른바 "기강잡기"에 들어가 있던 기간이었고, 실제로 이 시절 많은 언더그라운드 음악가들은 몸을 사리는 모습을 보였다. 허나 민방위는 (그런 것은 신경쓰지 않았는지, 아니면 자신들이 체포 대상이 될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못했는지) 민방위는 음악 활동을 감추지 않았고, 이는 지역 당국과 KGB의 훌륭한 먹잇감이 되었다.
심문 중 예고르는 당시 자신들을 심문하던 소령 블라디미르 메시코프의 압박에 못 이겨 자살한다는 내용의 쪽지를 남기고 자살을 기도했으나 바로 발각당해 목숨을 건진다. 이후 예고르는 감옥에 가는 대신 정신병원에 끌려가게 되어 1985년 12월 8일부터 1986년 3월 7일까지 병실에 감금당하게 되고[27] 랴비노프는 심장 문제에도 불구하고 당시 다니던 대학에서 퇴학당한 뒤 군대로, 그것도 격오지로 취급받던 카자흐스탄의 바이코누르 우주기지로 끌려갔다.[28][29] 당시 이들이 작업하던 앨범인 "썩어빠진 젊은이"와 "낙천주이"는 파기당하게 되고, 암암리에 떠돌던 부틀랙 카세트를 기반으로 2000년 컴필레이션 앨범 "Поносные звучания I"이 발매되었다.[30]
2.3. 정신병원 퇴원 이후 그리고 "아돌프 기틀레르" 사건[편집]
3월 초 그가 풀려난 뒤에도 주변 음악가들과 친구들은 예고르와 얽히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한 상태였기에 예고르는 1인 밴드로 혼자서 음악을 연주하고 녹음하며 앨범 "전체주의"(Тоталитаризм), "네크로필리아"(Некрофилия), "쥐덫"(Мышеловка), "아주 좋소!!!"(Хорошо!!), "빨간 앨범"(Красный Альбом) 등 5개의 앨범을 제작하고 여러 크바르티르니크에 참여하며 활발하게 활동하였다.[31]
흔히 민방위 하면 상당히 비판적이고 날것인 가사 그리고 노이즈가 주를 이루는 락/펑크 스타일의 노래를 떠올리지만[32][33] , 이 시절까지 레토프의 노래는 컬트스러운 가사와 웅웅거리는 듯한 노래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1987년 이후 몇몇 노래들을 제외하면 라이브에서는 점차 듣기 힘들게 된다.
이 시절에도 레토프는 정부 당국과 지속적인 마찰을 빚어 왔다. 1986년 옴스크의 지방 언론인 "베체르니 옴스크"(Вечерний Омск)의 사설 "다른 이의 목소리대로(С Чужого Голоса)"[34] 이 대표적인 사례로, 해당 사설은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루고 있다.[35][36] "쥐덫" 앨범에 실린 노래 "황색 언론"(Желтая пресса)은 이에 대한 레토프의 생각을 담고 있다.[37][38] 이 외 아파트에서 앨범을 작업하거나 공연을 열던 중 경찰 당국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1986년 여름 예고르는 올렉 및 예브게니 리셴코(Олег/Евгений Лищенко) 형제의 락 밴드 "피크 클락손(Пик Клаксон)"[39] 에 참여하여 드러머로 활동했다.[40] 당시 피크 클락손은 앨범 "잉여 녹음들"(Лишние Звуки)을 녹음하던 중이었는데 이에 지쳐 기분 전환할 겸 프로젝트 "아돌프 기틀레르"(Адольф Гитлер)[41] 를 발족했다. 부엌에서 담배를 피우며 예브게니 리셴코는 소련 말기의 체제의 부조리함을 나치 체제에 비유한 노래를 여럿 작곡했고, 이들의 연락을 받고 찾아온 레토프는 가사에 매우 흡족해 했다. 이후 이 셋은 리셴코 형제의 아파트에서 짧은 리허설 후 3시간 만에 20분짜리 "반파시스트적, 반고프닉적 의도를 담은"(Программа задумывалась антифашистской и анти-гопнической) 앨범 "병원"(Лечебница)을 녹음했다.[42]
Принципом написания песен стало доведение до откровенного и поражающего абсурда воззрений нацистской идеологии, в котором — словно в зеркале — отображалась бы другая идеология: зверство советского тоталитаризма.
-노래 작곡의 원칙은 나치 이념의 시선을 솔직하고 또 충격적으로 부조리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었고, 그를 통해 마치 거울처럼 또다른 체제를 반사시켜 보는 것이었다. 바로 소비에트 전체주의의 잔혹함 말이다. (올렉 리셴코의 증언)
이후 1987년 4월 12일 노보시비르스크의 치칼로프 문화궁전(ДК Чкалов)에서 제1회 노보시비르스크 락 페스티벌이 개최되었다. 해당 페스티벌은 관제 페스티벌이긴 했으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의 영향을 받아 열린 노보시비르스크 최초의 락 페스티벌이었다. 당시 페스티벌 참가 예정이었던 즈부키 무[43] 및 아우크치온이 '사상적 이유'로 참가가 거부되었고, 옴스크의 3인조는 이 페스티벌의 무대에 설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항상 크바르티르니크나 비공개 소규모 라이브만 전진해 왔던 예고르 레토프에게 있어 첫 공식 무대의 데뷔이기도 했다. 이들은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Гражданская Оборона)의 이름으로 무대에 올랐고, 사회자는 이들을 "옴스크에서 온 착한 소년들"(пай-мальчики из Омска)이라고 소개했다. 옴스크에서 온 착한 소년들은 "병원" 앨범에 수록된 노래 다수와[44] 레토프가 작곡한 곡[45] 사회자의 소개가 무색하게도 이들의 공연은 20분 만에 중단되는 파국으로 끝나게 된다.
당시 공연. 한동안 부틀랙으로만 유포되다 2016년 불 테리어 레코드(Bull Terrier Records)에서 리마스터링되어 공식 발매되었다.
После первых отыгранных композиций «официальные лица», сидевшие в первых рядах, просто впали в состояние ступора. Сарказм песен был совершенно не понят жюри. Его члены были уверены, что видят перед собой на сцене, самых что ни на есть настоящих фашистов, призывающих молодёжь к идеалам, воспетым Геббельсом. Летовские же песни, включённые в выступление, поразили всех своим неистовым запалом, своей яростной антимилитаристской мощью. Зал, буквально, бесновался и сходил с ума. Но когда Егор стал в исступлении и с диким хохотом кричать на весь дворец культуры: «мне смешно на вас, страна дураков!», это было уже слишком. Аппаратуру отключили и группу фактически согнали со сцены. Так Советский Союз узнал о «Гражданской Обороне», а по стране пошло гулять выражение: «Панк рок существовал в СССР только 20 минут - во время выступления «Обороны» в Новосибирске. Всё остальное — это уже пост-панк!»
-첫 노래가 연주되자 좌석의 첫 줄에 앉아 있던 "관리"들은 그야말로 마비되어 버렸다. 심사자들은 노래의 풍자를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말았다. 장담컨데 이들에게 있어 무대에 선 이들은, 젊은이들을 괴벨스가 불러제끼는 이념으로 끌어들이는, 그 누구보다 가장 극렬한 파시스트 분자들이었을 것이다. 공연 중에 포함된 레토프의 노래들은 모두를 격렬한 분노로 들끓게 했다. 청중은 문자 그대로 미쳐버렸다. 특히 예고르가 거친 웃음과 함께 문화궁전 전체에 "바보들의 나라, 전부 웃기기 그지 없어!"[46]
라고 광란의 외침을 질렀을 때 이들은 너무 나가버린 것이었다. 즉각 장비의 전원이 내려갔고 이들은 무대에서 그대로 쫓겨났다. 그렇게 소비에트 연방은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소련에서 펑크 락은 노보시비르스크의 "오보로나"가 공연하던 딱 20분 동안 존재했었다. 그 외의 것들은 전부 포스트 펑크이다!"라는 말이 전국에 돌게 되었다. (당시 관련자 증언 1)
Когда группа сыграла первые композиции, в рядах официоза начался столбняк, а зал в полном смысле сходил с ума. Это был дебют Летова и его друзей на большой сцене, и они умудрились устроить в столице Сибири натуральный Пер-Лашез. «Оборона» со своими антисоветскими текстами и грязным гаражным звуком начала крушить все подряд. Охваченный волной дикого кайфа, звукорежиссер «Калинова моста» Александр Кириллов схватил лист бумаги, написал печатными буквами: «Кто литовал?» и пустил эту парфянскую стрелу по рядам в направлении жюри...
-밴드가 첫 노래를 연주했을 때, 관련자들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고 멍을 때렸고, 청중은 말 그대로 미쳐버렸다. 이 공연은 레토프와 그의 친구들에게 있어 대형 무대 데뷔 공연이었고, 이들은 시베리아의 수도에 페르 라셰즈를 열어버리고야 말았다.[47]
"오보로나"의 반소비에트적 가사와 거친 개러지 락의 소리는 모든 것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이 거친 광란의 파도에 휩싸여, 칼리노프 모스트[48] 의 사운드 엔지니어였던 알렉산드르 키릴로프는 종이 한 장을 낚아채 큼직하게 적었다. "지금 누가 노래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는 심사관들이 앉은 열을 향해 파르티잔 샷을 쏘듯 정확하게 종이를 날렸다... (당시 관련자 증언 2)
Тогда это был наш первый концерт на большой сцене. До этого все в подвалах каких-то играли, дома играли, в основном у меня в квартире давали концерты человек на десять-пятнадцать. После фестиваля, когда вернулись в Омск, я две недели записывал свои альбомы — две недели пока шла бумага из Новосибирска в Омск. Бумага от фестиваля — там выступили. Написал кто-то из организаторов, какие-то комсомольцы. Бумага имела хождение в Омске: вызывали всех подряд. Меня сразу же вызвали в психушку и решили там оставить. Т.е. вызвали, сказали что-то про новосибирский фестиваль и добавили, что «сейчас за тобой санитары придут и все». И пошли за санитарами. Тут я дверь открыл и убежал. Сразу «скорая помощь» на дом приехала — меня забирать. У меня с собой было сорок рублей и сумка со свитером. На сорок рублей я купил билет на поезд до Москвы и уехал. В бегах был три или четыре месяца. Начался розыск — это был как раз 1987-й год, все лето. Не помню, виделись мы с тобой тогда или нет? Я был в Симферополе, Киеве, Москве, Ленинграде. Я постоянно ездил. Познакомился с Шевчуком — со всей тусовкой. А потом позвонил домой, мне сказали, что дело прекратили и меня искать перестали. Вернулся с опаской, даже дома сначала не жил. Смотрю: меня никуда уже не вызывают. Всю зиму вообще не работал — никуда не принимали: я, вообще-то, художник.
-큰 무대에서 공연하는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 전까지는 어디 작은 지하실이나 집에서, 내 아파트에서 많아봤자 열에서 열다섯 명 앞에서 연주했다. 공연 이후 옴스크로 돌아와서 나는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옴스크까지 소식이 전해질 2주 동안 앨범을 녹음했다. 어떤 콤소몰 조직원이, 해당 페스티벌의 관련자 중 한 사람이, 페스티벌에서 소식을 써서 보냈다. 소식이 옴스크 전체를 돌았고 관련자 모두가 소환당했다. 그들은 즉각 정신병원으로 날 불러 거기에 가두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날 불러 노보시비르스크 공연에 대해 뭔가 말했고 "당신에게 병원 간호인이 갈 것이고 그게 전부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간호인을 부르러 갔다. 이에 난 문을 열고 바로 튀었다. 그 직후 앰뷸런스가 날 데리러 집에 도착했다. 당시 내 수중에는 40루블과 스웨터 하나가 든 가방이 있었다. 40루블로 난 모스크바행 기차표를 사서 떠났다. 난 한 석 달에서 넉 달 정도 도망쳤다. 수색이 시작되었다. 1987년 초였고 수색은 여름 내내 이어졌다. 서로를 다시 보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난 심페로폴, 키이우, 모스크바, 레닌그라드에 있었다.[49]
난 계속해서 돌아다녔다. 난 셰프추크와 온 관중들을 만났다. 그리고 난 집에 연락했고, 가족들은 사건이 종결되었고 더 이상 날 찾지 않는다고 전해주었다. 난 조심스레 집으로 돌아가 보았다. 처음엔 아예 집에 머무르지도 않았다. 난 둘러보았다. 그 어디서도 날 찾지 않았다. 겨울 내내 일하지 않았다. 그 어디에도 난 고용되지 않았다. 이제 난 진정한 예술가였다.[50] (레토프의 증언 1)
Весной 1987-го мы вместе с «Адольфом» наскандалили, дали, что называется, говна на Новосибирском фестивале, на коем я, кстати, и познакомился впервые с Янкой, Чёрным Лукичём и другими, впоследствии героическими личностями. Снова начались гонения и дрязги. Меня попытались снова, запихнуть в психушку, но с благословенной помощью Янки я расторопно «двинул лыжи» и благополучно проездил все лето и осень автостопом по стране, находясь в розыске.
-1987년 봄 "아돌프"와 함께 우린 거한 사건을 쳤고, 그들의 말마따나 노보시비르스크 페스티벌에 똥물을 뿌렸다. 어쨌든, 난 거기서 얀카와 초르니 루키치[51]
그리고 다른 영웅적 면모를 가진 사람들을 만났다. 수색과 압류가 또다시 시작되었다. 그자들이 날 정신병원에 처넣으려 했지만 얀카 일행의 너무나도 고마운 도움과 함께 난 재빨리 챙길 걸 챙겨 수배 명단에 오른 채 여름과 가을 내내 안전하게 히치하이킹을 하며 돌아다녔다. (레토프의 증언 2, 1990년)
사실 첫 곡이었던 "나의 투쟁"(Mein Kampf)부터가 "짝불알 마조히스트 시클그루버 상병은 깜빵에서 나의 투쟁을 썼다네!" 같은 가사로 이루어져 있긴 했으나, 그리고 욕설을 자체 검열하는 등[52] 아돌프 기틀레르의 멤버들 또한 나름의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런 노래를 부르는 건 가히 "스캔들"이라 할 만했다. 80년대 말까지 노보시비르스크와 같은 지방에서는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가 제대로 퍼지지 않았고, 그 시절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도 아닌 이런 지방에서는 펑크나 히피나 파시스트나 똑같이 '인민의 적'으로 인식되었다. 한때 한국에서 반체제적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을 전부 "빨갱이"로 몰았던 역사가 있듯 소련 시절에도 사상적으로 좀 불순하다 싶으면 파시스트 아니면 디시덴트(반동분자)라는 딱지가 달라붙었다.
"— Дружок, после тебя еще будут выступать группы. Ты че там? Тебе что, похуй на наш фестиваль, да?"
"Сегодня мы закончили."
"Ты понял меня или нет?"
"Понял."
-"— 여러분, 여러분 뒤에 공연이 예정된 밴드가 여럿 있습니다. 뭐 하자는 겁니까? 뭐, 우리 페스티벌 따위 엿이나 먹어라, 그런 겁니까?"
"오늘 우리 공연은 끝났습니다."
"지금 제 말 이해하신 겁니까, 아닙니까?"
"아 이해했다고요."
-공연이 중단된 후 사운드 엔지니어였던 알렉산드르 키릴로프와 예고르 레토프 간에 오간 짧은 대화 (위 영상 기준 27:14부터)
그렇게 사고를 친 레토프는 집을 떠나 얀카와 함께 도망길에 올랐다. 반 년 가까이 둘은 보초를 서가며[54] 심페로폴, 키예프,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등 상당한 거리를 히치하이킹으로 돌아다니며 숨어지냈으나 그 와중에도 자주 크바르티르니크[55] 에 나타났다. 다행히 1987년 겨울 레토프의 친척들이 손을 써 주었기에 추적이 멈추었고 그렇게 "옴스크의 히피 펑크"는 사회로 돌아올 수 있었다. [56]
2.4. 전기 민방위의 본격적 활동 (1988년경 - 1990)[편집]
한 달 정도 조용히 있던 그는 앨범을 취입하는 등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1988년 민방위는 제2회 노보시비르스크 락 페스티벌에 또다시 민방위의 이름으로 참가했고, 이번에는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피크 클락손이 빠졌고, 대신 올렉 '매니저 '수다코프(Олег "Манагер" Судаков - 보컬), 포세프 시절 같이 활동했던 예브게니 '존 더블' 데예프(Евгений "Джон Дабл" Деев - 보컬, 베이스), 드미트리 셀리바노프(Дмитрий Селиванов - 보컬) 세 명과 함께 무대에 올랐다. 페레스트로이카는 절정을 달리고 있었고, 46분 간의 공연은 대성공을 이루었다. 이를 시작으로 민방위는 전국적으로 유명해지게 된다.
공연은 녹음본으로만 남아 있으나, 당시 페레스트로이카와 소련의 언더그라운드 음악에 대한 다큐멘터리 팀이 찍은 짤막한 영상이 남아 있다.[57]
피르소프의 주선으로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발트 3국 등 여러 곳에서 라이브를 진행했으며 앞서 언급된 아우크치온 관련 에피소드 이후 집에서 본인이 자신의 걸작으로 꼽는 "러시아의 실험낭자한 대평원" 등 4개의 앨범을 취입한다.
1988년 12월 04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시락(СыРок) 페스티벌" 공연 영상.[58]
2.5. 전기(前期)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 해체 및 정치 활동 (1990년대)[편집]
1990년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는 탈린 콘서트를 마지막으로 잠시 해체되었다. 이후 레토프는 "코뮤니즘"[59] 이나 "예고르와 정신줄 놓은 작자들" 등 여러 프로젝트를 통해 음악 활동을 계속하고 앨범을 취입하였다.
We have been playing together for a year and a half. There was some small period apart, just for the rest. We can’t live without each other. It’s like a commune. But I think that we must stop it after Barnaul. Now it’s that sort of situation in the country, that they make money by rock music. It’s just a profanation. People come to concerts as they would go to a discoteque, only for jumping and crying. Or there are some athletes who want to listen to some arpeggios or some timbre layers. I don’t think that rock is music or aesthetics. I think that it’s a kind of religious movement. I want to play the kind of music that we played in basements of Novosibirsk. It’s better to me if there are only ten persons in the concert hall, because they really want to listen to me. It seems to me that it’s absolutely impossible in our country to have such a small show.
-우리(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는 한 1년 반 정도 같이 공연해 왔다. 중간중간 단지 휴식을 위해서 잠깐씩 멈추었던 시기가 있기는 하다. 우리는 서로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마치 공동체 같은 것이다. 하지만 바르나울[60]
이후로는 밴드를 그만 두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요새 우리 나라의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록 음악을 한다. 그것은 신성모독이다. 사람들은 마치 디스코텍에 가는 기분으로, 그냥 단순히 뛰고 소리지르기 위해서 공연장에 간다. 아니면 웬 선수들이 와서 특정한 아르페지오나 음을 듣고 싶어한다. 나는 록을 음악이나 미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록은 차라리 종교적인 행동에 가까운 것이다. 나는 우리가 노보시비르스크의 지하실에서 연주하곤 했던 그런 음악을 하고 싶다. 나는 차라리 공연장에 관객이 10명만 있는 상황에서 공연을 하는 것이 더 좋은데, 왜냐면 그 10명의 관객은 나의 음악을 진정으로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은 규모의 공연을 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 된 것 같다.
-그롭이 해체된 이유를 설명하는 1991년 5월 인터뷰 출처
KGB에 쫓기고, 잡혀서 정신병원에 수감당하고, 공산당에 의심당할 수준으로 저속하고 반항적인 가사가 가득 담긴 노래를 여럿 만들긴 하였으나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이후로 예고르 레토프는 공산주의자가 되었으며[61] , 실제로 반문화와 밀접한 연관성을 맺고있던 국가 볼셰비키 당(NBP)의 창설자 중 하나이자 초창기 맴버이기도 하였다. 소련 붕괴 이후, 옐친을 비롯한 여러 자유주의자들에 의해서 발생한 사회적 부조리와 갈등에 의하여 공산주의로 선회한 것으로 추정된다.
"Я — СОВЕТСКИЙ НАЦИОНАЛИСТ. Моя Родина — не просто Россия, идею которой отстаивают и полируют разные серьезные мужи, я не россиянин, хотя и натурально русский (корни мои по отцу — из беднейших крестьян Северного Урала, по матери — из казачьего рода Мартемьяновых). Родина моя — СССР. Россия — это дело частное, отдельное, такое же, как Германия, Франция, Китай и прочие отдельные государства. СССР — это первый и великий шаг вдаль, вперед, в новое время, в новые горизонты. СССР — это не государство, это идея, рука, протянутая для рукопожатия, и слава и величие России в том, что она впервые в истории человечества взяла на себя горькую и праведную миссию прорыв сквозь тысячелетнее прозябание и мракобесие, одиночество человека к великому единению — к человечеству. Я верю, верую во всемирную, вселенскую Революцию и готов воевать за нее и словом, и делом, как это делали мои доблестные предшественники, учителя и соратники от Достоевского до Маяковского, все те, кто всегда был против лжи, равнодушия, упадка, смерти, В 1917 году наша страна сделала первый шаг на пути к истине — да не бывать ему последним!"
-"나는 소비에트 내셔널리스트다. 내 조국은 높은 놈들이 찬양하고 세워놓은 러시아가 아니다. 나는 인종은 비록 러시아인이고, 내 아버지의 조상은 북우랄의 가장 못사는 농부고, 어머니는 마르테먀노프의 카자크에서 왔다지만, 러시아 국민이 아니다. 내 조국은 소련이고, 러시아는 그저 그 부분이며 분리된 것이다. 마치 중국이나 프랑스, 독일 같은 그 외 분리된 정부들처럼 말이다.
소련은 위대한 도약이자. 한 발돋움이다. 앞으로, 새로운 시대로, 새로운 지평으로, 소련은 - 정부가 아니라. 이데아요, 약속된 손이요, 그리고 러시아로써는 천년동안 이어진 무지몽매함을 타파할 중대한 임무를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맡게 되었다는 건 영광이자 위대함이다,
외톨이였던 인간(러시아)을 - 인류(소련)로써 대통합을 하는 모습으로 말이다. 나는 곧 전세계, 전인류의 혁명이 일어날 걸 믿는다. 영원한 혁명을 위해, 나는 입으로도, 행동으로도 싸울 준비가 되어있다. 마치 우리들 선조들처럼, 선생이자, 동반자들인 도스토옙스키부터 마야콥스키까지, 모든, 거짓말과 무관심, 퇴폐, 죽음에 반하는 자들처럼 말이다. 1917년에 우리 나라는 진실을 향한 첫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이 첫 걸음은 마지막 걸음이 되지 않을 것이다!"
-신문 "Я молодой" 22호 (1997년 5월지)에 실린 레토프의 인터뷰 중. 원문
2.6. 2000년대 이후[편집]
다만 소련 말기 권위적이고 부패한 모습을 보여주던 소련 정부에 대한 반대 기조는 버리지 않았으며, 2001년 발매된 앨범 "별똥별(Звездопад)"이 암시하듯[62] 90년대 말 이후에는 자신이 더이상 그 어떠한 정치적 운동과 관계가 없다고 발언하는 등 선을 긋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당시 몇몇 관련자들과 달리 극우 성향은 보이지 않았다.[63]
В связи с трагическим инцидентом, имевшим место 8.02.2004г. в Свердловске во время нашего концерта в ДК «Урал», мы делаем следующее заявление.
Ко всем ура-нациионалистическим движениям мы не имели и не имеем отношения самым решительным и активнейшим образом. Мы патриоты, но не нацисты.
Приходится констатировать, что в сегодня повсеместно наблюдается даже не рождение, а тотальное, агрессивное наступление ФАШИЗМА — не цветасто-отвлеченно-героического, но самого натурального, крысиного, насекомого, который мы уже в свое время испытали на собственной жопе. Каждый нелюбитель маршировать в ногу с кем бы то ни было, каждый, кто САМ, каждый, кто ЖИВ — борись с ним как можешь на любом участке пространства, пока еще не окончательно поздно, не стой в тупом наблюдении и раззявой печали. Все же тоталитаристы — правые, левые, всех цветов и мастей — ИДИТЕ НА ХУЙ.
Убедительная просьба больше не ассоциировать с нашей деятельностью вашу вонь.
Егор Летов и «Гражданская Оборона»
9.02.2004
-2004년 2월 8일 스베들로프스크 "우랄" 문화궁전에서 있었던 우리의 공연 도중 있었던 비극적 사고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합니다.
우리는 가장 단호하고 적극적인 방식으로 국수주의적 민족주의 운동과 그 어떠한 관계도 없었으며 또 없음을 알립니다. 우리는 애국자이지만 나치는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세상이 "파시즘"이 단순한 탄생에서 벗어나 전체적이고 그리고 강렬한 공격을 수반하고 있음을 인정할 밖에 없습니다. 알록달록하고, 추상적이고, 영웅적이지 않은, 하지만 우리가 물리도록 겪은 가장 자연적인, 쥐새끼 같은 곤충의 꼬라지를 한 파시즘이 말입니다. 그 누구와도 발을 맞추어 행진하고 싶어하지 않는 이들에게, "자기 자신으로" 있는 이들에게, "살아 있는" 이들에게 말합니다. 너무 늦기 전에, 그 어디에서든 전력을 다해 파시즘과 맞서 싸우십시오. 바보같은 관조와 활짝 열린 슬픔의 편에 서지 마십시오. 그놈이 그놈인 전체주의자들에게 - 우파든, 좌파든, 어떤 색깔에 줄무늬를 내세우는 놈들이든 - 말합니다. 좆이나 까십시오.[64]
우리는 당신네 파시스트들에게 더 이상 당신들의 악취를 우리의 활동과 결부시키지 말아줄 것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예고르 레토프와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
2004년 02월 09일
이를 보여주는 사례가 2004년 2월 8일 예카테린부르크 공연에서 있었던 살인 사건에 대한 반응이다. 당시 공연장에서 대규모 몸싸움이 일어나 스킨해드 즉 극우파 성향의 팬들이 비슬라브인 팬을 구타하여 살해하는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 이후 레토프는 자신과 민방위 명의로 공식 홈페이지에 성명문을 올려 "파시스트들은 좆이나 까라"라는 등 직설적으로 비판하였다.
또한 소련 붕괴 이전에는 단순한 반정부, 아나키즘적인 가사를 담은 노이즈 섞인 펑크 락을 주로 작곡하였으나, 소련 붕괴 이후에는 초월과 투쟁, 그리고 종교적 의미를 가사의 중심으로 사용하는 사이키델릭한 노래들을 작곡하였다. 초기곡만 보면 상상하기 힘들 수도 있지만, 그는 상당한 량의 독서량을 자랑하는 인텔리였다. 10분이 넘어가는 대작 "실험낭자한 러시아의 대평원"이나 "참을 수 없는 가벼운 존재"[65] 등의 곡을 보면 그의 철학이 잘 드러난다.
2008년 2월 19일, 옴스크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수면 중 심장 질환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식에는 상당한 수의 팬들이 따랐으며, 옴스크 동부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의 묘비
Не теряйте надежды и совести, не впадайте в грех уныния, не складывайте оружия, не опускайте рук.
희망과 양심을 잃지 마십시오. 의기소침의 죄악에 빠지지 말고, 무기를 내려놓지도 말고, 두 팔을 들어 포기하지 마십시오.
Хватит заживо гнить в своих уютных капканах.
안락함이라는 올가미 속에서 살아 숨쉬는 채로 썩어들어가는 짓도 이제 충분합니다.
Покиньте свои пыльные, затхлые закоулки — выйдите на свет безбожный, вдохните полной грудью.
먼지 투성이 케케묵은 구석을 벗어나 신이 없는 세상으로 나와 가슴 깊이 숨을 들이마십시오.
Родина ждeт вас — безнадeжно-молодых, отчаянных и непокорных. Требуйте и достигайте невозможного!
가망 없으리만치 젊어 활기찬, 결사적인, 굴하지 않는 조국이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이루어 내십시오!
Наступите на горло своей тоске, апатии, лени. Казните свой страх.
목구멍까지 차오른 우울함과 권태 그리고 나태를 짓밟으십시오. 그대의 공포를 처형해 버리십시오.
Действуйте так, чтобы Смерть бежала от вас в ужасе.
죽음마저 공포에 차 당신을 벗어 달아날 정도로 행동하십시오.
Мир держится — пока ещe держится! — на каждом из нас — живом и непобедимом.
삶이란 놈은 매달려 있습니다. 여전히 매달려 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매달려 있습니다. 삶이란 놈은 살아 숨쉬며 또 무적입니다.
И пусть нас мало — нас и всегда было немного — но именно мы двигали и движем историю, гоним еe вперeд по сияющей спирали.
그리고 우리의 수가 적다 한들, 우리의 수는 언제나 적었지만, 역사를 움직여 왔고 또 역사를 움직이는 건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빛나는 나선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도록 재촉하고 있습니다.
Туда, где времени не было, нет и не будет.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도 시간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В вечность.
영원을 향하여.
Так не позорьте же себя и своe будущее.
그러니 자기 자신과 자신의 미래를 모욕에 빠트리지 마십시오.
Встаньте!
일어나십시오!
-레토프의 유언으로 알려져 있던 문구.[66]
3. 음악적 성향[편집]
꽤 적지 않은 러시아의 록 뮤지션이 그러하듯 레토프도 초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초기는 욕설이 난무하며, 가망이 없는 소련 사회에 대한 절망과 무력한 공산주의자들과 온갖 학살과 범죄를 주도한 높으신 분들에 대한 분노, 그리고 슬픔이 담겨있고 녹음을 하고 나서 편집을 하지 않은 듯한 펑크 락의 날카로움과 날 것의 감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후의 후기는 종교적 키워드, 시적 은유, 그리고 앞과 뒤가 모순되는 가사의 요소들을 통해서
남자의 '그곳'(욕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4. 들어보기[편집]
'펑크 락과 락앤롤(Панк и рок-н-ролл)'. 포세프 시절의 곡.
'우리는 얼음이다(Мы — лёд, 1987)'
네크로필리아(Некрофилия)
'KGB-락(КГБ-рок, 1987)'
'모든 것은 계획대로(Всё идёт по плану, 1989)'
'총알에 대한 철학적인 노래(Философская песня о пуле, 1989)'. 솔로 앨범 수록곡.
'펄쩍-펄쩍(Прыг-скок, 1990)'. 그롭 해체 이후 '예고르와 좆병신들' 시절 곡.[67]
'지점(Солнцеворот, 1997)'[68] .
'어느 바보에 대하여(Про дурачка, 2005)'
'사이코넛들에게 영광을(Слава психонавтам, 2007)' [69]
'나 없이(Без меня, 2004)'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는 곡의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5. 여담[편집]
- 민방위 앨범 커버에 대한 글
- 레토프 노래들의 특징 중 하나는 "매우 많은 테이크"이다. 레토프는 같은 노래를 여러 테이크로 제작했으며 이들은 특별한 고지 없이 여러 초판과 재판 앨범들, 컴필레이션 앨범들과 미공개 작업물들 사이에 뒤죽박죽 섞여 있다.[70]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다
Очень богатыми на раритеты оказались сессии альбома «Прыг-скок». Так, помимо дублей, вошедших в переиздание, известно также ещё по одному дублю песен «Про дурачка» и «Иваново детство» (входили в «Прыг-скок» в издании ХОР, BSA 1994 года, Moon Records «чёрной серии» и кассетное издание Звукореки / BSA), «Про червячков» (входил в «Прыг-скок» в издании BSA 1993 года, винил Золотой Долины и магнитоальбом), ещё два дубля «Песенки о святости, мыше и камыше» (один входил в «Прыг-скок» в издании BSA 1993 года, винил Золотой Долины и магнитоальбом, а другой — только в магнитофонный сборник «Попс 1984–90»). Еще один ауттейк из этих сессий никогда не входил в «Прыг-скок» — это заговор на смерть под названием «Песенка, сулящая несчастье», который можно услышать в магнитофонном сборнике «Хуй через плечо».
-
특히 "Прыг-скок" 앨범 작업 당시 수많은 희귀본들이 녹음되었다. 재판본[71] 에 포함된 또 다른 테이크와 함께, "Про дурачка" 및 "Иваново детство" 노래의 또 다른 테이크가 존재하며(ХОР 음반사, 1994년판 BSA 음반사, Moon Records 음반사의 일명 "검은 시리즈" 판본 및 Звукореки / BSA 음반사의 카세트 판본에 포함) "Про червячков"(1993년판 BSA 음반사, Золотой Долины 음반사의 LP 및 기타 마그니티즈다트[72] 에 포함) 또한 마찬가지이다. "Песенки о святости, мыше и камыше"의 경우 서로 다른 두 테이크가 더 존재한다. (하나는 1993년판 BSA 음반사 및 Золотой Долины 음반사의 LP 및 기타 마그니티즈다트에 포함되었으며, 다른 하나는 컴필레이션 앨범인 "Попс 1984–90"에 포함) 이 세션 당시 녹음된 테이크 중 "Прыг-скок" 앨범에 수록되지 않는 노래로 "Песенка, сулящая несчастье"라는 제목을 단 테이크가 있으며, 이 테이크는 컴필레이션 앨범인 "Хуй через плечо"에서 들어볼 수 있다.[73]
- 이런 문제는 특히 자파드나 포세프 시절부터 초창기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 시절 작업본에서 그 절정을 찍는다. "시베리아 펑크 지망생 불순분자들의 아마추어 연주"는 당시만 해도 아카이빙할 가치가 없었기에 유실된 것도 몇 있고, 당시 소련 상황상 질 좋은 녹음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였기에 상태 또한 좋지 않다. 여기에 이들 대다수는 알 수 없는 경로로 유출되어, 제대로 분류되지 않은 채 저질 카세트를 통해 마구잡이로 유통되었기에[74] 표지갈이가 상당히 심한 편이다.[75] 이에 대한 장문의 글(러시아어) 여기서 굳이 정본을 찾는다면, 2000년대 초반 레토프와 추마코바가 대대적으로 리마스터링하여 발매한 Выргород(비르고로트) 음반사 버전이 "정본"에 가까울 것이다.
2022년 1월, 나탈리야 추마코바는 현재 보유하고 있는 레토프의 아카이브를 재정리하여 포세프 및 극초창기 음악들을 재발매하겠다고 발표했다. VK 게시글 추마코바는 이를 2022년 내에 공개하겠다고 말했지만, 아카이브 자체의 문제[76] 와 현 러시아 시국상 실재 공개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측되었다. 실제로 2022년 내에는 발매되지 못했고, 2023년 비르고로트를 통해 당시 작업물들 중 일부가 포세프의 명의로 발매되었다.[77]
- 여러 노래에서 북한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
Там товарищ Ким Ир Сен, там тоже что у нас, (그 곳엔 김일성 동지가 있다, 그 곳 사람들도 우리와 다를 것 없이 살아간다)
Я уверен что у них тоже самое, и всё идёт по плану (그들도 우리처럼 살고 있다고 나는 믿고, 모든 건 계획대로 돌아가고 있다)
- Всё идёт по плану (모든 것은 계획대로, 1988)[79]
Цель оправдывает средства, давай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하나니, 어서)
Убивай, насилуй, клевещи, предавай (죽여라, 강간하라, 비방하라, 배신하라)
Ради светлого, светлого, светлого, светлого, светлого здания идей Чучхе (밝디밝게 빛나는 주체사상의 건물을 위하여)
- Харакири (할복, 1988)[80][81]
Идеями Чучхе да насыщаются народы (인민들은 주체사상에 배불리 자라났다)
Пронзительно взывая героическим сознаньем (영웅적인 의식에 통찰력 있게 호소하며)
В далёкий Пхеньян наши помыслы струятся (저 머나먼 평양으로 우리의 사상이 퍼져나간다)
Там наш великий вождь — сын прославленной Отчизны (그곳에 우리의 위대한 수령님이, 명성 높은 조국의 아드님이 계신다)
Навеки все мы все — Паломники в Корею (언제까지나 우리 모두는 조선으로 향하는 순례자이다)
- Паломники в Корею (조선으로 향하는 순례자, 1989)[82]
이후 나즈볼 활동을 하며 공산주의에 심취한 모습을 보이던 90년대 공연 세트리스트를 보면 미국에 맞서 6.25 전쟁에 참전한 중국 의용군을 기리는 "Песня про китайского народного добровольца"(젊은 중국 인민군의 노래)가 자주 나타나는데, 이 노래는 북한의 시인이었던 조령출(조명암)가 지은 동명의 시의 러시아어 번역본에 멜로디만 덧붙인 것이다.[83][84]
레토프의 이러한 성향에 대해 약간의 변론(?)을 해 주자면, 그가 활동하던 90년대만 하더라도 북한의 막나가는 실상이 현재만큼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보니 북한을 "굶어 죽어라도 마이웨이를 시전하는 소비에트적(?) 미친놈들에 대한 로망"이 담긴 시선에 입각해 호의적으로 바라보던 것으로 추정된다. 레토프는 2008년 사망하였기에 북한의 폭압적 진실을 잘 알지 못하고 죽었는데, 그의 행실을 고려해 보았을 때 그가 2010년대 이후까지 살아 있었다면 북한을 더 이상 호의적으로 보지는 않았을 것이라 추측이 가능하다. 장폴 사르트르가 마오이즘과 남침유도설을 옹호하고 존 레논이 마오쩌둥을 긍정적으로 보았던 사례와 비슷한 맥락으로 보면 된다.
- 형인 세르게이 레토프는 현재 러시아에서 유명 색소포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원래는 항공공학 분야를 전공하였고, 부란 우주왕복선 개발에도 참여한 적 있는 우수한 재원이라고 한다. 현재 레토프의 미망인 나탈리야 추마코바와는 여러 개인적 문제로 인해 서로 적대하는 사이이다.
- 초기 가사만 보면 상상하기 힘들 수도 있지만, 상당한 인텔리였다고 한다. 그의 집에는 상당한 양의 장서가 있고, 니콜라이 고골과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를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도스토예프스키는 젊은 시절 옴스크에서 유배 생활을 보낸 적이 있다. 실제로 그의 가사를 분석해 보면 수많은 소설, 영화, 시에 대한 레퍼런스가 가득하다.
- 축구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졌고, 죽기 몇 년 전에는 로만 아브라모비치 때문에 첼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러시아 사업 역사상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돈을 투자한 건 처음 봤다는 게 그 이유. 그의 유일한 법적 배우자 나탈리야 추마코바 또한 그의 축구에 대한 애정을 공유했는데, 그녀의 최애팀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였다고 한다.
- 원래 이름은 이고리지만, 레토프의 부친에 따르면 이름이 너무 평범해 보인다는 이유로(그리고 이름을 가능한 한 가장 바보같이 짓는다는 이유로) "뒤진 예고르(Егор Дохлый)"라는 예명을 직접 지었다고 한다. 허나 후일[87] "Дохлый"는 빠지고 예고르라는 이름만 남았다.
- 아버지 표도르 레토프는 전직 군인으로[88] 붉은 군대 합창단에서 잠시 노래를 부른 적이 있으며, 형 세르게이 레토프는 유명 재즈 색소포니스트다. 부친의 회고에 따르면 예고르의 첫 베이스 기타는 세르게이가 선물로 준 것이라고 한다.
- 또 다른 시베리아의 여성 가수 얀카 댜길레바와 80년대 동거했으며, 두 사람의 유명세로 인해 예고르는 얀카를 가장 사랑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표도르 레토프의 회고에 따르면 둘의 관계가 그렇게 좋기만 한 건 아니였으며[89] , 오히려 당시 예고르가 가장 좋아하던 여자는 얀카의 친구이자 가수였던 안나 '뉴리치' 볼코바(Анна "Нюрыч" Волкова)였다고 한다. 둘은 90년대까지 동거했으나 좋지 않게 헤어졌고[90] , 레토프의 유일한 법적 배우자는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의 베이시스트이기도 했던 나탈리야 추마코바(Наталья Чумакова)로[91] 이 둘의 관계는 레토프의 사망 때까지 유지되었다[92] .
- 2000년대 이전 라이브에서는 이 영상[93] 같이 춤을 추는 경우도 있는데, 말이 춤이지 얼핏 봐서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허우적거림(...)이다. 러시아인들 입장에서도 웃긴 건지[94] 유튜브에서 이 영상같은 패러디 영상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95] 사실 춤 정도면 양반이고, 원체 독특하고 똘끼넘치던 양반인지라 꽐라가 된 채 공연을 강행하는 등[96] 전위적 행동을 자주 선보였으며, 팬들 또한 그에 못지 않게 똘끼가 넘쳐 서로 술마시고 패싸움을 벌이거나 무대에 난입해 대신 노래를 부르거나 경비원들과 레토프를 가지고 줄다리기(...)를 하다 구타하는 등 기행을 선보이는 걸로 유명했다.[97][98] 1998년 5월 모스크바 공연 영상. 파도마냥 무대로 향해 뛰어들려고 시도하는 관중과 이들을 잡아 내팽개치듯 던져버리는 가드들을 주목. 결국 막판에 가면 레토프가 크라우드 서핑을 시전하고, 누가 윗옷을 가져가 버린다(...)
- 유명세와 여러 '독특한' 가사와 공연 및 생애 등으로 러시아 웹에서는 심영 비스무리한 합성물 주제로 등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자면 이 영상[99] . 2018년 등장하여 한때 소소하게 유행하였다. 이런 것도 있다. AI 기술을 이용해 목소리를 추출해 낸 것.[100]
- 1980년대 중후반에는 반삭 모히칸 스타일로 공연을 하는 일이 잦았고, 밴드 피크 클락손(пик клаксон)[101] 과 함께 아돌프 기틀레르(адольф гитлер) 프로젝트를 같이 하던 시절에는 무려 고스 스타일의 메이크업을 하고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특히 이 시절의 검은 안경과 데님 자켓으로 대표되는 펑크 스타일의 복장은 80년대 예고르 레토프를 상징하는 스타일이라고 해도 무방하다.[102][103]
90년대에는 스타일이 좀 '얌전해져서' 단정한 가죽 자켓 차림과 함께 종종 뿔테 안경을 썼고, 이 때부터 머리를 장발로 기르기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급속한 노화와 함께 머리칼도 마녀마냥 부스스하게 변했고, 사이키델릭한 무늬가 프린트된 티셔츠를 즐겨입었다.
이 장발에 관련된 아이러니한 에피소드가 있는데,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당시 예고르는 반옐친 편에 가담하였고, 시위와 가두행진에도 여러 번 참가하였다. 옐친 측의 유혈 진압이 시작되자 형 세르게이 레토프는 예고르가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고르는 진압이 본격화되기 하루 전 모스크바에서 옴스크로 가버렸기에 목숨을 건졌다. 옴스크로 간 이유에 대해 레토프는 옴스크에서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는데, 예고르 사후 세르게이는 한 인터뷰에서 가두행진 당시 몇몇 노파들이 장발의 예고르에게 "이 히피족야, 어긴 너희 같은 놈들이 있을 곳이 아니야, 썩 꺼져" 같은 말을 던졌고, 이 '모욕'이 레토프가 모스크바를 떠난 것에 영향을 미쳤다고 증언한 바 있다.
- 레토 감독인 키릴 세레브렌니코프의 영화 '페트로프의 감기'에 레토프의 곡들이 대거 삽입되었다. 주로 오피즈데네프시니예 시절 작업물들.
6. 앨범 목록[편집]
6.1. 포세프 앨범[편집]
6.1.1. 정규 앨범[편집]
6.1.2. 기타 앨범 (컴필레이션 앨범, 비공식 앨범 등)[편집]
- 위 앨범들 중 몇몇은 민방위 앨범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1984년-1986년 작업물들은 포세프로 봐야할지 민방위로 봐야할지 애매한 경우가 많다.
6.2.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 앨범[편집]
6.3. 솔로 앨범[편집]
6.4. 코무니즘 앨범[편집]
6.5. 예고르 이 오피즈데네프시니예 앨범[편집]
7.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편집]
- 2022년 발매한 시리어스 샘 시리즈의 스탠드얼론 확장판인 "Serious Sam: Siberian Mayhem"에 레토프를 오마주한 인물인 이고리 레도프(Igor Ledov)가 등장한다. 선글라스와 가죽 자켓 등 외모부터가 80년대 레토프와 판박이고, 동료 중에 "나탸샤"라는 사람이 있으며[118] , 언더그라운드 음악 활동을 한다는 것에서 확인사살.
- 사이버펑크 2077에 등장하는 이스터에그로, 돌아다니다 보면 벽면에 Мы - лёд под ногами майора!(우리는 대령 발 밑의 얼음이다!)라고 적힌 낙서를 볼 수 있는데, 민방위 시절 동명의 곡에 대한 오마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