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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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스페인 펠리페 2세와 그의 세번째 부인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의 장녀. 프랑스 왕국 앙리 2세의 외손녀이자 앙리 3세의 조카다.
남편과 함께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통치했다.[1]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1566년 8월 12일에 펠리페 2세와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의 장녀로 태어났다. 펠리페 2세는 아들을 원했지만 두차례의 사산 끝에 무사히 태어난 딸의 탄생을 매우 기뻐했다. 엘리자베트는 동생 카탈리나 미카엘라를 낳은 뒤 또다시 사산하고 사망했다. 펠리페 2세는 조카 오스트리아의 안나와 재혼했다. 이사벨과 카탈리나는 새어머니와 다정하게 지냈으나 이사벨이 14살 때 안나 또한 심부전으로 일찍 사망했다.
두번 어머니를 잃었지만 이사벨은 펠리페 2세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이사벨은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등의 외국어와 각종 분야에서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개인 비서 역할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정치를 익혔다. 총명한 이사벨은 펠리페 2세에게 온 서신을 정리하고 이탈리아어 문서를 스페인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했다.
2.2. 결혼[편집]
2살 때 새어머니 안나의 남동생이자 사촌인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대공과 약혼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루돌프에게 약혼은 외교 수단일 뿐이였는데, 이사벨이 서른을 훌쩍 넘길 때까지 아무 말도 없다가 그제서야 자신은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펠리페 2세는 이사벨의 약혼자로 루돌프의 동생인 알브레히트 7세 대공 쪽으로 눈을 돌렸다.
알브레히트는 어릴 적 스페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성직자로 키워졌다. 그는 톨레도의 대주교인 동시에 형의 뒤를 이어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총독을 맡고 있었다. 펠리페 2세는 이사벨과 알브레히트를 약혼시키고, 두 사람이 네덜란드를 물려받아 공동 통치하면서 후계자가 태어날 경우 그 후계자가 이어서 통치할 수 있도록 했다. 다만 부부 사이에 후사가 없이 부부 중 한명이 죽으면 네덜란드는 스페인 왕의 총독령으로 되돌아가는게 조건이었다. 이로 인해 부부의 공동 통치 기간 동안 스페인령 네덜란드는 일시적으로 스페인과 별개의 군주를 가진 주권국이 되었다. 펠리페 2세가 사망하고 이듬해 1599년 4월 18일, 당시에는 매우 늦은 나이인 33살에 이사벨은 알브레히트 7세 대공과 결혼했다. 이사벨은 3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모두 유아기에 사망했다.
2.3.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통치[편집]
이사벨과 알브레히트가 네덜란드에 도착했을 때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한창이었다. 당시 스타트허우더였던 마우리츠 판 나사우는 매우 뛰어난 군인이었고, 알브레히트는 그의 공세를 견디기 힘들었다. 결국 1609년 안트베르펜에서 12년 휴전이 체결되었다.
휴전 기간 동안 대공 부부는 영지를 재정비하고 안정과 발전을 추구했다. 토지의 매립과 국제 무역을 장려하고, 농지를 회복시켜 경제적 번영을 도모했다.1611년에는 법을 성문법으로 전환하는 영구 칙령을 내려 사법 제도를 개혁했다. 또한 루벤스 등 여러 예술가와 건축가를 후원해 네덜란드의 바로크 미술을 크게 부흥시켰다. 예술을 정치와 결합시키면서 대공궁은 유럽 예술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다방면의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대공 부부가 네덜란드를 통치하던 시기는 네덜란드의 황금 시대라고 여겨진다.
1621년에 알브레히트 7세 대공이 숨을 거두었다. 부부 사이에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네덜란드는 다시 스페인 왕의 총독령으로 되돌아갔다. 이사벨은 네덜란드의 주권 군주에서 총독으로 지위가 격하되었지만 홀로 네덜란드를 이어서 통치했다. 총독으로 활동하던 이사벨은 1633년에 브뤼셀에서 숨을 거두었다. 총독직은 조카 페르난도 데 아우스트리아에게로 넘어갔다.
3. 가족관계[편집]
3.1. 조상[편집]
4. 여담[편집]
- 프랑스 왕국의 앙리 3세가 사망하고 앙리 4세가 즉위하자 펠리페 2세와 가톨릭 세력들은 앙리 3세의 누나의 딸인 이사벨을 왕으로 내세웠다. 살리카 법을 생각하면 순 억지 주장이다.
- 이사벨린(Isabelline)이라는 색상의 이름이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로부터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설에 따르면 오스트리아의 알브레히트 7세 대공이 오스텐드 공성전에 참전했을 때, 이사벨은 남편이 승리하고 돌아올 때까지 옷을 갈아입지도, 씻지도 않겠다고 맹세했다. 공성전은 3년이 지나서야 끝났고 그때 이사벨이 입고 있던 아마포는 누래져 그 색에 이사벨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다행스럽게도(...) 공성전 이전의 기록에 이사벨린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해당 설은 사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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