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

덤프버전 :



[ 펼치기 · 접기 ]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나사우의 엥겔베르트 2세
윌리엄 드 크루아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스페인령 네덜란드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사보이아의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파르마의 마르가레테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
루이스 데 레케센스 이 주니가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
파르마-피아첸차의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페테르 에른스트 1세 폰 만스펠트-보더로트
오스트리아의 에른스트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페드로 엔리케스 데 아세베도
오스트리아의 알브레히트 7세[A]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A]
페르난도 데 아우스트리아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프란시스코 데 멜로
마누엘 드 모라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빌헬름
돈 후안 호세 데 아우스트리아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루이스 데 베나비데스 카리요
프란시스코 데 모라
이니고 멜코르 데 벨라스코
후안 도밍고 데 주니가 이 폰세카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카를로스 데 아라곤 데 구레아
파르마의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오토네 엔리코 델 카레토
프란시스코 안토니오 데 아구르토
제29대
제30대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2세
이시도로 데 라 쿠에베 이 베나비데스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제31대
제32대
제33대
제34대
사보이아의 외젠
비리히 필립 폰 다운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엘리자베트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하라흐-로라우
제35대
제36대
제37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나
마리아 크리스티나
카를 루트비히
카를 알렉산더
알베르트 카지미어
[A]: 1598년 5월 6일에서 1621년 7월 13일까지 일시적으로 총독이 아니라 주권자였다.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총독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
Isabel Clara Eugenia de España


파일:Isabel Clara Eugenia.png

이름
스페인어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 데 아우스트리아 이 발로이스
(Isabel Clara Eugenia de Austria y Valois)
독일어
이자벨라 클라라 오이게니아
(Isabella Clara Eugenia)
출생
1566년 8월 12일
스페인 왕국 세고비아 발사인 궁전
사망
1633년 12월 1일 (67세)
브라반트 공국 브뤼셀
재임
브라반트, 룩셈부르크, 부르고뉴의 여공작
1598년 5월 6일 ~ 1621년 7월 13일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총독
1621년 7월 13일 ~ 1633년 12월 1일
배우자
오스트리아의 대공 알브레히트 7세
(1599년 결혼 / 1621년 사망)
아버지
펠리페 2세
어머니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
형제
카탈리나 미카엘라
종교
가톨릭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결혼
2.3.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통치
3. 가족관계
3.1. 조상
4. 여담



1. 개요[편집]


스페인 펠리페 2세와 그의 세번째 부인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의 장녀. 프랑스 왕국 앙리 2세의 외손녀이자 앙리 3세의 조카다.

남편과 함께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통치했다.[1]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파일:Infantas_Isabella_Clara_Eugenia_and_Catalina_Micaela_of_Spain.jpg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와 동생 카탈리나 미카엘라, 1575년

1566년 8월 12일에 펠리페 2세엘리자베트 드 발루아의 장녀로 태어났다. 펠리페 2세는 아들을 원했지만 두차례의 사산 끝에 무사히 태어난 딸의 탄생을 매우 기뻐했다. 엘리자베트는 동생 카탈리나 미카엘라를 낳은 뒤 또다시 사산하고 사망했다. 펠리페 2세는 조카 오스트리아의 안나와 재혼했다. 이사벨과 카탈리나는 새어머니와 다정하게 지냈으나 이사벨이 14살 때 안나 또한 심부전으로 일찍 사망했다.

두번 어머니를 잃었지만 이사벨은 펠리페 2세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이사벨은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등의 외국어와 각종 분야에서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개인 비서 역할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정치를 익혔다. 총명한 이사벨은 펠리페 2세에게 온 서신을 정리하고 이탈리아어 문서를 스페인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했다.


2.2. 결혼[편집]



파일:Isabella Clara Eugenia and Archduke Albert.jpg

이사벨과 오스트리아의 알브레히트 7세 대공

2살 때 새어머니 안나의 남동생이자 사촌인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대공과 약혼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루돌프에게 약혼은 외교 수단일 뿐이였는데, 이사벨이 서른을 훌쩍 넘길 때까지 아무 말도 없다가 그제서야 자신은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펠리페 2세는 이사벨의 약혼자로 루돌프의 동생인 알브레히트 7세 대공 쪽으로 눈을 돌렸다.

알브레히트는 어릴 적 스페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성직자로 키워졌다. 그는 톨레도의 대주교인 동시에 형의 뒤를 이어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총독을 맡고 있었다. 펠리페 2세는 이사벨과 알브레히트를 약혼시키고, 두 사람이 네덜란드를 물려받아 공동 통치하면서 후계자가 태어날 경우 그 후계자가 이어서 통치할 수 있도록 했다. 다만 부부 사이에 후사가 없이 부부 중 한명이 죽으면 네덜란드는 스페인 왕의 총독령으로 되돌아가는게 조건이었다. 이로 인해 부부의 공동 통치 기간 동안 스페인령 네덜란드는 일시적으로 스페인과 별개의 군주를 가진 주권국이 되었다. 펠리페 2세가 사망하고 이듬해 1599년 4월 18일, 당시에는 매우 늦은 나이인 33살에 이사벨은 알브레히트 7세 대공과 결혼했다. 이사벨은 3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모두 유아기에 사망했다.


2.3.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통치[편집]


이사벨과 알브레히트가 네덜란드에 도착했을 때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한창이었다. 당시 스타트허우더였던 마우리츠 판 나사우는 매우 뛰어난 군인이었고, 알브레히트는 그의 공세를 견디기 힘들었다. 결국 1609년 안트베르펜에서 12년 휴전이 체결되었다.

휴전 기간 동안 대공 부부는 영지를 재정비하고 안정과 발전을 추구했다. 토지의 매립과 국제 무역을 장려하고, 농지를 회복시켜 경제적 번영을 도모했다.1611년에는 법을 성문법으로 전환하는 영구 칙령을 내려 사법 제도를 개혁했다. 또한 루벤스 등 여러 예술가와 건축가를 후원해 네덜란드의 바로크 미술을 크게 부흥시켰다. 예술을 정치와 결합시키면서 대공궁은 유럽 예술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다방면의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대공 부부가 네덜란드를 통치하던 시기는 네덜란드의 황금 시대라고 여겨진다.

1621년에 알브레히트 7세 대공이 숨을 거두었다. 부부 사이에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네덜란드는 다시 스페인 왕의 총독령으로 되돌아갔다. 이사벨은 네덜란드의 주권 군주에서 총독으로 지위가 격하되었지만 홀로 네덜란드를 이어서 통치했다. 총독으로 활동하던 이사벨은 1633년에 브뤼셀에서 숨을 거두었다. 총독직은 조카 페르난도 데 아우스트리아에게로 넘어갔다.


3. 가족관계[편집]



3.1.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
(Isabella Clara Eugenia)
펠리페 2세
(Felipe II)
카를 5세
(Karl V)
펠리페 1세
(Felipe I)
후아나 1세
(Juana I)
포르투갈의 이자벨
(Isabella of Portugal)
마누엘 1세
(Manuel I)
아라곤의 마리아
(Maria of Aragon)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
(Elisabeth of Valois)
앙리 2세
(Henri II)
프랑수아 1세
(Francis I)
프랑스의 클로드
(Claude of France)
카트린 드 메디시스
(Catherine de' Medici)
우르비노 공작 로렌초 데 메디치
(Lorenzo de' Medici, Duke of Urbino)
마들렌 드 라 투르 도베르뉴
(Madeleine de la Tour d'Auvergne)


4. 여담[편집]


  • 프랑스 왕국의 앙리 3세가 사망하고 앙리 4세가 즉위하자 펠리페 2세와 가톨릭 세력들은 앙리 3세의 누나의 딸인 이사벨을 왕으로 내세웠다. 살리카 법을 생각하면 순 억지 주장이다.

  • 이사벨린(Isabelline)이라는 색상의 이름이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로부터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설에 따르면 오스트리아의 알브레히트 7세 대공이 오스텐드 공성전에 참전했을 때, 이사벨은 남편이 승리하고 돌아올 때까지 옷을 갈아입지도, 씻지도 않겠다고 맹세했다. 공성전은 3년이 지나서야 끝났고 그때 이사벨이 입고 있던 아마포는 누래져 그 색에 이사벨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다행스럽게도(...) 공성전 이전의 기록에 이사벨린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해당 설은 사실이 아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3 21:14:23에 나무위키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부부의 공동 통치 기간 동안 스페인령 네덜란드는 일시적으로 스페인 왕의 총독령이 아닌 별개의 군주를 가진 주권국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