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엽/선수 경력/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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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파일:이승엽 국가대표.jpg


이승엽의 국가대표 경력을 정리한 문서.

국제대회에서 타율 0.296 169타수 36득점 50안타 11홈런 49타점 OPS 0.962 를 기록했다.[1]
100타석 이상 출전한 선수 중 OPS 1위, 홈런 1위, 타점 1위, 2루타 1위, 득점 4위 기록
2006년 처음 열린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WBC 초대 홈런왕[2], 타점왕을 차지했다.

2. 연도별 대회[편집]



2.1. 1999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편집]


당대 KBO 리그 최고의 홈런타자 이승엽2000 시드니 올림픽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을 겸한 본 대회에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서 참가했다.

당시 대회는 사실상 중국, 일본, 대만, 한국 4파전이었다. 이 팀들 사이에서 최소 대회 준우승을 기록해야 올림픽 직행 티켓을 얻을 수 있었으며 이 대회에서 한국은 중국[3], 태국, 대만, 일본를 모두 이기고 대회 전승 우승을 차지하며 올림픽 본선에 직행했다.

이승엽 역시 팀의 중심타자 겸 1루수로서 자신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특히 1999년 9월 16일, 가장 큰 난적이 될거라 예상했던 대만홈런을 터트리며 5:4 신승을 이끌었다. 이 홈런을 기점으로 이승엽은 국가적인 영웅으로 발돋움했다.


2.2. 2000 시드니 올림픽[편집]



파일: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화이트 로고.svg


경기
선발
타수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도루
삼진
4구
상세
9
9
28
5
2
0
2
7
3
.179
.258
.357
.615
0
12
3
-
1999시즌 KBO리그 한시즌 최다 홈런 신기록을 갈아치운 이승엽은 이미 박찬호, 박세리 등과 함께 한국 스포츠 최고 스타중 한명이었다. 2000시즌 역시 가공할 만한 활약을 하던 이승엽이 2000 시드니 올림픽에 출전하는 드림팀의 중심타자 겸 주전 1루수 역할을 수행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이승엽은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이 치룬 9경기에 모두 출전하며 자신의 위상을 재확인했다. 하지만 대회 내내 1할대 타율과 6할대 OPS에 머무르며 최악의 부진을 기록했다. 31타석 동안 홈런은 단 한개에 불과했을 정도로 자신의 장점인 장타력을 상실했다.

하지만 이런 이승엽의 개인적 부진과는 별개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은 우승후보 일본을 비롯해 이탈리아, 남아공, 네덜란드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4승 3패로 4강에 진출했다.

4강전에서 당시 최고 유망주였던 로이 오스왈트가 선발로 나선 미국에 2:3으로 석패한 대한민국은 다시 한번 일본과 사상 첫 올림픽 메달을 놓고 결전을 펼치게 됐다. 대회 내내 부진했던 이승엽은 이 날 결국 이름 값을 해냈으며 0:0 팽팽하던 8회말, 2사 1-3루 상황에서 마쓰자카 다이스케를 상대로 2타점 2루타를 때려냈다! 이 날 마쓰자카를 상대로 3타석 모두 삼진을 당한 상황에서 때려낸 장타였기에 더욱 값졌다. 이후 김동주가 연이어 적시타를 때려내며 득점까지 기록했다. 결국 이 점수를 잘 지켜 대한민국은 3:1 승리를 거두며 동메달을 획득했고, 이승엽의 2루타는 결승타가 되었다.

이 대회에서 이승엽이 매우 극심한 부진에 빠지며 제 몫을 못해온 것은 사실이다. 규정타석 충족 타자중 2번째로 낮은 타율과 가장 많은 삼진을 허용한 점이 이를 증명한다. 하지만 숙명의 라이벌 일본과 2번의 경기에서 예선라운드 투런포, 동메달 결정전 2타점 2루타를 처내며 킬러로서의 면모를 뽐냈다. 또한 최악의 비율 스텟에도 불구하고 팀 내에서 가장 많은 타점(7)을 기록하며, 결과적으로 승부처마다 해결사 역할은 잘 해주었다.


2.3.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야구[편집]


95년 데뷔 처음으로 아시안 게임 명단에 발탁[4] 되었으며 같은 포지션이자 같은 좌투좌타인 장성호와 함께 차출 되었고 주전 1루수로 뛰었지만 타격에서는 장성호[5]가 이승엽보다 좋았다. 홈런은 기록하지 못했으나 4할이라는 고타율을 기록 유일하게 홈런 친건 두목곰 딸랑 1명이었다.

전성기 시절 "이승엽" 이라면 당시 야구 볼 줄 아는 사람들 입에서 당연히 홈런이 나올 줄 알았으나 의외의 반응이였다는 평이었다.


2.4.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편집]


2004 아테네 올림픽 진출이 걸린 대회였으나 탈락했다.

2.5.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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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선발
타수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도루
삼진
4구
상세
7
7
24
8
0
0
5
10
8
.333
.414
.958
1.372
0
5
3
-
일본 진출 2년차인 2005시즌, 이승엽은 30홈런을 때려내며 일본 프로야구 적응에 성공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훈풍속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성공적인 FA계약을 맺음에 성공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KBO는 이승엽이 이적 첫 시즌 적응을 위해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합류를 고사할까봐 초긴장한 상태였다. 다행히 요미우리 구단과 이승엽 모두 대표팀 합류에 긍정적인 의사를 내비치면서 큰 잡음없이 팀에 합류했으며 이승엽은 1라운드 1차전 대만과의 경기부터 1루수 겸 3번타자로 선발출전했다. 비록 이 날 3타수 0안타, 1득점의 부진한 모습을 보였지만 팀이 2:0으로 승리하며 3년전 삿포로 참사를 설욕할 수 있었다.

이승엽의 타격감이 깨어난 것은 1라운드 2차전 중국전이었다. 이승엽은 이 날 4타수 4안타(2홈런), 1희생타, 5타점을 기록하며 중국의 마운드를 맹폭했다. 이승엽의 활약에 힘업어 대한민국은 중국을 상대로 10:1 완승을 거뒀다. 또한 이 날 승리로 2라운드(8강) 진출을 조기에 확정지을 수 있었다.

1라운드 3차전 숙명의 라이벌 일본전 역시 선발출전한 이승엽은 1:2로 뒤지고 있던 8회초, 직전시즌 37세이브에 1점대 평균 자책점을 기록한 특급 마무리 이시이 히로토시를 상대로 도쿄돔 우중간을 훌쩍 넘기는 대형 투런포를 때려내며 팀을 역전시켰다.[6] 이후 두번의 수비에서 일본에게 한점도 허용하지 않고 경기가 끝나면서 이 홈런이 결승홈런으로 남게 됐다.

이승엽의 활약은 2라운드에 가서도 멈추지 않았다. 1차전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역시 1회부터 투런포를 작렬시키며 3경기 연속 홈런의 기세를 이어갔으며, 이 홈런이 이 경기 대표팀의 유일한 득점이자 결승타가 되었다.

2라운드 2차전 메이저리그 올스타로 중무장한 미국과의 경기에서도 이승엽의 활약은 이어졌다. 2005시즌 236이닝 동안 좌타자에게 허용한 피홈런이 단 1개에 불과한 당시 메이저리그 최고의 좌완투수 돈트렐 윌리스를 상대[7]로 1회에 솔로홈런을 때려내며 리드를 안겨줬고[8], 이 홈런으로 잡은 리드 이후 미국에게 단 한번도 동점을 허용하지 않으며 이승엽은 또 다시 결승타의 주인공으로 기록됐다. 무려 4경기 연속 결승타. 심지어 두번째 타석에서는 이승엽을 미국 계투진이 고의사구로 걸러버리자 당시 홈 경기장을 채우고 있던 미국 관중으로부터 어마어마한 야유가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대표팀은 직후에 터진 대타 최희섭의 3점홈런을 포함하여 미국 대표팀을 제대로 관광보내버렸으며, 이 경기 이후 이승엽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염원하는 목소리가 국내 야구팬들 사이에서 커지기 시작했다.

다만 2라운드 3차전에서 다시 붙은 일본과의 경기에선 3타수 0안타, 1볼넷 만을 기록하며 부진했으며, 연이어 만난 일본과의 4강전에서도 이승엽은 4타수 0안타로 부진했고, 팀 역시 0:6으로 패하며 최종 3위에 만족해야[9]했다. 하지만 이 대회 이승엽은 일본, 멕시코, 미국의 상위리그 투수들을 상대로 전혀 부족하지 않은 실력을 뽐내며 자신의 가치를 입증했다. 대회 홈런왕[10]과 타점왕을 모두 석권했고, 대회 1루수 올스타에 선정되며 메이저리그 구단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게 됐다.


2.6. 2008 베이징 올림픽[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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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선발
타수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도루
삼진
4구
상세
8
8
30
5
1
0
2
6
4
.167
.265
.400
.665
0
9
4
-
이승엽2006 WBC에서의 맹활약과 2005~2007시즌 일본프로야구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한국야구의 자존심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2008시즌 들어 상황은 정반대가 됐다. 데뷔 이후 최악의 부진을 경험하며 소속팀에서 주전경쟁까지 쉽지 않은 상황이 펼처졌다. KBO리그에서 이대호, 김태균 등 젊은 1루수들의 활약까지 겹치며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에 더 이상 이승엽이 필요하지 않다는 여론들 역시 나오게 됐다. 하지만 김경문 대표팀 감독은 여전히 이승엽을 신뢰하며 팀의 주전 1루수로 기용할 뜻을 밝혔다.

이승엽은 대회 내내 주전 1루수 겸 4번타자로 기용됐지만 좀처럼 부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예선 라운드 6경기에서 중국전 끝내기 안타를 제외하고는 해결사라 불릴만한 장면이 나오지 않았다. 홈런은 단 한개도 치지 못했다. 그나마 김동주, 이대호, 김현수가 이승엽의 삽질을 덮는 대활약을 해줘서 다행이었을 정도.[11]

이러한 상황에 대한민국 국민들은 이승엽을 강도 높게 비난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대다수의 팬들은 이승엽이 라인업에서 빼야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김경문 감독은 이승엽에게 변함없는 믿음을 천명하며 4번타자로 기용했다.

이러한 믿음의 야구는 결선 라운드부터 보답을 받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23타수 3안타(.130)로 극도의 부진을 겪던 이승엽이었고, 4회 무사 1,3루의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왔을 때에는 병살타를 날려 고작 한점을 얻는데 그치는 바람에 죽도록 욕을 얻어먹었으나, 8회 2:2 동점상황에서 좌타킬러 이와세 히토키를 상대로 결승 투런포를 때려냈다.[12][13] 대표팀은 이승엽의 홈런을 포함해 두점을 더 얻어내며 6대2로 역전승을 거두고 결승에 진출했고, 이승엽은 그동안 마음고생이 매우 심했는지 경기 후 인터뷰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결승전에서도 이승엽의 타격감은 이어졌다. 이승엽은 1회부터 상대 선발 노베르토 곤잘레스를 상대로 투런포를 때려냈다. 결국 대표팀이 쿠바를 3:2로 이기고 금메달을 거뒀고, 이승엽은 준결승과 결승전에서 결승타를 날린 주인공으로 남으며 왜 국민타자라는 별명이 붙었는지, 결정적인 순간에 응답하는 4번타자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줬다. 여담으로, 결승전 9회말 병살플레이 상황에서 고영민에게 송구받은 공을 받아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자마자 뒷주머니에 넣었다가 KBO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이 공은 차후 야구박물관에 기증될 예정이다.


2.7.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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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타수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도루
삼진
4구
상세
3
10
4
3
0
0
1
3
.400
.400
.700
1.100
0
2
0
-

2007 시즌 이후 일본프로야구에서 최악의 부진을 겪은 이승엽은 결국 2009 WBC 출전을 고사한 후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한다. 시즌 준비에 사활을 걸어 슬럼프를 탈출하겠다는 굳은 의지였다. 하지만 이러한 절치부심에도 불구하고 이승엽의 일본 커리어는 반등하지 못한 채 2012년 삼성라이온즈로 복귀했다.

KBO 리그로 복귀하자마자 이승엽은 다시 예전의 타격감을 찾기 시작했고, 괜찮은 성적으로 2012시즌을 마감하게 된다. 결국 류중일 감독은 이승엽을 다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선발했으며 당시 대표팀에 김태균, 이대호라는 걸출한 1루수들이 있었기에 굳이 이승엽을 선발할 이유가 없다는 여론도 일부 있었다. 대다수의 야구팬들은 이승엽이 그라운드 밖에서 배태랑으로서 팀에 힘을 불어 넣는 역할을 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정작 대회가 시작하자 이승엽은 부진한 김태균을 밀어내고 주전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비록 팀은 2승 1패 호성적을 기록함에도 불구하고 사상 첫 1라운드 탈락의 수모를 맛봤지만, 이승엽은 팀에서 가장 많은 득점과 가장 높은 OPS를 기록하며 자신이 왜 국민타자-국제용 타자인지 입증했다.

[1] 이승엽 이대호 국제대회 통산 스탯 #[2] 5홈런으로 WBC 역대 단일 대회 최다 홈런 기록 보유중[3] 2승 0패[4] 98년 방콕 아시안 게임 명단에 없을때 이미 미필 선수로만 구성한다는 방침으로 이승엽 본인은 이미 프로 입단 전 군면제가 되어 차출 되지 않았다. 사족으로 정대현, 김수경도 그런 케이스다.[5] 장성호는 후반에 이승엽과 포지션을 바꿔서 체력 안배 차원으로 1루로 알바를 했다.[6] 이시이가 집요하게 바깥쪽 승부만 가져갔으나 이승엽이 죄다 골라내며 3B1S를 만들었고, 볼카운트가 유리한 상황에서 중앙 높은 스트라이크 코스로 공이 들어오자 이승엽이 기다렸다는 듯 넘겨버렸다.[7] 50구 이내로 한국 국가대표팀을 끝낸다고 인터뷰를 했으나 50구쯤 본인이 강판되어 버렸다.[8] 이 당시 박찬호가 이승엽에게 윌리스가 변화구를 던질거라는 조언을 했는데, 진짜로 초구부터 몰린 변화구를 그대로 잡아당겨 넘겨버렸다[9] 대진표 자체가 미국과 일본만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반면 한국과 멕시코만 불이익으로 받았다는 이런저런 오판이 많던 첫 대회였다.[10] WBC 역대 한 대회에서 5개는 이승엽만 유일했다가 2023년 트레이 터너가 타이 기록을 세웠다.[11] 결국 이승엽도 없고 김동주도 없고 이대호도 없는 도쿄 올림픽에선 김현수 혼자서 멱살잡기엔 한계에 닥치면서 목메달/군메달을 얻고 말았다.[12] 참고로 이 홈런은 이승엽 본인이 직접 뽑은 자신의 선수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다.[13] 스톡킹에서 이진영이 전타석에 이와세의 버릇을 발견해 이승엽에게 알려줬다고 했다. 직구와 슬라이더에 글러브 물린 차이가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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