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우/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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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마추어 시절
2. 프로 시절
2.1. 1996 시즌
2.2. 1997 시즌
2.3. 1998 시즌
2.4. 전성기
2.5. 몰락
2.6. 공익근무 후
3. 은퇴


1. 아마추어 시절[편집]


선린상업고등학교건국대학교 체육교육학과(1992학번)를 졸업하였다. 1학년 때부터 주전 중견수를 맡으며 3년 선배 이종범과 힘을 합쳐 건국대가 추계리그와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는데 기여했고, 2학년부터 4학년까지 국가대표로 활약하며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은메달에 기여한다.


2. 프로 시절[편집]



2.1. 1996 시즌[편집]


1996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고향팀 LG 트윈스로부터 외면받은 뒤[1], 2차지명 2순위에서 한화 이글스의 지명을 받으며 프로생활을 시작한다. 화려한 학창시절에 비해서는 비교적 초라한(?) 프로생활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1차지명과 2차 1순위에서 외면한 다른 팀 코칭스태프들에게 보란듯이 데뷔 첫 해부터 1군 114경기를 출장한다. 시즌 최종 성적은 타율 .269 출루율 .360 장타율 .414 8홈런 39타점 12도루. 아주 뛰어난 건 아니지만, 신인 1년차로선 쏠쏠한 활약이었다. 특히 타율보다 1할 가까이 높은 출루율, BB/K가 0.80에 육박한 점을 보면 신인으로써 훌륭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같은 활약에도 주목을 별로 못 받았다. 일단 팀 내 최고 유망주였던 1차 지명자 홍원기가 같은 해 데뷔했던 데다가, 정작 팀에서 가장 좋은 활약을 펼친 신인은 이영우도 아니고 홍원기도 아닌 송지만이라는 매우 알쏭달쏭한 결과였기 때문. 게다가 한 팀에 너무 한꺼번에 신인 유망주가 갑툭튀한 탓인지 이 당시 언론과 팬들은 이 세 선수와 임수민까지 패키지로 묶어 신인 4인방이라 불렀다. 덕분에 이영우 개인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거기다가 같은 해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센세이셔널한 신인 중 한 명이었던 어느 빵의 황제가 등장하여 KBO 역사상 최초의 30-30을 기록했다. 신인상은 당연히 송지만도 아니고 홍원기도 아니고 이영우도 아닌 그분에게 돌아갔다.

어쨌든 이 당시 한화 이글스에 신인 4인방이 한꺼번에 등장할 수 있었던 까닭은 당시 팀 타선이 완벽하게 시망 상태였기 때문. 이전 해인 1995년 한화 이글스에서 20홈런 이상을 기록한 타자는 오직 장종훈뿐이었고, 3할 이상을 기록한 타자도 오직 장종훈뿐이라는 그야말로 눈물겨운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2010, 2012년 한화의 투수진이 류현진과 나머지들이라면, 1995년 한화의 타선은 장종훈과 나머지들이었던 셈.

이로 인해 강병철 감독은 젊은 선수들에게 적극적으로 출장 기회를 주었고, 덕분에 이영우는 일찍부터 1군에서 주전으로 기용되었다.

1996년에는 부상이었던 장종훈을 대신해 1루수로 팀내에서 가장 많이 출전하였다.


2.2. 1997 시즌[편집]


이후 신인 2년차였던 1997년에는 소포모어 징크스를 보이며 타율 .202로 부진, 1년 만에 주전 자리를 빼앗긴다. 그런데 이영우 대신 주전을 다시 꿰찬 정영규 역시 타율 .235를 기록하며 이영우와 별로 다를 게 없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2.3. 1998 시즌[편집]


그리고 신인 3년차인 1998년 정영규동봉철을 상대로 시즌 중 트레이드되는데, 동봉철 역시 정영규와 마찬가지로 부진한 모습을 보여 주면서 결국 한화의 코너 외야수 한 자리를 당해 타율 .273의 3년차 이영우가 꿰차게 된다. 그리고 동봉철은 시즌이 끝나고 임창식을 상대로 쌍방울 레이더스에 트레이드된 후 부상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2.4. 전성기[편집]


이듬해 신인 4년차인 1999년, 그야말로 포텐샬이 대폭발한다. 이 해 성적은 타율 .334 13홈런 49타점 83득점 142안타. 특히 타율은 타격 6위의 훌륭한 성적. 이듬해인 2000년에도 .318로 타격 10위를 차지했고, 장타력도 늘어나 25홈런도 쳤다.

그리고 2004년까지 매년 기본이 3할 1푼, 못 쳐도 2할 9푼의 정확성과 잘 치면 25홈런, 못 쳐도 15홈런의 갭파워를 선보이며 맹활약한다. 일률적으로 비교하긴 어렵지만, 장성호와 비슷한 타입이었다고 보면 될 듯하다.[2][3]

전성기(1999년~2004년) 동안의 시즌 평균 성적은 다음과 같다.
  • 129.8게임, 142.5안타, 17.7홈런, 60.2타점, 87.7득점, 14도루, 9.2도실
  • 타율 .312, 출루율 .410, 장타율 .508

테이블세터의 OPS가 .918 이었다!

다만 주루플레이는 부진했다. 팀 사정상 주로 1번, 2번 타자로 출전하면서 도루를 하긴 했는데 매년 15~20개 가량의 도루를 하면서 도루 실패도 매년 두 자리수에 가까왔다는 게 문제였다. 예를 들어, 2004년엔 도루 20개를 기록하면서 커리어하이를 찍는데, 도루실패도 12개를 기록했고, 심지어 2000년엔 7도루 12도실을 기록하며 당최 도루를 왜 하는지 사람 알쏭달쏭하게 만드는 주루능력을 선보였다. 아예 장성호처럼 도루시도를 하지 말든가

이로 인해 당시 팬들 사이에선 이영우가 팀을 위해 도루를 안 하는게 더 낫다는 평가가 절대적이었다. 사실, 일반적으로 도루 성공율이 70% 이상이면 팀에 도움이 되고 65~70이면 그래도 투수를 괴롭히기 때문에 반반이라 보는데, 이영우는 통산 112도루 81도실로 도루 성공율은 달랑 58%이다. 덧붙여서, 통산 100개 이상의 도루를 기록한 타자 중 이영우보다 성공률이 낮은 타자는 없다. 심지어 양준혁도 62%다.

수비능력을 말하자면... 신인 시절에는 중견수를 보기도 했으나 제이 데이비스가 들어온 이후로는 주욱 붙박이 좌익수였다. 이것만으로 감이 올 것이다. 혹자는 그의 수비범위가 세발자국이라고...


2.5. 몰락[편집]


2004년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이 터진다. 사건 초기만 해도 당시 만 31살의 스타플레이어 이영우가 이 사건에 연루되었으리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나...

당시 병역 비리가 발각된 선수 중에서 이영우가 만 31세로 최고령자였다. 그러니까 걸어다니는 커트라인이었던 셈(...). 이렇게 나이가 나이인지라 팬들 중에 이영우가 이 사건에 연루되었으리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사건에 연루된 선수 중에서 이영우가 최고의 스타플레이어였다. 수치를 통해 비교해보자.

  • 사건에 연루된 선수 중 모든 타자(1군에서 단 한 경기라도 뛴 타자. 총15명)의 2004년까지 통산 홈런: 166개
  • 이영우가 2004년까지 기록한 통산 홈런: 126개 본격 15:1의 기상

이 중에서 이영우 다음 2인자(...)였던 정성훈의 42홈런을 제외하면, 124:126으로 이영우가 아슬아슬하게 승리(?)를 거둔다.

특히 아쉬운 점은 이영우는 당시 FA를 단 1년 앞두고 있었다는 것. 게다가 이영우는 비리로 병역 면탈을 했음이 뒤늦게 밝혀져 별도의 사법적 처벌 없이 only 신검만 다시 받으라는 처분이 내려진 것이고, 그 재검을 통해 공익근무[4] 처분이 내려진 것이다. 잘못한 게 맞긴 하지만 운이 지지리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전까지 팀에 대한 공헌도와 FA를 코 앞에 두고 쪽박을 차게된 점(...)을 감안해 구단에서 2005년 연봉으로 2004년보다 8% 인상된 2억7천만을 안겨주었다는 것. 그야말로 베테랑에게 대인배 of 대인배[5]스러운 한화 구단다웠다.


2.6. 공익근무 후[편집]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이영우는 2년간 공익근무를 마친 뒤 만 34살의 나이로 복귀한다. 올드팬들은 부활 이영우를 외치며 응원했으나, 정말로 만 34세 + 2년 공백의 타자가 예전같은 활약상을 보일 것으로 믿진 않았다.

그래도 2007년부터 2009년까지 풀타임 주전은 아니지만 사실상 주전으로 매년 1군에서 80~90경기 가량 출전하며 어느정도 제 몫을 해준다. 이 3년동안의 성적은 타율 .267 출루율 .334 장타율 .378 9홈런으로 백업으론 그럭저럭 성적이긴 한데, 과거 이영우의 활약상을 아는 팬들에겐 그야말로 피눈물나는 성적. 한 마디로 말해 감각이 떨어졌다는 것.

그나마 일말의 기대감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매년 성적이 향상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 2007년 - 97게임 타율 .238 출루율 .320 장타율 .313 0홈런
  • 2008년 - 89게임 타율 .288 출루율 .345 장타율 .402 2홈런
  • 2009년 - 93게임 타율 .277 출루율 .345 장타율 .427 7홈런

그러나 문제는 역시 수비. 전술했듯이 이영우는 붙박이 좌익수(...)일 정도로 수비능력은 낮은 편이었는데, 나이를 먹은데다 2년의 공백기까지 가졌으니... 결국 그렇잖아도 막장인 한화 이글스 수비에 막장 한 조각을 더할 뿐이었다. 가네모토 도모아키처럼 좌익수 앞에 떨어지는 공도 유격수가 중계를 해야 할 정도였으니...

복귀 후 3년 동안 숙녀어깨에서 소녀어깨를 거쳐 급기야는 유녀어깨(...)로 3단 변신하는 모습을 보여주며,[6] 결국 지명타자 말고 제대로 소화해낼 수 있는 포지션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뭐, 이렇게 전부 본인 책임처럼 적어놨지만 김인식 감독의 혹사 역시 이영우가 몰락하게 된 이유중 하나. 김인식 감독 항목 참조.

2007년에는 0홈런으로 마감하고 마는데, 사실 2007년 6월 28일에 기아를 상대로 역전 만루홈런을 때린 바 있다. 군 제대 후 때린 첫 홈런이자 개인통산 3번째 만루홈런이었지만, 3회 쏟아진 거짓말 같은 폭우로 노게임 된 것.

2008년 4월 11일에는 오심으로 인해 홈런 한개를 도둑맞았다. [7]


3. 은퇴[편집]


2010 시즌이 시작되고 예전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제몫을 해주면서 팬들은 이영우가 타선에 어느 정도 보탬이 될 것이라 기대했다. 팀 상황이 막장 그다지 좋지 않은 가운데 이도형플래툰으로 지명타자 자리를 채워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 개막 직후 달랑 3경기 지명타자로 선발 출장하더니 갑자기 4월말까지 행방불명
  • 4월 21일 복귀, 열흘동안 거의 매경기 대타로 출장하더니 5월이 되자 행방불명

이때 남긴 성적은 21타수 2안타로 달랑 9푼5리(...)이다.

그리고 이영우가 자취를 감춘 5월부터 입담만 좋은 팀의 신임감독예전 이영우와 비슷한 타입의 좌타자를 사달라는 징징거림이 심해졌다. 단, 한대화의 장징징(...)은 오프시즌부터 시작되었다. 단지 이영우가 더이상 통하기 어렵다는 게 확인된 5월부터 구단 무시하고 기자들에게 장징징을 2배로 시전하기 시작했던 것.

사실 장성호가 한화에 입단하면 이영우의 입지가 필연적으로 좁아질 수밖에 없는데, 둘이 서로 비슷한 타입의 좌타자인데다가 둘 다 수비가 막장 수비가 좋은 편이 아니라 맡을 수 있는 포지션이 지명타자, 1루수, 가끔 눈 질끈 감고 좌익수(...)로 완전히 겹치기 때문. 게다가 장성호는 이영우에 비하면 나이도 어리고 몸은 더 튼튼했고 부상으로 신음한 적은 없었다.

그러다가 결국 2010년 9월 중순, 현역 은퇴를 선언한다. 은퇴식은 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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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외면해도 이상하지는 않았던 게, LG는 전통적으로 좌타 외야수 왕국인데다가, 이미 2년 전에 이영우와 비슷한 플레이 스타일에 한살 어린 김재현이 좌익수 겸 2번타자 자리에 말뚝박은 상황이었다. 문제는 이영우를 거르고 뽑았던 게 공만 빠른 우투수인 희대의 먹튀 이정길이었다는 것(...)[2] 2001년에는 왼쪽 허벅지 근육이 파열되는 부상을 입어 타율이 0.286까지 떨어졌으나 OPS는 0.871을 기록했다.[3] 다만 꾸준함 면에서는 양준혁이 10년연속 타율 3할에 실패할 당시로 한정하면 장성호를 따라갈 자가 없었다.[4] 이영우가 부산 아시안 게임 금메달 획득으로 병역 특례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전혀 그렇지 않다. 정대현과 마찬가지로 기자들이 잘못 알고 있는 사례.[5] 단, 군보류 수당이 적용되어 연봉의 25%만 지급되므로 알고 보면 대인배라고 보기도 어렵다.[6] 사실 복귀 이후 심각한 어깨 부상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이를 알고 있던 모 감독은 아예 한화와 경기할 땐 아예 좌익수 쪽으로 공을 많이 보내라고 했을 정도.[7] 결국 그해 5월 7일에 127호 홈런을 쳐냈고, 이 홈런은 126호를 친 이후 1,325일 만에 생산한 홈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