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권 치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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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lee jong kwon incident.jpg
구속되는 사건의 주모자

1. 개요
2. 사건 경과
3. 유사 사건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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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97년 정의찬을 비롯한 남총련 간부들이 '박철민'이란 가명으로 전남대학교 학생 행세를 하고 다니던 이종권(당시 25세)씨를 경찰측 프락치로 의심하고 집단 폭행, 고문한 끝에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

남총련 사건이라고도 부르며 안 그래도 바로 직전 해에 연세대 사태로 인해서 이미지가 나빠지던 학생운동에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이석 치사 사건과 더불어 결정타를 날린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2. 사건 경과[편집]


폭행을 주도한 학생들은 한총련의 지부인 남총련의 투쟁국원, 기획국장, 정책위원 등 다섯 명의 간부들이었다. 소주 12병을 나눠 마시고 만취한 상태였던 이들은 피해자를 남총련 사무실 방으로 끌고 가 그의 본명과 학생이 아니란 것을 확인받자 경찰 프락치란 것을 자백하라며 주먹은 물론 쇠파이프와 물병을 이용해서 구타하였다.

직접적인 사인은 구타 중 강제로 먹인 소화제가 기도에 걸려 질식사한 것으로 판명됐다. 후일 경찰 조사 결과 이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간부가 무려 18명이나 된다는 것이 밝혀졌고 최종적으로 전부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사건의 주모자들은 '술 취한 주정뱅이가 캠퍼스에 쓰러진 것을 병원으로 데려가 응급조치를 했다\'는 거짓 증언으로 사건을 보름이나 은폐하다가 경찰 수사 결과 탄로났다.

재판 기록에 따르면 이종권은 송원대학교[1] 졸업생으로서 '박철민' 이라는 가명으로 전남대생을 가장하여 문학동아리 '용봉문학회'에 가입해 활동했다고 한다. 용봉은 전남대 캠퍼스 소재지에서 따 온 이름으로 1976년 창설 이래 시인 곽재구, 소설가 임철우 등을 배출한 유서깊은 동아리였는데 2011년 해체됐다.

이 사건의 발단은 1997년 5월 27일 20시 20분경 동아리 측 회장이 아무래도 학생이 아닌 것 같다며 선배들에게 조사를 의뢰한 것이다. 당시 경찰과 정보기관에 잠입시킨 프락치들이 대학가에 득실대던 시대라는 얘기도 있지만 설사 프락치였다고 하더라도 과거 정보기관과 같은 방식으로 감금, 고문을 통해 사람을 죽일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남총련의 운동권 간부들은 이종권을 프락치로 간주하고 고문하면서 취조했다. 사건 이후 경찰은 이종권이 프락치라는 주장을 일절 부인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1997년 6월 19일에 전남대 총장 노성만이 교수진을 대표해 공식 사과 성명을 발표했고 개교 45주년 기념 행사도 일체 취소되었다.

여러모로 한국 학생운동의 흑역사라고 할 만한 사건이다. 당시의 기사

그런데 당시 가담했던 간부 중 한 명인 구광식 전남대 총학생회 섭외부장은 2003년에 3개월 간 20여 회에 걸쳐 연쇄 강도강간을 저질렀고 결국 강간살인까지 저지르면서 또 사람을 죽였다. 결국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출처

그리고 2021년 8월 26일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이 사건의 가해자 중 한 명인 정의찬을 경기도 산하기관인 수원월드컵경기장관리재단 사무총장으로 임명한 사실이 기사화되면서 이 사건이 재조명되었다. 정의찬은 이 일이 밝혀지자 사무총장직을 사퇴했지만 이후 선대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3. 유사 사건[편집]


사실 이종권 치사 사건은 당대에 알려지지도 못했다. 오히려 운동권의 문제로 조명된 것은 비슷한 시기였던 1997년 6월 4일 한총련 출범식을 앞두고 한양대학교에서 일어난 이석 치사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당시 5월 31일 예정되었던 5기 한총련 출범식이 무산된 한양대에서 한총련 간부들이 캠퍼스 주변을 배회하던 선반기능공 이석(당시 23세)을 경찰의 프락치로 의심해서 집단 구타하다가 사망한 사건이다.

이석 치사 사건은 여야 정당이 비판 논평을 내고 국무총리, 내무부장관, 제1야당 당수가 빈소에 조문을 가는 등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켰으며 전해인 1996년에 일어난 연세대 사태로 휘청거리던 한총련과 학생운동에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큰 타격을 안겨주었다. 이 사건 이후 한총련은 이적단체로 규정되어 간부들은 자동 수배되었고 많은 대학들이 한총련을 탈퇴했다.

그때까지 한총련의 취객을 발견했다는 주장을 믿던 경찰은 이석이 사망한 후에야 운동권 학생들의 고문치사를 염두에 두고 수사하여 1997년 6월 13일에야 이를 밝혀내기에 이르렀다.

먼 과거에는 1989년 연세대학교에서 설인종 고문치사 사건이라는 유사 사건이 있었다.

1984년 서울대학교에서도 가짜 대학생들을 프락치로 보고 감금, 고문한 서울대 민간인 감금 폭행 고문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주도한 건 복학생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무식하게 구타해 놓고 잠적하는 바람에 직접적으로 폭행에 가담하진 않은 복학생협의회 의장이었던 유시민도 감옥에 갔는데 이때 그 유명한 항소이유서를 썼다. 다만 훗날 유시민은 자신의 책에서 이 일에 대해 '설사 진짜 프락치였더라도 그랬으면 안 되었다'는 언급을 한 적이 있다.

한국 이상으로 학생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던 일본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산악 베이스 사건이라고 불리우는 사건인데 연합적군 계열의 운동권 학생 30여명이 자신들의 행동거점인 산장에서 일으킨 사건이다. 공산주의 특유의 자아비판을 총괄이라고 부르던 이들은 그 과정에서 구타를 가했고 이것이 점점 심해지면서 린치 살해로 발전했다. 살해당한 인물의 수는 12명에 이르렀으며 그 원인은 키스를 나누었다든지 아니면 간부의 질투를 샀다든지 하는 시시한 것으로 이 사건의 내막이 알려짐으로써 당시까지 부패한 일본 정부에 대항하는 젊은 혁명가 정도로 취급받던 연합적군은 순식간에 평가가 나락으로 떨어졌고 일본을 뒤흔들던 학생운동도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일본 매스컴의 흑역사 중 하나다. 심지어 연합적군에 살해당한 경찰을 부패한 권력의 주구 정도로 취급하여 연합적군을 찬양하는 기사를 내보낸 적도 있다.

해당 이후 터진 아사마 산장 사건으로 일본의 좌익계 학생운동은 완전히 전멸해 버렸고 이때의 일본의 충격은 의외로 겟타로보에서 재현되었다. 과격한 학생운동가의 이미지를 따서 만들어진 것이 겟타 2의 진 하야토이고 오시이 마모루도 이러한 사건이 일어날 때쯤부터 학생운동에 참여한 경력이 있다.


4.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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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에는 송원전문대학이었다. 2012년에 4년제 대학으로 변경됐다.[2] 해프닝과 관련한 해당 문단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