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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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 대한제국 장조의 6대손[1]
이해청 | 李海淸}}}
본관
전주(全州)
성명
이해청(李海淸)
황실명
이광(李鑛)[2]
아명
이형길(李亨吉)
국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양부
이기용
양모
연안 김씨
생부
의친왕
생모
송은점(宋恩点)[3]
형제
이복형제: 이건, 이우, 이해진[4], 이해직[5],
이수길[6], 이곤, 이경길[7], 이해룡[8], 이석,
이해준[9], 이해선[10]

이복남매: 이해완[11], 이해원[12], 이해춘[13],
이해숙[14], 이해경[15], 이희자[16],
이해란[17], 이해련[18], 이창희[19]
출생
1921년 5월 7일[20]
사망
1952년 8월 12일 (향년 31세)
경상남도 부산시 신선대#
학력
서대문소학교
경성중학교
가쿠슈인
도쿄제국대학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가족과 후손



1. 개요[편집]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의 손자이자 의친왕의 7남. 남연군계 종가(宗家)인 계동궁의 사손 이기용[21] 양자이다.

황실명은 이광(李鑛), 아명은 이형길(李亨吉)로, 이해청(李海淸)이란 이름은 7촌 재당숙 이기용[22][23]양자로 들어갈 때 지은 법적 이름이다.


2. 생애[편집]


6살 때 이기용의 양자로 입적했다. 경성유치원을 다녔고# 서대문소학교와 경성중학교를 거쳐 일본으로 유학가 도쿄 가쿠슈인도쿄제국대학을 다녔다.#

유학 시절 일제가 강요한 학병 징집을 거부했다.# 그래서 같이 거부했던 귀족 자제들과 함경남도 원산의 철공장으로 강제로 끌려가 많은 고초를 겪었고 결국 신경쇠약에 걸리고 말았다.

8.15 광복 후인 1946년 9월 서울대학교 국문학과에 편입하여 2년 뒤에 졸업했다. 졸업 후 이화여자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쳤다.#

6.25 전쟁 때는 부산으로 피난갔고 숙명여자대학교[24]에서 국어 강사로 일했다.# 1952년 7월 15일에 대한민국 외무부 통상국 정책과 사무관으로 임명받고 활동했다. 그러나 1달도 채 못지난 1952년 8월 12일에 신선대에서 수영하다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3. 여담[편집]


  • 박관우 칼럼니스트가 이해청 서거 60주기를 맞아 〈브레이크 뉴스〉에 그의 생을 정리하는 칼럼을 올렸다.#

  • 생가의 적모 의친왕비를 잘 따랐던 것 같다. 계동궁으로 가기 전까지 친자식처럼 사랑해주었던 기억이 있어서인 듯 하다. 그래서 인사동 경성유치원에 다니던 시절에 유치원 수업이 끝난 후 사동궁에 매일 들러 집(계동궁)에 가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렸다고 한다.# 또한 이해청이 원산으로 징용에 끌려갔을 때, 걱정하는 의친왕비를 생각해 의친왕비의 친척동생이 이해청과 동행해서 철공장 근처에 방을 얻어 가까이 머물렀고, 이해청이 신경쇠약에 걸렸을 때 의친왕비가 직접 충청남도 예산에 있는 남연군 묘소에 데려가 요양을 시키는 등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고 한다.#


4. 가족과 후손[편집]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원래 계동궁가에서 관리했던 남연군묘를 조카[25] 이청이 관리했다가 충청남도에 기증했다고 한 것을 보면, 후손이 없는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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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로는 대한제국 의친왕의 7남 이다. 후술하겠지만, 일제강점기에 어쩔 수 없이 재당숙 이기용의 양자로 입적하였기에, 이기용 일가의 마지막 군주(추존 군주 포함)이었던 장조(사도세자)를 기준으로 적었다. 수정하지 말 것.[2] 전주 이씨 종친인 이근배라는 사람이 의친왕비 앞에서 받아적은 기록에는 이황(李鎤)이라 기록되어 있다.#[3] 사동궁의 간호부였다. 이해청이 두 살 때 궁을 떠났다.[4] 황실명 이방.[5] 황실명 이창.[6] 황실명 이주.[7] 황실명 이현.[8] 황실명 이갑. 아명 충길. 이원 황사손의 생부이다.[9] 황실명 이정.[10] 황실명 이환.[11] 황실명 이영.[12] 황실명 이진.[13] 황실명 이찬.[14] 황실명 이숙.[15] 황실명 이공.[16] 황실명 이장.[17] 황실명 이용.[18] 황실명 이현.[19] 황실명 이민.[20] 음력 3월 30일#[21]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큰형 흥녕군 이창응의 양손자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22] 이해청 말고도 호적상 인정받지 못한 의친왕의 딸들도 이기용의 호적으로 들어갔다. 일단 호적이 있어야 등교 등의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단, 일제 말에 태어나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해방을 맞이했던 9남(이갑: 황사손 이원의 생부), 10남(이석), 11남, 6녀, 7녀, 그리고 해방 이후에 태어난 12남, 8녀, 9녀는 이기용의 호적에 들어가지 않았다.[23] 예외로 6남 이곤과 8남 이현은 일제 초기에 태어났음에도 이기용의 호적에 들어가지 않았다. 6남 이곤의 경우, 비록 의친왕의 가계와 직위를 장남 이건이 이었다지만, 이건을 탐탁지 않게 여긴 의친왕이 차선으로 이곤을 생각했기에 양자로 보내지지 않았다. (이건은 결국 2차 대전 이후 일본에 귀화해서 남은 생애를 일본인으로 살다 죽었다.) 차남 이우부터 5남 이광까지는 전부 다른 왕족들의 양자로 갔기 때문. 8남 이현(평생 독신으로 살다 1996년 요양원에서 사망)은 어른의 사정이 들어가 있었다.[24] 할아버지 고종후궁 순헌황귀비 엄씨가 세운 학교이다.[25] 이해청의 둘째 형 이우의 장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