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1962)

덤프버전 :




대한제국 고종의 증손
이원 | 李源

어가행렬 중의 황사손 이원
본관
전주(全州)
이름
상협(相協) → 원(源)[1]
국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2]
양부
이구[3]
생부
이갑[4]
생모
이경숙
가족 관계
남동생: 이정
여동생: 이은영
부인: 최희정
장남: 이권(1998년생)
차남: 이영(1999년생)
출생
1962년 9월 23일 (61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
학력
상문고등학교 (졸업 / 6회)
뉴욕 공과대학교 (신문방송학 / 학사)
재임기간
대한제국 황실 수장
2005년 7월 16일 ~ 현재
경력
HBO 프로듀서
현대방송 프로듀서
현대홈쇼핑 디지털 방송 본부장
대한황실문화원 이사장
링크[5]
파일:대한제국 국장.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
2. 제정복고에 관한 시각
3. 생애
3.1. 이구 사망 이전
3.2. 이구 사망 이후
4. 가족과 후계
5. 황실적통에 대한 논란
6. 여담
7. 참고



1. 개요[편집]


대한제국 황실의 명목상 수장인 황사손. 황사손은 황통(皇)을 잇는(嗣) 자손(孫)이란 뜻으로 조선, 대한제국의 3대 의례인 종묘대제, 환구대제, 사직대제와 조선 왕릉에서 지내는 제사를 관장한다.

본명은 이상협으로 고종의 둘째 황자 의친왕의 9남 이갑의 아들로 태어났고, 2005년 7월에 이구의 명목상 양자가 되었다.

실현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지만 대한제국 황실 복원론은 사실상 이 사람을 황제로 옹립하자는 것이다. 대한제국 황실의 의민황태자 영친왕의 아들이였던 이구의 양자[6]고, 이구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혈통상 가장 가까운 황실 가문인 이구의 큰아버지 의친왕 계에서 양자를 들여야 했고, 황실 서열1위인 이준[7]은 의친왕가의 종손으로 사동궁을 이어야 하기에 차기 서열인 이원이 그 다음으로 서열이 높았던 조카이기 때문이다.


2. 제정복고에 관한 시각[편집]


이원은 본인을 황태자로 칭하고 있지만 황실 복원을 주장한 적은 없다. 오히려 〈정영진, 최욱의 매불쇼인터뷰에서 자신은 '민주주의 틀 안에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본인의 책임을 다한다'고 말했다.

이원과 달리 황실 복원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사람은 의친왕의 10남인 이석[8]이나 의친왕의 차녀인 이해원[9] 정도가 있다. 더욱이 황사손이란 과거 민가에서 가문의 제사를 봉양하기 위해 친척 중에 봉사손이라고 뽑아 부르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대한제국 황실의 대통이었던 이구의 사망으로 발생한 제례 공백을 이원이 물려받아 모든 제례를 '봉행(奉行)'하는 것이다.

다만 이원이 군주의 자리를 요구한 적이 없음에도 황위(왕위) 요구자로 분류되는 이유는 국제적으로 구 왕족들(특히 유럽) 등의 폐위된 왕손들이 왕가를 잇고 있는데, 유럽의 공화국들은 일단 이들에게 명목상 왕가로 인정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저 '요구자(Pretender)'라는 호칭은 그냥 군주였던 사람의 후손 중 군주제가 이어졌다면 그 지위를 계승했을 인물이라는 가정이지 무조건 군주의 자리를 요구한다는 것이 아니다.[10] 번역어가 본 뜻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주장하든 안하든 전부 다 통틀어서 작위(왕위) 요구자로 묶는 측면이 없잖아 있다. 물론 대한민국이야 애당초 유럽하고 상황이 다르다.

더군다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부터 왕정에 극도로 부정적이었고, 공화국으로 건국된 나라이기 때문에 국민 대부분이 전제군주제는 물론이고 입헌군주제에도 부정적이라 군주제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한 구한국 자체에 엄청난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북한이 당장 위에 자리잡고 있어서 향후 남북통일에도 걸림돌이 가능성이 높으므로 형식적으로라도 군주제 복고가 일어날 수 없는 환경이다.[11] 그러므로 남북통일 때 구 황실이 군주제 복고를 주장해봤자 오히려 그나마의 평판도 깎이기 때문에 가능성 자체가 거의 없다. 현재 2000년대 이후로 항상 대한민국 정계에서 나오는 10차 개헌 떡밥에서 의원내각제 개헌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어디까지나 대한민국 제7공화국이 목표이지 황실 복원(군주제 전환)은 농담으로라도 언급하지 않는다. 물론 유럽이나 아프리카의 일부 공화정 국가에 존재하는 왕 또는 족장 등 공화국이라도 사실상 관습적 군주로 간주하고 이를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비주권군주제라는 예외도 있으나, 이 역시 국민과 군주 간 오랜 역사와 전통이 빚어낸 신뢰와 합의가 바탕이 되어 오늘날까지 유지되는 특이한 사례로 대한민국과는 무관하다.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황제 즉위식 재현을 한 것 등에 대한 비판도 있었지만 이건 본인이 황제라는 의미가 아니라 황사손으로서 문화 행사에서 황제 역할을 맡아서 수행한 것뿐이다.

다만 문제가 될만한 것은 있다. 이원이 수장을 맡고 있는 대한황실문화원 공식 홈페이지에서 본인을 황태자, 아내를 황태자비, 아들들을 황자로 표현한 것이다. 또한 대한황실문화원에서 배포하고 있는 단체 소개 브로셔에서 본인을 황태자 이원으로 소개하고 있다. 양조부인 영친왕이 황태자였고, 양부 이구 또한 황세손이기에 본인이 황태자가 되는 것은 전혀 예법에 맞지 않지만 주변이나 언론에서 자신을 황태자로 불러서 그리 쓰고 있다고 주장한다. 스스로 황사손보다 황태자 명칭을 즐기는 것으로 보인다.


3. 생애[편집]



3.1. 이구 사망 이전[편집]


1962년 9월 23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에서 태어났다. 1981년 상문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이듬해 아버지 이갑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공과대학교(New York Institute of Technology, 약칭 NYIT)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미국 케이블 회사인 HBO에서 6년간 PD로 일했다. 1990년 귀국 후엔 광고 회사 금강기획[12]에서 5년 동안 방송 제작업무를 담당했으며, 이후에는 케이블 채널 현대방송에서 PD로 일했다. 당시 정보통신 발달과 함께 발전한 뉴미디어와 케이블방송에서 가능성을 보았다고 한다. 여담으로 뉴미디어 사업본부로 들어갈때 면접을 본 사람이 다름아닌 정몽헌현대그룹 회장(당시에는 현대전자 대표이사)이었다고 한다.#

또한 결혼 관련 케이블 채널인 뷰티TV에 설립 멤버로 참여했고, HOT가 한창 인기가 있을 때는 관련 캐릭터 사업을 담당했으며 그들이 주연으로 나온 3차원 입체영화 〈평화의 시대〉 제작에도 참여했다. 이후 2001년 현대홈쇼핑 개국과 동시에 창립멤버로 합류했고 여러 팀의 부장으로 재직했다.[13]# 2002년 경부터는 당시 첨단 기술로 촉망받던 유비쿼터스DMB 관련 공부도 열심히 했고# 간간히 언론과 사업 관련 인터뷰도 했다.##

3.2. 이구 사망 이후[편집]


2005년 7월 16일 슬하에 후손없이 사망한 이구[14] 사후양자(死後養子)로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으로부터 지명받았다. 그러나 현행 민법상 사후양자 제도[15]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법적인 양자 지위는 없다.[16] 양자가 된 이후 황사손(皇嗣孫)[17]으로서 현재 조선왕릉이나 종묘에 대한 전반적인 제사/제례를 모두 맡고 있다.

순종영친왕의 후사가 다 끊긴 상황에서, 그들의 유일한 형제인 의친왕의 손자가 (명목상이나마) 황실 후계자가 되는 것 자체는 적절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왜 9남 이갑의 장남인 이원이 황사손이 되었는지 의문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서열 상으로 황실 서열 1위인 6남 이곤의 아들 이준은 의친왕가의 종손으로 사동궁을 이어야 했기에 그 다음으로 이원이 가장 높았다. 왜냐하면 장남 이건(일본명 모모야마 켄이치)은 일본으로 귀화했고, 의친왕가를 계승한 6남 이곤 외에 2남부터 7남까지는 이미 각각 출계하여 법적으로는 다른 방계 황족의 후사를 이었고(2남 이우, 3남 이방, 4남 이창, 5남 이주, 7남 이광), 8남 이현은 독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명목상이지만 황실 후계자이니만큼 나름 안정적이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위치에 있는 것 역시 중요한 선정 기준이었다. 또한, 2020년 10월에 이원은 〈정영진, 최욱의 매불쇼〉에 출연하여 황사손으로 지명받은 또 다른 이유에 대해 "이구가 한국어를 잘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영어를 할 수 있는 것도 요인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열과 현실적인 이유를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그가 가장 적합했던 것이다.

(명목상) 양자 입적 후 삼년상을 치렀고, 현재는 조선 왕실의 5대 제향 등에서 초헌관(初獻官)을 일임하고 있다. 본인은 스스로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총재 혹은 명예총재라고 명명하곤 했지만 정작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는 정관에 총재직을 삭제하였기에 1대 총재 의친왕 이강, 2대 총재 영친왕 이은, 3대 총재 황세손 이구를 끝으로 종약원의 총재 직함은 끝나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원은 계속 스스로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의 총재 혹은 명예총재라고 지칭하는 경우가 있어 2023년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상임이사회에서 총재 혹은 명예총재라는 단어를 쓰지 말고 황사손만 쓰라고 권고 받기도 하였다. [18]

이원은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측에 황사손이라는 직함 대신 황태손 혹은 황태자로 변경해 달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는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원래 전공인 미디어 컨텐츠를 바탕으로 황실 문화를 대중들에게 널리 알릴 목적으로 사단법인 대한황실문화원을 세워 총재를 맡고 있다.

원래는 회사 생활과 황실 의례를 병행하려 했지만 황실의 그 많은 제례 행사와 회사 일을 도저히 같이 하기 힘들어 퇴사했다. 그렇지만 당연히 이런 행사만으로는 밥벌이가 안 되기 때문에 생계는 여러 회사경영컨설팅(management consulting)을 하며 유지하고 있다.# 단, 대동종약원과 문화재청 등에서 활동비 명목의 예산 자체는 꽤 나온다고.

종묘제례 등 전통의식 수행 외에 황실 관련 문화재 반환 문제 등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기도 했다.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인터뷰 기사 #1, #2, #3. 이원은 황사손 직위에 오른 이래 대한제국 황실 복원을 직접적으로 주장하지는 않고 있지만 황실의 문화를 전통이자 문화콘텐츠의 일종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 생각의 연장선에서 2015년부터 개최된 《궁중문화축전》도 기획했다.

이원 본인이 창덕궁 낙선재[19]에 거주하면서 관광 안내를 하는 방안을 매년 제안했으나 문화재청 측에게 번번이 거절당했다고 한다.# 이러한 아이디어의 배경은 '살아 있는 궁(宮)'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황실 복원 및 입헌군주제 관련 정치적으로 민감한 발언은 거의 하지 않았던 이원의 활동 중 꽤나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20]

4. 가족과 후계[편집]


슬하에 아들이 2명 있다. 아들들은 이원이 황사손이 되었을 때까지 자신들이 대한제국 황실의 후손인 것 자체를 전혀 몰랐다고 한다. 애초에 이원 본인도 1981년 미국에 이민을 가던 시점에서야 자신의 뿌리에 대해 제대로 알았다고 한다. 이민을 가면서 한국에 언제 다시 돌아올지 장담할 수 없어 아버지 이갑이 그때서야 제대로 얘기를 해줬다고 한다.#

이원은 아들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황사손이 될 것인지는 전적으로 아들들의 뜻에 맡기겠다고 밝혔다. 만약 승계 의사가 있다면 이원의 장남인 이권이 황사손이 될 것이고, 승계 의사가 없다면 차남 이영이, 이영 역시 승계 의사가 없으면 전례처럼 다시 의친왕계 남계 후손 중 가장 서열이 높은 사람이 차세대 황사손이 될 가능성이 높다.


5. 황실적통에 대한 논란[편집]


그를 대한황실의 수장으로 인정하지 않는 측에서는 민간 종친단체에 불과한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이 그를 황사손으로 지명하여 5대 제향 및 왕릉제향의 초헌관을 일임하는 제주 역할은 인정하나 그가 조선왕실과 대한황실의 적통을 이은 인물이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를 황실의 적통으로 인정하지 않는 대표적 인물은 전라북도 전주시의 지원을 받고 있는 황실문화재단의 총재이자 의친왕의 10남인 이석이 있다. 그는 애초 순종황제 다음 황위가 바로 손 아래 동생인 의친왕이 아닌 당시 10살에 불과한 영친왕을 옹립한 것 자체가 일본의 결정이었고, 황실의 위계질서를 무너뜨리는 일이었으며, 그 영친왕이 침략국 일본의 왕족인 이방자 여사와 강제결혼하여 일본인 혼혈 아들을 낳아 대한황실의 적통을 잇게 하는 것은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원래 황실의 위계대로 황통이 영친왕이 아닌 의친왕으로 돌리자는 주장은 일제잔재청산의 의미로 대중의 설득력을 얻기는 했으나, 의친왕으로 황통이 이어진다고 한들 의친왕의 10남에 볼과한 이석 본인이 황통을 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의친왕의 후계자는 6남인 이곤이 이었고, 황실의 예법 상 이석의 조카들이 황위 서열에서 본인보다 훨씬 높기 때문이다. 당장 의친왕의 후계자 이곤의 장남인 이준이 황실 서열 1위이고, 이준의 손아래 동생인 이원이 영친왕계로 양자를 가서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황사손에 봉무하고 있고, 그 외 본인보다 서열이 높은 조카들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석은 본인을 황실 적통이라 주장하고 있고, 아들이 없이 딸만 둘인 이석은 2018년 재미교포 앤드류 리(한국명 이상민)을 양자로 들여 미국 캘리포니아 베벌리힐즈에서 그를 황태자로 임명하는 의식을 치르며 이원이 황실의 수장이라는 것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다.한국일보:대한제국 황세손 남가주 대저택 사다. 조선일보:138억 미국 대저택 매입 알고보니 대한제국 황태자

이원을 대한황실의 적통으로 인정하지 않는 또 다른 단체로는 대한제국황족회가 있다. 2005년 이구 황세손이 후사없이 죽고 이원을 양자로 들여 황실 적통을 잇게 하자 의친왕의 차녀 이해원은 이원의 아버지 이갑(아명 이충길)의 어머니 함씨가 당호를 받지 못한 첩이라는 점과 의친왕의 아들인지 불분명하다는 점에서 이원이 황실의 적통을 잇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 단체는 2005년 당시 살아있는 황실의 후손 중 가장 연장자였던 이해원(의친왕의 차녀)를 여황제로 옹립하고 대관식을 열어 대한황실이 부활했다고 선언하였다.KBS뉴스:대한제국 황위 이해원 옹주 승계…‘황실 부활’ 선언 그러나 대한제국황족회라는 단체는 정작 대한황실 후손들의 단체가 아닌 기독교계열 종교단체가 주축이 된 것으로 논란이 있었다.

굳이 장자우선원칙에 따라 황실 족보대로 따져 적통을 꼽자면 고종황제의 장증손이자 의친왕가의 종손인 이준 황손이 황통 승계 서열1위이지만 그를 포함 대부분의 의친왕의 직계 황실후손들은 황실 적통에 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의친왕의 선양사업에만 집중하고 있다. 우리가 잘 모르는 의친왕의 삶, 역사적 재평가 꼭 해야죠

따라서 현재 이원을 황실의 적통으로 인정하지 않는 일부 단체와 인물을 제외하고는 대한황실의 후손들은 대체적으로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의 황사손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이원을 황실의 수장으로 인지하고 있는 분위기다.


6. 여담[편집]



  • 현대홈쇼핑 아동레포츠팀 부장으로 있던 시절에는 부하 직원들에게 젊은 감각으로 대했다고 한다. 회식 자리에서도 분위기 메이커로서 이승철의 〈희야〉와 클론의 〈꿍따리 샤바라〉를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회식 때 술을 많이 마시면 주사 없이 조용히 잤다고 한다. 물론 일할 때는 프로다운 면모를 보였다고 한다.#

  • 현대홈쇼핑에 재직하던 시절에는 쉬는 날마다 맛집 탐방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 2020년 10월 개최된 《궁중문화축전》 프로그램 중 하나인 〈헬로우 황태자〉에 출연하여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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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5년 7월 16일 황세손 이구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황실의 후손들과 상의 끝에 전주이씨대동종약원으로부터 공식 양자로 지명받고, 황사손이 되면서 항렬에 맞춰 개명하였다. 공교롭게도 현종과 동명이인.[2] 미국 국적이라는 말도 있었으나 실제로는 미국 영주권을 갖고 있었다가 1989년 포기했다고 한다. #[3] 어디까지나 명목상으로 법적 양부는 아니다.[4] 의친왕의 9남으로 아명은 충길(忠吉)이다. 호적명은 항렬에 따라 해룡(海龍)이다.[5] 대한황실문화원 홈페이지 및 SNS[6] 사후 입적[7] 의친왕 가문의 종손이자 사동궁 사손[8] 황실 복원 및 본인 황위 계승을 가장 열정적으로 주장하며 BBC 인터뷰 등에서 관련 발언으로 논란을 빚었다. 대표적으로 상술한 BBC 인터뷰와 채널A 〈쾌도난마〉에서의 낭설 주장 등 구 황실의 이미지에 좋지 않은 영향을 많이 남겼다.[9] 2020년 사망했다. 드라마 〈〉 열풍이 불던 2006년 9월 29일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대한제국황족회'라는 정체불명의 단체에 의해 '제30대 대한제국 여제'로 옹립되었지만 당연히 대한민국 정부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대수가 '30대'인 것은 순종(27대)에 이어 영친왕이구를 각각 28대, 29대 황제로 간주한 것.[10] 심지어 작위 요구자 항목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는 아예 군주의 자리를 거부한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하일레 셀라시에의 장남이었던 암하 셀라시에. 물론 암하 셀라시에의 경우는 옹립자들(데르그 쿠데타 세력의 온건파)이 막장이라 그런 것이었지만.[11] 북한 주민들이 황실에 대한 호감도가 높다면 통일의 구심점으로 영국, 일본처럼 나라의 상징성으로 활용하는 것 정도는 고려해 볼 수도 있겠으나 그런 것도 아니므로 할 명분도 없거니와 이득도 없다.[12] 정주영 시절 현대그룹의 광고기획을 위해 1982년에 설립된 기업.[13] 후술할 황사손 결정 당시에는 상품 제2본부 아동레포츠팀 부장이었다.#[14] 자신이 태어난 도쿄 구저택이 있었던 아카사카 프린스호텔 신관 객실에 머물다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사망했다.[15] 직계비속 없이 사망한 사람의 입후를 위하여 배우자, 직계존속 또는 친족회등 선정권자가 양자를 지명할 수 있는 제도로 주로 제사를 잇기 위하여 인정되었다. 조선 세종 때 도입되어 대한민국 민법도 1991년까지 사후양자를 법률상 양자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호주상속'이 '호주승계'로 변경되면서 사후입양은 더 이상 법적 효력을 갖지 않게 되었다.[16] 하지만 명목상이나마 양자로서 대통(大統)을 계승했기에 홍유릉 내의 회인원 제향에서도 직접 초헌(初獻)하며, 공석에서는 이구를 공식적으로 '아버님'으로 호칭한다.[17] 황사손의 계승을 인정하지 않는 측에서는 봉사손(奉祀孫)이라고 칭한다.[18] 조선 왕실과 단순 전주 이씨의 종친회는 이미 조선시대부터 족보와 제향 모두 분리되어 있었으나 도리어 현재는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이화문(오얏꽃🌸)을 심벌로 사용하고 조선의 5대 제향 및 조선 왕릉 제향 전반을 도맡는다. 더욱이 2000년대 중반 - 2010년대 초반에 황실 숭모 사업을 시도한 민간 단체가 여럿 생기며 황손 가계의 영향력이 강해지자, 오히려 종약원에서는 "황손들을 일반 전주 이씨 방계처럼 의친왕파로 분파시키자!"는 성토까지 있었다. 전주 이씨 종친회인 대동종약원은 일찍부터 왕실에서 분파해 그 후손의 수가 많은 파, 그중 특히 효령대군파의 입김이 강하다.[19]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덕혜옹주,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여기서 거주했다.[20] 이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이, 현재 황실 일원이 국익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분야가 있다면 문화재 분야이다. 과거 수탈과 식민지 시절 수탈된 문화재 환수 작업은 문화재청에서도 고심하고 있는 사안이나 예산 문제로 환수가 쉽지만은 않다. 라이엇 게임즈 코리아와 같은 민간기업들도 힘을 보태주며 몇몇 문화재를 국내로 가져올 순 있었는데, 황실 일원에게 이와 같은 역할을 부여하면, 최소한 황실 문화재와 관련해선 다시 돌려달라고 말하는 것에 보다 설득력이 붙을게 되는 것. 실제로 본인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어, "일본 내 일부 기관들은 시민단체 소속 신분으로는 유물을 관람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때가 있다. 그럴 때 황사손으로서 직계 조상들의 유물을 보러 왔다고 말하면 적어도 실체는 확인할 수 있어 환수 활동에 도움을 받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특사 혹은 홍보대사 자격으로 임명한다면 정부 휘하에서 움직이는 일원이기에 왕정복고 등에 대한 비판도 어느 정도는 무마할 수 있을 것이다. 이원 본인도 자신은 민주국가 대한민국의 민주 시민의 권리와 의무만 가지지 왕정복고는 추호도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공자의 직계 후손인 연성공도 현재는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이라는 장관급의 무보수 명예직으로 바뀌어 공자의 후손으로서의 특권은 전혀 없이 중화민국의 일반 국민의 신분에 불과한 상황이다. 대한제국 황사손 역시 이런 지위와 비슷하게 되어 일종의 인간문화재 같은 기능만 하도록 하는 것이다.[21] 첫 번째 에피소드인 〈살아있다! 대한민국에 황태자가? - 종묘제례 주관자로서의 삶〉은 다른 사이트를 통해 볼 수 없고 궁중문화축전 유튜브 채널을 통해서만 시청이 가능하다.
〈헬로우 황태자〉 Ep2) 〈오상진, 낙선재에 무슨 일로 오셨소? - 낙선재, 슬프지만 아름다운〉
〈헬로우 황태자〉 Ep3) 〈전하! 대한제국 오얏꽃에 무슨 일이? - 못다 핀 오얏꽃, 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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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진, 최욱의 매불쇼〉에 출연한 황사손(이원)



7. 참고[편집]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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