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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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 관계 관련 틀 파일:인도 국기.svg 파일:파키스탄 국기.svg 파일:방글라데시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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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적 관계
2.1. 인도 제국 해체 이후
2.2. 방글라데시 독립 이후
3. 교류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의 세 나라 관계에 대한 문서이다. 3국은 모두 남아시아에 위치해있으며 동시에 자국 내 각각 2억 명 이상의 무슬림 인구를 보유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인도의 경우 무슬림 인구가 2억이 넘는 상황이지만 인도 인구 자체가 워낙 많은 이유로 인도 무슬림들은 소수자인 상황이다.

2. 역사적 관계[편집]





비교하자면 중국 역사의 경우 황하 북쪽에서 남쪽 장강 일대로 문명이 확장해 왔다면 인도아대륙이 경우에는 인더스 강이 위치한 서쪽에서부터 동쪽의 갠지스강 일대로 문명이 확장하는 형태였다. 다시 말해서 북인도 지역의 경우 종교 이외의 부분에서는 남인도보다는 오히려 파키스탄 및 방글라데시와 역사/문화적 공통점이 더 많은 편이다.

근세 시대에는 무굴 제국이 인도 반도를 거의 대다수를 통일했다. 그러나 영국이 무굴 제국을 침략하여 영국령 인도가 된다. 영국령 인도 제국은 과거 무굴 제국 등에서 기득권을 유지하던 무슬림 관료 지주 계급과 힌두교도들 사이의 갈등을 부채질하였고, 힌두교도 민족주의 운동과 이슬람 모더니즘 운동이 서로 갈등하면서 독자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입말로는 거의 똑같지만 문자와 종교 어휘만 서로 다른 우르두어에서 힌디어가 19세기를 기점으로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한 사례를 들 수 있다.

봄베이의 힌두교도들은 영국의 기독교 선교에 저항함과 동시에 관공서에서 과거 무굴 제국 시절에 사용되던 나슈탈리크 문자 대신에 데바나가리 문자를 사용할 것을 요청하는데 영국 식민 당국이 이를 승인하면서, 데바나가리 문자를 읽지 못하는 인도 무슬림 관료층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이 침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봄베이의 힌두교도들이 아리아 사마지라는 근대화 단체를 설립하고 자체적인 신문을 발간하며 힌디어 어휘에 페르시아어 어휘를 잘라내고 고대 산스크리트어 어휘들을 상당수 부흥시키는 운동을 하며 힌디어를 우르두어와 차별화하는 운동을 진행하였다면, 인도아대륙의 무슬림들은 이에 질새라 서구의 과학기술 및 인문학 서적들을 우르두어로 번역하며 우르두어 근대화 작업에 열심히였다.

19세기의 자말룻딘 알 아프가니, 20세기의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처럼 무슬림들과 힌두교도, 시크교도들의 화합을 추구하는 인물들도 적지 않았으나, 결국 1947년 영국령 인도 제국은 자와할랄 네루인도 공화국모하마드 진나파키스탄으로 분리되어 독립하고 말았다. 벵골인 독립 운동가였던 찬드라 보세의 경우 오늘날 인도 공화국 외에도 방글라데시 내 세속주의자들 사이에서 위대한 독립운동가로 추앙받고 있다.

2.1. 인도 제국 해체 이후[편집]


1947년 8월 15일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독립하는 과정에서 파키스탄의 힌두교도 시크교도들이 인도로 이주하고 인도의 무슬림들이 파키스탄으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와중에 영국은 무슬림 인구가 다수이던 카슈미르 번왕국을 인도 영토에 포함시켰고, 이후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서는 카슈미르 문제를 두고 전쟁이 벌어졌으며 종전 이후에도 양국의 소규모 무력 충돌이 지속되는 상황이다. 펀자브 지역이 가장 이주민과 사상자가 많았지만 동파키스탄이 위치한 동벵골 지역에도 상당수의 비하르인 무슬림들이 이주하였다.

파키스탄 안에서도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 사이의 심각한 갈등이 발생하게 되었다. 파키스탄 운동은 우르두어 부흥 운동에 기반하여 발생한 운동인데, 동파키스탄 지역은 사실상 벵골인 단일민족 사회 즉 벵골어만으로 서로 의사 소통에 아무 문제가 없던 상황으로 이들 입장에서는 우르두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라는 조치가 차별적인 조치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서파키스탄에서는 민족 집단 구성이 워낙 다양하다보니 우르두어를 행정 언어로 삼는 정책에 반발이 적었으나, 동파키스탄에서는 서파키스탄에서 파견된 관료들이 현지 벵골어를 무시하고 우르두어로 현지 벵골인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당시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은 종교만 같다는 점만 빼면 민족적, 지역적으로 다르다보니 갈등이 심각해졌다. 중세 이래 동파키스탄은 중앙아시아 출신 무슬림들이 지주 관료가 되어 현지 주민들 위에 군림하는 구조였고 여기에 비하르인들이 끼어들면서 갈등이 격화되었다. 인도-파키스탄 분리 독립 당시 비하르에서 동벵골로 이주해온 사람들은 모국어가 우르두어였고 이들은 동파키스탄의 실세가 되어 벵골 현지인들을 심각하게 차별하였다. 서파키스탄에서 동파키스탄으로 파견된 관료들 역시 자신들이 지주 관료 계급이라는 엘리트 의식을 가지고 현지인들을 학대하였다. 동파키스탄의 쌀과 소고기는 서파키스탄으로 수탈되었고 1970년대 사이클론으로 동파키스탄이 심각한 타격을 받는 동안 파키스탄 정부의 구호활동은 서파키스탄 출신 가정에만 집중되었다. 이는 분리독립의 원인이 되어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이 일어나고, 인도의 지원을 받은 방글라데시는 독립을 한다.

2.2. 방글라데시 독립 이후[편집]


세 나라들 모두 서로 갈등이 있으나 인도와 방글라데시는 어느 정도 완화되기도 했던 기간도 있었으나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는 2017년 완화를 하려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갈등이 있는 편이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카슈미르를 두고 여전히 갈등이 있으며, 방글라데시는 오히려 인도편을 들어주고 있다. 힌디어와 우르두어는 문자와 일부 종교 어휘만 다르고 서로 사투리 수준으로 비슷한 언어인데도 방글라데시인들은 해외에서 인도인들을 만나 대화할 때는 힌디어를 사용하지만,[1] 파키스탄인들을 만나면 대개 영어로 대화한다. 그만큼 사이가 안 좋다.

방글라데시는 벵골어 억압 정책에 반발하여 독립한 나라이지만, 아직 방글라데시 내에는 벵골어 국어 정책을 폐기하고 우르두어를 다시 국어로 부활시켜야 한다는 운동도 있다. 당연히 대중적인 지지는 못 받지만 이런 단체들은 이슬람 극단주의와 결합한 상황이라서(대개 자마아티 이슬라미 계열이다.) 완전히 뿌리뽑히지는 않고 있다.

파일:Pak-India GDP per capita.jpg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는 파키스탄이 3국 중에서 1인당 GDP가 가장 높았으나 이후 인도에게 추월당했고, 방글라데시의 경공업 진흥 정책 및 가족계획 정책 등이 효과를 보면서 2010년도 이후에는 방글라데시가 파키스탄을 마저 추월한 상황이다.

파키스탄의 경우 펀자브 지역의 높은 생산성 및 미국의 군사 원조금으로 3국 중에서 비교적 소득 수준이 높았으나 출산율 억제 및 자국 내 탈레반 문제 해결에 실패하면서 해외 투자를 유치하는데 실패하고 미국의 원조금이 감소함에 따라 오늘날 3국 중에서 가장 성장률이 낮은 국가가 되었다.


3. 교류[편집]


삼국 모두 서로와 갈등을 겪었고, 아직까지도 살벌하게 갈등하고 있지만, 서로 모두 고등판무관 사무소[2]를 각국 수도에 설치해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즉 이 세 나라는 남북간이나 중국 양안과는 달리 서로를 외국으로 인식한다.


4.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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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힌디어와 벵골어가 가까운 사이인데다 볼리우드 영화 때문에 간단한 힌디어 정도는 다 한다.[2] 영문명은 High Comission. 영연방 국가들끼리는 이것이 대사관이나 마찬가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