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론 머스크/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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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기 생애
1.1. 유년기
1.2. 청소년기
1.3. 북미로의 이민
1.3.1. 캐나다
1.3.2. 미국
2. 창업 및 경영
3. 둘러보기


1. 초기 생애[편집]



1.1. 유년기[편집]


1971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프리토리아에서 엔지니어인 부친 에롤 머스크와 모델 겸 영양사인 모친 메이 머스크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남아공으로 이민했던 백인 가정의 후손들 중 다수가 재산이 많았던 것도 있고, 아버지인 에롤이 남아공에서 최연소로 기술사 자격을 취득한 우수한 전기 기술자여서 어린 시절 머스크의 집은 상당히 부유했다고 한다. 에롤은 젊은 시절 에메랄드 광산 채굴권을 헐값에 구입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디펜던트지#에 의하면 에롤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 당시 우리는 매우 부유했습니다. 돈이 너무 많아서 금고의 문을 닫을 수도 없었습니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애슐리 반스가 쓴 《일론 머스크:미래의 설계자》에 따르면 "어린 시절 머스크의 집은 프리토리아에서 가장 큰 집 중 하나였고 에롤은 가족들과 자주 해외여행을 갔다."라고 설명하고 있다.[2]

컴퓨터에 흥미를 가졌던 10살 때 코모도어 VIC-20 컴퓨터를 살 수 있었다.[3]

그러나 이러한 능력적인 부분과는 별개로 머스크는 에롤과의 사이가 매우 나쁘다. 머스크의 부모는 그가 10대일 때 이혼했는데, 어머니와 산지 2년만에 아버지와 같이 살겠다고 했던 것을 훗날 매우 후회했다. 평전의 인터뷰에서 그는 아버지에 대한 인터뷰를 아예 거부했다. 한 인터뷰에선 아예 "내 아버지는 악마이자 끔찍한 인간 말종이다. 당신들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악행과 범죄를 다 저질러본 사람이다."고 말하면서 인터뷰 도중에 울기까지 했다. 이에 에롤이 "철 좀 들어라"고 다시 아들을 공격하는 등 부자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걸로 보인다.[4][5]


1.2. 청소년기[편집]


남아공에서의 학창 시절, 그는 몸이 허약한 데다 내성적이며 직설적인 성격, 독특한 성씨 때문에 학우들로부터 따돌림과 더불어 폭행까지 종종 당했다고 한다. 9학년 때는 계단에서 밀려 굴러떨어진 뒤 의식을 잃을 때까지 맞았다고 한다. 이때 코의 재건 수술을 했으며 후유증이 지금도 남아있어 호흡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 여기에 더불어 상술한 부모님의 이혼에다 같이 살던 부친과의 불화로 인하여 머스크는 삶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 의문을 갖고 우울함을 겪은 후 하루종일 책을 읽으며 독서에 더욱 집중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공상에 자주 잠기는 성격이였으며 이런 성향 때문에 모친 메이 머스크에 의하면, 운동에 그다지 소질이 없었고 또래에게 인기가 없었다고 한다.

일론 머스크는 프로그래밍에도 흥미를 가졌다. 1984년 만 12세 일때 코모도어 VIC-20와 IBM PC XT를 구입하고 BASIC을 독학해 Blastar[6]라는 이름의 슈팅 게임을 동생과 함께 만들고 이를 게임 잡지에 500달러(현재 가치로 1,200달러)에 판매했다. 우주선을 쏴대는 슈팅게임이다. 이로 인해 167줄의 소스코드가 <PC와 사무 기술>이라는 출판물에 실리며 1984년, 그의 이름이 대중 앞에 처음 공개된다.[7] 이후 같은 잡지사에 두 개의 게임 코드도 팔았다고 한다.

또한 엔지니어였던 부친이 기술을 전수해준 덕에 모형 로켓을 만드는 데도 취미가 있어 가솔린과 각종 화학 약품을 혼합하여 로켓 연료를 만들곤 그걸 자작 로켓에 넣어 발사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그 외에도 모친은 그가 어린 시절에 했던 활동들이 너무 다양해서 하나를 콕 짚어 말하기가 힘들다고 언급했다. 이웃에 부활절 달걀 팔기, 오토바이, 공기총 놀이, 비디오 게임방 사업 등이 있다고 한다.

다만, 학교 시스템에 회의를 느꼈고 물리학, 수학, 컴퓨터과학 등 특정 과목만을 편애했기 때문에 전반적인 학업 성적이 우수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특히 종교와 언어 수업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1.3. 북미로의 이민[편집]



1.3.1. 캐나다[편집]


10대 초반부터 부친에게 미국으로 이민을 가자고 계속 졸랐으며 이후 청소년 시기를 거쳐 냉전이 끝난 90년대는 세계가 미국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확신해서 미국에서 유학하고 정착하는 걸 목표로 삼는다. 그런데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징병제를 시행 중이었고, 남아공 국적자였던 머스크도 입영 대상자였다. 머스크는 아파르트헤이트 등 인종갈등이 만연한 남아공 사회에 경멸감을 느꼈기 때문에 국가를 위하여 군 복무를 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8]

그가 17세가 됐을 때 부모 중에 한 사람만이라도 시민자이면, 자녀에게 캐나다 시민권을 줄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된 덕분에 미국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캐나다는 미국과 지리와 문화적으로 근접한 데다가 미국 영주권 혹은 시민권을 취득하기 용이하기 때문이다.[9] 머스크는 입대를 미루고 캐나다 이민 성공을 위해서 실제로 학업은 게을리했지만, 서류상 강점을 갖기 위해 남아공에서 프리토리아 대학교를 다니며 1년간의 절차를 거쳐서 새로운 법에 따른 절차를 준비했고 캐나다 당국으로부터 입국을 허가받는다. 그러나 1989년 6월에 캐나다로 떠난 17세의 머스크는 엄청난 고생을 하게 된다. 머스크가 에롤과 멀어지고 난 후 어머니인 메이 쪽은 돈이 별로 없어서 타국으로 떠나는 머스크에게 돈을 대줄 수가 없었고 종조부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던 몬트리올의 집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알고보니 몬트리올의 친척들은 머스크가 오기도 전에 캐나다에서 미국 미네소타로 이민갔던 것이었다. 때문에 1년 가량 캐나다 전역을 방랑자처럼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농장에서 밭일을 하고 제재소의 유독한 보일러 폐기물을 치우거나 전기톱으로 통나무를 자르는 등 인력시장의 궂은일을 하며 살았다.

일론이 1년동안 캐나다 전역을 도는 동안, 모친인 메이를 비롯하여 동생 둘도 캐나다 이민에 성공하면서 토론토에서 가족이 재회하게 된다.[10] 가족이 모인 덕분에 온타리오에 위치한 퀸스 대학교(캐나다)[11]에 진학한다. 대학 생활이 체질에 잘 맞아서, 이 때부터 사회성이 늘기 시작했다고 한다.[12] 한편으로는 무작정적인 전화로 건 점심식사 요청을 통해, 노바스코샤뱅크의 임원인 피터 니콜슨이라는 인물을 만나게 되고 이를 통하여 여름 인턴쉽에도 참여하여 시급 14달러를 받아가며 전략기획 팀에서 개발도상국 포트폴리오 검토 관련 업무를 맡은 적이 있다고 한다.[13][14]


1.3.2. 미국[편집]


미국 진출이라는 당초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퀸스에서 학업에 충실했던 덕에, 1993년 여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와튼스쿨로 편입하는 데 성공한다. 입학 후 모교 내에서 무면허로 주류를 밀매하는 클럽하우스 사업을 했다고 한다.[15] 이 와중에 1994년 여름, 실리콘밸리에 건너가서 낮에는 피더클 연구소에서 슈퍼축전기 연구를, 야간인턴으로는 로켓 사이언스라는 게임 제작사에서 잠깐 일하기도 했다. 이 회사가 만든 Loadstar와 Rocket Jockey 등의 게임 크레딧에 실제로 머스크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신생 업체이다 보니, 인턴임에도 임베디드와 드라이버 등 저수준 단의 핵심 기술 개발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비디오 게임 사업을 고려했지만, 인류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하기 위해서 대학에서는 경제학물리학을 공부하였다. 특히 졸업 직전인 1994년 12월에는 태양열 발전을 주제로 첫 번째 논문를 작성했으며 그 외에도 슈퍼축전기와 데이터베이스, 로켓 관련해서 연구하고 논문을 집필했다고 한다.[16]

결국 재미는 있었지만 그의 범지구적 공상에는 미치지 못했던 비디오 게임쪽 진로를 접고 본전공을 이어 고체물리학 슈퍼축전기 분야로 1995년 스탠퍼드 대학교 재료공학 박사과정에 합격한다. 하지만, 야후넷스케이프 등을 통해 발전해가는 포털과 웹 브라우저인터넷 산업의 풍부한 잠재성에 매료되어 창업의 길로 들어서기로 결정하면서 실리콘밸리로 이주하여 입학도 채 하기 전에 합격 통지만 받고 휴학을 신청했는데, 이후 등록을 하지 않아 자동 제적되었다.[17][18]

그는 창업하기 전에 본인에게 얼마 정도가 필요한지 알아보기 위한 일종의 실험을 했다. 이른 바 ‘일론 머스크의 욕구 실험’이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하루를 1달러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창업을 앞두고 혹시나 실패했을 때 뒤따를 가난을 감당할 수 있을지 고민했고, 1달러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일론은 대형마트에서 냉동 핫도그와 오렌지 30달러 어치를 사서 컴퓨터를 끼고 한 달 동안 매일 그것들만 먹고 생활을 했다. 돈이 없는 삶이 어떠한지를 직접 체험해 본 것이다. 한 달을 지내보니 살만했다고 한다.[19] `어떻게 되든 (망해도) 한 달에 30달러는 벌겠지'라고 생각한 그는, 대학원 진학을 포기한 이후 곧바로 창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2. 창업 및 경영[편집]



그가 경영하고 있는 기업들[20]

일론 머스크가 성공 가도를 달리게 된 2020년대 이후로만 접근하면, 그저 돈 많고 순탄하게 살아온 괴짜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 또한 커리어 내내 승승장구하기는 커녕 크고 작은 여려 문제들을 직면해왔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사업에서는 경영권 다툼에 밀려 배제당했으며 2000년대 후반, 테슬라 로드스터의 배터리와 변속기에서 문제가 발생해 변속기를 처음부터 재설계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생산에 차질을 빚어 정식 출시일을 지키지 못하고 고객과 언론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동시에 스페이스X의 팰컨 1 발사체 1~3차 시기가 전부 실패하면서 막대한 재정난을 겪었다. 설상가상으로 2008년 세계금융위기가 겹쳐서 자금 조달이 매우 어려워 테슬라와 스페이스X 모두 파산 위기에 몰린 바 있고, 개인적으로도 이혼 소송을 진행하며 힘든 시기를 겪은 바 있다. 2008년 중순 스페이스X 팰컨1 4차 발사가 성공하면서 NASA와의 대규모 화물 계약을 유치하고 테슬라 로드스터를 성공적으로 출시했으며, 2012년 상반기에는 CRS-1테슬라 모델 S의 출시 성공으로 유토피아를 꿈꾸는 괴짜 이상주의자 수준을 벗어나 비로소 실리콘밸리의 냉소주의자들로부터 인정받기 시작한다.

이후에도 2016년 여러 차례 팰컨 9 발사와 부스터 회수에 여러 차례 실패하면서 안정성을 의심받은 바 있고 테슬라는 배터리 등의 문제로 양산 차질을 겪으며 악화된 재정 탓에 오랜 기간 공매도로 고생했지만, 각각 팰컨 9 블록 5에 이르러서는 발사외 회수 모두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궤도에 올라섰으며 테슬라는 모델 3를 통해 성공적으로 전기차 양산에 성공하면서 2020년대에 폭발적인 성장을 하게 된 것이다.


2.1. Zip2[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Zip2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상술한대로 머스크는 원래 에너지 사업에 관심이 많아서 대학원에 진학할 계획이었으나,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폭발적인 발전을 하고 있던 인터넷 사업의 가능성을 보고 곧바로 인터넷 사업에 뛰어들기로 결정한다. 당시 퀸스 대학에서 역시 경영학을 전공하던 그의 동생을 실리콘밸리로 불러들여[21] 팔로알토에 56제곱미터 규모의 꼬질꼬질한 곳에 사무실을 내고 첫 회사인 Zip2를 설립했다.

인터넷의 수요는 폭증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전히 인터넷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였고 기업들조차 웹사이트를 제대로 구축할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인터넷에 무지한 사업체들이 처음 온라인에 진출하는 과정을 지원해보자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실리콘밸리를 시작으로 사업체의 이름과 주소 등이 담긴 DB에 접근할 수 있는 허가증을 얻는 한편 GPS 기반 디지털 지도 라이선싱을 얻어와, 자영업자, 중소업체들을 위주로 이들의 검색 결과와 위치 정보를 인터넷상으로 홍보하여 마케팅을 지원하는 기능을 갖춘다. 구글 지도 혹은 옐프의 사업과 비슷하다.

인터넷이 생소했던 초창기에는 사용 방법을 알리기 위해 고객들을 대상으로 일일이 도시정보 서비스를 방문판매하는 회사였으나, 뉴욕타임스와 같은 온라인 미디어에 소프트웨어 패키지를 제공하는 B2B 방식으로 피봇하였다. 신문사는 Zip2의 소프트웨어 패키지를 통하여 별도의 자체 기술 개발 없이도 디렉토리를 만들어, 온라인 사업에 쉽게 진출할 수 있었다.

일론이 SW개발, 킴벌이 세일즈를 담당했고, 1996년 무어데이비도우라는 벤처캐피탈로부터 300만 달러를 투자 받은 뒤 리치 소킨이라는 경영인을 CEO에 앉힌다.[22] 여기에 더해 일론이 구축했던 코드는 헤어볼[23]로 인해 새로운 직원들에 의해 전부 개편되었다. 얼마 안 가 머스크 형제는 경영권에 이어서 이사회 의장 자리를 박탈당하고 아웃사이더로 몰리게 된다.

1999년 2월 Compaq에 3억 700만 달러로 인수되었다. 그중에 당시 머스크의 지분은 7%로 2,200만 달러를 받으며 엑싯했다.[24] 28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백만장자가 된 것이다.


2.2. 페이팔[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페이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일론은 Zip2를 창업하기 전부터 인터넷 은행이라는 아이디어를 실현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다만, 당시에는 개인정보 침해 우려 때문에 인터넷에 카드번호 등 금융 정보를 올리는 것을 꺼리는 사람들이 대다수였기에 훗날을 도모했다. 컴팩에 Zip2를 넘긴 1999년 3월, 1,600만 달러의 현금을 얻게 되자 167 제곱미터의 아파트를 개조하고, 100만 달러의 맥라렌 F1, 소형 프로펠러 비행기 구입 등 일부 사치를 마친 이후 본인의 사재 1,200만 달러를 전부 털어서 X.com 설립에 투자하며 연쇄 창업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Zip2에서 쫒겨난 교훈을 되새기며, 경영권을 장악하기 위해 외부 투자를 받지 않고 직접 사재를 털어 넣어 최대 주주가 된 것이다.

인터넷이 있기 때문에, 굳이 창구가 필요 없을 것이라는 아이디어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기술력은 있었으나, 진짜 문제는 당국의 까다로운 규제였다. 금융데이터는 민감한 정보가 담긴 만큼, 당국이 생소한 인터넷을 통해 사업을 전개하는 것에 대해서 큰 반감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아에 은행을 인수한 뒤, 시스템을 개편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급진적인 주장이 팀 내에서도 마찰이 되어, 공동창업자 세 명이 전부 창업 몇 달만에 회사를 떠나고 똑같은 서비스를 지원하는 기업을 새로 창업했다. 이로 인해 자금줄이 떨어져가자, 어쩔 수 없이 세쿼이아캐피탈로부터 투자를 유치했다고 한다.

X.com은 세계최초 온라인 은행으로 핀테크 업계의 시조새와 같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은행 영업 허가를 취득한 뒤, FDIC 계좌보험과 뮤추얼 펀드를 갖추게 되었다. 이후 이메일 주소로 간편한 통합로그인을 지원하여 송금 중개하는 에스크로 사업으로 전환한다. 벤처캐피탈의 든든한 지원 덕에, 수수료를 기존 은행보다 낮추는 데에 더해 신규 고객에게 20달러짜리 현금카드를 뿌려서 고객을 유치했다고 한다.

2000년, 비슷한 서비스를 개발 중이던 컨피니티(Confinity)라는 회사와 합병하고 회사명을 페이팔(PayPal)로 변경하였다. 이 두 회사는 서로 같은 건물에 있는 경쟁 관계였는데, 서로 수수료 인하, 신규고객 현금 지급 등에 돈을 부으며 치킨게임을 지속했으나 계속 경쟁만 하다가는 모두 망하게 될 것이라는 의견에 두 회사가 모두 동의하면서 전략적 합병을 진행한 것이다.[25]

합병 직후 직불 100만 고객 유치에 성공했음에도 적자는 쌓여만 갔고[26], 취약한 보안[27]과 비즈니스 모델[28]도 문제가 되었다. 또한 서비스 개발 방식을 두고 맥스 레브친 등의 솔라리스, 리눅스유닉스 계열 오픈소스 지지자와 마이크로소프트윈도우 NT 생태계 개발 방식을 지지하는 일론 머스크와의 의견 갈등이 심화되었다. 결국은 머스크가 호주로 휴가를 간 사이 동료들이 이사회에 해임안을 올리는 바람에 실권을 빼앗기고 이사회 투표대결에서 패배하며 CEO 직위를 상실하게 된다.[29][30] 다만, 페이팔이 매우 잘 나가는 상태였고 본인이 최대주주였기에 고문직으로 얌전히 물러나 있다가, 2002년 이베이[31]나스닥에 이제 막 상장한 페이팔을 15억 달러에 인수할 때 2.5억 달러를 받아가며 엑싯하게 된다.[32] 한편 그를 해임시킨 리드 호프먼, 데이비드 색스 등의 중역들, CEO로 선임된 피터 틸 등 쿠데타 당사자들과의 관계는 여전히 돈독한 편인 것으로 추정된다.[33]


2.3. 스페이스X[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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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언급한 대로 나는 화성 수송 체계가 자리 잡기 전까지 스페이스X의 주식상장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화성에서 생활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스페이스X의 핵심적인 목표입니다.[원문]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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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스크가 직원들에게 보낸 이메일, 2013


페이팔로 인터넷 사업에서 성공을 거둔 이후 머스크는 학부시절부터 관심 있던 분야인 에너지 사업과 전기 자동차 사업, 우주 산업 등의 중공업으로 눈을 돌렸다. 초등학교 때 접했던 SF 판타지 이후로 우주는 머스크가 평생동안 꿈꿔왔던 분야였다. 우주에 대한 그의 갈망은 성인이 되어서도 식지 않았으며, 펜실베이니아대에 다닐 때도 지구 환경 문제와 폭발적인 인구 증가, 식량 부족으로 인한 인류의 종말을 우려하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앞선 창업을 통해 백만장자가 되었지만 투자자들의 압박과 연이은 쿠데타로 인해 실리콘밸리에서 피로를 느낀 일론은 2001년 여름, 제트추진연구소반덴버그 우주군기지 등 우주와 방산 산업이 발달된 로스앤젤레스로 분위기를 환기할 겸 전략적 이주를 선택한다. 화성이주재단을 설립하고 마스소사이어티라는 저궤도 탐사 프로젝트 단체에도 거액의 기부금을 지원한다.[34] 처음에는 완전히 자기 손으로 화성까지 화물을 조금이나마 보낼 수 있는 로켓새턴 V급 초대형 행성 간 로켓 + 우주선 세트까지 만들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설치류를 우주에 보낸 뒤 이를 중계하겠다는 아이디어부터 시작해서 화성 오아시스라는 이름으로 수분 보급용 젤에 작은 식물들을 채워 넣은 미니 온실을 나사를 통해 화성으로 보내 식물들의 성장을 공개 방송하여 다시금 사람들의 관심을 우주로 돌리고 NASA의 예산을 증액시킬 수 있도록 하자는 발상을 하였다. 추진체를 구하기 위해서 기술자들을 끌어 모으고, 당시 소련 해체 이후 군축을 하면서 많은 수의 ICBM를 퇴역처리했던 러시아와 협상하러 2001년 하반기부터 2002년 상반기까지 수 차례 모스크바로 향했으나 대 당 1,800만 달러라는 다소 비싼 금액을 제시 받아 협상이 틀어지며 빈손으로 돌아온다.[35]

러시아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그는 계산기를 두들겨보니 그냥 내가 직접 경량화된 소형 로켓을 직접 만들어서 쏘는 게 더 낫겠다는 결론에 도달해 2002년 5월, 페이팔 매각 자금 1.8억 달러 중 1억달러를 투자하며 우주탐사 비용을 낮추는 것을 목표로 스페이스X를 설립한다.[36] 자신의 재산을 그야말로 쏟아부었고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경험을 살려 로켓 설계와 디자인에도 상당 부분 참여하고 있다.[37]

초창기에는 2003년 내로 1단 로켓 -> 2단 로켓 -> 동체 ->부품 조립 -> 발사대 설치 -> 발사까지 3,000만 달러에 완수한다는 다소 비현실적인 플랜 때문에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었다.[38] 로켓을 만들어 우주에 인공물을 쏘는 덴 엄청난 기술력과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국가 단위의 자금 지원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하며, 따라서 일개 민간 기업에선 로켓 제작을 할 수 없다는 의견이 대다수였던 터라 어찌 보면 세간의 손가락질은 당연했다. 실제로 톰 뮬러 등의 유능한 공학자들을 다수 섭외하여 팰컨 1이란 로켓을 만들고 발사장까지 확보하여 실험을 했지만, 1~3번의 로켓 발사 시도가 모두 실패하는 쓴맛을 본 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8년 미국발 대침체가 일어나 추가 투자금 유치마저 힘들어지게 되는 최악의 시기를 맞게 된다. 일론을 포함한 로켓 공학자들은 멘붕에 빠졌지만 이를 극복하고 마지막 기회였던 4번째 발사를 극적으로 성공시켰고, 이후부터는 승승장구를 하게 된다. 이는 정부 기관이 아닌 개인 사업가로서 위성 발사를 성공한 최초의 기록이기도 하다.[39]

이 성공으로 인해 2008년 오비털ATK와 함께 NASACRS 화물계약 사업자에 선정되어 12회 16억 달러 상당의 펀딩을 받으며 팰컨9과 드래곤1 개발에 여유롭게 착수했다. 2012년에는 드래곤1으로 민간기업 최초로 ISS 도킹에 성공하였다. 거기에 더해 원래는 한 번 쓰고 버려지던 발사체를 다시 송환시켜서 연료만 충전시키고 재사용하는 아이디어를 2015년 팰컨9 Full Thrust로 처음 성공시키면서 CRS 2기로 사업 연장에 이어 보잉과 함께 CCP 사업자로 선정되어 나사로부터 약 33억 달러에 달하는 펀딩을 받아, 드래곤2와 팰컨9 B5 개발에 착수한다.[40]

2016년 1월에는 드디어 처음 생각했던 화성 오아시스의 판을 키워 2025년까지 화성에 사람을 보내겠다는 폭탄 선언을 했다. 2016년 9월 27일 멕시코에서 열린 국제 천문 총회에서 연설을 통해 구체적인 계획안인 'Interplanetary Transport System'을 발표했다. 이 ITS는 2019년까지 현실적으로 여러 부분이 조정되었지만 기본적으로 새턴 V 수준의 크기를 가진 운송량 100톤급 초대형 로켓이라는 테마는 그대로 유지된 채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2010년대 전후로는 우주 탐사뿐만 아니라 국방부가 러시아 제재의 일환으로 군사 위성 분야에서 러시아 의존도를 줄이겠다고 발표하면서 군사 위성의 발사에도 한몫하게 될 것 같다.[41] 머스크가 국방부의 높으신 분들 청문회에 끌려나가는 광경도 놀랍지 않다. 오히려 2014년 청문회에서는 ULA의 CEO의 면전에다 대고 “우린 완전 미국제에 가격도 저렴한데 이놈들은 러시아제 엔진 쓰면서 가격도 창렬이다”라는 디스를 날려 ULA 측을 완벽하게 털기까지 했다.[42] 펜타곤뿐만 아니라 NASA 역시 많은 관계자들이 팰컨 헤비에 주목하며 ULA, 아리안스페이스 등의 경쟁자들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팰컨과 드래곤 시리즈의 재활용 시도는 이미 전 세계의 차세대 발사체, 우주선 연구에서 벤치마킹의 대상이 되었다.

2018년 2월 6일에 발사된 팰컨 헤비의 발사 성공으로 그의 능력을 다시 한번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또 2020년 5월에는 세계 최초의 민간 유인 궤도 우주선인 드래곤 V2의 유인 우주 비행에 성공하는 쾌거도 이루었고 2019년 중반부터는 2018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프로토타입 건조가 시작된 스타십 우주선을 SSTO로 테스트해 보겠다는 계획까지 진행하고 있다. 성공이 그렇듯 스페이스X가 지닌 사소한 결점은 머스크에서 직접 비롯된다. 부분적으로는 머스크가 스페이스X의 일거수일투족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세세한 사항에도 집요할 정도로 신경 쓰기 때문이다.[43]

2021년 아르테미스 계획에서 스타십HLS가 29억 달러에 달 착륙 단독 사업자로 선정되어 SLS가 루나 게이트웨이까지 유인 운송을 하면, 스타십HLS가 루나에서 달로 착륙시키는 과정을 수행할 예정이다. 또한 루나게이트웨이 건설 사업에도 선정되어 팰컨 헤비로 2회 모듈 발사가 2024년 예정되어 있다. 화물 운반 사업자에도 15년간 70억 달러의 규모로 드래곤XL/팰컨헤비가 단독 사업자로 선정되었다. CLPS라는 민간기업 착륙선&로버 발사에도 ULA와 더불어 선정되어 2023년부터 6회 발사가 예정되어 있다. 이처럼 아르테미스 건으로 정부와 계약된 것만 봐도 수주 금액이 도합 100억 달러를 상회한다.



2.4. 머스크 재단[편집]


2002년 설립된 개인 재단이다. 주로 과학, 공학적 연구를 진행하는 비영리단체를 후원한다. 오픈소스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OpenAI, 공동 저작 미디어를 개발하는 위키미디어 재단, 모교인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동생 킴벌의 단체 빅그린, 인류 발전 기술 개발자에게 상금을 수여하는 X 시상식 재단 등이 대표적이다. 2,500만 달러 이상을 후원해왔으며 향후 본인의 재산 대부분을 이 곳에 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2021년 11월에는 기부를 약속한 57억 달러의 대부분을 여기에 지원했으며 누적 기금이 94억 달러에 달한다고 한다.[44] 다만 자서전에서는 이는 테슬라 주식 매도로 인해 세금 문제를 맞아 기부한 것이며 그가 평소 "대다수의 자선 활동이 허튼 수작이며 내가 운영하는 지속 가능한 기업에 소득을 재투자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는 점이 드러났다.


2.5. 테슬라[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테슬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본래 학부에서 연구하던 슈퍼축전기 방식으로 구동하는 전기자동차에 관심이 있었으나, 2002년에 스트라우벨을 통해 리튬 이온 배터리의 발전상을 전해 들음과 동시에 AC프로펄전과의 미팅을 통하여 사업의 가능성을 옅보았다.[45] 이후 2004년 일론 머스크는 최초 투자자로서 635만 달러의 자금을 투자하여 테슬라의 최대 주주로 등극한 뒤, 변호사와 회계사 등을 주선하고 향후 모터 개발을 주도할 J.B. 스트라우벨 등의 엔지니어를 영입한다.[46] 즉, 원래 테슬라는 AC프로펄전의 티제로 자동차를 상용화하기 위해 창업한 것이다.

2006년, AC프로펄전 기술 라이선싱에 로터스 앨리스 샤시를 사용한 로드스터를 공개하였으나 애초 계획에 비해 개발 비용이 불어나고 로드스터의 원가가 판매 가격 이상이라는 것이 밝혀져 2007년 마틴 에버하드를 CEO에서 해고하고 잠시 전문 경영진 체제를 거친 뒤 본인이 직접 CEO가 되었다.[47] 이후 마크 타페닝 역시 회사를 떠났다.

2008년에는 AC프로펄전을 벗어나 스트라우벨이 설계한 동력계로 테슬라 로드스터를 드디어 출시하였고 2009년에는 모델 S를 공개했다. 허나 로드스터 개발비가 초기 2,500만 달러에서 1.4억 달러까지 불어났고 모델 S 개발비 10억 달러에 더해 대침체로 인해 돈줄이 끊겨 파산 위기에 처했으나 다임러가 지분 10%를 5,000만 달러에 인수해주며 생존에 성공한다.[48] 그 이후 2010년에는 미국 에너지국과 미국 내 공장생산 & 배터리 투자 지속을 조건으로 4억 6,500만 달러의 차관 협정을 맺어 4,200만 달러라는 헐값에 GM과 도요타가 폐쇄한 NUMI 공장을 인수한 뒤 도요타에 지분 2.5%를 5,000만 달러에, 주식공개로 추가 2억 2,600만 달러의 자금을 확보하고 모델X 개발에 돌입하여 2012년 공개한다. 허나 계속되는 생산 악화, 예약 취소, 공매도 집중 등으로 인해 상황은 나아지지 않자 2013년 1분기에는 래리 페이지와의 논의를 통해 60억 달러로 구글에 매각하는 방안을 고려하기도 했다.[49] 그리고 2014년 6월 12일, CEO 일론 머스크는 블로그를 통해 테슬라 모터스의 특허를 모두 공개한다고 발표했다. 제목은 All your base are belong to us의 패러디. 이유는 전기차 시장을 키우기 위해서라고 한다. 니치 시장에서 독점 업체가 되는 것보다, 보다 큰 시장에서 주요 플레이어로 남는 것을 택한 셈이다.

2018년에는 제너럴 모터스를 시가총액을 추월하며 주가가 사상 최고치를 찍었으나, 머스크의 주당 5,000대 생산 공약이 터무니 없다고 여긴 헤지펀드들에 의해 가장 인기 좋은 공매도 종목에 등극하며 큰 위기를 맞는다.[50] 반면 이 시기 머스크는 주가, 생산량, 매출, 수익성 등의 분야에서 여러 달성 요건을 설정한 뒤 이사회로부터 3억 3,960만주[51] 규모의 스톡옵션 패키지를 23.34달러[52]에 발동할 수 있도록 승인받았는데, 다소 무모해보이는 배팅이었으나 모델 3 양산을 통해 비로소 대부분의 요건을 충족시키며 2021년 1월 처음으로 세계 최고 부자에 등극한다.[53]

그의 비범한 성격 때문인지 기존 자동차 회사의 패러다임에 도전하는 독특한 차량을 내세운다. 자동차 모델 이니셜을 모으면 SEXY[54]가 된다거나, 무리수에 가깝지만 한눈에 봐도 미끈한 차량 디자인을 내놓는다거나. 혁신적인 디자인, 흥미로운 프레젠테이션, 사명 변경[55]의 취지를 보면 애플이 떠오른다. 물론 경영 전략의 관점으로 봐도 신생 기업이 시장의 흐름을 완전히 따라 흔하디 흔하게 위치하면 그 자체로는 기업에 전혀 메리트가 없다. 만약 흔한 후발 주자로 참전한다면 그나마 내밀 수 있는 카드가 낮은 가격인데 이럴 바엔 틈새시장을 공략해 그 분야의 일류가 되자는 전략을 세웠다. 그리고 모델S 양산에 성공하여 그 전략이 성공했으며[56] 2021년 1월 토요타를 추월해 시가 총액 1위 자동차 제조업체에 올라 있다. 최대 주주인 머스크도 세계 최대 부자 반열에 올랐다.


2.6. 솔라시티[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테슬라 에너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6억 달러에 인수한 이후, 테슬라 에너지 사업부에 편입시켰다. 같은 사업부의 에너지 저장 사업이 승승장구하는 반면, 2020년대에도 사업 부진에 시달리며 아직까진 실패한 인수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2.7. OpenAI[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OpenAI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15년 10월, 샘 올트먼과 함께 인공지능의 잠재 위험성에 대해 의견을 공유하고 구글 등 현재 주요 업체들이 이에 대해서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비영리로 공동 설립한 인공지능 기업이다. 특허와 기술을 오픈소스로 공개함으로써 독점을 방지하여 인공지능의 안전한 발전을 위해 만들어졌다.

설립 3년만인 2018년, 이사회에 사임하였고 2019년에 마이크로소프트에게 지분 전량을 매각하여 현재는 아무 관련이 없는 상태이다. 퇴사 이후에는 오픈AI에 굉장히 적대적인 발언을 서슴치 않고 있으며 Future of Life 재단의 GPT-4 이상의 성능을 내는 모델에 대하여 6개월 개발 중단을 요구하는 성명서에도 서명을 했다.[57] 샘 올트먼의 주장에 의하면, 오픈AI의 발전 속도가 더뎌지자 일론 머스크가 기업을 사유화하려는 태도를 보였고 이로 인해 배제되었다고 한다. 머스크는 OpenAI가 대규모 자금 조달을 유치하고 폐쇄형 정책을 취하면서 초기 설립 취지를 잃었기 때문에 사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2.8. 뉴럴링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뉴럴링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뉴럴링크는 인공지능의 잠재 위험성에 대비하여 인류의 위험성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인간의 뇌와 컴퓨터를 연결하여 높은 지능을 만들기 위해 만든 회사다. 즉 일론 머스크 본인이 몸 담고 있던 오픈AI 등에 대한 방어적 수단 마련을 위한 프로젝트.


2.9. 보링 컴퍼니[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보링 컴퍼니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보링 컴퍼니 설립에 앞서 캘리포니아 고속철도 사업을 보고 효율성과 비용에 실망하여 하이퍼루프라는 아이디어를 고안한 바 있다. 태양광 기반으로 1,600km 이하의 거리가 대상이다. 튜브 속을 저압으로 유지하며 전저기 펄스와 모터로 추진한다.테슬라모터스 블로그 2017년 1월에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계 공모전 대회까지 주최했다.

미국 도시의 심각한 교통체증 해결을 위해 3D 방식의 자율주행 터널링 지하차도를 짓는 것을 목표한다. 로스엔젤레스 터널에서는 하이퍼루프를 여전히 연구개발하고 있으며 라스베이거스에서 LVCC를 중심으로 하는 노선을 확장하고 있다.

다만 차량교통의 철도교통화를 폐기하고 오토파일럿 기능이 있는 테슬라 차량만을 대상으로 범위를 제한하면서 본래 취지가 크게 후퇴되었다. 이 외에도 굴착 비용, 굴착 허가, 자율주행의 개발 등의 한계에 부딪혀 여타 업체 대비 저렴한 건설비 외에는 별다른 특장점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2.10. X Corp.[편집]


일론 머스크는 이전부터 트위터를 비롯한 SNS표현의 자유가 상실됐다며 불만을 많이 드러낸 바 있다. 자신이 직접 새로운 소셜 미디어를 창업할지 고민하기도 했다고 한다.# 2022년 트위터에 투표를 올린 뒤 찬성표가 과반수를 넘자 테슬라 지분을 매도한 뒤 100억 달러라는 거금을 쥐게 되고 트위터 인수를 시도한다.[58] 인수 협상 과정에서 검열 최소화, 암호화폐 스팸봇 퇴치, 콘텐츠 편집기능 추가, 추천 알고리즘 & 내부문건 공개 등 정책 변화를 예고했다.#

인수 이후, 먼저 인력을 1/5 수준으로 줄였고 임원진 해고, 복리후생 축소, 사무실 축소 등의 대규모 구조조정을 거쳤다. 본인의 발언들로 인해 빠져나가는 광고 수익을 커버하기 위해 계정인증 유료화, API 유료화, 슈퍼팔로우, 암호화폐 송금, 맞춤 비디오, 스페이스 등의 기능을 강화시켰으며, 트위터를 X Corp.에 합병시켜 X라는 새로운 플랫폼으로 전환을 맞으며 모든 것이 가능한 앱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인수 당시 트위터를 440억달러(약 58조6천640억원)에 인수한 지난해 10월 스페이스X로부터 10억달러를 빌렸으며 한 달 뒤에 곧바로 이자와 함께 상환했다고 밝혔다.#


2.11. xAI[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xAI(기업)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둘러보기[편집]


  • 네이버 캐스트: 일론 머스크
  • <일론 머스크, 미래의 설계자> : 일론 머스크를 다룬 첫 번째 공식 전기이다.
  • <Elon Musk> : 월터 아이작슨[59]이 집필한 그의 두 번째 전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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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5 03:34:04에 나무위키 일론 머스크/생애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머스크의 외할아버지는 미국에서 태어난 캐나다인으로 척추 교정의였다. 할머니는 영국독일계 혈통이다.[2] 당시 남아공은 백인 사이에서도 빈부격차가 엄청 나 해외여행이라 해도 레소토, 에스와티니(당시에는 스와질란드)를 가는 정도 였다.[3] 다만 코모도어 VIC-20은 3년전 나온 8비트 컴퓨터인 애플 2나 TRS-80보다 훨씬 저렴한 299달러였고 이런 가격과 소매점 대규모 유통으로 85년 단종까지 약 250만대가 팔린 베스트셀러였다. 부잣집만 살수있던 대단히 비싼 물건은 아니다.[4] 동생인 킴벌의 말에 따르면 부친이 감정적인 억압과 폭언을 일삼아, 유복했던 외면과는 다르게 내면은 찢어 문드러져서 비참했다고 한다. 애초에 머스크가 자기 부친에 대해 자세한 언급조차 거부한건 부친의 머스크에 대한 억압과 폭언의 정도가 너무 심해서 머스크가 지금까지도 입에 담기조차 싫어해서 그랬던 것이다.[5] 에롤은 자기 의붓딸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가지기도 했는데 아이를 가질 당시 그의 나이는 72살이 넘었고 이 의붓딸의 친모인 전 부인과는 현재 이혼 상태이며, 친딸은 아니라곤 하나 기혼이었을 적에는 4살 때부터 자기가 키웠던 딸이었다. 또한 에롤은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자신의 집에 침입한 3명의 사람들을 총으로 살해한 뒤 정당방위를 선고받은 적도 있다.[6] 같은 해에 Blaster라는 게임이 다른 사람에게서 만들어지기도 해서 종종 헷갈리기도 한다. Blastar라고 검색해야 제대로 나오니 참고하자.[7] 8비트 컴퓨터 시절의 컴퓨터는 운영체제라고 할만한 개념이 없었고 베이식 언어 인터프리티를 내장한 ROM을 탑재한 장비나 다름없었다. 디스크 오퍼레이팅도 각종 사무프로그램도 이런 베이식 언어로 코딩한걸 실행하는게 일상이였고, 각종 컴퓨터 잡지들이나 컴퓨터 안에 든 사용 설명서에 이런 예제 코드들을 첨부하여 구독자를 끌어모았다.[8] 머스크는 중년이 된 최근에도 남아공의 군대에 입대하지 않은 것에 대해 양심적이고 좋은 선택이었다고 회상한다.[9] 캐나다 국적자에게는 미국에서 취업할 수 있는 TN 비자가 사실상 아무 조건 없이 나온다.[10] 메이가 캐나다 집을 알아보기 위해 잠시 떠난 사이에, 남아공에 남아있던 일론의 여동생 토스카가 몰래 집을 부동산에 내놓고 차량과 가구까지 전부 팔며 필사적으로 남아공을 탈출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11] 워털루 대학교와 고민하다가, 캠퍼스에 가보고 너드들만 있어서 예쁜 여학생이 많은 퀸스에 진학했다고 한다.[12] 첫 번째 아내인 저스틴 머스크가 이 시기 만난 같은 대학교 동기였다.[13] 훗날 창업할 페이팔의 아이디어가 여기서 착안된다. 미국이 개발도상국의 부채들 덜어주기 위해 만든 브래디 채권이 1달러 당 50센트를 지원해주는 반면, 실제 채권은 1달러 당 25센트라는 가격에 거래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국채를 모으기만 하면, 큰 이득을 볼 수 있었지만 윗선에서 별 시덥지 않은 이유로 거절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훗날 인터넷 금융 업체를 창업해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14] 남미 부채를 이미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인턴의 말을 들어가며 헷징했던 리스크를 감수할 필요성이 떨어지긴 한다.[15] 덕분에 돈을 그래도 꽤 번 것인지, 20년된 BMW 320i를 끌고 다녔다고 한다.[16] 2017년 샘 올트먼과의 인터뷰에 따르면, 학창 시절 로켓, 유전학, 인공지능, 인터넷 외에도 전기자동차를 비롯한 '지속 가능한 에너지'에 관심이 있었고, 이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수십년째 성능 향상이 더뎠던 리튬 이온 배터리를 대체해야 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슈퍼축전기를 통해 레이저 총과 미사일 등 무기 관련해서도 진지하게 가능성에 대해 고찰했다고 한다.[17] 담당교수는 재료과학과의 윌리엄 닉스.#[18] 2023년 7월 X.AI 관련 트위터 스페이스 대화 내용에 따르면, 물리학으로 진로를 정하면 충돌기 실험을 하려고 했는데 이는 규제 당국에 의해 언제든 막힐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급부상하던 인터넷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한다.[19] 정황상 생활비 전체가 아니라 식비만 1달러를 쓰기로 한 것 같다.[20] 2023년 기준으로 그가 최대주주로서 직간접적으로 경영하고 있는 기업은 여섯 곳이다. 좌측 상단부터 차례대로 xAI, 테슬라, X Corp., 뉴럴링크, 보링 컴퍼니, 스페이스X[21] 이 상태에서는 둘 다 비자나 영주권 없이 미국에 거주 중이었다고 한다. 어찌 보면 당시 둘 다 불법 이민이었다고 동생이 인터뷰하기도 했다. 학생 비자로 와서 자퇴했던 머스크는 물론, 미국에서 사업 활동을 하던 그의 동생 또한 마찬가지 였다. 훗날 Zip2 투자자들 덕분에 비자 문제룰 해결했다고 한다.[22] 무어데이비도우는 붙임성이 떨어지던 일론을 그닥 신뢰하지 않았고, 일론은 외부 투자를 받은 창업이 처음이다보니 사업 운영에 있어서는 굉장히 미숙했던 것으로 보인다. 해당 투자건을 통해 경영권을 뺏긴 걸 후회한다고 밝혔다.[23] 일체형으로 코드를 짜서, 향후 확장이 어려운 형태의 문제점.[24] 세후 1,600만 달러[25] 여담이지만 컨피니티는 원래 엑스닷컴이 소유 중인 사무실을 빌려서 운영하고 있다가 사무실을 옮기면서 페이팔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그 이름이 합병한 회사의 이름이 되었다. 월터 아이작슨에 따르면, 합병 과정에서 일론은 페이팔이 아니라 X로 이름이 유지되길 원했으며 이 과정에서 맥스 레브친과 불화가 생겨났다고 한다.[26] 거래량 비중이 ACH 반, 카드 네트워크 반이었다고 한다. 마스터카드, 비자 등의 카드 네트워크는 수수료가 비싸기 때문에 ACH 비중을 높이려고 직불카드와 MMF 등을 출시하였으나 큰 효과를 못보았다.[27] 당시 사기가 성행해서 맥스 레브친CAPTCHA 기술을 업계 최초로 상용화시켰으나 머스크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28] 중역들은 전자결제 사업에 집중하려했고 머스크는 회사 재정상황이 좋지 못했음에도 디지털 은행까지 사업 범위 확장을 넓히려고 했다.[29] 머스크가 최대주주여서 까다로운 상황이었으나, 맥스 레브친리드 호프먼, 데이비드 섹스 등 대부분의 중역들이 머스크의 운영 방식에 불만이 컸으며 세쿼이아캐피탈을 설득해 피터 틸을 CEO로 임명시켰다.[30] 재정 상태가 엉망이었음에도 디지털은행 사업 확장을 추구했으며 이 과정에서도 맥스 레브친이 제시한 CAPTCHA를 등한시하며 보안을 소홀히하는 등 논리적 모순이 상당했기 때문에 중역들의 신임을 잃은 상태였다.[31] 당시 페이팔 매출의 상당수가 이베이를 통해 발생했을 정도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플랫폼이다. X.com과 컨피니티의 합병 직전 두 기업은 각각 20만 명의 고객을 이베이를 통해 거느리고 있었다.[32] 세후로는 1.8억 달러. 이 중 1억 달러는 스페이스X, 7,000만 달러는 테슬라, 나머지 1,000만 달러는 솔라시티에 나누어 2000년대 말까지 전부 투자한다.[33] 대표적으로 피터 틸은 머스크가 설립한 스페이스X오픈AI, 보링 컴퍼니의 투자자로 참여 중이다. 또한 데이비드 색스가 호스트로 있는 올인 팟캐스트에 출연하기도 했다.[원문] Per my recent comments, I am increasingly concerned about SpaceX going public before the Mars transport system is in place. Creating the technology needed to establish life on Mars is and always has been the fundamental goal of SpaceX.[34] 테슬라 창업자인 에버하드와 타페닝은 마스소사이어티 회의에 참석해 설치류를 우주에 보낸다는 내용의 머스크의 연설을 들으면서, 특이함을 느끼고 주요 투자자 후보로 그를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35] 이후 러시아는 이 아이디어가 실제로 돈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구형이 된 R-36 ICBM에 드네프르 로켓이라는 새 이름을 붙여서 상업용 로켓으로 전환시켰다.[36] 당시 같이 동행했던 동료는 처음에 일론 머스크가 자체 로켓 개발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을 때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으나 일론 머스크가 설계부터 제작 비용까지 치밀하게 계산하여 작성한 문서를 보고 의견을 같이했다고 한다. 또한 일론은 학부생 시절 당시 축전기 분야를 위주로 공부하였기에 이쪽 분야는 식견이 넓지 않았으나 독학으로 관련 지식을 쌓기 시작하였다고 한다.[37] 환경오염이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우주개발을 위한 기술이 발전하기 전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머스크는 친환경에너지의 보급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전기자동차와 태양광발전 사업도 이러한 취지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테슬라와 솔라시티의 사업도 화성 개척 계획에서도 활용할 수 있다. 화석 연료도 핵물질도 강도 없고 대기도 희박한 화성에서는 지구보다 효율이 낮다고는 해도 반드시 태양광 발전을 해야하고 전기차를 굴려야 한다.[38] 이 처럼 역사가 풍부한 기업들이 대폭 포진되어있는 항공우주 산업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들보다 빠른 속도의 개발을 지향했는데, 이 과정에서 자사 개발 속도를 못따라오는 납품 업체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마더보드, PCB, 센서, 태양 전지판, 컴퓨터 등 부품 대부분을 직접 제조하기 시작했다. 2010년대 중반 기준으로 전장과 부품 등 80% 이상을 자체 제작하고 있다. 또한 반덴버그에서 발사대를 사용하는 과정에서도 긴 대기시간 때문에 마찰을 겪은 사례도 존재한다.[39] 이 당시 일론 머스크는 파산 직전의 상태가 되어 전용기 탈 돈도 아껴야 했기 때문에 저비용항공사인 사우스웨스트 항공을 이용할 정도였다. 즉 4번째 발사마저 말아먹었으면 스페이스X는 파산하고 일론 머스크는 알거지가 될 수도 있었다.[40] 기존의 로켓들 중에도 재사용되는 종류도 몇몇 존재한다. 놀라운 건 스페이스X의 로켓은 발사체의 모든 부분이 완전히 재사용 가능하도록 개발 중이란 사실. 문제는 한번 우주로 발사된 로켓은 엄청난 압력과 열의 영향을 받기에 재사용 시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는 점. 실제로 우주 로켓 기술력을 가진 국가에선 이러한 이유 탓에 로켓 재사용 기술을 제한적으로 사용하거나 아예 배제하고 있다.[41] 결정적으로 스페이스X는 군사 위성 발사 수주 문제로 공군을 상대로 고소미를 먹여 가면서 쇼부를 친 적이 있다. 결과적으로 팰컨 9의 NRO 미션 3회와 GPS-III 위성 발사 3회, 그리고 팰컨 헤비의 STP-2 미션과 공군 우주 사령부의 기밀 미션 2회를 수주하는 데 성공하였다.[42] 청문회가 얼마 지나지 않아 ULA의 CEO는 경질되었고, 엔진 하청도 미국 업체인 블루오리진으로 갈아탄다.[43] 스페이스X의 신입 사원 면접 땐 반드시 직접 참여하여 난해한 질문을 많이 날린다고 한다. 다른 기업에서 우수한 인재를 헤드헌팅해 올 때도 그렇다고 한다.[44] 허나 본인이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재단인 만큼, 여느 억만장자들과 다르지 않게 이미지 메이킹 목적이며 탈세와 증여, 상속세 회피가 목적이 아니냐는 비판이 존재한다. 블룸버그에서는 누적 기금이 94억 달러에 육박하는 반면, 실제로 기부가 이루어진 금액은 전체 2%도 안되는 1억 6,000만 달러에 불과하기에 언행일치가 안된다며 이를 꼬집었다.[45] 지금이야 리튬 방식이 당연하다고 여기지만, 당시에는 리튬 배터리 방식을 채택하며 디바이스가 수십억 인구에게 보급된 모바일 시대가 열리기 전이었고 배터리 구축 방식이 제 각각이었다.[46] 에버하드가 CEO로서 경영을 하고, 머스크는 스페이스X에 조금 더 집중하는 한편 자금조달, 인맥중개, 로드스터 디자인 지시 등을 담당했다.[47] 계속된 투자에도 배터리와 변속기 성능의 개선이 더디었고 제조비를 2배 가량이나 착각하는 말도 안되는 실무 능력을 벌여 판매하는 족족 적자가 나게 되는 구조였다[48] 모델 S가 CLS 기반이었으며, 다임러는 테슬라가 자사 모델로 시연한 제품을 마음에 들어하며 지분 인수 외에도 스마트카용 배터리팩 4,000개를 주문했다. 이후 지분은 2014년 8억 달러에 매각하며 16배 이상의 수익을 냈다.[49] 판매 예약된 차량이 실제 구매로 이루어지지 않는 게 가장 큰 문제였는데, 판매직원을 대량 고용하고 중고차 가격 대응, 사후 서비스 강화 등의 정책을 예고하면서 단기간에 수요가 극복되었다. 이에 매각을 진지하게 고려하던 2013년 1분기에 오히려 4,900대를 인도하며 역대 최대 순수익을 남겨 에너지국의 차관을 1,200만 달러 이자 포함해서 조기 상환했다.[50] 펀드매니저들은 공장 상공에 드론을 띄우거나 내부자 소식통을 빼내는 등 당시 주당 3,000대 생산에도 못미치는 테슬라의 현실을 정확히 파악해냈다. 심지어 당시 테슬라 공매도에는 서브프라임 사태를 예측해서 대박을 친 것으로 유명한 마이클 버리까지 가세했다. 물론 캐서린 우드처럼 수많은 펀드매니저들이 테슬라에 대해 혹평을 쏟아내고 공매도를 치는 와중에도 테슬라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유지하며 테슬라에 장기투자해서 큰 돈을 번 펀드매니저들도 몇 있다.[51] 2020년과 2022년 주식분할을 적용시킨 값.[52] 마찬가지로 두 차례 주식분할을 적용시킨 값.[53] 3억 3,960만주 중에서 2022년 기준으로 2억 7,863만주 행사 요건을 달성했다. 머스크가 2022년 기준으로 보유하고 있는 주식 수량인 7억 1,502만주 중에서 무려 39% 해당 스톡옵션 충족을 통해 얻은 주식이다. 그리고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머스크의 테슬라는 일본의 도요타마저 시총으로 추월하기에 이른다.[54] 이 중 모델 Y는 가장 늦게 출시되었다.[55] 테슬라 모터스에서 테슬라로 바꿨다.[56] 20세기 초반 크라이슬러 이후, 미국 자동차 업계에서 100년만에 배출된 신생기업이 되었다.[57] 다만 이 재단에는 오픈AI의 경쟁사 구글 소속의 연구자가 이사회에 참여하고 있어, 단순 오픈AI 때리기가 아니냐며 진성성을 의심 받고 있다.[58] 세금만 무려 110억 달러를 납부했는데, 이는 역사상 가장 큰 금액의 단일 세금 청구서였다고 한다.[59] 스티브 잡스의 유일한 공식 전기를 집필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