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호/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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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수 경력[편집]



1.1. 프로 이전[편집]


서울무학초등학교 5학년에 축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중앙대학교 사범 대학에서 중고등학교를 모두 지낸 그는, 팀의 압도적인 성적과 함께 중고등학교 정상급 미드필더로 성장했다. 특히 동기인 서관수와 함께 고등학교 3학년 당시 아시아 학생 대회에서 대한민국 고등학교 팀의 주장을 맡아 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최고 레벨의 미드필더였던 전재호는 고려대학교, 연세대학교 등 대학 명문 팀들의 연이은 러브콜이 있었지만, 학교 동기들과 동반 진학하는 조건을 내세운 홍익대학교로 진학하게 된다. 홍익대학교 진학 이후 박창선 감독이 이끄는 19세 이하 대표팀에 선발되며 본격적으로 대표팀에 선발되기 시작했다. 이후 조영증 감독이 이끄는 1999년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나이지리아에서 열린 대회에 참여했다. 당시 이동국, 김은중, 설기현, 송종국, 김용대, 박동혁 등이 포진된 최고의 멤버로 구성된 팀이었다.

홍익대학교에서 4년 간 대학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발돋움한 전재호는 졸업을 앞두고 당시 K리그 최강 팀인 성남 일화 천마의 러브콜을 받고 프로선수가 된다.

1.2. 성남 일화 천마[편집]


2002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차경복 감독이 이끄는 성남에 입단하며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2002년의 성남은 이미 디팬딩 챔피언이자 리그 최강의 전력을 갖춘 강팀이었기 때문에 전재호는 신인 시절 거의 기회를 받지 못했다. 특히 아마추어시절 정상급 공격형 미드필더로 이름을 날리던 전재호의 자리에는 신태용이라는 리그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가 있었고, 윤정환 같은 선수도 주전으로 뛰지 못할 만큼 치열한 성남의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였다.

그래서 2년차를 앞두고 전재호의 킥과 스피드를 높게 본 김학범 수석코치는 전재호에게 풀백으로 포지션 변경을 제안한다. 결국 김학범 코치의 조언에 따라 꾸준히 노력해 온 전재호는 두 번째 시즌에 주전으로 도약하여 좋은 활약을 펼쳤다. 전재호는 2003년 성남의 리그 3연패에도 공헌하였다.

1.3. 인천 유나이티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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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에서 곧잘 활약하던 전재호였지만, 새로 창단된 인천이 성남에서 무려 여섯 명을 영입[1]하는 와중에 그 역시도 그 일원이 되어 인천에 합류하게 되었다.[2] 인천으로 이적한 이후 같이 온 김우재, 김현수와 함께 곧바로 팀의 주전이 되었다. 당시 쓰리백 전술에서는 좌측 미드필더를 맡아서 활약했고, 시즌 막판에는 포항 스틸러스를 상대로 극적인 결승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창단 첫 해의 활약을 통해 움베르투 코엘류 감독의 부름을 받아 국가대표 유니폼도 입었으나, 부상으로 인해 중도 낙마했다.

성남 출신 인천 창단 멤버 중 김현수, 김우재, 김정재가 한 해만에 인천을 떠났으나, 전재호는 권찬수, 황연석과 함께 팀에 계속 잔류했다. 그리고 2005년에도 변함없이 주전으로 활약하여 팀의 리그 준우승에 공헌했다. 인천에서 전재호는 차츰 임중용과 함께 팀의 중심을 잡는 베테랑 선수로 입지를 굳혔고, 4백에서는 좌측 풀백, 3백에서는 좌측 윙백 내지는 미드필더를 오가면서 활약하였다. 2010년에는 인천의 주장으로 선임되기도 하는 등 팀에서도 좋은 대우를 받았다.

2007년에는 임중용에두가 경기 중에 거세게 충돌하다가 임중용이 퇴장, 에두가 경고를 받은 경기가 있었는데,[3] 이 때 전재호는 판정에 큰 불만을 품고 거친 플레이를 보여주다가 이관우에게 거센 파울을 하여 퇴장을 당한 적이 있었다. 나가면서도 분을 삭이지 못한 전재호는 카메라가 있는데서 욕설을 하기도 했다. 9명으로 경기를 치른 인천이지만, 에두의 침 뱉는 장면 리플레이 등을 통해서 경기장 분위기가 달아오르며 경기 자체는 3 : 2로 종료되었다. 전재호는 벌금 처분을 받았는데, 이 사건 때문인지 인천은 여러 의미에서 예의주시 대상이 되었고 그것이 결국 이후 심판에게 항의한 방승환의 1년 출장 정지 징계로 이어지고 말았다.

허정무 부임 이후 주전에서 완전히 밀려난 임중용에 비해 전재호는 주장 완장을 배효성에게 넘기기는 했어도 2011 시즌에도 출장 기회를 계속 받았으나, 팀 사정에 따라 우측으로 옮겨가기도 하고 차츰 장원석에게 밀리기도 하는 등 과거에 비해서는 확실히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허정무 감독 역시 노쇠화가 되었지만 팀의 레전드였던 전재호를 잡지않겠다고 구단에 통보를 하면서 사실상 전력외의 선수가 되어버렸고 결국 FA 대상자가 된 전재호는 8년을 몸 담았던 인천을 떠나 이적을 선택, 인천과 작별한다. 임중용도 2011 시즌 종료 이후 은퇴했고, 그 이전 2010년에 김이섭이 은퇴한데다가 노종건도 팀을 떠났기에 팀을 상징하던 창단 멤버들이 하나 하나 떠나가는 중이었고, 전재호의 이적은 그 종지부를 찍었다.

1.4. 부산 아이파크[편집]


FA 자격을 얻은 전재호는 성남 시절 자신을 지도했던 은사 안익수 감독의 러브콜을 받고 부산으로 이적했다. 그래도 전 해까지 여전히 인천에서 많은 경기를 출장한 베테랑이기에 팬들의 기대를 받았지만, 피로골절이 겹치는 등 불운이 이어져서 전반기 3경기 출장에 그치고 말았다. 이에 스트레스를 받던 전재호는 반 시즌만에 팀을 떠났다.

1.5. 강원 FC[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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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여름 부산을 떠나 강원으로 이적했다. 성남 시절 자신에게 풀백을 추천하며 프로 생활의 수명을 늘려준 은사 김학범 감독이 강원으로 부임하며 전재호를 데려온 것이다. 강원에서는 다시금 과거 자신의 폼을 회복하며 주전 수비수로 경기를 치렀다. 골을 본래 많이 넣는 선수는 아니었으나, 2012 시즌에 멀티 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리고 2년 차인 2013 시즌에는 팀의 주장으로 선임되어 팀의 중심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팀이 부진하며 김학범 감독은 경질되는 등 부침을 겪었다. 시즌 막판에는 아마추어 시절 줄곧 봤던 공격형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변경해 대전전에서 중거리슛으로만 멀티골을 뽑아내는 등 팀의 잔류를 위해 최선의 기량을 펼쳤다. 하지만, 결국 강원은 2013 시즌 강등당하고 말았다.

강원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운 전재호는 2013 시즌 종료 후 은퇴를 선언하며 그라운드를 떠났다. 그의 후임으로 새 주장이 된 선수는 인천에서도 그의 후임 주장이었던 배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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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우재, 김정재, 황연석, 김현수, 권찬수, 그리고 전재호[2] 인천이 성남에서만 많은 선수를 데려온 것은 아니고, 안양 LG 치타스에서 5명, 전북 현대 모터스에서 3명을 영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남에서 온 선수 중 전재호, 김우재, 김현수, 황연석 네 명은 팀의 주전이었고, 권찬수도 로테이션 이상의 입지를 지닌 선수여서 특히 말이 많이 나왔다. 안양의 5명 중에는 최태욱이상헌, 전북이 3명 중에는 김이섭 정도만이 팀 내에서 일정 이상의 입지를 지닌 데에 비하면 성남이 피해를 많이 본 것이 사실이다.[3] 에두가 침을 뱉은 것은 카메라에 확실히 목격되었다. 다만 임중용도 뱉었다는 주장이 있고, 현재 진실은 당사자들만이 알기 때문에 무엇이 사실인지는 정확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