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창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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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장의위원회 구성
4. 여담
5. 참고문헌



1. 개요[편집]


항일 빨치산 1세대 출신의 북한의 정치인.

2. 생애[편집]


1905년 4월 10일, 함북 회령군 창효리 농가에서 태어났다. 연길에서 사범전문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하였으며 1926년 왕청현 봉오골에서 소학교 교원을 하다가 1930년에 반일운동에 투신, 1931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항일 유격대에 가담했다. 소련으로 퇴각 이후 88여단에 배속되었으며 상사 계급으로 분대장을 맡았다. 빨치산 동료 안정숙과 결혼했다.

해방 이후 귀국, 평양의 당조직 사업을 맡았으며 중앙지도부 구성 이후 함경남도에도 파견되었다. 북한 초기 최대의 문제였던 간부 양성 사업을 맡았다. 평양노농정치학교를 건설, 교무주임을 맡아 1945년 12월부터 간부를 양성했였으며 1949년 8월, 만경대혁명학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평양학원에서 당증수여사업을 하기 위해 반심사위원회가 구성되자 기석복이 위원장을 맡았고, 전창철과 조정철이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49년 2월 7일, 강상호, 박금철, 허봉학, 김창봉, 서철, 전문섭과 함께 국기훈장 3급을 받았다.

당중앙위원회 검열위원회 부위원장, 중앙당정치학교 교장 등으로 일하다가 1958년 3월, 1차 당대표자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보선되었으며, 1958년 6월 30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서철의 뒤를 이어 주 북베트남 대사로 부임하였다. 1959년 6월 전원회의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재선되었다. 1962년 7월 14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북베트남 대사에서 소환, 마동산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귀국하였다.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된 이후 죽을 때까지 재선되었다.

1967년 4월, 갑산파 사건으로 직총 중앙위원장 김왈룡이 숙청되면서 후임 직총 중앙위원장이 되었다. 1967년 12월, 4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외교위원에 선출되었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재선되었다. 1971년 10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 박문규가 사망하면서 1971년 11월에 그 후임 서기장에 임명되었고, 따라서 직총 중앙위원장 자리는 12월에 열린 직총 5차 당대회에서 렴태준에게 물려주었다.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상임위원회가 상설회의로 개편되면서 상설회의 사무장에 유임되었으며 죽을 때까지 이 직책을 맡았다.

1980년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1982년 3월 12일, 3시 50분에 77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중앙인민위원회는 부고를 발표, "전창철동지는 자기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확고히 세우고 당과 혁명위업에 무한히 충실하였으며 당의 강화발전과 공화국의 륭성번영과 인민의 행복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지혜와 정력을 다 바쳐 사업하였다."라고 칭송하였다.

이후 시신은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안장되었으며, 반신상도 제작되었다. 더불어 아내인 안정숙도 같이 합장되었다.

3. 장의위원회 구성[편집]



4. 여담[편집]


  • 부인 안정숙은 1989년 5월 12일에 사망했고, 남편과 같이 합장되었다.

5. 참고문헌[편집]


  •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 1: 건당, 건국, 건군의 역사(서울: 선인, 2003).
  • 조선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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