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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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운해.png[1]
성명
정운해(鄭雲海)
이명
이경진(李景珍)·이봉화(李奉華)
생몰
1893년 9월 14일 ~ 1945년 10월 27일
출생지
경상도 대구도호부 서상면
(현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2가)
사망지
대구광역시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 생애[편집]


정운해는 1893년 9월 14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서상면(현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2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0년 한일병합 후 국외로 망명하여 연해주만주 일대에서 여러 독립운동단체에 참여했다. 1919년 2월 27일 지린성 북문 밖 여준의 집에서 여준, 박찬익, 황상규, 김좌진, 정원택, 조소앙 등과 함께 대한독립의군부의 후신인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 결성에 참여하여 선전 겸 연락을 맡았다. 이후 국내로 귀환한 그는 1920년 6월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大邱支會) 결성을 주도하면서, 대구와 경북 일대에서 노동운동 확산에 힘을 기울였다.

1922년 2월 대구지회 정기강연회에서 생존권의 요구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그 해 대구지회 정기총회에서 총간사로 선출되었다. 1923년 2월 대구노동공제회 집행위원으로 선출되고, 4월 달성군 소작조합 결성을 주도하였다. 8월 각 공산주의 그룹의 대립으로 발생한 폭행사건인 일명 장안여관사건(長安旅館事件)에 가담하였다.

1924년 1월 진주에서 열린 경남노농운동자간친회(慶南勞農運動者懇親會) 개최를 주도했으며, 3월에는 남선노농동맹(南鮮勞農同盟)의 결성을 주도하고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특히 남선노농총동맹에서는 장래에 전국적인 노농조직을 건립하기 위한 준비작업의 일환으로 전조선노농단체연합 기관기성교섭위원을 선출하였는데, 그 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같은 해 4월에 결성된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 창립대회에서도 전형위원·기초위원·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는 등 초기 노동운동 발전에 기여하였다.

또한 11월에는 경성부에서 김약수 등과 함께 재일(在日) 사회주의사상단체인 북성회(北星會) 서울 본부로서 북풍회(北風會) 결성을 주도하였으며,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고, 기관지 『해방운동』 발행에도 참여하였다. 1925년 2월에는 화요회와 북풍회가 중심이 되어 전조선 운동단체의 조직적 통일과 운동방침에 대한 토의를 위해 개최하고자 했던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全朝鮮民衆運動者大會)의 준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해 3월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집행위원회 제4회 간친회 의장직을 맡아 회의를 주재했으며,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총무부와 편집부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4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가 일본 경찰에 의해 금지되자 해금교섭위원으로 선정되어 대회의 개최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 참석자들의 의견교환이 이루어지는 어떤 형태의 집회도 불허한다는 방침을 강요함으로써 결국 대회는 무산되고 말았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결성대회에 참석해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노농부(勞農部)를 담당하였다. 7월에는 대구농촌사에 가입해 서무로 활동했고, 11월 당내에서 북풍회의 종파행위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정권(停權) 처분을 받았다. 그 해 대구 지역 사회단체를 중심으로 구성한 치안유지법 대책위원회에 참여해, 조선에 대한 일본의 치안유지법 실시를 반대하였다.

그해 12월 노농총동맹을 조선농민·노동총동맹으로 나누는 문제에 대한 지방 각 세포단체의 의견을 수렴할 때, 대구노동공제회 간선위원으로 선정되어 노총에 배속되었다. 같은 달 일본 경찰의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을 피해 일본으로 탈출한 뒤 일본에서 조선공산당 일본연락부에 가입해 부원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 7월 조선공산당 일본부가 파괴되자, 다시 간도로 망명했으나 1927년 5월 그곳에서 체포되었다. 1928년 2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그해 5월 1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취하하였고#, 같은 날 서대문형무소에 입소하여 옥고를 치렀다.#

파일:정운해2.png
1928년 5월 1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1931년 5월 18일 출옥 후 대구에서 신탄사업을 했으며, 1944년 조선건국동맹 경북지부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8.15 광복 후, 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부 결성에 참여했고, 1945년 10월 관선 경상북도 고문을 맡았다. 그러나 10월 27일 백색테러로 인해 피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정운해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1923년 9월 12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