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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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IMG_7135.jpg

출생
1877년
경상도 웅천군 북부동
(現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북부동)[1]
사망
1941년 (향년 65세)
경상도 밀양시 하남면 수산리

우원(于源)

석천(石泉)
본관
신안 주씨[2]
학력
서당
직업
교육자, 독립운동가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독립운동가, 교육자


2. 생애[편집]


1877년(고종 14) 경상도 웅천군 북부동 백일마을에서 출생했다.
서당에서 수학하였으며 1902년웅천군의 판임주사로 서임되었다. 관리생활을 하면서 국내의 정세를 살펴보니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제러시아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하고, 한국의 침략이 노골화되어 구국의 길을 교육과 산업 진흥에 두어야겠다고 결심하고 관직을 그만두고 상경하여 선각자들을 방문하였다. 1906년 사재를 들여 김구석, 양주용과 함께 근대 교육 기관인 웅천에 사립 개통학교(웅천초등학교 전신)를 창설하여 교장이 되었고, 1907년 숙명의숙(淑明義塾)을 세웠다. 졸업생중 유망한 제자 40여명을 선발하여 사재로 유학을 시켜 민족지사의 양성에도 힘쓰니 가산이 기울어졌다. 그리고 교양과 지식을 보급하기 위해 웅천 도서원을 개설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료로 책을 대여하여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도록 권장하였다.실업조합, 흥업조합을 발기하고 '국채보상단연동맹'을 조직하여 일제의 경제적 침략에 대항하는 운동을 벌였으며 말년에는 밀양시 하남면 수산리로 이사를 하여 광복의 날만 기다리다 못보고 타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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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안 주씨 집성촌이다.독립운동가 주기철, 주기용 제헌 국회의원 이 마을 출신이다.[2] 웅천파. 신안 주씨 30세 기(基)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