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당(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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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러시아 제국 국기.svg {{{+1 [[러시아 제국|{{{#000000 러시아 제국}}}]]의 주요 정당}}}
혁명적 사회주의
인민주의
자유주의
자유보수주의
사회민주노동당
^볼셰비키 · 멘셰비키^
사회혁명당
^좌파 · 트루도비키 · 민중사회주의^
입헌민주당
진보당
10월 17일 연합
^ 좌파 · 우파[1]^
[1] 입헌민주당, 진보당, 10월당 좌파가 결성한 진보블록에 참여하지 않고 10월당 우파(right-wing of octobrists)라는 이름의 당파를 결성해 독자적으로 선거에 출마했다.



Прогрессивная партия
영어
Progressive Party
한글 명칭
진보당
주요 당수
알렉산드르 코노발로프
이반 예프리예모프
창당일
1912년
해산일
1917년 12월 12일
이념
고전적 자유주의
보수자유주의
의회주권주의
입헌군주주의[1]
정치적 다원주의
스펙트럼
중도 ~ 중도우파

1. 개요
2. 창립과 역사
3.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러시아 제국 말기부터 러시아 혁명기까지 존재했던 정당. 정치적으로는 입헌민주당10월당의 중간 즈음에 위치했다.


2. 창립과 역사[편집]


이 당의 기원은 1906년 부르주아들을 중심으로 10월당 내 좌파와 입헌당 내 우파가 모여 만든 평화개조당(party of peaceful renovation)이다. 이후 1912년 두마 총선을 앞두고 알렉산드르 코노발로프 등을 중심으로 진보당으로 재편되었다. 1912년 국가두마 선거에서 10월당과 카데츠에 이어 48석을 얻어 원내 3당이 되었으며, 정치적으로는 저 두 당의 중간 위치로써 의견을 조율하는 역할도 했다. 그러다 1차대전 이후 입헌민주당, 10월당 내 좌파와 연합해 진보 블록(Progressive bloc)을 조직해 여러 개혁을 요구했는데, 이는 정치범의 사면, 민족과 신앙(특히 폴란드)의 제한 철폐, 노조 결성의 자유 등 자유주의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이 개혁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으나 정부가 두마를 일시적으로 해산한 뒤 1916년이 되어서야 다시 소집해 사실상 거부되었다.

1916년, 러시아는 1차 세계대전의 장기화로 국내외로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었고, 러시아군이 삽질을 거듭하자 국내에서는 정치적 불안정이 커지기 시작하며 혁명을 외치는 목소리가 대두되었다. 이에 니콜라이 2세는 두마 재소집을 결심하고는 두마 재소집에 반대하는 총리를 끌어내린 뒤 새로 두마 소집에 찬성하는 보리스 슈튀르머를 총리로 임명했다. 두마가 재소집되자 진보 블록은 이 총리가 자신들의 개혁 요구를 승인할 것을 요구했으나, 그는 외부전쟁 중에 내부 대개혁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거부했다. 진보당은 급기야 정부의 책임을 요구한 뒤 이 블록을 떠나버렸고, 이에 슈튀르머와 프로토포프와 같은 정부 인사들은 두마 해체를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전임 러시아 국가두마 의장이었던 알렉산드르 구치코프는 케렌스키를 위시로 한 진보당 소속 의원 5명의 쿠데타 가능성을 보고하기도 했으나 정부는 이에 대한 별다른 조치나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다만, 쿠데타는 러시아군 전선군 총사령관이었던 니콜라이 대공[2]이 쿠데타 지지를 거부했기에 실제로 벌어지지는 않았다.

이후 러시아 2월 혁명으로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자[3] 입헌군주제를 지지했던 이들은 니콜라이 2세의 동생 알렉세이 대공의 옹립을 지지했으나, 결국 군주제가 폐지되고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면서 이 블록 역시 해산되고 러시아 공화국이 성립되자 진보당은 여기에 참여한다. 그러나 10월 혁명으로 임시정부가 무너진 후 소비에트가 제헌의회까지 해산하자 진보당도 해산된다.

이후 러시아 내전기에 일부 전 진보당 당원들이 반볼셰비키 세력으로써 백군에서 싸웠다.


3.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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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월혁명 이전[2] 니콜라이 1세의 손자. 1차대전 당시 독일, 오헝, 오스만과의 전쟁을 총괄했으나, 성과가 미흡해 경질되었다. 이후 러시아 내전 당시 캅카스에서 일부 백군에 의해 황제로 옹립되었다. 이후 프랑스로 망명해 1929년 사망했다. [3] 일부 사학자들에 따르면 진보당과 카데츠, 10월당이 니콜라이 2세에게 평화로운 퇴위를 권유했기 때문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