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혁명당(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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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사회주의
인민주의
자유주의
자유보수주의
사회민주노동당
^볼셰비키 · 멘셰비키^
사회혁명당
^좌파 · 트루도비키 · 민중사회주의^
입헌민주당
진보당
10월 17일 연합
^ 좌파 · 우파[1]^
[1] 입헌민주당, 진보당, 10월당 좌파가 결성한 진보블록에 참여하지 않고 10월당 우파(right-wing of octobrists)라는 이름의 당파를 결성해 독자적으로 선거에 출마했다.



파일:사회혁명당.png
Па́ртия социали́стов-революционе́ров
영어
Party of Socialist-Revolutionaries[1]
한글 명칭
사회주의자 혁명가당
약칭
사회혁명당 (한)
СР, Эсэры (러)[2]
SRs (영)[3]
슬로건
Въ борьбѣ обрѣтешь ты право свое!
(투쟁으로 그대의 권리를 되찾자!)
창당일
1900년
해산일
1940년 (공식적)
1921년 (실질적)
이념
농본주의
나로드니키
사회주의
연방주의

내부 계파 :
혁명적 사회주의
민주사회주의
• 혁명적 생디칼리슴[4]
스펙트럼
좌익
국제조직
제2 인터내셔널 (1889–1916)
노동과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1923–1940)
1. 개요
2. 역사
3. 분파
4. 의의
5. 출신 인물
6. 기타
7.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사회혁명당은 1902년 창당되어 1940년 해산된 러시아의 정당이다. 19세기 후반 러시아 제국에서 유행했던 나로드니키 이념을 계승했으며, 러시아 혁명 이후 1922년 소련 수립 전까지 러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정당 중 하나였다. 20세기 초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과 함께 러시아 혁명을 이끌었다.

당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주로 약어인 SR 또는 에스에르(Эсэры, Eser)로 불렸으며, 흔히 사회혁명당, 사회주의혁명당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2. 역사[편집]


사회혁명당은 인민주의 운동가들로부터 탄생했다. 게르첸, 라브로프, 바쿠닌 등의 인민주의 이론가들의 영향을 받은 나로드니키 운동가들은 <토지와 자유>를 세워 테러리즘 활동과 브나로드 운동과 같은 계몽 운동을 병행하고 있었으나, 제국 정부의 끊임 없는 탄압과 브나로드 운동의 지속적인 실패로 인해 위축되었고 내부적으로 노선 차이가 발생해 차리즘에 대한 폭력 투쟁을 강조하는 강경파는 '인민의 의지'로, 대중 선동과 계몽에 주력하던 온건파는 '흑토 재분배'로 분열했다.

토지와 자유의 분열은 인민주의 세력이 다양한 단체를 창설하는 계기임과 동시에 분열의 계기였다. 상호 간의 의견을 일치시키지 못한 인민주의 혁명가들은 지역 단위, 또는 개인 단위로 연대하기 시작해 1896년에는 사회주의 혁명가 북부 연합, 예카테리나 브레시코프스키가 세운 러시아 정치 해방 노동당 등의 다양한 단체들이 등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비롯해 다양한 사회주의 이론과 학설을 접한 새로운 인민주의 이론가, 혁명가, 활동가들이 등장해 인민주의 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1902년에 사회혁명당이 창당되어 여러 인민주의 단체들을 통합했다. 당 기관지는 '혁명 러시아'였으며 편집인은 체르노프와 고츠였다.

사회혁명당은 테러리즘 활동과 혁명 운동을 동시에 전개하여 농민 운동과 협동 조합 운동을 주도하는 것과 동시에 당 내부에 테러 조직을 창설해 반동적인 관료와 군인, 사회 인사들을 암살했다. 이에 사회혁명당은 차리즘에 대한 불만이 많던 청년층의 공감을 얻었고, 제국 정부에게도 심리적 부담과 타격을 입혔다.

사회혁명당의 주요 지지 세력은 농민이었지만, 노동자와 지식인들의 일부도 사회혁명당을 지지했다. 원래 인민주의는 농민을 기반으로 하지만, 수차에 걸친 브나로드 운동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은 인민주의자들에게 냉담했던 반면, 노동자들은 인민주의 활동가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었기에 인민주의자들은 농민보다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더 인기가 많은 기묘한 상황에 빠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창당된 사회혁명당은 농민 - 노동자 - 지식인 3대 계층의 연대를 주장하고 도시에서 노동자들 사이에서 활동하며 노동 운동을 지원했다. 이 과정에서 사회혁명당은 노동자와 지식인들의 지지를 확보하고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설득력을 확보했다.

그리고 농민층의 경우, 사회혁명당이 창당되던 20세기 초부터 러시아의 정치, 사회적 불안정, 경제적 문제 등이 증폭되어 대중적인 불만이 크게 늘어나 농민들의 '혁명화'가 가속되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농민들은 점차 사회혁명당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사회혁명당은 경쟁 세력인 사회 민주 노동당이 도시에서만 활동할 때에 농촌 지역에서도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사회혁명당은 주요 정강으로 토지 개혁과 '토지 사회화'를 내세웠고, 이는 농민들의 관심을 받았다. 러시아 인구 80%를 차지하던 농민들은 느린 소득 증대와 과다한 인구압으로 인한 토지 부족 문제를 겪어 농노 해방 이후에도 빈곤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에 사회혁명당은 귀족과 국가가 소유한 토지들을 농민에게 분배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독일 사회주의자들과 낭만주의자, 개혁가, 러시아 슬라브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은 인민주의자들은 농촌 공동체인 미르를 사회주의의 기초가 될 수 있는 토대로 인식하고 토지의 국유화도, 사유화도 아닌 토지의 사회화를 주장했다. 사회혁명당은 이 주장을 그대로 물려받아 산업 자본계가 미르 해체를 주장하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미르에 대한 비평을 내놓을 때에도 미르를 옹호하며 미르를 통한 사회주의 구현을 시도하려 했다.

1905년 혁명 이후에 수립된 블리긴 두마에서 사회혁명당과 트루도비키들은 크게 약진하여 다수의 의석을 확보했다. 그러나, 니콜라이 2세는 사회주의, 자유주의 세력의 두마 장악을 우려하여 1차 두마를 해산시켰다. 이후, 3.15 부정 선거 이상의 부정을 저지르고도 2차 두마에서 사회주의 세력이 이전보다 더욱 많은 의석을 확보하자, 두마를 통제하려 했던 스톨리핀은 1907년에 6월 쿠데타를 일으켜 두마를 해산시키고 선거법과 선거구를 다시 조정해 보수 세력들이 3차 두마에서 대부분의 의석을 확보하게 해주었다.

이 때문에 사회혁명당은 3차 두마부터 소수 정당으로 전락하여 의정 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기가 어려워졌다. 쿠데타를 일으켜 사회혁명당, 트루도비키, 입헌민주당, 소수민족들의 분노를 샀지만, 그 대신에 10월당의 협조를 확보한 표트르 스톨리핀은 귀족들의 토지를 분배하는 것이 아닌, 미르를 해체하여 농민들의 토지를 정리하고 개별적으로 토지를 분배하는 개혁을 추진했고 사회혁명당은 이러한 스톨리핀의 조치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 페트로그라드에서 제정이 전복되고 임시정부가 들어서자, 사회혁명당에서는 혁명 이후 당의 주요 노선을 두고 크게 두 분파로 나뉘었다. 빅토르 체르노프와 같은 기존 사회혁명당은 자유주의자와 연정을 통해 점진적인 토지 분배를 이루고 제1차 세계 대전을 지속하자고 하였고 이에 반대하는 마리야 스피리도노바와 같은 좌익파는 전쟁을 제국주의적 전쟁으로 규정하여 반전을 주장하고, 즉각적인 토지분배를 하여 사회혁명당이 보수주의자 및 자유주의자와 연정하던 것을 끝내자고 하였다.

2월 혁명 때까지만 해도 사회혁명당에서는 기존 온건노선이 대세를 이루었지만,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전쟁을 지속하기로 결정하고 경제는 물론 전쟁에서의 암담한 소식을 접하자 이에 당에 실망한 당내 좌익파들은 좌파 사회주의혁명당(Партия левых социалистов-революционеров)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해 볼셰비키와 협력하여 10월 혁명에 임시정부를 무너트리고 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하는데 적극 참여했다.

하지만 1917년 11월 25일 러시아 전역에서 치러진 제헌의회 선거에서 볼셰비키의 예상을 뒤엎고 기존 온건노선 사회혁명당이 다수 의석을 얻었다. 이에 혁명 이후 권력에서 배제될 것을 두려워한 볼셰비키는 좌익 사회혁명당과 함께 제헌의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는 온건파 사회주의자들로부터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기존 사회혁명당, 즉 우익 사회혁명당원들은 러시아 전역에서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투쟁에 합류했다.

좌익 사회혁명당은 처음 소비에트에서 볼셰비키와 함께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그러나 당시 사법 권력이자 비밀경찰이었던 체카의 통제권을 두고 갈등했고, 여기에 1918년 볼셰비키가 독일 제국에게 굴욕적인 협상조건을 강요당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으면서 볼셰비키와 점차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1918년 7월 주러 독일 제국 대사였던 빌헬름 폰 미르바흐가 사회혁명당원에 의해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볼셰비키는 군대를 동원해 좌익 사회혁명당을 본격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사회혁명당은 1923년까지 러시아 전역에서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봉기를 주도했다.

1922년 모스크바에서 사회혁명당원들에 대한 재판이 열렸을 때,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카를 카우츠키를 비롯한 당시 지식인들은 사회혁명당원 피고에 대한 구명운동에 동참했다.

3. 분파[편집]


사회주의 노선 해석에 대한 차이를 두고 볼셰비키멘셰비키로 나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과 마찬가지로, 사회혁명당도 당내 다양한 분파가 존재하였으며, 이들 중 몇몇 정파는 개별 정파로써 독립하기도 했다.

러시아 혁명 이전
사회혁명당 내 온건파. 1906년 러시아에서 첫 두마 선거가 실시되었을 때 온건파 출신들이 주를 이루었다. 제1차 (1906-1908), 제2차 두마에서 좌익진영 대표정당으로 인기를 끌었던 정당이다. 훗날 2월 혁명 이후 임시정부를 이끌게 되는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속한 정파였다.

  • 민중사회주의자 (Народные Соицалисты, Popular Socialists)
1906년 사회혁명당에서 테러리즘을 통한 정치적 목표 달성에 반대하는 당원들이 세운 독립정당. 사회혁명당의 주요 의제였던 토지개혁에 있어 사회화(지주들의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보다 국유화(지주들의 토지를 국가에 귀속) 방식을 선호했다. 사회혁명당원들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마르크스주의의 요소도 일부 차용했다. 1907년 두마가 스톨리핀에 의해 해산된 이후 사실상 해산되었다. 2월 혁명 이후 잠시 부활해 트루도비키들과 연합했다가 10월 혁명 이후 사실상 해산되었다.

  • 마르크스주의자 (Союз социалистов-революционеров-максималистов, Socialists-Revolutionaries Maximalists)
사회혁명당 내 마르크스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급진파. 이들은 혁명적이고 과격한 방식을 사용하는데에도 적극적이라 1905년 혁명 등 사회혁명당의 적색 테러를 주도했다. 1906년 스톨리핀의 주도로 반쯤 친위 쿠데타에 가까운 방식으로 2차 국가두마가 해체되자, 이때 사회혁명당에서 떨어져 나와 독자적인 정당을 차렸다. 1907년까지 사회혁명당 주류와 함께 끊임없이 테러를 일으키며 혁명을 시도했으나 끝내 실패하고 1907년부터는 활동이 침체되었으나,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여기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10월 혁명이후로는 해산되어 일부는 좌파 사회혁명당에, 일부는 볼셰비키에 들어갔다.

러시아 혁명 이후

  • 사회혁명당(기존 사회혁명당)
볼셰비키에 반대한 온건파. 사회혁명당 자체가 1차 국가두마 때부터 트루도비키가 다수였기에 사실상 위에 나온 트루도비키와 동일하다. 러시아 내전이 발발하자 우파에서는 알렉산드르 콜차크가 이끄는 러시아국의 백군과 연합하여 볼셰비키에 싸웠다.
우익 사회혁명당원들은 러시아 내전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고립된 세력 중 하나였다. 왕당파를 위시한 백군볼셰비키 모두 이들을 적으로 취급했다. 결국 대다수 우익 사회혁명당원들은 해외로 망명했고, 일부 우익 사회혁명당원들은 해외에서 1923년부터 1940년까지 활동을 이어갔다. 좌파 사회혁명당에 입당한 이들은 적백내전동안 볼셰비키가 적군 내 반대파 숙청을 시도하자 반볼셰비키 테러 활동을 이어갔다.

  • 좌익 사회혁명당 (Партия левых социалистов-революционеров, Party of Left Socialists-Revolutionaries)
1차 세계대전을 지속하던 기존 사회혁명당을 비판하여 나온 이들. 이들은 제1차 세계 대전을 즉시 중단하고 즉각적인 토지개혁과 노동자-농민들의 자발적 평의회 건설을 통한 협동조합화된 노동공화국화 그리고 노동자와 농민들의 의거한 진정한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실현 등을 목표로 삼았다.
이들은 기존 나로드니키부터 이어진 투쟁방식인 농민 파업, 노동자 총파업, 테러리즘적 전술을 통해 사회혁명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으며 실제로도 많은 좌파 사회혁명당원은 제국주의자, 지주, 자본가들을 암살하기도 하였으며 이로 인해 손을 잡았던 볼셰비키와의 관계가 약화되자 블라디미르 레닌을 암살하려고도 하기도 하였고 그 외에도 탐보프 농민봉기, 크론슈타트 봉기 등을 이끌며 볼셰비키와 적극적으로 대립하여 싸우기도 하였으며 볼셰비키의 탄압에 불복하여 이들은 지하-좌파 사회혁명당 파벌을 조직하여 볼셰비키에 대한 무장투쟁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볼셰비키의 탄압과 당내의 폭력적 방법에 의문을 품던 이들도 많았기에 이들 역시 많이 분열되는데 대표적으로 레닌과의 적극적 협력을 주도하며 당을 탈당한 인민공산당(Партия народников-коммунистов)과 혁명적 공산당(Партия революционного коммунизма)이 있으며 다른 하나는 폭력적 투쟁이 아닌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투쟁을 주장한 이삭 스타인버그(Исаак Нахман Штейнберг, 1888~1957)의 법률주의(혹은 합법주의)파가 존재했다.
이 중 혁명적 공산당과 인민공산당은 당을 자진 해산하여 볼셰비키와 통합하였고 이삭 스타인버그의 합법주의파 역시 볼셰비키의 '불법활동' 의혹을 받아 탄압받고 그 자신도 러시아를 떠났으며 볼셰비키와 투쟁을 주장하던 지하 좌파 사회혁명당 파벌 또한 구속되었다가 레닌 사후 1937년 대숙청 시기에 숙청당했다.

이외에 임시정부 시기에 케렌스키를 지지하고 다른 사회혁명당 정파들에 비해 확연히 온건하고 우파적인 성향을 가졌던 이들을 따로 사회혁명당 우파(right-SR)이라고도 부른다. 이들의 성향은 거의 사회자유주의에 가까웠다.

4. 의의[편집]


오늘날 사회혁명당은 러시아 혁명이라는 거대한 풍파 속에서 볼셰비키에 밀려 패배한 정당으로써 역사가를 제외하면 잘 알려지지 않은 정당이다. 하지만 사회혁명당은 19세기 후반부터 차르의 전제정치에 저항해왔던 나로드니키의 정신적 계승자였으며,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사에 있어서 분명히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 정당이었다. 특히 사회혁명당은 나로드니키의 주요 사상에 따라 당대 러시아 농촌의 현실을 개선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러시아 농촌은 1917년 제헌의회 선거에서 사회혁명당에 혁명을 주도했던 볼셰비키보다도 훨씬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면서 응답했다.

특히 사회혁명당은 초창기부터 혁명운동을 이끌어 왔던 대중정당으로써 모습을 끝까지 이어나갔다. 사회혁명당원들은 시대 상황에 따라 각자 성향에 따라 의회에서부터 농촌까지 자유롭게 활동했다. 대표적으로 러시아 혁명 이후에도 사회혁명당원들은 각자 성향에 따라 좌익, 우익 등 다양한 분파로 나뉘어 활동했고, 이들은 자신의 사상에 따라 국외로 망명하거나 러시아에 남아서 탐보프 반란같은 반볼셰비키 반란을 주도하는 한편, 녹색군대와 같은 농민군에 가담하기도 했다. 이는 레닌에 의해 당내 파벌이 금지되고 점차 민주집중제라는 이름으로 권위주의화되었던 볼셰비키와도 차별되는 모습이었다.

사회혁명당은 소비에트 정부가 세워진 후 마지막까지 공식적으로 활동했던 야당이었다.[5] [6] 사회혁명당이 제거됨과 함께, 볼셰비키는 러시아 내전에서 승리하면서 소련에서 견제받지 않는 유일정당으로써 입지를 굳혔다. 하지만 이렇게 견제장치가 사라진 공산당은 이후 이오시프 스탈린의 대두와 함께 전체주의적 독재를 향해 폭주했고, 결국 홀로도모르대숙청으로 사회주의 운동에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남기면서 한 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5. 출신 인물[편집]


  • 마리야 스피리도노바 (1884-1941)
사회혁명당원. 1906년 탐보프 지역 사회혁명당에 입당해 이후 좌익 사회혁명당을 이끌었던 지도자 중 한 명이다. 러시아 혁명에서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와 더불어 몇 안되는 여성 혁명가로 알려진 인물이다.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에 의해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내전이 마무리 된 후 정치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석방되어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거주했으나, 대숙청 기간중 다시 체포되었다. 워낙 명망이 높았기에 소련 정부도 함부로 처형할 수 없어 2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독소전쟁 발발 후 수감자들을 후방으로 옮길 수 없었던 NKVD에 의해 처형되었다.[7]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연방하에서 복권되었다.

사회혁명당 전투조직원. 1904년과 1905년에 걸쳐 러시아 제국 고위 관료 암살에 참여했으며, 2월 혁명 이후에는 임시정부에서 전쟁부장관(국방장관)을 잠시 맡기도 했다. 10월 혁명 이후 극우파로 변신하였고, 볼셰비키에 맞섰으나 당시 볼셰비키 비밀경찰이었던 체카의 공작에 속아 러시아로 귀국했다가 체포되어 1925년 옥사했다.[8]

러시아 공화국 총리. 트루도비키에 속했다.

  • 파니 카플란 (1890-1918)
블라디미르 레닌 암살 미수범. 사회혁명당원이었다. 본래 시각장애인으로 크림반도에서 요양했었으나, 드미트리 울랴노프[9]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고 레닌 암살을 시도했다.

  • 야코프 블룸킨 (1900-1929)
체카 요원으로 활동하였고 내전 후 볼셰비키로 전향했으나 튀르키예에서 레프 트로츠키를 만나고 왔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당시 트로츠키를 만나고 오는 당원들이 하도 많았던 탓에 스탈린은 트로츠키의 영향력을 소련에서 완전히 없애고 당원들에게 경고를 줘야 할 필요가 있었는데 전 사회혁명당원이었던 블룸킨이 거기에 걸려든 것이다.


6. 기타[편집]


  • 사회혁명당과 이들의 선배인 나로드니키는 정치적 테러, 게릴라전, 무장봉기과 같은 무장 투쟁으로 사회주의 운동과 러시아 역사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알렉산드르 2세, 표트르 스톨리핀같은 정치적 거물을 암살했고, 러시아 혁명 이후에도 독일 제국과 맺은 굴욕적인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반발해 주러 독일 대사를 암살하고 블라디미르 레닌까지 암살하려 했다.[10] 볼셰비키에 탄압받기 시작한 이후에도 사회혁명당원들은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녹군, 네스토르 마흐노 등과 연합하여 볼셰비키에 맞서 싸우는 한편, 다른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연합하여 크론시타트 반란, 탐보프 반란과 같은 좌익봉기를 주도했다. 이들이 선보인 무장투쟁 방식은 훗날 붉은 여단, 바더 마인호프, 적군파같은 극좌 무장조직의 투쟁방식에도 영향을 끼쳤다.


7.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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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식 당명은 이렇지만, 편의상 Socialist Revolutionary Party라고 번역하기도 한다.[2] 에스에리라고 읽는다.[3] 러시아 명칭에서 따 'Esers'라고도 칭한다.[4] 러시아 내전 발발 이후 사회혁명당 좌파의 이념 [5] 1918년 7월 6일 사회혁명당 좌파가 볼셰비키에 대항해 봉기를 일으키기 이틀 전인 7월 4일에 개막한 5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는 고르바초프 이전 소비에트 러시아와 소련 최후의 다당제 국가기관이었다. 실제로 당시 의석을 살펴보면 볼셰비키가 1164석중 773석이라는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사회혁명당 좌파가 353석, 최대주의자들이라 불리는 사회혁명당 극좌파가 17석, 아나키스트가 4석, 멘셰비키 국제파가 4석, 유대인 조직인 포알레 시온이 1석에 아르메니아 혁명연합(다쉬낙)이 1석, 그리고 백군의 집권정당이었던 사회혁명당 우파 1석, 무소속 10석이었다.[6] 한때의 동지이자 야당이라 보기만은 애매한 멘셰비키 국제파는 조금 더 오래 살아남았다. 크론시타트 수병봉기 이전까지 주로 활동하였는데, 수병봉기 직후 이들의 지도자인 표도르 단이 체포되는 수모를 겪으면서 완전히 해체된다. 멘셰비키들은 엄연히 지역 소비에트에서 소비에트 러시아가 주장한 대로 '민주적으로' 당선되었었지만, 볼셰비키는 이들을 족족 감옥에 보냈다.[7] 소련은 스피리도노바만 아니라 소련 서부의 교도소에 수감된 수형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을 벌였다.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발트 3국의 민족주의자와 정치범, 전쟁포로들이 이때 다수 학살당했다.[8] 추락사했다고도 한다.[9] 레닌의 동생 맞다.[10] 심지어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 암살사건의 여파로 건강이 악화되어 일찍 죽었다는 시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