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테일러(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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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베리아 공화국 제22대 대통령
찰스 테일러
Charles Tayl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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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찰스 매카서 강카이 테일러
Charles McArthur Ghankay Taylor
출생
1948년 1월 28일 (76세)
라이베리아 몽세라도 주 아싱턴
직업
前 정치인
재임
제22대 라이베리아 대통령
1997년 8월 2일 ~ 2003년 8월 11일
정당
PRC (1983년 제명)
NPP (1997~2005)
학력
벤틀리 대학교
가족
배우자[1]
자녀 14명

1. 소개
2. 생애
2.1. 초년 시절
2.2. 집권 과정
2.3. 시에라리온 내전 개입
2.4. 몰락, 그리고 재판
3. 은닉 재산
4. 기타
5. 매체



1. 소개[편집]


라이베리아대통령이자 독재자, 학살자.

시에라리온 내전을 일으킨 전범으로, 소년병 양성과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 신체훼손, 학살 등의 다양한 전쟁 범죄로 국제적인 지탄을 받았으며, 그 악명높은 블러드 다이아몬드라는 용어를 만든 장본인이다.


2. 생애[편집]



2.1. 초년 시절[편집]


그는 어린 시절 라이베리아 수도 몬로비아에서 약 48km 떨어진 한 시골 지역에서 불륜으로 인한 혼혈 사생아로 태어났고, 그 곳에서 자랐다. 그는 훗날 자신이 어린 시절 학교에 맨발로 걸어 다녔다고 회상했다. 다만, 찰스 테일러의 어머니는 라이베리아 토착민인 골라족이었는데 이러한 어머니의 평범한 신분은 찰스 테일러가 훗날 라이베리아와 미국에서 동시에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찰스 테일러는 자신의 중간 이름에 골라어로 '강자'라는 뜻을 지닌 '강카이(Ghankay)'를 덧붙였다.

그는 학교를 마친 뒤 교사가 됐고, 결혼해서 20살 때에 자녀를 가졌다. 이후 수도인 몬로비아로 이사해서 재무부에서 회계업무를 맡았다. 1972년, 그는 다른 아메리카계 라이베리아인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는 것이 자신에게 출세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판단했고 미국 유학을 떠났다. 그는 메사추세츠 벤틀리대에서 스포츠카를 몰고 트리니다드 출신 애인 버니스 이매뉴얼과 두 번째 아이인 처키 테일러(찰스 매카서 이매뉴얼)를 낳았다. 그는 그 곳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미국 내의 라이베리아인들과의 관계를 맺어갔다. 동시에 미국에서 고국의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백악관 인근에서 열린 한 시위에서는 당시 라이베리아의 대통령이었던 윌리엄 톨버트의 가짜 관을 끌고 나오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찰스 테일러는 1980년 톨버트 정부의 초청으로 라이베리아로 돌아가서 라이베리아 현대화사업의 자문 역할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2달 뒤 원주민 출신의 군인 새뮤얼 케니언 도 상사(!)가 쿠데타를 일으켰고, 새뮤얼 케니언 도는 톨버트 대통령과 아메리카계 라이베리아 핵심 브레인들을 제거하고 이후 수십년 간 이어지는 라이베리아 내전의 서막을 열었다. 자세한 내용은 라이베리아 항목 참고. 권력을 잡은 새뮤얼 케니언 도는 찰스 테일러를 조달청장에 앉히고 내각에도 자리를 마련해주는 등 그를 우대했다. 하지만 찰스 테일러는 1983년 미 뉴저지의 한 제조업자에게 웃돈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정부의 공금을 횡령했다는 혐의를 받게 되었다. 그는 처벌을 피해 미국으로 도주했으나 1984년 보스턴에서 FBI에게 체포됐다.

체포된 후 매사추세츠의 교정시설에서 1년 이상을 보낸 찰스 테일러는 1985년 감옥에서 탈옥에 성공하는데, 알려진 바에 따르면 테일러와 다른 4명의 수감자들과 함께 사용하지 않는 세탁실의 창문 창살을 절단하고 감옥에서 탈출했는데, 헝겊으로 만든 밧줄을 이용해 12피트 높이의 교도소 벽을 넘었고 얼마뒤 그와 다른 2명의 탈옥수들이 테일러의 아내인 에니드와 처제인 루시아 토웨가 일하고 있는 조단 병원에서 만났다고 한다. 그러나 찰스 테일러는 훗날 전범 혐의를 다루는 법정에서 그는 미국 정부가 자신을 풀어줬다고 주장했으며, 프린스 존슨은 2008년 8월 27일 찰스 테일러의 탈옥은 당시에 라이베리아 대통령이었던 새뮤얼 케니언 도를 제거하기 위한 미국의 계획된 행동이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당시에도 찰스 테일러의 탈옥의 배후에는 새뮤얼 케니언 도 정권을 전복시키는 역할을 찰스 테일러에게 맡기려는 미 정부가 있었다는 음모론이 나돌 정도였다. 어쨌든 그렇게 탈옥에 성공한 테일러는 리비아에 도착했고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의 보호를 받으며 게릴라전 수행에 대한 군사 훈련을 받게 된다.


2.2. 집권 과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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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우리 아빠를 죽였다.

그는 우리 엄마를 죽였다.

그는 우리 누이와 딸을 강간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에게 투표할 것이다."

- 찰스 테일러가 97년 대통령 선거에 내건 구호[2]

찰스 테일러는 새뮤얼 도의 군사 반란에 끼어들어 권력을 차지하는 듯 싶더니, 이후 횡령혐의로 요직에서 해임되자 골때리게도 리비아로 달아나서 카다피에게 의탁한다. 처음에 카다피는 그를 영 탐탁지 않게 생각했으나, 라이베리아가 안정되면 또다시 미국이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반군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이런저런 지원을 해준다.

그는 카다피가 사막에 꾸려놓은 혁명가 캠프에서 코트디부아르펠릭스 우푸에부아니, 부르키나파소블레즈 콩파오레와 같은 독재자들과도 함께 생활했다. 유엔(UN)의 경고를 무시하고 라이베리아에서 돈벌이 궁리를 하는 국내외 자본들도 테일러의 편이었다. 가장 가까운 동맹은 시에라리온에서 반군 혁명연합전선(RUF)을 이끌던 포다이 산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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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의 막대한 지원에 힘입은 테일러는 라이베리아로 돌아와 새뮤얼 도를 축출하였지만, 이는 오히려 정치적 분열을 일으켰고 폭력적인 당파싸움이 계속되었다. 7년 가까이 내전이 지속되며 많은 사망자와 함께 라이베리아의 치안과 경제는 시궁창에 빠져들게 된다. 나무와 철광, 다이아몬드, 고무와 같은 라이베리아의 천연자원을 놓고서 벌인 라이베리아 군벌들 간의 치열한 싸움으로 무려 20만 명 이상이 희생되고 100만 명이 넘는 난민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찰스 테일러를 비롯한 군벌들은 이른바 ’피의 다이아몬드‘를 밀매하고 그 돈으로 무기를 사들여 아프리카는 그야말로 개판 오분전이 되어버렸다. 그야말로 카다피가 원하던 계산이 딱 들어맞았던 셈.

이후 테일러는 내전이 일시적으로 중단된 사이에 유엔의 관리 하에 치러진 선거에서 자신이 지면 다시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공갈 협박을 대놓고 하여 75%가 넘는 지지율로 이겨서 1997년 합법적인 대통령이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선거가 라이베리아의 사살상 최초의 완전 자유선거였다. 왜냐하면 1980년 휘그당 집권기때는 선거가 요식행위에 가까웠고 라이베리아 초창기때는 서양식 주택을 보유한 사람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하는 제한 선거제도였기때문. 그러나, 진짜 비극은 도리어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그는 반대파를 쓸어버리고 권력을 독점하는 전형적인 루트를 탄다. 집권 초부터 찰스 테일러의 개인 친위대에 의한 살인실종, 약탈, 능욕 사건이 계속 일어나자 라이베리아 국민들의 지지는 눈녹듯이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찰스 테일러의 아들 처키는 당시에 테러 진압 조직을 지휘했는데, 그는 2009년 플로리다 법정에서 '미국인이 해외에서 고문을 자행한 혐의'로 97년형을 선고받았을 정도로 악랄한 인물이었다.


2.3. 시에라리온 내전 개입[편집]


그러나 그의 독재는 꽤 짧은 편이었는데, 바로 이웃 시에라리온에 가득한 다이아몬드를 욕심내며 시에라리온 내전에 한발 걸쳤던 것. 그것도 스스로 RUF(혁명연합전선)를 지원했다가 혼자 다 뒤집어썼다.

그는 시에라리온 반란군으로 위장한 라이베리아군(NPFL)을 보내서 RUF의 수법을 그대로 배껴 현지인들의 두 팔을 자르거나 아이들을 납치하여 강제로 마약을 먹여 소년병이나 위안부들로 만들고, 중독 상태에서 전투와 살인을 강요하며 시에라리온을 말 그대로의 지옥으로 빠트렸다. 심지어 테일러는 시에라리온에서 직접 RUF의 작전을 지시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처음에 다이아몬드는 반군들이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수단이였지만, 점차 다이아몬드가 목적이 되면서 라이베리아는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RUF는 교전 과정에서 반대 진영 주민들의 손목과 발목을 도끼로 자르는 만행을 조직적으로 저질러 라이베리아인들에게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심지어 그 이유도 황당했는데, 그렇게 손을 자른 이유는 '그 손으로 현 정부에 투표해서'였다고 한다. 게다가 농경이 산업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라이베리아에서 손목이 잘린다는 것은 말 그대로 인생이 끝장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이들은 8개월 된 아기까지 손을 잘랐다.

또한 소년병 징집도 일상이 되어버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겨우 7~12살, 심지어는 문자 그대로 4살밖에 안 된 아이들이 반군에 납치되어 군사훈련을 받고, 교전에 동원됐다.[3] 반군은 겁에 질린 소년병들에게 세뇌교육을 시켰고, 심지어 전투와 습격 직전에는 어린이들에게 마약을 먹였는데, 이렇게 정신이 혼미한 상태가 된 아이들은 자기가 살던 마을에 총을 쏘았고, 자기 손으로 부모와 형제를 죽여야 했기 때문에 이후 심각한 트라우마를 얻게 되었다. 당시 소년병의 증언에 의하면 "약물을 투여해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몰랐다. 죽인 병사의 살을 동료와 나눠 먹었다"라고 증언할 정도였다. 게다가 돌아갈 곳을 잃은 아이들은 어느새 반군의 일원이 되어 이들이 또다시 아이들을 납치해서 아이들을 소년병으로 만드는 헬게이트가 펼쳐졌다.

또한 미혼녀나 여아들 수천명도 납치되었는데, 10살도 안 된 여아들은 낮에는 허드렛일을 도왔고, 밤에는 문자 그대로 반군들의 욕정을 채우기 위한(!!) 성적 노리개가 되어 성추행이나 강간을 당하여 임신을 당해 혼혈 사생아를 낳아버리는 상상을 초월하는 인권침해를 겪었다.[4] 이렇게 반군에게 납치되어 피해를 입은 어린이들은 무려 11,000명에 달한다고 한다.

게다가 테일러의 부하들의 증언에 따르면 테일러는 의식을 명분으로 임산부를 손수 생매장하거나 'No Baby on Target'이라는 이름의 작전을 지시하며 '아무도 불쌍히 여기면 안된다'라며 부하들에게 민간인들의 팔다리를 자르고 그들이 본 모든 아기들을 살해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으며,[5] 심지어 테일러는 자신의 민병대에게 적들을 공포에 떨게 하기 위해 포로로 잡힌 적들과 UN 군인들의 인육을 먹으라는 지시를 직접 내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렇게 10년 가량 계속된 시에라리온 내전은 최소 5만~2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최소 21만 5천명의 여성들이 성폭행을 당했으며, 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신체 절단이나 고문 피해를 입었다. 또한 500만 명의 국민들 가운데 200만 명 이상이 난민이 되었으며 내전으로 삶은 처참하게 파괴되고, 주민들의 삶의 질은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나 찰스 테일러는 이렇게 서람들이 막 죽어나가는 와중에도 RUF가 노예를 동원해 채취한 다이아몬드를 제공받으며 13살 첩을 끼고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다고 한다. 그리고 테일러 본인이 직접 인육을 먹었다는 괴소문까지 돌았지만, 테일러 본인은 '이 소문을 듣고 토할 것 같았다'는 말을 남기며 본인의 식인설은 물론, 민병대에게 식인을 지시했다는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이 결과로 그는 시에라리온 내전에서 벌어지는 전쟁범죄와 다이아몬드 밀수로 UN에 수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뻔뻔하게도 그는 오히려 하얀 로브를 입고 신의 자비를 빌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도 그의 시절에는 살인자로 비난받았다."라는 희대의 궤변을 남겼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런 그의 극악무도한 행보에 반테일러 세력이 하나로 뭉치게 되어 '화해와 민주를 위한 라이베리아 연합(LURD)'과 '라이베리아 민주운동(MODEL)'이 결성되어 1999년 또다시 내전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를 제2차 라이베리아 내전이라고 부른다. 자세한 내용은 라이베리아 항목을 참고.

게다가 무슬림의 비중이 높은 시에라리온에 슬쩍 손을 댄 것이 하필이면 이슬람 국가인 리비아카다피의 심기를 거스르고 말았다. 리비아의 지원을 받은 기독교 국가의 독재자가 감히 이슬람 국가의 혼란을 부채질하는 꼴을 보고는 자신의 체면도 생각해야 하던[6] 카다피가 그대로 지원을 끊어버리고, 되려 시에라리온군을 지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2.4. 몰락, 그리고 재판[편집]


미국은 찰스 테일러가 시에라리온에서 획득한 대량의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알 카에다와 비밀거래를 하고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했으며, 찰스 테일러가 저지르는 전쟁범죄에 지금까지 우호적이었던 코트디부아르리비아는 물론 아프리카의 모든 나라들이 찰스 테일러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다.

이렇게 테일러의 행보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2003년에는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그를 까며 테일러를 체포해 재판을 받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2003년 8월 11일에 테일러는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정권을 모세스 블라 부통령에게 이양하고 임시 망명지 나이지리아로 떠나 갈것을 국민들 앞에 라디오 방송으로 발표했다. 하지만 찰스 테일러 대통령은 그의 마지막 연설 방송에서 미국의 압력 때문에 퇴임을 한다고 밝히면서 미국에 대한 억울하다는 심정을 이야기했고 "나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면서 대통령으로써 마지막 연설을 했다. 테일러 대통령이 퇴진한 후에 모세스 블라가 대통령직을 승계를 하기는 했지만 반군들은 수도 몬로비아를 공격하고 블라 대통령 정권을 거의 무용지물로 만들고 있었다.

마침내 기니의 지원을 받은 반군이 라이베리아 북부에서 테일러에 맞서 봉기를 했으며, 뒤이어 코트디부아르 계열의 반군이 남부에서 밀고 들어왔고, 결국 2003년 10월, 2천여명의 반대파가 진격해 테일러 정권을 6년만에 엎어버렸다. 결국 반군의 포위와 국제사회의 추적 속에 테일러는 나이지리아로 망명했다. 물론 실은 여기에 미국이 깊숙히 개입했다는 의혹이 꼬리를 물기도 했다.

정권이 엎어지고 몰락한 테일러는 나이지리아로 망명해 잠적했으나, 2006년 계속된 미국의 요구에 굴복한 나이지리아 정부가 그의 추방을 결정하자 찰스 테일러는 외교관 차량으로 위장한 차를 타고 다시 도주했지만 결국 나이지리아와 카메룬 사이 국경 인근에서 붙잡혔는데 당시 그의 가방에는 약 5만 달러의 현금다발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결국 찰스 테일러를 체포해 미국에 넘기면서 찰스 테일러는 국제재판소에 설 날을 기다리고 있다. 물론 정신 못차리고 그는 재판에 앞서서 "나는 라이베리아 정권 교체를 원하던 서방의 희생양이었으며, 실제로는 지역 갈등 해소를 위해 노력하던 중재자"였다고 주장했으며, '내가 없으면 라이베리아에 혼란이 찾아올 것'이라는 뻔뻔한 망언을 날렸지만 실상은 테일러가 있어서 라이베리아의 혼란이 더 가중되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2006년 이후 평화를 되찾고 최초의 여성 대통령인 엘런 존슨 설리프(Ellen Johnson Sirleaf,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기도 하다)가 선출된 이후로 그럭저럭 민주주의가 굴러가고 있지만, GDP는 여전히 세계 최하위에 워낙 장기간에 걸친 내전의 결과로 국가가 피폐해지고 사회적 손실이 막대한데다 부룬디처럼 무장해제를 거부한 채 버티는 일부 집단들이 다시 들고일어날 가능성도 있어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리고 국제재판소에 기소된 찰스 테일러는 유죄판결을 받게 되었다.

테일러의 재판을 맡은 러식 판사는 “피고는 인간 역사에 기록된 가장 극악무도한 범죄의 일부를 돕고 사주한 책임이 인정된다”며 “많은 무고한 시에라리온 시민들의 삶이 그의 행동의 직접적인 결과로 파괴됐다”고 고 말했고, 테일러는 시에라리온 내전에서 발생한 살인과 성폭행, 소년병 이용 등을 도운 11가지 반인도주의 혐의로 기소되었다.

체포된 그는 네덜란드 헤이그 감옥에 수감된 채 유엔 산하 시에라리온 특별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교도소 경비 등을 포함, 재판비용으로만 다달이 10만달러(약 1억 2000만원) 이상이 들어가는데, 이 돈은 대부분 미국이 내고 있다. 라이베리아내전으로 나라가 초토화된 데다가 국가재정이 거의 무너져 재판비용조차 감당하기 힘든 형편인데 이 인간의 재판비용에도 돈을 써야 한다,

결국 2012년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징역 50년을 선고 받았다. 나이를 고려하면 사실상 교도소에서 일생을 마칠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전직 국가 정상이 국제 재판소에서 유죄를 받은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범을 처벌하기 위해 열렸던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이후 최초라는 점에서 전세계에서 큰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여담으로 찰스 테일러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지자 시에라리온 수도 프리타운에서는 수천 명이 거리로 나와 국기를 흔들며 환호했다고 AFP가 전했다.

물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는지 ‘인도적 배려’를 요구하며 감옥을 옮겨달라는 소송을 냈다. 그는 영국 정부에 “르완다로 감옥을 옮겨달라”고 요구했는데, 르완다는 1994년 종족분쟁 르완다 내전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국제전범재판을 실시했고, 전범들을 수감하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 라이베리아·시에라리온과 상관없는 곳이지만 이런 시설이 있으니 자신을 그리로 옮겨달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면서 런던 법원에는 "아프리카 안에 있어야 내 가족이 찾아오기가 수월하다"고 주장했다.

2017년 12월 26일, 라이베리아 대통령 선거에서 찰스 테일러의 전 부인 주얼 하워드가 조지 웨아러닝메이트로 출마하여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주얼 하워드는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면, 내 전 부인 주얼 하워드 테일러에게 투표하라. 주얼이 당선되면 나도 감옥에서 나갈 수 있다”라는 찰스 테일러의 녹음된 목소리로 그의 근거지인 '봉 카운티'에서 상원의원으로 당선될 만큼 테일러의 대리자 역할을 하고 있는 인물이다. 조지 웨아가 주얼 하워드를 러닝 메이트로 삼아 찰스 테일러의 지지자를 흡수하여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찰스 테일러가 옥 중에서 라이베리아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3. 은닉 재산[편집]


라이베리아 정부와 미국, 유엔은 찰스 테일러가 집권 시절 해외로 빼돌린 재산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으나 아직도 성과는 없다. 찰스 테일러 비자금을 찾는 것은 1979년 이란 팔레비 왕조가 무너진 뒤 팔라비가 빼돌린 재산을 찾기 위한 사건 이후 최대의 ‘은닉자산 수색작전’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2000년에서 2003년 동안 라이베리아의 대통령 봉급은 공식적으로 월 2만 4000달러였으나 목재회사, 국영전화회사, 다이아몬드 광산 등을 장악해서 거액을 빼돌렸으며, 국민 세금 200만 달러를 버젓이 수도 몬로비아의 자기 은행 계좌에 빼돌렸을 정도기 때문에, 찰스 테일러가 외국에 숨겨놓은 돈은 얼마인지 짐작도 힘든 상태다. 일각에서는 찰스 테일러는 집권 기간 동안 1억 달러를 횡령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라이베리아 정부 수입의 절반에 육박하는 거액이었다.

일단 최소한 2400만 달러 이상이 미국 뉴욕 시티뱅크 지점을 거쳐 찰스 테일러 계좌에 입금된 사실은 기록을 통해 파악됐지만, 그 돈은 대부분 대만 정부가 라이베리아 어린이 에이즈 치료를 돕기 위해 보낸 원조금이었으며, 나머지 돈의 행방은 파악이 불가능한 상황, 라이베리아 정부는 자산추적 전문가인 미국 변호사 토머스 크릴과 로펌 3곳을 고용해서 찰스 테일러의 비자금을 찾아 나섰으나, 라이베리아의 찰스 테일러 친척들이 갖고 있던 800만달러를 압류하는 것이 전부였다. 찰스 테일러는 헤이그의 교도소에 앉아서 “지구상에서 나 찰스 테일러가 돈을 숨겨놓은 계좌가 있다는 사람이 있다면 데려와보라”며 큰소리를 치기도 했다.

이 자금을 찾기 힘든 이유는 찰스 테일러의 자산들이 미국, 스위스, 홍콩, 라이베리아 등 4개 대륙에 걸쳐서 복잡하게 숨겨져 있어서다. 미국 변호사 토머스 크릴은 “테일러의 돈이 무기거래상들에게 들어갔다가 여러 차례 세탁을 거쳐 어디론가 이동한 것 같다”고 밝혔고, 스티븐 랩 미 전범전담 대사는 “숨겨놓은 재산을 찾으려면 앞으로도 몇 년은 걸릴 것”이라고 말할 정도다. 2006년 선거로 대통령이 된 엘렌 존슨 설리프 대통령은 국제사회의 도움을 받아 군대 재건, 인프라 복구에 나서고 있으나, 모든 산업이 무너져 국가의 재정수입은 거의 없는 상황이다. 라이베리아의 1인당 연간 GDP는 2022년 기준으로도 735달러로 194개국 중 181위로 세계 최하위권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라이베리아 정부는 찰스 테일러의 숨겨진 재산을 찾는데 방법을 총동원하고 있다.


4. 기타[편집]


파일:external/dimg.donga.com/45829903.1.jpg
찰스 테일러의 사건 일지

세계적인 슈퍼모델 나오미 캠벨에게 다이아몬드를 선물한 것이 재판 과정을 통해 밝혀지면서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후 캠벨은 국제재판소에 증인으로 참석하여 그 더러운 돌멩이'라며 깊은 모욕감을 표출했다.

아들인 찰스 매카서 이매뉴얼(Charles McArthur Emmanuel)은 미국 시민권자였는데, 그 또한 아버지와 버금가는 막장 짓거리를 라이베리아에서 저질러서 전범 혐의로 미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고, 타국민에 대한 고문 및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아 2008년 10월에 97년 형이 선고되었다.

이 내전의 영향으로 시에라리온 내전 종결 19년 후인 2021년 기준으로도 시에라리온의 인간개발지수는 전세계 조사대상국 191개국 가운데 뒤에서 11위인 180위를 차지했고, 2022년 기준으로도 시에라리온의 1인당 GDP는 194개국 중 뒤에서 3위인 493달러에 불과하게 되었다.


5. 매체[편집]


  • 로드 오브 워에서 부하 장교를 총기 시험으로 쏴버린 잔혹한 라이베리아 대통령 앙드레 바티스트는 찰스 테일러를 모델로 만들어졌다.


[1] 2002년 결혼. 세번째 배우자. 첫 배우자는 1979년에 결혼해 1997년에 이혼, 두번째 배우자는 1997년 결혼해 2006년에 이혼.[2] 이런 말도 안되는 구호를 내건 이유는 악행을 너무 대놓고 해서 어차피 숨길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기에게 투표하지 않으면 내전을 더욱 일으켜 아예 사람답게 살 수 없는 나라를 만들어버리겠다는 의미로 국가를 볼모로 잡고 국민들에게 대놓고 협박을 한 것이다. 물론 공약은 당연히 지켜지지 않았다. 즉, 그는 대통령이 되었지만 라이베리아를 다시 내전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3] 실제로 1999년에 한 반군 단체는 전투원의 30%가 미성년자라고 인정했다.[4] 심지어 어떤 여아는 '아내가 불임이라 아이를 낳을 여자가 필요하다'는 반군에게 강간당하고 임신당해 출산했다는 끔찍한 일화의 피해자가 되었는데, 이렇게 태어난 아이도 그 반군의 아내가 빼앗아간 후 방임과 학대의 영향으로 죽게 되었다고 한다.[5] 이에 대해 증언한 테일러의 부하는 이 일에 대해 후회하냐고 하니까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으며, 그 전에 "나는 내 재산과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지시를 따랐을 뿐이다. 테일러의 지시를 거부하면 가족과 재산이 파괴되었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그 부하는 '테일러의 지시 없이는 어떤 '작전'도 진행되지 않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출처[6] 리비아는 철저한 세속국가였지만 정치적 이유로 당시 범이슬람주의를 강조하고 있었다. 물론 그 자신도 차드 내전을 부추기고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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