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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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永慶
1529년(중종 24년) ~ 1590년(선조 23년) (향년 60 ~ 61세)[1]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편집]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효원(孝元), 호는 수우당(守愚堂), 본관은 화순(和順)


2. 생애[편집]


조식의 문인이였으며 그는 동인 강경파로 서인과 마찰이 심했던 자인데 특히 서인 강경파인 정철을 “정철은 속 좁은 소인!”이라고 할 정도로 정철과는 사이가 매우 안좋았다. 1589년 정여립 모반 사건이 터지면서 최영경이 길삼봉이란 주장이 나와 이때 최영경이 잡혀들어오는데 선조는 그에게 “그대의 호가 삼봉인가?”라고 말했는데 그때 최영경이 “간신 정도전의 호가 삼봉인데 신에 어찌 간신의 호를 쓰겠습니까?”라고 답하였고 최영경은 정여립과 편지 한통도 주고 받지 않았다고 결백을 주장하는데 그때 편지 한통이 발견되는데 이때 최영경은 “신이 늙어서 기억을 잘 못했나이다.”라고했다. 이 말을 들은 선조는 최영경이 길삼봉이 아니라 판단해 최영경을 석방하려 했지만 대간들이 최영경을 국문하라고 강력히 주장해 선조는 최영경을 국문하라고 주장을 바꿨는데 결국 1590년 감옥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하고 만다.


3. 기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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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는나이로 6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