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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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의정

중종 ~ 광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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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의정
기자헌
奇自獻


파일:ssu007597.jpg

출생
1563년 1월 6일[1]
(음력 1562년, 명종 17년 12월 2일)
한성부 성저십리 청파
(現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2]
사망
1624년 3월 13일 (향년 61세)[3]
(음력 인조 2년 1월 24일)[4]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사사형
묘소
경기도 안성시 대덕면 대학6길 33
봉호
덕평부원군(德平府院君)[5]
본관
행주 기씨

사정(士靖)

만전(晩全)
부모
부친 - 기응세(奇應世)
모친 - 선산 임씨(善山林氏) 임백령(林百齡)의 딸
형제자매
남동생 - 기윤헌(奇允獻, ? ~ 1624)
기통헌(奇通獻)
부인
전주 이씨 이희령(李稀齡, 1563 ~ ?)[6]
자녀
슬하 4남 1녀
장남 - 기준격
차남 - 기순격(奇順格, ? ~ 1624)
3남 - 기신격(奇愼格)
4남 - 기민격(奇敏格)
장녀 - 이지선(李志宣)의 처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편집]


조선영의정. 인조반정 때 반정에 불응했다가 수감된 후 처형당했다.


2. 생애[편집]


1562년 한성부 성저십리 청파에서 태어났다. 이정귀도 청파 출신이므로, 이정귀와 동향 출신이었다. 중종(조선)대에 기묘사화로 인해 교살당한 기묘명현 기준(奇遵, 1492~1521)의 증손자이며 명종(조선)의 교시를 받아 심의겸 등과 함께 외척 이량 일파의 탄핵을 진두지휘했던 가구(可久) 기대항(奇大恒, 1519 ~ 1564)의 손자이다.

1582년 성균관에 입학하여 유생이 되었다. 1604년 사헌부 대사헌에 발탁되고 거듭 승진해 공조판서, 병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거쳐서 우의정좌의정으로 승진했으며 이 때 소북의 류영경 등이 영창대군을 앞세워 광해군의 즉위를 저지하려 하자 그는 광해군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선조가 광해군을 폐하고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으려 하자 이를 끝까지 반대하여 광해군을 왕위에 오르게 했다. 이후 광해군 조정에서 정인홍, 이이첨과 함께 북인에서 분파한 붕당인 대북의 영수가 되어 국정을 주도한다.

1617년 인목왕후의 처우를 놓고 벌어진 폐모론이 일자 반대하였으나 점차 권력을 잠식한 이이첨에게 하극상을 당해(이이첨은 찬성파였다) 문외출송되어 홍원에 유배되고 다시 길주로 옮겨진다.

1623년 인조반정김류, 이귀에게 가담 요청을 받았으나 거절하였고, 반정이 성공한 후 이원익의 부름을 받았으나 "옛 주인을 배신할 수 없다"며 사양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러자 인조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을 했으나 물증이 없어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1624년 이괄의 난으로 인해 이괄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처형을 당하였다. 이원익, 이귀 등의 상소로 인조 5년인 1627년에 복관되었다.

부인 이씨는 덕흥대원군의 장남이자 선조의 형인 하원군 이정의 딸이며(즉 선조의 조카사위), 아들로는 기준격,* 기준격은 허균과 친했으나 기자헌이 폐모론에 반대해 유배되자 허균의 역모 정황을 고변했다. 결국 허균은 처형당했는데 다음 해에 고변을 늦게 하였다는 죄목으로 자신도 강릉에 유배당하였다. 인조반정 후 아버지, 형과 함께 모함을 받아 처형된다.] 기순격, 기신격, 기민격이 있다. 또한 기대승의 6촌 재종손(친사촌 기대항의 친손자)이 된다.

폐모론 사건으로 인해 허균이 처형당한 뒤 아들 기준격과는 관계가 좋지 않았는데, 기준격이 스승 허균의 역모를 고변할 때 쓴 상소문이 "대비를 심하게 침범"하였다 보고 이후 만나려 하지 않았다 한다. #


3. 기타[편집]


  • 불교 신자였다. 친불교적이었던 김시습의 사상을 믿은 류몽인과 함께 유교와 불교를 동시에 수용했다. # 허균과도 불교를 통해 만나서 친해진 사이였고, 허균의 문하로 자신의 아들 기준격을 보냈지만, 폐모론과 관련해서 갈등이 생긴 이후 관계가 멀어졌다.[7]

  • 기자헌은 감옥에 있으면서 내통할 가능성이 없었으나 그의 사촌 기익헌(奇益獻)이 이괄의 난에 가담하게 되어서 처형에 영향을 미쳤다.[8][9] <어우야담>의 저자 류몽인과 공통점이 있는데 둘 다 비록 탐관오리라는 악명이 있었지만 강경노선으로 일관한 북인 중에서는 중립을 지키는 인사였으며 폐모론에 반대했다. 그러나 둘 다 반정 직후 광해군에게 의리를 지키기 위해 인조 정권에 출사하기를 거부했다가 정국의 혼란 속에 모함을 받아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10]

  • <광해군일기>에서는 기자헌이 이순신 지휘 하에서 군법을 어겨 죽게 된 남해현령 기효근(奇孝謹)[11]이라는 집안 친척을 원균에게 음식을 뇌물로 바쳐 살려냈고 심지어 부당하게 그의 공을 상주해 선무공신에 수록했다는 심각한 흑역사로 탄핵받았던 것이 기재되어 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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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율리우스력 1562년 12월 27일.[2] 링크의 자료에 의하면 기자헌과 이정귀한양도성 남쪽 청파 출신이다.#[3] 62년 / 22,630일[4] 세는나이 63세.[5] 인조반정 이후 익사공신, 형난공신 삭제로 인한 삭탈.[6] 덕흥대원군의 장남 하원군의 장녀로 선조의 조카다.[7] 허균은 이이첨의 행동대장격으로 강경한 찬성파였고 기자헌은 반대파였다.[8] 영의정까지 올랐던 사촌네 집안과는 달리 기익헌은 집안이 얼자 출신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출사할 수 없었으나 무과에 급제하고 왕족이었던 이문빈(李文賓)의 사위가 되어 그럭저럭 커리어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후 궁궐 재건과 조선(造船) 등에 공을 세워, 광해군의 특명으로 고원군수(현 함경남도 고원군)에까지 오른다. 아마 광해군의 총신이었던 점이 이괄에게 동조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 이수백(李守白)과 함께 이괄을 배신하여 이괄과 한명련(韓明璉)의 목을 바쳤고, 아무튼 반란의 주동자 중 하나였기에 결국 사형당할 위기에 놓였으나 인조와 이귀의 두둔으로 진도로 유배를 갔다가 7년 후 풀려난다. 정작 반란에 가담한 자신은 멀쩡히 살아남고 무고한 친척들만 죽게 된 아이러니한 경우인데, 사실 서인은 대북을 정말로 가루가 되도록 숙청했기 때문에 이게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구실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기익헌은 출신이나 관직이 높지 않았기 때문에 붕당에 참여할 수 있을 정도의 배경이 없어서 오히려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마탄 전투 막바지에 관군 8대장의 목을 베어 관군에 보낸 모략을 꾸민 장본인이었던 이수백은 유배를 갔다가 풀려난 지 몇 해 안 있어, 희생양으로 죽은 이중로(李重老), 박영신(朴榮臣)의 아들들인 이문웅(李文雄), 이문위(李文偉), 박지병(朴之屛), 박지원(朴之垣), 박지번(朴之藩)에게 대낮에 살해당한다.[9] 이때 이괄과 함께 죽은 한명련은 임진왜란 때의 명장이었으나 인조반정 이후 역적으로 몰리게 되어 가담한 것이었는데, 한명련의 죽음이라는 사건은 아들 한윤과 조카 한택(韓澤) 등의 친족들이 흑화하여 청나라에 붙고 정묘호란병자호란에 가담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10] 억울하다고는 할 수 없다. 이 작자는 매관매직에 부정축재를 밥먹듯이 하던 자였고 그로 인하여 당당하게 간신의 반열에 올랐기 때문이다. 물론 죽은 이유가 그것 때문이 아니라는 게 문제지만.[11] <조선왕조실록> DB에는 기효례라고도 되어 있다. 기자헌과는 고조부가 같은, 즉 증조부대에서부터 갈라진 먼 친척이다.[12] <난중일기>의 기록을 보면 기효근은 전쟁 초반에 원균과 함께 배를 자침시키고 빤쓰런을 하며 자신의 군함을 원균의 계집질 장소로 쓰게 해주는 등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애초에 원균 라인을 탄 수군 장수라는 점에서 얼마나 선을 넘은 인물인지 알 수 있다. 다만 이후 정유재란 때 병으로 현령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적군을 만나 어머니와 함께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최후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