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 브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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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 브라운의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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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997marlinschampslogo.jpg
MLB 월드 시리즈
우승반지

1997

파일:1992 MLB 올스타전 로고.png파일:1996 MLB 올스타전 로고.svg파일:1997 MLB 올스타전 로고.png
파일:1998 MLB 올스타전 로고.svg파일:2000 MLB 올스타전 로고.svg파일:2003 MLB 올스타전 로고.svg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

1992
1996
1997
1998
2000
2003

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1992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다승왕
스캇 에릭슨
(미네소타 트윈스)
빌 걸릭슨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케빈 브라운
(텍사스 레인저스)

잭 모리스
(토론토 블루제이스)

잭 맥도웰
(시카고 화이트삭스)

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1996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방어율왕
그렉 매덕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케빈 브라운
(플로리다 말린스)


페드로 마르티네스
(몬트리올 엑스포스)
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2000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방어율왕
랜디 존슨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케빈 브라운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랜디 존슨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파일:MLB 로고.svg 역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최고액 계약자

페드로 마르티네스
(1998년 7/92,000,000$)

케빈 브라운
(1999년 7/105,000,000$)


켄 그리피 주니어
(2000년 9/116,500,000$)




케빈 브라운
Kevin Brown

본명
제임스 케빈 브라운
James Kevin Brown
출생
1965년 3월 14일 (59세)
조지아 주 밀리지빌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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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신체
193cm / 97kg
포지션
선발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6년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4번, TEX)
소속팀
텍사스 레인저스 (1986~1994)
볼티모어 오리올스 (1995)
플로리다 말린스 (1996~1997)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1998)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99~2003)
뉴욕 양키스 (2004~2005)
기록
노히트 노런 (1997.06.10)

1. 개요
2. 선수 시절
3. 피칭 스타일
4. 은퇴 후
5. 연도별 성적



1. 개요[편집]


미국의 전 야구 선수. 포지션은 선발 투수였다.

MLB 최초의 1억 달러 계약을 이끌어낸 선수이다. 국내에는 박찬호의 전성기 시절 LA 다저스의 1선발로 유명하지만, 1997년~1998년 플로리다 말린스샌디에이고 파드리스를 월드시리즈로 이끌었고 말린스에서는 우승을 차지하는 등 우승 청부사로 이름을 날렸으며, 그 덕분에 메이저리그 최초로 1억 달러의 벽을 넘긴 거대 계약을 따내기도 했다. 하지만 말년에 먹튀짓을 좀 한 데다가 도핑 적발로 인해[1] 평가가 낮아졌다.


2. 선수 시절[편집]


조지아 주에서 태어나 조지아 공대를 나온 후, 1986년 드래프트 1라운드 4번으로 텍사스 레인저스에 지명됐으며, 드래프트된 해 9월 30일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의 홈경기에서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치러 5이닝 2실점으로 메이저리그 첫 승을 거뒀다.

메이저리그에 본격적으로 데뷔한 해는 3년 뒤인 1989년으로, 12승 9패 평균자책 3.35를 기록해 신인왕 투표에서 6위를 기록했다. 케빈 브라운의 텍사스 레인저스 시절은 국내에 잘 안 알려졌으나 최다 투구이닝(265.2이닝) 및 최다승(21승)을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뛰었던 1992년 기록했다. 94년 FA로 풀리기 전까지 6시즌 간 평균 13승 10패, 평균자책 3.80, 평균 투구이닝 208이닝을 기록했으며 이 때부터 피홈런이 극히 적어 평균 14피홈런을 기록했다.

그러나 FA로 풀리기 전 마지막해인 94년 성적이 평균자책 4.82, 170.0이닝 218피안타로 막장스러워서인지 레인저스는 케빈 브라운을 잡지 않았고, 그는 전년과 똑같은 연봉에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1년 계약을 맺는다. 그렇게 동부로 향한 1995년에 172.1이닝 평균자책 3.60으로 괜찮은 성적을 거두고 오프시즌 플로리다 말린스와 계약해 내셔널리그로 이적하는데...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포텐이 터지기 시작한다.

대망의 1996년, 브라운은 스테로이드 시대[2] 선발투수 1점대 ERA[3]라는 전설적인 기록을 수립한다.[4] 이 때 233.0이닝을 던져 ERA 1.89, 17승 11패를 기록했다. 피홈런은 단 8개. 그러나 24승 8패 ERA 2.94를 기록한 존 스몰츠에게 밀려 사이 영 상을 수상하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그라운드볼 피칭을 주로 하다보니 탈삼진 수가 사이영 위너 기준으로 심하게 적은 159개에 머물렀고 승수도 적은 편이었다는 것이 당시의 사이 영 상 투표 기자단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남겨준 것 같다.[5]

1997년에는 NLCS에서 1차전 매덕스, 6차전 글래빈을 상대로 승리를 따내며 당시 신생팀이었던 플로리다 말린스를 월드시리즈까지 진출시키고 월드시리즈 우승을 안긴다. 명성에 비해 월드시리즈에서의 피칭은 11.0이닝 10자책 무승 2패로 매우 좋지 않았지만, 애초에 그가 없었으면 월드시리즈까지 올라가지도 못 했을 것이었다.

플로리다 말린스의 우승 뒤 파이어세일로 1:3 트레이드돼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이적한다. 1998년 시즌 성적 역시 18승 7패 평균자책 2.38, 투구이닝 257이닝으로 훌륭했다.[6] NLDS 1차전에서 랜디 존슨과 최고의 투수전[7]을 벌여 승리, 뒤이어 NLCS 2차전에서는 톰 글래빈과 리턴매치를 벌여 11K 완봉승을 따내며 팀을 월드시리즈로 진출시킨다. 다만 이 때 월드시리즈 상대였던 뉴욕 양키스의 전력이 워낙 탄탄해서 월드시리즈에서는 4:0으로 스윕당하고 만다.[8]

1998년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었는데, 오프시즌 중 랜디 존슨을 노렸으나 피닉스 근처에 집을 지었다는 이유로 빅 유닛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게 뺏긴 LA 다저스는 대신 케빈 브라운에게 7년 1억 5백만 달러라는 계약을 안긴다. 메이저리그 최초로 1억 달러의 벽을 넘긴 거대 계약이라 당시 미국은 물론 한국까지 들썩거리게 만든 대사건이었다. 본격적으로 메이저리그의 연봉 액수가 뻥튀기되어가는 시발점이기도 했으며, 이로 인해 한동안 FA 투수에게 거액의 연봉을 선사하는 게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그 최대의 수혜자가 박찬호
당연히(?) 그의 에이전트는 보라스

다만 이 때 나이가 이미 34세였고 계약 기간이 끝나면 40세에 들어가다 보니 노장 투수에게 너무 큰 액수를 지출했다는 평가는 당시부터 있었다. 최훈이해할 수 없는 계약이라고 깠다.

그러나 우려와 다르게 계약 초반인 1999년~2000년 2년 연속 200이닝 이상을 던지며 기대대로 에이스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기대했던 포스트시즌 진출은 이뤄내지 못했지만, 이건 당시 다저스의 실패한 돈질 때문이라...

문제는 계약 3년차부터 먹튀 기질을 보이기 시작했다. 2001년 시즌 부상으로 시즌의 절반을 날려먹은 데 이어 2002년 63.2이닝 평균자책 4.81에 그치면서 우려가 현실이 되나 했지만 2003년 시즌 마지막으로 부활해 211.0이닝 14승 9패 평균자책 2.39라는 좋은 성적을 기록한다. 그러나 아직 계약기간 2년이 더 남아있었고, 거대 계약이 부담이 됐던 LA 다저스는 2003년 시즌 후 케빈 브라운을 트레이드 시장에 내놓는다. 마침 당시 우승을 위해 대책없이 선수들을 수집하고 있던 뉴욕 양키스에 케빈 브라운을 1:3 트레이드로 넘겼고, 이미 나이가 마흔줄이었던 데다 결정적으로 부상이 재발하면서 양키스에서 2년 동안 14승 13패만을 기록한 뒤 2005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 메이저리그를 떠난다. 보스턴의 리버스 스윕으로 유명한 2004 ALCS 마지막 7차전에서 선발등판했으나 1.1이닝 5자책으로 장렬히 산화하면서 보스턴의 리버스 스윕에 한몫하기도 했다. 게다가 말년엔 미첼 리포트에서 약물복용 사실까지 드러나는 등, 이뤄낸 업적에 비해 선수생활 막바지에는 꽤나 초라했다고 볼 수 있다. [9][10]


3. 피칭 스타일[편집]


교과서적인 하이브리드 싱커볼러다. 말년엔 하이브리드 칭호가 떨어져나갔지만, 90마일 중반대의 묵직하게 깔리는 하드싱커를 주무기로 했으며 이 때문에 홈런 허용이 매우 적었다. 1996년~1997년에 걸쳐 118이닝 무피홈런을 기록한 적도 있다. NL로 옮긴 뒤로는 9이닝당 탈삼진율이 8~9를 기록할 정도로 탈삼진 숫자도 매우 많아졌다. 단 브랜든 웹, 왕젠민, 데릭 로우 같은 일반적인 싱커볼러들과 브라운이 다른 점은 전자는100구를 던지면 98구를 싱커를 던진다고 할정도로 의존도가 높지만 브라운은 엄연히 98마일의 포심을 주로 던지던 선수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의 싱커는 다른 선수들과는 다르게 사실상 스플리터 각도로 떨어지는 공이라 땅볼보다 삼진을 유도해내는 구질이었다. 다른 싱커볼러들과는 다른 높은 탈삼진율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또한 부상 위험이 매우 크다고 알려진 싱커볼러이면서도 매우 많은 이닝을 꾸준히 던진 워크호스이기도 하다. 19시즌 중 200이닝 이상을 투구한 시즌이 9시즌이며 1991년부터 단축시즌인 1994~95시즌을 제외하고 10년 연속 200이닝을 기록하기도 했다. 210.2이닝의 1991년을 제외하면 모두 230+ 이닝이다. 총 투구이닝 역시 19시즌 3256.1이닝으로 충분히 많은 이닝을 던진 투수. 불운한 점은, 동시대에 250이닝-300탈삼진을 밥먹듯이 기록한 랜디 존슨이라는 괴물 때문에, 저 때는 아무도 저게 대단한 기록인지 느끼지 못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박찬호가 전성기를 달리며 메이저리그가 국민적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던 2001년 시즌부터 부상에 시달리며 2003년 시즌만 밥값을 해 버린 통에 국내엔 인저리프론으로 낙인찍혀 있다. 더불어 싱커는 위험한 볼이라는 고정관념도 굳어지고 말았고... 그러나 20대 후반~30대 초반에는 많은 이닝을 던져 준 투수였으며, 2001년 당시 36세였던 나이를 고려해 본다면 그의 부상이 싱커 때문이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성격은 굉장히 승부욕이 강한 파이터 타입이라고 한다. 말년을 보낸 뉴욕 양키스에서 강판된 뒤 제 성격을 못 이기고 덕아웃에서 주먹질을 하다가 자기 밥줄인 오른쪽 팔 부상을 당해 큰 논란을 일으킨 적도 있었다. 보통 투수는 덕아웃에서 난동을 부리더라도 밥줄을 보호하기 위해 투구하는 팔과 반대쪽 팔을 사용하는 법인데...


4. 은퇴 후[편집]


은퇴 후에는 고향인 조지아로 돌아가 테트널 스퀘어 아카데미에서 코치로 일했다. 2011년 HoF 첫해 투표에서도 5% 미만 지지율로 탈락했다. 성적만 보면 승수는 좀 적어도[11] WAR[12] 등 각종 기록을 보면, 적어도 광탈할 기록은 아니다. 문제는 우선 동시대에 대투수들이 너무 많았다. 커트 실링마이크 무시나가 밀려날 정도니까. 결정적으로 약물 복용 전적으로 인해 이미지가 크게 추락하며 명전 입성은 물 건너갔었다.

2018년 6월 14일, 우편물 도둑을 잡아 경찰에 인계했다는 기사가 올라오며 오랜만에 근황이 공개됐다. 자신을 포함한 이웃들의 우편물이 자꾸 사라지자 이상하게 여긴 브라운 본인이 마당에 잠복해 있다가 우편물 도둑이 나타나자 이들을 제압하고 출동한 경찰에 넘겼다고 한다.


5. 연도별 성적[편집]


파일:MLB 로고.svg 케빈 브라운의 역대 MLB 기록
연도

G
W
L
S
HLD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1986
TEX
1
1
0
0
0
5
3.60
6
0
0
0
4
1.200
128
0.3
0.2
1987
1군 기록 없음
1988
4
1
1
0
0
23⅓
4.24
33
2
8
1
12
1.757
97
0.3
-0.2
1989
28
12
9
0
0
191
3.35
167
10
70
4
104
1.241
119
3.1
3.6
1990
26
12
10
0
0
180
3.60
175
13
60
3
88
1.306
109
2.4
2.1
1991
33
9
12
0
0
210⅔
4.40
233
17
90
13
96
1.533
92
1.5
1.6
1992
35
21
11
0
0
265⅔
3.32
262
11
76
10
173
1.272
116
6.3
4.8
1993
34
15
12
0
0
233
3.59
228
14
74
15
142
1.296
116
4.4
4.0
1994
26
7
9
0
0
170
4.82
218
18
50
6
123
1.578
100
3.4
1.6
연도

G
W
L
S
HLD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1995
BAL
26
10
9
0
0
172⅓
3.60
155
10
48
9
117
1.178
133
4.5
4.3
연도

G
W
L
S
HLD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1996
FLA
32
17
11
0
0
233
1.89
187
8
33
16
159
0.944
215
6.7
7.9
1997
33
16
8
0
0
237⅓
2.69
214
10
66
14
205
1.180
150
6.5
7.0
연도

G
W
L
S
HLD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1998
SD
36
18
7
0
1
257
2.38
225
8
49
10
257
1.066
164
9.6
8.6
연도

G
W
L
S
HLD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1999
LAD
35
18
9
0
0
252⅓
3.00
210
19
59
7
221
1.066
143
7.3
6.2
2000
33
13
6
0
0
230
2.58
181
21
47
9
216
0.991
167
6.8
7.0
2001
20
10
4
0
0
115⅔
2.65
94
8
38
2
104
1.141
151
3.5
3.1
2002
17
3
4
0
0
63⅔
4.81
68
9
23
5
58
1.429
79
0.5
-0.4
2003
32
14
9
0
0
211
2.39
184
11
56
5
185
1.137
169
6.1
4.5
연도

G
W
L
S
HLD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2004
NYY
22
10
6
0
0
132
4.09
132
14
35
3
83
1.265
110
2.3
2.8
2005
13
4
7
0
0
73⅓
6.50
107
5
19
7
50
1.718
65
1.4
-0.4
MLB 통산
(19시즌)
486
211
144
0
1
3256⅔
3.28
3079
208
901
139
2397
1.222
127
76.5
68.2
[1] 하지만 약은 2000년대 초반, 즉 브라운의 커리어가 몰락해갈 쯤에 했다는 것이 정설. 물론 약물 복용 기록이 있는 이상 약을 복용한 시기를 명확하게 추정하기 힘드므로 그 이전의 기록들 역시 의심받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알려진 바에 의하면 브라운은 폴 로두카에 의해 의도치 않게 걸린 부분이라 억울할 수는 있다. 그렇다고 먹튀였다는건 달라지지 않지만...[2] 다만 이 땐 스테로이드 시대의 초창기였다.[3] 투고타저 시대로 접어들은 2000년대 후반 들어선 수많은 투수들이 1점대 ERA를 찍긴 했지만, 브라운은 극심한 타고투저였던 스테로이드 시대에 1점대 평자점을 찍었기에 차별화된다. 다만 브라운 본인 역시 약쟁이라 의미는 없지만...[4] 1997년 페드로 마르티네즈몬트리올 엑스포스에서 달성한 스테로이드 시대 선발 1점대 ERA 시즌은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만, 의외로 케빈 브라운이 1년 먼저 이 기록을 달성했다는 사실은 잘 안 알려져 있는 편이다.[5] 그의 war은 8.0으로 메이저리그 전체 2위였다. 스몰츠는 7.3, 1위는 펫 헨트겐의 8.5.[6] 257이닝을 던지면서 257삼진을 잡아냈는데, 싱커볼러중 최고의 탈삼진율을 기록했다.[7] 8이닝 16K 무실점 랜디 존슨은 8이닝 9K 2실점으로 패전투수가 되었다.[8] 이 98년부터 2000년까지 양키스는 WS를 3연패한 뒤 01년에야 랜디 존슨커트 실링의 다이아몬드백스에 가로막힌다.[9] 다만 약을 빤 이유가 당대의 선수들처럼 성적을 위해서가 아닌, 다저스 시절 부상회복에 좋다는 동료 폴 로두카의 꾐에 넘어가서이다. 게다가 약을 빨고도 오히려 부상은 심해졌고 성적도 떨어졌다. 그래도 2003년에 성적이 반짝 오르는 덕분에 약값은 했지만...[10] 정확히 이 약빨의 최대 수혜자는 다저스일 것이다. 잔여 2년의 거액 계약은 우승 조급증이 생기던 양키스로 넘어가고 반짝이어도 1년 잘 쓴 불펜투수 브리조반까지 데려왔다. 실제로 이 트레이드를 시행한 다저스의 단장 댄 에반스에 대해 평가가 갈려도 이 트레이드 하나만큼은 이 단장의 업적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양키스 팬들에게는 공공의 적일지도?[11] 물론 현재는 200승을 찍으면 임팩트를 봤을 때 명전 입성을 점칠 수 있지만 브라운이 뛰던 시기는 누적을 지금보다 훨씬 중시했었다.[12] 통산 WAR가 67.8로 WAR 69로 호프집에 들어간 존 스몰츠와 크게 차이가 안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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