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트르 바그라티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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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이바노비치 바그라티온
Пётр Иванович Багратио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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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65년 7월 10일
카르트리-카케티 왕국 키즐랴르
사망
1812년 9월 24일
러시아 제국 블라디미르현 시마 마을
사인
괴저
국적
파일:러시아 국기.svg러시아 제국
가족
가계참고
직업
군인
복무
파일:러시아 제국 국기.svg러시아 제국 육군
근무
제2서부군[1]
다뉴브군
투르크군단
제21보병사단
제6경보병연대
소피아 소총기병연대
키예프기마엽기병연대
캅카스 보병연대
그루지야 제14척탄병연대
아스트라한 제12척탄병연대
복무기간
1783년 9월 3일 ~ 1812년 8월 26일
지휘편제단위
연대사단군단
병과
보병
최종계급
보병대장(1809)
참전
7년 전쟁
제9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코카서스 전쟁
알디 전투
나폴레옹 전쟁
아다 강 전투
트레비아 강 전투
메르츠바흐 전투
홀라브룬 전투
아우스터리츠 전투
프리틀란트 전투
아일라우 전투
조국 전쟁
살타노브카 전투
보로디노 전투
러시아-스웨덴 전쟁
올란드 원정
서훈
성 이반 훈장
성 알렉산드르 넵스키 훈장
묘역
보로디노들판 기념비

1. 개요
2. 생애
3. 가계도
3.1. 사생활
4. 평가
5. 기타



1. 개요[편집]


나폴레옹 전쟁러시아 제국군을 이끌었던 장군이자, 조지아 왕국바그라티온 왕가왕자이다. 당시 조지아는 러시아에 합병 당해 바그라티온 왕가 출신의 왕자들은 러시아의 공작으로 대우받고 있었다. 러시아 원정 당시 러시아 제국 육군 제2군을 이끌었던 걸로 잘 알려져 있으며, 미하일 쿠투조프, 레온티 레온티예비치 베니히센, 바클라이 드 톨리 등과 함께 당대의 러시아군을 대표했던 이름난 장수이다. 다만, 앞서 언급된 다른 세 장군들과 성격이 조금 다른, 맹장, 용장에 가까운 성향을 지녔던 장군이다.


2. 생애[편집]



2.1. 나폴레옹 전쟁 이전[편집]


바그라티온은 1765년, 키즐랴르(지금의 다게스탄 공화국)에서 조지아의 왕자이자 러시아군의 대령인 이반 바그라티온[2]적장자로 태어났다. 그는 성장해 17세의 나이에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군에 종군, 아스트라한 보병 연대 휘하 캅카스 척후병 부대의 중사로 복무했으며, 이후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러시아-체르케스[3] 전쟁, 러시아-튀르크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이때의 활약상을 인정받아 그는 키예프 기마 추격병 연대의 부사령관으로 승진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폴란드의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가 일으킨 봉기(코시치우슈코 반란)를 진압하며 그는 운명적인 만남을 겪게 되는데... 바로 러시아의 명장이었던 알렉산드르 수보로프의 지휘를 받게 된 것이다. 바그라티온은 수보로프의 지휘 하에서 기병대를 이끌고 맹렬히 싸워 공을 세웠고, 이때 수보로프의 눈에 들어 공을 인정받아 소피아 중기병 연대의 연대장으로 승진하게 된다.

이후 프랑스 혁명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수보로프를 따라 1799년의 이탈리아, 스위스 원정에 종군, 수보로프가 이끄는 러시아군의 선봉장이 되어 이탈리아 전선의 프랑스 공화국군을 상대로 맹활약하며 브레시아를 점령하는 등, 러시아군의 승리에 큰 기여를 했다. 원정이 끝나고 그가 러시아에 귀국했을 때, 그는 어느덧 근위대대의 대대장이 되어있었다.


2.2. 나폴레옹 전쟁[편집]



2.2.1. 오스트리아 전쟁[편집]


나폴레옹이 황제에 등극하고 전 유럽의 어그로를 끌어 기어이 나폴레옹 전쟁이 발발, 러시아가 이 전쟁에 개입하게 되자 이미 러시아군의 대표적 지휘관이 되어있었던 바그라티온 역시 자연스럽게 이 전쟁에 종군하게 된다. 이 전쟁에서 그는 러시아군의 선봉대를 담당했으며, 미하일 쿠투조프의 지휘를 받았다. 오스트리아 전쟁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군을 연파하게 되자 쿠투조프는 군대를 퇴각시켜 오스트리아군과 합류하려 했는데, 나폴레옹은 쉬지 않고 맹진, 쿠투조프에게 군대를 퇴각시킬 여유를 주지 않으려 했다. 이에 쿠투조프는 바그라티온에게 7,300명의 병사를 맡겨 프랑스군의 저지를 지시한다.


영화 전쟁과 평화에서 묘사된 홀라브룬 전투. 영상 후반부에 우라돌격하는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바그라티온은 부대를 이끌어 홀라브룬 북쪽의 고지에 진을 치고 장 란조아킴 뮈라가 이끄는 약 2만의 프랑스군을 맞이한다. 병력의 차이가 너무나 압도적이었던 나머지 바그라티온은 거짓으로 뮈라에게 휴전할 걸 제안하는데, 이때 뮈라는 바그라티온이 러시아의 모든 부대를 지휘하고 있을 것이란 오판으로 란의 극구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시 휴전을 승낙하고 만다. 이 사이 쿠투조프가 이끄는 러시아군은 프랑스군의 주력으로부터 상당히 멀어질 수 있었으며, 바그라티온 역시 자신이 지휘하는 러시아군을 정비할 기회를 얻었다. 당연히 나폴레옹은 이 소식을 듣고 노발대발하며 "나의 실망감을 표현할 단어가 없다."란 말과 함께 뮈라에게 즉각 공격할 것을 명령, 이에 뮈라는 란과 함께 러시아군을 상대로 출진한다.

그러나 압도적인 병력차에도 불구하고 바그라티온이 이끄는 러시아군은 맹렬히 저항하며 최대한 프랑스군을 잡고 늘어졌고, 결국 쿠투조프의 본대가 성공적으로 오스트리아군 및 러시아 증원군과 합류할 때까지 시간을 벌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약 1,200명, 러시아군은 약 2,600명의 병력 손실을 내었으며, 바그라티온은 남아있는 5,000 가량의 병사들을 이끌고 성공적으로 후퇴해 본대와 합류한다.

하지만 이런 바그라티온의 활약도 무색하게, 이어서 벌어진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은 나폴레옹에게 참패했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의 우익을 담당해 13,000의 병사를 이끌었던 바그라티온 역시 뮈라와 란이 이끄는 프랑스군과 맞서 무참하게 박살나며 겨우 후퇴, 그나마 뮈라가 추격하자는 장 란의 제안을 다시 무시하고 그의 부대를 추격하지 않아서 전멸은 면할 수 있었다.


2.2.2. 독일·폴란드 원정[편집]


아우스터리츠 전투 이후로 나폴레옹에 의해 3차 대불동맹이 깨어짐에 따라 전쟁은 대략 일단락되는듯 보였으나, 곧이어 프로이센이 참전해 4차 대불동맹이 결성, 다시금 전 유럽이 나폴레옹 까기에 참여하게 된다. 바그라티온 역시 다시금 전쟁에 종군해 이번엔 레온티 레온티예비치 베니히센의 지휘를 받게 된다. 이어진 나폴레옹의 독일·폴란드 원정에서 프로이센군이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처절하게 깨지고, 카멘스키가 이끄는 러시아군 역시 프랑스군에게 패퇴하고 있을때 베니히센이 이끄는 러시아군은 동프로이센의 모룽겐에서 미셸 네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 휘하의 프랑스군을 격파(모룽겐 전투)했다. 그러나 이때 러시아군이 너무 깊숙하게 진군해버린 나머지 좌익의 방비가 허술해졌는데, 나폴레옹은 이 기회를 안 놓치고 베르나도트에게 러시아군의 좌익을 공격해 퇴로를 막아버리란 명령서를 보낸다.

그러나 운 좋게도 바그라티온 휘하의 카자크 기병대가 이 명령서를 가져가던 전령을 생포, 명령서는 고스란히 바그라티온에게 전달됐고 바그라티온이 이를 베니히센에게 보냄에 따라 나폴레옹의 계획이 탄로나게 된다. 베니히센은 이 사실을 알자마자 황급히 부대를 후퇴시켜 좌익을 재정비했고, 절호의 기회를 놓친 나폴레옹은 아쉬운 대로 추격을 계속했다. 마침내 두 군대는 1807년 2월 7일, 아일라우에서 서로를 마주하게 된다.

바그라티온은 니콜라 장드듀 술트가 이끄는 프랑스군을 상대로 아일라우의 고원에서 분전했으나, 다음날 이어진 저 유명한 뮈라의 기병돌격으로 러시아군의 중앙이 뜷려버리게 되면서 전세가 기울어지게 되자 베니히센이 후퇴할 때 함께 후퇴하게 된다. 다만 그의 부대를 포함한 러시아군 전체가 프랑스군과 워낙 백중세로 싸워준 덕분에 나폴레옹 역시 러시아군을 추격할 수 없었고, 이에 러시아군과 프랑스군은 같은 해 6월 24일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다시금 충돌, 여기서 러시아군이 완패를 당하고 틸지트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4차 대불동맹은 막을 내리게 된다. 비록 패전만 거듭했으나 바그라티온은 이때의 전공 덕에 러시아군을 이끌 새로운 장군으로 주목받았으며, 알렉산드르 1세의 신임을 얻고 북스게브덴(Buxhoevden, 1750 ~ 1811)휘하에서 다시금 핀란드 전쟁에 종군하게 된다.


2.2.3. 핀란드 전쟁[편집]


스웨덴과 러시아는 본래 관계가 좋지 않았고, 중세 이래로 여러 차례 충돌해 왔지만 틸지트 조약과 대륙 봉쇄령 선포 이후 스웨덴이 적대하던 나폴레옹의 프랑스가 러시아와 손을 잡게 된 이후 안 그래도 나쁘던 사이가 완전히 틀어져버렸다. 이후 영국과 러시아간의 전쟁이 발발[4]했을 때 스웨덴이 영국을 지지하고 나서며 핀란드에 병사를 집결시키자 러시아 역시 스웨덴과의 충돌에 대비해 스파이를 대규모로 파견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기 시작한다. 한편 프랑스 역시 반나폴레옹의 기치를 고수하던 스웨덴의 버릇을 이 기회에 고치려 했으며, 러시아를 지원해주게 된다.

결국 핀란드에 스웨덴군이 집결하기 전에 선빵을 날려야겠다고 판단한 러시아는 전쟁을 결의, 1808년 2월 21일 북스게브덴을 사령관으로 하는 24,000의 러시아군이 야음을 틈타 국경을 넘게 되면서 핀란드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당시 바그라티온은 북스게브덴 휘하에서 21사단을 이끌고 아직 집결하지 못한 스웨덴군의 집결을 방해하는 데 공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이때 총사령관 북스게브덴의 판단 미스로 고립되어있던 스웨덴군이 성공적으로 후퇴해버리면서 스웨덴군을 각개격파할 기회는 날아가버리고 만다.

핀란드에선 밀려나왔다지만, 스웨덴은 아직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스웨덴의 국왕 구스타프 4세는 직접 최전방에 나와 병사들을 독려하고, 러시아군이 점령한 투르쿠에 대한 상륙작전을 명했지만 약 5,000명으로 이루어졌던 선발대가 바그라티온의 러시아군에게 패퇴하게 되자 올란드 섬을 요새화해 방어를 굳히는 방향으로 전략을 변경했으며, 이는 나름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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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란드(Åland) 섬의 위치. 핀란드와 스웨덴을 잇는 요충지였다.
전쟁이 시작된지 1년만에 핀란드 전역을 접수하는데 성공한 러시아는 의기양양해져 스웨덴 본토까지 쳐들어갈 계획을 세우게 된다. 핀란드의 러시아군은 각각 세 개로 쪼개져 톨리, 슈발로프, 그리고 바그라티온의 지휘를 받았으며, 바그라티온이 통솔한 병력은 약 20,000에 달했다고 한다.

이때 바그라티온은 올란드 섬을 공략하기 위해 아주 대담무쌍한 전술을 내놓는데, 바로 겨울이 되어 꽁꽁 얼었을 보트니아 만의 바다를 행군해 건넌다는 것. 이는 당연히 무모한 짓으로 여겨졌지만, 놀랍게도 바그라티온은 꽁꽁 언 겨울의 북방 바다를 가로질러 성공적으로 올란드 섬에 대한 공성전을 수행해내고 만다. 당시 올란드 섬의 스웨덴군을 지휘하던 되벨른 장군은 압도적인 숫적 열세로 인해 바그라티온에게 휴전 협상을 청했으나, 바그라티온은 이를 계략이라 판단하고 협상을 거절, 결국 되벨른의 부대는 올란드를 버리고 후퇴해버렸고, 올란드 섬이 러시아군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면서 전세는 완전히 기울게 된다.

이렇듯 치열하게 진행된 핀란드 전쟁은 조금 허무하게도 스웨덴의 왕이었던 구스타프 4세가 쿠데타로 폐위를 당하면서 막을 내리게 된다. 이때 구스타프 4세를 대신해 왕위에 오른 칼 13세는, 훗날 자신의 후계자로 칼 14세 요한을 지명했다. 바그라티온은 이 전쟁에서 세운 공을 인정받아 대장으로 승진하게 된다.


2.2.4. 러시아 원정과 죽음[편집]


러시아는 대륙 봉쇄령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틸지트 조약을 맺을 때야 나폴레옹이 워낙 무지막지했으니 찍소리도 못했고, 핀란드 전쟁이 진행 중일 당시엔 프랑스가 러시아를 지원해 주었던 만큼 참고 있었지만, 핀란드 전쟁이 끝난 뒤 1년 가량이 지나자마자 러시아는 다시금 대륙 봉쇄령에 대한 불만을 품게 된다. 마침 터진 이베리아 반도 전쟁으로 위장이 쓰라린[5] 나폴레옹의 발목이 붙잡힌 데다, 핀란드 전쟁을 통해 자신감을 얻었던 알렉산드르 1세는 1810년 대륙 봉쇄령을 일방적으로 파기, 영국과의 교역을 재개한다. 당연하게도 이를 고깝게 여긴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기 위해 1812년, 70만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원정대(일명 대육군)를 조직해 러시아 원정을 단행한다.

당시 쿠투조프의 휘하에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종군하고 있었던 바그라티온은 나폴레옹을 상대하기 위해 급히 귀환되어 러시아 제2군의 지휘권을 부여받고 전선으로 투입된다. 그러나 1812년 7월 23일, 루이 니콜라 다부가 이끄는 프랑스군을 상대로 모길레프 전투에서 참패한 뒤 스몰렌스크에서 제1군 휘하로 재편성되어 톨리의 지휘를 받게 된다. 그러나 바그라티온은 신중하게 청야 전술[6]을 펼치는 톨리와 사사건건 대립하며 프랑스군과의 결전을 외쳤고, 차르에게 "저런 겁쟁이의 지휘를 받느니 군권을 내놓고, 일선 연대장으로 복무하겠다!' 라는 최후통첩 까지 날린다. 스몰렌스크가 함락되자 알렉산드르 1세 마저 톨리를 비난하며 총사령관에서 톨리가 경질, 그 후임으로 쿠투조프가 러시아군을 지휘했으며 바그라티온 역시 그의 지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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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로디노 전투에서 피격당한 바그라티온

그러나 쿠투조프 역시 뾰족한 수가 없었으며, 막상 사령관이 되고 보니 러시아군은 청야 전술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바그라티온을 대표로 하는 결전파들의 극렬한 반발 속에 + 자기 스스로 알렉산드르 1세 앞에서 당당히 말해버렸던 바[7]가 있어서 1812년 9월 7일, 보로디노에 진을 치고 나폴레옹과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이기로 한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 맞서, 보로디노에서 바그라티온은 러시아군의 좌익을 지휘했다. 보로디노 전투는 양 군을 합쳐 약 30만에 달하는 병력이 맞붙어 치열하게 진행됐는데, 바그라티온의 러시아군 좌익 역시 맹렬히 싸우며 프랑스군과 호각을 보였으나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가 이끄는 폴란드 기병대에게 후방을 급습당하며 전세가 역전당하고 말았고, 열세 속에서 위치를 고수하던 바그라티온은 유탄에 맞아 부상당하면서 쓰러진다.

결국 보로디노 전투는 러시아군의 패배로 끝났으며, 부상을 당한 바그라티온은 후방으로 이송되어 급히 치료를 받았으나 상처가 괴저로 악화돼 호전에 실패하는 바람에 결국 1812년 9월 12일[8], 4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만다.


3. 가계도[편집]


고조할아버지 : 카이틀리 왕국 레반 = 고조할머니 : 티나틴 아발리시빌리# 공주
증조할아버지 : 카이틀리 왕국 제시 왕 = 증조할머니 : 이름불명(첩)
할아버지 : 알렉산드로 이세예비치 바그라티온 = 할머니 : 이름불명(케르케스 귀족)
아버지 : 이반 바그라티온 (1730~1795) = 어머니 : 이름불명(조지아 귀족)
장인어른 : 파벨 스카브론스키(Павел Мартынович Скавронский, 1757~1793) = 장모 : 옐리자베타 엥겔하르트(Екатерина Васильевна Энгельгардт)
처형 : 마리아 스카브론스키(Мария Павловна Скавронский, 1782~1857)
본인 : 표트르 바그라티온 (1765~1812) 러시아 제국 육군 보병 대장 = 예카테리나 스카브론스키(Екатерина Павловна Скавронская, 1783~1857)
남동생 : 알렉산드로 바그라티온 왕(1771~1820)
남동생 : 이반 바그라티온 (?~1797) 러시아 제국군 중위
남동생 : 로만 바그라티온 (1778~1834) 러시아 제국 육군 중장 = 제수 : 안나 이바노바(Анны Семеновны Ивановой, 생몰년불명)
  • 조카 : 표트르 바그라티온 (1818~1876) = 안나 마르티노바(Анна Алексеевна Мартынова (1823~1908)
    • 조카손녀 : 예브게나 바그라티온(1846~1903) 황실의 하녀
    • 조카손녀 : 옐리자베타 바그라티온(1846~1868) 에리히-게오르그 골드버그(Эриком-Георгом Гольдбергом ?~1876)
  • 조카 : 이반 바그라티온 (1876~1860) 러시아 제국군 대령
  • 조카 : 알렉산드라 바그라티온 (1829) 요절
  • 조카 : 안나 바그라티온 공주(생몰년불명)
  • 조카 : 옐리자베타 바그라티온 (1820~1867) = 조카사위 : 알렉산드르 벨렌도르브 남작(баронесса Александр Белендорф, 생몰년불명)
작은아버지 : 솔로몬 바그라티온 (생몰년불명)
작은아버지 : 키릴 바그라티온 (1750~1828) 러시아 제국 육군 소장 = 전처 : 바르바라 코반스카야(Варвара Алексеевна Хованская, 1769~1788)
= 후처 : 알렉산드라 골리코바(Александра Ивановна Голикова, 1778~1853)
  • 사촌 : B알렉산드로 바그라티온(Александр Багратион, 1785~1837)
    • 손자 : 표트르 바그라티온(Петро Багратион, 생몰년불명)
      • 증손자 : 알렉산드로(Александра Петровича, 1862~1920) 러시아 제국 육군 소장출신, 소비에트 연방에 의해 처형됨
      • 증손자 : 드미트리 바그라티온(Дмитрий Петрович Багратион, 1863~1919) 러시아 제국 육군 중장출신, 2월혁명이후 1918년 붉은군대로 입대 = 부인 : 베라 자카리나(Вера Закарина, 1883~1947) 슬하 1녀
  • 사촌 : B알렉세이 바그라티온(Алексей Багратион, 1787~1824)
  • 사촌 : A나탈리아 바그라티온(Наталья Багратион, 1803~1873) = 남편 : 파벨 알베딘스키(Павла Петровича Альбединского, 1793~?) 러시아 제국군 중장
    • 아들 : 표트르 알베딘스키(Пётр Павлович Альбединский, 1826~1883)
  • 사촌 : A안나 바그라티온(Анна Багратион, 1804~1875) 황실의 하녀 = 남편: 니콜라이 고데인(Николай Петрович Годейн, 1790~1856) 러시아 제국 육군 소장
    • 딸 : 알렉산드라 고데인(Александра ,1834~1873)
    • 딸 : 옐리자베타 고데인(Елизавета ,1835~1904)
  • 사촌 : A다리아 바그라티온(Дарья Багратион, 1809~1831)
  • 사촌 : A표트르 바그라티온(Пётр Багратион, 1811) 요절
작은아버지 : 타마스 바그라티온(1743~1759)
작은아버지 : 포르피리 바그라티온(생몰년불명) 키즐랴즈의 동방정교 수도원 대주교

알수없는 먼 친척
  • 알렉산더 왕자
    • 조지 왕자
      • 드미트리 바그라티온-이메레테스키(Дмитрий Георгиевич Багратион-Имеретинский, 1800~1845) 러시아 제국 육군 소장

※ B는 전처간의 자식, A는 후처간의 자식


3.1. 사생활[편집]


바그라티온이 예카테리나 스카브론스카야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파벨 1세에 귀에 들어갔으며 변덕이 심한 차르 파벨 1세는 바그라티온과 예카테리나 스카브론스카야과의 결혼을 주선하였으며 결혼식을 1800년 9월 2일 가치나 궁전 교회에서 거행되었다.

1805년 예카테리나는 유럽으로 떠났으며 남편과도 살지 않았으며, 바그라티온은 불러서 돌아오라고 했지만 치료를 핑계삼아 해외에 머물렀다. 해외에서 큰성공을 거두었고 여러 국가에게서 많은 명성을 얻었다. 오스트리아 제국 외교관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간의 딸인 마리아 클레멘티나 바그라티온(Мария Клементина Багратион) 낳았다. 표트르 바그라티온이 사망하고, 예카테리나는 영국인 존 호바트 캐러독 남작과 결혼하였지만 결혼생활을 짧았고 바그라티온이라는 성을 반환했으며, 그녀는 러시아 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며, 바그라티온은 죽기전에 화가 볼코프에게 자신과 아내의 초상화를 의뢰하였다. 이후 예카테리나는 베니스에서 사망하고 뭍혔다. 유독 처가 장모님과 처형은 2번씩 결혼한 전적을 가지고 있다.

차르 알렉산드르 1세 여동생인 예카테리나 파블로브나가 바그라티온을 사랑했다는 소문이 있었고 황실은 좋지않았으며, 심지어 바그라티온을 제거할 생각도 있었다고 한다.

바그라티온은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식이 없었다.


4. 평가[편집]


러시아에는 좋은 장수가 없지만 딱 한 명, 바그라티온이 있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일찍부터 크고 작은 군공을 세워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고, 이에 알렉산드르 수보로프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신임을 얻어 빠르게 승진할 수 있었다. 더 적은 병력으로도 압도적 규모의 프랑스군을 성공적으로 저지한 홀라브룬 전투는 그의 가장 대표적인 전공이며, 얼어붙은 보트니아 만을 건너 스웨덴군의 요충지를 공략한 올란드 전투는 그의 대담함을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또 홀라브룬에서 뮈라를 상대로 기만책을 썼던 전적을 보면 머리를 쓰는 쪽에도 일가견은 있었다.

하지만 그의 대담함과 과단성은 루이니콜라 다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비롯한 당대의 '강적'들, 즉 그의 과감한 공격에 수월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역량이 뛰어난 장군들을 대적했을 때 패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또한 미하일 쿠투조프, 레온티 레온티예비치 베니히센 등의 신중하고 책략이 뛰어났던 장수들의 휘하에서 싸울 때면 자신이 맡은 임무를 항상 훌륭하게 수행해 내었으나, 자신이 직접 한 군단의 총사령관으로 종군했던 러시아 원정에선 프랑스군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단 점에서 최전선에서 병사를 통솔하며 적군과 직접 맞서 싸우는 전술적 역량은 뛰어났으나, 이에 반해 전략적 역량은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바그라티온은 뛰어난 군단장감으로 그 역량을 타고났지만, 전선을 책임질 만한 사령관은 아니었다.


5. 기타[편집]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소련군의 독일군을 향한 대공세였던 바그라티온 작전의 명칭이 바로 이 인물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알렉산데르와 로만(레바즈)이란 남동생이 둘 있었으며, 그 중 막내인 로만 바그라티온 또한 유명한 군인이자 장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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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12년 3월 이전 포돌스카야군 이라고 불렸다. [2] 조지아어로는 이바네 바그라티오니(ივანე ბაგრატიონი).[3] 2014 소치 동계올림픽으로 유명해진 도시인 소치주도로 하는 지역이다.[4] 영국-러시아 전쟁(Anglo-Russian War). 양국간의 전면전이 벌어졌던 건 아니고, 발트해에서 산발적인 해상 충돌이 지속됐을 뿐이었다.[5] 나폴레옹은 위장병을 앓고 있었는데, 때맞춰 터진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 대해 '저게 내 위장을 더 쓰리게 한다'라 말했다.[6] 의도된 게 아니란 설도 있다. 자세한 건 러시아 원정 문서 참조.[7] "한번도 안 싸우고 모스크바를 나폴레옹에게 내주지는 않겠다."라 말했다.[8] 24일이란 기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