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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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순현 전경
시가지 동부의 (구도심 서부의) 시후 (富顺西湖, 부순서호)[1]
주요 볼거리인 푸순문묘 (富顺文庙)
1. 개요[편집]
富顺县
간체자 富順縣 (부순현)
영어 Fushun County
쓰촨성 쯔궁시 동부의 현. 인구는 약 80만명이다. 전통적으로 쯔궁 시할구의 대공정, 자류정과 함께 일대의 3대 염장 중 하나로써 번영하였다. 당나라 및 남송 대에는 서쪽의 영현 (룽현)에 밀렸으나 북송 대에 부순감 (富顺监), 원나라 대에 부순주 (富顺州)가 설치되었고 명나라 말에는 부순왕 (富顺王)이 분봉되며 사천 지역 최대의 도시로 성장하였다. 다만 청나라 대에 부순현은 경제적으로 급성장한 자류정에 점차 밀려났고, 명목상으로나마 상급 행정기관으로 유지되다가 1939년 쯔궁시 설립과 함께 그 관할 하의 현으로 전락하였다. 시가지는 쯔궁에서 흘러온 푸시강과 네이장에서 흘러온 퉈강의 합류 지점에 형성되어 있다. 오랜 역사 덕에 시내에는 문묘와 서호, 회란탑 등 적지 않은 볼거리가 있다.
2. 역사[편집]
자세한 내용은 쯔궁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청나라 동치제 연간에 세워진 시가지 남쪽의 회란탑 (回澜塔)
본래 쯔궁 일대의 소금 산지는 시할구인 자류정-공정 일대가 아닌 부순으로, 후한 대에 요족의 추장 매택이 발견하였다. 이후 제갈량의 북벌에 있어 주요 재원 중 하나가 될 정도로 발전하였고, 부세염정 (富世鹽井)이라 명명되었다. 공정이 개발된 것은 4세기 부터로, 3세기 가량 늦다. 노주 (瀘州) 강양현에 속해있던 일대는 북주 시기인 567년 부세현 (富世縣)이 세워지며 쯔궁 지역 최초의 자체 행정 구역으로 발전하였고, 현 시할구인 공정진 (公井镇)을 관할하였다. 그러나 당나라 대인 618년 공정진을 현으로 승격시키고 욱천현 (룽현)과 함께 영주 (荣州)로 편성하며 그대로 노주에 남은 부세현과 분리되었다. 부세현은 649년 당태종 이세민와의 피휘를 위해 부의현 (富義縣)으로 개칭되었다 다만 부세현이란 지명은 현 시할구인 푸쉬진 (富世镇)으로 남아있다. 안사의 난 이후 사천의 절도사가 부의현의 수비를 맡았고, 후촉 시기에는 상서우복야가 치안과 조운을 맡았다.
2.1. 송·명대의 번영[편집]
북송 들어 부의현은 주와 동급인 부의감 (富義监)으로 승격었고, 노주와 함께 재주로 (梓州路)에 속하였다. 976년 부의감은 송태종 조광의의 피휘를 위해 부순감 (富顺监)으로 개칭되었고, 현 푸순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1036년 송 조정은 태상박사 주연준을 부순 지감 (知监)으로 봉하여 그곳에 문묘와 서원을 건립하게 하였다. 또한 일시적으로 영주가 폐지되었을 때에 옛 화의현 일대 (현 쯔궁 다안구)를 병합하였다. 1064년에는 부순감 하에 부순현 (富顺縣)을 설치하였다. 부순의 지감은 소금을 관장한다 하여 염감 (鹽监)으로도 불렀다. 송대의 기술 발전과 함께 염업은 더욱 활발해졌다. 남송 대에 부순감은 감부 (监府)를 인근 호두산 (虎头山)으로 옮기고 성을 쌓아 15년 이상 버텼으나 1275년 지감 왕종의 (王宗義)가 결국 항복하였다.
그후 부순감은 폐지되었고, 부순현에는 부순안무사 (富顺安撫司)가 설치되었다가 1283년 부순주 (富顺州)로 승격되었다. 다만 1371년 명나라의 사천 정복 후 부순주는 폐지되어 다시 현으로 격하되었고, 현 이빈시인 서주부 (叙州府)에 예속되었다. 이웃한 영주 역시 현으로 격하되어 가정주에 속하였다. 15세기 호광 지역 이주민들이 유입된 결과 부순현은 파촉 분지의 현들 중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지니게 되었다. 16세기 들어 동부 지역이 융창현 (현 룽창시)으로 분리되고 현지 부의염정이 담수의 유입으로 버려져 위기를 맞았으나 자류정, 공정, 신라염정 등의 소금 산지들이 영현에서 부순현을 이관되며 더욱 번영하게 되었다. 1616년에는 명나라의 촉공왕 주봉전의 3남 주지주 (朱至澍)가 부순왕 (富顺王)으로 책봉되었다.
비록 행정 구역상 현에 불과하여 주지주가 직접 거주하지는 않았지만, 명대에 번왕이 현에 분봉되는 것은 예외적인 일이었다. 이렇듯 명나라 말엽 부순은 사천 지방에서 가장 부유하며 가장 인구가 많은 현이었다. 동시에 문화와 학문적으로도 발달하여 경태십재자 (景泰十才子) 중 하나인 안탁 (晏鐸), 가경팔재자 (嘉靖八才子) 중 하나인 웅과 (熊過) 등을 배출하였다. 하지만 명청교체기의 혼란 속에 일대는 초토화되었고, 17세기 후반 청나라 조정은 면세 조치와 호광 이주민들을 통해 부흥에 나섰으나 18세기 초까지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한편 자류정, 공정 일대는 옹정제가 현에 준하는 승서 (丞署)로 승격시킨 후 크게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자류정, 공정을 합친 자공이란 지명이 점차 부순과 동급으로 쓰이게 되었다.
2.2. 근현대[편집]
건륭제 연간 부순현은 과거의 명성을 회복하여 재자지향 (才子之鄕) 혹은 부순재자내장관 (富顺才子内江官) 등의 칭호를 얻었으나, 이는 부순 자체보다는 자공염정 (혹은 부영염장)의 상업적 번영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19세기 들어 부순은 자류정의 명성에 완전히 밀려났고, 1911년 9월 신해혁명 시에도 청나라 군은 부순을 포기하고 자류정에서 두달간 버텼다. 얼마후 자공 지역 상인들이 자체 현을 설립하려 하자 부순현은 영현과 함께 이를 저지하였으나. 결국 1939년 쯔궁시의 설립을 막지 못하였다. 1949년 12월 5일, 인민해방군이 자오화를 거쳐 푸순에 입성하였고 13일 후 푸순현인민정부가 수립되었다. 20세기 중반 과거와 마찬가지로 이빈시에 속하던 푸순현은 1983년 쯔궁시로 이관되어 현재에 이른다.
3. 갤러리[편집]
샤오시후 (小西湖)
푸순 문묘 (富顺文庙)
자오화진 (赵化镇)의 옛 거리
[푸순현 기타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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