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외국어대학교/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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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 연혁
2. 역사
2.1. 설립 이전 (1952~1954)
2.2. 1954년 한국외국어대학 (Forigen Language College of Korea) 개교
2.4. 1980년 용인분교 개교
2.5. 1980년 종합대학 한국외국어대학교로 개편
2.6. 1998년 재단 개혁 및 제2건학 선포
2.7. 2010년 용인캠퍼스를 글로벌캠퍼스로 명칭 변경
2.8. 2014년 서울캠퍼스-글로벌캠퍼스 통합
3. 학부 변천사
3.1. 1980년 이전
3.2. 1980년대
3.3. 1990년대
3.4. 2000년대
3.5. 2010년대
3.6. 2020년대

참조
이 문서의 대부분은 '한국외국어대학교 60년사(1954~2014)'를 기반으로 한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지편집위원회의 기사와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관에서 발간한 'HUFS'tory: 외대, 세계를 품다'를 참고하여 작성하였다.

1. 주요 연혁[편집]


파일:한국외국어대학교 캐릭터_금색.svg 한국외국어대학교의 역사
년도
연혁
1952
학교법인 한국육영회 설립 인가
1953
한국육영회 이사회에서 한국외국어대학 설립 결의
1954
한국외국어대학 설립 인가
한국외국어대학 (Foreign Language College of Korea) 개교
1957
이문동 캠퍼스로 이전
1961
학교법인 명칭을 동원육영회로 변경
1962
대학 영문 명칭을 Hankuk University of Foreign Studies로 변경
1980
용인분교 개교
종합대학 한국외국어대학교로 개편
1998
재단 개혁 및 제2건학 선포
2010
용인캠퍼스를 글로벌캠퍼스로 명칭 변경
2014
한국외국어대학교 서울캠퍼스-글로벌캠퍼스 통합

2. 역사[편집]



2.1. 설립 이전 (1952~1954)[편집]


파일:학교법인 한국육영회 설립 허가서.jpg
학교법인 한국육영회 설립 허가서

전쟁이 한창 중이던 1952년 9월 10일, 기업가 김흥배는 임시수도였던 부산에 있는 자신의 회사인 한국화재해상보험주식회사 임시본부에서 학교를 세우기 위한 학교법인을 설립하고자 했다. 그는 학교법인 한국육영회[1]를 만들고 문교부에 재단설립 허가요청공문을 보냈다. 이때 문교부에 보낸 공문엔 ‘문과와 이과를 아우르는 종합대학교인 한국정경대학교를 설립하고 싶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그 결과 1952년 12월 30일 문교부는 학교법인 한국육영회의 설립을 인가하였다.

설립허가를 받은 한국육영회는 1953년 1월 8일에 있던 이사회에서 1953년 4월에 개교를 결정하고 교명을 ‘동양대학’으로 정했으며, 1953년 4월 부산에서 개교한다는 구체적인 계획까지 정했다. 대학에는 3개의 학과를 두기로 했는데 상경학과, 건축공학과, 광산학과였다. [2] [3]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온 김흥배는 대학설립 방향을 바꾸기에 이른다. 그 배경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영향이 컸다. 휴전협상 조인(1953년 7월 27일) 후 일주일이 채 안 된 31일 이승만 대통령은 백두진 국무총리에게 외국어대학의 설립을 추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 등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외국어대학’이라는 구체적 지시였다. 지시를 받은 문교부에서는 설립계획 수립 및 외국어학교 설립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신속하게 준비했다. 당초 세우고자 했던 교명은 ‘국립서울외국어대학’이었다. 그러나 당시 문교부가 기존 국립대학조차 유지하기 힘들다며 재정의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계획이 백지화되었다.

정부가 외국어대학 설립에 애를 먹고 있을 때 김흥배는 별도로 대학을 설립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당시 친분이 있던 백두진 총리 서리 겸 재무부장관[4]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백 서리는 자신의 은사였던 박술음 사회부 장관을 김흥배에게 소개했다. 박술음 장관은 김흥배에게 ‘자원이 부족한 한국의 현실과 외국의 일터로 나갈 인재육성’을 강조하며 ‘외국어대학이 반드시 필요해 문교부에서 설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추진해 왔으나 예산 확보의 어려움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으니, 대학설립재원이 확인된 재산가가 외국어대학 설립 신청서를 제출하면 쉽게 인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에 박술음 장관과 김흥배는 백 서리를 찾아가 정부의 지원을 호소했다. 외국인 교수를 채용하게 되면 인건비외화로 지급해야 하는데, 정부의 외화지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는 정부에게도 매우 신중히 결정해야 할 사안이었다.

한편, 재산가라 불리던 김흥배였지만 대학 설립 자금 마련은 쉽지 않았다. 그는 자금 마련 과정에서 편법(이라고는 하지만 현재 시각에서 보면 엄연히 불법)을 사용했다. 은행에서 더 큰 융자를 지원받기 위해 영등포 제일방직 터[5]를 국가로부터 양도받는 과정에서 시가보다 열 배 비싸게 뻥튀기시켜 지불한 것이다. 김흥배는 이렇게 융자받은 돈과 자기 방직회사의 주식으로 자금을 마련했다.[6]

외국어대학을 세우려는 정부와 자금을 가진 김흥배의 이해 일치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되었고 이 대통령은 조속히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이러한 정부의 판단 하에 김흥배에게 교수 인건비 국가보조에 대한 허가와 대학설립인가가 주어졌다. 국립대학을 목적으로 외국어대학교 설립위원회를 만든 문교부는 다시 사립대학을 목적으로 하는 설립위원회로 바꾸었다. 아울러 명칭 역시 문교부에서 정했던 ‘서울외국어대학’에서 ‘한국외국어대학’으로 변경했다.

그렇게 동양대학 개교 계획은 10개월 만에 전면 백지화되었고 1953년 10월 15일 김흥배는 한국육영회 이사회를 개최하여 한국외국어대학 설립을 의결하였다. 마침내 1954년 1월 18일 문교부는 한국외국어대학의 설립을 인가하였다.


2.2. 1954년 한국외국어대학 (Forigen Language College of Korea) 개교[편집]



파일:attachment/hufs_first.jpg

개교를 확정한 외대는 당시 아직 이문동 캠퍼스에 첫 건물도 완공되기 전이라 종로에 빌딩 하나를 빌려서 교사로 이용하였다. 이 건물은 박술음 장관의 휘문학교 교사 시절 제자인 민대식으로부터 대여한 것이었다. 그렇게 한국외국어대학교는 1954년 4월 20일 서울특별시 종로 2가 82번지 영보빌딩에 임시교사를 두고 개교하였다. [7] 이곳은 주로 전공과목 강의실로 사용되었고 교양과목은 회현동 중앙우체국 근처에 있던 가교사에서 진행되었다.

초대 학장(지금의 총장) 또한 박술음 장관이 추천한 안호삼 교수에게 맡겼다. 안호삼 초대 학장을 중심으로 교수진과 사무진을 갖췄고 3월에 입학시험을 실시해 252명을 선발했다. 과는 영어과(132명), 불어과(21명), 중국어과(37명), 독어과(29명), 노어과(33명) 등 다섯 개 학과로 수업을 진행했다. 과에 따라 반을 구성했는데 각 반은 20~30명 사이였다. 이듬해에는 한국 최초로 서반아어(스페인어)과가 신설되었다. 교재는 전공과목, 선택과목 모두 외국어로 된 교재를 사용하도록 했으며 졸업논문도 외국어로 쓰도록 권장했다.

당시 대학교들은 청강생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에 대해 학교는 청강생을 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엄격하게 고수했는데, 이는 ‘소수의 학생이라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는 설립자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학생들의 나이는 고르지 않았다. 군복무를 마치고 온 학생,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학생, 거기에 간혹 만학도도 섞여 있었다. 심지어는 중령, 즉 대대장 계급을 달고 대학에 들어오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새로운 전공에 흥미를 느껴 들어온 사람도 있었다. 여학생은 각 반에 서너 명 정도로 많지 않았다. 졸업생들의 회고에 따르면 정규 교육과정 중에는 체육시간도 있었는데, 운동장이 없었기 때문에 남산으로 올라가야 했음에도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또 이 당시에는 대학교 교복도 존재했는데, 외대의 교복은 배지만 빼고는 서울대의 교복과 같은 모양이었다.

정부는 외대의 교원 확보를 위해 금전적인 지원을 해 주었을 뿐 아니라 외국인 교수 초빙에도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었다. 문교부가 직접 주한외국대사관에 의뢰를 하여 유능한 교수를 추천해주도록 협조를 당부하였다. 특히 운크라(UNKRA, 유엔한국부흥위원단)와도 알선해 타이프라이터 40대, 녹음기, 반향기, 축음기, 라디오 등 최신식 기자재를 도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원이 큰 만큼 정부는 감독을 두었다. 처음엔 문교부 장관 대리인 허증수 문교부 차관을 이사로 임명했다. 그 후 정부의 지원이 계속되었고 1954년 12월 28일에는 당시 정부의 실세였던 이기붕 등 3명을 새로운 이사로 선임했다. 정부의 지원을 업은 만큼 학교는 빠르게 성장했으나, 그만큼 정부의 입김 역시 커졌다.


2.3. 1957년 이문동 캠퍼스로 이전[편집]



파일:이문동 캠퍼스 초기 모습.jpg

종로 빌딩이 너무도 비좁았기에, 외대는 새로운 터를 찾아야 했다. 그러던 중 호재가 찾아왔다. 정부가 공공부지인 이문동의 학교 교사 예정지를 재단에게 매각해 준 것이다. 원래 이문동 캠퍼스 부지는 임업시험장의 부지였으나 그 중 5만평을 팔아주어 사용하도록 했다. [8] [9] 하지만 이 시기에는 자원이 궁핍했던 시기라 시멘트와 철근을 구하기 힘들었다. 이에 문교부는 직접 산업자원부에 공문을 발송하여 시멘트와 철근을 배급해 건물 완공을 도와주기도 했다.

한국외대는 1956년 7월부터 이문동 신교사[10]에 대한 공사를 시작했다. 1957년 9월 우측 부분만 완성되었던 본관이 개관되어 이문동 캠퍼스에서 강의가 시작되었다. 나머지 좌측 부분이 2년 후 완성되면서 완전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지금은 고층 건물들이 즐비한 서울의 일부분이지만 당시엔 이문동 전체가 사진처럼 논밭이었기 때문에 외대의 건물들만이 홀로 우뚝 솟아 있는 풍경을 이루었다.


파일:한국외국어대학 제1회 졸업식(1958).jpg
1958년에는 제3대 학장서리로 한종원 교수가 임명되었으며 첫 졸업식[11]이 개최되었다.

1961년에는 제4대 권중휘 학장이 임명되었으며, 이 해에 대학원 신설인가를 받아 석사학위과정에 영어과, 불어과, 독일어과를 개설하여 학구활동의 본격화를 이루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1962년에 제5대 최완복 학장의 취임이 있었고, 9월에는 시청각교육원을 설치, 동양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어학실습설비를 갖추게 되었다. 같은 해 대학 영문 명칭이 'Foreign Language College of Korea'에서 'Hankuk University of Foreign Studies'로 개칭되었다. 1963년 3월에는 이태리어과가, 같은 해 12월에서는 말레이・인도네시아어과, 외사학부 및 산하의 외교학과와 무역학과[12]가 신설되었다. 아울러 대학원에 박사학위과정 설치 인가를 받아 영어과, 불어과 독일어과를 설치했다. 1964년에는 국제사정연구소가 개소되었으며, 이듬해 1월에는 아랍어과와 국제행정학과가 신설되었다. 1966년 1월에는 포르투갈어과와 태국어과가 설치되었고 3월에는 제6대 박술음 학장이 취임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베트남어과가 설치되었으며, 1967년에는 국제경제학과와 국제법률학과가 신설되었다. 1968년에는 학제 개편이 단행되어 외국어학부[13], 법정학부[14], 상경학부[15], 교육학부[16] 등 4개 학부, 21개 학과 체제가 완성되었다. 1969년에는 경제・경영연구소와 언어연구소가 설치되었다.

1970년에는 대학원 석사학위과정에 동구지역연구학과, 정치외교학과, 무역학과가 신설되었고, 1971년에는 인도어과가 신설되었다. 1972년에는 중국문제연구소와 소련 및 동구문제연구소가 개소하였고, 터키어과가 설치되었다. 1974년 2월 스웨덴어과와 한국어교육과가 신설되었고, 9월에는 외국어연수원이 설치되었다. 1975년에는 이란어과가 설치되었으며, 1977년에는 제7대 최완복 박사가 취임했다. 1978년에는 4개 학부, 28개 학과에 입학정원 1,005명의 국내 최대의 단과대학으로 성장했다. 1979년 3월에는 야간강좌 설치를 인가 받아 8개의 야간학과[17]가 신설되었으며, 9월에는 통역대학원 설립 인가를 받아 한국어 동시통역학과[18]와 외국어 동시통역학과[19]가 설치되었다.


2.4. 1980년 용인분교 개교[편집]


이후 한국의 대학이 몸집을 키우던 시기를 맞으면서 외대도 급속하게 학과를 신설하면서 외형적으로 성장을 거듭했다. 하지만 단과대학에서 규모가 커지면서 종합대학이 되기에는 이문동 부지가 작았고, 그마저도 뒤쪽에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 지금의 국가정보원이 있었던 까닭에[20][21] 증축이나 신규 건축도 제한을 받는 등 종합대학으로 커나가기에 걸림돌이 되었다.[22]

이에 설립자는 대학발전을 위해서는 다른 곳에 큰 대학부지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70년대 초부터 10여년을 서울 인근을 물색,[23] 용인에 80만 평의 부지를 사재를 털어 구입하고,[24] 몇 년의 준비 끝에 1979년 용인분교 설립을 인가 받아 6개 학과[25]가 설치되었다. 1980년 용인분교는 용인대학이란 단과대 형태로 개편되었으며, 5개 학과[26]가 추가로 신설되었다.

파일:jhj7Qtq.jpg

설립자는 용인분교가 분교가 아니라 메인캠퍼스로서 학부와 최종적으로 대학본부도 이곳으로 옮기고 서울캠퍼스는 대학원 및 연구소 중심으로 가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1983년 문리과대학만 이전되었으며 완전한 이전 계획은 여러 이유로 실행되지는 못했다.[27][28]


2.5. 1980년 종합대학 한국외국어대학교로 개편[편집]


1980년 10월 2일 종합대학 조건을 만족시키며 국민대학교와 함께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었으며, 종합대학 조건[29]을 충족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학제개편이 진행되었다. 외국어학부는 각각 서양어대학[30]과 동양어대학[31]으로, 법정학부는 법정대학[32]으로 승격되었다. 또한, 상경학부는 상경대학[33]으로, 교육학부는 사범대학[34]으로 개편되었다. 아울러 자연계열 단과대 확보를 위해 서울캠퍼스에 문리과대학[35]이 신설되었다.

1982년 10월 학제개편을 통해 용인대학이 용인캠퍼스로 개편되었으며, 용인대학의 외국어학부와 상경학부를 각각 어문대학과 사회과학대학으로 승격되었다. 또한, 용인캠퍼스 어문대학에 3개 학과[36]를, 서울캠퍼스 문리과대학에 전자계산학과가 설치되었다.

1983년 9월에는 용인캠퍼스에 추가로 3개 학과[37]가 설치되었고, 서울캠퍼스의 문리과대학이 용인캠퍼스로 이전되었다.


2.6. 1998년 재단 개혁 및 제2건학 선포[편집]


외대는 1980년대 전국적으로 불어온 대학의 양적 팽창과정에서 새로운 대학 환경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보다는 현실에 안주한 측면이 있었다.[38] 그 결과 1990년대에 들어서 대학 전체가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1998년 재단운영을 둘러싸고 이사들의 비리[39] 및 총장 선임 문제로 교수·교직원 간 반목과 수업 거부 등 내부 진통도 불거졌다. 학생들은 전면 수업거부에 들어갔고, 교수들은 비상교수협의회를 구성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당시 총장이었던 조규철 총장은 교수진과 뜻을 모아 교육부 장관에게 사태 해결을 청원하게 되고, 결국 1998년 7월 교육부는 칼을 빼든다. 특별감사를 벌여 재단이 입시비리에 관여하고 법인 예산을 유용하거나 학사행정에 부당 간섭하는 등 탈법·파행 운영한 것을 확인하고 당시 이사를 모두 해임한 것이다. 교육부는 계속해서 임시 이사 9인을 선임하고,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를 이사장으로 선출하였다. 이러한 학교 정상화 과정에서 새로운 외대 중흥 원년 1998년, 외대인들의 민주개혁 정신을 기리고 앞으로 백년 대계를 세워 끊임없는 개혁과 발전을 추진해 나가자는 취지에서 대학 구성원의 이름으로 ”한국외국어대학교 제2건학“을 선언하게 된다.

급변하는 교육환경 속에서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학교발전의 대전환을 이루기 위해서는 개혁을 통한 체질개선과 발전계획의 수립을 통한 방향 정립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이에 “대학평의원회”와 “제2건학 기획단”이 구성되어 이들을 중심으로 “제2건학”의 기치 아래 개혁과 비전 모색을 위한 노력이 다각도로 진행되었다.

외대는 새로운 시대환경에 대응하는 대학발전을 주도하기 위하여 조직구조 설계 방향을 효율화, 분권화, 유연화의 방향으로 설정하고, 학생 중심의 서비스 제공 및 교육·연구 활성화를 위한 지원 등 핵심기능 강화, 용인캠퍼스의 권한 및 책임 강화 등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행정조직 구조를 개편하였다. 또한 본관 신축, 기숙사 건립, 리모델링을 통한 강의실의 현대화 등 외형적 인프라를 구축하고, 정보지원처를 신설하여 정보 관련 업무를 일원화하였다. 그리고 도서관, 시청각교육원 및 학사·행정 업무를 디지털화하는 등 정보화 시대에 부응하여 내적 인프라를 구축 운영하였다.


2.7. 2010년 용인캠퍼스를 글로벌캠퍼스로 명칭 변경[편집]


본, 분교 통합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대외적 인식 문제로 인해 용인캠퍼스의 명칭을 글로벌캠퍼스로 변경하게 된다.


2.8. 2014년 서울캠퍼스-글로벌캠퍼스 통합[편집]


2014년 교육부로부터 글로벌캠퍼스가 본교 승인을 받으면서 분교에서 벗어나 이원화 캠퍼스가 되었다. 허나 이에 대한 학내 구성원 간의 갈등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40]

글로벌캠퍼스의 본분교 통합은 상당히 급작스레 이루어졌다. 물론 2000년대 말부터 2010년대 초까지 두 캠퍼스간의 통합에 대한 얘기가 오갔고 실제로 용인캠퍼스 명칭을 글로벌캠퍼스로 바꾸고 제2기숙사를 신축해내는 등의 성과를 이뤘지만, 이는 글로벌캠퍼스에만 이공계 학과가 존재하는 학교의 특성상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 점진적인 통합 준비를 해야되지 않겠느냐 정도의 논의였다.

이렇게 천천히 준비하던 글로벌캠퍼스의 본교화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두 가지다. 첫째로 2011년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 2012년 경희대학교 국제캠퍼스(구 수원캠퍼스)가 이원화가 되면서 학교에서도 타 대학들과의 경쟁력 제고를 위해 글로벌캠퍼스의 본교화가 시급하다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번째로, 박근혜 정부가 2015년 실시한다고 공표한 대학구조개혁평가다. 한국외대 서울캠퍼스는 교지확보율[41][42]에서 감점을 받을 것이 분명했으며, 또한 이공계 관련 평가는 이공계열 학과가 전무하기 때문에 0점을 받을 상황이었다. 해당 평가에서 A등급을 받지 못하면 상당한 인원을 감축해야 하는 상황에서, 학교 측에서 2011년 공식적으로 들고 나온 비장의 무기가 바로 본, 분교 통합이었다.

당시 글로벌캠퍼스에서 서울캠퍼스로의 복수전공 제도를 통한 학벌 세탁[43] 논란이 거셌던 와중에 캠퍼스 통합은 그야말로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사태였다. 서울캠퍼스에서는 2010년대 이후로 최대 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총학생회장이 삭발까지 해가며 캠퍼스 통합을 반대했다. 심지어는 모 신문사에서 본분교 통합에 반대하는 학생들을 학벌주의자로 매도하는 기사가 올라오자 학생회관에서 해당 신문을 불태우는 퍼포먼스까지 벌어졌다. 글로벌캠퍼스에서는 대체로 통합을 환영하는 반응이었으나[44], 통합하며 폐과가 예정된 중복학과들은 거세게 반발하였다. 하지만 대학본부가 이미 몇 년간 통합을 준비해 온 데다, 각종 어른의 사정이 겹쳐 있었기 때문에[45] 캠퍼스 통합을 막기는 어려웠고, 계획보다는 미뤄진 2014년에 캠퍼스 통합이 강행되었다.

상술했듯 졸속 논란을 빚은 통합이었기 때문에, 양 캠퍼스 간의 감정의 골이 아직도 깊으며 중복학과 등의 각종 논란이 해결되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외국어대학교/사건사고 문서 내용을 참조.


3. 학부 변천사[편집]



3.1. 1980년 이전[편집]






3.2. 1980년대[편집]






3.3. 1990년대[편집]






3.4. 2000년대[편집]






3.5. 2010년대[편집]






3.6. 2020년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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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동원육영회의 전신[2] 이를 보면 당시 국토개발을 위한 건축가 양성과 광산운영 전문가, 경제개발을 위한 경제 전문가에 대한 사회의 수요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3] 이와 더불어 김흥배가 경영했던 삼화피복공사, 동양철광공사와 소유하고 있던 한국화재해상보험주식회사, 제일방직공업주식회사의 성격을 보면 이 회사들에 필요한 인력을 양성하기 위함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4] 1952년 10월 9일부터 익년 4월 3일까지는 정식 총리가 아니라 서리였다. 정식 총리 임기는 익일부터 시작했다. 고로 상술한 1953년 7월 31일에는 총리였던 게 맞고, 김흥배가 대학 설립을 위해 한창 뛰어다니던 중에는 서리였다가 총리 인준안이 가결된 것이다.[5] 전쟁 중 인민군의 방화로 황폐화되어 있었다.[6] 이 편법행위에 대해 김흥배는 ‘비슷한 시기에 설립 인가를 받은 대학들이 기본재산 없이 학생들의 수업료에 의지했던 것과 비교해 자기자본을 가지고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한다.[7] 이 영보빌딩은 지금은 헐려서 없어졌지만 지금의 위치로 말하자면 대강 종로서적이 있는 자리 정도다.[8] 이문동 캠퍼스뿐 아니라 외대 뒤편 천장산 주변이 전부 홍릉 임업시험장이었다. 그러나 한국과학기술연구원, 경희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하다못해 안기부(현 한국예술종합학교)까지 꿰어차고 들어와 이리저리 떼내서 불하되거나 넘기고 남아 있는게 지금의 홍릉수목원이다. 5만 평을 구입했다고 하나 지금 남아 있는 건 2만 5천 평 정도이니 절반쯤은 그 후 야금야금 팔아먹었다는 이야기다.[9] 설립자 회고집을 보면 대학 부지가 도로로 둘로 나눠져 있서 문제였다고 언급한 걸로 봐서는 나머지 부지는 지금 외대와 외대역 사이였던 걸로 보인다.[10] 구본관, 현재는 보존된 일부가 역사관으로 사용 중[11] 졸업생 133명[12] 현 국제통상학과[13] 영어과, 불어과, 중국어과, 독일어과, 노어과, 스페인어과, 일본어과, 이태리어과, 말레이・인도네시아어과, 아랍어과, 포르투갈어과, 태국어과, 베트남어과[14] 정치외교학과, 행정학과, 법학과[15] 무역학과, 경제학과[16] 영어교육과, 불어교육과, 독일어교육과[17] 영어과, 불어과, 독일어과, 일본어과, 아랍어과, 무역학과, 경영학과[18] 한영과, 한불과, 한노과, 한서과, 한일과, 한아과[19] 영불과, 영중과, 영노과, 영서과, 영일과, 영아과, 불중과, 불노과, 중노과, 중서과, 노서과[20] 지금의 한국예술종합학교 자리이다. 이후 지금은 알다시피 국정원은 서초구 내곡동으로 이전한 상태.[21] 여담이지만 단국대학교도 국정원 때문에 피해를 입은 대학이다.[22] 당시에는 대학이 종합대학이냐 단과대학이냐가 대학의 위상을 가를 정도로 중요한 기준이었고, 대학들이 너도나도 종합대학이 되기 위해 사력을 다해 규모를 키우는 시기였다. 심지어는 종합대학만이 "대학교"라는 명칭을 쓸 수 있었고 단과대학은 "대학"이라고만 표기해야 했다. 또 단과대학은 "총장"이라는 호칭도 쓸 수 없었고 "학장"이라는 호칭만 써야 했다. 수험생들도 대학을 선택하는 중요한 기준을 종합대학이냐 아니냐로 두기도 했다.[23] 설립자 회고록을 보면 "10년 이상 교지 확보를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지만, 마땅한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던 이유는 내가 생각하는 학교부지로서의 조건이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새로 정할 교지는 서울 중심부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안 되고 너무 가까워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장차 대학 본부가 자리 잡게 될 곳이므로 종합대학교 캠퍼스로서 갖가지 조건에 부족함이 없어야 했다. 앞으로의 대학의 규모를 생각해서 세월이 흐른 뒤에도 학교부지로서의 조건에 부족함이 없어야 하고 또 넉넉한 공간 활용의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대지가 80만평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대학촌이 형성된 뒤의 모습도 생각해 보아야 했다."라고 되어 있는데 일부러 서울에서 좀 떨어진 곳을 선택한 것 같다. 지금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생각이지만 아마 그 당시에는 굳이 서울에 위치하거나 서울에서 가까워야 할 이유가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듯 하다.[24] 설립자 회고록을 보면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어느 가을 날 경기도 광주를 지나 용인으로 빠지는 길에서 잠시 차를 세웠다. 동쪽으로 시선을 옮기어 푸른 하늘을 쳐다보니 산봉우리가 보였다. 봉우리를 중심으로 날개처럼 두 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산등성이가 동물의 부드러운 등허리처럼 순하게 뻗어 있었다. 나는 이상한 영감에 말려드는 듯하였다. 어림잡아 그 일대가 80만 평이 넘을 것 같았고 산세가 포근하면서도 힘이 있었다. 여기다! 나는 속으로 외쳤다." … "부지 매입 자금은 내 소유의 땅을 팔아서 마련하였다."[25] 영어과, 불어과, 노어과, 스페인어과, 아랍어과[26] 중국어과, 일본어과, 포르투갈어과, 경제학과, 무역학과[27] 결정적으로 설립자는 용인캠 개교 몇년후 숙환으로 별세했다. 사실 80년대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서울에 캠퍼스가 있다는 게 입결에 중요한 문제로 작용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있었던 단국대학교가 죽전으로 이전하고 나서 어떻게 되었는지 봐도 답이 나온다. 서울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으니 입결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것 같다. 사실 단국대학교의 용인 이전은 정치권의 개입, 한남동 주변의 공관들로 인한 한남캠퍼스의 확장 불가 등 여러 사유가 있다. 그리고 단국대학교도 용인 이전 시 외대처럼 일부시설은 서울에 남기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자세한 사항은 단국대학교/역사 참고[28] 비슷한 경우로 명지대학교가 있다.[29] 당시 교육법 및 동법 시행령에 따라 최소 3개의 단과대학이 있어야 하며, 단과대학 중 하나는 자연계열이어야 했다.[30] 영어과, 불어과, 독일어과, 노어과, 스페인어과, 이태리어과, 포르투갈어과, 네덜란드어과, 스웨덴어과[31] 중국어과, 일본어과, 말레이・인도네시아어과, 아랍어과, 태국어과, 베트남어과, 인도어과, 터키어과, 이란어과[32] 정치외교학과, 행정학과, 법학과, 홍보학과[33] 무역학과, 경제학과, 경영학과[34] 영어교육과, 불어교육과, 독일어교육과, 한국어교육과[35] 철학과, 수학과, 물리학과, 화학과[36] 이태리어과, 태국어과, 스와힐리어과[37] 어문대학 인도어과, 사회과대학 경영정보학과 및 사학과[38] 이러한 안주적인 학내 구성원들의 태도는 수십 년이 지난 현재 2020년대까지도 지적되고 있는 외대의 고질병이라고 할 수 있다.[39] 특히 설립자 김흥배의 처조카인 박승준 이사의 비리가 문제가 되었다.[40] 지금도 학내 구성원 간의 갈등이 표면적으로만 드러나지 않는 것이지 에브리타임 같은 익명 커뮤니티에 들어가보면 서울캠과 글로벌캠이 언제 싸워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이다.[41] 한국외대 서울캠퍼스와 비슷한 수준의 학부생 인원을 갖춘 학교는 경희대학교 서울캠퍼스, 서울시립대학교 등인데, 이 학교들과 학교 부지를 비교해보면 처참하기 그지없다.[42] 서울캠퍼스의 열악한 상황과는 반대로 글로벌캠퍼스는 학교 부지가 수도권에서 서울대학교 바로 다음이라는 어마무시한 크기를 자랑한다.[43] 이 제도로 이득을 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조우종이다.[44] 본디 서울캠퍼스 총학생회가 연대를 요청해 글로벌캠퍼스 총학생회 역시 학교 측에 반대입장을 표명하기로 약속되었으나, 중간에 글로벌캠퍼스 학생회가 어물쩡 말을 바꾸면서 뒤로 빠졌고, 오히려 글캠에서는 운동권을 포함한 상당수의 학생들이 통합 촉구 집회를 벌였다. 서울캠퍼스 학생회는 결국 홀로 통합 반대 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이 때문에 서울캠퍼스 고학번들과 졸업생들은 아직까지도 글로벌캠퍼스 학생들에 대한 시선이 대단히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45] 서울캠퍼스는 교지 면적이 턱없이 부족한데다 이공계 학과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각종 국책사업 후보 선정 과정이나 대학평가 등에서 불이익을 받고 있었는데, 글로벌캠퍼스와의 통합으로 더 높은 평가를 받고자 하는 대학 측의 의지가 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