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년 장마, 종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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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년 장마, 종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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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매일
1993년 10월
장르
포크
재생 시간
39:56
곡 수
9곡
레이블
삶의 문화
타이틀 곡
92년 장마, 종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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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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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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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1998년 91위2007년 63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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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BEAT 선정 90년대 베스트 앨범 100
19위




1. 개요
2. 상세
3. 공윤과의 투쟁
4. 트랙 리스트
4.1. 양단 몇 마름
4.2. 저 들에 불을 놓아
4.3. 비둘기의 꿈
4.4.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
4.5. 비둘기의 꿈 (경음악)
4.6. 사람들
4.7. LA 스케치
4.8. 나 살던 고향
4.9. 92년 장마, 종로에서



1. 개요[편집]


1993년 배포된 정태춘과 박은옥의 여덟 번째 앨범.


2. 상세[편집]


전작인 '아, 대한민국...' 못지 않게 중요한 음반인데, 우선 예술적 관점에서 이 음반은 정태춘이 그동안 쌓아오던 정서와 메시지들이 한 마디로 익을대로 익은 결과물이었다. 당시 시대상황도 상황이었으나 이전의 '아, 대한민국...'의 경우 다소 투박하고 거친 면이 많았는데, 이 앨범에 와서는 조금 더 정제되고 절제된 정서를 보여주고 있다. 다소 독특한 것은 그동안 지향해오던 전통적인 분위기, 혹은 농촌에 기반한 정서가 많이 누그러진 반면, 도시적인 분위기가 더욱 가미되었다는 것이다. 앨범 재킷 또한 종로를 배경으로 촬영되었고 전통 악기의 사용의 빈도 역시 줄어들었다.

이 앨범을 관통하는 전반적인 정서는 회한의 성격이 강했는데, 이는 이 앨범의 내용들이 당시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1991년 연쇄 분신 파동 이후 한국 사회는 한차례의 가두 투쟁이 실패로 끝났고,[1] 사람들은 그저 한차례 몸살을 앓은것 마냥 민주화 과정을 과거의 것으로 치부하게 된다. 이는 고스란히 사회의 보수화로 이어진다. 1993년 한국의 정치, 사회적 상황은 야권, 혹은 민주화 세력의 한 축이었던 김영삼이 전격적으로 노태우, 김종필3당 합당을 거친 후 대통령 후보가 되어 김대중과 대결한 제 14대 대선에서 승리한 상황으로, 80년대 중반부터 민주화를 열망하며 정권교체를 희망하던 이들에게 엄청난 상실감을 주던 시기였다.[2]

파일:external/af019874e632d679d395c0ba506414c6bc8cf4b13726391298f35241ab087d8f.jpg
거리풍경, 박재동, 1992년 12월 19일 한겨례 그림판

당시 상황을 만평으로 잘 요약해 주는 것이 대선 직후 박재동 화백이 한겨레신문에 기고한 위의 만평인데, 당시 운동권, 혹은 진보진영의 이들이 느꼈던 상실감을 잘 표현해주고 있고, 정태춘의 앨범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 김대중은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났으며, 재야진보정당 민중당도 해체되고 운동권은 대중 대신 교조적 이념만 남아 점차 지리멸렬해져갔다.

80년대 중후반과 90년대 초반을 거쳐 저항하던 학생들은 이미 대부분 사회인이 되어 바빠지기 시작했고, 소위 '민중문화계'의 핵심인사들도 뿔뿔이 흩어지던 시대였다. 정태춘을 위시한 많은 이들에게 이 시기는 패배의 시기였고 절망의 시기였으며, 반성의 차원을 넘어 회한을 느끼는 시기였다. 심지어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일정 부분 개혁조처가 내려져 반정부 투쟁의 명분이 약해졌고, 대학가 역시 자유와 개인주의를 표방한 'X세대'들이 주류가 되면서 상명하복형 NL운동권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어졌다.

이 앨범에 수록된 '사람들'이라는 곡의 가사에서 이러한 정서가 잘 드러나 있으며, 타이틀 곡이라고 할 수 있는 '92년 장마, 종로에서'도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희망을 얘기하고 있지만 회한의 정서가 주를 차지하고 있다.


3. 공윤과의 투쟁[편집]


이 앨범 역시 공윤 심의를 거부하고 배포된다. 이 시기에 이르러 공윤 사전검열제와의 투쟁은 더더욱 본격적이 되는데, 단순히 심의를 거치지 않은 음반의 배포 및 판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연장과 집회를 통해 해당 내용을 홍보하고 사인 판매를 진행했으며, 관객들의 지지 서명까지 받는가 하면, 1993년 10월 30일 KBS1 <생방송 심야토론: 전화를 받습니다>에 출연해[3] 사전심의의 부당함을 알리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LP 재킷에는 아예 ‘창작 · 표현의 자유 만세’라는 붉은 스티커를 찍은 버전까지 있다. 이런 연유로 그는 동년 11월 1일 문화체육부에 의해 서울지검에 고발당했으며 1994년 1월 25일에는 서울지방검찰청에 의해 불구속 기소된다.

또 1993년 11월 5일에 방영된 KBS1 <노영심의 작은음악회[4]> '정태춘-박은옥 특집 에피소드'에 해당 앨범 2곡이 수록되었다는 이유로 담당 연출자 박해선 PD가 KBS 측에 의해 경고처분을 당하기도 했다.

정태춘의 기소는 공윤 음반사전검열에 대해 전 문화계가 집중하는 계기가 되는데, 기소된 바로 다음 날인 1994년 1월 26일 민예총은 즉각 기소에 대해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으며, 많은 문화계 인사들이 그를 지지하고 나섰다. 변호사로는 천정배 변호사가 선임되어 재판이 진행된다. 1994년 3월 22일 시작된 1차 공판을 거쳐 1994년 4월 19일 2차 공판에서는 해당 법률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제청이 있게 된다. 이 위헌심판제청은 같은 해 5월 10일 있었던 3차 공판에서 위헌제청 결정 판결이 남에 따라 헌법재판소에서 음비법에 대한 위헌 판단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1995년 3월에 법무부는 정태춘의 위헌제청에 대해 "예술표현의 자유도 공공복리를 위해 제한할 수 있으며[5] 현행 사전심의제도와 공윤은 검열제도나 검열기구가 아니므로 정태춘의 위헌제청 신청 및 건의를 기각하여야 한다."고 하여 헌재에 <음비법 위헌제청 신청 건에 관한 의견서>를 접수했고, 문체부와 서울지검도 이와 비슷한 의견을 냈다.(당시 사건 경과)

1년이 넘게 진행된 이 위헌 심판은 1996년 10월 31일, 헌법재판소 재판관 전원 일치로 위헌(94헌가6)으로 판정되어 해당 법률은 즉각 효력을 상실했고, 1996년 12월 31일 서울지법이 정태춘의 기소에 대해 선고유예를 판결함으로써 이 사건은 일단락된다. 실질적으로 그가 5년이 넘게 투쟁해 온 결과인 사전검열제의 위헌 판결에 따른 폐지는 한국의 대중문화사에 기념비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여담 내지는 해프닝에 불과한 일이지만, 이 위헌 판결의 주인공이 정태춘이 아니라 서태지로 잘못 알려진 일도 있었다. 위헌 판결 이전인 1995년, 공윤은 발매 예정이었던 서태지의 4집 수록곡인 '시대유감'의 가사에 대해 수정 권고를 했고, 이에 대해 서태지는 가사를 전면 삭제하고 연주곡으로 수록함으로써 공윤의 권고에 대해 다소 소극적인 저항을 한다. 이 내용에 대해 당시의 서태지 팬덤들은 자신들이 추종하는 가수가 부당한 권력과 투쟁한다는 것으로 과대하게 해석했고, 대중적 유명세에 따라 다수 언론에 해당 관련 기사들이 노출되었다. 이 사건이 발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전검열제가 폐지되었으니 팬덤들 및 일반 대중들에게는 사전검열제의 주인공이 서태지로 여겨지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물론 소수이긴 하지만 정태춘의 팬덤들에게는 그저 소극적인 저항에 그친 행위일 뿐이고, 애초에 공윤에 심의를 진행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은 작은 반항을 한 이에게 문화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의 기념비가 돌아간다는 점에서 심히 저항감을 가질만도 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서태지 또한 사전검열제에 제한적인 형태이나마 저항의 표시를 함으로써 당시 한창이던 위헌 심판에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로 보인다.

<시대유감> 가사 삭제 외에도 저항의 표시가 또 하나 있었는데 4집 앨범 수록곡 <필승> 가사는 원래 공윤에 제출했던 가사와 다르다. 사전심의제 시절에는 앨범 발매 전에 공윤에 가사를 제출했는데, 공윤 제출본에는 없었던 빌어먹을이란 말이 앨범에 갑자기 추가되었던 것이다. 기사 이 때문에 공윤에서는 서태지와 아이들 4집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까지 냈다. 그러나 이게 오히려 서태지 팬들을 자극해 사전심의폐지 운동에 불을 붙인 격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다른 세계에서 활동하던 서태지와 정태춘이 진보 언론에서 같이 다뤄지게 된 것이다.

당시 이 위헌심판의 주인공인 정태춘 본인이 서태지의 대중적 위상에 따른 역할에 대해 긍정적으로 인정한 것으로 볼 때, 이 해프닝은 그저 팬덤에 의해 발생한 해프닝으로 보는 게 적절하다.

1996년에 사전심의가 폐지된 이후로 공윤은 '등급보류'라는 이름으로 또다른 검열제를 만들어 표현의 자유를 제한했으나, 2006년에 음비게법이 폐지되고 '음반산업 진흥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음반에 대한 유해성 여부는 청소년보호법에 따라 현재 청소년보호위원회가 맡고 있다.


4. 트랙 리스트[편집]


트랙
곡명
작사
작곡
편곡
재생 시간
1
양단 몇 마름
정태춘
정태춘
유지연
2:22
2
저 들에 불을 놓아
정태춘
정태춘
함춘호
4:58
3
비둘기의 꿈
정태춘
정태춘
함춘호
4:37
4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
정태춘
정태춘
함춘호
4:47
5
비둘기의 꿈 (경음악)
-
정태춘
-
4:35
6
사람들
정태춘
정태춘
정태춘
7:00
7
LA 스케치
정태춘
정태춘
정태춘
4:22
8
나 살던 고향
곽재구
정태춘
정태춘
4:10
9
92년 장마, 종로에서
정태춘
정태춘
함춘호
5:48


4.1. 양단 몇 마름[편집]



양단 몇 마름
{{{#000000 시집올 때 가져온 양단 몇 마름
옷장 속 깊이깊이 모셔 두고서
생각나면 꺼내서 만져만 보고
펼쳐만 보고 둘러만 보고
석삼년이 가도록 그러다가
늙어지면 두고 갈 것 생각 못 하고
만져 보고 펼쳐 보고 둘러만 보고
시집올 때 가져온 꽃신 한 켤레
고리짝 깊이깊이 모셔 두고서
생각나면 꺼내서 만져만 보고
쳐다만 보고 닦아도 보고
석삼년이 가도록 그러다가
늙어지면 두고 갈 것 생각 못 하고
만져 보고 쳐다보고 닦아만 보고
만져 보고 펼쳐 보고 둘러만 보고 }}}


4.2. 저 들에 불을 놓아[편집]



저 들에 불을 놓아
{{{#000000 저 들에 불을 놓아 그 연기 들판 가득히
낮은 논둑길 따라 번져가누나
노을도 없이 해는 서편 먼 산 너머로 기울고
흩어진 지푸라기 작은 불꽃들이 매운 연기 속에 가물가물
눈물 자꾸 흘러내리는 저 늙은 농부의 얼굴에
떨며 흔들리는 불꽃들이 춤을 추누나
초겨울 가랑비에 젖은 볏짚 낫으로 그러모아
마른 짚단에 성냥 그어 여기저기 불 붙인다
연기만큼이나 안개가 들판 가득히 피어오르고
그중 낮은 논배미 불꽃 당긴 짚더미 낫으로 이리저리 헤집으며
뜨거운 짚단 불로 마지막 담배 붙여 물고
젖은 논바닥 깊이 그 뜨거운 낫을 꽂는다
어두워가는 안개 들판 너머 자욱한 연기 깔리는 그 너머
열나흘 둥근달이 불끈 떠오르고 그 달빛이 고향 마을 비출 때
집으로 돌아가는 늙은 농부의 소작 논배미엔
짚더미마다 훨 훨 불꽃 높이 솟아오른다
희뿌연 달빛 들판에 불기둥이 되어 춤을 춘다 }}}


4.3. 비둘기의 꿈[편집]



  • 입시의 압박에 의해 자살을 선택하는 학생들을 묘사한 노래로, 실제로 자살을 선택한 한 학생의 유서를 기반으로 만든 노래이다. 그 학생의 어머니가 정태춘과 박은옥에게 직접 유서를 보내주었다고.
비둘기의 꿈
{{{#000000 봄 햇살 드는 창밖으로 뛰어나갈 수 없네
모란이 피는 이 계절에도 우린 흐느껴
저 교회 지붕 위에 졸고 있는 비둘기
어서 날아가라 계속 날아가라 총질을 해대고
그 총에 맞아 혹은 지쳐 떨어지는 비둘기들
음 그래 우린 지쳤어
좋은 밤에도 우린 무서운 고독과 싸워
기나긴 어둠 홀로 고통의 눈물만 삼켰네
아 삶의 향기 가득한 우리의 꿈 있었지
노래도 듣고 시도 읽고 사랑도 하고
저 높은 산을 넘어 거칠은 들판 내닫는 꿈
오 제발 우릴 도와줘
내가 사랑한 것들 참 자유 행복한 어린 시절들
알 수 없는 건 참 힘든 이 세상의 나날들
안녕 이제 안녕
여기 나의 노래들을 당신에게 전할 수 있다면
안녕 모두 안녕 열아홉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
안녕 부디 나의 노래 잊지 말아 줘 }}}


4.4.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편집]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
{{{#000000 우리는 긴긴 철교 위를 달리는
쏜살같은 전철에 지친 몸을 싣고
우리는 그 강물에 빛나던 노을도 진
아 어두운 한강을 건너
집으로 집으로 졸며
우리는 신선한 노동의 오늘 하루
우리들 인생에 소중한 또 하루를
이 강을 건너 다시 지하로 숨어드는 전철에
흔들리며 그저 내맡긴 몸뚱아리로
또 하루를 지우며 가는가
창백한 불빛 아래 겹겹이 서로 몸 부대끼며
사람의 슬픔이라는 것이 다른 그 무엇이 아니구나
우리가 이렇게 돌아가는 곳도 이 열차의
또 다른 칸은 아닌가
아 그 눈빛들 어루만지는 그 손길들
우리는 이 긴긴 터널 위를 실려가는
희망 없는 하나의 짐짝들이어서는 안되지
우리는 이 평행선 궤도 위를 달려가는
끝끝내 지칠 줄 모르는 열차 그 자체는
결코 아니지 아니지 우리는
무거운 눈꺼풀이 잠시 잠기고
깜빡 잠에 얼핏 꿈을 꾸지
열차가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
찬란한 은빛세상으로
거기 사람들 얼굴마다 삶의 기쁨과 긍지가 충만한
살만한 인생 그 아름다운 사람들
매일처럼 이 열차를 기다리는 저 모든 사람들
그들 모두 아니 우리들 모두를 태우고
아무도 단 한 사람도 내려서는 안되지
마지막 역과 차량기지를 지나
열차와 함께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
나아가야지 거기까지 우리는
꿈을 꿔야지 함께 가야지 우리는 우리는
나아가야지 거기까지 우리는 우리는
꿈을 꿔야지 함께 가야지 우리는 우리는 }}}


4.5. 비둘기의 꿈 (경음악)[편집]



  • 위의 비둘기의 꿈을 하모니카로 편곡한 연주곡이다.


4.6. 사람들[편집]



  • 현 세태[6]와 당시 운동권 인사들의 근황을 담담하게 읊은 곡. 문승현, 천상병, 박노해 등 그들의 실명을 가사에 넣은것이 특징이다. 중간에 노찾사도 언급된다.
사람들
{{{#000000 문승현[7]이는 쏘련으로 가고
거리에는 황사만이
그가 떠난 서울 하늘 가득 뿌옇게 뿌옇게
음 흙바람
내 책상머리 스피커 위엔
고아 하나 울고 있고
그의 머리 위론 구름 조각만 파랗게 파랗게
그 앞에 촛대 하나
김용태[8] 씨는 처가엘 가고
백 선생은 궁금해하시고
개 한 마리 잡아 부른다더니
소식 없네 허 참
"사실은 제주도 강요배 전시장엘 갔다나 봐요"
인사동 찻집 귀천에는
주인 천상병 씨가 나와있고
"나 먼저 왔다 나 먼저 왔다
나 먼저 커피 줘라 나 먼저 커피 줘라
저 손님보다 내가 먼저 왔다 나 먼저 줘라 나 먼저 줘라"
민방위 훈련의 초빙 강사
아주 유익한 말씀도 해주시고
민방위 대원 아저씨들 킬킬대고 박수 치고
구청 직원 왈 "반응이 좋으시군요 또 모셔야겠군요"
백태웅[9]이도 잡혀가고
박노해 김진주[10]
철창 속에 사람들 철창 밖에 사람들
우 사람들
작년엔 만 삼천여 명이 교통사고로 죽고
이천삼백여 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죽고
천이백여 명의 농민이 농약 뿌리다 죽고
또 몇백 명의 당신네 아이들이 공부 공부에 치여 스스로 목숨을 끊고
죽고 죽고 죽고 지금도 계속 죽어가고
압구정동에는 화사한 꽃이 피고
저 죽은 이들의 얼굴에 꽃이 피고
그 꽃을 따먹는 사람들 입술 붉은 사람들
음 사람들
노찾사 노래 공연장엔
희망의 아침이 불려지고
비좁은 객석의 꽉 찬 관객들 너무나도 심각하고
아무도 아무 말도[11]
문승현이는 쏘련에 도착하고
문대현[12]이는 퇴근하고
미국의 폭동도 잦아들고 잠실 야구장도 쾌청하고
프로야구를 보는 사람들 테레비를 보는 사람들
음 사람들 음 사람들 음 사람들 음 사람들
음 사람들 음 사람들 }}}


4.7. LA 스케치[편집]



  • 로스앤젤레스 빈민층과 부유층을 대비시켜 미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조명한 곡으로, 가사를 보면 알겠지만 LA 폭동에 영감을 받아 [13] 미국 나아가 한국인의 인종 차별을 비판하고 있다. 꽹과리, 징, 장구 등 국악기가 주로 쓰인게 특징.
LA 스케치
{{{#000000 해는 기울고 한낮 더위도 식어
아드모어 공원 주차장 벤치에는 시카노들이 둘러앉아 카드를 돌리고
그 어느 건물보다도 높은 가로수
빗자루 나무 꼭대기 잎사귀에 석양이 걸릴 때
길 옆 담벼락 그늘에 기대어 졸던 노랑머리의 실업자들이
구부정하게 일어나 동냥 그릇을 흔들어댄다
커다란 콜라 종이컵 안엔 몇 개의 쿼터 다임 니켈
남쪽 빈민가 흑인촌 담벼락마다 온통 크고 작은 알파벳 낙서들
아직 따가운 저녁 햇살과 검은 노인들 고요한 침묵만이
음 프리웨이 잡초 비탈에도 시원한 물줄기의 스프링클러
물젖은 엉겅퀴 기다란 줄기 캠리 차창 밖으로 스쳐가고
은밀한 비벌리힐스 오르는 길목 티끌, 먼지 하나 없는 로데오 거리
투명한 쇼윈도 안엔 자본보다도 권위적인 아 첨단의 패션
LA 인터내셔널 에어포트 나오다 원유 퍼 올리는 두레박들을 봤지
붉은 산등성이 여기저기 이리 끄덕 저리 끄덕 노을빛 함께 퍼올리는 철골들
어둠 깃들어 텅 빈 다운타운 커다란 박스들과 후진 텐트와 노숙자들
길 가 건물 아래 줄줄이 자리 펴고 누워 빌딩 사이 초저녁 별을 기다리고
그림 같은 교외 주택가 언덕 길가 창문마다 아늑한 불빛
인적 없는 초저녁 뽀얀 가로등 그 너머로 초승달이 먼저 뜬다
마켓 앞에서 식수를 받는 사람들 리쿼에서 개피 담배를 사는 사람들
버거킹에서 늦은 저녁을 먹는 사람들 아 아메리카 사람들
캘리포니아의 밤은 깊어가고 불 밝은 이층 한국 기원 코리아 타운
웨스트 에잇스 스트리트 코메리칸 오피스 주차장 긴 철문이 잠길 때
길 건너 초라한 아파트 어느 골목에서 LA 한밤의 정적을 깬다
"백인들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미국에서 백인들을 잘 못 보겠어"
한국 관광객 질겁에 간 떨어지는 총소리 따당 따당땅 따당땅 }}}


4.8. 나 살던 고향[편집]



  • 시인 곽재구의 시 "유곡나루[14]"를 가사에 활용하였으며, 전체적으로 엔카와 국악을 섞은 듯한 곡이다. 마지막의 "나니나니나~"는 정태춘이 자체 검열을 한 번 거친 버전이고, 원래 가사는 "좆돼부렀네~" 였다고 한다. 라이브에서 제대로 부른 적이 한 번 있다고 한다.
나 살던 고향
{{{#000000 육만 엥이란다
후꾸오카에서 비행기 타고
전세 버스 부산 거쳐 순천 거쳐
섬진강 물 맑은 유곡 나루
아이스박스 들고 허리 차는 고무장화 신고
은어 잡이 나온 일본 관광객들
삼박사일 풀코스에
육만 엥이란다
초가지붕 우로
피어오르는 아침 햇살
신선하게 터지는 박꽃 넝쿨 바라보며
리빠나 모노 데스네[A] 리빠나 모노 데스네[A]
깨스 불에 은어 소금구이
혓바닥 사리 살살 굴리면서
신칸센 왕복 기차 값이면
조선 관광 다 끝난단다 음 음
육만 엥이란다
초가 지붕 우로
피어오르는 아침 햇살
신선하게 터지는 박꽃 넝쿨 바라보며
리빠나 모노 데스네[A] 리빠나 모노 데스네[A]
낚싯대 접고 고무 장화 벗고
순천의 특급호텔 사우나에 몸 풀면
긴 밤 내내 미끈한 풋가시내들
서비스 한번 볼만 한데 음 음
환갑내기 일본 관광객들
식사 대접받고 그저 아이스박스 가득 가득
등살 푸른 섬진강 그 맑은 몸 값이
육만 엥이란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나니나니나 }}}


4.9. 92년 장마, 종로에서[편집]



  • 앨범의 타이틀 곡이자 정태춘의 대표곡 중 하나이다. 지금은 장마가 서울을 적시고 있다는 가사로 어두운 현실을 표현하고 있지만 동시에 언젠가는 그 장마도 그치고 비둘기가 다시 날아오를 것이라는 희망을 담고 있는 곡이다.
92년 장마, 종로에서
{{{#000000 모두 우산을 쓰고 횡단보도를 지나는 사람들
탑골공원 담장 기와도 흠씬 젖고
고가 차도에 매달린 신호등 위에 비둘기 한 마리
건너 빌딩의 웬디스 햄버거 간판을 읽고 있지
비는 내리고
장마비 구름이 서울 하늘 위에
높은 빌딩 유리창에
신호등에 멈춰 서는 시민들 우산 위에
맑은 날 손수건을 팔던 노점상 좌판 위에
그렇게 서울은 장마권에 들고
다시는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
비에 젖은 이 거리 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간다
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뿐이냐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
워 워우워 워 워우워
저기 우산 속으로 사라져 가는구나
입술 굳게 다물고 그렇게 흘러가는구나 음
비가 개이면
서쪽 하늘부터 구름이 벗어지고
파란 하늘이 열리면
저 남산 타워 쯤에선 뭐든 다 보일 게야
저 구로 공단과 봉천동 북편 산동네 길도
아니 삼각산과 그 아래 또 세종로 길도
다시는
다시는 시청 광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말자
물 대포에 쓰러지지도 말자
절망으로 무너진 가슴들 이제 다시 일어서고 있구나
보라 저 비둘기들 문득 큰 박수 소리로
후여 깃을 치며 다시 날아오른다 하늘 높이
훠이 훠이 훨 훠이 훠이 훨
빨간 신호등에 멈춰 섰는 사람들 이마 위로
무심한 눈빛 활짝 열리는 여기 서울 하늘 위로
한 무리 비둘기들 문득 큰 박수 소리로
후여 깃을 치며 다시 날아오른다 하늘 높이
훠이 훠이 훨 훠이 훠이 훨
훠이 훠이 훨 훠이 훠이 훨
훨 훨 }}}
[1] 이 부분은 '92년 장마, 종로에서'에서 "다시는 시청광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말자, 물대포에 쓰러지지도 말자"로 묘사된다.[2] 정태춘은 전작에 수록된 곡인 '아, 대한민국...'에서 '하루 아침에 위대한 배신의 칼을 휘두르는 저 민주인사와 함께' 라는 구절을 넣어서 대놓고 김영삼을 깠다.[3] 방영 당시 정태춘 외에 김순규 문화체육부 예술진흥국장, 김동호 공연윤리위원회 위원장, 정지영 영화감독, 동아일보 논설위원 등이 출연했다.[4] 유희열의 스케치북의 선조격 프로그램.[5] 헌법 제37조 2항도 국민의 기본권 보장에 대한 유보를 언급하고 있다.[6] 후반부에 읇조리는 사망자 통계의 나열이 이걸 대신한다.[7] 민중가요 그 날이 오면, 사계의 작곡가.[8]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장.[9]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을 준비하고 운영했었다. 현 하와이 대학교 로스쿨 교수.[10] 박노해의 아내.[11] 노찾사의 '희망의 아침'이 잠시 샘플링된다.[12] 민중가요 광야에서의 작곡가. 문승현의 동생이다.[13] 실제로 정태춘은 미국을 방문하기도 했다고 한다.[14] 밑의 가사를 잘 보면 알겠지만, 일본인들의 매춘관광과 그런 일본인들에게 매춘을 하는 한국인 모두를 비판한 시이다.[A] A B C D 立派な物ですね。 "좋은 것이군요" 정도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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