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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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한국적 포크를 노래한 음유시인
Mnet 레전드 아티스트 100에서의 소개문구
모든 것을 떠나 과거 이름만을 먹고살지 않고 지속적으로 신보를 내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는 국보급 포크 뮤지션이다. 우리한테 정태춘과 같은 '레알' 음악가가 있다는 것은 실로 행운이요, 축복이다.
ㅡ임진모
가장 한국적인 보컬 아티스트로 대한민국의 원로 가수이자 사회 운동가, 싱어송라이터. 시인. 가요계를 논할 때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 원로가수 중 한 명이다.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인 가요계의 거물. 조용필과 같은 올드 가수들과 더불어 지금도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가수 중 하나이자[1] , 사전심의 폐지운동을 주도하여 승리를 이끌어낸[2] , 한국 가요계에서 음악의 사회참여적 측면에서는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한 인물. 또한 음악적 측면에서도 예전의 뭇 가수들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한국적인 멋이 듬뿍 들어간 노래와 서정적인 가사가 일품인 노래를 통해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노래를 만들었다. 지금도 정태춘을 '정태춘 선생님’,
배우자는 박은옥(1957년생)으로, 이쪽도 가수이자 사회 운동가로 불교 신자다.
'뮤지션 그리고 투사' 정태춘
2. 생애 및 디스코그래피[편집]
2.1. 출생 및 성장기[편집]
1954년 3월, 경기도 평택에서 평범한 농사꾼의 5남 3녀 중 하나로 태어났다. 포털사이트의 인물정보를 포함한 각종 공식 프로필에는 1954년 10월 10일생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당대 흔했던 늦은 출생신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출생하여 자랐던 평택의 도두리(棹頭里)는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에 위치한 곳으로 이 마을 사람들이 주로 왕래하던 장은 충청남도 아산시(당시 아산군) 둔포(屯浦)면에 위치한 장이었다고 한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의 성장기를 모두 이곳에서 보냈으므로, 이 성장기의 환경은 이후 그의 정서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3]
평범한 시골의 가정이었지만, 악기를 접하고 취미로 삼을 수 있을 정도였던 것으로 보아 아주 빈농의 가정형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생활에서 음악을 접하게 된 것은 국민학교 5학년 때로, 미군부대를 다니던 큰매형이 가지고 온 기타 때문이었다고 한다. 무료한 농촌 생활이니만큰 그와 그의 셋째 형은 틈만 나면 이 기타를 붙잡고 놀았는데, 얼마나 가지고 놀았으면 한 번 들은 노래의 멜로디를 기타로 연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는 상태로 긴 시간 동안 많은 빈도로 악기를 가지고 놀아본 이들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코드나 주법의 체계적인 방법은 모르지만, 어찌어찌하면 이러한 멜로디를 연주할 수 있다라는 걸 체득하는 건 불가능한 건 아니다. 이걸 가지고 천재적인 재능을 어렸을 때부터 지녔느니 하는 건 오버일 수도 있다. 심지어 모차르트마저 타고난 천재가 아니라 그 아버지의 강요로 인한 피나는 연습 끝에 체화된 음악적 능력에 기반한 음악가라고 할 수도 있다.
여하튼 이 기타로 인해 음악에 높은 관심을 가지게 되고, 평택중학교 때 바이올린을 본격적으로 배우게 된다. 악기와 본인의 궁합이 매우 좋았던 것으로 보여 평택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도 바이올린을 계속 하며 음대에 진학할 꿈을 가지게 된다. 판단할 요소가 많진 않지만, 당시 정태춘의 모습은 소박한 시골에서 바이올린을 사랑하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학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내성적인 소년이 맞이한 첫 번째 시련은 고등학교 2학년 시절 그가 바이올린을 배우고 연주할 수 있었던 학교의 현악반이 밴드부로 통합된 것이었다. 당연히 밴드부에서 현악기의 존재는 유명무실한 것으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고자 했던 그가 느꼈던 절망감은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인다. 고등학교 이후의 진로가 통째로 날아가버린 암담한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앞날이 불투명한 시골 청소년들의 루트인 무리지어 몰려 다니기, 흡연, 외박 등이었다. 비록 내성적인 바이올리니스트 희망 학생에서 시골의 불량 잉여로 전락해 버린 그였지만, 이 시기에도 버스에 낀 성에를 갖고 시를 지어 보일 만큼 감수성 하나만큼은 다른 잉여들과 다른 점이었다고 한다.
당연히 대학진학은 실패. 하지만 앞서 언급되었듯이 찢어지게 가난한 형편은 아니었고, 자식이 하고 싶은 일을 타의에 의해 좌절당해 방황하는 것을 보기 안스러웠는지 집안에서는 당시로서는 거금인 30만원 가량의 바이올린까지 사서 그를 셋째 형이 있는 서울로 그를 보내어 을지로 3가에 있었던 서울음대에 레슨까지 받게 하며 재수생활을 하게 한다. 하지만 당시 그의 정신적, 심리적 상황은 외모에 대한 자학적인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는데다가 잘 알지도 모르면서 헤르만 헤세와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를 탐독하고 죽음에 대해 항상 생각하면서 자신이 직접 제조한 독약을 항상 품에 품고 다니는 등 뒤늦게 찾아온 중2병(...)에 쩔어 있는 상태였다. 그는 입시 직전이던 1972년 10월 소위 10월 유신이 발표되자마자 재수생활을 때려치고 귀향하는데, 이는 딱히 확고한 정치적, 사회적 신념에 찬 결의였다기 보다는 자신과 세상에 대한 염세적 자세가 임계점을 넘나들던 가운데 발생한 사회적 이슈가 발화점이 된 것뿐이라고 할 수 있다.
가난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물심양면으로 신경써서 보냈던 어린 자식이 무작정 짐싸들고 집으로 돌아오니 집안에서 반겨줄 리가 만무한 상황에서 그는 몇 번씩이나 무작정 집을 나가 전국을 방황하거나 목욕탕의 화부[4] 로 일을 하는 등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는 고행을 한다. 다만, 이러한 경험은 당시에는 별다른 목적이 없는 그저 방황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 시기에 그에게 축적된 감수성, 혹은 내재적인 사고들은 그의 음악적 세계에 중요한 기반을 마련한 것으로 보여진다.[5]
그러던 도중 그는 입대를 하게 되고, 군생활 가운데 그의 초기작들을 작곡하게 된다. 어찌보면 외적인 방황이 제한된 군생활이 그에게는 오히려 내재된 정서를 정리하여 음악으로 표출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제대한 1978년 6월, 그는 이전부터 알고 지냈던 음악평론가 최경식[6] 의 소개로 서라벌 레코드와 인연을 맺어 군생활 동안 정리한 곡들을 처음으로 음반으로 만들어 발표하게 된다.
2.2. 데뷔 - 시인의 마을[편집]
나는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
상념 끊기지 않는
번민의 시인이라도 좋겠소
나는 일몰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고행의 방랑자처럼
하늘에 비낀 노을 바라보며
시인의 마을에 밤이 오는 소릴 들을 테요
ㅡ《시인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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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 1집, 시인의 마을
1집 타이틀 곡 '시인의 마을'
당시 여전히 대중문화 전체를 포크가 지배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발표된 그의 첫 번째 음반은 꽤나 좋은 평가를 받게 되었고, 경제적으로도 그에게 나름대로 여유를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 보면 뭔가 촌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당대의 포크송들이 대부분 미국의 번안곡들을 포함하여 서양 중심적인 형태를 보인 것에 비해 정태춘의 음악은 기타를 베이스로 하는 포크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한국적인 요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고 가사에서 나타나는 미학적인 수준도 꽤나 대중들의 공감을 사는 것이어서 나름대로 싹수가 보이는 대중가수로 평가받았다.[7] 이 시기 같은 서라벌 레코드 소속 가수였던 박은옥에게 첫눈에 반해 결혼까지 하게 되면서 적어도 외적으로는 가장 평온하고 행복한 시기를 보내게 된다. 1979년 MBC 신인가수상과 TBC 방송가요대상 작사 부문상까지 수상하면서 '연예인'으로서도 성공을 거둔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이 시기 그의 향후 행보를 결정하게 되는 두 가지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중 첫 번째가 바로 한국공연윤리위원회가 시행한 음반사전심의제도[8] 와의 만남이다. 그의 첫 번째 음반의 대표곡인 '시인의 마을'을 포함하여 몇몇 곡들은 공윤에 의해 가사 변경을 권고(라고 쓰고 변경하지 않으면 음반 발매가 안되니 '명령'이라고 읽는다.)받게 되고, 서라벌 레코드에 의해 가사를 수정하여 발표한다. 일례로 타이틀 곡 '시인의 마을'의 경우에는 가사 중 '나는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 대목이 '나는 자연의 친구 생명의 친구'로 강제로 엉뚱하게 바뀌었다. 이 일은 이제 갓 입봉한 신인 가수 입장에서 뭣도 모르니 시키는대로 하긴 했지만, 나름대로 깊은 내면의 고민 끝에 만든 자신의 곡이 타인의 의지에 의해서, 그것도 합당하지도 않은 의견과 더불어 수정을 강요당하는 경험은 그에게 또다른 고민을 안겨준 듯 하다.
또한 이 시기의 그는 예나 지금이나 신인 연예인이 거칠 수밖에 없는 방송국 출연을 통한 홍보에 나서게 되는데, 이것이 그에게는 지극히 고민을 가져다 주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트레이닝복을 입고 '명랑운동회'에 나가 뛰고 구르고 실에 매달린 과자를 따먹거나 밀가루 범벅에 얼굴을 파묻고 찹쌀떡을 먹어야 하는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당연히 이러한 고민이 그저 내면의 고민으로 끝나지는 않는 법, 그는 방송국 관계자들로부터 신인 주제에 건방지고 뻣뻣한 놈으로 인식되었고 자연스럽게 기피 대상이 된다.
2.3. 고난과 방황의 시기[편집]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두 번째 음반을 준비하게 되는데, 첫 음반의 성공을 지켜본 서라벌 레코드는 그에게 선곡의 권한을 준다. 하지만, 이것은 적어도 대중적 성공에 있어서는 패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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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 2집, 사랑과 인생과 영원의 시
정태춘의 2집은 음악적 수준 그 자체로는 실패작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대중적으로는 실패작이었다. '사망부가'나 '탁발승의 새벽노래' 등의 수록곡은 그가 가지고 있었던 정서적인 특색이 더욱 강조되고 깊이가 있는 것이었으나 대중적이지는 않았다. 더구나 방송국 관계자들에게는 뻣뻣하고 싸가지 없으며 어딘가 불순한 놈으로 인식된 상황에서 음반의 성공은 요원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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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 3집, 우네
2집의 실패에 이어 3집의 결과는 더욱 비참했고 시장에 음반이 제대로 깔리지도 못하게 된다. 3집의 노래들 역시 정태춘 특유의 정서는 더욱 강조되었고, 반주 중 상당수를 국악으로 하는 등 실험적인 요소도 많았던 음반이다. 하지만, 결과는 대 실패.[9] 연이은 음반의 실패로 말미암아 그는 경제적으로도 꽤나 궁지에 몰리게 된다. 저작권에 따른 수입 체계나 음반 유통의 정확한 통계에 따른 인세 개념이 희박했던 당시 대중음악인들의 수입 체계는 꽤나 허술해서, 레코드사에서 계약금조로 주는 돈에다가 월급조로 주어지는 생활비가 일종의 음반과 공연에 대한 정산이었던 셈인데, 이 시기 이러한 생활비 지급이 중단된다. 음반사의 경영난이라는 핑계가 따라왔지만 그야말로 핑계일 뿐, 누가 봐도 저조한 흥행에 대한 당연한 댓가였다.
1980년대 초반의 이 시기는 그의 음악활동 기간 중 가장 방황이 심했던 시기였다. 연이은 음반의 실패로 인한 경제적 곤궁함, 결혼을 하고 자녀까지 낳아 기르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생활에 대한 갈망과 동시에 '연예인'이 아닌 음악가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등으로 괴로운 나날을 보낸다. 이 때 손을 내민 것은 당시 메이저 레코드사 중 하나였던 지구레코드. 지구레코드가 제시한 조건은 4년 전속 계약으로 800만원이었다.
2.4. 복귀, 그리고 개안(開眼)의 시작[편집]
이 계약으로 인해 1984년 4번째 음반인 '떠나가는 배'가 발매된다. 이때부터 그의 음반은 정태춘이 아니라 '정태춘, 박은옥'의 부부 듀엣의 이름으로 발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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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 박은옥, 떠나가는 배
타이틀 곡 '떠나가는 배'
이 4번째 음반은 나름대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다. 비록 방송 출연 등의 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곤궁한 이전 시절의 경제적 고난은 겪지 않았어도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정확한 판매량 측정에 따른 인세 개념은 없었던 시기였지만 음반사로부터 계약금 외의 수입이 발생하여 가계에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1985년 연이어 발매된 '북한강에서' 역시 나름대로의 대중적 성공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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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 박은옥, 북한강에서
타이틀 곡 '북한강에서'
비록 대중음악인으로서,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회생했지만 그가 가졌던 고민과 의문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그의 내면에 남아있었다. 그는 이러한 고민과 의문을 풀어나가는 방향으로 전국적인 공연을 시작한다.
그의 전국 공연은 현재와 같은 소위 '콘서트'의 형태는 아니었다. 그는 대규모 공연 스탭과 물량을 동원할 수준의 가수는 아니었고, 1985년 1월 부산 카톨릭회관에서 시작되어 전국 방방곡곡으로 이어진 그의 공연은 대부분 소극장 내지 대학의 강당 수준에서 벌어지는 공연이었다. 다만, 이는 어떠한 지향점을 가졌던 것이라기 보다는 그저 현실적인 형편에 의한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소규모의 공연은 그에게 하나의 전환점을 가져다 준다. 사실 그는 상당히 애매한 수준의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의문과 고민을 가지고 젊은 시절의 방황에 가까운 형태로 공연을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아러한 소규모의 공연장에서 대중과 가깝게 접촉하면서 이전과 대비하여 비교적 체계적인 형태의 '개안(開眼)'을 한 것이다.
![파일:external/img.maniadb.com/100204_f_1.jpg](https://lh3.googleusercontent.com/-Ue5G9_wceyE/XDmgSngwBfI/AAAAAAAH_5g/XXWHH_nGvjQ4AzYlrLxaY4ggf5F8p_8kgCHMYCw/s0/b418257cf9af44523dc30f3109449d3bf8b98a7e.jpg)
정태춘, 박은옥 발췌곡집
1987년, 그동안의 노래들을 정리한 발췌곡집 음반을 낸 후 1988년 연이어 6집 음반이라고 할 수 있는 '무진 새노래'를 발표한다.
2.5. 새 노래를 들고 광야로[편집]
![파일:external/img.maniadb.com/100202_f_2.jpg](http://obj-sg.the1.wiki/d/01/8a/b77e44203fa64e69f125d35d23da75ebf5a067a996813c9d860647a195723c1f.jpg)
정태춘, 박은옥, 무진 새 노래
10번 트랙 '얘기2'
'무진 새 노래'에 실린 노래들은 공연을 통해서 실연된 노래들을 포함하고 있었고, 단순히 전통적 음악기법과 처연한 정서 중심이었던 기존 노래들과 달리 상대적으로 더 진지하고 구체적인 메시지들을 담고 있었다. 당연히 공윤과의 갈등은 더욱 깊어질 수 밖에 없었고 그는 이를 통해 무언가 구체적인 진로를 결정하게 된다. 사실, 이 음반은 당시 공윤의 기준으로는 발매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최고조에 달하던 시절이어서 가사 수정 명령에 그쳤다고 봐야 한다.[10]
그는 1988년 겨울, 청계피복노조 주최의 작은 집회에 참가하여 노래를 부른 것을 시작으로 크고 작은 집회와 대학가의 초대 손님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1988년 12월부터 '송아지 송아지 누렁송아지'라는 공연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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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지 송아지 누렁송아지'는 단편적인 노래가 아닌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주제를 가진 노래극 형태의 공연이었고, 당시 제도권 대중음악계에서는 시도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당대 사회적인 시류, 특히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중들의 정서와 맞아떨어졌다는 것이다. 비록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인생과 음악생활을 통해 지속적으로 견지해 온 그의 음악적 특성은 당시의 대학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재발견의 노력, 혹은 서구, 특히 미국 중심의 대중문화에 대한 반발적인 정서와 적절하게 들어맞았다.
![파일:external/www.izm.co.kr/13021719.jpg](http://obj-sg.the1.wiki/d/f4/26/72db533b03d1d70729492fa199c1f0fa9efb71b4674385651f40cba050751db3.jpg)
당시 전국의 모든 대학에는 소위 '제국주의 문화'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운동권과 연계된 탈춤, 풍물 동아리, 전통문화연구 동아리 등이 존재했었고 이들이 대학을 다니는 20대 초중반의 청년문화의 핵심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국을 돌며 벌어지는 정태춘의 공연은 입소문을 타고 온 대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다만, 정태춘의 입장에서 이러한 현상은 오히려 그들에 의해 자신이 눈을 뜨게 되는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음반을 발표하고 방송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만 대중을 만났던 그에게 젊은 대중들과 만나면서 그들이 이야기하는 세상의 이야기, 탁치니 억하고 죽은 이에 대한 이야기와 공연장 밖에서 날마다 휘날리는 매캐한 최루탄 냄새의 구체적인 이유 등을 듣게 되는 기회였던 셈이다. 1989년 4월까지 이어진 이 공연을 통해 그는 비로소 그의 음악적 지향점의 기초를 완성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진정한 노래를 위하여 공윤과의 힘겨운 싸움에 나서게 되는데...
2.6. 아, 대한민국... 그리고 검열과의 전쟁[편집]
![파일:external/deecompany.cafe24.com/1045651_500.jpg](http://obj-sg.the1.wiki/d/67/f0/f169918a3f820040b574815070f032c24453e89f44eba96a911e563113db9fe7.jpg)
[11]
정태춘, 아, 대한민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