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 일본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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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반도 일본어(半島日本語; Peninsular Japonic)설이란, 과거에 한반도에서 일본어족 계통의 언어가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학설을 의미한다. 일본어족은 현대 일본어 및 방언과 고일본어는 물론 류큐어 까지 포괄하는 어족으로, 반도 일본어설을 연구한 대표적인 학자는 알렉산더 보빈이 있다. 그는 대표 논문 「고구려에서 탐라까지(From Koguryŏ to Tamna)」에서 반도 일본어설을 제시했다. 번역
본 가설은 탄탄한 근거와 이론으로 무장하고 있기에 국내외 많은 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지만, 간접적인 근거를 이용한 추측과 재구 외에는 직접적인 물증, 즉 1차 사료가 없기에 아직 가설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20년경부터 한국 인터넷 커뮤니티에 널리 퍼져서 마치 정설인 것처럼 알려지기도 했지만, 상술했다시피 아직 가설 단계이다.
2. 구성[편집]
반도 일본어설이 주장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고대 한반도 중남부에는 일본어족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 중 일부가 일본 열도로 이주한 집단이 야요이인이고, 이들이 일본 열도에서 야요이 문명을 시작하고 일본 열도에 고일본어(Old Japanese)를 퍼뜨렸다. 한편 일본 열도로 이주하지 않고 한반도에 남아 있던 일본어족 집단은 만주에서 남하한 한국어족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에 밀려, 결국 한반도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한국어족 계통의 언어로 동화·대체되었다는 것이다.
이 가설을 연구한 알렉산더 보빈은 고조선에서 한국어족 계통의 언어를 사용했고, 한반도 남부의 진국에서는 일본어족 계통의 언어를 사용했다고 추정했다. 이후 고조선의 준왕 집단이 진국의 영역으로 남하하여 건마국을 세워 마한 지역의 초대 맹주가 되고, 마찬가지로 고조선계가 세운 목지국이 건마국 다음 마한의 맹주가 되면서 마한 지역은 한반도 남부에서 가장 먼저 한화(韓化)되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마한의 한화는 마찬가지로 한국어족을 사용한 고구려계 유이민이 세운 백제에서 지속되었다는 주장이다. 보빈은 물론 백제에서도 일본어와 연관이 있는 어휘가 일부 발견되었으나, 초기 진한보다는 훨씬 적음을 확인했으며, 이는 마한 지역이 훨씬 먼저 한화되었다는 증거로 해석했다.
반면 마한과 언어 및 풍습이 달랐다는 변한/가야와 진한의 토착 언어는 일본어족 계통이었으나[3] , 변한과 진한의 소국 중에서도 고조선계 유이민들이 세운 구야국과 사로국의 언어는 한국어족으로 보았다. 이러한 구야국과 사로국이 각각 변한과 진한의 맹주가 되면서 이 두 지역도 차츰 한화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변한/가야의 소국들이 멸망하고 사로국이 신라가 되어 진한 및 변한 지역을 장악하면서 한반도에서 일본어족은 7세기 이후에 사멸되어 기층 언어로만 남았다는 주장이다. 또한 당시 제주도 지역에 있던 국가인 주호국/탐라국에서 사용되었던 탐라어를 일본어족이라고 추측했다.
이 가설은 한국 신화인 단군 신화와 연결되는 부분이 있고, 언어학적으로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유사한 언어(고대 한국어)를 사용했다는 기록에 대해 '삼국사기' 권34, 권37이나 '양서 백제전'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한반도 중남부의 지명 등 고유명사가 한국어보다는 고대 일본어와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을 주된 근거로 든다.
만약 해당 가설이 사실이라면, 당시 한반도에서 쓰였던 반도 일본어는 상대 일본어와 매우 유사할 것으로 추측된다.
2.1. 지명사의 유사성[편집]
반도 일본어설의 근거로 거론되는 것은 대부분 일반 명사나 수사, 지명이나 인명 등의 고유명사이다. 특히 역사학자 및 언어학자들은 경덕왕의 한화 정책 이전에 사용되었던 한반도 남부의 옛 지명들이 한국어보다는 일본어와 유사하다는 것을 강력한 근거로 들고 있다. 찬성론에서는 지명은 웬만해서는 바뀌지 않기에[4] , 경덕왕이 바꾸기 전의 지명은 반도 일본어족이 지은 것이기에 일본어와 유사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化昌縣本知乃彌知縣景徳王改名
화창현은 본래 지내미지(tinəmiti)현이었는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西畿停本豆良彌知停景徳王改名
서기정은 본래 두량미지(turamiti)정이었는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單密縣本武冬彌知一云曷冬彌知景徳王改名
단밀현은 본래 무동미지(mutuŋ miti) 혹은 갈동미지(katuŋ miti)였는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道安縣本刀良縣景徳王改名
도안현은 본래 도량(tora)현이었는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위 기록들은 전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신라의 옛 지명들 중 일부이다. 경덕왕의 한화 정책 이전 본래 지명인 tinəmiti, turamiti, mutuŋ miti/katuŋ miti, tora는 한국어 지명이라고는 보기에는 어색하지만, 알렉산더 보빈은 이 지명들을 일본어로 쉽게 분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 먼저 tinəmiti의 경우, 고대 일본어 속격 조사 -nö [nə], 고대 서부 일본어에서 길이라는 뜻의 mîti로부터 ti-nö mîti를 얻을 수 있다. 고대 서부 일본어 ti는 '피, 우유, 아버지, 힘'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며, 보빈은 tinəmiti의 의미는 고대 일본어로 '강한/견고한 길'라는 의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A]
- turamiti의 경우, 고대 서부 일본어에서 tura는 앞, 얼굴이라는 의미이며, mîti는 상술했듯이 길'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turamiti의 의미는 고대 일본어로 앞길에 있는 정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고 추측했다.[A]
- mutuŋ miti의 경우, 상술했듯이 miti는 고대 서부 일본어로 길이라는 뜻이다. 또한 고대 서부 일본어는 음절말 자음이 없었음을 염두에 두면, mutuŋ은 고대 서부 일본어 mutu '친밀한, 가까운'과 비교해볼 수 있다. 따라서 mutuŋ miti는 은밀한 길이라고 해석할 수 있으며, 경덕왕이 지은 단밀(단지 은밀함)에도 일부 보존되어 있다고 추측했다. mutuŋ miti의 또다른 이름인 katuŋ miti의 경우, 고대 서부 일본어로 합치다라는 뜻의 kate-와[5] 길을 의미하는 mîti로 번역할 수 있으며, 합쳐지는 길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A]
- tora의 경우, 고대 서부 일본어로 호랑이라는 뜻의 tôra로 쉽게 번역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A]
진한과 신라 외에도 변한 및 가야계의 몇몇 소국들의 이름을 예시로 들 수 있다. 이를테면 변한 및 가야의 소국 중에서는 미오야마(彌烏邪馬)와 사이기(斯二岐)라는 국가가 있다. 이 두 국가들의 국명은 한국어로 보기에는 상당히 낯설지만 일본어와는 괴리감이 없다는 점에서 근거로 쓰이고 있다. 특히 미오야마에서 일본어로 산을 뜻하는 야마(やま, 山)를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미오야마(미오산)라는 명칭을 일본 신화에 나오는 나라현에 위치한 미와야마(미와산)와 관련짓는 주장도 있다.[6]
다만 미오야마 국명 반도 일본어설에 대해서는 비판도 있다. 말 마(馬) 자는 주조마국처럼 다른 나라 이름에서도 이름 뒤에 붙는 사례가 있기 때문에 일종의 접미사로 보는 주장이다.[7] 미오야마국에서 마 자를 접미사로 보고 제외하면 미오야국이 되는데, 구야국이나 안야국에서 볼 수 있듯 삼국지 동이전에서 야(邪) 자로 끝나는 나라 이름은 여럿 존재한다. 그리고 만약 말 마 자가 접미사라면, '야마'를 세트로 묶어서 추정하는 것이 자동적으로 부정된다. 또한 미오야마라는 말에서 가야의 또 다른 명칭인 임나(미마나)가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에서 더 나아가 일각에서는 임나의 음운에 중점을 두어 미오야마라는 명칭은 미마야오(彌馬邪烏)나 미오마야(彌烏馬邪)를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알렉산더 보빈은 탐라의 이름 역시 고대 일본어로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탐라가 '타미(民 - 백성)'+'무라(村 - 마을)', 혹은 '타(田 - 밭)'+'무라(村 - 마을)'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즉 제주어가 탐라에 건너가기 전 제주도의 토착 국가로 추정되는 주호국의 토착어인 탐라어가 일본어족이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탐라에서 타가 타(田)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은 탐(耽)의 당시 한자음이 /*tom/이었음을 간과한 것으로서 신빙성이 떨어진다. 게다가 고대 일본에서는 '토라(度羅, トラ)'라는 명칭으로도 불려졌다는 상반되는 증거도 있다. 일본의 전통 궁중 음악 가가쿠(아악)의 탐라 음악도 이를 따라 '토라가쿠(度羅楽)'이다.
그러나 적어도 탐라의 뒷부분만큼은 보빈의 가설대로 반도 일본어족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수서》에서는 탐라를 탐모라(耽牟羅)라고 표기했는데, 여기서 모라(牟羅)라는 지명 요소는 《일본서기》[8] , 《양서》[9] , 〈울진 봉평리 신라비〉[10] 등 삼국시대의 각종 문헌에서 문증되며 《삼국지》[11] , 〈광개토대왕릉비〉[12] , 《삼국사기》[13] 에도 비슷한 단어가 등장한다. 학자들은 이 단어를 보통 일본어의 무라(むら)와 연관지어 마을이라고 해석하는 편이다. 다만 이 어휘가 차용된 방향성은 알 수 없다. 반도 일본어파의 잔재일 수도 있으나 반대로 고대 한국어 어휘가 일본조어로 넘어갔다가 되려 한국어족에서는 사라졌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 그리고 위키낱말사전에 따르면 한국어 '무리(중세 한국어: 물)'과 관련짓는 견해도 있다.# 참고로 중세 한국어에서 '(/*mʌzʌlh/)'이었던 현대 한국어의 '마을'과는 별개의 어원을 가진다.
또한 모라(牟羅)와 모로(牟盧)는 산(山)을 뜻할 가능성도 있는데, 그 근거로는 《일본서기》에 구례모라성(久禮牟羅城)이 구례산(久禮山)이라고 표기되었다는 점, 모로비리국의 옛 땅이 신라에 편입된 후 고창군(高敞縣)이 되었다는 점,[14] 《용비어천가》에 피모로라는 산 이름이 나온 점 등이 있다. 그리고 고구려 지명 중 고구려어로 산을 뜻했던 달(達)이 들어간 경우가 많았듯이,[15] 산악지대가 많은 한반도 특성상 현대 대한민국이나 북한의 지명에도 山자가 들어간 곳은 매우 많다. 탐라가 위치했던 제주도야 한라산이라는 대표적인 산이 있다.
2.2. 고언어와의 비교 연구[편집]
알렉산더 보빈은 상술했듯이 진한과 변한/가야에서 쓰이던 언어를 일본어족으로 보았다. 현재 남아 있는 변한어 사료는 존재하지 않지만, 삼국지 위지 동이전과 후한서, 양서 등의 사서에는 진한어 자료가 일부 남아있다. 기록에 의하면 진한과 변한은 언어가 같다고 했으므로, 진한어가 일본어족임이 입증되면 자연스럽게 변한어 또한 일본어족이 된다.
2.2.1. 진한어[편집]
알렉산더 보빈은 초기 진한에서 쓰였던 언어를 일본어족에 속한 언어로 보았고, 북쪽에서 내려온 한국어족 계통의 집단이 사로국을 건국함에 따라 진한 지역이 한화(韓化)되었다고 주장했다. 즉 이 설에 따르면 초기 진한어는 일본어족이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국어족인 신라어로 언어가 대체되었다는 것이다.[16] 이에 대한 근거로 보빈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 후한서, 양서에 제시되어 있는 진한의 언어를 들었는데, 그는 남아 있는 진한어 텍스트가 한국어족과 일본어족이 혼재되어 있다면서, 이는 본래 일본어족 언어를 쓰던 진한 지역이 한화되는 과정, 즉 과도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중국 사서들에는 신라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진한은 중국 방면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라고 하고, 언어 관련해서도 중국과의 언어적 관련성을 구체적 사례를 들어가며 주로 설명하지, 일본어 계통과 관련 있다고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보빈도 이에 대해 중국 사서에 적힌 진한어들은 중국어처럼 보인다고 인정하면서도, 이러한 '중국어처럼 보이는' 진한어들을 제대로 재구하고 어원을 밝혀내면 한국어족과 일본어족이 혼재된 결과가 나온다고 주장한다. 다음은 실제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나온 진한어의 예시와 보빈의 분석이다.
東方人名我爲阿
동방 사람들은 나라는 말을 아(阿, *ʔa)라 한다.
名國爲邦
나라를 방(邦, *pæwŋ)이라 한다.
賊爲寇
도적을 구(寇, *kus)라 한다.
相呼爲徒
서로 부르는 것을 도(徒, *da)라 한다.
- 진한어로 나를 아(ʔa)라고 한다는 점에서, 1인칭 단수 대명사 *a(阿, 상고 한어 및 전기 중고 한어 *ʔa)를 얻을 수 있다. 보빈은 이를 중세 한국어에서의 1인칭 단수 대명사인 na와는 양립할 수 없다고 보아, 진한어의 1인칭 단수 대명사 아의 어원을 일본어족에서 찾았다. 일본조어에서 나를 의미하는 *a, 고대 서부 일본어의 a, 고대 동부 일본어의 a, 고대 류큐어의 a, 세소코어의 'a, 요나구니어의 'anu에서 볼 수 있듯 고대 일본어족에서 1인칭 단수 대명사는 '아'였다. 이로써 보빈은 진한 일본어 *a '나'를 재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B]
- 진한어로 나라를 방(*pæwŋ)이라고 한다는 점에서, 언어학자인 고노 로쿠로는 한고조 유방을 피휘했기 때문으로 보았다. 그러나 보빈은 고노의 주장이 틀렸다고 주장하고 邦(*pæwŋ)이라는 글자를 열도 일본어에서 기대되는 마지막 자음 탈락이 나타난 형태인 근처, 장소라는 뜻의 고대 서부 일본어 pê, '-의 쪽'이라는 뜻인 고대 동부 일본어 -N-pï와 비슷한 일본어 낱말을 적은 것으로 추측했다. 이와 동계어로는 '하늘 꼭대기(구름-쪽-꼭대기)'라는 뜻인 kumo-fe-tithe에서 나타나는 쪽이라는 뜻의 고대 류큐어 -fe가 있다고 보았다. 이 낱말이 때때로 류큐조어 *e를 보존하고 있는 고대 류큐어에서 문증되므로 확실히 동계어로 보았으나, 다른 류큐 방언에서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일본 본토로부터 차용된 말일 수도 있다고 보았다. 이로써 보빈은 진한 일본어 *pe(ŋ) '나라'를 재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B]
- 진한어로 도적을 구(寇, *kus)라고 한다는 점에서, 보빈은 賊과 寇의 대립에는 어떠한 개별 방언적·지리적 특성도 없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보빈은 *kus라는 진한어 낱말을 중국 사서에서 한자로 준훈차한 것으로 보았으며, 이에 대한 어원으로 중세 일본어로 무례한 부류, 범죄, 사기꾼, 불의를 의미하는 kuse에서 찾았다. 이를 통해 보빈은 진한 일본어 *kus '도적'을 재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B]
- 진한어로 서로를 '도(徒, *da)'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진한인들이 제자백가 사상에 심취해서 서로를 '제자님(徒)'이라고 불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 때문에 이는 2인칭 단수 대명사인 '너'를 음차한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중세 한국어 ne와는 전혀 맞지 않기에, 보빈은 '*da'의 어원을 일본어족에서 찾았다. 일본어족의 류큐어 분지에서 2인칭 단수 대명사 '너'는 하테루마어 daa, 요나구니어 Ndaa, 시토이어 daa로, 진한어에서의 2인칭 단수 대명사 *da와 매우 유사하다. 이 낱말은 류큐어에서도 널리 퍼지지 못했지만, 남류큐어와 북류큐어에서 모두 발견된다는 사실에서 보빈은 류큐조어에 이 날말이 존재했을 것이라 추측했다.[17] 하테루마어 daa, 요나구니어 Ndaa, 시토이어 daa에서 류큐조어의 2인칭 단수 대명사인 *Ndaa를 재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보빈은 선(先)비음화된 *Nd-를 한자로 적을 때 *d-로 전사한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라고 보았는데, 이는 3세기 중국어에는 선비음화 파열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보빈은 진한 일본어 *da '너'를 재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B]
상기된 예시 외에도 보빈이 같은 방식으로 진한어를 재구한 결과, 진한어 낱말에는 일본어와 한국어가 섞였다고 주장했다. 재구한 결과에 따르면 진한어에서 나타나는 일본어계 낱말은 인칭 대명사, 중요하지 않은 기초어휘, 문화어휘이고, 한국어계 낱말은 형태론적 표지 하나를 포함하여 중요하지 않은 기초어휘와 문화어휘이다.
어족을 구분하는 중요한 요소인 인칭대명사가 일본어족 계통으로 나타났다는 점을 들어, 보빈은 원래 진한 지역의 토착 언어는 일본어족이었으나, 한국어족이 침입해 일본어족과 한국어족이 혼재되어 쓰이던 시기의 언어가 바로 진한어이고, 이후 진한 지역을 완전히 정복한 신라에 의해 완벽하게 한화되었다고 주장했다.[B] 또한 마한의 왕이 진한까지 전부 지배하였다는 기록도 있기에, 보빈은 한국어족 사용자인 마한 지배자들이 진한 지역의 일본어족 사용자들을 동화시켜 한국어족의 영역으로 만들었다고 여겼다.
반면 보빈은 양서에 제시된 7세기 신라어 낱말을 분석해도 한국어족과 일본어족이 혼재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결과가 나오게 된 가능성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신라가 7세기까지 양층 언어 국가였다는 것과, 두 번째는 일본어족이 기층 언어가 되어 한국어족에 남았다는 것이다.
첫 번째 가능성과 관련하여 신라어를 반도 일본어와 연관짓는 주장도 간혹 나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지도자 칭호들이 반도 일본어족의 흔적이 있다고 보는 경우가 있다. 거서간, 이사금, 매금 같은 칭호조차도 일본어와 연관짓는 가설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신라인 혹은 백제인과 왜인이 말이 통하지 않는다거나 통역관[18] 이 필요하다는 문헌 근거가 굉장히 많이 남아있다.
현재 해석할 수 있는 신라어 텍스트로 향가가 전하는데, 향가를 해석한 결과 향가의 언어는 일본어족이 아닌 한국어족에 속했다. 신라가 양층 언어 국가였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최소한 신라의 주류 언어는 고대 한국어 계통일 가능성이 높고, 반도 일본어와 연관시키기는 어렵다. <일본서기1>, <일본서기2>,[19] <일본후기>, <입당구법순례행기1>, <입당구법순례행기2> 그렇기에 보빈은 두 번째 가능성에 더 주목하였다.[B]
다만 알렉산더 보빈은 적어도 7세기까지는 일본어족 계통 언어가 한반도 남부에서 쓰이고 있었다고 추측했는데, 경주지역은 이미 기원전 1세기 이후로는 재래의 검단리 문화가 소멸하고 와질토기 문화권으로 통합되었다는 사실[20] 과는 배치된다. 이후 성립된 사로국은 후대의 통일 신라까지 별다른 단절이나 변혁 없이 6부라는 지배층이 쭉 이어진 정치체임이 고고학적으로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렇기에 신라가 시대별로 언어가 어족 단위로 달라졌으리라 상정하기 어렵다. 또 마찬가지로 기원전 시기 경주 지역의 주민 계통이 비교적 중층적이라는 사실은 인정받지만, 기원후에 사로국-신라 사회는 와질토기 문화권으로 동질적인 물질문화를 이루고 양층언어 사회로 볼 만한 근거는 찾기 어렵다.[21]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면 가능성은 총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반도 일본어설이 참이라는 가정 하에, 사로국 권역을 제외한 나머지 진한의 지역에서는 여전히 반도 일본어가 쓰였지만, 사로국이 권역을 넓혀가면서 한국어족을 진한 지역에 보다 빨리 확산시켰다는 것이다. 즉 7세기 무렵부터 반도 일본어는 일부 시골의 장노년 계층에서만 간혹 쓰이는 언어로 전락했다는 가능성이다.[22] 두 번째는 반도 일본어설이 참이라는 가정 하에, 사로국 건국 시기쯤, 즉 보빈의 추측보다 훨씬 더 빨리 한반도 전역이 한국어족 사용 지역으로 모조리 동화되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반도 일본어설이 거짓이라는 가정 하에, 한반도에서 일본어족 계열의 언어는 쓰였던 적은 없으며, 한반도 전역이 원래부터 한국어족의 권역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위 세 가지는 전부 심증에 기반한 추측일 뿐이고, 자료가 부족하여 결정적인 물증은 존재하지 않는다.
2.2.2. 가야어(변한어)[편집]
기록에 따르면 진한과 변한은 언어, 의식주, 법속이 전부 같다고 한다. 만약 위의 초기 진한어가 일본어족 계열이라는 것이 확실시 된다면, 진한과 언어가 같다는 변한도 자연스럽게 일본어족이 된다.[23] 이에 따라 변한의 후신인 가야의 언어에도 자연스럽게 이목이 집중되었다. 대체로 반도 일본어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변한 대까지는 일본어족이 사용되었고, 이는 초기 가야 시절까지 이어지다가 중후기로 들어가면서 한화되었다고 본다. 진한어의 텍스트가 꽤 있는 것과는 달리, 이를 검증하기 위한 가야어 자료는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다음이 전부이다.
加羅語謂門為梁云
가야어에서는 '문(門)'을 '양(梁)'이라 이른다.
량>양은 한자음으로 읽은 것이고 실제 梁이 표기하는 발음은 '돌(twol)'인데 고일본어에서 문을 의미하는 '토(と; 戶)'와는 음운이 굉장히 유사하다. 이는 가야어-일본어 간의 관계를 추측하는 하나의 지표로서 여겨졌다. 하지만 울돌목, 돌쩌귀 등 순우리말에 문을 돌로 지칭하는 표현이 남아있는 것을 볼 때, 고한국어에서도 원래 돌이나 그 비슷한 발음으로 발음했으나 한자어 문으로 대체되었으며, 가야어가 한국어족 언어들 중에서 예외적으로 대체가 일어나지 않았거나 늦게 대체되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즉, 문을 의미하는 돌/토는 한국어족과 일본어족이 공유했던 어휘였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반면 석봉천자문에는 문의 순우리말을 '오래'라고 기술한 것으로 보아, 울돌목이나 돌쩌귀에서 문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돌은 단순히 가야어의 잔재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 기록을 보면 고대 일본어를 가야에서 사용된 고대한어(韓語)와 구분짓고, 가야어를 한어(韓語)라고 기록하는 등의 에피소드를 보면 당대에도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한 듯하다. 예를 들면 가야를 능욕하기 위해 작성된 기사로 보이는 가야의 지배층의 아녀자들이 임나일본부의 왜국측 인사들을 성적으로 유혹하기 위해 너의 뿌리를 나의 뿌리에 넣어라라고 발언한 기사가 있는데 거기서 임나일본부측 왜국 인사는 아녀자들이 하는 고대 가야어를 알아듣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반도일본어설은 엄격한 사료검증을 요한다. 예시
2.3. 고고학적 연구[편집]
반도 일본어설을 주장하는 언어학 연구자들은 이를 방증하는 여러가지 고고학적 증거들을 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고고학계의 해석은 다른 경우가 많고, 때로는 근래의 고고학계에서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낡은 학설에 근거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24] 물론 고고학적인 물질 문화 양상이 언어, 어족과 같은 관념 문화의 양상을 온전히 반영할 수는 없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언어학적 추론을 무시한 채 오로지 고고학적인 관점으로 해석한 내용을 토대로 반도 일본어 가설을 완전히 틀린 것으로 배척하기도 어렵다는 것은 분명히 인지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고고학적 관점 및 분석을 무시한 채 언어학적 추론만을 가지고 어족과 인간집단의 이동이라고 하는 거대한 역사적인 사건을 재구성하는 것 역시 어렵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현재 나타난 고고학적 자료들은 반도 일본어설만을 유일하게 옳은 언어학적 가설로 확증지을 만한 논거를 제시해주지 않으며, 동시에 반도 일본어설이 거짓임을 확증지을 만한 논거를 제시해주지 않는다. 즉 아래 문단에서 제시되어 있는 이러한 고고학적 자료들을 반도 일본어설을 입론 및 반론하는 근거로서 사용하는 것에는 부당한 측면이 존재한다. 이는 반도 일본어설을 입증 및 반론하기 위해서는 고고학계와 언어학계의 적극적인 상호 보완 연구가 필요함을 시사한다.
반도 일본어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 집단들이 반도 일본어를 사용한 집단이라고 본다. 이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학자로는 알렉산더 보빈과 존 휘트먼(John Whitman)이 있다. 휘트먼은 기원전 1,500년경, 요동반도에서 한반도로 논농사가 도입되면서 일본어족이 들어왔다고 본다. 이후 기원전 300년경, 연나라 장수 진개가 고조선을 침입하면서 수많은 유이민들이 발생하였고, 이들이 한반도로 이주하면서 한국어족이 들어왔다고 주장한다. 특히 일본어족의 경우 논농사를 기반으로 해서 한반도 남부지방으로 빠르게 확산되었고, 기원전 300년경 이들 집단이 일본 규슈 지방으로 이주하면서 일본 열도로 일본어족이 확산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반도 일본어의 경우 기원전 300년경에 유입된 한국어족으로 인해 점점 소멸되어갔다고 주장했다.
휘트먼은 이러한 원시 일본어족 문화의 지표 유물을 민무늬 토기로 보고 있다.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건너간 야요이인들의 문화는 대체로 송국리식 토기의 유적 문화와 일치하는데, 송국리식 토기는 이 민무늬 토기에서 발전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어족의 문화는 십이대영자 문화로 대표되는 이중구연토기, 점토대토기가 지배적으로, 민무늬 토기와는 뚜렷하게 구분된다.
실제로 송국리 문화를 영유하던 집단은 일부가 일본열도로 직접 이주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당시 한반도에 살던 주민이 일본 열도로 이주했다는 사실 자체는 유전학적으로도 증명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Cis-AB형의 존재가 있는데, 이 혈액형은 침미다례의 지역이었던 전라남도의 남쪽과 일부 변한 지역, 그리고 일본 규슈에서만 발견되는 희귀 혈액형이다. 침미다례의 고고학적 계통은 서해안 토돈분구묘 + 위만조선계의 예맥 + 송국리 문화 유형인 계열 세력의 융합인데, 이를 근거로 송국리 문화 유형인들의 Cis-AB형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라고 주장한다.
알렉산더 보빈은 상술했듯이 마한이 진한과 변한보다 일찍 한화되었다고 주장했는데, 이 또한 고고학적 증거가 존재한다. 보빈은 한국어족 집단들은 비파형 동검과 세형 동검으로 대표되는 북방 세력이라고 보았는데, 진국 지역 일대에서 세형 동검이 가장 먼저 등장한 지역은 준왕이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마한 건마국 부근, 즉 금강 유역이었다.# 즉 이는 준왕의 마한 정복 전승과도 통하지만 실제로 이는 서기전 300년경의 일로, 위만의 쿠데타보다 100년 정도 앞선다. 다만 기원전 300년은 상술했듯 고조선이 연나라에게 패하여 중심지가 심양에서 평양으로 이동한 시기와 일치하는데, 즉 기존 준왕의 전승보다 더 빨리 한국어족이 한반도에 유입되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고고학계에서는 앞서 제시된 휘트먼의 가설과는 달리, 기원전 5-4세기 이후 점토대토기문화의 확산을 단순한 이주나 주민교체설의 견지에서 설명하지 않는다. 고고학계는 이를 비교적 소규모의 이주민과 토착민 간의 활발한 교류 및 융화의 관점에서 설명하거나, 전기 청동기시대부터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온 요동지역 청동기 문화 네트워크 사이의 교류의 결과로 해석하고 있다.[25] 특히 알렉산더 보빈이 제시하는 '무기와 전술이 우월한 북방의 기마민족 내지 수렵민이 남방의 농경민족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지배했다'는 식의 자극적인 주장[26] 을 뒷받침할만한 증거는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상호 간의 호혜적인 교류 속에 점진적으로 통합되어갔음을 시사하고 있다.[27] 한편 강원 지역에서는 점토대토기 문화가 기원전 4세기부터 나타나기는 하지만, 이는 종래의 민무늬 토기와 병존하다가 새로운 철기문화로 모두 흡수되기 때문에 딱히 점토대토기 문화가 지배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말할 수도 없으며,[28] 이 지역에서 한국어족이 정착한 과정은 단순히 '점토대토기 문화 집단'의 이주 이외의 다른 부가적인 요인을 통해 해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상기한 논의는 민무늬 토기와 점토대토기와 같은 몇 가지 표지 유물만을 가지고 어족과 집단의 이주를 단순화해서 이해하는 반도 일본어 가설의 입장과, 새로운 문화의 출현을 이주 뿐만 아니라 교류 및 전파, 융합과 같은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하는 주류 고고학적인 견해들 사이에 적지 않은 간극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물론 물질 문화의 변화 양상을 통해 해석된 상기의 논의들이 관념 문화의 변화까지 온전히 포괄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것이 반도 일본어설이 거짓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극단적인 수준의 대규모 주민 교체는 없었을지언정 비교적 소규모 수준의 고조선 계통 주민들의 집단적 이주는 어느정도 존재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또 이들이 지역적인 교역망을 주도함에 따라 이들의 언어인 한국어족이 점차 지배적인 언어로 부상했을 가능성 역시 부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반도 중남부에서 청동기 시대 말기에서 원삼국 시대 사이에 어떤 집단이 대규모로 이동했다고 상정할 수 있을 만큼의 극적인 변화는 나타나지 않고 있는 이 무렵의 고고학 자료들을, 외래인의 대규모 이주로 말미암아 어족이 비교적 단시간에 극적으로 변했다는 반도 일본어 가설을 결정적으로 확증할만한 근거로 사용하기는 어려워보인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 당시 상황에 대한 고고학계의 주류 의견은, 반도 일본어설의 찬성론자들이 이 무렵의 일본어족 집단으로 가정하는 한반도 중남부 토착민들은 단순히 이러한 외래 문화를 일방적으로 수용하거나 이들에 흡수되는 입장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적극적으로 외래 문화를 수용하고, 다른 집단과 교섭하면서 토착문화와 외래문화가 융합된 새로운 문화를 창출시킨 주역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29] 즉 일본어족 토착민이 일부 기층 어휘만을 남기고 외래의 한국어족 집단에 일방적으로 흡수 및 소멸한 것으로 가정하는 반도 일본어설의 주장과는 다소 배치된다.[30][31][32]
이와 같은 고고자료의 양상은, 외래 한국어족에 의한 토착 일본어족 집단의 대체라고 하는 반도 일본어 가설에 부분적으로 개연성을 제공할 여지는 있으나, 이러한 자료를 반대되는 가설[33] 을 배척하는 논리로 이용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34] 또한 고고자료 상 점토대토기 문화 집단을 한국어족으로, 토착민을 일본어족으로 규정하는 논리는 고고학적 해석을 통해서는 도출하기 어려운 많은 비약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한편, 반도 일본어설을 지지하는 이들 중 일부는 '송국리문화가 한국어족 도래 이전에 이미 기후문제로 쇠락해 있었으며, 따라서 한국어족 계통 이주민들이 자연스럽게 토착 송국리문화를 대체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고고학계에서도 기원전 7-6세기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한 송국리문화가 기원전 6-5세기에 걸쳐 불상의 이유로 크게 쇠락했다는 사실 자체는 인정한다. 하지만 이는 송국리유적, 관창리유적, 진주 대평리 유적과 같은 그 당시 송국리 사회에서 각 지역별 최상위 취락의 역할을 담당했던 대형취락이 해체되거나 축소된 사실에 대한 담론일 뿐이다. 실상은 세형 동검계통 이주민들이 당시 사회를 주도했다고 보는 조진선조차도 변, 진한사회의 기층에 송국리문화와 검단리문화가 자리잡고 있음을 인정하며, 세형동검문화 계통의 취락은 극소수였으며, 이에 반해 다수의 송국리형-검단리유형 취락들이 기층에서 잔존해 있었다고 보고 이들의 흔적은 기원전 1세기 와질토기문화가 성립할 무렵까지 지속되었다고 본다.[35] 뿐만 아니라 2010년대 이후 대다수의 고고학자들 모두 점토대토기문화가 유입된 이후에도 송국리계통 취락이 잔존하고 있었다고 보며, 이미 앞서 언급했듯 순수한 점토대토기 취락은 거의 없고, 대신 소수의 점토대토기 계통 이주민과 다수의 송국리문화계통 주민들이 결합하여 양자의 문화가 혼합된 다수의 복합취락을 형성했다고 보고 있다. 다시말해 송국리문화는 기원전 6-5세기에 걸쳐 기후변화 및 점증하는 사회적 갈등으로 말미암아 상당부분 정치적 혼란을 겪은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갑작스레 해당 문화를 영위하던 주민들이 증발하거나 사라진 것이 아니며 그들의 인적, 문화적 요소는 후대 문화에도 지속적으로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36]
물론 2000년대 이전의 고고학계에서는 연나라 진개의 동정이나 준왕의 남정과 같은 문헌기록을 고고자료와 연결시키는 데에 과도하게 집착했던 나머지, 마치 송국리문화 자체가 기원전 대략 기원전 4세기 무렵의 거점취락의 해체와 동시에 사라지고, 세형동검을 공반한 점토대토기문화가 이를 대체했다는 단절론적 입장이 우세했던 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점토대토기단계 단절론/주민교체론'에 가까운 견해라 할 수 있으며, 세형 동검의 전래를 언어교체의 계기로 보는 휘트먼의 가설 역시 대체로 이에 근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이청규가 세형 동검과 점토대토기의 출현 연대를 서로 상이하게 보는 것을 시작으로[37] 이러한 단절론의 근거가 되는 문헌중심적 편년연대론이 공격받기 시작했으며, 2010년대 이후 이창희 등에 의해 문헌기록과 무관한 유물의 자체적인 새로운 편년안이 정립되면서[38] 고고학계에서는 '송국리문화가 이미 기원전 4세기 이전에도 점토대토기를 수용하고 있었으며, 한반도 중남부에서의 세형 동검의 유입은 점토대토기문화의 출현보다 늦다'는 입장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이미 송국리 사회는 최초의 점토대토기문화의 출현시점부터 적극적으로 이러한 외래 문화를 수용하고 이주민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매우 점진적으로 점토대토기와 세형동검과 같은 초기철기문화의 문화요소들이 성립하는 과정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며, 주민교체론과 같은 극단적인 단절론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또 앞서 언급했듯, 애당초 이러한 점토대토기문화 계통 이주민들의 취락이 취락이 매우 소수인데다가 소규모라는 점도 이러한 단절론을 배격하는 한 가지 근거가 되었다. 애당초 이들 이주민들의 취락은 매우 열세하여 입지상 충분한 가경지조차도 확보하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상황에서[39] 도대체 무슨 수로 이들 소수의 이주민들이 다수의 토착민들을 정복하고 지배할 수 있단 말인가?
뿐만 아니라 세형 동검과 점토대토기문화가 이주민에 의해 동시에 확산되었다고 보는 문헌중심적 연대관에는 또 하나의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이에 근거해서는 세형 동검이 부장된 분묘가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호서 및 호남서부지역에는 이 분묘들과 공반하는 생활유적 자체가 거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연대관에 근거하면 당시 세형동검집단을 점토대토기집단으로 보아야 하는데 정작 이 무렵 해당지역에서 순수한 점토대토기문화의 단일취락은 거의 없고, 그나마 송국리문화와 점토대토기가 모두 공반된 취락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반대로 동시기에 원형점토대토기문화의 단일 마을유적이 나타나는 곳은 송국리문화가 확산되지 않았거나, 중심지에서 크게 떨어져 있어서 송국리문화가 크게 우세하지 않은 지역들이 대부분인데, 오히려 해당 지역에서는 세형동검이 거의 출토되지 않는다. 결국 이에 따르면 송국리문화를 대체하고 들어섰다는 점토대토기문화 계통 이주민들은 호서 및 호남서부 지역에 다수의 분묘만 조영한 뒤 생활유적을 건설하지 않았으며, 정작 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한 것으로 알려진 지역에서는 세형동검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기이하고 모순된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그런데 반면에 해당 연대관에서 이전 시기에 이미 종말한 것으로 가정하는 송국리유형 취락들이 이 무렵까지 잔존하고 있다고 가정하면, 해당 분묘들이 자연스럽게 송국리유형 취락과 관계된 것으로 해명된다.
이는 구(舊)연대관에서 송국리문화가 점토대토기-세형동검 문화에 의해 일괄 대체되는 것으로 가정하여, 점토대토기가 공반되지 않는 순수한 송국리형 취락을 일괄적으로 기원전 4세기 이전으로 편년한 데에서 기인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김장석은 이러한 편년관에 반대하여, 적어도 호서지역 및 호남서부 일대에 한해서라도 송국리문화 종말기의 연대를 기원전 2세기 중후엽까지 내려 볼 것을 제안한다. 이에 따르면 송국리형 취락들은 호서 및 호남서부 지역에서 세형동검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기원전 4-3세기 무렵에 존속하고 있었으며, 해당 지역에서 분묘에 세형동검을 부장하던 영위하던 권력자들은 주로 송국리문화 계통의 취락들을 기층으로 거느리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김장석은 피난민에 불과한 점토대토기문화 계통의 유이민들이[40] 토착 송국리사회를 압도하고 재지 문화의 변화를 이끌어내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고있는데, 이들이 부분적으로 재지 송국리문화사회의 지배층에 편입되었을 수는 있을지라도, 세형동검을 수용한 것은 어디까지나 재지계통 지배층의 선택의 결과로 해석한다. 다시말해 세형동검의 유입은 어디까지나 재지 송국리문화 계통 주민들의 선택의 결과에 가까우며, 세형 동검의 유입으로 송국리문화가 종말한다는 것은 편년 오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41][42] 그렇다면 세형동검을 점토대토기문화와 결부시키고, 이를 외래의 한국어족의 유입 및 토착언어 대체의 근거로 보았던 휘트먼의 가설은 그 기초부터 무너지게 된다. 왜냐하면 상기 논의에 따르면 이러한 세형동검은 종래의 재지송국리문화집단과 훨씬 더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43][44]
비슷한 맥락에서 천선행 역시 원삼국시대 한(韓) 문화를 세형동검 및 점토대토기와 같은 외래계 문화로 정의하는 통설에 반대한다. 특히 근래에 들어 송국리문화 및 점토대토기문화의 접변 사례에 대한 보고가 늘어나고 있어 분구묘와 같이 과거에 송국리문화와 초기철기문화 간 단절이라고 생각했던 요소들이 실은 상당부분 연속적이고 점진적인 변화의 결과로 드러나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 문화를 재지 토착민과 단절된 문화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즉, 재지 문화는 상당부분 토착 묘제를 존속시키고 있는데다가, 새로운 문화요소에서조차도 토기 제작기법 등 재래의 기술이 계승되는 측면이 강했기 때문에 토착민의 문화가 외래문화와 공존, 화합하면서 지속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세형동검의 확산 이후에도 송국리문화, 점토대토기문화는 기원후 2세기까지 잔존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천선행의 경우에는 문헌기록 상 준왕의 남래 자체는 사실로 인정하지만, 이를 문화적인 단절의 계기로 보지는 않는다. 문헌기록에 따르면 마치 준왕을 중심으로 한 단일 집단이 도래, 확산하여 한(韓) 사회를 건설한 것처럼 묘사하나, 실제의 당시의 각 지역별 고고자료는 지역별로 상당히 이질적인 측면이 강하므로 문헌기록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고 한다. 요컨대, 삼한사회나 진(辰)이라 범칭되는 집단은 실상 선주문화 및 외래문화의 수용양상 등의 측면에서 상당히 지역성이 강했고, 따라서 물질문화도 상당히 이질적이므로 마치 어떤 단일집단이 확산한 결과로서 이해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문헌기록에 과도하게 집착하여, 삼한 문화의 한 구성요소에 불과한 '세형동검'을 마치 단일한 집단의 표지유물처럼 활용한 기존 학계의 관행은 잘못되었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그러므로 세형동검과 같은 외래 문화요소에만 매몰될 것이 아니라, 토착문화가 이러한 외래문화를 수용하여 생겨난 중층적 구조로서 삼한사회를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45][46][47]
결국 이러한 근래의 고고학계의 논의들을 살펴보면, 송국리문화는 최상위취락의 해체 및 와해 현상으로 쇠락을 겪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상당수 송국리유형 취락들은 길게는 기원전 1세기까지 혹은 그 이후까지 별다른 외부문화의 유입없이 존속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일부 지배계층의 취락들의 경우 순차적으로 점토대토기나 세형 동검을 수용한다던가, 새로운 묘제양식을 받아들인다던가 하는 식으로 문화적인 변화를 겪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지배층의 경관적, 위세품적 요소를 제외하면 정작 주거나 실용기, 생활패턴과 같이 실생활에 보다 더 밀접한 요소들은 재지의 양식이 그대로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고 할 수 있다.[48][49]
이처럼 청동기시대에서 초기 철기시대, 그리고 원삼국시대로 물질문화가 변화하는 과정은 다양한 계통의 외래문화의 지속적인 유입으로 말미암아 점진적으로 변화한 것이지 특정한 주민집단의 대규모 이주로 말미암은 단절론적 획기에 의해 변화한 것이 아님이 고고자료가 축적될수록 보다 더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근래에 들어서는 그러한 변화 과정의 연속적인 측면 역시 보다 더 세밀하게 재구성되고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문화 접변이 무력 정복을 통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볼만한 근거도 그다지 찾기 어렵고, 오히려 토착사회가 적극적으로 외래 물질문화를 수용하는 양상으로 볼 때 그럴 가능성은 상당히 낮다. 오히려 일부의 새로운 묘제형식이 추가된다던가, 세형 동검이나 일부 토기제작양식이 외부에서 유입된 데에 반해, 생계경제 양상이나 수단, 생활주거 양식 등은 거의 변하지 않고 재래의 요소가 연속적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과연 세형동검이나 점토대토기와 같은 새로운 문화요소를 주민교체나 언어 교체의 계기로 지목해야만 하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지에 대해 반문해볼 수밖에 없다. 청동기시대-삼한시대의 물질문화변화 양상은 한 때 학계에서 특정한 문헌기록에 과도하게 주목하여 단절론적 견해가 유행했었다는 것 이외에는 별달리 특별할 것이 없다.[50] 외래에서의 새로운 문화요소의 유입이나 소규모 이주민이 있었을 가능성 자체를 특별히 전면적인 언어교체의 계기로 볼 근거는 없기 때문에, 앞선 단락에서 언급된 휘트먼의 가설은 고고학적으로는 전혀 증명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 한편, 반도 일본어족 가설의 주장대로라면, 당시 중국 동북지역 및 한반도 중, 북부에 있던 수렵민 성향이 강한 '한국어족' 계통의 주민집단과, 한반도 중남부 농경민들을 중심으로 한 '일본어족' 계통의 주민집단이 적어도 특정 시점에는 서로 어족 수준의 언어의 차이가 분명히 나타날만큼 이질적인 집단으로서 병존해야만 한다.[51] 물론 물질 문화의 양상이 언어, 어족과 같은 관념문화를 온전히 반영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고고학적 사료를 통해서는 물질 문화 집단을 확연하게 두 개의 이질적인 집단으로 구별할 만한 실마리는 그다지 나타나 있지 않다.
예를 들면 기원전후부터 다양한 문화권이 병존하는 요서-요동-서북한-압록강-두만강 유역의 광대한 영역의 문화집단들은 이들을 단일한 '북방세력' 내지 '북방문화'로 단순화할 수 있을만큼 동질적이지도 않았다. 예컨대 부여계 문화를 대표하는 서단산문화나 고구려 계통 문화도 유사한 점이 있으면서도 묘제나 여타 문화요소가 분명히 차이가 나며, 이들은 다시 원삼국 시대 이후 강원지역의 예계 문화권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와도 상당한 차이점을 보인다. 흔히 후대의 문헌기록을 과도하게 소급 적용하여 이들을 '예맥계 종족'이라고 단순화하는 경향도 분명히 학계에 존재하기는 하지만, 실상 이들은 삼국시대 이전에 어떤 통일된 종족집단이나 물질문화를 이루고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52] 또한 북방 문화는 반대로 한반도 중남부의 청동기 문화 집단과 아주 격절적으로 문화적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이들은 같은 요령식 비파형 동검 문화권에 속해 오히려 긴밀히 교류하는 관계였다는 점도 분명히 주지해야 한다. 오히려 송국리 문화가 확산된 한반도 중서부 일대는 해로를 통해 서북한 및 요동집단과 밀접하게 교류했던 경향 역시 존재한다.[53][54]
한편, 청동기 시대 조기부터 철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중남부는 이미 이러한 다양한 계통의 북방 문화의 영향을 받고 수용하는 위치에 있었으며, 이러한 영향으로 청동기 시대 조기-전기부터 다양한 문화 조합상이 한반도 중남부에 나타났다.[55] 이후 청동기 시대 중기 혹은 후기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문화권이 생업양상별로 통합되어, 대략 울산-경기 중부를 가르는 축선으로 송국리 문화권과 비송국리 문화권이 구별될만큼 한반도 민무늬 토기 문화권도 역시 그다지 동질적이지 않았다.[56] 물론 이들 역시 서로 간의 무조건적인 긴장관계만 있었던 것은 아니며, 경주, 부산 등 동남부 일대에는 이들 사이의 점이지대가 비교적 광범위하게 나타나기도 했다.
특히 야요이 문화의 초기 기원 중 하나로 지목되는 곳이 이 지역으로, 송국리 문화를 일부 수용했으나 청동기시대 전기 이래의 잔존 요소가 상당히 강하게 남아 있었다. 초기 야요이 유적에서도 마찬가지로 송국리 문화에서는 이미 소멸된 각목돌대문토기나 공렬문토기 등이 나타나고 있어 전형적인 송국리 문화의 양상과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57] 사실 송국리 문화는 야요이 문화와 상당한 접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들 양자를 완전히 동일시하기는 어렵고 기존에 존재하던 송국리 문화와 조몬 문화가 상당한 변형 및 융합을 거쳐[58] 형성된 제 3의 문화로서 야요이문화가 탄생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59][60] 혈연적 공통성과는 전혀 무관하게 문화요소의 공통점만을 가지고 송국리 문화로서 한반도 중남부 제집단이 범칭되고 있기는 하나[61] , 단순히 이에 근거하여 한반도 중서부의 전형적인 송국리 문화 집단과, 상당히 많은 문화적 변형을 거쳐 형성된 일본 규슈의 야요이 문화 집단을 혈연적으로 동일한 계통의 집단으로만 해석할 수 있을지는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일 수 있다.
대개 반도 일본어 가설에서는 반도 일본어족을 주로 농경민인 송국리 문화와 동일시하고, 이들 문화가 태백산맥을 경계로 비교적 수렵채집의 생계양식이 여전히 강하게 잔존하던 한반도 중동부, 중북부 일대로 전파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근거로 반도 일본어족과 한국어족이 서로 명확히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해당 지역의 고고학적 양상들은 이보다는 훨씬 복잡한 것으로, 강원 지역 및 울산 지역에서는 오히려 오랫동안 점토대토기보다는 민무늬토기가 우세한 반면에, 한반도 중서부 일대에 먼저 점토대토기와 세형 동검이 출현하며, 이들은 또한 반도 일본어 가설에서 한국어족의 기원지로 지목하는 요동지역과 긴밀한 교류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반도 일본어 가설에서 각 어족에 대한 지표들로 제시하는 민무늬 토기, 세형 동검, 농경 내지 수렵 채집이라는 생계경제 양상 등은 어떤 측면에서건 고고학적으로 서로 다른 두 집단으로 명확히 분리해서 해석할 수 있을만큼 일관적인 양상으로 확인되지는 않는다.[62][63]
위와 같은 기원전 시기 동북아시아 지역 문화유형의 복잡한 양상을 검토해보면 단순히 이 광범위한 지역에 거주하던 여러 제종족들을 거대한 두 개의 집단, 즉 한국어족 집단과 일본어족 집단으로 이분법적으로 구별할 수 있는지에 많은 의문부호가 달린다. 오히려 물질문화의 양상으로만 보자면 한국어족-일본어족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별법보다 훨씬 더 다양한 스펙트럼의 문화 양상이 존재하였으며, 이들은 서로 외떨어져 존재한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또 긴밀한 교류의 관계 속에 존재했다. 그렇다면 반도 일본어 가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렇듯 다양한 범주의 문화권을 어디에서부터 한국어족으로, 또 어디에서부터 일본어족으로 구획해야하는지, 또 그러한 구획에 어떤 정당한 근거가 있는지를 먼저 해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편, 앞선 문단에서는 탐라어가 일본어족과 연결될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으나, 오히려 탐라일대의 무문토기문화 계통 송국리문화의 이주는 소규모에 불과했고, 탐라 정치체의 형성과 함께 제주도에서 원형주거지가 대규모로 확산되는 것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자료들은 주로 기원전 4-2세기 경 원형점토대토기를 중심으로 한다.[64][65] 앞서 휘트먼의 가설에 따르면 세형동검 및 점토대토기를 한국어족의 표지유물로 간주했으므로, 이에 따르면 탐라어는 당연히 한국어족이 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제주도가 송국리 및 점토대토기문화의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일지라도, 제주도의 송국리문화가 기층문화라거나 점토대토기문화가 지배층이라는 시각은 물질자료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해석에 불과하며, 송국리문화 유입 이전 재지민의 잔존문화의 양상이 오히려 더 강하게 나타난다는 입장도 존재한다.[66] 이에 따르면 제주도의 토착 언어를 토대로 한반도 주류 언어가 어떤 언어인지를 추측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일 수 있다.[67]
만약 반도 일본어설 측에서 제주도 점토대토기문화는 송국리문화와 접변한 뒤 유입된 것이니 한국어족이 아니라는 논지로 이를 재반론하고자 한다면, 점토대토기의 확산을 토대로 한국어족의 확산에 대한 가설을 펴는 이들의 기본적인 대전제 자체가 성립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한반도에 확산된 점토대토기 문화가 다 이런 식으로 접변화한 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반도에는 순수한 '점토대토기 이주민'으로 볼 수 있을만한 취락이나 흔적 자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68] 제주도가 유독 문화적 보수성이 강해 일본어족이 많이 남았다는 논리로 땜빵을 하기에는 애당초 앞서 보았듯 제주도는 점토대토기 도래 이전에는 송국리문화 자체가 그다지 유행한 적조차도 없다. 그렇다면 보빈이 지적한 제주도의 일본어족의 흔적은 도대체 무엇일까? 만약 정말로 보빈의 주장대로 그것이 일본어족의 흔적이 맞다고 하더라도 이는 송국리문화와는 아무 상관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만 보더라도 송국리문화를 일본어족으로 가정하는 휘트먼이나 여타 반도 일본어설 측의 가설은 고고자료의 측면에서 볼 때 정합성이 완전히 결여돼 있다.
반도 일본어설이 엄밀히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이를 통해 고고자료를 일관되고 정합적인 방법으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반도 일본어설 측에서 제시하는 고고학적 증거들은 단편적인 지역 간 문화적 교류의 흔적들을 가지고 '이것이 바로 새로운 언어가 유입/교체된 증거이다'라면서 내세우는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나 현재 고고학에서는 단순히 문화의 전파, 파급, 수용을 특정 인류집단의 이동과 동일시해서 해석하지도 않고, 그러한 문화 전파는 많은 경우, 오히려 전면적인 주민교체를 통해 일어나지 않고 대부분 토착민이 스스로 외부 문화를 수용한 것으로 확인되기도 한다.[69] 만약 이주민에 의한 재지집단에 대한 정복과 지배가 확인되려면 역시 이와 관련한 고고자료가 검출되어야 하며, 이러한 문화 담당 주체가 바뀌었다고 할 때에도 이에 상응하는 전면적인 문화적인 단절이 확인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반도 초기철기시대는 세형동검이나 점토대토기와 같은 이질적인 외래 문화요소가 전면적으로 확산되는 시기이기는 했으나, 그 이외의 많은 문화요소들이 연속적, 계승적 측면에 있으며, 외래문화요소조차도 상당부분 토착화, 접변화한 뒤에 확산되었다. 이는 설령 이주민이 소규모로 존재하였어도, 해당 문화를 영위한 주체는 결국 토착민이었을 개연성을 높게 보여주는 증거의 일례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는 이주민에 의한 일방적인 언어 대체를 상정하는 것은 어렵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물질문화가 전파되고 수용되는 양상에 대해서도 고고학계에서는 이처럼 매우 복잡하고 심도깊은 논의를 진행한다. 물질문화는 한두 가지 요소만으로 그 본질이 온전히 해명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여러가지 속성들과, 다른 물질문화 사이의 상관관계 등이 모두 정합적으로 들어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외래 물질문화 요소가 한반도에 나타났다는 사실만을 들어서 주민교체나 대규모 이주민의 존재를 섣불리 상정하고, 이를 통해 반도 일본어설과 같은 언어학적 가설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된 것으로 보는 이들이 있는 것은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앞서의 논의를 종합하면, 청동기 시대부터 요동 지역과 한반도 중서부 일대가 교류망을 이루고 이주민이 일부 지속적으로 유입되었다는 사실, 야요이 문화가 부분적으로 한반도 이주민의 기여에 의해 성립되었다는 사실과 같은 몇 가지의 고고학적 증거만을 가지고서는 보빈류의 반도 일본어 가설에서 상정하는대로 반도 일본어족이 한국어족과 뚜렷이 구별되는 상태로 오랫동안 존재해왔고, 이들이 한반도 중남부 일대에 지배적이었다고 주장하는 극단적인 가설을 증명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설령 일본 야요이 문화의 기원이 한반도 주민의 이주로 인해 시작되었으며, 또 그들 이주민이 원래 한반도에서 사용하던 언어가 일본어족의 원류가 되는 언어였다고 할지라도, 그 언어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는지는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논증되기는 어렵다.
결론적으로, 청동기 시대부터 원삼국 시대까지의 고고학적 양상은 반도 일본어 가설에서 상정하는 바와 일부 부합하는 측면도 있으나[70] 차이점도 적지 않으며,[71] 따라서 고고학적 근거를 토대로 반도 일본어 가설을 논증하고자 할 때는 매우 조심스럽고 엄밀하게 고고자료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한국 고고학 연구자 중 정규 논문을 통해 반도 일본어 가설에 대해 평가한 연구자는 김장석과 박진호가 거의 유일하다. 그들은 반도 일본어 가설에서 상정하는 바와 달리 청동기 시대 전기 당시의 한반도의 물질 문화 양상은 비교적 동질적라고 보아 한국어족과 일본어족이 청동기 시대 전기 이전에 이미 분지되어 한반도 북부 및 중남부 일대에 한국어족과 일본어족이 서로 병존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보며[72][73] 또 한국어족이 세형 동검과 함께 확산되었다는 휘트먼의 주장에 대해서는 세형 동검 계통 이주민은 비교적 소수였을 것으로 보이므로 근거가 부족하다고 본다.[74][75] 김장석, 박진호는 이에 따라 벼농사 등 생계경제 수단의 확산과 함께 한국어족이나 일본어족이 한반도나 일본열도에서 제각기 확산되었다고 보는 농경-언어 확산 가설 이외에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한국어와 일본어의 기원 및 분화에 대해 추측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76]
한편, 이러한 김장석의 주장 역시 어느정도 유전학적 연구결과에 부합하는 측면이 있어보인다.
UNIST 생명공학과 박종화 교수팀에 의해 진행된 한국인의 기원에 대한 게놈분석 연구에 따르면, 한국인의 게놈은 8천년 전(기원전 6000년 경) 악마문 동굴에서 나타나는 북아시아 신석기인(선남방계)과 3500년 전(기원전 1500년 경) 동남아 철기시대 밧콤노우 고대인(후남방계)의 게놈을 융합한 결과로 잘 설명된다고 한다.[77] 이 때 악마문동굴의 북아시아 신석기인 역시 동남아에서 기원하여 이미 오래 전에 북아시아에 광범위하게 확산된 '선남방계'이며, 아직 이들에게는 남중국계통의 청동기-신석기인들인 '후남방계' 혈통의 영향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이 당시에는 후남방계 집단이 아직 한반도에 도래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78] 그러다가 대략 5-4000년 전(기원전 3~2000년 경) 무렵, 중국 남부에서 유래한 '후남방계'가 한반도, 북중국, 동남아 등 다양한 방향으로 확산되었고 그 중 한반도 방면으로 확산된 집단이 선남방계와 결합하여 현재의 한국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 남중국에서 벼농사가 시작되었음을 고려하면,[79] 이들 후남방계의 확산은 일반적으로 도작농경의 확산과 거의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보이는데,[80] 이는 한반도에 도작농경이 유입된 청동기시대 전기에 전면적인 고고자료의 변화가 나타난다고 주장한 김장석의 입장과 일치한다.[81] 그리고 후남방계의 도래 이후로는 별다른 대규모 유전적 변화는 검출되지 않으므로, 설령 대규모 인구 이동이 있었더라도 또다른 이질적인 인류집단의 유입을 상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반면에 휘트먼의 '세형동검-언어 확산설'은 도작농경의 전래 이후에도 이들 도작농경민과 어족 수준에서 다른 언어를 사용할만큼 이질적인 집단이 유입되었다고 보는데, 이러한 '세형동검-언어 확산설'에 비판적인 김장석의 견해는 상기한 유전학적 연구결과와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82][83][84]
앞서도 언급했듯, 고고학이 다루는 영역은 물질문화 및 이와 관련해서 제한적으로 추론되는 관념상이기 때문에 온전한 관념의 영역인 언어의 교체의 문제에 대해서 명확한 해답을 내려주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고고학자들은 이러한 언어 교체의 문제에 대해 매우 조심스러운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반면에 언어학계에서는 특정한 유물을 함부로 이주민 확산의 표지로 선정하는 식으로 고고학적 연구를 오용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반도 일본어설 측이나 트랜스유라시아어족 가설 측 모두 이들이 상당부분 잘못된 맥락에서 인용된 고고학적 증거들을 자신들의 이론을 입증하는 대전제로서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비록 언어학자는 아니지만 트랜스유라시아어족 가설을 지지하는 일본 고고학자인 K MIyamoto가, 김장석이 '세형동검-언어 확산설'을 반대하자 세형동검이 아닌 '원형점토대토기'를 이를 대신하는 이주민 확산의 표지유물로 삼는 것이 이러한 한 예다.[85][86]
그러나 김장석은 원형점토대토기집단이든 세형동검집단이든 이들이 재래 사회를 해체하고 이를 대체했다고 보지 않는다.[87] 그는 재지 송국리계통의 수장층이 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을 차례로 수용하여, 대민지배를 위한 이념조작에 이를 사용하다가, 철기가 도입된 이후 이념조작 대신 무력을 통한 직접적인 대민지배전략으로 선회함에 따라 기층 취락을 스스로 재편한 것으로 보았다.[88] 이는 원래 무문토기를 사용하던 재지수장층이 정치적 필요에 따라 비파형동검, 세형동검 그리고 철기를 순차적으로 수용한 것이라는 논리이며, 원형점토대토기 집단의 이주가 기존 사회를 와해시키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요컨대, 최소한 김장석의 논의를 바탕으로 점토대토기 이주설-언어교체설을 입론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언어학 가설들이 이렇듯 오용된 고고학적 증거들을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한 주요한 근거로 삼고 있는 이상, 고고학이 제시하는 이 당시 물질자료에 대한 자체적인 해석안들은 상기한 언어학적 가설을 검증하는 데에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89]
2.3.1. 삼국시대 한반도 남부의 왜계 묘제가 반도 일본어족 집단의 증거?[편집]
한편, 언어학 유튜버인 향문천은 그의 저서에서 삼국시대 마한과 갸야의 지배층이 일본-류큐어족 화자 집단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왜계 양식인 전방후원분이 전남과 경남 지역에서 발견되는 것을 그 근거로 제시했다.[90]
하지만 이는 고고학적으로 전혀 성립할 수 없는 주장이다. 이러한 왜계 고분은 주로 기원후 5-6세기에 갑작스럽게 등장했다가 사라질 뿐, 현지의 토착묘제와 명확히 계통적으로 차이가 나는 외래계 문화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왜계 석실을 연구한 김준식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전방후원분을 포함하여 한반도 남부지역에 분포하는 왜계석실의 출현배경과 피장자 출신에 관해서는 아직도 연구자마다 견해 차이가 뚜렷하다. 그러나 왜계석실의 구조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확인된 백제와 가야 횡혈식석실과는 확실히 다르고, 일본 규슈지역 횡혈식석실의 요소가 반영된 것에 대해서는 큰 이견이 없는 상황이다. 왜계석실의 계보는 용례의 차이는 있으나 크게 일본 규슈지역에서 직접 계보를 구할 수 있는 규슈계(또는 이식형), 재지 묘제와 왜계요소가 혼합된 창출계(또는 복합형)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규슈계 왜계석실의 경우 구체적으로 규슈 북부지역(福岡縣) 계통인지 아니면 중서부지역(有明海 沿岸-熊本縣, 佐賀縣, 長崎縣) 계통인지의 구분과 함께 각 계통에 따른 한반도 남부지역 내 분포현황 및 피장자의 활동방식의 차이점까지 주목한 사례도 있다.
- 김준식, 장고봉유형 사례로 본 창출계 왜계석실 유형설정의 재검토, 2021.
마찬가지로 최영주 역시 한반도 남부의 왜계 석실이 규슈에서 성립되어 한반도로 전파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한반도 남서부지역 횡혈식석실은 왜계로 크게 북부큐슈형과 히고형으로 분류된다. 각 형식의 석실들은 구조의 세부적인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큐슈계 석실이 일본열도와 한반도 서남해안 연안으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전파의 계기와 방법, 전파한 곳과 받아들인 집단의 정치·사회적 관계 등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지역별로 아주 다양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석실 구조의 차이는 재지의 공인들에 의해 석실들이 축조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 최영주, 韓半島南西部地域倭系 橫穴式石室의 特徵과 出現背景, 2010.
한편, 허진아-송원근은, 이 무렵 영산강 유역에는 토착 옹관고분을 위시한 다양한 계통의 묘제가 공존하고 있었던 사실을 지적한다.
당시 마한사회의 내부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기록이 전무하다보니 연구자들은 정치적 사건 위주의 단편적 기록에 의존하여 백제의 입장에서 마한의 소멸을 설명해 올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고고 자료의 활용에서도 녹록지 않은 상황에 직면해 있는데, 5-6세기 영산강 고분문화가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다는 것이다. 분구·전용옹관·다장 등 지역전통을 비롯해 백제·가야·일본 등 당대 주변지역의 고분문화가 모두 확인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연구자가 어떠한 요소에 더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상반되는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다.
- 허진아-송원근, 정치경제적 관점에서 본 5-6세기 영산강 고분사회의 구슬 교역·유통·소비, 2022.
이들은 또, 이러한 다양한 묘제가 백제와 재지세력을 둘러싼 다양한 역학관계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이때, 동시에 옹관고분이 해당 지역에서 재지세력의 전통문화임을 명시하고 있다.
백제 중앙은 영산강유역에 대해 국내 및 주변 정세에 따라 시기별(한성기-웅진기-사비기)로 다른 지배전략을 취하였다. 나주 오량동 토기요지에서 확인되는 풍납토성 출토 돌대완(뚝배기형 토기)이나 영암 옥야리 방대형 고분의 직구호 및 소호류 등 한성백제 기종은 백제 중앙이 한성기 후반부터 영산강 중핵지역과 교섭을 시도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정촌 1호 석실에서 알 수 있듯이, 웅진기 초중반(5세기말-6세기초) 백제는 영산강 상류권에 가까운 복암리 세력과 그 관계를 확대, 강화해 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동시에, 나주 반남면 일대에서는 U자형 옹관을 매장시설로 사용하는 고분 축조집단이 강력한 지역정치체로 성장한다. 백제는 이들과 금동신발·금동관 등 사여품을 매개로 정치적 관계를 맺어 재지세력 간 견제를 도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영암 태간리·광주 월계동·함평 신덕 등 외래 계통의 전방후원형(장고형) 고분이 이러한 중핵지역 공동체를 에워싸듯이 분포하고 있어, 옹관묘 전통의 재지세력이 영산강유역 전체를 정치적 영향력 아래 두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 허진아-송원근, 정치경제적 관점에서 본 5-6세기 영산강 고분사회의 구슬 교역·유통·소비, 2022.
마찬가지로 김낙중은 옹관고분이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표지 유물이라고 주장하면서, 대략 기원후 3세기 후반부터 이것이 해당지역의 중심적인 묘제로서 등장한다고 본다.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표지적 고고학 자료는 대형옹관을 매장주체로 한 고분이다. 영산강유역이 4세기 중엽 이후 백제에 복속되었을 것이라는 역사학계의 大勢論을 再檢討하도록 한 이 지역의 독특한 묘제이다 옹관고분에 대한 연구는 그동안 옹관 자체의 형태적 연구뿐만 아니라 분구 부장유물을 종합적으로 다루어 많은 진전을 보았다. (중략)
2세기 후반 이후 凡馬韓的으로 사용되던 대형 옹형토기는 백제가 우월적 정치체로서 성장에 따라 점차적으로 범위를 좁혀가며 용도가 바뀌는데 3세기 후반 이후 영산강유역에서 저분구묘의 중심 매장시설로 기능을 전용하면서 옹관고분이 등장하게 된다.
- 김낙중, 榮山江流域 甕棺古墳 發生 背景, 2004.
즉, 상기의 인용문을 종합하자면 전방후원형 고분(장고분)을 위시한 왜계 묘제는 결코 영산강 유역의 중심 묘제가 아니다. 3세기 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옹관고분이 오히려 전통적인 묘제인데, 5-6세기 규슈일대에서 유래한 왜계 묘제의 양식들이 영산강유역권에서 외래 묘제로서 나타나기 시작했다가, 이후 백제의 영역지배가 관철되면서 이들 다양한 묘제가 백제식 묘제로 통일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고고학계의 견해는 이러한 5-6세기 왜계 묘제의 등장을 영산강 유역과 규슈지역 간의 교류, 이주 내지 전파에서 찾아야하지, 결코 해당 지역에 기원전시기부터 잔존하던 '반도 일본어족 집단' 내지 '토착 왜 집단'의 존재를 암시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오해를 막기 위해 말하자면, 한반도 남부의 왜계 묘제가 명확히 외래계 문화라는 것이 임나일본부설을 방증하는 것은 아니다. 한성백제식 횡혈식 석실 양식이 규슈와 기나이 일대에서 유행했다고 해서 규슈와 기나이 일대가 백제에 복속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91] 마찬가지로 이렇듯 한성기 백제와 왜와의 밀접한 교류관계가 백제-왜 동계설을 입증할 증거가 되기도 어렵다. 정확히 똑같은 맥락으로 5-6세기에 이르러 영산강 유역의 고분축조 집단이 왜계 묘제를 수용하거나 일부 왜계 집단이 이주했다고 해서 이러한 교류관계를 근거로 원래 해당 지역이 친연성이 강했다거나, 동족이어서 교류관계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폭론 역시 아무 근거가 없다. 이들 지역의 토착문화가 계통상 뚜렷한 연관이 있다는 증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92]
흔히 영산강 유역에 전방후원형 고분과 같은 왜계 묘제가 유행하기는 하지만, 해당 지역에서 중심 고분은 어디까지나 송국리문화에까지 기원을 찾을 수 있는 대형 옹관고분이었고, 이 묘제는 6세기까지 연속하다가 백제의 직접통제 하에 들어섬에 따라 백제식 횡혈식 석실분으로 대체된다. 즉, 강력한 수장층 중 하나가 왜계 고분문화를 영위했던 것은 맞지만 이는 병존하던 여러 수장층 중 하나일 뿐, 이들 중 가장 강력한 고분문화는 대형 옹관고분이라는 토착 묘제였다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경남지역에 나타나는 왜계 고분은 그 흔적이 훨씬 더 희미하고 당연히 해당 지역에 기원전후부터 연속되는 토착 묘제는 각 지역마다 다 따로 있다.
또 5-6세기 영산강 유역의 왜계 묘제라 할지라도 대체로 왜계 양식 속에 토착 양식이 섞여 있거나, 변형되기가 일쑤여서, 이들 왜계 고분은 일부의 경우 실제로 왜인이 직접 이주한 결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토착민이 규슈일대의 왜계 묘제의 양식을 일부 수용함으로써 조영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93] 이 시기 영산강 세력과 규슈 왜 집단 사이의 긴밀한 교류 관계는 많은 연구자들이 한성백제의 멸망과 기나이 왜왕권의 쇠퇴 속에서 영산강 세력과 규슈 왜 집단이 비교적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상황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과정에서 규슈일대의 왜계 고분이 한반도로 수입되는가 하면, 한반도에서 새롭게 변형된 양식의 '창출형 왜계 고분'이 역으로 다시 규슈 일대에 나타나는 등 양자 상호 간 긴밀한 교류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94]
그러나 6세기 전엽에 이르러 영산강 세력은 백제의 확고한 지배영역으로 편입되고, 규슈 왜 역시 이와이의 난을 거쳐 독자성을 상실하면서 양자 사이의 긴밀한 교류관계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95]
물론 한반도 왜계 묘제의 모든 것이 이러한 교류관계를 통해 나타난 것은 아니고, 그 이외에도 백제계 왜인관료 혹은 백제가 왜에 요청한 왕실 호위집단처럼 다양한 경로로 말미암아 이러한 왜계 고분이 조영되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 왜계 고분은 단발적이고 소규모로 나타나는 것이 너무나 명확해서, 마치 왜가 해당 지역을 확고하게 영역지배를 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이나 혹은 해당 지역에 토착 왜 집단이 기원전시기부터 기원후시기까지 지속적으로 잔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반도일본어족 한반도 잔존설'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96]
야요이문화가 시작되는 기원전 8-7세기 경부터 삼국이 통일되는 기원후 676년에 이르기까지 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한반도와 왜 열도는 긴밀한 교류관계에 있었으며, 한반도의 묘제와 문물이 일본으로 건너가기도 하고, 혹은 반대로 일본의 묘제와 문물이 한반도로 유입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문화 양상이 서로 동질적이거나 동일한 변화양상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이렇게 서로 교류한 문물은 각지에서 토착화되고 변용되어 그 지역만의 특색을 강하게 띠었다. 그리고 각지에서 토착화한 문물이 다른 지역으로 다시 전파될 때, 그 문화의 계통, 기원을 추적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며, 역사시대 한반도에 나타나는 왜계자료도 대체로 기원지와 전파시기가 뚜렷이 규명돼 있다. 그러므로 한반도에 해당지역의 재지문화와 이질적인 왜계 문물이 갑자기 나타났을 때는 이러한 전파와 교류의 과정에서 유입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해당 지역에 '토착 왜 집단'이 이전부터 연속해서 잔존하고 있었다고 해석하는 것은 상당히 억지스러울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한반도에 나타나는 왜계 자료는 대체로 역사시대 이후 그 기원을 명확히 추적할 수 있는 교류의 산물일 뿐, 결코 '토착 왜 집단'인 반도 일본어족 집단이 역사시대 한반도 남부에 잔존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증거가 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기원후 한반도에 나타나고 있는 여러 왜계자료들을 단순히 일본 열도와 한반도 사이의 교류 관계 이외에 반도 일본어족 집단이 계속해서 잔존하고 있었다고 해석할만한 근거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2.4. 수사의 유사성[편집]
보다 이전에는 규슈대학 무라야마 시치로(村山七郎) 등이 수사의 유사성을 제기한 바 있다. 수사의 유사성은 동계어의 중요한 증거로서, 상당히 일찍 갈라진 인도유럽어에도 1, 2, 3과 같은 기본 수사는 상당히 비슷하다. 예를 들어 3을 가리키는 수사는 영어 Three, 프랑스어 Trois, 스페인어 Tres, 러시아어의 Три(Tri), 그리스어 τρία(Tria), 산스크리트어 Tri.가 있는 등. 고구려와 일본어의 수사가 유사하다는 주장은 국내에서도 《고종석의 문장》등 여러 언어, 문장학 교양서에서 인용되었다. 이후 크리스토퍼 벡위드 등이 주장한 부여어족 가설도 이러한 어휘 비교를 근거로 했었다.
위의 수사 비교는 모두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지명 이력을 근거로 했다. 《삼국사기》의 지명은 대개 한문을 훈과 음 양 쪽으로 읽던 시기의 것을 밝히고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지명의 고유명사에서 실질 형태소를 분리한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계통 연구에서 상당히 신뢰성 있는 것으로 꼽히며 실제 '물(勿)'이 '수(水)'와 통한다는 것[97] 이나 '달(達)'이 '산(山)'과 통한다는 것은 거의 자명한 사실이다. #
문제는 이를 근거로 분리된 수사 표본에 대한 신뢰성이다. 상기한 '물'과 '달' 같은 후보는 수많은 지명에서 사용되어 표본 신뢰성이 확실한 편이나, 재구된 수사의 경우 그 증거가 되는 표본이 굉장히 적다. 이 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숫자 '10'이 '덕'인 이유를 두고 삼국사기 지명 '십곡현(十谷縣)'을 다른 말로는 '덕돈홀(德頓忽)'로 불렀는데, '골 곡(谷)'자가 '조아릴 돈(頓)'과 통하므로 '열 십(十)'이 '큰 덕(德)'이라고 비정했다. 7의 '난은' 역시 '칠중현(七重縣)'을 '난은별(難隱別)'이라고도 불렀으므로 '일곱 칠(七)'이 '난은'이라는 주장이며, '오곡군(五谷郡)'은 '우차탄홀(于次呑忽)', '삼현현(三峴縣)'은 '밀파혜(密波兮)'라는 기록에서 각각 5, 3이 이츠츠(いつつ)와 밋츠(みっつ)와 관련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수사 3이라면 한반도 동남부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밀=推=密=三이라는 상관관계를 도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삼국사기》 지리지를 분석하면 '현풍(玄風)'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일대의 옛 행정구역이었다. 그러나 신라 때에는 '추량화현(推良火縣)' 또는 '삼량화현(三良火縣)'이라 하였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 '현효현(玄驍縣)'으로 고쳐서 화왕군(火旺郡: 창녕)에 속하게 하였다. 즉, 위의 표본대로 수사를 수집한다면, 벡위드나 이기문 등이 고구려-백제 계통에서 분리하는 신라어에서도 고구려어와 유사한 경향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다만, 초기 신라어가 일본어와 매우 가깝다고 추정한 보빈의 경우에는 이 지적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수사 '3'은 현재 '密 발음설'과 '悉(siet)/史(s^ïei) 발음설'로 나누어져 있어 지명만으로는 정확히 비정하기 어렵다. 후자는 다른 지명 기록에서 '실직군(悉直郡)', '사직(史直)'이 곧 '삼척군(三陟郡)'이 되었다는 것을 그 근거로 한다.
'5'의 경우에도 이를 '우차'로 인정하더라도 고일본어 '이투'와의 대응이 문제이다. 이를 현대음으로 생각하면 비슷하게 여겨질 지 모르나 고대음가로 생각하면 비슷하다고 하기 어렵다. 次의 성모는 清母[tsʰ]인데 이를 기준으로 할 경우 于次의 상고음은 [ɣiotsʰi]에 해당한다. 그러나 상대 일본어의 ツ는 당대에 [tu]로 발음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치경 파찰음은 대부분 サ행으로 옮겨졌다.[98] 때문에 정말로 于次와 연관을 가졌다면 ギュウシ~ウシ로 음사되었어야 합당하다. 즉, 현대음을 기준으로 하면 비슷할지 모르나 당대 음가를 생각하면 이 둘이 비슷하다는 것은 문제가 많다.
2017년에는 서울대 이승재 교수가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백제어 목간[99] 에서 수사를 분리하여 #, 숫자 '2'를 '의털읍(矣毛邑)', 숫자 '3'을 '새태읍(新台邑)', '5'를 '도스읍(刀士邑)', 7을 '일고읍(日古邑)', 8을 '옅털읍(今毛邑)'이라 재구하였는데, 여기서 재구된 음은 상술한 것과는 전혀 다르고 현대 한국어와 매우 비슷하다. 사실상 백제어는 한국어족에 속한다고 보고있다.
3. 고구려어(부여어족)와의 근연관계 논쟁[편집]
今言語服章略與高驪同, 行不張拱, 拜不申足則異
백제의 지금의 언어와 복장은 대략 고구려와 같은데, 다닐 때 두 손을 맞잡지 않고 절할 때 다리를 펴지 않는 점이 다르다.
- 『양서(梁書)』 동이열전(東夷列傳) 백제전(百濟傳)
其拜及行與高驪相類. 無文字, 刻木爲信語言待百濟而後通焉
'그들은 절하고 다니는 걸음걸이가 고려(고구려)와 비슷하다. 문자가 없어서 나무에다가 새겨서 이것을 가지고 남과의 약속을 했다. 말을 하는 데는 백제 사람을 중간에 놓아야만 했다.'
- 『양서(梁書)』 신라전(新羅傳)
우선 고구려어와 백제어, 신라어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는 근거는 없다. 양서(梁書)에 '백제는 고구려와 언어가 같다(今言語服章略與高驪同.)'고 서술되어 있고 '신라는 중국인과 말을 할 때 백제 사람을 중간에 놓아야만 했다(言語待百濟而後通焉)'고 되어 있어 삼국의 언어가 서로 유사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신라인은 백제인, 고구려인과 말이 통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신라-백제-고구려 삼국이 방언연속체로써 존재했다는 걸 보여주는 기록이다.[100] 백제의 경우 토착 세력인 피지배층과 고구려 유민 계통의 지배층이 서로 다른 언어를 썼다는 이중언어설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으나, 이 가설을 입증할 근거는 부족하다. 오늘날 들어서는 고구려의 변체한문(變體漢文) 문법 구조가 한국어의 문법적 요소와 비슷하다는 점이나 백제 목간에서 현대 한국어와 비슷한 형태의 수사가 확인됨으로써, 이들이 한국어족이었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등장하는 한반도 중남부의 옛 고구려 지명은 반드시 고구려어로 표기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기존 마한 토착 세력들이나 황해도~경기도 북부의 예맥족이 쓰던 지명을 그대로 답습했을 가능성이 높다. 후자라면 옛 고구려어는 일본어와 큰 관련이 없으나, 이 경우 고구려계 지배 세력이 도달하기 이전의 한반도 중남부에서 일본어와 비슷한 언어가 쓰이고 있었다는 학설과는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고구려어와 일본어 사이의 관계를 비교언어학적 관점에서 분석하기에도 사료가 매우 부족하며,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한들 이게 실제로 동계어라서 유사성을 가지는 건지, 단순히 차용한 건지 판단하는 것도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다. 오늘날 이에 대한 재구는 모두 삼국사기 지리지나 일본서기, 삼국지 등 중국 일부 사서에 등장하는 고유명사를 비교하는 정도에서 그치고 있다.
일본서기 비다쓰 덴노조의 기록을 참고하면, 고대 야마토 왕조는 백제와 언어가 통하지 않아 역관을 따로 두었고 백제의 언어를 '한(韓)어'라고 구분하여 자국의 언어와는 별개의 언어로 따로 구분했다. 고구려-백제어와 한어를 별개로 보는 이중언어설을 제외하면 이 기록은 일본어와 고대 한국어가 다른 계통이라는 근거가 된다. 반대로 고대 일본어는 고구려-백제어, 즉 '부여계 어족'과 완전히 다른 언어 계통이었지만 부여계 어족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아서 부여계 어족에 속하는 고구려어, 백제어와 서로 비슷해졌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 이런 현상을 언어동조대라고 한다.[101] 이에 대해서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있는 설은 없다.
고구려와 왜(倭) 사이에 서로 동류의식을 보인 적이 없다는 점이 확실하나 동류의식 자체는 언어계통의 논박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그 예로, 인도유럽어족은 까마득한 고대 시절부터 수많은 민족들이 썼지만 이들은 서로를 결코 동류로 여긴 적이 없었다.[102] 동류의식을 근거로 언어 간의 친연관계를 논한다면 오히려 이는 역설적으로 해당 언어의 화자인 문화 그룹이 충분히 분리되지 않아, 그 언어들이 속한 어족의 역사가 인도유럽어족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극도로 짧다는 증거가 된다. 따라서 고구려와 왜 사이에 동류의식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이 둘의 언어가 같은 어족이 아니었다는 근거로 제시할 수는 없다.
한편 고구려어를 일본어족으로 묶으려는 시도와는 별개로,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다른 세력으로는 중국 정부에 대한 충성도가 매우 높은 만주족 연구자들[103] 이 있으며 이들이 고구려어를 퉁구스어족으로 묶으려는 시도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퉁구스 계통의 언어와 고구려어가 다르다는 중국의 기록[104] , 고구려어와 연관된 백제어를 삼한어 계통으로 묶는 일본 기록마저 무시하는 것이다. 이는 기본적인 증거조차 무시하고 그저 만선사관 혹은 동북공정을 통해 한국을 만주 세력(고구려)에 종속된 국가로 폄하하거나 고구려를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목적이 숨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4. 오해[편집]
임나일본부설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학설이다. 해당 학설이 한일 양국 고대사와 연관될 여지가 있어 일부에서는 민감하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고대에 일본어 화자들이 한국어 화자에 밀려났다', '일본어가 한반도에서 유래되었다'는 내용만 따와 곡해하기도 한다.
오히려 임나일본부설을 정면에서 반박하는 학설로도 볼 수 있는데, 현대 일본인 즉 야마토 민족의 근원지는 한반도 중남부이며 이후에 일본 열도로 이주한 고대 일본계 종족인 야요이인[105] 의 후예가 오늘날 현대 일본인이라는 학설을 더욱 탄탄하게 뒷받침해 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임나일본부설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일본 열도에서 한반도를 침공, 지배한 것이 아니라 원래 한반도에 있었다가 일본 열도로 전해진 언어가 현대 일본어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이 본 학설의 올바른 해석이다.
한반도 중남부와 일본 열도에 동일한 어족이 존재하였다는 학설은 임나일본부설을 연상시킬 수 있으나, 해당 학설의 대표자인 알렉산더 보빈은 임나일본부설에 전혀 동의하지 않으며 논문을 읽어보면 오히려 임나일본부설과 배치되는 주장을 많이 하기 때문에 임나일본부설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학설이다. 기본적으로 반도 일본어설을 지지하는 학설들의 중론이 지적하는 한국어족 남하 시점은 한반도 국가 쪽이든 일본 열도 국가 쪽이든 부(府)니 뭐니 하는 그런 지배 기구를 논할 시기보다 한참 이전이다. 게다가 보빈은 일본의 역대 천황들 중 몇몇은 고대 한국어를 쓰던 한국계라는 주장도 한 적 있는 사람이다. 심지어 일본 극우 세력의 역사왜곡 단골 주제인 진구황후의 정체도 고대 일본을 다스리던 한국인 여왕이라고 하는 사람이니, 일본의 극우들이 보빈의 논문을 제대로 읽어봤다면 뒷목 잡고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다.
알렉산더 보빈은 한국어와 일본어 연구에서 가장 큰 난점으로 꼽은 부분으로 이런 식으로 민족주의적 요소를 집어넣으려는 것을 지목했다. 한반도 남부가 고 일본어권이라는 주장을 일본의 극우들이나 한국의 일뽕들이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우기거나, 반대로 한국의 극좌들이나 반일주의자들이 친일주의자의 날조라고 치부하는 것을 대단히 불쾌하게 여겼다. 마찬가지로 일본사의 초반부에 한국계 군주들이 통치한 시기가 있었다는 주장에 대해 한일 양국이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서도 맹렬한 비판을 가하였다. 한일 양국 모두 민족주의가 강한 탓에 자신들이 유리한 방향에서만 반도 일본어설을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보빈은 억울할 만한 것이 보빈의 가설이 설명한 과정은 언어 세계사적 관점으로는 아주 대단히 특수하다고 할 것도 없는 현상이다. 이와 비슷한 예로 켈트어군도 유럽 대륙에서 발생하고 브리튼제도를 걸쳐 아일랜드로 넘어가서 한동안 주류 어군으로 자리잡았지만 정작 대륙에서 켈트어군은 일찍이 소멸되었고, 도서지역 켈트어군(Insular Celtic)만 살아남아 그 명맥을 이어갔다. 자세한 건 켈트어파 참조. 쉽게 말하자면 일본어족도 켈트어파랑 비슷한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106] 프랑스도 옛날에 대륙 켈트어파에 속한 갈리아어를 썼었고 이제는 흡수소멸된 언어의 흔적이, 아직까지 규명된 바로는 반도 일본어족의 그 고대어가 현대 한국어에 미친 영향보다도 현대 프랑스어에 더 짙게 남아 있는데[107] 이것을 가지고 아일랜드가 프랑스를 정복했다거나 프랑스가 아일랜드에 우월하다거나 하는 주장을 펼치지 않는 것을 떠올려보자.
비교언어학이란, 여러 사료들을 바탕으로 언어의 역사와 진화 과정을 밝혀내는 과학의 한 분야인 만큼, 그 이론 자체는 민족주의적 요소가 전혀 없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옛날에 자기네 언어의 조상 언어를 구사하던 사람들이 살던 땅이라는 사실이 그 후손으로 하여금 다시 그 땅을 회복해야 할 정당한 이유가 되지는 않으며, 오히려 이는 자연주의의 오류에 해당한다.
학설을 불쾌하게 여기는 부분은 일본 우익들에게서도 관찰되는데, 반도 일본어설을 두고 자신들의 조상들이 '남진하는 한국인의 직계 조상들에게 축출당해 일본으로 밀려났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며 유쾌하지 못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반도 일본어설 관련 언어학 유튜브 채널들을 보면, 하플로그룹까지 운운하며 한반도와 엮지 말라고 비분강개하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반면에 해당 내용에서 한국어에 반도 일본어의 잔재만을 강조하여 한국어의 기원에 일본어가 개입했다는 식으로 짜깁기를 하기도 한다.
다만 한일 학계에서 반도 일본어설이 폭넓게 수용되지 못하는 것이, 기성 학계가 이를 정치적인 문제로 불쾌하게 여기거나 민감하게 여겨서는 전혀 아니다. 애당초 일본 고고학계에서는 최소 전후무렵부터, 한국에서도 비슷한 시기부터 이미 오랫동안 고고유물을 통한 주민교체설이 폭넓게 논의되었으며[108] 일본의 주민들이 한반도에서 나왔다는 야요이문화 한반도 기원론도 이미 오래전부터 널리 논의되고 퍼져 있던 이야기지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새로울 것 없는 주민교체론, 이주설에 대해서 한일학계가 정치적으로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보빈의 주장은 상당부분 설득력이 떨어진다.[109]
반도 일본어설과는 달리, 한반도의 송국리문화가 일본 야요이문화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 자체는, 한일학계를 통틀어 최소한 90년대부터 지금까지 압도적인 주류 정설이며, 이 과정에서 한일 학계 어디에서도 이에 대한 강렬한 저항이 있었던 적은 없다. 다시 말해 단순히 한반도 주민들이 일본으로 이주했다는 사실이나, 일본인의 형성에 고대 한반도인이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어떤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것이 아니다. 야요이문화에 대한 송국리문화 기원설과 달리 반도 일본어설이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것은, 애당초 그러한 이주 이후에 또 한 차례 더 한반도 주민들이 전면적으로 대체되었다고 볼만한 학술적인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본래 일본으로의 대륙계 고고자료의 전파 과정에서 한반도는 당연하게 기장 중요한 유입 경로로서 전제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반도로부터의 대규모 주민집단의 이주는 일본 고고학계에서 문화기원을 설명하는 전형적인 이해의 틀이었다. 이 때 이러한 유물상의 교체를 전면적인 주민교체와 연결짓는 시각은 '과정고고학'이 널리 수용된 이후의 비교적 근래의 고고학이 아니라, 그 이전의 고전적인 고고학 담론에서 오히려 활발히 유행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단순한 해석에 근거해서는 고고자료에 나타나는 재지문화의 계승성과 연속성을 충분히 반영하지도 못하는 데다가, 이러한 해석이 여타의 고고자료 및 형질인류학, 분자인류학과 같은 다른 종류의 자료와도 그다지 부합하지 않는 측면이 많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는 이러한 전면적인 주민교체설은 상당부분 해체되거나 축소, 후퇴되는 측면이 강한 것이다.[110]
그러므로 만약 알렉산더 보빈과 반도 일본어설 측이 한일학계에서 자신의 주장이 널리 받아들여지지 못한다고 느꼈다면, 이는 한일 고고학계에서 딱히 새로울 게 없는 '이주론' '주민교체론'에 대한 정치적인 반감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미 한일 고고학계와 인류학계에서는 너무 진부해서 수없이 비판받아 현재는 잘 언급되지도 않는 고전적인 이론의 재탕에 가깝다고 여겼기 때문에 외면받는다고 하는 것이 좀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실제로 알렉산더 보빈은 주로 '기마민족 남하설/기마민족 정복왕조설'과 같은, 전후 일본에서 에가미 나미오 등이 제시한 낡은 이론에 근거하여 처음 반도 일본어설을 정립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학설은 한국 학계에서는 제대로 통용된 적도 없는 데다가, 근래에 들어서는 일본 학계에서도 딱히 널리 받아들여지는 학설이 아니다. 이처럼 기원후에야 기마민족이 남하하면서 한국어족이 한반도에 전래된 것이라는 가설이 비판 받자, 휘트먼이 이를 땜빵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기원전시기 세형동검집단 남하론, 이것이 다시 비판받자 또 새롭게 나온 것이 점토대토기집단 남하론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이론들은 애당초 한국 고고학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수반되지 않은 단편적인 접근에 불과하기 때문에 한국학계에서는 딱히 반향을 일으킬 여지가 없었다. 즉, 애당초 보빈이나 휘트먼 등이 제시한 논거가 고고학적으로는 대개 새로울 것이 없는 논거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이에 대한 반도 일본어설 측의 해석은 이미 수많은 토의와 논박을 거쳐서 현재 한일 주류학계에서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낡은 해석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구태여 관심을 가질 이유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보빈과 휘트먼 등이 제시하는 언어학적 추론의 가치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이러한 이론이 저항을 받는 데에는 민족주의적 감정보다는 이러한 학제간 연구주제에 대해 관련 학계 사이의 충분한 합의나 소통이 부족한 데에서 기인한 부분이 크므로, 이 점이 훨씬 선행적으로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로 보인다.
5. 가설[편집]
반도 일본어설과 유사한 학설 또는 연관성은 있으나 주장하는 바가 다른 학설에는 다음과 같은 가설들이 있다.
5.1. 일본어족 기원 가설[편집]
상술한 알렉산더 보빈이 추가적으로 추측한 바에 따르면 일본어족의 조어는 한반도에 넘어온 것보다도 이전에는 근본적으로 중국 대륙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이 있다.#[111] 사실 소위 '남방언어'들과 일본어 사이에 비슷한 점이 많다는 지적은 옛날부터 있어서, 크라다이어족은 물론이고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오스트로아시아어족 등등까지 묶은 남방어족(Austric languages)이라는 대어족 가설을 세우는 소수 학자들이 있었다. 다만 보빈은 이걸 부정하면서도 크라다이어족과 일본어족은 서로 별개의 어족이기는 하나 고대에 가까운 지역에서 사용되었기에 접촉에 의해 어휘나 문법요소가 가까워졌을 수 있다며 중국티베트어족의 확장 이전 선사시대 중국 동~남부쯤에서 일본어족의 조어가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다. 다만 본인도 확신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는 단순 가설임에 주의.
일본어족의 기원이 춘추전국시대의 오나라가 아닌가 하는 추정도 있다. 오나라가 멸망하고 그 유민들의 일부가 배를 타고 한반도 중남부로 건너와 터전을 잡았다가 다시 북쪽에서 내려온 한국어족 집단에 밀려 일본 열도로 건너가 야요이 시대를 열었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로 '吳'의 상고한어 발음이 일본어 1인칭의 어근과 유사하다. 일본 왜의 어원이 1인칭 대명사임을 생각하면 오나라의 국명도 같을 수 있다고 보는 게 무리는 아닐 것이다. 실제로 영어 위키백과에 한때 오나라의 공용어로 'proto-Japonic(원시 일본어)'이라고 적혀 있던 적이 한때 있었다. 일본어족의 기원을 논하는 한 논문에서도 종종 오나라와의 관계, 특히 오태백과의 관계를 다룬 사서의 내용을 다룰 뿐 아니라 양쯔강 하류에서 시작된 벼농사의 전파를 같이 고려해 일본어족의 원향(urheimat)을 중국 남동부로 보는 때가 많기 때문에 비록 춘추시대 오나라의 언어가 전적으로 고대 일본어는 아니었을지언정 각 지역의 언어 중 하나가 일본어족이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러나 자세히 파고들면 오나라 일본어족설에서 해명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단 역사에서 오나라 유민들이 한반도 남부로 왔음을 입증할 자료가 전혀 없다. 적어도 구전을 기록한 것으로라도, 한반도 남부에 자신들이 오나라 출신임을 밝히는 게 있어야 하지만 그런 것이 없다. 거기에 오나라가 당대로서는 첨단 문물이었던 철기로 유명했다면 한반도 남부의 반도 일본어 사용자들이 청동기 및 철기를 쓰던 북방의 한국어족에 밀려났다는 것에 의구심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뿐 아니라 오나라 유민들이 정말 한반도 중남부의 반도 일본어를 사용했다면, 이들이 오나라의 계승 의식으로 유의미한 정치 집단을 이뤄야 했을 텐데 그런 것조차 없다. 굳이 이 난점들을 뚫고 오나라와 반도 일본어설을 엮자면, 원시 일본어족이 오나라뿐 아니라 한반도 중남부에 동시대에 같이 살았고, 그래서 둘 사이에 이렇다 할 유사성이나 접점이 없었다고 보는 것 말고는 없는데, 이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아직까지 없다.
5.2. 고구려어-일본어 동계설[편집]
일본어족 계통의 언어가 한반도에서 사용된 적이 있다는 학설을 주장하는 다른 학자로는 미국의 언어학자인 크리스토퍼 벡위드(Christopher I. Beckwith)가 있는데, 이쪽은 가설의 구조가 완전히 다르다. 벡위드는 일본어와 고구려어를 '부여어족'으로 묶고[112] 오늘날의 한국어는 이 계통에서 철저히 떼어놓았다. 즉 현대 한국어와 고구려어 사이에는 어휘 차용 이외에는 친족성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고구려어와 한국어 간의 유사성, 한국어와 일본어 간의 유사성은 단순한 어휘 차용으로 보고 기존 학설을 비판했다.
그러나 알렉산더 보빈이 지적하듯이 그의 분석에는 결함이 많아서, 명백한 기초어휘까지 자의적으로 차용이라 주장하는가 하면, 한국어의 기본적인 한자음 재구에도 문제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국명 '신라(新羅)'가 'Silla'라고 발음되는 것을 한국어의 틀이 아닌 중국어의 틀에서 해석하려 하여, '新(신)'의 한자음이 고대에 'Sir'로 발음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그는 신라를 표기할 때 斯羅(사라), 斯盧(사로), 尸羅(시라) 등 여러 가지로 표기되었으며, 한자어가 아니라 본래 우리말을 한자를 빌려 적었을 뿐인 것을 몰랐다. 또 한국어 특유의 'n+r→ll'의 자음동화 현상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이외에도 무턱대고 단어의 어원을 한자어 기원으로 몰아가려는 경향도 보였으며, 일본어와 오스트로네시아어족 간의 영향마저도 무시했다. 이러한 이유로 대한민국의 언어학자인 정광 선생에 의해 크리스토퍼 벡위드의 논문이 번역되어 출간된 뒤에 그의 주장은 굉장히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한편 이 가설은 일본어와 알타이 제어간 연관성을 찾는 일본의 알타이어족 가설 지지자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다.
5.3. 원시 한반도어설[편집]
한편 한국 학자 중에서 이와 유사한 개념을 제창한 학자로는 서울대학교의 김방한 명예교수가 있다. 김방한 교수는, 한반도에 퉁구스(알타이)적 영향을 받은 북방계 어족이 존재하는 것과 별도로, 이들과 이질적인 언어인 '원시 한반도어'를 사용하는 기층적 집단이 따로 있어서 서로 공존하였으나 이들 원시한반도어를 쓰는 어족은 북방계 어족에게 흡수되거나 북방계 어족을 흡수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한국어가 형성되었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
예를 들어 일본어와 유사하다고 평가받는 삼국사기의 수사자료(3, 5, 7, 10)는 부여계 어족인 고구려어가 아니라 원시 한반도어라는 것이다. 관련 주장은 알렉산더 보빈의 반도 일본어설과 세부적인 면에서 그 주장을 달리하지만 한반도 내에 이질적인 2개의 언어 집단이 공존했다는 입장에서는 보빈의 주장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다만 김방한 교수는 그 기층언어를 니브흐어 등으로 추측했으나, 한국에는 니브흐어 부문을 연구하는 학자가 거의 없으므로 이 설은 검증이 어렵다.
5.4. 일본어족 조몬어 기원설[편집]
또 다른 가설로 일본어족의 기원이 한반도 기원의 야요이인의 언어가 아니라 조몬어, 즉 원주민들의 언어였다는 가설이 있다. 극히 최근 들어 제기된 새로운 가설로, 2017년 무렵 일본의 언어학자 이가라시 요스케가 주장한 이후, 2020년에 인도의 인류학자인 갸네시와르 차우베이와 네덜란드의 언어학자인 조르주 반 드리엄에 의해 다시금 제기된 주장이다. 이들의 가설에 따르면 일본어족은 본래 혼슈 서부의 조몬어에서 기원했으며, 이후 한반도를 통해 건너온 야요이인들과 융합하여 일본 전역으로 확대해 나갔다. 이렇게 이 가설에서는 알렉산더 보빈의 가설과 달리 야요이인의 언어가 일본어족이 아니었고 오히려 조몬인의 언어였다고 보는 것이다. 보빈의 학설과 비교하면 보빈은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일본어족이 건너가 조몬어를 밀어냈지만, 이 가설에서는 이주 자체는 같으나 언어의 교체가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언어적으로는 야요이인이 조몬인(일본어족)에게 동화되었다고 본다.
한편 이 가설을 채택하면 한반도 중남부에 있던 언어, 즉 보빈이 반도 일본어로 본 언어는 일본어족도 한국어족도 아닌 제3의 어족일 가능성이 커진다. 게다가 김방한 교수의 '원시 한반도어 가설'과도 많은 부분에서 비슷해진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그동안 조몬인의 후계 민족으로 알려졌던 아이누족의 기원이 어떻게 되느냐는 문제가 새로 발생한다.[113] 다만 조몬 시대가 매우 오래 이어졌기 때문에 원래 같은 언어였더라도 시간이 지나며 유사성이 완전히 사라졌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5.5. 일본어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설[편집]
일각에서는 일본어의 기원을 중국 남부 혹은 대만섬으로 보기도 했으며 폴리네시아어, 마인어 같은 언어들과 동계 언어로 간주하고 진지하게 연구된 적도 있다.
6. 기타[편집]
-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토끼를 의미하는 '오사함'이 일본어 '우사기'의 유래라고 주장하나[114] ,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으며 오히려 한자의 고대어 음가를 생각하면 고구려 독음과 고일본어 독음은 상당한 차이를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
- 탐라어에 대한 가설 또한 존재한다. 신당서, 일본서기 등 문헌에는 7세기의 탐라국 인명으로 유리도라(儒李都羅), 아파기(阿波伎), 고여(姑如), 구마기(久麻伎), 도라(都羅), 우마(宇麻), 가라(加羅) 등이 등장한다. 이 가운데 구마기, 도라, 우마 3명은 각각 일본어로 곰을 뜻하는 쿠마(くま), 호랑이를 뜻하는 토라(とら), 말을 뜻하는 우마(うま)와 발음이 비슷하여 주목할 만하다. 이 외에도 탐라국의 세 형제 중 막내가 수여받았다는 관직인 도내(都內)가 일본어의 토노(との)와 동원어라는 의견도 있다.[115]
- 여담으로 한반도에서 빗살무늬토기를 사용했던 집단의 언어가 일본어족인지 한국어족인지는 미스터리인데, 알렉산더 보빈과 존 휘트먼은 이 집단의 언어를 일본어족과 한국어족 둘 다 아닌 미지의 언어로 추측했다. 이 미지의 집단으로 일본 열도의 선주민으로 추측되는 조몬인/아이누로 추측하였다.[116]
- 알렉산더 보빈은 1994년, 1995년, 1997년, 1999년, 2000년, 2001년에 여러 연구 결과물을 내며 알타이어족 학설의 지지자였지만, 2001년 교토의 국제일본학센터에서 교환 교수로 재직(2001-2002년, 2008년)한 시기부터 알타이어족 학설의 비판자로 전향하고, 한반도 중남부가 고일본어권(Old Japanese)'이라는 반도 일본어설을 주장했다. 그리고 2001년에도 Japanese, Korean and Tungusic. Evidence for genetic relationship from verbal morphology라는 저작물을 내놓으며 한국어, 일본어가 퉁구스어족과 언어형태적으로 유사하다는 저작물을 내놓았다. 하지만 교토의 국제일본학센터에 재직할 때는 반도 일본어설을 들고 나왔다.
- 다만 그가 반도 일본어설을 들고 나온 시기는 알타이어족 가설 자체가 보빈뿐 아니라 이곳저곳에서 공격받던 시기이므로, 꼭 좋지 않게 생각할 이유는 없다. 애초에 반도 일본어설의 화살표 방향은 반도→일본이라 일본 우익들도 불쾌해하는 입장이며, 이 학자가 가설로 내놓은 전파과정 및 소멸과정 자체도 다른 어파의 역사에서 일어난 일과 유사하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곳이 아니면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즉 특이하지 않은 현상이라는 것을 주의하자.[117][118]
7. 링크[편집]
https://gall.dcinside.com/scrap_smile/72397
https://www.fmkorea.com/3446499032
https://www.fmkorea.com/3566816734
https://arca.live/b/novelchannel/82466535
https://arca.live/b/breaking/82466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