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의 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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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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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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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국왕 · 역대 왕비 · 환조 ~ 연산군 후궁
※ 정식 후궁 첩지가 있는 사람만 기재
※ 고종의 후궁 보현당 귀인 정씨, 광화당 귀인 이씨, 복녕당 귀인 양씨, 삼축당 김씨, 정화당 김씨는 대한제국 멸망 이후에 후궁이 되었으므로 조선의 후궁이었던 적이 없다.






조선 명종의 후궁
숙의 신씨 | 淑儀 申氏

출생
연대 미상
사망
1593년 이후
능묘
미상
재위기간
조선 숙의
1549년 1월 29일 ~ 1593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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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평산 신씨
부모
부친 - 신언숙(申彥淑)
모친 - 해주 최씨 최응(崔凝)의 딸
배우자
명종
자녀
없음
봉작
숙의(淑儀)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조선 명종후궁. 아버지는 강서 현령을 지낸 신언숙(申彥淑)이며, 어머니는 최응(崔凝)의 딸 해주 최씨이다.

2. 생애[편집]


1548년(명종 4) 숙의(淑儀)가 궁궐에 들어오려면 본가에서 마련할 물품이 많으니 아버지 신언숙에게 6품의 직을 제수하라는 기록이 있다.[1] 이때 자전(慈殿) 즉, 왕의 어머니가 전교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후궁 봉작은 문정왕후의 뜻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숙의 신씨는 입궁하여 3년이 되도록 자식을 낳지 못해서 1551년(명종 6) 문정왕후는 숙의를 한 사람 더 뽑자는 이야기를 하게 된다.[2][3]

1562년(명종 17)에는 숙의 신씨의 본가 옆집에 살던 윤홍중(尹弘中)이 담장 문제로 신씨의 본가 여종을 매질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숙의 신씨가 명종에게 호소해 윤홍중이 강진(康津)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4] 이 일에 대해 사관은 본래 윤홍중의 사람됨이 좋지 않아서 애석한 일은 아니지만, 후궁을 위해 사사로운 사건에 왕이 나섰다고 비판하였다.

한편, 숙의 신씨의 정확한 생몰년은 알 수 없으나 《선조실록》을 보면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까지 살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593년(선조 26) 숙의 신씨는 아산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아산현감 권유(權愉)가 교만하고 포악하여 대접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5] 숙의 신씨가 '종을 시켜 언문 편지를 보내어 기아(飢餓)를 호소'했다고 하니 전쟁 중에 많은 고생을 겪은 듯.

좌승지 이덕열(李德悅)에게 전교하였다.

"혜빈 정씨는 광주(廣州)에서, 숙빈 윤씨는 남양(南陽)에서, 숙의 이씨ㆍ신씨는 연안(延安)에서 음식물을 제급(題給)하여 줄 것을 감사에게 유지(有旨)를 내리도록 하라."

선조실록》 선조 28년 5월 26일


숙의 이씨와 함께 황해도 연안(延安)에서 지낸 것으로 보이지만, 1595년(선조 28) 이후부터는 기록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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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종실록 8권, 명종 3년 12월 21일 임술 1번째기사. # [2] 명종실록 11권, 명종 6년 2월 25일 계미 2번째기사. # [3] 인종이 후사없이 일찍 죽었고, 명종도 이때까지 자식이 없어서 왕실에서는 후궁 소생이라도 태어나기를 바라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그해 5월에 인순왕후순회세자를 낳았지만, 결과적으로 명종의 후궁들 중에서는 자식을 낳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4] 명종실록 28권, 명종 17년 4월 12일 을축 1번째기사. # [5] 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 7월 11일 계해 1번째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