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우스 카이사르/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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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문서: 율리우스 카이사르
1. 정치적 평가[편집]
내전기 이후로 혼란에 빠진 공화정 로마를 종결시키고 제정의 길을 연 인물이다. 카이사르 개인의 정치적 능력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없으나, 그가 끼친 영향이 결과적으로 로마에 긍정적인 것이었는지는 평가가 갈린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가 낳은 걸출한 인재로서 포에니 전쟁 이후 표류하기 시작한 로마 제국[* 당시 로마 제국은 레스 푸블리카 - 공화국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많은 속주들을 거느리고 군사적으로 위압하는 임페리움 - 제국이기도 했다.]의 체제를 재정비하려고 했던 개혁가인 동시에, 공화정을 파멸시킨 독재자라는 양극의 평가가 존재하는 인물이다. 공화정만으로 로마가 결코 유지될 수 없다는 걸 알아차리고 개혁을 꿈꾸던 인물이라는 평과 그저 최고가 아니면 참지 못 했던 성격 때문에 최고 권력자 자리에 도전했던 사람이라는 평이 갈린다.[1][2] 사실 둘 다였을 가능성이 높다. 카이사르 정도의 머리를 가진 사람이 자신의 야망이 로마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몰랐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원로원 중심 체제의 문제점을 잘 파악했으며 그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 또한 잘 제시했다. 물론 그로 인하여 발생하는 신체제의 한계와 부작용 역시 잘 알았겠지만 엄청나게 유능한 거물이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하튼 훗날 몽테스키외는 카이사르를 두고 이렇게 평했다.
카이사르가 행운을 타고났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 비범한 인물이 뛰어난 자질을 많이 지녔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결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어떤 군대를 지휘했어도 승리자가 되었을 것이고, 어떤 나라에서 태어났더라도 지도자가 되었을 것이다.
1.1. 긍정적 평가[편집]
로마가 낳은 유일한 창조적 천재
기본적으로 카이사르는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고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는데는 그야말로 동서고금을 통틀어서도 탑 오브 탑에 들어갈 만큼 뛰어났던 정치가였다. 광활한 고대 로마 영토를 볼 때, 당시의 포로 로마노에서 정치를 논하는 식의 공화정은 한계가 분명했다. 게다가 공화국 말기에 들어서는 공화정과는 거리가 멀어져 과두정으로 변질되었는데 로마의 영토가 넓어지면서 공화정 체제가 한계에 달해 과두화되었다 볼 수 있다. 그 증거로 카이사르가 암살당했지만, 결국 황제는 탄생한 점을 들 수 있다. 더군다나 이미 그라쿠스 형제의 실패, 술라와 마리우스의 내전 등을 통해 평민 계급과 원로원 계급의 골은 깊어져 있었다. 즉, 강대한 카리스마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이 점은 사라질 수 없고 장기적으로 로마를 잠식했을 것이다. 이 같은 점으로 볼 때, 개인의 야욕이 있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으나, 단순히 사욕에만 불탄 것이 아니라 당대 시스템적인 한계점과 이를 해결하는 방법도 역시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카이사르의 정치 체제는 1인이 독재를 하되 민중의 뜻을 존중하는 체제였다. 원로원의 부패한 기득권 세력을 청산하고 시민들에게 권리를 일부 되돌려주는 방식인 것이다. 카이사르가 시행한 개혁들은 무산자를 비롯한 빈민, 해방 노예, 속주민들을 구제하고 원로원과 기사의 세력을 억제하여 민중에게 실익이 되는 개혁이었다. 그런 까닭에 민중이 카이사르를 지지한 것이지만.[4]
출생도 성격도 누구보다 귀족적이었던 카이사르가 민중의 숙원이었던 그라쿠스의 정책을 독재 권력으로 시행한 것은 언뜻 모순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에 대해 포퓰리즘 정책이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것은 너무 현대적 관점에서 2,000년 전 활약한 인물을 폄하하는 것이다. 카이사르는 젊을 때부터 마지막까지 민중파였다.[5] 자신의 고모부이자 민중파의 상징이었던 마리우스의 장례식, 그것도 술라의 지배하인 로마 한가운데서 10대의 나이에 대놓고 민중파를 지지하는 조문을 읊어서[6] 술라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등, 어린 시절부터 이미 간이 어마어마하게 크고 타고난 정치인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7] 그래서 학계는 제정의 수립 여부를 떠나 "수백 년간 대립해온 평민-귀족 간의 대결과 로마의 모순을 해결한 인물이었다."는 점에선 이견이 없다.
카이사르는 술라에 의해 침탈당한 공적 소유를 복원하여 성장과 팽창에서 분배를 지향해 막대한 부를 지닌 귀족과 경제적으로 몰락한 평민과의 양극화를 효과적으로 해결했다. 그라쿠스 형제를 시작으로 민중파는 이러한 개혁을 실시하려 했으나 원로원의 보수 귀족 세력에 의해 늘 저지되었는데 카이사르가 내전에서 승리하고 국가 개혁을 성공적으로 실시함으로써 거의 100년간 이어지던 민중과 민중파의 숙원을 해결한 셈이다. 호민관 그라쿠스가 이루지 못했던 문제를 역설적이게도 독재관 카이사르가 이루어낸 것.[8][9]
부정적 평가 문단에서 로마 공화정이 문제가 많기는 해도 민주정이기에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원로원도 민중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말하며 그라쿠스 형제와 폼페이우스의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데, 오히려 원로원이 민중의 요구를 절대 들어주지 않을거라는 반증사례에 불과하다. 그라쿠스 형제는 그 요구 들어주려다가 원로원한테 찍혀서 원로원의 친위 쿠데타로 죽었으며 폼페이우스의 개혁책 역시 카이사르의 인기를 조금이라도 깎아내기 위한 기만책이라는 것이 대세다. 이는 억측이 아닌 게 당장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당시, 원로원에서 드루수스라는 인물을 내세워 더 급진적이고 민중 친화적인 개혁안을 내세우게 해서 가이우스 그라쿠스(동생)를 낙선시킨 뒤, 그가 죽자마자 자기네가 내세웠던 개혁안을 모조리 엎어버린 전적이 있다.
또한, 공화정의 몰락하지 않는 IF 시나리오가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은 의미가 없다. 애시당초 역사에 가정은 필요가 없기도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당시 로마의 공화제는 모순이 너무 많이 쌓여서 설령 공화제를 유지하려고 해도 한번은 몰락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10][11]
우선적으로 로마 공화정은 그냥 민주 공화정이 아닌 귀족 공화정이기 때문에, 아예 민주 공화정으로 한번에 갈아엎지 않는 이상, 원로원은 귀족 공화정의 집정관도, 호민관도 비교될 수 없는 로마의 정치 체계를 구축하는 핵심 축에 해당한다. 그런데 로마 공화정의 정치 시스템의 핵심 축인 원로원이 기득권이자 타파 대상이라는 게 결정적인 문제로 작용한다. 그리고 그 원로원을 타파하는 순간 로마 공화정은 무너진다.
그리고 민중파의 요구는 국가의 근간이 되는 중산층의 빈민화라는 치명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으며, 이는 로마 공화정의 건전성을 위해 무조건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라는 점이라는 부분은 대체로 다 인정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과연 로마 공화정을 망가트리지 않은 채 이런 모순들을 해결하는 방법이 있을지 살펴봐야 하는데, 이미 농지법이 정식 법안으로 통과되었는데도 원로원 최종권고를 통해 민중파들을 다 죽인 뒤 원로원파가 농지법을 무력화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식 법안 통과만으로는 민중파의 요구가 들어먹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우선적으로 합법적이고 비교적 평화로운 수단으로 정당한 수단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게 가장 합리적인 시도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 시도들을 그라쿠스 형제 같은 민중파가 감행한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길거리에서 대놓고 때려 죽인다거나, 원로원 최종 권고를 발동하여 수도에서 지지자 3천여 명을 학살한 것이었다. 카이사르가 똑같은 합법적이고 평화로운 수단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으면 카이사르도 같은 꼴이 났을 거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12] 이 경우 우리는 역사책에서 로마의 사실상 첫 황제 취급받는 카이사르가 아니라, 그라쿠스처럼 개혁하다가 죽은 카이사르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13] 그리고 민중파의 요구는 필연적으로 다시 등장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우리는 개혁이 성공하거나 로마가 망할 때까지 제 2, 3, 4의 카이사르를 보게 되었을 것이고, 원로원의 과격한 대응에 살아남아 맞서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제2, 3, 4의 카이사르는 더 강경해져야 했을 것이다.[14] 실제 그라쿠스 형제도 제일 먼저 그나마 온건한 형이 죽고, 동생은 더 강경해졌고, 마리우스 시절에는 휘하의 사투르니누스가 그라쿠스 형제보다도 더더욱 강경한 모습을 보였다. 카이사르가 일으킨 내전은 결국 원로원의 대응에 의해 살아남기 위해 마리우스 시절보다도 한 단계 더 강경해진 모습이라고 보는 게 맞다.
그렇다고 원로원 없이 새로운 로마 공화정을 꾸려간다는 시나리오를 본다면,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도시국가를 넘어서서 지역의 패권을 좌지우지하는 국가 중에서 공화정으로 운영되던 나라는 로마 이전에는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당장 공화정은 세계 역사에서 로마 공화정 이후에는 한참 동안 찾아보기도 힘든 정치 체계이다. 1,800년쯤 뒤의 영국이나 미국 정도는 되어야지 말을 꺼내 볼 만한데, 영국의 입헌 군주정은 긴 시간 왕정과 귀족, 부르주아 층간의 갈등을 계기로 긴 시간에 만들어진 타협의 결과물에 가까운 것이고, 왕정도 아니었던 로마에서 단시간에 따라할 수 있던 게 아니었다. 그나마 비교 대상으로 미국을 정치 시스템을 로마가 취할 수 있었을지 살펴본다면 당대의 최고위 지식인 및 지도자층 55명이 모여 지금까지의 공화정 시스템의 장점을 최대한 취합해서 수개월간의 긴 회의와 극적인 타협으로 간신히 만든 시스템이 미국 정치 시스템이란 걸 감안하면 매우 어렵다.
이렇게 보면 공화정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기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위업인지 알 수 있다. 무려 1,800년의 세월을 넘어야 하며, 세계 역사적으로 또 다시 최초로 기존의 원로원 기반 귀족 공화정이 아닌 또 다른 공화정의 새 패러다임을 그 당시에 제시한다는 것은 시간여행물이나 이세계물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수준의 비현실적인 시나리오이다. 또한 통신 기술과 투표 시스템의 비효율성 등 여러 가지 기술적 한계까지 감안하면 당시 소수의 귀족 공화정으로도 의견을 모으기 힘들어서 넓은 영토를 관리하기 힘들었던 게 로마였다. 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모으는, 이상적인 민주 공화정에 가까운 형태로 변화한다는 건 한층 더 비현실적인 시나리오이다.
그렇다고 원로원이 민중파에 양보를 할 수 있을까? 이 양보를 할 생각이 있었다면 이미 그라쿠스 형제 시기에 양보했을 것이다. 이미 최악의 수단으로 최소 3번 이상 민중파를 탄압한 원로원이 갑자기 민중파의 요구를 들어줄정도로 급변한다는 것도 비현실적이다. 당장 수백 명 단위의 타락한 기득권층을 단체로 개과천선시킨다는 사례는 전 세계 역사를 통틀어 있는지조차 의문이다.
결국 종합해보자면, 원로원의 무력화 및 기득권의 소실이 사실상 로마 공화정의 종말에 가까운 형태라고 본다면 원로원이 양보하지 않는 당시의 로마의 상황을 감안하면 로마 공화정의 종말은 필연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걸 단순한 결과론이라고 보긴 힘든 게, 원로원 자신이 초래한 결과물이므로 사실상 자업자득에 가까운 전개이며, 무려 그라쿠스 형제와 마리우스까지 포함해서 최소한 3번의 해결 찬스까지 자기 손으로 엎어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이만한 규모의 민중의 요구를 무려 3번이나 무시하고도 멸망 안 당한 시나리오가 드물다는 걸 감안할 때, 그들에게는 이미 충분히 많은 기회가 주어졌지만 스스로 져버린 것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더군다나, 초기 로마면 몰라도 당시 로마를 권력이 쪼개진 체제라고 주장하며 "폭주하는 집정관은 탄핵으로 어루만져주면 되지만, 폭주하는 황제에게는 칼 외에는 해결책이 없다."라는 주장은 그야말로 문제의 본질에서 눈을 돌리는 헛소리인데, 공화정 말기 로마의 최대의 문제는 탄핵할 수 있는 집정관이 아니라 바로 원로원 최종권고였기 때문이다.
이 원로원 최종 권고가 발동되어 집정관에게 권한이 부여되면 거부권이나 탄핵을 모조리 무시하므로, 그야말로 칼 말고는 해결책이 없는 수단이자 그 자체가 자국민 정적을 향한 재판 없는 절대 무력 행사 선언이나 다름없다. 발동되면 천 단위 이상의 자국민 학살조차 정당화하고, 이게 발동된 순간 항복한 정적조차 죽어야 끝났으며 물론 재판따윈 없었다.[15] 어지간한 절대왕정 체제의 왕도 단체 학살을 해버리면 반란이 일어나므로 함부로 휘두르기 힘든 무소불위의 권력을 부여하는 이 최악의 수단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문제지만, 초기 로마에는 이게 발동되지 않는 선에서 로마의 권력 체계가 잘 유지되어 왔다.[16][17]
하지만 로마 공화정 말기에는 이 원로원 최종권고가 남용되었으며, 무엇보다 국가의 이득이 아니라 자기네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남용되었다는 것이 로마 공화정 말기의 결정적인 문제점 중 하나이다. 건강한 국가 시스템에 권력 견제가 필요한 근본적인 이유 중 가장 큰 원인이 이것이다. 권력자나 권력 집단이 사익을 포기하고 오로지 국가를 위해서만 결정을 내린다면, 독재의 폐해는 현저히 줄어든다. 하지만 권력자나 권력자가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견제가 필요한 것인데 로마 역사에서 확인되는 최초의 원로원 최종권고가 발동된 안건이 바로 민중의 요구를 주장하던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그 지지자들을 학살하는 것이었으며, 심지어 그라쿠스 1명도 아니고 그 지지자 약 3250여 명을 싹 다 죽여버린다. 권력 분리가 잘 되지 않은 건강하지 않은 정치 시스템이 일으키는 폐해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원로원 최종권고는 로마에 내려오던 무슨 전통적인 방법 같은 것도 아니다. 원래 로마에 내려오던 제도는 원로원 권고로, 집정관이 도를 넘을 가능성이 있으면 원로원의 권고로 이를 바로잡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어느새 원로원 최종 권고가 되어 사람을 마구 학살해도 용납되는 어처구니없는 제도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제도는 결국 대(對) 민중파 최종병기로, 민중파를 때려잡기 위해 원로원에서 고안된 제도로 봐도 무방하다. 전술하였듯 최초로 발동한 것이 바로 그라쿠스 형제를 때려잡기 위해서였으니 말이다.[18][19]
오늘날 정확한 표결 수는 알 수 없지만 로마에서는 한번 투표하면 수천에서 수만 명 정도 투표한 것으로 추산되는데[20] 오늘날의 투표 시스템과 로마 공화정의 투표 시스템이 다르므로 투표 수와 지지자 수를 일대일로 대입할 수는 없지만 무려 3000명 단위로 지지자를 학살하는 행위는 그야말로 특정 지지자의 정치 지지 기반을 추후에도 씨도 안 남기고 학살하려고 한 뒤, 도망치거나 숨지 못한 사람들 빼곤 다 죽였다고 봐도 될 정도의 학살이다. 공화정이라는 시스템이 투표로 인해 돌아간다는 것을 감안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권한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로원 최종 권고라는 수단이 군주정의 권력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그나마 상시 발동이 아니라는 점이겠지만, 대신에 상시 발동이 아니므로 한번 발동이 걸리면 군주정에서조차 반란이 무서워서 함부로 못 하는 짓을 끝까지 해버릴 수 있다.
또한 키케로와 카토는 개인적으로는 청렴했을지 몰라도 정치적으로는 절대 민주적이라고 할 수가 없는 인물들이었다. 당장 키케로가 자신의 최고 업적이라고 내세웠던 카틸리나 탄핵부터가 문학사적으로는 걸작 소리를 듣지만, 그 내막을 뜯어보면 유력한 정치인과 그 지지자들을 재판도 없이 처형해 놓고는 그것이 로마를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며 정당화하며 법치주의를 완전히 무시한 연설이었다.[21] 당장 키케로는 이 사건에서 원로원 최종권고를 발동시킨 뒤 카틸리나와 그 지지자들을 학살했다. 그라쿠스 때처럼, 약 3000명의 지지자들도 학살시켰으며, 이는 카틸리나의 지지자들을 보이는 족족 다 죽여버렸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카토 역시 필리버스터를 남발하며 카이사르를 견제했다며 고평가 받지만, 이 인간이 필리버스터로 반대한 안건이라는 게 바로 민중에게 토지를 재분배하는 법안이었다. 그리고 그걸로도 모자라 카토는 앞서 언급한 키케로의 카틸리나 탄핵 때 누구보다도 키케로에게 찬성하는 걸로도 모자라서, 카이사르까지 카틸리나랑 한 패라고 묶어서 보내버리려들었다는 기록이 버젓이 남아있을 정도로 법치주의나 공정함과는 거리가 먼 인사였다. 참고로 이게 그나마 원로원파 중에서 나은 인물들로 언급되는 인물들인데도 이런 수준이었다.누만티아를 파괴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훌륭한 인물로 뛰어난 군인이지만,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죽인 평범한 개인 푸블리우스 나시카보다 공화국에 더 유익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술라가 카이사르보다 낫다는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는데, 술라가 사욕을 위하지 않았다는 부분을 아무리 높게 평가하더라도 기득권인 원로원을 위해서 내전을 일으킨 뒤, 내전 이후에도 수천 명 단위로 정적을 학살했다. 사욕으로 움직이진 않았지만 기득권층을 위해서 내전을 벌이고, 정적을 학살하고 독재를 하다가 내려온 사람이 낫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술라는 군사적 능력과 권력을 잡는 능력은 빼어났을지 몰라도 당시 로마체계의 문제의 본질조차 이해하지 못해서 결국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긍정적인 성과는 전무했으며, 개혁을 일으키긴 했지만 긍정적인 영향은 없는 반면 내전으로 국내를 피폐화시킨 이후에도 민중파를 학살하고 원로원 최종 권고 발동 등으로 국가 시스템의 불안정성만 키우는 퇴보나 다름없는 개악이었다. "무능한 리더가 열심히 일해서 열심히 말아먹었지만 의도는 좋았다."는 건데, 카이사르가 민중에게 가져온 긍정적인 부분은 "독재를 정당화할 순 없다."라며 전부 무시한 뒤, 술라가 말아먹은 것에 대한 평가는 다 건너뛰고, 그 좋았던 의도에 대한 평가만 하면 전혀 공평한 비교가 못 된다.[23][24]
결정적으로 일부 공화정 말기의 원로원이 청렴한 사람이었다, 훌륭한 사람이었다, 아니었다를 논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과도 거리가 멀다. 원로원이 비판받는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악이라서가 아니다. 단순히 그들이 부나 권력을 많이 가져서도 아니다. 로마는 중산층까지 무너져가는 상황에 있고 심지어 로마의 근간을 이루는 시민병조차 은퇴하면 퇴직금으로 땅도 못 받고, 벌어둔 돈은 부족하기 짝이 없어서 깡통차는 상황이다 보니 내전이나 반란 일어나기 딱 좋은 상황을 만들어 놓았는데, 원로원은 이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해결하지 않은 채로 부를 독점하고[25] , 해결하라고 뽑아놓은 호민관들이 이 점을 개선하려 들면[26] 원로원 최종권고를 통해 박살내 버렸다.
카이사르가 정적을 숙청한 뒤, 절대 권력을 구축한 것이 민주주의에 악영향을 끼쳤음은 부정할 수 없지만, 동시에 당시의 원로원이 이끌어가던 공화정은 민중을 위한 법을 만들 생각도, 의지도 없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가 없다. 때문에 원로원한테서 권력을 뺏은 것 자체는 잘못한 일이라고 볼 수가 없으머, 카이사르의 오점을 찾는다면 그렇게 획득한 권력을 독점한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권력을 손에 넣은 자의 인간적 한계이자 당시 시대 그 자체의 한계라고 봐야지, 카이사르가 야망이 넘치는 폭군이라서 그랬다고 보는 것은 심한 처사다. 그리고 전제정은 고대와 중세 기준으로 봤을 때 매우 효율적인 정치 체제이다. 오늘날에야 교육의 질 상승, 계몽주의와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둔 인권 의식의 상승, 정보 통신 기술과 교통수단의 발달 등을 통해 민주주의가 효율적이고 공정하게 자리잡았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그러질 못했으며 영역이 넓어지고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진 로마 입장에서 민주정이든 과두정이든 사공이 많아 배가 산으로 가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유능한 한 사람이 모든 정권을 위임받아 일을 처리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고 빠르다. 전제정에는 무능한 한 사람에 의해 나라가 기우는 형세를 만들 수 있다는 단점이 있지만 이마저도 민주정 혹은 과두정에서의 지지부진한 일처리와 다수라는 명목하에 개혁 의지를 없애버리는 것보단 낫다. 전자는 유능한 한 사람이 나오면 나라가 개혁될 수 있지만 후자는 그 다수가 전부 바뀌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물론 결과론적으로 바라본 것이지만 카이사르는 유능했고, 불안한 정세를 바로잡고 다수의 의견을 수용할 능력이 있었다.
다만 부연하자면 민주 공화정이 독재정이나 전제정보다 비효율적이라는 말은 틀렸다. 오히려 혼자서 뭘 하는 쪽이 실제로는 효율성 면에서 훨씬 떨어질 수 있다. 단지 당시 상황에서는 시스템 자체의 한계로 인해 민주정이나 공화정의 한계가 도시국가 정도인 것일 뿐이었다. 당장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민주주의 국가들이 군국주의 국가들에 비해 훨씬 효율적이었다. 단지 아주 뛰어난 인물이 등장했을 경우[28] 전제정이나 독재정이 일순간 민주 공화정을 앞설 수 있겠지만 그것도 그 뛰어난 인물이 민주 공화정에서 봉사하는 편이 더 효율적이다. 애시당초 당시 공화정이 망하고 원수정으로 간 것도 공화정이 시대적, 시스템적 한계 때문에 제대로 운영되지 못 했기 때문인 것이지[29] 공화정 그 자체의 비효율성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사실 카이사르가 공화정을 파괴했다고들 흔히 이야기하지만, 카이사르가 살아 있을 당시는 물론이고 그 후에도 로마의 공화정은 명목상으로나마 계속 존속했다. 로마가 황제정이 된 것은 그 후임자였던 아우구스투스의 직위였던 임페라토르(총사령관)가 절대 권력을 지닌 채로 그 후계자들에게 세습되면서 왕과 같은 권위를 갖추며 종국에는 엠퍼러(황제)의 어원이 되는 지경에 이르면서 공식화된 거지, 당장 아우구스투스도 자신을 부를 때는 프린켑스(제1시민)라고 불렀고, 공식적인 직함은 어디까지나 그전부터 있던 호민관이었다. 정확히는 국가의 대표가 모든 권력을 잡고 정국을 다스리는 전제정이라는 개념 자체가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도 있다.
더불어 무엇보다 로마 공화정의 본질이 귀족 과두정인 것이 현실인 시점에서 귀족 과두정을 무너뜨리고 1인 독재정을 만들었다고 한들 그것이 민주주의의 파괴로 비판받을 수 있는지 의문이 드는 것도 현실이다.
물론 이 시점에 이미 로마의 공화정이 식물인간 상태가 되었다는 건 부인할 수 없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아우구스투스가 한 일이지 카이사르가 한 일이 아니다. 카이사르는 왕과 다를 바 없는 권력을 누리기는 했지만,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 왕에 취임한 적이 없으며, 기존의 임시직이었던 독재관직을 종신화하는 것에서 그쳤다. 그리고 이마저도 원로원의 거두였던 술라가 먼저 한 짓이지 딱히 카이사르가 오리지널인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렇게 앉은 자리에서 1년도 안 되어 암살로 숨을 거둔지라, 그가 평생 독재자로 살았을지, 아니면 술라처럼 2년 만에 은퇴하고 내려왔을지조차 판단할 수가 없게 됐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바로 당대 로마가 가야 할 길을 알고 실천했다는 점이다. 당시 로마는 포에니 전쟁을 겪으면서 이로 인해 내부적으로든 외부적으로든 환경에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외부적으로는 전쟁의 승리로 인해 일개 도시국가가 아닌 거대 제국으로 변모했고 내부적으로는 거대 제국으로 변화한 상태에서 현 체제는 이를 수용하기에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공화제 자체가 비효율적인 제도는 아니지만 당시 사회 발전 상황으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고[30] 거기에 더해 로마의 공화제는 귀족과 평민 간 차별이 존재하고 로마인과 외부인 간 신분상 차이가 있는 등 불완전했다는 점도 문제였다. 그런데 기존의 원로원파들은 이런 변화에 대한 대처를 소홀히 하고 오히려 포에니 전쟁으로 인한 과실을 독점하는 데만 급급했으나 카이사르는 이 변화를 읽고 민중의 편에 서서 기득권과 싸웠다. 이 점만 놓고 봐도 카이사르는 쉽게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는 인물이다.
1.2. 부정적 평가[편집]
독재자들이 제정한 법률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정당하다는 말인가? 아테네에서 저 유명한 30인(三十人) 독재자가[31]
[32] 법률을 부과하려고 한다면, 또 설령 아테네인들 전부가 독재자의 법률을 좋아한다면, 그것만으로 그 법률을 정당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법률론」 1.15.42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여! (중략) 제가 염려하는 바는 당신이 영예의 참된 길을 망각한 채, 당신 혼자가 우리 모두보다 강한 것을 영예로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며, 동료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것보다 그들을 두렵게 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영예의 길을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소중한 시민이 되는 것, 국가에 공헌하는 것, 칭송받는 것, 존경받는 것, 사랑받는 것이야말로 영예의 길입니다. 실로 두려움과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반감과 혐오와 미약하고 덧없는 길입니다. "두려워하기만 한다면 나를 증오해도 상관없다." 극중에서도 이렇게 말했던 사람은 파멸의 길을 걸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몰락을 보고서도 사랑받기가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을 여전히 원한다면, 누가 무슨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카이사르가 행복한 인생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참으로 가련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살해자에게 처벌이 아니라 최고의 명예를 안겨 주게 될 그런 삶은 결코 행복한 삶이라 할 수 없습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필리피카이」 中
역사서를 읽었고 고대에 벌어진 일들의 기록을 잘 활용한다면, 공화국에서 개인 시민으로 사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분간을 반드시 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시민 자격으로서는 카이사르나 스키피오 같이 될 수 있다면 차라리 스키피오 같은 사람이 되기를 바랄 것이다. (중략) 또 고대의 저술가들이 카이사르를 아무리 칭송하여도 그 영광에 속아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를 칭송한 사람들은 그의 좋은 운명에 현혹되었거나, 카이사르(황제)의 이름으로 운영된 제국이 너무 오래 지속하여 그에 대하여 자유롭게 쓰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겁먹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저술가들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카이사르에 대하여 어떤 글을 했겠는지 알고 싶은 사람은 그 저술가들이 카틸리나에 대해서 어떻게 말했는지 살펴보면 된다. 카이사르는 이 사람과 비해 보면 더욱 더 혐오스러운 자이다. 카틸리나는 고작 국가를 전복하려는 생각을 품었을 뿐이지만, 카이사르는 그런 생각을 실천했으니 더욱 비난 받아 마땅하다. 또 독자들은 저술가들이 카이사르 암살자인 브루투스를 어떻게 칭송하는지 살펴보기 바란다. 카이사르의 권세에 눌려 그를 비난하지 못하니까 그 적수를 높이 칭송했던 것이다.
(중략)
그리고 그가 그 다음으로 암군들의 시대를 자세히 검토해 본다면, 전쟁으로 적개심이 가득한 시대, 소요 사태로 의견 분열로 가득 찬 시대, 전시나 평시나 가리지 않고 잔인한 시대를 목격하게 될 것이다. (중략) 그는 카이사르가 로마, 이탈리아, 그리고 온 세상에 얼마나 많은 혼란을 초래했는지 똑똑히 보게 될 것이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로마사론」 1-10 中
후일 이 파당의 지도자로 올라선 카이사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을 가렸고 그리하여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목에다 멍에를 얹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로마사론」 1-17 中
다만 우리나라에선《로마인 이야기》의 영향으로 무슨 결함이 없는 완벽한 체제를 그린 영웅으로만 통하는데 정작 서양에서는 그렇지 않다. 정치적인 의미에서 카이사르라고 까면 독재적 야심이 있는 사람이라는 정도의 의미로도 통한다.[33]
로마의 체제는 기본적으로 혼합정의 형태를 한 공화정 체제이다. 즉, 왕정의 요소를 지닌 행정관, 귀족정의 요소를 지닌 원로원, 민주정의 요소를 지닌 민회가 상호견제를 하면서 권력이 쪼개진 체제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는 근현대의 국가들에 비하면 문제점이 많으며, 실상은 원로원 위주의 체제였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로마 공화국에서는 폭주하는 집정관과 호민관을 탄핵할 수 있었고, 뻘짓하는 원로원 의원을 제명할 수 있었고, 민회는 집정관, 법무관, 호민관, 조영관 등 행정관들을 선출했다. 반면 카이사르로부터 비롯된 로마 제국에서는 황제에 대한 합법적인 견제 장치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고 최고 권력자의 폭정에 대항할 수단은 군사 쿠데타와 암살만이 존재하게 되었다.[34][35][36] 마키아벨리가《로마사론》에서 쓴 표현을 빌리자면, 폭주하는 집정관은 탄핵으로 어루만져주면 되지만, 폭주하는 황제에게는 칼 말고는 해결책이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카이사르 본인부터가 칼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탄핵이 아니라 암살로 정치 커리어가 끝나버렸다. 그리고 카이사르가 파괴해버린 로마 공화정은 훗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전제정까지 이어진다. 로마 황제의 형식적인 견제 및 권고 기관인 원로원은 시간이 지날수록 힘을 잃어갔고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사후 로마의 정세는 황제를 꿈꾸는 군인 야망가들의 전쟁으로 이어졌으며 결국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전제정을 성립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카이사르가 민중을 존중했네 어쩌네 하는 것은 결국 부차적인 문제이다. 그러한 존중은 어디까지나 최고 권력자 한 명의 의지에 종속되어 있으며, 그 의지가 돌변해버린다면 '칼'이라는 선택지만 남아버리는 것이다. 카이사르에게 한참 이후의 디오클레티아누스를 거론하며 비판하는 게 가혹하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그가 공화정의 권력견제장치를 파괴해버린 것은 분명하고,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카이사르 본인부터가 잘 알았을 것이다. 만약 몰랐다면, 그건 공화정 로마의 정치가로서 무능한 것이고.
게다가 "공화정 체제는 답이 없었고, 원로원은 부패했고, 따라서 군주정으로의 복귀는 필연이었다."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결과론적 입장이다.[37] 카이사르의 옹호자들 일부는 카이사르 암살 후의 로마가 아우구스투스의 체제로 쇄도한 것을 예로 들면서 이러한 필연성을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말도 안 되는 비판이다. 이미 카이사르가 공화정을 유린하고 파괴하여 원로원의 권위를 박살내버린 상황이었는데, 이걸 토대로 공화정의 필멸성을 논하는 것은 당대의 공화정 지지자들에게 너무 억울한 평가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돌이켜보면, 공화정의 몰락을 거의 예정된 일처럼, 즉 마치 버틸 수 없는 늪에서 어쩔 수 없이 추락할 수밖에 없었던 사건으로 보기 쉽다. 사태의 전개에 어떠한 외부 위험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았다. 갈등은 내부에서 비롯되었다. 제국을 통치하는 데 필요한 요구들에 공화정 시기의 사회와 정부가 대응하는 과정에서 빚어졌고, 로마의 팽창 동력이었던 귀족 간의 경쟁 그리고 '영광'과 '위엄'의 압박에서 비롯되었다. 사병화된 군대들, 점점 늘어가는 부로 인해 경쟁은 더욱 격화되었고, 결국 한 사람의 수중에 위엄, 부, 군사적 지배권이 집중될 때까지 싸움은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어떠한 역사도 진정으로 불가피한 것은 아니다. 마지막 시점에서조차 사람들은 공화정과 이상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공화정의 몰락은 불가피한 운명이 아니었다. 이것은 야망과 자기희생, 천재성과 어리석음이 섞여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이야기이다.
데이비드 M. 귄, 「로마 공화정」 中
결국 부정적 평가를 요약하자면, "카이사르가 제아무리 민중을 위해줬다고 하더라도, 그 본질이 독재자라는 것은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일 것이다. 민중의 지지는 결코 독재의 근거가 될 수 없으며, 독재의 반대말은 다수의 지지가 아니라 권력의 분립과 상호 견제이다. 카이사르는 결국 권력을 좋아하던 탐욕스러운 개인에 불과했으며, 인민의 것(Res populi)인 공공재산(Res publica, 의역하면 공화국)을 박탈하여 자신의 사유재산(Res privata)으로 만들어버렸다. 카이사르의 패악질에 비한다면, 차라리 술라는 잔혹했을지언정 "공화정을 지켜야 한다."라는 신념이라도 있었다. 물론 술라의 개혁에는 구체적인 여러 문제점이 있고, 무엇보다 그 스스로가 군벌이었기에 모순이 가득했으나, 술라는 마지막에 스스로 모든 관직을 사임하고 개인의 생활로 은퇴함으로써 자신의 의도가 진심이었음을 입증했다.[38][39][40]
또한 카이사르의 일부 옹호자들은, 카이사르의 적들을 구시대적인 기득권층으로 모조리 몰고가는데, 이는 너무나 부당한 평가이다. 키케로는 이상주의자이고 원칙주의자였으며[43] 카이사르가 유린한 공화정을 수호하느라 인생을, 그리고 최후에는 목숨을 바쳤다. 소(小) 카토는 깨끗하고 검소하며 총독으로서의 내정도 마찬가지였다는 평이 대다수였고 내전이 사실상 카이사르의 승리로 결착나자 자살로 생에 마침표를 찍었으며,[44][45]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의 개인적 호의에 힘입어 자신에게 보장된 장래의 공직을 뿌리치고 가시밭길의 모험에 나섰다.
다만 위의 서술은 긍정적 평가에서도 기술했듯이 그들이 보인 위선적 면모 때문에 그리 호응받지 못하고 있다. 긍정적 평가에서도 기술했듯이 키케로는 원칙주의자라고 하지만 카틸리나 음모 사건 때 국법을 어겼으며 카이사르 내전기와 이후에도 개인의 이익을 위해 국법을 위반하는 행동을 상당히 많이 했고[46] 그 본인 역시 평민 계층에 생각만큼 개방적이지 않았고 카이사르에 대한 비판 사항을 보면 결국 원로원 기득권 수호라는 면에 갇혀 있다. 또한 키케로는 내전 직전 원로원 최종 권고에 찬성안을 던졌다. 카토 또한 평민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원로원과 대지주 평민들만 변호했다. 본인은 청렴했다 하지만 동료들의 부패에 비판하지 못했으며 평민 지원책에 정당한 의사소통을 방해하는 형식으로 오히려 공화정이 소중히 여기는 토론으로 의사결정을 위반했고 이러한 행위 때문에 후대 역사가들에게 카토의 일부 인기를 얻은 정책이 인기 영합 정책이 아니냐고 비판을 들었다. 이 문제의 정점은 바로 술라로, 공화국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옵티마테스이면서 로마에 군대가 있으면 안 된다는 법을 어기고 로마로 진군했으며, 재판 없이 로마 시민들을 마구잡이로 죽여댔다. 이미 술라 시대에 로마 공화정의 도덕성은 끝장나 있었던 것이다.[47][48]
가장 큰 문제는 포에니 전쟁 이후로 로마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였던 패러다임의 변화에 대한 대처가 '전혀'라고 할 정도로 없었다는 점. 제정이 카이사르가 원한 것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건 카이사르는 최소한 이런 패러다임의 변화에 대해 분명히 해결책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실 그게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그리고 원로원파는 포에니 전쟁으로 인해 얻은 전리품을 또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민중들에게는 나누어 줄 생각이 없이 기득권인 그들이 독점해 버렸다. 정작 그 전리품을 얻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포에니 전쟁에서 종군했던 민중들을 철저히 외면한 채로 말이다.
카이사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들먹이는 카이사르의 관용 또한, 진심으로 용서하고 관용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회유책이었을 드러내는 사건이 안티 카토 집필이다. 이 글은 소 카토의 자결을 찬양하는 키케로의 '카토'라는 글이 카토에 대한 동정론을 불러일으키자 이를 차단하기 위해 쓰였다고 전해지는데, 본문은 현존하지 않지만 다른 문헌에 전해지는 내용에 의하면 카토가 아내를 잃은 친구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에게 아내를 얻어주기 위해 자기 아내와 이혼하고 호르텐시우스와 재혼시켰다가 호르텐시우스가 몇 년 만에 사망하자 다시 자기 아내와 재결합했던 일이나 카토가 술로 스트레스를 풀었던 것을 '아내 팔아먹은 주정꾼' 식으로 디스하는 내용이어서 오히려 카이사르의 쪼잔함만 드러낸 결과가 되었다고 한다.#[50]
또한 의외로 측근들의 배반을 많이 겪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알려진 인망 높은 이미지가 사실은 거짓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가 후하게 대우하여 측근으로 삼았는데도 그를 배반한 네임드 측근만 해도 갈리아 전쟁 당시 아트레바테스 족장인 콤미우스, 갈리아 전쟁 당시 오른팔이었던 라비에누스, 역시 핵심 참모였던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 제2 상속자로 삼을 정도의 측근이었던 데키무스 브루투스, 아들처럼 대했던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등이 있고, 친위대처럼 아끼고 혜택을 베풀어준 10군단이 파업을 벌이는 사건도 겪었다. 폼페이우스의 측근들 중 폼페이우스 사후에도 이탈자가 거의 없었던 것과 비교하면 카이사르는 겉으로는 인망 높은 지도자 이미지로 한껏 자신을 포장했지만 막상 아랫사람들의 불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이기적인 지도자였다는 것이다.[51][52][53]
2. 군사적 평가: 기적의 반전 전술가[편집]
카이사르가 얼마나 훌륭한 장군이었는지는 여러 가지 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먼저 그가 싸운 곳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험악한 곳이었고, 그가 정복한 지역도 매우 광대했다. 또한 그는 잔인하고 야만스러운 민족들을 너그럽게 다스렸고 포로들에게도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부하들에게도 누구보다 따뜻한 장군이었다. 그는 갈리아 지방에서 크고 작은 전쟁들을 치르면서 10년 동안 무려 800개의 도시를 점령하였으며 300개의 나라를 무찔렀다. 그래서 300만 명의 적과 싸워 100만 명을 죽이고[54] 100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카이사르> 中
군사적 영웅으로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업적은 상당히 특이하다. 역사상 대부분의 명장들은 알고 보면 전투 이전에 이미 이길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대승리를 거뒀다. 예를 들어 한니발 바르카의 경우 자신이 싸우고 싶을 때만 로마군과 전투를 벌였고 언제나 승리했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오히려 정상적인 전투에서는 곤경에 처하는 일도 적지 않았지만, 상황이 궁지에 몰렸을 때는 예상 외로 승리하는 일이 매우 많았다. 대표적으로 다음 전투들이 있다.
- 사비스 전투: 숲길을 지나던 중 두 배에 달하는 네르비족의 매복에 걸려 장기인 로마군의 조직력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싸워야 하는 최악의 상황에 놓였지만 결국 승리한다.
- 파르살루스 전투: 정석적인 망치와 모루 전술을 펼친 폼페이우스 군을 상대로 하여, 기병이 부족하다는 약점을 보조병으로 기병을 맞받아치는 변칙 전술로 승리한다. 망치와 모루 전술의 변칙 기술을 사용했다는 것이 특기할 만한 점이다. 망치와 모루 전술이 불후의 전술임에도 이를 그대로 답습했던 폼페이우스가 이 회전에서 카이사르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한 것을 생각하면 카이사르의 변칙이 얼마나 훌륭했는가를 알 수 있다. 망치와 모루 전술에서 가장 중요한 기병의 열세(1:7의 비율)를 만회하기 위해서 기병을 뒤에 투석병을 매달고 뛰면서 잠시 정차후 투석, 다시 질주를 무한 반복함으로써 폼페이우스의 기병을 견제하게 한 후 정예 중보병을 이용하여 폼페이우스의 기병대를 섬멸한 것은 탁월한 임기응변이었다.[55] 이는 알렉산드로스나 한니발과 같은 선배와 달리 기병의 전력이 열세인 점에서 '정석을 사용할 수 없었던 것'에 기인하긴 하지만, 결과가 말해주듯이 유효하며 훌륭한 변칙이었다.
주요 전투를 살펴보면 카이사르는 정석적인 길을 걸어간 지휘관이 아니라 타고난 임기응변과 재치가 뛰어난 타입의 지휘관이었다. 바꿔 말하면 개인의 자질에 의존하는 인물로써 후세의 장군들이 배워 따라하기 어려운 타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알렉산더나 한니발과 달리 군사적인 정석을 세우지는 못했다. 사실 카이사르는 타고난 정치가로 무력은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면을 보충하기 위해 사용한 것에 가깝다. 물론 드넓은 갈리아 지역을 단 10년 만에 평정하고, 여러 위기 상황을 기가 막힌 임기응변으로 돌파했으며 나아가 당대 최고의 명성을 누렸던 폼페이우스를 격파했으며 내전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휘하 군단병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카이사르의 군사적 자질을 낮게 평가할 이유는 없다. 다만 카이사르의 군사적 자질 자체가 지극히 입체적이어서 누구도 배워서 따라할 수없는 것일 뿐.
애초에 그가 이렇게 독특한 전술을 쓸 수 있었던 이유도 상황의 유불리를 읽어내는 뛰어난 통찰력과 병사들에게서 거의 광적인 충성심을 이끌어낼 정도의 지도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병사를 통솔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났고 그 휘하에서 종군했던 로마 군단병들 역시 전투력 수준이 남달랐다. 물론 카이사르의 군단병의 수준은 수년에 걸친 갈리아 전쟁을 치르면서 다져진 것이지 처음부터 뛰어난 병사들을 통솔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갈리아 전쟁기 초반에는 경험없고 우왕좌왕하는 군단의 모습이 나오나 베테랑이 되어간다. 같은 군대가 맞나 싶을 정도로 갈리아 전쟁기 초반과 후반의 군단들은 질적, 경험적으로 엄청나게 차이나는 역량을 보여주는데, 갈리아 전쟁 후반기에는 현지 동맹부족들까지 하나 빼고 모조리 배신하고 뒤통수를 치는 바람에 보급이 완전히 차단되어 쫄쫄 굶는 와중에서도 총사령관에 대한 무한 신뢰 하나만 가지고 풀뿌리를 캐먹으면서 버티는 고참병들의 모습을 보면 카이사르의 지도력이 거의 알렉산드로스나 한니발에 비견할만한 수준이었음을 짐작 할 수있다.《갈리아 전쟁기》를 읽는 재미 요소 중 하나가 이렇게 오합지졸에서 역전의 용사로 변해가는 군단의 모습이다. 이는 항상 수적으로 열세였던 카이사르가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자 자신의 부대를 무적의 군대로 키워낸 그의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이 훌륭했음을 나타내준다. 예컨대 파르살루스 회전에서 그와 그의 병사들이 보여준 전략은 독창적이다 못해 잘 단련된 병사가 훌륭한 지휘관을 만나면 어떻게 유기적으로 움직이는지를 보여준다. 이때 당시 반대파의 지휘관이었던 폼페이우스는 수년간 갈리아에서 생존한 카이사르의 베테랑 부대를 맞아 양 진영 간의 거리를 정석의 두 배쯤으로 늘린 후 휘하 병사들에게 돌격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이는 카이사르 측 병사가 먼 거리를 달려오느라 지치는 것을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카이사르 측 병사들은 절반쯤 뛰다가 상대편이 가만히 있는 것을 보고는 중간에 잠깐 숨을 고른 후 다시 뛰었다. 당시 카이사르는 그쪽에 없었기 때문에 카이사르가 시켜서가 아니라 군단병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멈춘 것이었다.
카이사르가 전략가로서는 그리 높은 수준은 아니라고 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전략가로서는 뛰어나지 않지만 돌발 상황이 닥쳤을 때 임기응변으로 수습하는 능력이 뛰어났다고 보는 것이 그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버나드 로 몽고메리가 쓴《전쟁의 역사》다. 하지만 엘 알라메인 전투를 에르빈 롬멜과 자신의 대결로 미화하고, 조지 S. 패튼의 이름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고,[56] 마켓 가든 작전마저도 억지로 변호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신뢰도가 좀 떨어진다. 어쨌든 몽고메리는 철저한 계획이 아닌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는 것을 유달리 싫어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전후 서술 과정을 보면, 감히 브리튼을 침공한 괘씸죄로 카이사르를 깎아내리는 느낌이 매우 강하게 든다는 말도 있는데, 이건 억측에 가깝다. 기본적으로 다수의 영국인들은 로만 브리튼 시대를 긍정적으로 보며, 몽고메리가 교육받았던 시대에는 그런 경향이 더 강했다. 사실 이건 당연한 게, 로마한테 털리고 점령당한 당시의 영국 민족은 켈트족이고, 지금의 영국을 구성하는 앵글로색슨족은 로마가 물러난 뒤에 켈트족이 용병으로 끌어들인 거다. 그 뒤 앵글로색슨족이 고용주를 스코틀랜드 쪽으로 내쫓고 잉글랜드를 먹고 퍼진 것이 현대의 영미 계열 국가다. 민족적으로 볼 때는 로마와 척질 이유가 하나도 없다.
사례를 보아도 위의 두 전투도 궁지에 몰리지 않을 수 있는데 일부러 찾아 들어간 것이다. 카이사르가 워낙에 전술가로서 능력이 뛰어나고 기회를 찾아내는 데 탁월하다 보니까 순간적인 판단으로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카이사르만 아니고 전술가로 이름을 날리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경향인데 기회를 포착하고 밀어붙이는 성향상 위험한 작전을 선택하는 모험주의에 전술가의 고질병이라고 할 수 있는 한 방에 모든 것을 거는 대결전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본인 스스로도 실수를 만회하려 하거나 단점을 고치려 하기 보단 대역전승의 기회를 찾고 장점을 극대화하는 것이 낫다고 말했을 정도니 그 성향이 이해된다. 본래 병법에선 이렇게 준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임기응변으로 승리를 구하려 하는 건 무능한 장수나 하는 짓[57] 이라고 경고하는데, 카이사르는 이 것의 반례라 할 수 있다.[58]
베르킨게토릭스와 폼페이우스를 상대해서 카이사르가 패배한 두 전투, 게르고비아 공격, 디라키움 포위전을 볼 때, 카이사르는 너무 공세적인 작전을 선택했고 이게 패배의 원인이었다. 전략적인 열세에서 강대한 적을 공격하는데, 상대방은 전략적 우세를 이용해서 카이사르의 병참을 끊으면서 자신은 병참선을 확보한 뒤에 요새화한 진지에 틀어박혀서 소모전을 펼친다. 당연히 결전을 벌이려는 카이사르는 군량 부족과 포위의 위협 때문에 장기전에서 불리해진다. 카이사르의 군대가 회전 이외의 전투 경험도 풍부하다지만 로마군의 장점은 조직력에서 나오고 방어전에서는 조직력과 전투력을 상쇄할 수 있다. 거기다 수적으로 밀리면서 꼭 일부 병력을 떼어놓아서 다른 쪽을 견제한다는 식의 작전을 구사한다. 자신의 전술적 역량에 자신을 가지니까 하는 것이지만 직접 전투를 회피하고 소모전을 강요하는 전략에 스스로 걸려들어가는 식의 전투를 벌임으로서 쓸데없이 패배하고 만다는 면도 있다.
요컨대 카이사르는 공세일변도 전술 때문에 위기를 자초하는 면이 강한 만큼 상대가 판짜기를 잘하는 방어적인 장군이면 살짝 휘둘리는 경향이 존재한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전략적 식견은 군사적인 면보다 정략적인 측면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갈리아 전쟁 때는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서 게르만족과 대결상황에서 충분히 갈리아에 동맹군을 만들어냈고 이후에도 갈리아가 통일되지 않은 상황을 잘 활용했다. 그러다가 베르킨게토릭스라는 걸물이 나타나서 갈리아 전체의 동맹을 이끌어내는 상황에서 예상치 못하게 고립되었다. 내전에서도 원래대로라면 북아프리카부터 차분하게 공략하려는 당초 계획이 무너지자 정치적으로 우위를 점한 뒤에 가한 공세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전략적으로 주도적인 위치를 가질 수 있는 경우가 없었고 항상 적지에서 혼자 싸우는 상황이 연출되었다는 환경적 문제도 감안해야 한다. 갈리아 전쟁도 사전에 치밀한 계획 아래에 대군을 조직적으로 밀어붙인 것은 아니었고[59] , 내전도 예상치 못한 싸움에 동족과의 전쟁이라는 면에서 제약이 있었다.
가장 큰 불운이라면 카이사르의 장점과 약점을 파악하고 소모전을 벌이려는 우수한 지휘관을 두 번이나 연달아 상대한 것이고 가장 큰 행운이라면 둘 다 소모전을 하면 더 유리할 상황에서 승기를 탔다고 섣불리 전투를 걸었다가 카이사르에게 회생과 승리의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다.
카이사르 본인의 전투 실력이라면 의외로 모자라기는 커녕 뛰어난 편이었다. 카이사르는 젊을 때부터 마르고 호리호리한 체형이었는데 의외로 뛰어난 검술과 기마술, 격한 전투에도 지치지 않는 강한 체력을 가져 군단병들이 처음엔 무시하다가 나중엔 존경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말을 잘 타서 등자가 없었기에 허벅지에 힘을 주고 버텨야 하는 승마 자체가 매우 힘든 시대에 경기장에서 안장도 고삐도 없는 말을 그것도 양손을 뒤통수에 짚고 타는 기행을 벌이는 바람에 어머니인 아우렐리아를 기겁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요즘으로 치면 폭주족이나 바이커 갱이 하는 핸들 놓고 오토바이 타기 수준의 서커스인데 그러다 낙마하면 절대로 곱게 안끝난다. 서양에서 등자가 보급된 시기가 중세 쯤인데 이 정도 기행을 보일 정도면 카이사르가 말을 잘 탔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나 여느 기마 민족들이 말을 태어날 때부터 타고 자랐듯이 본인이 말을 계속 타고 지냈다면 이런 묘기를 부렸을 가능성도 있다.
폼페이우스의 맏아들인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스페인에서 치른 문다 전투에서는 직접 전투에 앞장서서 싸운 기록이 나온다. 높은 지형에 있던 적군의 공격에 고전하자 직접 선두로 나섰고 선봉에 선 카이사르에게 적군의 공격이 집중됐다. 아피아노스는 “카이사르에게 날아온 투창이 200개나 됐다”라고 기록했다. 카이사르는 투창을 피하기도 했고 일부는 방패로 막기도 했다. 투창 몇 개는 방패에 매달려 덜렁거리기도 했다. ‘운이 좋게도’ 카이사르는 상처 하나 없었다. 카이사르는 투구를 벗어 자신이 누구인지 병사들이 쉽게 알아보도록 했다. 그러고는 갈리아와 게르마니아, 브리타니아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정예 10군단에게 다음과 같이 외쳤다. “그대들은 그대의 장군이 고작 아이들에게 패배하도록 놔두면 수치스럽지도 않은가?”(플루타르코스) 주춤하던 병사들은 다시 전진했고 끝내 승리를 거둔다. 후에 카이사르는 “나는 항상 승리를 위해 싸웠지만 이번에는 처음으로 살기 위해 싸웠다”라고 토로했다. 수십, 수백 명의 집중 공격을 받으면서도 상처 하나 없이 살아남은 운빨과 실력을 갖췄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배짱이 군인들에게 신뢰를 받아서 나중에 군인들이 파업을 해도 카이사르가 타이르면 곧장 귀담아 듣거나 전쟁 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게 해주는 리더십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2.1. 반론[편집]
리델 하트의 경우 카이사르가 일레르다 전투와 파르살루스 전투 이전에는 잘 쳐봐야 능력 있는 부관형 지휘관일 뿐이라며 여기서 최고의 승리인 파르살루스 하나를 더해봤자 일급 지휘관이 되긴 힘들다고 혹평했다. 다만, 이건 군사학자로서 리델 하트의 스키피오 빠심이 폭주한 결과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평가로 인정받진 못 한다.
암비오릭스의 난 초반에 로마군이 대패한 사건에 대해서도, 현대 학계에서는 애초에 로마에 적대적인 부족민들의 영역에 군대를 분산시켜 배치한 카이사르의 결정에 문제가 있었으며, 카이사르가 자신의 실책을 감추기 위해 퀸투스 티투리우스 사비누스를 무능하고 비겁한 장군으로 매도하며 모든 책임을 그에게 뒤집어씌웠다고 본다. 실제로 독자적으로 노르망디 일대의 갈리아족을 평정했고, 카이사르가 브리타니아 원정을 떠났을 때 반란을 일으킨 메나피족을 제압하기도 할 정도로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편이었던 그가 갈리아 전기에서 묘사했던 것처럼 무능하고 겁많은 인물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다만, 후에 내전 중 본인이 직접 스페인 지방으로 군대를 끌고갈때 4개군단이나 맡겼으나 패배했던 쿠리오에게는 상당한 이유를 들어 본인이 성급한 행동을 할수밖에 없는 이유를 들기도 하고, 해당 패배도 본인의 실수임을 인정하고 그 해 겨울 직접 갈리아 전선에서 같이 머무는걸 보면 과연 그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운건지는 의문이 든다. 또한, 그 이후 그가 잃은 군단명을 그대로 다음 군단에게 부여한것을 보면 크게 신경쓴 사람이 아닐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