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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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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시인. 본관은 진성(眞城), 호는 육사(陸史), 본명은 이원록(李源祿) 또는 이원삼(李源三), 이활(李活)이며 후에 이육사로 이름을 개명했다. 윤동주, 한용운과 더불어 일제강점기의 저항 시인으로 유명하다.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 독립유공자 이광호(李洸鎬)와 독립유공자 이영호(李寧鎬)는 그의 9촌 삼종숙(三從叔)이다. 또한 이육사의 시신을 거둔 것은 10촌 친척인 독립유공자 이병희이며, 독립유공자 이효정과도 친척이다.
2. 생애[편집]
1904년 5월 18일[14] 경상북도 예안군 의동면 원촌동(現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원촌마을) 881번지에서 퇴계 이황의 13대손인 아버지 이가호(李家鎬, 1878 ~ 1941.4.26.)와 어머니 김해 허씨 허길(許吉, 1876 ~ 1942. 4. 29)[15] 사이의 6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영천군 화북면 오동리(梧洞里) 사람 안용락(安庸洛)의 딸 안일양(安一陽, 1906.11.7. ~ ?)과 결혼하였다.[16]연보
이육사의 딸인 이옥비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1934년 육사와 정치군사간부학교 1기생 동기인 외삼촌 안병철(安炳喆)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잡혀들어간 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한 자백으로 여러 사람이 체포되어 죽거나 다쳤다. 이 일 때문에 이육사는 크게 분노해 안병철의 뺨을 때린 후 장인과 처삼촌에게 두루마리 6장이나 되는 편지를 보내 더러운 피의 일족(부인 안일양을 지칭)인 사람을 더는 받아들일 수 없으니 데려가라 전했다 한다. 심지어 그 일 이후 무려 7년 동안이나 본가에 들러도 부모님께 인사만 드리고 잠은 여관에서 잤다고 한다.[17]#
어린 시절 대한제국 시기 장릉(章陵) 참봉을 지낸 조부 이중직(李中稙, 1847 ~ 1916. 1. 17)에게서 소학을 배우는 등, 한학을 공부하다가 조부가 별세하던 1916년 보문의숙(이후 도산공립보통학교로 개칭)에서 수학하기 시작하였다. 이 경험으로 그는 훗날의 창작 활동에서 한학을 배운 흔적이 보인다.[18] 졸업 후 1920년 가족들이 모두 대구부 남산정(現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662번지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그리고 19살 때 영천군의 사립 백학학원(白鶴學院)의 교원으로 9개월간 근무하였고 1924년 4월 일본 도쿄에 유학하여 킨죠(錦城) 예비학교를 1년간 다니다가 중퇴하였다. 1925년 8월 중국 베이징으로 유학하여 중국대학(中國大學) 상과에 입학하였으나 2학년 때 중퇴하였다.#
1927년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 때의 수인번호인 264에서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이육사의 이름은 여기에서 시작된 셈.[19][20][21]
출옥 후 1929년 5월부터 중외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1여년간 근무하였는데, 그 사이 1930년 1월 3일 이활이라는 이름으로 첫 시(詩) <말>을 조선일보에 발표한다. 이때 후에 교보생명을 창업하게 되는 신용호에게도 영향을 미쳐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고, 나아가 교육보험사업에 설립하는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22]
1931년 8월에는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전직하였으나 1932년 3월 퇴사하였다. 같은 해 4월 만주국 펑톈으로 가서 의열단 핵심단원 윤세주를 만나 의열단 입단을 권유받고 곧 난징에 있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23] 에 1기로 입교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폭탄·탄약·뇌관 등의 제조법과 투척법 그리고 피신법·변장법·무기운반법 등을 배웠으며 권총 사격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전한다.
1933년 4월 학교 졸업 후 7월경 귀국하여, 육사라는 필명으로 시 《황혼(黃昏)》을 《신조선(新朝鮮)》에 발표하여 시단에 데뷔했다. 신문사·잡지사를 전전하면서 시작 외에 논문·시나리오까지 손을 댔고, 루쉰의 소설 《고향(故鄕)》을 번역하였다. 그러나 1934년 3월, 의열단 및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출신자라는 이유로 경성부 본정경찰서에 검거된 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며 7월에야 기소유예로 풀려날 수 있었다##2.
1937년 윤곤강(尹崑崗)·김광균(金光均)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 그 무렵 유명한 《청포도(靑葡萄)》를 비롯하여 《교목(喬木)》 《절정(絶頂)》 《광야(曠野)》 등을 발표했다. 1943년 베이징으로 건너갔다가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5월에 귀국했다가 이 해 6월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이듬해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옥사하였다. 둘째동생 이원창과 함께 의열단에서 활동했던 이병희가 그의 유해를 수습하여 서울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했고, 1960년 안동시에 이장됐다. 1968년에는 안동시에 그의 시비가 건립됐다. 2004년에 이육사 문학관이 세워졌고, 안동시에서는 안동 강변도로를 "이육사로"로 개칭했다. 강변 도로를 타고 안동댐으로 가면 수몰지구 민속촌 입구에 시인의 대표 시인 광야 시비가 세워져 있으며, 도산면 서부리와 도산서원을 지나 온혜리 도산면사무소 교차로에서 토계리 방향으로 들어가면 원천리에 이육사 문학관과 청포도 시비가 세워져 있다.
3. 기타[편집]
- 그의 경력이 독립운동에 매진한 것으로(옥살이만 17번) 채워진 덕분인지 그는 윤동주와 함께 '저항 시인'으로서 평가받게 되었으며 실제로 1943년부터는 한글 사용에 대해 탄압을 가해오자 한시만 쓰는 식으로 붓을 꺾지 않으면서도 저항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게다가 두 시인 모두 해방을 목전에 두고 옥사)[24] 하지만 현재 윤동주는 서훈이 3급이고 이육사는 서훈이 4급이다.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보훈처에 정정을 요구하였으나 보훈처에서는 안 된다는 말만 있어 왔다. 아무래도 윤동주는 문단에서 힘깨나 쓰는 분들과 엮일 일이 없었으므로 거부감이 적었으나, 이육사는 문단에서 숨기고 싶은 일들이 많은 분들과 엮여왔기에 그의 이름이 언급되면 불편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동생부터 남로당계 고위인사라 북한 사회주의 정권과의 연결성을 부정할 수 없는 것도 문제. 현대에야 이런 연좌제적인 사상을 거의 적용하지 않고 대중들도 이육사 시인의 동생에 대해 거의 알지도 못하지만, 여러 요건이 얽혀 영향이 없다고 보기는 어렵다.
- 동생뿐만 아니라 이육사 본인도 사회주의자였다. 1931년 이육사는 김원봉에 대해 중국국민당의 지원을 받음으로써 "중국의 부르주아 계급과 야합"하고, "사상이 애매하고 비계급적"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코민테른의 일국일당주의를 위반하여 "조선인이 중국에서 조선의 혁명 사업을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혁명적 정조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육사가 1933년 국내에서 발표한 '자연과학과 유물변증법'이라는 글도 그의 이념적 성향을 잘 보여준다.# 이육사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졸업식 때 지은 연극 '지하실'에서는 조선에 공산제도가 실현되고, 토지는 국유화되고, 노동자와 농민이 지배하는 사회가 실현돼, 마지막으로 '조선혁명 성공 만세'를 외치는 내용이어서 이육사가 독립운동의 방향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상일 동의대 교수는 "이육사 연구는 사회주의적 성격에 대해서는 사실상 함구하고 있었다. 반공주의의 감옥에 갇혀버린 우리 현대사의 억압으로 인해 이육사의 민족주의는 보수적 민족주의에 기반한 주자학적 전통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 획일화되어 버리고 만 것"이라고 지적했다.@
- 전체적으로 그의 시를 평가하자면 윤동주가 부끄러움과 반성, 기독교적 희생을 주로 다루고 있다면 이육사는 남성적이면서도 목가적인, 그리고 극한에 서서도 굴하지 않는 의지를 표출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육사의 시가 주제가 명확하게 드러난다고 해서 수능에 나오면 난이도가 쉽다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딱 쉬운 난이도의 해석으로만 유도하는 고교 교육과정까지만 통하는 소리다. 이육사의 시는 상징적인 시어가 많아 의미 자체를 해석하기 어려워 이육사의 시 앞에서는 자동으로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말까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능에서 윤동주와 함께 많이 출제된 작가인데 이는 친일 행적이 없기 때문. 199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자야곡, 199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꽃이, 200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교목이, 201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강 건너간 노래가, 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초가가 출제되었다.
- 오늘날 교과서에서 저항시인의 대표주자로 배우고, 또 그의 작품이 종종 교과서에 실리는 만큼 단순히 '저항시인'으로만 기억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는 '저항시인'이라는 수식어조차 부족해 보일 정도로 평생을 초인적인 삶을 살았다. 이미 20대 초반 무렵무터 각종 독립 운동에 연관되어 감옥살이를 했으며, 만주까지 건너가서 독립운동을 했고 조선 독립군이 사용할 무기 반입 계획에 몸소 참여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마흔 남짓한 짧은 인생이었지만 위대하게 불타오른 애국지사의 표상.
- 일제 강점기를 거쳐 갔던 수많은 문인들 중 가장 적극적으로 애국, 독립운동을 한 인물이다. 39여년의 인생 동안 옥살이만 17번을 했다는 사실이 애국심과 민족의식이 투철한 그의 삶을 대변한다.
- 도산서원 근처에 있는 이육사문학관에 가면 이육사의 딸인 이옥비(1941년~)씨 를 만날 수도 있다. 물론 운이 좋아야 한다. 문학관 뒤편에 거주하고 있다. 2013년 11월 3일 안동대학교 선비캠프에서 도산서원 방문 뒤인 다음날 이육사문학관 관람과 더불어 이분을 만나서 인생 및 이육사의 딸이라는 위치 등등 여러 이야기를 강연하였다. 2007년부터 이육사문학관 근처에 있는 목재고택에서 사시면서 문학관에 왕래한다[25]
- 동생인 이원조는 좌파 문인으로 활약하다 해방 후에 북한 정권에서 고위직을 한다. 물론 박헌영과 더불어 숙청되는데, 여러 이설이 있지만 1955년경에 정치범 수용소에서 옥사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때문에 이육사 역시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기는 하지만, 해방 이후 북한 정부 수립과는 관련이 없는데도 괜히 동생때문에 언급되기도 한다. 이육사 생전에 작품집이 발간된 적은 없었고, 이원조가 광복 후 1946년에 형의 작품집을 발간한다.
- 이육사의 집안은 독립운동가 집안으로 친척 중 유명한 독립운동가가 많다. 그 중 유명한 여성 독립유공자로 경성트로이카 활동을 한 이병희와 이효정이 있다. 이병희는 이육사와 이재유의 죽음에 대한 증언을 남겼다. 이효정은 박진홍, 이순금과 친구이고 이관술의 제자이기도 한 경성트로이카의 핵심으로 정말 역사의 산증인이었다.
-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청림동에 청포도 문학공원이라는 작은 기념공원이 있다. 오랜 수형생활로 건강이 안 좋아진 이육사는 한학자인 사촌형 이종형이 있던 청림동으로 휴양을 왔는데 당시 이곳은 60만평 크기의 동양 최대의 청포도 농장[26] 있어 이를 보고 이육사의 대표작 청포도가 만들어 졌다고 알려짐에 그를 기리기 위해 조성되었다.
- 2019년 2월 26일 이육사 선생의 새로운 사진과 친필이 적힌 사진이 발견돼 처음으로 공개됐다. #
동생인 이원일, 친구인 조규인과 함께 찍은 20대의 이육사(우측)의 사진.
- 2019년 6월 18일자 한국일보 기사에 의하면, 이육사 선생은 대나무로 살점을 떼내는 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
4. 대중매체에서[편집]
5. 작품[편집]
이육사의 시는 독립운동 지사로서의 강한 의지를 담은 시들이 많지만,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느끼던 인간적인 고뇌를 담은 시들도 존재한다. 대표 시로는 <황혼>, <절정>, <광야>, <꽃>, <교목>이 있다.
6. 관련 문서[편집]
7. 둘러보기[편집]
[1] #[2] 원촌파(遠村派) 21세 원(源) 항렬.[3] 인근의 의촌리, 토계리, 단천리, 온혜리와 함께 진성 이씨 집성촌이다.[4] 도로명 주소로는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백운로 533-20[5] 음력 1943년 12월 21일.[6] 도로명주소 미발급.[7] 李源一. 진보이씨상계파세보 하권 542쪽에는 이원유(李源裕)로 등재되어 있다. 1906년 11월 21일생.[8] 李源昌. 1914년 1월 25일생.[9] 李源洪. 화가로 활동하다가 19세 때 요절했다.[10] TV 프로그램 선을 넘는 녀석들에도 잠깐 언급되었다.[11] 李東博. 1941년 11월 13일생. 셋째 남동생 이원창의 셋째 아들이다.[12] 선을 넘는 녀석들에도 출연했다. 남원 양씨 양진호(梁振鎬)와 결혼하여 슬하에 양우영(梁佑榮)·양우석(梁佑錫) 등 두 아들을 두었다.[13] 베이징대학과 다른 학교로, 1913년 쑨원에 의해 세워졌고 1949년 폐교되었다.#[14] 음력 4월 4일.[15] 구한말 대한제국 군대해산에 반발해 거의한 13도 창의군(정미의병)의 의병장 허위의 사촌 형 허형(許蘅)의 딸이다.[16] 충남지사와 국회의원을 지낸 심대평의 처 안명옥과 안일양은 사촌지간이라고 한다.위키백과 심대평[17] 이후 안병철은 죄책감에 평생 이육사를 보지 못했고, 부인인 안일양 역시 충격으로 여러차례 자살기도를 했지만 시어머니의 만류로 살았다고 한다.[18] <청포도>에서 마지막 연에서 '아이야'라는 구절과 같은 것 등을 비롯하여 그의 시 대부분이 한시의 기승전결 구조와 간결한 시행배열을 보이고 있다.[19] 어떤 강사가 학생들에게 이육사의 호를 쉽게 외우도록 하기 위해 지어낸 얘기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있으나, 사실무근이다. 적어도 1963년 12월 18일자 동아일보에서부터 육사라는 호는 대구형무소 수인번호에서 취음한 것이라고 나오며, 1934년 의열단 관련자로 투옥되었을 당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에 본명 이활(李活)에 이명 李源三·陸史임이 병기되어 있다.[20] 본명인 이활(李活)로 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그 외에도, 본디 '치욕의 역사를 도륙낸다', '현재의 역사(일제강점기 시대였으니...)를 찢어죽이겠다'라는 의미에서 호를 '육시할 육'자에 '역사 사'자를 써 육사(戮史)로 하려 했으나 호가 매우 거칠고 사나우며 너무 노골적이라는 집안어른 이영우의 권고로 육자를 '뭍 륙'자로 고친, 즉 육사(陸史)로 순화했다고 한다. 이렇게 전해지는 이육사 시인의 필명이나 호 등은 육사(陸史), 육사(戮史), 육사(肉瀉), 대구이육사(大邱二六四)라고 한다.[21] 서술 근거가 된 자료는 아래와 같다. "육사 이름, 六四→戮史→肉瀉→陸史로 변천" - 오마이뉴스, 2004년 7월 31일, 항일시인 '육사' 六四→戮史→肉瀉→陸史로 - 동아일보, 2004년 8월 1일, 가족 이야기- 시인 이육사의 딸 李沃非 - 조선일보, 2015년 1월 2일, 《이육사의 육사시집》 구글 도서검색 결과, 한국어 위키백과 '이육사' 문서[22] 다만 이는 교보생명에서 발표한 내용으로서, 추가적인 검증이 필요하다.출처[23] 정식 명칭은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간부 훈련반 제6대[24] 공교롭게도 두 시인은 각각 북부 출신, 남부 출신이었다.(윤동주 시인은 한반도 출신이 아닌 연변 지역의 용정이 고향이지만 본적은 함북 청진이었다.)[25] 원래 이육사 슬하에 자녀는 1남 1녀이나 아들은 일찍 요절해 조카인 이동박을 양자로 들여 대를 이었다.[26] 포항 해군기지가 이 청포도 농장 부지위에 건설되었다.[27] 극본 김항명, 연출 장형일 PD, 1부는 이상화 편으로 백윤식이 열연했고 2부는 윤동주 편으로 태민영이 열연했다.[28] 1989년 KBS 드라마 <바람과 구름과 비>에서는 흥선대원군 역,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정도전 역, 2002년 KBS 드라마 <제국의 아침>에서는 왕식렴 역, 2003년 KBS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정중부 역.[29] 배우들의 호연과 세련된 연출로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휴스턴 영화제 특집극 부문에서 대상을 받았다.[30] 2018 수능에 출제되었는데 교과서나 EBS 연계교재 그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았던 작품이다. 다만 교육청 모의고사에는 등장한 전적이 있다.[31] 모래 언덕.[32] '자(子)'는 자시 즉 밤 11시~1시라는 시간을 의미하고, '야(夜)' 역시 밤이라는 시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곡(曲)'은 노래를 의미하므로 '자야곡'은 '한밤중에 부른 노래'를 의미한다.[33] 이육사의 시에서 자주 보이는 희망의 소재. 강철이라는 금속으로 강인함을, 무지개라는 자연물로 희망을 나타내 굳센 희망을 의미한다.[34] 혹은 다른 해석도 존재 한다. 겨울이라는 시어가 시련을 의미하는데, 이에 대한 속성으로 각각 강철과 무지개가 제시되었다. 시련은 강철처럼 굳건하고 엄중하여 결코 부서지지 않을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무지개가 언젠가 사라질 허상이듯이 시련 또한 사라질 것이라는 희망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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