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근호/1998 FIFA 월드컵 프랑스/네덜란드전
덤프버전 :
관련 문서: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E조
[ 펼치기 · 접기 ] - <-4><bgcolor=#e6002d,#191919> {{{#ffffff {{{-2
[각주] - #!end[각주]}}}}}}}}} ||||}}}}}}}}} ||
1. 개요[편집]
이 경기는 일명 마르세유의 치욕, 마르세유의 비극으로도 불리는 경기다. 대한민국이 월드컵에서 1경기에 5실점, 5점 차 이상의 대패를 당한 건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16개국 본선 때 헝가리에 0:9, 터키에 0:7 대패를 당한 이후 무려 44년 만의 일로, 대한민국 축구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경기 중 하나다. 또한 현재까지도 5 : 0의 스코어는 축구 경기에서 참패를 뜻하는 명사로 자리잡힐 만큼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준 경기이기도 하며, 오대영, 오대빵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내기도 했다.[1]
대한민국은 이 경기에서의 대패로 인해 남은 경기 결과와 상관없이 16강 진출이 좌절되었다.
2. 요약[편집]
속수무책이네요.
완전히 오늘, 완패입니다.
차범근 감독의 전술은 이미 실패작 수준이었고 선수 기용도 도저히 이해 못할 고집스런 수준이었다.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
2002 월드컵을 대비하여 다음 벨기에전 때 신인 선수들을 포함하는 새 진형을 갖추겠다.
우리는 더 많은 득점을 할 수 있었지만, 한국의 골키퍼가 너무 뛰어나서 더 많은 골을 넣지 못했다.
당시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거스 히딩크[3]
이 경기를 지켜보신 축구를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여러분의 참담한 심정, 저와 똑같을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절대로... 좌절을 해서는 안됩니다. 한국 축구는 꼭 다시 일어설 겁니다. 성원해주신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3. 경기 전[편집]
이변의 드라마를 꿈꾸며 옆의 링크는 당시 경향신문 프랑스 특파원이 네덜란드전을 앞두고 쓴 기사이다. 경향신문 프랑스 특파원은 네덜란드 기자가 최소 2:0 이상 승리를 예상했는데, 다른 외국 기자는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며 한국은 그것이나 기대해 보라면서 고개를 내저었다고 한다.
해외 축구 자체에 대해 매우 무지하기 짝이 없었으며, 당시 한국은 1997년 외환 위기를 맞이한 상태였다. 환경도 열악하다 보니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었다. 그럼에도 한국 언론이나 방송은 멕시코전의 패배는 잊었다는 듯 앞다투어 "네덜란드 해볼만 하다.", "네덜란드 약점은?", "네덜란드 격파 비책" 같은 제목으로 이른바 뇌피셜만 가득찬 축알못스러운 기사들만 주구장창 골라서 쏟아냈다. 한편 어떤 무속인[5] 은 네덜란드에 3:1로 이긴다고 해서 눈길을 끌기도 했다. 네덜란드에 3:1승리 무속인
그나마, 유일무이하게 꿈이나 깨라고 예언 수준으로 예측한 것은 딱 하나 뿐인 시사저널이었다.차범근호/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에 나오듯이 시사저널은 '다들 단꿈에 취했는데 한국축구 수준으로 월드컵 16강은 커녕, 1승도 불가능하다.' '잘해야 1무 승점 1점 거둔다.' '이번 월드컵은 승점 1점 1무 2패가 고작이며 네덜란드에게 한국은 4골차 이상으로 질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예측까지 해 버렸다. 이러자, 시사저널은 당시 엄청난 비난을 들었다. 하지만, 경기 후에 경악스럽다고 독자들이 뭔 예언이라도 했냐고 반응했다.
경기 당일 신문 제목들은 더욱 가관이었는데, 최용수는 네덜란드전에서 반드시 결승골을 넣겠다고 인터뷰했다. 최용수 반드시 결승골을 넣겠다 기사들 제목은 "오늘 네덜란드 잡는다.", "차범근 비책", "네덜란드 잡으면 16강 청신호.", "44년 한 꼭 16강 간다" 등이었으며 비겼을 때 경우의 수를 논하는 글들도 아주 드물게 있긴 있었다. 확실히 상대하는 3개국 중 제일 강팀이 네덜란드라는 것은 알았기 때문이다.
네덜란드가 1차전인 벨기에전에서 비기는 것을 보고 우리도 해볼만 하다는 생각은 그저 근거 없는 자신감이 더욱 커진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앞선 일본과 아르헨티나의 경기에서 일본이 0:1로 석패했지만 그나마 선전하는 것을 봤는데다 현지 유럽 언론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별볼일 없는 모습을 질타하는 것을 보고 조바심이 나서 그렇게 됐을 이유도 있다지만 그 당시엔 2002 월드컵을 공동 개최하면서 한일 양국 정상이 이런 약속을 한 전례가 있었다.
1996년에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 발표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하시모토 류타로 전 총리 두 정상은 서로의 공동 개최를 축하하며 한일 양국 두나라가 2002년 월드컵 결승전까지 올라가 멋진 맞대결을 펼치자는 덕담이 오가긴 했다.[6][7][8] 이럴 정도였으니 당연히 당시 대한축구협회나 기자들도 지금보다도 더더욱 현실파악을 전혀 못하던 시절이고, 아무래도 욕을 하던 말던 좋던 나쁘던 조회수 유도와 발행 부수 증가와 트래픽 유도를 위하여 일부러 관심성 기사를 써대는 게 예나 지금이나 흔한 기자들이라는 점도 있지만...
유럽 언론은 차범근 전 감독이 월드컵에서 승리를 얻지 못해 자신을 질타하는 한국 팬들의 분위기를 전하며 일본과 비교했을 때 한국은 실망스럽다는 식의 기사를 실었다. 차범근 전 감독 압박 한국 관중들
이때의 네덜란드-벨기에전의 결과는 순수히 양 팀의 실력만 보고 선수들의 멘탈을 좌우하는 양국 관계를 몰라서 나온 말이다. 비록 당시 벨기에는 대부분 30대가 넘은 팀이고 객관적인 전력으로 보면 네덜란드에 처지는 상태였지만, 사실상 홈팀이었고 과거 벨기에는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한 국가였고, 그것 때문에 네덜란드를 숙적으로 여겨 네덜란드와 경기를 할 때이면 항상 자기 실력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면이 있던 것이다. 실제로도 1974 FIFA 월드컵 서독,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 유럽예선에서는 네덜란드가 벨기에를,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에서는 벨기에가 플레이오프 끝에 네덜란드를 밀어내고 월드컵에 올라갔다. 그리고 4년 전 1994 FIFA 월드컵 미국에서는 벨기에가 네덜란드를 잡았다.[9][10][11]
심지어 네덜란드 팀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흑백 갈등을 지적한 기사가 나오기도 했는데, 이는 파트릭 클라위버르트나 에드가 다비즈, 클라렌스 세도르프를 두고 한 얘기였고 실제로 당시 악동으로 불렸던 클라위버르트가 훈련 중 다툼을 일으켰다는 기사가 있기는 했고, 팀 내에 흑백 갈등이 아주 없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히딩크가 그 문제를 잘 통제, 관리하고 있었다는 것.[12] 정작 차범근 본인은 "네덜란드와는 비기고 벨기에를 꺾는 것이 목표다"고 말했다.[13]
최용수는 자신의 골 결정력이 네덜란드의 데니스 베르캄프에게 뒤지지 않고 네덜란드를 상대로 반드시 결승골을 넣고 마르세유에서 1승을 얻겠다고 호언장담했다.[14] 마르세유 1승 기적은 있다
아무튼 마치 우물 안 개구리같은 언론의 유언비어 보도를 믿었던 많은 국민들은 듣도보도 못한 나라 네덜란드 정도면 이길 수 있다는 망상을 굳게 믿고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만 해도 위성방송이나 케이블 방송이 널리 퍼지지 않았던 때였고, 해외 축구의 실력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은 당시의 축구 전문가들 정도 뿐이었다. 그리고 당시 이른바 축빠들은 흔히 축구 잘 하는 나라라 하면 월드컵 단골 손님들인 브라질, 아르헨티나, 독일, 이탈리아 정도를 생각했고[15] , 유럽 만년 콩라인 네덜란드가 어느 정도로 강팀인지, 심지어는 네덜란드가 세계 지도의 어디에 있는지나 어느 대륙에 속하는지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16] 게다가 KBS에서는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유럽 예선도 몇 경기 골라서 중계해줬고, 축구 잡지 베스트 일레븐에서는 본선 32개국 진출 예상 선수 개개인의 플레이 스타일까지 소개할 만큼 나름의 정보 제공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축구계는 우물 안 개구리 수준이었다.
한편, 프랑스 월드컵에 출전했을 당시의 네덜란드 대표팀은 한국 언론들 및 이를 믿었던 한국 국민들의 예상과는 완전히 딴판일 정도로 상당히 강력한 스쿼드를 갖춘 강팀이었다. 네덜란드 대표팀의 전성기로는 1974 FIFA 월드컵 서독과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에서 연이어 월드컵 준우승을 이룬 시절, UEFA 유로 1988에서 우승을 차지했던 시절,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준우승을 했던 시절 등이 꼽힌다. 전대회인 1994 FIFA 월드컵 미국 때도 네덜란드 대표팀은 매우 인상적인 경기력을 보여줬다. 8강전에서 우승국 브라질을 만나 2:3으로 석패했지만, 이 경기는 전반전 내내 0:0으로 팽팽히 맞선 데다가 후반전에 들면서 0:2로 뒤지고 있다가도 곧바로 2:2까지 따라붙는 근성까지 보여주었을 정도로 대회 최고의 명경기로 꼽혔다.
UEFA 유로 1988 우승 당시 네덜란드는 마르코 반 바스텐, 루드 굴리트, 프랑크 레이카르트를 앞세운 오렌지 삼총사로 우승을 차지했는데 오렌지 삼총사 외에도 수비수 로날드 쿠만과 그의 형인 에르빈 쿠만, 얀 바우터스, 제랄트 바넨부르그, 아론 빈테르, 반 티그렌과 골키퍼 한스 반 브루켈렌 등이 포진될 정도로 막강한 스쿼드를 가졌다. 참고로 이때 네덜란드는 유로 대회 직전에 열린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자국 명문팀인 PSV 아인트호벤이 거스 히딩크 전 감독으로 우승을 차지하는 등의 면모를 과시해 나름대로는 절정의 상승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당시 스쿼드만 봐도 꽤나 화려하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네덜란드의 면면을 살펴보면 당시 최고의 전성기에 접어들은 섀도우 스트라이커의 교과서 데니스 베르캄프를 필두로, 세계 정상급 스피드 윙어였던 마크 오베르마스, 최강의 타겟맨 파트릭 클라위버르트[17] , 중원의 싸움닭 에드가 다비즈와 프랑크 더부르-로날트 더부르 형제[18] , 루드 굴리트 이래로 네덜란드 최고의 테크니션이라 평가받은 클라렌스 세도르프, 다재다능한 만능 멀티플레이어 필립 코쿠, 캄펜의 바위라 불리며 강력한 피지컬로 상대 공격수들을 제압하는 수비수 야프 스탐, 그리고 이제는 전설이 된 최고의 골키퍼 에드윈 반 데 사르 등 당대 월드 클래스로 불릴만한 선수들이 즐비했다. 그것도 포지션 편중은 커녕 공수 전반에 걸쳐 골고루 분포되어 있고 골키퍼까지도 완벽했던 것이 1998 네덜란드의 스쿼드다. 한마디로 1998 네덜란드의 스쿼드는 네덜란드 2번째 전성기였던 것이다.[19] 각종 게임이나 TV, 영상 매체로 축구 역사를 쉽게 접할 수 있는 현 세대 입장에선 당시 각 리그 레전드들을 박박 긁어모은 수준의 압도적인 스쿼드다. 게다가 차범근과는 경험과 능력면에서 매우 뛰어난 거스 히딩크가 지휘하고 있었으니 한국과는 차원이 너무나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당시 네덜란드 선수들 대부분은 각각 다른 팀에서 뛰고 있었지만 1994-1995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의 우승을 이뤄낸 AFC 아약스 출신의 멤버들로 조직력 또한 문제가 없었다. 네덜란드는 결국 이 대회 준결승전에서 브라질을 만나 승부차기까지 간 끝에 석패했지만 객관적인 경기력은 브라질을 앞섰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으며, 히딩크가 이 대회 이후 사임한 것도 저렇게 훌륭한 스쿼드를 가지고도 4강 그것도 4위에 그쳐서 실망스러운 결과였기 때문이라는 말이 신빙성 있게 들릴 정도였다. 그러니까 정말로 네덜란드가 콩라인만 아니었다면 우승을 논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스쿼드인 것이다.
물론 상기한 대로 당시는 비단 유럽 축구 뿐 아니라 외국에 대한 인식이 지금에 비하면 매우 무지한 시기였기에[20] 많은 국내의 축구팬에게 네덜란드가 얼마나 잘 하는지 모르던 시절이다.[21] 경기를 중계하던 송재익과 신문선도 자막의 다비즈의 로마자 스펠링만 보고 "다비드즈?"라고 잘못 발음했을 정도로 나름 국내 축구 전문가들이라는 사람들조차 유럽 축구에 대해 매우 무지했다.
그러나 당시 세계에서 가장 날카로운 공격력을 가진 네덜란드는 월드컵 전 평가전에서 파라과이, 멕시코, 나이지리아를 상대로 모두 5골이나 넣는 가공할 공격력을 보여준 팀이다. 즉, 당시 16강 정도의 전력을 가진 팀을 상대로도 네덜란드는 5골을 넣을 수 있는 팀인 것이다. 따라서 한국이 네덜란드에 5골을 실점한 것은, 유럽 축구를 어느 정도 잘 아는 사람에게는 딱히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네덜란드전을 앞둔 한국에 펠레는 컬럼을 통해 최소한 무승부를 거두어야 하는 경기지만 그렇다고 수비만 하지는 말라고 조언하며 하지만 네덜란드는 5골을 넣을 수 있는 팀이란 말도 잊지 않았다. 한국이 잘 못하면 네덜란드에 5골을 실점할 수 있다는 위기 의식은 해외 전문가만이 아니라 일부 국내팬들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네덜란드는 경기 전날의 연습 시간에 자신들의 연습 시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경기장을 내주지 않고 슈팅 연습을 계속 해댔고,[22][23] 강력하고 정교한 슈팅들이 골문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본 한국 선수들은 0:1로 뒤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정신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이는 히딩크의 전략으로, 후에 자신의 자서전에서도 언급하였다.[24] 게다가 경기날 경기장 분위기도 한국의 기를 꺾기에 충분했다. 당시 55,000명의 관중 가운데 60% 정도가 오렌지색 유니폼을 입은 네덜란드 응원단이었고, 한국은 완벽히 원정의 분위기에서 압도당한 채 경기를 치러야만 했다.[25]
4. 경기 실황[편집]
네덜란드 선발 및 교체 기록
에드윈 반 데 사르(골키퍼), 아론 빈터르, 아서 누만, 야프 스탐, 프랑크 더부르, 로날트 더부르(84분 교체-바우데베인 젠던), 마르크 오버르마르스, 에드가 다비즈, 빔 용크, 필립 코쿠, 데니스 베르캄프(78분 교체-피에르 판호이동크)
대한민국 선발 및 교체 기록
김병지, 홍명보, 최영일, 이민성, 최성용(51분 교체 김태영), 유상철, 김도근, 이상윤, 서정원(78분 교체-이동국), 김도훈(70분 교체-고종수), 최용수
네덜란드는 전 경기인 벨기에전에서 퇴장당한 파트릭 클라위버르트가 징계로 출장 정지, 벨기에전에 출장한 클라렌스 세도르프, 지미 플로이드 하셀바잉크가 선발에서 제외되어 벨기에전과는 약간 다른 선발 명단으로 나왔다.
전반 초중반까지는 그런대로 잘 싸웠으며, 종종 기회를 만들기도 했다. 전반 8분에 김도훈이 옆그물을 맞추는 강력한 슈팅을 날렸는데, 이 때 카메라 각도가 절묘해서 해설진과 팬들이 잠시 골로 착각하고 환호하기도 했다.
김병지가 자꾸 시간을 끌어요, 주심 비위를 건드려요, 나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경기는 하프코트 게임으로 돌변하기 시작했고, 한국은 전반전부터 아예 노골적인 시간 끌기 전략으로 전환한다. 골킥을 차려던 김병지가 일부러 최대한 늦게까지 미적대다가 관중들의 야유를 받았다.
참 이상해요, 왜 오늘 이렇게 서두르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당시 MBC 캐스터 송재익. 최용수가 프리킥 상황에 시간을 끌자 심판한테 경고를 받는 모습을 보고 한 말.
프리킥 때는 최용수가 자꾸 킥을 하지 않고 도움닫기 거리를 최대치로 잡으며 무한정 뒷걸음질을 시전하다가 보다 못한 심판에게 경고를 먹기까지 했다(...). 결국 전반 37분 미드필더가 아닌 공격수로 출전한[27] 필립 코쿠에게 멋진 왼발 터닝슛 선제골을 허용한 데 이어 42분 역습 상황에서 마르크 오버르마르스에게 추가 골까지 허용하면서 0:2로 전반전을 마쳤다. 이때 이용수는 전반전을 마치고 "아이, 37분까지는 잘 개겼는데~" 라고 말하기도(...).
그리고 후반전에 드디어 헬게이트가 열리고 말았다. 전반전을 통해서 대한민국의 전력을 간파한 네덜란드에 한국 수비진은 더 이상 상대가 되지 못했다. 후반 26분 데니스 베르캄프가 한국의 수비진을 완벽히 농락하면서 오른발 아웃프런트킥으로 세번째 골을 넣었고[28] 후반 33분 베르캄프와 맞교체되어 들어온 피에르 판호이동크가 마르크 오버르마르스의 크로스를 받아서 헤딩으로 내리찍으며 4번째 골[29] 을 완성시켰으며, 후반 37분 로날트 더부르가 5번째 골까지 넣으면서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처참하게 구겨놓았다.
결국 대한민국은 거스 히딩크가 이끄는 네덜란드에 0:5로 대패하고 말았다. 그나마 김병지의 선방이 아니었다면, 5실점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경기에서 네덜란드의 슈팅 개수는 27개, 유효 슈팅이 17개였다.[30] 평범한 골키퍼였다면 두 자릿 수 실점이 나올 수도 있었다. 참고로 당시 대표팀의 후보 골키퍼는 서동명이었다. 서동명의 경우 김병지에게 밀렸으나 1년 전 브라질과의 평가전에서 세계 최고의 공격수 호나우두의 10번의 슈팅을 PK 실점을 제외하고 모두 선방한 경험이 있다. 만일 서동명이 나왔을 경우 실점을 더 많이 했을지 더 적게 했을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 유력하다.
대한민국이 월드컵 본선에 진출해 한 경기에 5실점 이상을 기록하고 또 5점 차 대패를 당한 것은 대한민국이 최초로 진출한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31] 이후 44년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내용과 상황을 보면 이번이 더 비참했다. 1954년엔 비록 헝가리에 0:9로, 터키에 0:7로 대패해 이 경기보다 점수 차는 더 컸을지언정 내용은 훨씬 더 선전한 경기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은 6월에 개막했는데, 6.25 전쟁이 정전된 게 1953년 7월 27일이니 전쟁이 막을 내리고 만으로 1년도 채 되지 못한 시점에서 지역예선에서 라이벌 일본을 이기고 16개국 본선 월드컵에 진출한 것이다. 당시 대한민국 1인당 GDP는 고작 67$로 세계에서 2번째로 굉장히 못사는 나라였다.[32] 전후 복구하기도 힘든 판국에 축구 따위에는 신경쓸 겨를도 없었다. 비행기표는 커녕 선수단 단복 맞출 돈조차도 없어서 축구협회 임원 한 사람이 양복점 운영하는 지인에게 사정사정해서 외상으로 겨우 맞춰 입었으며[33] 스위스까지 갈 때에도 돈이 없어서 선수단 전원이 입성하지 못하고 1진, 2진이 나눠서 가야 했다. 그나마도 마침 태국에 여행 와 있던 영국인 신혼부부가 자기 좌석을 양보해줘서 간신히 갈 수 있었다.
그렇게 고생고생해서 스위스에 도착하니 개막식은 이미 다 끝난 상태였고, 헝가리전 킥오프까지 겨우 10시간 남은 상태였다. 여독도 제대로 풀리지 못한 상태에서 시차 적응도 못하고 그대로 옷과 신발만 환복한 다음 바로 뛰었다. 거기다 1950년대 당시 헝가리는 지금의 프랑스, 아르헨티나급의 세계 최강팀이었다. 그런 팀을 상대로 신생 독립국이 9골만 내준 것은 오히려 굉장히 선전한 것이다. 실제로 당시 대부분이 예측한 그 경기 스코어는 최소 20:0 이상이었다. 그런데 9:0으로 끝나자 오히려 대한민국의 선전을 칭찬했다. 헝가리를 비난하는 말도 있었지만, 당시 월드컵 최다 득점으로 이긴 터라 그렇게 많이 욕은 먹지 않았다.
그런데 1998년은 지난 1994 FIFA 월드컵 미국에서 피파랭킹 5위 스페인을 상대로 2:2 무승부 승점 1점, 남미예선 3위 볼리비아에게 0:0 승점 1점, 피파랭킹 1위 & 디펜딩챔피언 독일을 상대로 2:3 석패를 기록해 어느 정도 유럽 강팀과도 맞붙어볼 만하다는 자신감을 안겨주었던 때였다. 그러한 희망적인 상황에서 이렇게 뜻밖의 졸전을 벌였으니 많은 한국 축구팬들에게 실망과 분노를 제대로 안겨준 경기가 되고 말았다. 홍명보는 네덜란드전에 대해 후일담에서 "경기가 빨리 끝나기를 바랐다."고 회고하였고, 당시 경기를 생중계하던 KBS 캐스터 서기철 역시 5번째 골이 들어가자 망연자실하여 "차라리 경기가 빨리 끝났으면 좋겠네요..."라는 말까지 남겼다. 그때 새벽잠을 설쳐가며 경기를 시청한 사람들 대부분 역시 맨정신으로 끝까지 경기를 지켜볼 수가 없었고, 많은 축구 팬들에게 네덜란드 트라우마를 제대로 안긴 경기이다. 이 경기 이후로 네덜란드는 국내 팬들의 관심 팀이 되는데, 잊힐만 하면 유로 예선에서 중하위권 팀들에 대량 득점을 하며 "역시 네덜란드는 양민 학살의 달인"이라는 평을 하게끔 만들었다.
특히 당시 국내 최고의 준족을 자랑하던 서정원이 앞이 탁 트인 상황에서 공을 잡았음에도 뒤따라 오던 에드가 다비즈에게 따라잡히는 모습을 보이는 등, 지역 예선의 선전으로 우쭐해 있던 대한민국 축구가 아직도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이 그대로 드러났다. 물론 당시 서정원은 프랑스로 출국하기 전 아들을 안아주다 옮은 수두 때문에 정상 컨디션이 아니기는 했다. 근데 설령 서정원이 정상 컨디션이었다고 해도 유럽 내에서도 타고난 운동 능력을 가진 다비즈를 따돌리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이는 다비즈가 이후에 준결승 브라질전에서 당시 이 대회 골든볼 수상자이자 신체적으로 최전성기를 맞이한 호나우두를 상대로 쫓아가서 커트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을 정도로 굉장히 뛰어난 운동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만 봐도 충분히 예상을 할 수 있는 부분이다.
당시 이 경기를 광화문에서 단체 관람한 초창기 붉은 악마들은 새벽 이슬을 맞으며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프로그램 촬영차 마르세유 현지에서 직관한 이경규는 네덜란드전에 대해서 멕시코전 녹화분을 보고 2차전에서는 울어서 감동을 줘 보자고 생각했는데, 경기를 보고 진짜로 울게 되더라며 이때를 회고했다. 그리고 경기를 직접 보러온 김흥국도 방송 카메라로 안타까워하는 얼굴을 하며 보던 게 찍혔다. 이 경기가 한국 시간으로 새벽 6시경에 끝났는데, 패배가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경기 종료 직후에 시작된 아침 뉴스 오프닝에서 앵커가 사색이 된 얼굴로 잠시 말문을 열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5. 중계[편집]
6. 대한민국의 패인[편집]
당시 거스 히딩크는 대한민국의 문제점을 확실하게 파악하게 되는 계기가 되고, 문제가 한두가지가 아닌 것으로 보았다고 말했다. 일단 체력 문제로, 대한민국 선수들은 전반 30분 경을 넘기고서 확실히 지친 모습이었다. 지난 1994 FIFA 월드컵 미국 때는 독일과의 경기에서 비록 지기는 했어도 섭씨 40도를 넘나드는 폭염 속에서 지치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여 독일 팀을 긴장시키기도 했는데, 이번 네덜란드전의 선수들은 압도적으로 차원이 달랐다. 연장 전반이 아닌 그냥 전반전도 안 끝난 시점에 지친 것은 적장의 눈으로도 체력이 약점임이 드러난 경기였다.[34]
두 번째는 상대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다가, 정신적으로 쉽게 흔들리는 선수들의 모습이다. 다음은 히딩크 문서의 각주를 일부 따온 것이다.
훗날 인터뷰에서 경기 전 한국 선수들의 매우 무지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약한 듯한 모습을 보고 승리를 확신했다고 한다. 다만 그렇게 대승을 할 지는 본인도 예상 못했다고. 2002년 이전 월드컵만 나가면 뭘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쩔쩔매다 자멸했다던 많은 국대 선수들의 인터뷰와 일맥상통한 이야기다. 이렇게 무지한 대한민국 선수들을 네덜란드 선수들은 일부러 쫄게 만들기도 했다. 당시 한국과 네덜란드는 같은 연습장을 썼는데, 한국 대표팀이 도착한 후에도 히딩크는 일부러 훈련을 계속했다. 그런데 30분이 넘도록 대한민국 쪽에서 아무런 항의가 없어서 '얘네들, 아무것도 모르는구나...'라고 확신했다고. 당시에 우리나라 선수들이 뭐가 어떻게 되가는 건지 외국만 나가면 뭘 어떻게 해야될지 몰라서 쩔쩔매는 매우 무지한 모습을 보여줬다. 지금은 다 정보가 공개되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저렇게 외국에 나가서도 뭘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르고 준비를 제대로 안하고 나가서 버벅대니, 대한민국 대표팀의 성적이 바닥을 기는 것도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것. 게다가 선수들조차 대부분 국내나 아시아 무대 정도에서만 뛰었으니 개인 경험도 없어 저런 모습을 보인 것과 거기에 덧붙여 잘못된 훈련 방식과 상대 팀에 대해서 너무 모르는 것도 문제였다.
2002년 월드컵 이후에 출판된 히딩크의 자서전 <마이웨이>에는, 1998년 월드컵 당시 대한민국 대표팀에 대한 소감을 정확하게 적어놓았다.
...당시 월드컵에서 만난 대한민국 대표팀에 대한 느낌은 간단했다. 개인적으로는 잘하는데 조직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선수들 사이의 간격이 너무 넓었고, 공수 협력이 제대로 안돼 우왕좌왕했다. 조직력에 문제가 있다보니, 선수들이 각자 혼자서 뭔가를 해보려 한다는 인상마저 주었다. 설상가상으로 한국 선수들은 몸이 굳어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대한민국은 전원 공격, 전원 수비의 토탈 사커 및 압박 축구와 같은 당시의 축구 전술 흐름에도 완전히 무지한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선수 시절 '유럽물을 제대로 먹은' 차범근이 감독이었어도, 당시의 정보력으로는 세계적 흐름을 읽는데 역부족이었던 듯하다. 애초에 차범근이 몸담았던 독일의 축구 스타일 자체가 이 시기엔 이미 한참 뒤쳐져서 녹슨 전차군단이라며 조롱 받던 시절이었음을 생각해보자. 차범근은 1970년대 후반부터 1989년까지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 은퇴했다. 따라서 아리고 사키의 밀란 제너레이션이 몰고온 압박과 공간이라는 현대 축구의 큰 흐름을 거의 경험해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히딩크가 간격과 공수 협력을 지적했듯이, 당시 국내 축구계는 니폼니시를 제외하면 공수 간격 유지라는 개념이 거의 없었다. 차범근호 항목에도 나오듯이 대표팀의 전술은 빠른 윙어들의 측면 돌파 → 무한 크로스 → 최전방의 황선홍 or 최용수의 받아먹기 이게 전부였고, 중앙은 사실상 유상철 혼자 버티기였다. 이게 아시아에서는 통했지만, 본선에서는 탈아시아급 상대들의 압박에 완전히 녹아내려서 속수무책이 되어버린 것.[35]
세 번째는 차범근의 경험 부족과 자질 문제였다. 일단 차범근의 경험 부족이 제일 큰 문제로 초보 감독인 차범근을 덜컥 대표팀 감독에 앉힌 것부터가 문제였다. 히딩크가 그가 문제라고 본 것이 전부 차범근의 경험 부족을 정확히 파악한 것이다. 당장 명선수는 명감독이 될 수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현역 시절 뛰어난 선수였다고 해서 명감독이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36][37] 차범근이 지도자로서 어떤 자질을 가졌던, 1998년 시점에선 3년간 울산 현대의 감독을 맡은 것이 전부였으니 대표팀 감독이라는 중책을 맡기에는 차범근의 지도자 경험부터가 분명 지나치게 짧았다. 차범근이 국가대표팀을 하면서 나름 선전하면서 도쿄 대첩이라는 업적도 세웠지만 월드컵에서는 언론 통제를 제대로 못한 본인의 실수가 겹치면서 결국 0:5 대패를 기록하는 단초를 마련한다.
그렇지만, 이렇게 이야기를 하더라도, 결국 실력 차이가 가장 크다. 마치 KBL 올스타와 NBA 올스타와 겨루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그 당시 1998년의 사정을 보면 해외 축구의 사정에 익숙하지 못했고, 시간이 지나 유럽파가 늘어났음에도 여전히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알제리 쇼크로 최악의 광탈을 기록했다. 그나마 2002년 4강 이후,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을 제외한 나머지 월드컵 본선에서 꾸준히 1승과 월드컵 19위 이상은 했다는 것이 고무적인 성과이다.[38] 아시아 축구 대부분이 유럽, 남미에는 힘든 게 현실이며, 설사 차범근이 아닌 그나마 더 능력있는 다른 지도자가 감독이었다 해도 패배하는 건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
네번째로 대한축구협회의 실책이 컸는데, 사실 차범근만의 책임이 아니였다. 상술했듯, 차범근은 감독으로써는 초보였고 감독 경험도 국내리그만 3년 한채 국가대표 감독이 되었다. 원래도 파리목숨이었던 국대 축구팀 감독을 하면서 눈앞의 아시아 예선에 신경쓰느라 월드컵 본선 경기에 대비할 여력따위는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최소한 차범근호는 아시아 예선에서는 나름 강력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럼에도 차범근 본인은 지금도 알려진 기독교 관련 구설수같은 것들만 언론에 나와서 곤욕을 치렀고, 축구협회의 사내 정치에 휘둘리는 쪽이었다. 대한축구협회가 월드컵 개최지인 프랑스로의 출국 바로 전 날, 중국과 친선경기를 잡은게 대표적인데[39][40] , 이 당시 중국의 거친 플레이로 주요 선수 황선홍이 월드컵 경기에 나오지 못할 정도의 큰 부상을 입는 그야말로 굉장히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말았다. 중국은 당시 대한민국과 월드컵에서 상대해야 될 팀과는 레벨도 완전히 낮았으며 결국 아무 쓸모없는 경기로 체력과 전력만 무의미하게 소모한 꼴이 되었음은 물론, 이후 본선에서 멕시코 및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의 잇단 패배와 그에 따른 조기 탈락 확정의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이 때문에 대한축구협회도 큰 비난과 비판을 받았으며 결국 차범근의 경질은 몇몇 실책은 축구협회도 같이 만들었음에도 그 감독에게 모든 책임을 다 떠넘기고 꼬리자른 셈이라는 견해도 있다.[41][42]
7. 경기 후[편집]
경기 후 나온 석간판[43] 신문 제목들은 흔한 클리셰 중 하나인 "세계의 벽 높았다." 일색… 그나마 일간지들은 저 정도였지, 이날 저녁에 나온 스포츠신문 석간판 1면은 온통 "이 치욕 잊지 말자"느니, "김병지가 불쌍했다"느니 "이날 전국은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등등, 원색적인
결국 차범근은 네덜란드전 대패 직후 월드컵 중에 전격 경질되었고,[45] 대표팀은 수석코치 김평석을 감독대행으로 올려 마지막 벨기에전을 준비하기에 이른다. 이에 앞서 당시 사우디아라비아 대표팀 감독으로, 1994 FIFA 월드컵 미국에서 브라질을 우승으로 이끈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파헤이라가 프랑스에 0:4로 대패한 직후 대회 도중 경질된 바 있다.
당시 경기 장소가 마르세유 오렌지 벨로드롬이라 마르세유의 치욕, 마르세유의 굴욕, 마르세유의 비극 등으로 불린다.
그래도 이 경기에서 빛났던 대한민국 선수가 있었으니, 바로 17개의 유효슈팅 중 겨우 5골만 먹힌 김병지. 그리고 당시 19세의 이동국은 후반에 교체로 들어가 네덜란드의 골문을 위협한 날카로운 중거리슛과 코너킥에서 골키퍼 정면으로 향하는 강한 헤더 슛을 날리면서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다음 대회를 기약하는 희망을 주기도 하였다.[46][47]
경기가 끝난 후 외신과 네덜란드 언론이 김병지와 이동국만 언급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부상이 심했으나 혹시 나을지도?" 하는 생각에 데려간 황선홍은 벤치에서 분루를 삼키며 진통제를 맞고라도 뛰겠다는 이야기를 했으나 차범근이 이 대회가 끝이 아니라면서 만류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한편, 같은 조에 속한 멕시코와 벨기에는 대한민국 대 네덜란드 경기를 치르기 전에 이미 2:2 무승부를 기록해 놓은 상태였다. 그리하여 결국 대한민국의 조별리그 조기 탈락이 네덜란드전 대패 직후 확정되고 만 것이다. 같은 조 4팀 중 대한민국만 유일하게 패배, 그것도 2패가 있기 때문이다.[48][49]
이 경기를 통해 처음으로 한국인들에게 알려지게 된 당시 네덜란드의 감독 거스 히딩크는 이 때까지는 대한민국에 통한의 눈물을 흘리게 하고 비수를 꽂은 적장(敵將)이라는 인식을 만들게 하였다.[50] 이 때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을 맡은 거스 히딩크는 월드컵 이후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에서 사퇴했고, 스페인으로 건너가 레알 마드리드 CF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성적 부진으로 1년 만에 경질되었고, 레알 베티스의 감독으로 부임했으나 또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어 힘겨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바로 이 때 거스 히딩크에게 대한축구협회가 오퍼를 보냈고, 거스 히딩크는 마르세유에서 맞붙었던 대한민국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다음 대회를 앞두고 당시 적장이던 그가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감독이 되어서 4강 신화까지 이룩하게 만든 대한민국 축구의 영웅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때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으니, 참으로 얄궂은 운명의 장난이라고 할 수 있다.[51]
이 경기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처음으로 문화 충격을 받은 경기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킥오프 직전 관중석을 온통 오렌지색으로 뒤덮은 스타디움의 장관이 중계 화면을 통해 비춰지면서 사람들은 그야말로 시각적 쇼크를 받은 것이다. 지금이야 응원 팀과 같은 유니폼을 입거나 같은 색깔로 깔맞춤을 하고 경기장을 찾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그 당시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에서는 붉은 악마같은 응원단체가 아닌 일반 관중이 응원 팀과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응원한다는 개념이 거의 없던 시절인 때였다. K리그 서포터즈 문화도 이제 막 태동하던 단계였다.
프로야구조차도 아직 유니폼을 상품화해서 제작, 판매한다는 개념을 상상조차 못하던 때였다. 하여튼 경기 킥오프 전부터 그라운드 관중석 전체가 오렌지 빛으로 뒤덮인 광경을 신기하게 바라보면서, 선수들도 선수들이지만 시청자들조차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경기였다.[52] 여러모로 대한민국 축구사에 임팩트를 안겨 준 경기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당시 대한민국을 무너뜨린 적장이 여러 모로 대한민국 축구의 변화를 유도한 건 사실이다.
이 경기에서 대한민국은 파란색 유니폼을 입고 뛰었는데[53] 이 날의 대패를 기점으로 이 유니폼을 입고 뛴 경기들은 대체적으로 결과가 좋지 못해 결국 월드컵에서의 마지막 파란색 유니폼 착용이 되었다.[54] 1950년 월드컵 때, 우승이 확실하다고 설레발쳤다가 우루과이에게 뒤통수를 제대로 맞고 이에 충격을 받아 결국 흰색 유니폼을 아예 없애버린 브라질처럼 대한민국도 빨강 홈 - 흰색 원정 유니폼으로 바꾸었고 2002년 월드컵에서 대성공을 거두자 아예 공식화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55]
이후 이 조에서는 네덜란드와 멕시코가 16강에 진출했다. 멕시코는 16강에서 만난 독일을 상대로 분전끝에 16강 13위로 주저앉은 반면 네덜란드는 8강에서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 중 하나인 아르헨티나를 침몰시키고 4강에 진출하는 쾌거를 달성했다. 1980년 이후 잉글랜드 최강이라 불리던 데이비드 베컴의 잉글랜드를 16강에서 잠재우고 올라온 아르헨티나였던지라 상당히 강한 팀이었는데 그런 팀을 누른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브라질과 4강전에서 피터지는 승부차기까지 간 접전 끝에 장렬히 산화했다. 공교롭게도 네덜란드가 브라질에게 탈락한 경기장이 바로 이 오렌지 벨로드롬 경기장이였다. 이러한 오렌지 군단의 성과를 본 이후에야 네덜란드가 한국을 대파할만 했다는 여론이 생겼다.
8. 여담[편집]
- 이 경기를 끝으로 경질된 차범근은 훗날 SBS 축구 해설위원이 되었는데,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준결승전에서 벌어진 미네이랑의 비극을 보고는 남의 일 같지가 않다면서 이 날의 충격을 곱씹으며 브라질을 동정했다.[60] 생각보다 비슷한 점이 많기도 하고.[61]
- 조별리그가 1조당 4팀이 속해 각 팀당 3경기, 총 6경기를 치르는 현재의 방식으로 정착된 이래 FIFA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대한민국이 조별리그에서 단 두 경기만에 조기 탈락이 확정된 월드컵은 이 경기가 있는 1998년 월드컵이 유일하다. 44년 전 최초로 대한민국이 16개국 본선에 진출했던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는 1~2경기, 승자전, 패자전으로 팀당 2경기를 치른 뒤 승자전 패배팀과 패자전 승리팀끼리 동률이 발생했을 시에만 재경기로 조별리그 3차전을 치르는 방식이었다.[62] 무엇보다 그때는 대한민국이 월드컵에 낯설은 때였고, 시차 적응은 커녕 시합에 대한 준비조차도 제대로 못한 상황이었다.[63]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와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에서도 32강 조별리그에서 일찌감치 2패를 적립하긴 했지만 두 번 다 16강 경우의 수가 아예 소멸한 것은 아니었다. 1990년 대회는 24개국 체제라 마지막 상대인 우루과이를 3점 차이로 잡으면 조 3위를 차지해도 조 3위 상위 4팀 와일드카드로 24강 조별리그를 통과할 가능성은 남아있었고, 2018년 대회는 마지막 상대인 독일을 2점차 이상으로 이기고, 멕시코가 스웨덴을 잡았다면 멕시코를 뺀 세 팀이 모두 1승 2패로 물리며 한국도 조 2위를 차지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64] 2026 FIFA 월드컵부터는 조별리그가 48강으로 확대되어 조 3위 상위 8팀에게도 와일드카드로 조별리그 통과 가능성이 열리게 되므로 대한민국이 조별리그에서 단 두 경기만에 탈락이 확정된 대회는 한동안 이 대회가 유일할 가능성이 높다.
- 한국은 1986, 1994년을 제외하면 20세기에는[65] 대체로 월드컵에서 동네북 신세였지만 의외로 4골 이상의 점수차로 패배하거나 3골 이상의 점수차에 골을 넣지 못하고 패배한 적은 최초로 대한민국이 본선에 진출한 1954 스위스 월드컵 16개국 본선을 제외하면 다른 월드컵 전 경기 중에 이 경기의 패배가 유일하다. 2010년 아르헨티나전에서는 4골을 내줬지만 최종스코어는 3골차에 1골을 넣은 상태로 패배했으며, 2014년 알제리전에서도 역시 4골을 내줬지만 2골을 넣음으로써 최종 스코어는 2골차다. 2022년 16강 브라질전에서도 전반전에 4골을 내줘서 이 경기의 악몽이 재현되는 듯 했으나, 후반전에 들면서 1골을 만회한데다가 아예 무실점으로 틀어막기까지 하며 이 경기 수준의 대패를 면했다. 또, 이로부터 얼마 전에 치렀던 브라질과의 평가전에서도 5골이나 내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1골은 만회했다.
- 9년이 지난 2007년 6월 2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A대표팀 친선경기로 다시 만났는데 라파엘 반 더 바르트가 혼자서 31분(PK)과 71분에 각각 득점하면서 0:2로 패배해 설욕하는데는 실패했다. 그리하여 네덜란드와의 역대 A매치 전적은 현재 2전 2패 7실점 무득점인 상태다.
9. 관련 문서[편집]
- 2002 FIFA 월드컵 대한민국·일본
- E조 독일 vs 사우디아라비아 (8-0): 당시 독일은 지역예선에서 잉글랜드에게 1-5로 대역전패를 당해 플레이오프로 떨어져 우크라이나를 꺾고 겨우 본선에 올라왔었는데 본선 진출 후 그 첫 경기에서 사우디아라비아를 8-0으로 대파해 자신들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한편, 사우디아라비아는 그 독일에게의 대패 이후 카메룬에게도 0-1, 아일랜드에게도 0-3으로 잇달아 져서 결국 월드컵 32강 조별리그 3전 전패 + 12실점에 무득점 + 한일 월드컵 전체 진출국 중에서도 32등 꼴찌라는 불명예 종합 세트를 받고 말았다.[66][67]
-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 G조 포르투갈 vs 북한 (7-0): 브라질과의 첫 경기에서 1-2로 비록 졌지만 비교적 선전했던[68] 북한이 포르투갈과의 두 번째 경기에서는 무려 0-7로 참혹하게 발려버리며 일찌감치 떨어지고 말았다. 코트디부아르와의 마지막 경기에서도 0-3으로 지며[69] 결국 남아공 월드컵 전체 진출국 중에서도 32등 꼴찌라는 수모도 받았다.
- 8강 독일 vs 아르헨티나 (4-0): 당시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디에고 마라도나의 삽질 때문에 대패를 하지 않을 수 있던 경기를 대패하게 만들었다.
- UEFA 유로 2012 폴란드·우크라이나
-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 A조 카메룬 vs 크로아티아 (0-4): 카메룬이 이 경기에서 완전히 개막장을 선보이며[70] 결국 조기 탈락이 확정되는 치욕을 맛보았고 최종적으로 전체 참가팀 중에서도 꼴찌를 기록하고 말았다.
- B조 스페인 vs 네덜란드 (1-5): 이것도 네덜란드에 5실점이나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주인공이 무려 스페인이다. 다만, 스페인은 페널티킥으로 선제골은 넣었다.[71]
- C조 일본 vs 콜롬비아 (1-4)
- H조 대한민국 vs 알제리 (2-4): 대한민국이 세계 최초로 아프리카 팀에게 4실점 이상 당한 경기.
- 준결승 브라질 vs 독일 (1-7): 무려 위 네 경기 결과들을 단숨에 잊게 만들 정도.[72]
- 2017 EAFF 동아시안컵 일본
- 결승전 대한민국 vs 일본 (4-1): 일명 도쿄 대첩. 반대로 대한민국이 알제리 쇼크 감독의 일본을 원정에서 4-1이라는 스코어로 이긴 경기. 일본이 기록한 1골은 PK 선제골이다.
-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
- D조 아르헨티나 vs 크로아티아 (0-3): 아르헨티나 축구 역사상 위 2010 월드컵 독일전 이상의 참패. 그런데 여기서도 두 팀 모두 16강에 진출했다.[73]
- 2019 FIFA 여자 월드컵 프랑스
- A조 대한민국 vs 프랑스 (0-4): 역대 남녀 성인 대회를 통틀어 첫 원정 개막전. 전반에만 3골을 내주는 등, 경기력에서도 아무것도 못 해보고 처참하게 패했다. 마르세유의 치욕 "파리 버전" 또는 파리 대참사.
- 2020 AFC U-23 챔피언십 태국
- A조 태국 vs 바레인 (5-0): 제 아무리 개최국이었다고는 하나 태국을 위시로 한 동남아 대표팀들은 상대적으로 서아시아에 비해 약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무려 5:0으로 발렸다.
- 8강 우즈베키스탄 vs 아랍에미리트 (5-1): UAE가 조 1위로 통과했지만 상대는 대한민국과 이란이라는 죽음의 조에서 이란을 밀어내고 2위로 통과한 우즈베키스탄이었고, 결국 어찌어찌 선제골을 넣었으나 전반전에 3골을, 후반전에 2골을 먹혀 1-5 대패를 하고 만다.
- UEFA 네이션스 리그/2020-21 시즌
- 4조 6차전 독일 vs 스페인 (0-6): 독일은 스페인과의 이 경기에서 무재배만 해도 조 1위로 토너먼트 진출이 가능한 상황이었는데, 0-6이라는 엄청난 점수차로 대패해 역대 UEFA 네이션스 리그 전체 최다 득실차 타이 기록을 세우고 대회를 망치고 말았다. 반면, 스페인은 이 경기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독일을 상대로 메이저 대회 3연승을 달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