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탕카멘의 무덤

덤프버전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BDB76B 0%, #DECD87 20%, #DECD87 80%, #BDB76B);"
[ 펼치기 · 접기 ]
역사
선왕조 (상이집트 · 하이집트) · 이집트 초기 왕조 (제1왕조 · 제2왕조) · 이집트 고왕국 (제3왕조 · 제4왕조 · 제5왕조 · 제6왕조) · 이집트 제1중간기 (제7왕조 · 제8왕조 · 제9왕조 · 제10왕조 · 제11왕조) · 이집트 중왕국 (제11왕조 · 제12왕조) · 이집트 제2중간기 (제13왕조 · 제14왕조 · 제15왕조 · 제16왕조 · 제17왕조) · 이집트 신왕국 (제18왕조 · 제19왕조 · 제20왕조) · 이집트 제3중간기 (제21왕조 · 제22왕조 · 제23왕조 · 제24왕조 · 제25왕조) · 이집트 말기 왕조 (제26왕조 · 제27왕조 · 제28왕조 · 제29왕조 · 제30왕조 · 제31왕조)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문화
고대 이집트 · 이집트 문명 · 나일강 · 이집트 미술 · 이집트 상형문자 · 고대 이집트어 · 세네트 · 네메스 · 스핑크스 · 메자이 · 카노푸스 · 샤브티 · 포티 · 앙크 · 호루스의 눈 · 파라오 · 파라오/미라 · 이집트/미라 · 사자의 서 · 어떤 남자와 그의 영혼의 대화 · 스캐럽 · 파피루스 · 코피스 · 이집토마니아 · 고대 이집트/성문화
도시
기르가 · 기자 · 다만후르 · 다클라 · 데숙 · 룩소르 · 메르사마트루 · 멤피스 · 미냐 · 바하리야 · 반하 · 베니수에프 · 빌베이스 · 사이스 · 사파가 · 소하그 · 수에즈 · 시와 · 아마르나 · 아비도스 · 아스완 · 아시유트 · 아크밈 · 알렉산드리아 · 에드푸 · 에스나 · 엘아리쉬 · 자가지그 · 카르가 · 콤옴보 · 쿠세이르 · 쿠스 · 퀴나 · 키프트 · 타니스 · 탄타 · 파이윰 · 헬리오폴리스
종교
이집트 신화 · · · 테프누트 · 게브 · 누트 · 오시리스 · 이시스 · 세트 · 네프티스 · 호루스 · 아누비스 · 하토르 · 토트 · 프타 · 세베크 · 아포피스 · 아톤 · 엔네아드
유물
나르메르 팔레트 · 투탕카멘의 가면 · 투탕카멘의 단검 · 네페르티티 흉상 · 로제타 석 · 팔레르모 석
건축
피라미드/이집트 · 기자의 대피라미드 · 카프레의 피라미드 · 멘카우레의 피라미드 · 조세르의 피라미드 · 붉은 피라미드 · 아부심벨 대신전 · 카르나크 신전 · 룩소르 신전 · 에드푸 신전 · 덴데라 신전 · 콤 옴보 신전 · 에스나 신전 · 필라에 신전 · 왕가의 계곡 · 투탕카멘의 무덤 · 람세스 2세의 무덤 · 세티 1세의 무덤 ·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 · 기자의 대스핑크스 · 데이르 엘 바하리 · 하트셉수트의 장제전 · 라메세움 · 오벨리스크 · 알렉산드리아의 등대 ·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인물
나르메르 · 조세르 · 임호텝 · 쿠푸 · 카프레 · 멘카우레 · 투트모세 3세 · 하트셉수트 · 아멘호테프 3세 · 아케나톤 · 네페르티티 · 투탕카멘 · 람세스 2세 · 네페르타리 · 람세스 3세 · 넥타네보 2세 · 알렉산드로스 3세 · 프톨레마이오스 1세 · 클레오파트라 7세 · 역대 이집트 파라오
낭설
고대 이집트인 흑인설 · 덴데라 신전의 전구 · 아비도스 사원의 헬리콥터 · 초고대문명설 · 투탕카멘의 저주



파일:section-of-tutankhamen_s-tomb.jpg}}}
파일:01tuttombDSC_3173.webp}}}
투탕카멘의 무덤.[1]

مقبرة توت عنخ آمون
Tomb of Tutankhamun

1. 개요
2. 발굴
3. 구조
3.1. 관
3.2. 미라
4. 부장품
5. 관광 정보
6. 하워드 카터의 일기
6.1. 무덤의 발견
6.2. 묘실 발굴
6.3. 석관 개관
6.4. 미라 공개



1. 개요[편집]




고대 이집트파라오 투탕카멘의 무덤. 룩소르나일 강 서쪽에 있는 왕가의 계곡에 있으며, KV62 무덤(مقبرة 62)이라고도 한다.


2. 발굴[편집]


거기 봉인된 문이 있었다. 그 문을 열자 우리 앞의 수십 세기가 사라졌다.

하워드 카터 (무덤의 발견자)#

왕가의 계곡은 고대 이집트인들의 치밀한 설계로 도굴꾼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일부러 눈에 잘 띄지 않는 후미진 위치에 자리잡고 있지만, 그마저도 완전히 막지 못해 신왕조 시기부터 거의 모든 무덤들이 전부 도굴된 상태였다. 그러나 1922년 11월 4일에 왕가의 계곡에서 엄청난 발견이 있었다. 투탕카멘의 무덤(KV62)이 거의 도굴되지 않은 거의 완전한 형태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다만 여기서 '거의'라고 한 이유는 투탕카멘의 무덤도 도굴당한 흔적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2] 입구에 봉인을 3개 해놓았는데, 2번째 봉인은 발굴 당시에 이미 뚫려 있던 것이다. 투탕카멘 왕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도굴꾼이 침입했는데, 무덤을 지키던 경비대에 걸려 미수로 끝났으며, 마야라는 관리와 사제들이 다시 무덤을 봉인했다는 기록이 전해져온다.[3] 여러 유물에서 도굴의 흔적이 남아 있고 방들이 대체로 어지러져 있었지만, 그 정도가 타 파라오들의 무덤과 비교할 수준이 못 된다. 2번의 도굴 시도에서 도굴꾼들은 가벼운 귀금속들과 귀한 연고 정도를 가지고 간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무덤에서 발견된 석상에서는 귀금속이 모두 벗겨져 사라진 채 발견되었다.

투탕카멘의 무덤을 처음으로 찾아낸 것은 당시 발굴 현장 일꾼들이 마실 물을 매일 항아리에 담아서 가져오는 일을 하는 '후세인 압델 라술(Hussein Abdel-Rassoul,1910~2003)'이라는 소년(당시 사진)이 있었는데, 그 소년이 항아리가 넘어지지 않게 하려고 땅에 조그만 구멍을 파다가 무덤으로 향하는 제일 윗계단을 발견하였다. 이 후세인 압델-라술은 이 명성 덕에, 이 무덤 입구에서 관광객들을 상대로 사진 모델을 하면서 받는 돈으로 평생 먹고 살게 되었으며 나중에 이집트 정부에서 위대한 문화재를 찾아낸 공로로 훈장연금도 수여했다.1998년 88살이던 압델 라술 사진. 세상을 떠난 지금도 거론되며 아들인 모하메드 압디 압델 라술이 아버지를 회고하면서 아버지에게 듣던 여러 이야기도 해외 인터뷰를 하며 종종 해외 방송이니 언론으로 나오고 있다.

물론 보통 발견자로 거론되는 건 영국하워드 카터와 그의 재정 후원자, 영국의 제5대 카나본 백작 조지 허버트[4] 이 무덤을 발굴하기 전에도 하워드 카터는 허버트 경의 후원을 받아 다수의 발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으나, 이미 도굴된 무덤들 뿐이라 큰 성과가 없었다. 그런데 카터는 인근 무덤에서 투탕카멘의 장례식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유물 조각들을 찾아내어, 투탕카멘의 존재와 더불어 그의 무덤이 왕가의 계곡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이전에 발굴을 하던 시어도어 데이비스는 이제 왕가의 계곡에는 무덤이 없다!라고 선언하고 발굴권을 넘겼고, 카터는 이번이 마지막 발굴이라는 부탁을 해 허버트 경에게서 간신히 자금을 끌어올 수 있었다. 그 마지막 발굴이 세기적인 발굴이 된것이다...포기하지 않고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굴하여 이집트의 아이콘이 되었으니 하워드 카터에게 감사해야 할것이다.

카터는 람세스 2세람세스 6세 무덤 사이에 있던 곳에 주목했는데 이 곳은 수상했지만 그동안 발굴이 없었던 곳이었다. 이 자리는 원래 람세스 6세 무덤을 만들던 노동자들이 기거하던 오두막이 있던 곳이었는데 카터는 이 곳을 파내려 가다가 마침내 무덤으로 향하는 계단을 발견했다.

계단을 발견한 카터는 도굴당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동시에 내부에 뭐가 있을까 호기심도 들었지만 5년 동안 막대한 돈을 투자하면서 자신을 믿고 후원해준 후원자인 허버트 경과 같이 봐야한다는 마음으로 꾹 참고 그 날, 카이로로 가서 지병으로 본가에서 요양하고 있던 허버트 경에게 전보를 치기 위해 한 걸음에 달려가 전보를 보냈다.

마침내 왕가의 계곡에서 엄청난 발견을 해냈습니다. 매우 아름다운, 아직까지 봉인이 남아 있는 무덤입니다. 카나본 공께서 도착하실 때까지 다시 봉인해 놓겠습니다. 축하드립니다.

1922년 11월 6일, 하워드 카터의 전보를 받은 허버트 경은 서둘러 이집트로 갈 준비를 했다. 이 시기 허버트 경은 오랜 지병으로 건강상태가 대단히 좋지 않은 상태였지만, 봉인이 멀쩡한 무덤을 발견했다는 기쁜 소식에, 아픈 몸을 이끌고 그의 딸과 함께 당시 교통으로 꽤 빠른 3주만에 이집트로 왔다. 이렇게 무리하게 이집트로 온 것으로 인해 몸이 더욱 나빠졌다는 말이 투탕카멘의 저주보다 훨씬 설득력 있게 들리는 이유다.

당시 카터는 그가 발견한 것이 진짜로 파라오의 무덤인지, 아니면 단순한 부장물 창고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상태였는데, 비록 후원자가 있는 상태에서 봉인을 열기 위해 문은 열지 못했지만, 지하로 통하는 통로를 보고 무덤일 것이라는 심증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파일:king_tut_tomb_conservation_getty_feature.jpg

마침내, 1922년 11월 26일, 영국에서 날아온 허버트 경과 그의 딸, 그리고 발굴 관계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카터는 끌을 이용해 통로의 봉인에 작은 구멍을 뚫었고, 그 구멍에 램프를 집어 넣고 수천 년 만에 열리는 무덤의 안을 본 순간...

뭔가 보이나? (Can you see anything?) (허버트 경)

네, 아주 아름다운 것들이 보입니다... (Yes, Wonderful things...) (카터)

과연 하워드 카터가 말한 대로, 투탕카멘의 무덤에서는 사진에서 보는 화려한 투탕카멘의 가면와 투탕카멘의 미라를 비롯한 수많은 유물이 발견되었고, 덤으로 투탕카멘의 저주라는 도시전설까지 떠돌았다. 고작 9년을 재위(在位)한 별 볼 일 없는 파라오였던 투탕카멘은 그 많은 이집트 파라오를 전부 다 제치고, 단숨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파라오가 되었다.[5] 사실 무덤이 도굴당하면 유명한 왕이라도 후손들이 보기엔 그냥 그 왕일 뿐이다. 그 무덤이 온전하게 후세에 전해지면 그 무덤의 주인은 역사에 대서특필된다. 실제 우리나라도 그렇다.[6]

사실 이 규모가 작고 별볼일없는 무덤은, 재위 기간이 짧고 별볼일없는 파라오 투탕카멘에게 걸맞은 것이다. 투탕카멘이 갑자기 죽어버리는 바람에, 그의 무덤은 사실 다른 귀족을 위해 만들어 놓은 무덤을 이용한 것이다. 투탕카멘의 뒤를 이은 아이의 귀족 시절 무덤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며, 거기다 아이가 투탕카멘의 원래 무덤을 차지했다는 설이 있다.[7] 심지어 최근 연구에 따르면 투탕카멘의 상징과도 같은 황금 마스크조차 네페르티티의 이름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 투탕카멘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닌 네페르티티를 위해 만들어진 것을 수정해 사용한 것일 가능성이 높을 정도다. 그 때문에 왕에 걸맞지 않게 무덤의 크기가 매우 간소하다. 하지만 그 간소하다는 무덤에서 나온 유물들이 이집트 박물관의 1개 층을 모두 채우고도 남을 양이다. 즉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이집트 고대사를 다룬 ABE 전집 5권 '파묻힌 세계'에서는 "투탕카멘 정도의 약소 파라오의 무덤에서 나온 유물이 이 정도인데, 만약 신왕국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람세스 2세의 무덤이 도굴당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대단했을까!"라고 아쉬워하기도 한다.[8]

하지만 도굴이 아니더라도, 당시에는 전임자의 무덤을 털어서 자기가 쓰는 경우가 아주 흔했다. 예를 들어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에서는 19왕조 메르넵타의 석관과 20왕조 람세스 9세의 반지가 나왔을 정도다. 어쨌든 투탕카멘의 무덤이 말짱하게 남은 건 정말 운이 좋았던 것이다. 심지어 19왕조의 재상이었던 라모세의 무덤도 투탕카멘 왕의 것보다 크다. 하지만 투탕카멘은 호렘헤브가 이단자 파라오의 목록[9]에 넣는 바람에 이후에는 존재가 잊혀졌고, 도굴 미수 후에 마야라는 관리가 제대로 재봉인을 했으며, 결정적으로 그의 무덤 위에는 20왕조 람세스 6세의 무덤을 짓기 위한 공사에 참여한 노동자들을 위한 숙소가 지어지는 바람에 완벽하게 은폐될 수 있었다. 크기도 크기지만, 설마하니 집 아래에 무덤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진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이걸 찾아낸 카터도 대단한데, 그는 인근 무덤에서 나온 작고 조잡한 유물들을 통해 투탕카멘의 존재를 직감하고 마침내 찾아내게 된다.

파일:p07sdnh7.jpg
당시 발굴현장의 모습을 컬러로 복원한 사진.

사실 시어도어 데이비스라는 자가 왕가의 계곡에서 더 이상 새로운 무덤을 없을 거라고 큰소리치고 발굴권을 카터에게 넘겼는데... 투탕카멘의 무덤은 데이비스가 마지막으로 발굴한 무덤에서 고작 2m 떨어진 곳이었다. 그나마 데이비드에겐 다행인 게 카터가 이 무덤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데이비스가 죽은 후였다. 사실 데이비스가 1914년 이 무덤 발굴을 멈춰야 했던 것도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다음 해인 1915년, 78살로 세상을 떠났다. 실제로 데이비스의 유족들이 투탕카멘 무덤 발굴에 대하여 안타까워했었다.

여담이지만 그의 무덤을 의도치 않게 보호하게 된 람세스 6세의 무덤(KV9)은 정말 화끈하게 털렸다. 사실 이 무덤은 원래 그의 전임자이자 조카였던 람세스 5세의 무덤이었다. 하지만 람세스 5세가 요절한 후 람세스 6세가 무덤을 뺏어 확장한 뒤 자신이 사용했는데 이 시기 내분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람세스 5세의 자리를 찬탈했다는 설도 있다. 람세스 6세의 석관은 도굴꾼들에 의해 박살나고 보물을 찾는다고 뒤집어 놨을 정도로 무덤 내부는 엉망이다. 1898년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KV35)에서 발견된 그의 미라는 얼굴 정면이 도끼로 깊이 찍혀 망가져 있고 몸통은 말 그대로 오체분시되어 없어지거나 훼손된 부위는 다른 미라들의 부위를 재활용(?)하여 땜질했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하다. 가령 그의 목 부분에서는 어느 여자 미라의 골반이 나왔다고. 참고로 람세스 6세의 박살난 석관 뚜껑에 있던 얼굴 부분은 대영박물관에 있다. 석관들도 대영박물관에 전시되다가 2004년에 다시 이집트로 돌아왔다. 고고학자들은 무려 250개에 달하는 석관 조각들을 하나하나 다시 꿰맞추었고, 현재는 무덤 한가운데에 복원되어 전시되고 있다. 현재 KV9 무덤은 기나긴 입구 통로와 그 안에 새겨진 매우 화려한 부조, 벽화들 덕분에 왕가의 계곡에서도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무덤들 중 하나이다. 그 유명한 투탕카멘의 무덤과 비교해보면 얼마나 투탕카멘이 초라한 무덤에 묻혔는지 비교가 될 정도. 천장은 푸른색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고, 벽화의 색들도 대부분 잘 보존되어 있다. 2021년 4월에는 람세스 6세 미라를 카이로 박물관에서 빼내어 고대 이집트 문명 박물관에 옮겼다

2016년, 투탕카멘의 단검에 대해 조사를 실시했고 재질이 철이라는 점이 확인되었다. 이탈리아 대학(Milan Polytechnic and Pisa University)과 이집트 박물관의 학자들이 이 단검에 대한 성분 조사를 하였는데 운석에서 볼 수 있는 운철 성분이 검출되었다. 즉, 이 단검은 운철로 만들어진 것이다.



3. 구조[편집]


파일:TUTANKHAMUN_Tomb_evc3kj.webp
투탕카멘의 무덤 투시도.

위의 그림은 매장 당시 투탕카멘의 무덤을 3D로 재구현해놓은 모습이다. 무덤 자체는 왕가의 계곡 서안의 석회암 기반을 깎아서 만들었다. 무덤으로 내려가는 복도는 길이 8m, 너비 1.7m 정도로 꽤나 널찍하다. 발굴 당시에는 복도가 통째로 자갈과 흙으로 메워져 있어서 인부들이 모두 파헤쳐야 했다고. 복도로 내려가는 계단은 원래 16단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가장 낮은 6단의 계단들은 발굴 과정에서 부장품들을 빼내며 깎아서 없앴다.

복도를 쭉 지나가면 제일 먼저 전실(Antechamber)로 들어갈 수 있다. 위 그림에서 가장 세로로 길쭉해보이는 방이 바로 전실이다. 남북으로 7.9m, 동서로 3.6m로 면적으로만 보면 무덤 전체에서 제일 넓은 방이다. 대략 600~700점의 유물들이 이 전실에서 발견됐고, 온갖 잡다한 용도의 집기들이 쌓여있었다. 방 왼쪽에는 해체된 전차 부품들이 놓여있었고 중앙에는 동물 머리가 달린 장례용 침대, 황금 옥좌, 옷, 화려한 설화석고 화병들, 그리고 온갖 보석들이 담겼던 상자들이 산처럼 쌓여있었다.[10] 침대 아래에 쌓인 흰색 물건들은 파라오가 사후세계에서 쓸 그릇이다. 특히 장례용 침대 아래에 놓여있던 황금 옥좌의 경우 하워드 카터가 '이집트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물'이라고 찬탄할 정도로 정교했다. 상자 내부에도 유물들이 가득했는데, 주로 투탕카멘이 입던 리넨 옷이나 튜닉, 셔츠 따위 등이 쏟아져 나왔다. 전실 북쪽에는 관이 놓여있는 현실(Burial Chamber)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고 그 앞에 투탕카멘의 조각상 2개가 버티고 있다.

전실 뒷편을 보면 자그마한 방이 하나 있는데, 이게 별실(Annexe)이다. 신관들이 도굴된 무덤을 수습하면서 온갖 물건들을 다 여기다 처박아놓은 통에 전실보다도 훨씬 뒤죽박죽하게 유물들이 널려있었는데 이 좁은 공간에서 무려 2,000여 점이 넘는 보물들이 나왔다. 이미 도굴꾼들이 한 번 봉인을 깨고 들어갔던 방이라 유물들이 함부로 밟혀져 있거나 아예 뒤집혀져 있어서 하워드 카터가 발굴 당시 유난히 애를 먹었던 방이기도 한데, 주로 포도주나 향유 등의 식료품, 샤브티, 목조 배 모형, 코피스, 방패 같은 개인용 생활용품 등이 발굴되었다.

왕의 미라가 있는 현실(Burial Chamber)은 남북 4m, 동서 6.4m 정도로 꽤나 널찍한 편이지만 그 안에 거대한 사당이 통째로 놓여있던 통에 남은 공간이 거의 없었다. 무덤에서 유일하게 벽화가 그려져 있었던 공간으로 4겹의 금박 목조 사당과 그 안에 들어있는 석관,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는 또 3겹의 황금관들이 마치 마트료시카처럼 층층이 들어있었다. 벽에는 사자의 서와 신들, 그리고 투탕카멘과 그의 장례식을 집전한 아이의 모습이 그려졌다. 이 안에서도 꽤나 많은 유물들이 나왔다. 노, 부채, 갈고리와 도리깨 같은 물건들이 출토되었고 사당과 사당 사이, 관과 관 사이마다 꼭 몇 개씩은 귀중한 유물이 튀어나왔다. 하워드 카터가 발굴할 때 가장 애를 먹었던 방인데, 사당이 워낙 방을 통째로 메우고 있어서 도저히 작업을 할 공간 견적이 안나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며칠에 걸쳐서 한쪽 벽을 아예 허물어서 작업을 했다고 한다.

마지막 방이 현실과 조그맣게 연결되어 있는 보물의 방(Treasury)이다. 발굴 과정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발굴된 방으로 투탕카멘의 장기들을 보관한 카노푸스 단지와 여러 장례용품들이 쌓여있었다. 보물의 방 입구에는 나무로 만든 아누비스 조각이 놓였고 중앙에는 카노푸스를 보관하는 거대한 황금 사당이 있었다. 이 곳도 도굴꾼들의 발이 아예 닿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른 방들에 비하면 거의 완벽한 상태로 남아있어서 조그마한 보석류의 경우 대부분이 이 보물의 방에서 나왔다. 그 외에도 투탕카멘이 사후세계로 향할 때 쓸 목조 배 모형, 샤브티, 그리고 상당수의 값비싼 장신구들이 함께 묻혀있었다. 다른 방들에서는 리넨 옷이나 가구 등이 나왔다면 여기서는 작은 보석류와 금속제 물건들이 나왔다. 작은 사당 내부에는 투탕카멘의 할머니이자 아멘호테프 3세의 아내 티예 왕비의 머리카락 한 묶음, 그리고 투탕카멘의 사산한 딸의 미라도 있었다.

파일:ramses-v-tomb-luxor-053.jpg
파일:tomb-of-nefertari-1.jpg
람세스 6세의 무덤 KV9의 내부 모습.[11]
네페르타리의 무덤. 일개 왕비의 무덤이 파라오 투탕카멘의 무덤보다 더 화려하다.[12]
여담이지만 투탕카멘의 무덤은 신왕국 파라오의 무덤들 중에서도 가장 초라한 편이다.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람세스 6세의 무덤의 경우 투탕카멘의 무덤 바로 위에 있어서 도굴꾼들에게 탈탈 털렸지만 내부 벽화의 보존 상태가 좋아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은데, 람세스 6세의 무덤만 봐도 투탕카멘의 무덤이 얼마나 작은지 알 수 있다. 람세스 6세의 무덤은 천장부터 바닥까지 색색이 벽화가 빼곡히 들어찬 반면 투탕카멘의 무덤은 좁아터진 현실에만 벽화가 겨우 그려져 있다. 게다가 람세스 6세의 무덤은 무덤 내부에 기둥이 있고 기나긴 복도, 그리고 널찍한 공간들이 있다. 허나 투탕카멘의 무덤은 그런 건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가 없으니 파라오의 무덤치고는 얼마나 작은 무덤인지 짐작이 가능하다.[13]

왕가의 계곡 문서만 봐도 알겠지만 대부분의 파라오 무덤들은 투탕카멘의 무덤보다 훨씬 넓고 장식도 화려하다. 심지어 람세스 2세의 아내인 네페르타리의 무덤이 투탕카멘의 것보다 더 정교하다. 아무 업적도 남기지 못했고 채 10년도 재위하지 못했던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쏟아져나온 부장품들의 양이 박물관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인데 만약 람세스 2세람세스 3세처럼 위대한 파라오의 무덤이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었다면 얼마나 많은 유물들이 나왔을지는 상상도 하기 힘들다. 다만 투탕카멘의 무덤이 그 작은 크기 덕분에 수 천년의 세월 동안 도굴당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는 투탕카멘이 가장 유명한 파라오들 중 하나가 된 걸 생각하면 투탕카멘 본인에게는 좋은 일일지도?

다른 파라오들의 무덤의 경우, 람세스 2세의 무덤비가 올 때마다 침수되는 곳에 지은 탓에 내부의 벽화고 뭐고 아무 것도 남지 않은 폐허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매장 직후 도굴당해서 람세스 2세의 미라를 제외하면 부장품도 보존되어 살아남은 게 단 하나도 없다. 람세스 3세의 무덤은 길이 188m에 이르는 대무덤이지만 이미 오래 전에 도굴당해서 벽화를 빼고 남은 게 없고, 세티 1세의 무덤은 벽화만이 남아있으나 이마저도 프로이센 원정군이 한쪽 벽에 그려진 벽화를 통째로 들어내 훔쳐가는 등 온갖 수난에 시달렸다. 그 외에도 여러 신왕국 시대 파라오 무덤들이 존재하고 모두 투탕카멘의 것보다는 크고 화려하지만 제대로 보존된 건 단 하나도 없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신왕국 시대의 파라오들 중에서 초라하다는 것이지, 고대 이집트 전체로 보면 투탕카멘의 무덤이 무조건적으로 초라하다고 할 수만은 없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이다. 프수센네스 1세는 혼란기인 제3중간기 시절의 파라오인데, 무려 46년 동안을 재위했다. 단 한번도 도굴당하지 않은 무덤으로 유명한데[14] 이 무덤에서 출토된 부장품과 투탕카멘의 부장품을 비교하면 투탕카멘의 것이 압도적으로 화려하고 정교하다. 즉 이집트 역사 최전성기인 신왕국 시대의 별볼일없는 파라오의 무덤이 웬만한 혼란기 시절 오랜 기간 재위했던 파라오들의 무덤을 훨씬 능가한다는 뜻.

의외로 투탕카멘의 부장품 양이 다른 파라오 양에 비해 딱히 꿇리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다른 파라오들의 무덤이 투탕카멘의 무덤에 비해 훨씬 거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비슷한 양의 부장품들이 조금 더 넒고 정돈된 형태로 넣어져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로 투탕카멘의 부장품들이 좁은 무덤 안에 넘칠 정도로 그득그득 쌓여있었던 것을 근거로 꼽는다. 관도 운신이 어려울 정도로 딱 겨우겨우 들어갈만한 크기의 방을 파놓은걸 보면, 무덤이 좁아서 부장품을 얼마 넣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좁은 공간 안에 많은 부장품들을 전부 때려넣은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즉 미리 정해진 양의 부장품들을 전부 좁아터진 방 안에 몰아넣어서 초라해 보일 뿐 양 자체는 별다른 차이가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물론 주장의 신빙성을 검증해줄 다른 파라오의 무덤이 발굴된 적이 없기에 그저 가설일 뿐이다.


3.1. 관[편집]


파일:220px-Tutanchamun_Schrein_1_-_4,_Sarkophag.jpg
파일:THREE-Golden-Sarcophagi.jpg
파일:0rh3xtnn6fu61.webp
4겹의 황금 사당.
붉은 규암 석관 속 들어있던 세 겹의 황금관.
황금관들의 모습 비교.[15]
현실을 가득 메우고 있던 사당이 바로 위의 그림처럼 층층이 포개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목재로 프레임을 만들고 그 위에 얇게 금을 발라 제작했는데, 투탕카멘이 요절한 터라 급히 만드는 바람에 일부 사당 벽면이 찌그러진 곳도 있다고 한다. 가장 바깥 사당과 두 번째 사당 사이에는 푸른색으로 아마포를 덮은 목조 프레임을 따로 만들어 사당을 받쳤다. 사당들 사이사이의 좁은 틈에도 유물들을 넣었고, 사자의 서에 적힌 대로 벽돌을 넣거나 죽은 자를 보호하는 부적들을 끼워넣었다. 가장 바깥 사당에는 푸른색 색유리로 만든 장식 밖에 없지만 안쪽의 사당들에는 히에로글리프로 사자의 서의 내용을 정교히 새겼다. 현재는 모두 해체해 카이로 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사당들 가장 안쪽에는 붉은 규암으로 만든 석관이 있었다. 뚜껑은 붉은 화강암으로 제작했는데, 발견 당시에는 오랜 세월을 이기지 못해 뚜껑이 두쪽 나있었다고. 석관의 네 모서리에는 각각 이시스, 네프티스, 세르케트, 네이트 여신들이 팔을 뻗어 관을 감싸 수호하는 모습이 새겨져있다. 뚜껑의 모습을 보면 한 쪽이 불룩하게 튀어나온 걸 볼 수 있는데 이쪽이 머리가 있던 쪽이다.

규암 석관 안을 보면 드디어 황금관이 나온다. 바깥쪽 2개의 관은 목조에 금박을 입히고 그 위에 준보석과 색유리를 박아 만들었다. 위의 2번째 사진에서 가장 거대한 관이 맨 바깥쪽, 그리고 앞으로 올 수록 안쪽의 관이다. 의외로 2번째 중간 관이 색감으로만 보면 가장 화려한 편이다. 참고로 바깥 2개의 관은 금을 입한 나무로 만들었지만 가장 안쪽 관은 통째로 110.4kg의 순금으로 만들었다. 두 번째 사진에서 가장 앞에 있는 관이 바로 그것. 이 관을 열면 마침내 가면을 쓰고 있는 투탕카멘의 미라를 조우할 수 있다. 미라에는 샌들, 목걸이, 단검, 그리고 수많은 기타 장신구들이 올려져 있었고 머리에는 구슬로 장식된 금관이 얹혀졌다. 미라를 꽁꽁 싸매던 수 백겹의 아마포 붕대 사이사이에도 신관들이 보물들을 끼워넣은 탓에 미라 붕대를 푸는 과정에서도 정말 엄청난 양의 유물들이 나왔다. 미라가 그 자체로 고대 이집트의 보물창고라고 봐도 전혀 과언이 아니었을 정도였다.


3.2. 미라[편집]


파일:howardcartermummt.webp
파일:tumblr_p0994782pm1rgoah1o1_1280.jpg
미라를 확인하는 하워드 카터.[16]
발굴 당시의 모습.
투탕카멘의 무덤 자체는 1922년에 이미 발견되었으나 발굴 과정이 워낙 오래 걸려서 미라는 3년이 흐른 1925년에야 꺼낼 수 있었다. 투탕카멘의 미라를 감싸던 붕대를 풀 때 상당히 골치를 썩였는데, 고대 신관이 미라 위에 축복의 의미로 부은 향유가 시간이 흐르며 시꺼멓게 굳어서 미라를 관에다가 착 붙여버렸던 탓이 컸다. 게다가 향유와 연고를 지나치게 많이 부어서 미라의 붕대가 상당히 약화된 상태였기에 함부로 풀다가는 미라고 뭐고 부서져버릴 위험도 있었다. 때문에 미라의 붕대를 푸는 과정은 매우 천천히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

하워드 카터는 미라에 최대한 손을 대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발굴 도중 장신구를 떼내기 위해서 미라를 절단할 수 밖에 없었다. 향유가 검은색으로 굳은 데다가 수 천년의 세월로 인해 장신구들이 완전히 미라에 딱 붙어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신구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미라의 팔다리를 모두 절단했고, 특히 황금 마스크를 떼낼 때는 마스크가 아예 얼굴 피부까지 달라붙어있던 터라 아예 머리를 잘라냈다. 얼굴피부와 마스크 사이로 뜨겁게 달군 칼을 집어넣어 겨우겨우 마스크를 떼어냈다고 한다. 장신구들을 모두 제거한 후에는 실로 다시 봉합했다.

붕대를 벗겨낸 투탕카멘의 미라 모습. 혐오감을 줄 수 있으니 열람시 주의 [펼치기ㆍ접기]
파일:7958b8d5-21d9-494c-912a-6cca4e4134be.webp
파일:karlins6-3-10-11.jpg

미라의 상태는 썩 좋지 못했다. 향유와 습기 때문에 피부 자체가 탄화되어 푸석푸석해져버렸고, 피부는 검은색으로 변질되어 수많은 잔금들이 가있었다. 독특한 모습의 두개골은 넒고 낮은 이마를 가지고 있었다. 머리는 깔끔하게 면도해서 머리카락을 싹 민 상태였고 긴 속눈썹을 가진 눈은 반쯤 뜨여있었다. 한때 뚜렷했을 콧날은 미라에 붕대를 감는 과정에서 납작하게 눌려버렸다. 콧대를 살리기 위해 일부러 콧구멍에 향유를 적신 리넨 천을 넣어두었지만 별 소용은 없었던 모양. 윗입술은 약간 뒤로 당겨져 앞니가 그대로 드러났고 얼굴에 난 수염도 모두 깨끗하게 깎였다. 왼쪽 뺨에는 딱지처럼 내려앉은 오목한 부분이 파였고 작은 귀에는 귀걸이용 구멍이 뚫려있었다. 배꼽에서 왼쪽 엉덩이까지를 칼로 갈라 내부의 장기들을 모조리 빼낸 걸로 보이며, 장기들을 빼낸 빈 공간에는 향유를 적셔 단단하게 굳힌 리넨천을 넣어 모양을 잡았다.

미라는 1926년 무덤에서 꺼내져 부검을 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미라의 흉곽이 완전히 부서져 있고 머리뼈 조각이 있다는 결과가 나오며 암살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허나 1968년 엑스레이를 다시 찍어본 결과 흉곽 손상과 머리뼈 손상은 투탕카멘 사후 미라화 과정에서 생겨난 손상이며,[17][18] 투탕카멘이 둔기로 머리를 맞거나 그런 일은 없었다는 결론이 최종적으로 나오면서 암살설은 폐기되었다. 현재는 투탕카멘이 다리 골절, 무혈성 괴사, 말라리아 등 복합적 원인에 시달리다가 19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고 보는 게 정설이다.[19]

발견 당시 투탕카멘의 성기수직으로 직립한 모습으로 미라화되어있었다. 오시리스의 모습을 본따서 고대 이집트인들이 고의적으로 이런 모습으로 묻었다는 주장이다. 발굴 당시 투탕카멘의 성기는 십자붕대에 따로 싸서 직립한 형태로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음모는 다 빠져서 찾아보기 어려웠고, 고환은 허벅지에 눌려서 평평해진 상태였다. 또한 1968년에 다시 CT를 찍을 때 1928년 발굴 당시에만 해도 멀쩡히 투탕카멘의 미라에 붙어있던 그의 성기가 사라져서 크게 소동이 발생한 적이 있었는데, 알고보니 미라를 다시 재안치하는 과정 중 성기 조각이 몸에서 떨어졌던 걸로 밝혀지며 해프닝으로 끝났다. 투탕카멘의 성기 조각은 미라를 올려놓던 모래 속에서 발견되었다고.

투탕카멘의 미라는 1926년에 DNA 검사와 기본적인 부검 절차를 끝낸 후에 가장 바깥쪽 황금관에 되돌려놓은 뒤 붉은 규암 석관에 넣어서 무덤에 다시 안치했다.[20] 대신 관광객들이 미라를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석관 위에 유리 뚜껑을 씌웠다. 2007년 11월에는 무덤을 찾는 관광객들이 내뿜는 습기 때문에 미라에 곰팡이가 피는 등 파손의 위험이 높아지자 온도 조절이 가능한 유리 커버를 씌우기도 했다. 그 이래로 미라는 아직까지도 무덤 내부에 고이 잠들어있다.


4. 부장품[편집]


투탕카멘의 무덤에서는 그 좁은 공간에도 불구하고 총 5,398점의 유물들이 쏟아져나왔다. 총 200여 점이 넘는 보석류들이 발견되었고, 413개의 샤브티가 묻혀있었다. 웬만한 이집트 유적들을 가뿐히 압도할 정도로 엄청난 양의 유물들이 대규모로 발굴되었기에 실로 고대 이집트학 역사상 최고의 발견이라 할만하다.

다만 처음에 발견했을 당시에는 유물들의 상태가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도굴범들이 이미 고대에 한 차례 무덤을 약간 털어버린 적이 있었는데, 뒤늦게 이걸 발견한 신관들이 부랴부랴 무덤을 대충 재정돈하고 봉인하면서 유물들이 깨지고 그 사이에 습기가 들어가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도굴로 인해 봉인된 문 사이에 갈라진 틈이 생기면서 그 사이로 습기가 들락날락하며 무덤의 환경은 유물들이 보존되기에 좋은 환경은 절대 아니었다. 목재 유물들의 경우 뒤틀리고 접착제가 녹아버린 탓에 손만 대도 깨지기 직전의 상태가 되어버렸고 특히 썩기 쉬운 천과 아마포의 상태가 최악이었다. 일부 아마포 유물들은 아예 손을 대기도 전에 검은 가루로 삭아버렸다고. 또한 대부분의 유물들은 표면이 석고에서 배어나온 일종의 분홍색 철 화합물로 얇게 뒤덮여 있었다고 한다.

투탕카멘의 무덤에서는 의외로 파피루스 문서는 단 한 점도 발견되지 않았다. 무덤에서 나올 귀중한 기록문서를 노리던 고고학자들로서는 엄청나게 아쉬웠던 일. 아멘호테프 2세 등 다른 파라오들의 무덤에서는 파피루스 문서가 일부 발견되었던 걸 생각하면 투탕카멘의 무덤이 필수품들만을 쑤셔넣기에도 지나치게 작아서 그냥 묻지 않았던 듯하다.

투탕카멘의 무덤이 도굴당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제로는 이미 도굴당한 무덤이다. 다만 매장당한 직후 소규모로 몇 차례 도굴당했을 뿐이고 다시 신관들이 봉인한 이후로는 수 천년 동안 외부인들의 발을 타지 않아서 상대적으로 온전한 상태로 남아있다는 것이다.[21] 물론 미라고 뭐고 싸그리 털려버린 다른 파라오들의 무덤에 비하면 기적적일 정도로 완벽한 상태로 발견된 건 맞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게 남아있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매장실 속 보석 목록에 적혀있는 보물들의 60%가 사라졌고, 특히 값비싼 화장품이나 유리, 대부분의 금속류들은 탈탈 털렸다. 다만 워낙 처음에 함께 묻은 보물의 양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아서 그렇게 티가 안나는 것이다.

무덤에서는 수 천점이 넘는 유물들이 출토되었으나 아래에는 핵심적이거나 주요 유물들만 설명한다.

사진
설명

파일:800px-CairoEgMuseumTaaMaskMostlyPhotographed.jpg

투탕카멘의 가면
투탕카멘의 상징이자 아이덴티티라고 해도 될만큼 유명한 유물. 투탕카멘의 미라가 쓰고 있었던 핵심적인 보물이다. 높이는 54cm, 너비는 39.3cm, 내부 깊이는 약 49cm다. 황금을 바탕으로 라피스 라줄리, 흑요석, 색유리, 터키석, 홍옥수 등을 박아넣어 만들었다. 단순히 물질적인 가치만 추산하면 약 26억 원. 하지만 고고학적 가치와 상징성을 생각하면 수백억은 가뿐히 넘어갈 만한 가치를 가진 엄청난 보물이다. 2015년에는 직원이 실수로 턱수염 부분을 떨어뜨리는 대참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투탕카멘의 가면 문서 참고. 여담이지만 이 투탕카멘의 가면 말고도 파라오 프수넨네스 1세의 데스마스크가 남아있다. 하지만 그 정교함과 화려함이 훨씬 덜하고 초라해서 딱히 유명하진 않다.

파일:32c13f66-e550-4d72-9af7-1e3b4738f459-tuts-golden-sandals-egypt-getty.jpg

황금 샌들
투탕카멘이 내세에서 신을 신발이다. 나무를 꼬아서 만들었고 그 위에 녹색 가죽, 그리고 얇은 금박을 덧씌워서 장식했다. 밑창은 백색 테라코타로 얇게 코팅되어있다. 발등의 스트랩은 얇은 나무 껍질에 금을 입혀서 만들었다. 발바닥 부분에는 연꽃과 파피루스 줄기로 포박된 노예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이집트의 아홉 대적들을 상징하는 4개의 활들이 위와 아래에 한 쌍씩 있다. 이집트의 적들을 파라오가 발로 밟고 다닌다는 의미였다.

파일:DB268BED-96A7-40AF-88A8-A849821AF8CD.jpg

투탕카멘의 단검
투탕카멘의 관에서 발견된 황금 단검과 철제 단검. 특히 철제 단검의 경우 유난히 유명한대 그 이유는 운석으로 만든 단검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철질 운석 속 운철을 사용해서 만든 검이다. 일반적으로 주조된 고대 철검의 경우 많아봤자 니켈 함량이 최대 4%를 넘지 않는데, 이 단검에는 11%가 넘는 니켈이 함유되어 있다. 보통 운석에 5~35% 정도 니켈이 함유되어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일반 철광석이 아니라 운석을 녹여서 만들었다는 뜻이다. 심지어 이 시대의 철검은 워낙 주조하기가 어려워서 황금보다도 귀하게 여겨졌다. 실로 엄청난 가치를 가진 유물인 셈이다.

파일:abf7c0eaf03f7a97d3448335bd4b4bcc.jpg

황금 지팡이와 도리깨
고대 이집트에서는 지팡이와 도리깨가 왕권의 상징이었다. 관짝에 새겨진 파라오들이 손을 겹쳐서 들고 있는 게 바로 이 지팡이와 도리깨다. 쌍으로 발견되었을 같지만 각각 따로 발견됐다. 지팡이는 전실(Antechamber)에서 발견됐고 도리깨는 황금 사당 내부에서 발견했는데, 원래 한 쌍으로 다니는 게 맞아서 함께 전시하고 있는 중. 이 지팡이와 도리깨에 모두 '투탕카톤'이라고 해서 투탕카멘의 초기 이름이 새겨져 있는 걸 보아 투탕카멘의 재위 초반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22] 대관식 때 파라오들이 지팡이와 도리깨를 들었던 걸 생각하면 아마 대관식 때 투탕카멘 본인이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둘다 청동으로 만든 심 위에 푸른 색유리와 금박을 씌워서 만들었고, 도리깨의 황금 구슬의 경우 안에 목재 심이 들어가있다.

파일:Replica_of_Tutankhamun’s_chariot_(side_view).jpg

황금 전차
고대 이집트인들은 정말 파라오를 위해 무덤에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싸넣었는데 당연히 전차도 포함됐다.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총 5대의 이륜전차가 발견됐다. 발견 당시에는 저런 완전한 모습이 아니라 폭탄을 맞은 것처럼 부품들이 다 분해되어 여기저기 널려 있었는데,[23]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들인 끝에 결국 5대의 전차를 모두 복원할 수 있었다. 투탕카멘의 무덤이 발견되기 이전에 살아남은 고대 이집트 전차 유물이 고작 3대 밖에 없었는데 이 무덤에서 5대에 달하는 전차가 출토되며 그 당시 전차의 모습을 상세하게 복원할 수 있었다.

파일:28279099_1814234315543642_9097826608836175950_n.jpg

투탕카멘의 황금 왕좌
투탕카멘의 가면과 함께 투탕카멘의 보물들 중 가장 유명한 유물들 중 하나다. 무덤의 전실 하마 머리장식 침대 아래에서 발견되었는데, 하워드 카터는 처음에 이 왕좌를 보고 너무 놀라서 할 말을 잃었다고 한다. 전형적인 제18왕조 양식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다만 보통 신왕국 시대의 왕좌들은 팔걸이가 여성의 머리로 만들어져 있는데 이 왕좌는 팔걸이가 사자로 장식되어 있다는 게 특이한 점이다. 왕좌 자체는 나무로 만들었고 금박으로 덮은 후 준보석, 방해석, 색유리 등으로 화려하게 상감했다. 원래 고양이 모양의 다리 사이에도 금으로 식물 형태의 조각이 달려있었지만 도굴꾼들이 훔쳐 떼어갔다. 등받이의 양각 장식을 보면 아톤 신이 태양 원반의 모습으로 투탕카멘과 그의 아내 안케세나멘에게 축복을 내리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아톤 신앙이 투탕카멘의 치세 초반부에만 공인되었던 걸로 보아 이 왕좌 역시 투탕카멘의 재위 초창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파일:31618491397_935aa434ff_b.jpg

황금 독수리 목걸이
독수리 여신이었던 네크베트는 이집트 파라오들의 수호자이자 왕실의 수호여신이었다.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독수리를 모티브로 한 장식물들을 많이 만들었는데, 이 네크베트 목걸이가 그 대표적인 예시다. 딱 봐도 알겠지만 엄청나게 정교하게 제작됐다. 총 250여 개의 수많은 작은 황금 조각들을 하나하나 이어붙여 날개 부분을 만들었고, 가슴과 목을 덮도록 앞으로 목걸이를 두른 뒤 날개가 목을 감싸도록 뒤에서 연결하면 된다. 참고로 이 목걸이는 장례용이었고 실제 생전에는 이렇게 치렁치렁한 걸 걸치지는 않았다. 이 목걸이는 투탕카멘의 미라가 직접 덮고 있었으며 현재는 보존 처리를 거쳐 카이로 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파일:eb45317d1d2f2bba41c09da8f60691b3.jpg

투탕카멘의 황금관
원래는 투탕카멘의 가면 아래에 미라의 머리 바로 위에 씌워진 황금관이었다. 아마 투탕카멘 본인이 생전에도 즐겨 착용하는 황금관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고대 이집트에서는 여자고 남자고 모두 서클렛이나 관을 착용하는 게 일상적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가발을 착용했는데, 이 가발이 앞으로 떨어져 시야를 가리지 않도록 관을 써서 머리를 뒤로 묶었던 것이다. 투탕카멘의 황금관의 경우 이런 실용적인 목적과 함께 상당히 장식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코브라의 머리는 홍옥수와 청금석, 색유리로 상감되어 있고 길고 꾸불꾸불한 꼬리는 가발의 형태에 맞게 곡선형이다. 독수리는 아예 순금으로 만들었고 눈은 흑요석으로 박아넣었다. 특히 독수리의 경우 목 뒤의 주름과 깃털까지 표현했을 정도로 대단히 섬세한 공예기법을 선보이며 찬탄을 자아내기도 했다. 발견됐을 당시에는 저 이마의 코브라 장식이 분리되어 있었다. 가면 아래의 좁은 공간에 코브라 장식이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인 듯하다.

아누비스 상
죽음의 신 아누비스를 묘사한 신상이다. 길이는 3피트가 조금 안되고 발견 당시에는 묘실 바로 옆에서 파라오를 수호한다는 의미로 목에 화환이 걸린 채 세워져 있었다. 나무를 깎아 검은색 수지를 바른 다음 황금으로 귀와 눈, 목걸이 등에 금박을 발라 제작했다. 아누비스가 누워있는 상자는 이집트식 신전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 안에는 8개의 보석 펜던트들이 들어있었다. 상자 아래에는 이 상자를 처음에 무덤에 들여놓을 때 사용했던 썰매가 있다. 특유의 분위기 때문인지 카이로 박물관에서도 인기가 많은 유물에 속한다.

파일:EgyptMus-12.jpg

카노푸스 단지
고대 이집트인들은 미라를 만들 때 장기를 따로 떼어서 카노푸스 단지에 보관했다. 이 상자는 투탕카멘의 장기를 담을 용도로 제작된 카노푸스 단지다. 테두리에 금을 두른 백색 설화석고로 만들었고 그 안에는 역시 설화석고로 만든 4개의 카노푸스 단지들이 들어있다. 상자의 각 모서리에는 이시스가 양팔을 뻗어 상자를 감싸는 형상으로 조각되어 있는데, 그 옆에는 '나의 팔은 이 안에 있는 것을 보호하고, 나의 안에 있는 임세티를 수호한다'라고 써져있다.

파일:a47be6d352819d0260269e0f54afa3e8--mummification-process-tutankhamun.jpg

카노푸스 황금관
익숙한 모양의 관이지만 이건 미라를 담는 관이 아니라 위의 설화석고 카노푸스 단지 속에 들어있던 작은 관들이다. 미라가 들어있는 관을 작게 축소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장기 역시 영혼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몸뚱아리와 똑같이 취급했고, 그래서 똑같이 황금관을 크기만 작게 해서 만들어 장기를 넣은 것이다. 4개의 카노푸스 단지들마다 한 개씩 총 4개의 조그만 황금관들이 따로 있다.

파일:f0eb5fdc32c5ce9d41b9c81532e5096b--gold-art-tutankhamun.jpg

카노푸스 단지 보관함
맨 위 투탕카멘의 무덤 그림을 보면 보물의 방 한가운데에 떡하고 자리잡은 황금빛 상자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바로 이거다. 바로 위의 카노푸스 단지들을 보관하는 용도로 썼고, 이시스, 네프티스, 네이트, 세르케트 여신이 양 팔을 뻗은 자세로 사당을 수호하고 있다. 틀은 나무를 깎아 만들었고 그 위에 금박 판을 붙였다. 참고로 이 금박 판을 붙일 때 매우 정교한 작업이 필요했는데, 투탕카멘이 요절한지라 만들 시간이 부족했고 일을 급히 처리하다보니 일부 부분에 약간 우그러진 부분이 있다고 한다. 디테일 면을 보자면 사당의 천장 쪽에는 태양 원반을 얹은 우라에우스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위를 노려보고있다. 부조에는 투탕카멘과 그의 왕비 안케세나멘이 향료를 뿌리면서 축복을 기원하거나 파라오가 파피루스 배에 타서 부메랑을 던지는 장면들이 섬세히 새겨졌다.

파일:21995902-standard.jpg

파라오 수호신상
무덤의 전실, 묘실 바로 앞에 세워져 있던 한 쌍의 수호신상이다. 높이는 약 5피트 6인치 정도로 실물보다 약간 더 크고, 나무로 조각되어 있으며 그 위에 금박을 두텁게 칠해서 완성했다. 눈은 석회암에 검은 흑요석을 박아서 만들었다. 원래는 신상 위에 얇은 리넨 천이 입혀져 있었는데 수 천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그대로 옷이 삭아버렸다. 신상을 보면 가장 눈에 띄는 게 검디검은 피부색인데, 이는 당시 고대 이집트인들이 검은색을 오시리스의 상징색이자 풍요의 색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면 신상이 완벽히 똑같은 건 아니고 머리 장식이 약간 다르다.

파일:28060384708_3ab1b0a420_b.jpg

소년 투탕카멘의 목조 두상
투탕카멘의 어릴 적 모습을 조각한 목조 두상이다. 학계에서는 '네페르템의 두상'이라고도 부른다. 통째로 나무를 깎아 만들었고 높이는 약 30cm 정도다. 붉은색으로 피부를 칠했고 눈썹과 눈동자, 아이라이너 등은 푸른색으로 칠했다. 상당히 정교하게 만들어서 심지어 깎은 수염의 흔적마저 묘사했을 정도다. 하워드 카터는 유물 발견 후에도 자신의 일지에 이 유물에 대한 언급을 전혀 남기지 않았는데, 심지어 이집트 당국이 발굴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요구했던 사진 기록마저 남기지 않아서[24] 몰래 빼돌리려한 게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다.

파일:80edf319362fb5ef04040200f112ecf4.jpg

스카라베 보석
날개달린 스카라베를 모티브로 삼은 보석 목걸이 장식이다. 보면 매와 스카라베를 절묘하게 뒤섞어놓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몸통은 반투명한 황녹색 준보석을 써서 만들었고 황금으로 만든 앞다리는 풍뎅이의, 뒷다리는 매의 것이다. 뒷다리에는 각각 연꽃과 백합을 쥐고 있다. 스카라베 바로 옆에는 태양 원반을 쓴 코브라 2마리가 주위를 경계하고 있는 모습으로, 코브라의 꼬리가 길게 이어져 위로 올라가며 자연스레 스카라베의 날개를 구성한다. 스카라베 위쪽에는 호루스의 눈이 달려있다. 호루스의 눈 위에는 초승달의 형상과 3명의 인물들이 새겨진 원반이 올라가 있는데 이 원반에 , 투탕카멘, 토트를 새겼다. 스카라베 아래쪽으로는 연꽃과 양귀비꽃 장식이 달려있다. 홍옥, 청금석, 방해석, 흑요석, 그리고 다채로운 색깔들의 유리로 만들어져 색감이 굉장히 뛰어나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가치가 높다.

파일:kingtutearring.jpg

황금 귀걸이
투탕카멘이 생전 직접 사용하던 귀걸이다. 귀랑 닿는 부분에서 생기는 마찰로 인해 귀걸이가 닳은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귀걸이가 힉소스인들의 침입 이래로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유행으로 번져나갔다. 허나 남성의 경우 귀걸이는 해봤자 어린 소년들이 끼는 것에 그쳤고 성인들은 거의 끼지 않았다. 다만 투탕카멘의 가면에는 귀 부분에 구멍이 뚫린 것을 보아 소년 파라오였던 투탕카멘이 귀걸이를 하고 다녔음을 알 수 있다. 귀걸이 자체는 순금으로 몸체를 만들었고 온갖 색유리와 준보석 조각들을 하나하나 박아서 만들었다. 아래에는 태양 원반을 머리에 얹은 코브라들이 달려있어 걸을 때마다 찰랑찰랑거렸다.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크기가 작다는 걸 감안하면 정말 지극한 정성으로 만들었다는 게 보인다. 수 천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걸 생각하면 실로 놀라운 정교함이다.

파일:4250042205_c35a33e4b3.jpg

황금 사자 머리장식 침대
투탕카멘이 사후 세계에서 쓸 침대다. 나무로 만든 몸체에 순금을 발라서 만들었다. 이 침대를 처음 발굴한 하워드 카터는 사자가 아니라 치타라고 생각했는데 후대의 연구 결과 사자가 맞다고 결론이 났다. 고대 이집트식 침대의 기능이나 특수한 목적이 알려져 있지 않은 터라 이 침대를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이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왕족들의 탄생을 묘사한 벽화에 이 것과 비슷하게 생긴 침대가 등장하는 걸 보면 아마 투탕카멘이 내세에서 재탄생할 때 사용할 침대가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파일:31402770107_bab1398692_b.jpg

앙크 모양 거울 상자
모습이 굉장히 독특하게 생겼는데, 이건 이집트에서 생명의 상징이었던 앙크라고 한다. 원래 상자 안에는 거울이 들어있었지만 발굴 당시에는 이미 도굴꾼이 거울을 훔쳐가버린 후였다. 그래서 고고학자들은 아마 거울이 순금이나 매끈하고 값비싼 금속으로 만들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저 상자 뚜껑을 열면 그 안에 거울이 들어있는 식이었다. 둘다 목재로 만들었고 그 위에 금박을 입힌 뒤 색유리와 준보석을 박아 완성했다. 케이스를 밀봉할 수 있는 손잡이도 따로 만들어져 있어서 뚜껑 고정이 가능하다.

파일:Tutankhamun-treasures-7.jpg

황금 허리띠 버클
투탕카멘의 허리띠에 고정되었던 금제 버클이다. 순금으로 만들었고 투탕카멘이 전차에 올라타 사냥하는 모습을 정교하게 재현했다. 참고로 당시 고대 이집트에서는 파라오를 유능한 사냥꾼으로 묘사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군주로서 사냥을 잘하는 건 당연한 미덕이었기에 파라오가 사냥을 잘하든 잘하지 못하든 파라오가 사냥감들을 잡는 모습을 온갖 군데에다가 그려넣었다. 심지어 아케나톤의 왕비였던 네페르티티가 사냥을 하는 모습을 그린 부조도 있다.

파일:tutl36.jpg

독수리 펜던트
이 펜던트는 투탕카멘의 미라를 싸고 있던 아마포 붕대 속에 함께 들어있던 펜던트인데, 개중에서도 가장 안쪽에 목 부위 근처에 곱게 넣어져 있던 펜던트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생전 고인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물건을 미라 붕대 안쪽에 끼워넣었던 걸 생각하면 아마 투탕카멘이 생전에 즐겨끼던 펜던트일 가능성이 크다. 상이집트의 독수리 여신 네크베트를 묘사했고, 순금판 위에 푸른색과 붉은색 색유리를 하나하나 박아넣어서 만들었다. 펜던트에 사슬을 달 때는 날개 부분 상단 가장자리의 고리에 연결해서 매달고 다녔다.

파일:Ushabtis of Tutankhamun.jpg

샤브티
투탕카멘이 사후세계에서 해야할 일들을 대신 해줄 시종들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신분이 높을수록 많은 양의 샤브티들을 무덤에 묻었고, 지존의 파라오였던 투탕카멘은 무려 413개에 달하는 샤브티들과 함께 묻혔다. 종류도 가지각색이어서 농사짓는 샤브티, 서기 샤브티, 호위병 샤브티 등 다양했다.

파일:1442125753.png

세네트 게임판
상아로 제작된 고대 이집트식 세네트 게임판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생전 고인이 가장 좋아하는 물건을 무덤에 함께 묻었는데, 이 세네트 게임판이 같이 묻혀있던 걸 보아 투탕카멘이 살아있을 때 상당히 세네트를 좋아했던 듯하다. 심지어 다른 부조에도 제 아내 안케세나멘과 함께 세네트 게임을 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을 정도. 흑단과 백색 상아로 만들었고 테두리에 얇은 금으로 상형문자를 새겨넣었다.

파일:Tutankhamun’s_Fan.jpg

타조깃털 부채
사진만 보면 의아할 수 있지만 사진에 나온 건 부챗깃이 없는 부챗대다. 저 대에 긴 타조 깃털들을 꽂아서 부채로 썼던 것인데, 흔히 영화 속 왕 뒤에서 하인들이 천천히 부치고 있는 부채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는 이집트에서는 부채가 필수적이었다. 보통 그늘을 만들거나 바람을 부칠 용도로 썼으나 왕의 품위를 더하는 기물이기도 했다. 투탕카멘의 무덤에서는 총 8개의 부채가 발견되었는데, 이런 부채 외에도 손잡이가 달린 1인용 부채나 상아로 만든 부채도 있다.

파일:7a99aa300d15082a897208b1dfefee35928eab0e.jpg

상아 베개
해당 베개는 실제로 관 속 투탕카멘의 미라 머리를 받치고 있던 상아로 만든 베개다. 발굴 당시 관 속에 붕대로 칭칭 감긴 투탕카멘 미라의 머리를 고정하고 있었다. 공기의 신 가 머릿받침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는 이집트 신화에서 슈가 하늘을 떠받치는 신이기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머리를 신성하게 여겼고, 때문에 베개는 단순한 집기가 아니라 머리를 보호하고 악령을 물리치는 성스러운 기물이었다. 투탕카멘의 무덤에서는 이 베개 외에도 철로 만든 베개, 그리고 상아로 만든 베개가 4개 정도 더 출토되었다.

파일:0ae38f6c76b7b5eed37907ebf0f2b8a3.jpg

석고 화병
백색 설화석고로 제작한 화병이다. 전실과 별실에서 수많은 복잡하게 생긴 화병들이 발굴되었고, 현재는 보존처리를 거쳐 카이로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독특한 생김새로 이목을 끄는데 사진의 화병은 개중에서도 가장 희한하게 생긴 화병이다. 두 개의 석고 블록을 통째로 깎아서 만들었고, 옆에 복잡하게 달린 장식들은 파피루스를 형상화한 것이다. 화병 표면에는 투탕카멘의 카르투슈가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는 전형적인 초목의 모습이 새겨졌다. 전체적인 면을 보면 대칭적인 모습을 띠고 있으나 오른쪽에는 파피루스 꽃, 왼쪽에는 연꽃이 붙어있다. 당대에는 깨지기도 쉬운 석고를 조각하는 게 힘들어서 상류층이나 왕족이나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품들 중 하나였다고.

파일:Tutankhamun_Treasure_in_Paris_coupe_au_lotus-cropped.jpg

연꽃 모양 성배
하나의 석고 덩어리를 정교하게 깎아만든 연꽃 모양의 성배. 이집트 신화에서는 연꽃이 태고의 혼돈 속에서 솟아오른 부활의 모티프를 상징하기 때문에 이런 디자인을 활용한 것이다. 표면에는 푸른색 안료로 '그가 부활하기를, 강한 황소 호루스여, 생명의 아름다움이여, 두 땅을 조화케 하고 왕관을 쓰고서 신들을 달래는 황금 호루스, 상하 이집트의 왕이자 생명의 땅을 다스리는 자 네페케페루레'라고 쓰여있다. 투탕카멘의 무덤 전시회가 처음으로 열렸을 때부터 꾸준히 전시되는 핵심 부장품들 중 하나다.

파일:5249465318_f5c42ac78a_b.jpg

금제 트럼펫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트럼펫이다. 심지어 아직까지도 작동한다. 청동으로 만들어 그 위에 금을 입혀서 만들었는데, 금속으로 만든 탓에 도굴꾼들이 훔쳐가려다가 중간에 떨어뜨려서 도굴당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몸체에는 파라오와 아문 신의 모습이 새겨졌다. 현대의 트럼펫과의 차이점이라면 이 트럼펫에는 밸브도 없고 상당히 투박한 편이다. 하워드 카터가 직접 불어본 결과 대략 도에서 레 정도의 음이 난다고.[25] 고대 이집트 악기들 중 거의 유일하게 아직까지 보존되어 있는 악기이기 때문에 음을 정확히 복원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고대 악기이기도 하다.

파일:eMd770Dyy59a9X1-pNbdSMWa1pENa9SWO92QEolby3I (1).webp

스카라베 반지
청금석과 황금으로 만들어진 스카라베 모양의 반지. 반지가 작은 걸로 보아 아마 투탕카멘이 어린 시절 끼던 반지였던 걸로 추정된다. 투탕카멘의 무덤에서는 수십 개가 넘는 반지들이 쏟아져나왔는데, 투탕카멘의 왕명이 새겨진 단순한 순금 반지부터 어떤 반지는 정말 몇 천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정교한 것들도 존재한다. 참고로 반지는 가장 많이 도둑질당한 물건이다. 작고 훔치기 쉬워서 도굴꾼들이 집중적으로 훔쳐갔기 때문. 하지만 애초에 묻어둔 양이 너무 많아서 고고학자들에게 발견된 것들이 꽤나 많다.

파일:Tutankhamun_pendant.jpg

보석 펜던트
투탕카멘의 무덤에서는 수많은 펜던트들이 출토되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이 펜던트를 허리에 달거나 아예 가지고 다니는 등 다양하게 썼는데, 권력의 정점인 파라오의 경우 화려화기 짝이 없는 펜던트를 가지고 다녔다. 사진의 펜던트는 연한 파란색 옥으로 만든 황금 펜던트다. 이 펜던트 외에도 개코원숭이, 태양, 호루스의 눈 등의 기물들을 새겨놓은 펜던트들도 많다.

파일:fdc24ec6f44079d5ea04f0aeddfdbcba--amenhotep-iii-egyptian-jewelry.jpg

금제 파라오 입상 목걸이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굴되기는 했지만 투탕카멘이 아니라 아멘호테프 3세의 모습을 묘사한 조각상으로 추정된다.[26] 통째로 순금을 녹여 만들었고 우라에우스가 달린 전투모 케프레시를 쓰고 왕권의 상징인 도리깨와 갈고리를 들고 있다. 조각상의 목에는 비취와 대리석으로 만든 목걸이를 달았다. 보면 조각상에 금으로 만든 사슬이 달려 있는 걸 볼 수 있는데, 이 사슬을 목에 걸고 다녔다.

파일:QH2XF2PBXLPGOGO5KG6NCR4VCQ.jpg

작살 사냥을 하는 파라오 입상
나무로 조각하고 금박을 입혔다. 왕이 들고 있는 작살과 왼손에 감은 줄, 신발과 왕관에 붙인 우라에우스 등 부속물은 청동으로 따로 제작해 붙였다. 늪에서 배를 타고 작살로 사냥을 하는 투탕카멘의 모습을 묘사했는데, 이건 개중에서도 특별히 하마를 사냥하는 모습이다. 하마가 묘사되지 않은 이유는 이 장면에서는 하마가 파라오의 대적을 상징하는 사악한 동물이었기 때문. 사악한 동물을 조각해 무덤에 넣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일부러 하마를 사냥 모습에서 빼버린 것이다. 참고로 이 입상은 이집트 조각들 중에서도 독보적일 정도로 역동적인 자세를 하고 있는데,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던 아마르나 시대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다.


5. 관광 정보[편집]


  • 보통 왕가의 계곡의 매표소에서 판매하는 티켓으로 무덤 3곳에 입장할 수 있다. 하지만 투탕카멘의 무덤은 별도로 티켓을 사야 입장할 수 있다.

  • 2010년부터 무덤을 보수하기 위하여 관광객을 받지 않고 폐쇄하였다. 당초 5년 동안 보수할 예정이었으나, 2011 이집트 혁명의 여파로 작업이 늦춰졌고, 2015년에 무덤을 다시 개방하였으나, 10월에 다시 보수공사를 위해 폐쇄하였고, 2019년 2월에 보수가 완료되어 무덤이 개방되었다.


6. 하워드 카터의 일기[편집]



6.1. 무덤의 발견[편집]


[ 펼치기 • 접기 ]

10월 28일[1]

: 룩소르에 도착해 캘린더를 보기 위해 에레멘트로 향하는 10시 기차를 탔다. 나일 강 동안에 있는 그의 작은 집에서 이틀간 그의 집에서 묵었다.


11월 1일 : 왕가의 계곡에서 발굴 작업을 시작했다. 내가 작업을 시작한 곳은 람세스 6세 무덤 입구 북동쪽 모서리 부분이다. 이 곳에는 계곡에서 일하던 인부들의 오두막들의 유구가 남아있었다. 남쪽으로 땅을 파헤쳐나가며 작업을 계속하자 데이비스가 이전에 발굴해둔 오두막 마을 유적들과 그대로 이어졌다. 우리는 오두막을 덮고 있던 자갈들을 치우고 기록한 다음 더 아래쪽을 조사하기 위해 오두막 유적을 모두 들어내 다른 곳으로 옮겼다.

11월 4일 : 땅을 파던 중 10시 쯤에 오두막 아래에서 정체모를 무덤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발견했다. 람세스 6세의 무덤에서 대략 4m 정도 더 아래에 있는 계단이었는데, 기반암을 그대로 깎아만든 계단이다. 계단의 깊이는 계곡의 바닥 부분과 거의 비슷하다. 계단의 모양을 보면 제18왕조 시대의 무덤 같기는 하지만..... 아직 확실한 건 없다. 저 계단으로 내려가는 통로를 가득 채우고 있는 자갈들을 치우고 나서야 무어라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11월 5일 : 4일과 5일을 꼬박 자갈들을 치우는 데 보냈다. 이제야 계단의 네 모서리들이 명확하게 제모습을 드러냈다. 추측한 바와 같이 기반암을 파내만든 4m x 1.6m의 입구이며, 람세스 6세 무덤이 있는 경사면에 접해있다. 해가 질때까지 12번째 계단까지 흙과 자갈들을 치워낼 수 있었다. 자갈들을 치워내자 석회로 봉인된 벽이 드러났다. 이로써 우리가 찾아낸 것이 무덤이라는게 거의 확실해졌다. 석회에 찍힌 도장자국이 온전한 것을 보아 아마 도굴당하지 않은 무덤일지도 모른다.

자갈 위로 드러난 문에 찍힌 도장자국을 조사했지만 고대 이집트 왕실에서 쓰던 아누비스 인장의 모습과 같다는 것 정도만 밝혀낼 수 있었다. 무덤에 찍힌 봉인이 온전한 점, 무덤 바로 위에 람세스 6세 시대에 살던 인부들의 오두막이 지어져 있었기에 천만다행으로 무덤이 도굴당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우리가 발굴한 무덤은 제20왕조 이래로[2]

단 한번도 도굴당하지 않은 무덤임이 거의 확실시된다.

무덤을 봉인하는 문에 찍힌 인장의 모습을 보면 꽤나 지위높은 인물의 무덤일 것 같은데 누군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석회로 된 문짝과 천장이 맞닿는 곳에 있는 나무로 된 문틀에 주목했다. 이미 석회가 일부 바스러져 있어서 건드리기가 쉬웠다. 무덤이 온전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문틀 오른쪽 모서리에 3.5cm x 1.5cm 크기의 작은 구멍을 뚫었다. 나는 이 구멍을 통해 전등빛을 비추어 봉인된 문 뒤의 복도에도 바닥부터 천장까지 돌과 자갈, 모래가 그득그득 차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 무덤이 도굴되지 않았다는 또다른 증거다.

도굴당하지 않은 무덤을 홀로 앞에 두고, 수 년간 흙을 퍼내며 힘들게 살아오다가 마침내 일생일대의 엄청난 발견이 내 눈앞에 와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탐험가에게 그보다 더한 짜릿함은 없을 것이다. 나는 떨리는 손을 멈추고 엄청난 인내심과 함께 내가 만든 구멍을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은 후 문에 찍힌 봉인 인장에 더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없을까하고 다시 문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내가 파낸 부분으로 드러난 문의 윗부분에 있는 조그만 인장자국으로는 도저히 무언가 더 알아낼만한 게 없었다. 앞서 썼듯이 왕실용 인장과 모습이 비슷하다는 것 정도를 제외하면 별다른 소득이 없다.

내가 꿈꾸던 잃어버린 무덤들 중 하나를 찾기위해 수 년간의 고된 고생 끝에 내가 지금 엄청난 발견을 목전에 두고 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지만, 내가 찾아낸 무덤의 입구가 다른 파라오들의 무덤 입구에 비해 지나치게 작다는 것 때문에 매우 혼란스럽다. 무덤의 봉인양식이나 구조는 제18왕조 시대 것이 분명하다. 왕실의 성은을 받아 왕가의 계곡에 묻힌 귀족의 무덤일까? 아니면 설마 왕족의 무덤일까? 내가 이렇게 상상의 나래를 펼쳐도 내 머리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3]

어느새 밤이 깊어 계곡에 어둠이 내려앉았고, 달은 동쪽 하늘에 푸르고 높게 떠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혹시모를 이변을 막기 위해 입구를 다시 흙으로 덮고 인부들을 시켜 지키도록 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영국에 있는 카나본 경에게 전보를 쳤다. 전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마침내 왕가의 계곡에서 엄청난 발견을 해냈습니다. 매우 아름다운, 아직까지 봉인이 남아 있는 무덤입니다. 카나본 공께서 도착하실 때까지 다시 봉인해 놓겠습니다. 축하드립니다."[4]

11월 6일 : 인부들을 시켜 카나본 경과 함께 무덤을 재개봉하기 위해 일단 무덤 입구를 완전히 흙으로 덮어놓도록 했다. 고대 오두막의 벽으로 쓰이던 무덤 입구 바로 옆의 큼직한 암석을 굴려 옆으로 치워버렸다.

11월 7일 : 벌써 무덤 발견에 대한 소식이 전국에 빠르게 퍼졌다. 수 십명의 호기심 많은 기자와 특파원들이 몰려들어 내게 축하를 전하고 질문을 퍼붓는 일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한편 나는 카나본 경이 이집트에 도착하기 전까진 무덤을 직접 건드릴 수는 없었으니 무덤 인근의 오두막 유적들을 한꺼번에 발굴, 정리했다. 계곡 남쪽으로 쭉 땅을 파헤쳐내려가자 더 많은 오두막 잔해들이 나왔고, 무덤에 쓸 석회 제작소 비스무리한 유적을 기점으로 오두막들의 방향이 서쪽으로 꺾어졌다. 이 작업은 11월 13일 월요일까지 계속되었다. 내가 작업을 하면서 보니, 이전에 이 곳을 발굴했던 데이비스는 오두막들이 별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유구 윗부분만을 대강 발굴했고 오두막 기단과 바닥 부분은 아예 들여다보지도 않은 것 같다.

11월 8일 : 카나본 경에게 곧 도착한다는 전보를 받았다. 잠시 후 20일 경에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다는 전보를 또다시 받았다.

11월 10일 : 캘린더가 소식을 듣고 발굴 현장에 도착했다.

11월 18일 : 곧 이집트에 도착할 카나본 경을 맞이하기 위해 카이로로 출발했다.

11월 20일 : 카나본 경과 그의 가족들이 이집트에 도착했다.

11월 23일 : 카나본 경이 마침내 발굴 현장에 도착했다. 내 숙소에 그의 짐을 풀었다. 캘린더가 다시 무덤 발굴 작업을 재개했다.

11월 24일 : 캘린더가 흙을 파내고 다시 첫 번째 문에 이르렀다. 이번에 다시 세어본 결과 내려가는 계단 층계가 총 16개다. 문을 가리던 모래와 자갈들을 깔끔히 치워내자 '투-앙크-아멘'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카르투슈가 선명히 보였다. 석회로 덧칠한 바위문에는 왕실 인장, 장례 인장 등 수많은 도장들이 어지럽게 찍혀있었는데, 대체로 아래쪽에 찍힌 도장자국들이 훨씬 보존 상태가 좋았다.

문 위쪽을 유심히 살펴보니 두 차례 개봉했다가 다시 봉인한 자국이 확연히 보였다. 내가 지난 5일에 확인한 그 인장자국은 이미 한번 열렸던 문을 다시 봉인할 때 찍힌 자국인 것 같다. '투탕카멘'이라는 이름이 발견되면서 이 무덤이 대략 어느 시대에 지어진 것인지는 어느 정도 감이 잡히지만, 대체 무슨 용도로 지어진 것인지, 그리고 누구를 위한 장소인지는 아직도 미궁 속에 빠져있다. 인부들이 문 앞에 쌓인 자갈들을 치우다보니 그 속에서 아케나텐, 스멘크카레, 투탕카멘의 이름이 새겨진 도자기 파편과 투트모세 3세의 이름이 박힌 스카라베 조각이 나왔다. 이 유물들을 토대로 나는 내가 발견한 무덤이 아마르나 시대[5]

의 것이라 결론내렸다. 다만 문이 수 차례 열렸다가 다시 봉인된 것을 보니 한 번 이상 재사용된 무덤 같다.

이집트 유물부 수석 차관인 엥겔바흐가 동료들과 함께 발굴 현장을 관람했다. 엥겔바흐와 함께 브런톤도 함께 왔다. 낮이 저물자 계곡에서 야영했다. 잠들기 전 목수들을 시켜 문틀을 보강할 임시용 목재 문틀을 제작하도록 했다.

11월 25일 : 문에 찍힌 인장들의 모습을 모두 노트에 옮겨그리고, 사진으로 찍어남긴 다음 드디어 문을 개봉했다. 문짝은 복도의 바닥부터 천장까지 꽉 채울 정도로 상당한 크기의 돌덩어리로 표면에는 석회를 발라놓고 석회가 굳기 전 그 위에 수많은 인장들을 찍어놓은 것이었다. 이 거대한 돌덩어리를 치워내자 모래와 자갈로 완전히 막혀버린 문 뒤의 복도가 보였다. 폭은 계단으로 내려오는 통로와 엇비슷했고, 높이는 2m 가량 더 높은 것 같았다. 우리는 이 자갈들이 쌓인 모습들에서도 이 무덤이 한 차례 열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부분 백색 석회암 조각들이 모래와 함께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는데, 오직 천장과 맞닿은 왼쪽 한귀퉁이를 채우는 자갈들은 유난히 검은빛을 띠고 빈 공간에 마구 쑤셔넣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앞서 말했듯 이 무덤이 이전에 누군가가 이미 다녀간 후에야 다시 복도를 막아놓았다는 증거다.

복도를 메운 자갈과 모래들을 모두 들어 입구 밖으로 빼냈다. 토사물을 치우니 깨진 도자기 파편, 항아리 뚜껑, 여러 정체를 알 수 없는 조그마한 조각들이 모래에 섞여있는 모습이 보였다. 복도 바닥에는 설화석고로 만들어진 항아리 조각들과 색이 칠해진 화병 조각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우리는 이 것들을 통해서 무덤의 주인이나 용도에 대해 아무 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문이 한번 열렸던 모습과, 바닥의 깨진 도자기 조각들을 보니 갈수록 불안한 마음이 앞선다. 모두 도굴꾼들이 다녀간 무덤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11월 26일 : 길이가 9m에 달하는 복도에 가득 쌓인 자갈들을 오후가 늦어서야 간신히 모두 치웠다. 자갈들을 치우자 두 번째 봉인된 문이 보였다. 모습은 첫 번째 문의 모습과 거의 똑같다. 첫 번째 문과 마찬가지로 석회 표면 위에 온갖 종류의 도장들이 가득 찍혀있고, 역시 이전에 열렸다가 다시 봉인한 흔적이 역력하다. 찍힌 도장들은 투탕카멘의 이름과 왕실 묘지의 인장들인 것으로 추정되지만 첫 번째 문에 찍혀있던 것만큼 뚜렷하지 않아 알아보기가 어렵다. 무덤의 구조와 복도의 모습을 살펴보니 얼마전 데이비스가 발견한 아케나텐의 무덤 양식과 굉장히 비슷해 보인다. 내가 발견한 무덤도 혹시 왕실의 무덤이지 않을까.....?[6]

우리는 문이 완벽히 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복도에 쌓인 흙과 모래들을 깔끔히 정리했다. 첫 번째 문처럼 두 번째 문의 모습도 노트에 옮겨 그리고 문 왼쪽 위에 작은 구멍을 뚫었다. 또 문 뒤에 자갈들이 가득할까봐 철사를 넣어보자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빈 공간이라는 것이다. 당시 고대 이집트의 일반적인 무덤 구조처럼 다시 내려가는 계단 복도일까? 아니면 부장품이 있는 방인가? 우리는 불안한 기대감에 가득 찬채로 문 앞에 서있었다. 고대 무덤에는 악취가 나는 가스가 가득 차서 문을 열면 가스 중독으로 사망한다는 속설 때문에 우리는 촛불을 가지고 온 상태였다. 나는 구멍을 넓힌 다음 촛불을 집어넣고 그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내 옆에서 캘린더와 카나본 경은 잔뜩 흥분한 상태로 나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내가 무언가를 제대로 보기도 전에 뜨거운 바람이 무덤 속에서 휙하고 새어나오며 촛불빛을 흔들리게 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씩 지나고 내 눈이 희미한 촛불에 적응할 즈음, 어렴풋한 방 내부의 광경이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냈다. 온갖 화려하고 아름다운 자태의 보물들이 서로 겹쳐 쌓인 채로 엄청난 장관을 자아냈다. 내 글 실력이 짧아 이 종이에 다적지 못하지만, 그때 그 감동은 직접 본 사람이 아니라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할말을 잃고 그저 바라만보고 있자 옆에서 조바심치던 카나본 경이 '뭔가 보이나?'하고 물었다. 나는 '네.... 아주 아름다운 것들이 보입니다.'라고 답했다.

나는 나머지 사람들도 볼 수있게 구멍을 허물어 크게 넓혔다. 카나본 경도 볼 수 있도록 전등과 촛불들을 켜 방 내부를 더욱 환하게 비추었다. 더 밝은 빛을 통해 제대로 방 내부를 직관한 우리의 놀라움과 감탄은 남에게 설명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였다. 황금 샌들을 신고 지팡이와 메이스를 든 장엄한 모습의 파라오 석상 2개가 어둠 속에서 우리를 굽어보았고, 사자 머리, 동물 머리 등 희한한 장식들로 꾸며진 의자, 아름답게 채색된 수많은 상자들, 석고 꽃병들, 뱀들로 장식된 큼직한 검은빛 보물함, 생각 외로 평범하게 생긴 백색 상자, 최고급 재질의 의자, 금빛으로 번쩍이는 상감된 왕좌, 사랑스럽게 생긴 컵과 보물들 - 모든 종류의 가재도구들과 귀한 보석들, 황금빛이 도는 전차 부속품들이 우리의 눈에 들어왔다.

방의 모습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잃어버린 문명의 오페라하우스' 같았다. 우리의 감정은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기쁨과 궁금증으로 가득 차 넘실거렸다. 우리는 이 많은 보물들을 보고, 과연 우리가 찾아낸 것이 무덤인지 아니면 보물창고인지 고민했다. 그러나 지팡이를 든 두 조각상들 사이로 또다른 문의 흔적이 있는 것을 보고, 그리고 그 문에 투탕카멘의 이름이 찍혀있는 것을 보고 우리는 저 뒤에 투탕카멘이 잠들어있음을 직감했다. 이 모든 과정이 끝나자 우리는 다시 구멍을 닫고, 첫 번째 문에 목재 잠금장치를 단 다음 당나귀를 타고 우리가 본 것에 대해 떠들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엥겔바흐 차관에게 파발을 넣어 최대한 빨리 돌아오라고 요청했다. 그가 일찍 도착해 무덤 내부에 전등을 놓을 수 있게 전기 설비를 깔아주었으면 좋겠다.


11월 27일 : 캘린더가 무덤 내부 전등 설치를 위해 전기 설비를 깔고 있다. 12시 쯤 되어 전기 설비가 완료되자 카나본 경, 캘린더, 나는 다시 어제 보았던 그 아름다운 방으로 들어갔다. 이제부턴 그 방을 '전실'(Antechamber)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오후가 되자 케나로 파견나간 엥겔바흐 차관을 대신해 룩소르 유물부 차관인 이브라힘 에펜디 차관이 도착했다.

우리는 지금 역사적인 발견을 바로 눈앞에 둔 것이 확실하다. 우리가 그 무덤 속에서 본 광경은 상상 그이상이었다. 다만 우리가 방을 자세히 조사하기 시작하면서 물건들이 꽤나 어지럽혀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방 속에 그득하게 쌓인 부장품들은 아무 질서 없이 대강대강 흐트러진 상태였다. 워낙에 어지러운 상태로 아무렇게나 쌓아있었기에, 우리가 조금이라도 잘못 건드리거나 움직였다간 그 유물들이 파손될 수도 있었고 따라서 우리는 굉장히 신중에 신중을 기해 작업해야만 했다. 우리가 방을 정리하면 할수록 도굴꾼들의 흔적이 보였다. 한때 정갈히 놓여있었을 물건들이 마구잡이로 뒤집혀 있거나, 도자기가 깨져있는 등 안그래도 좁은 방 내부는 대단히 복잡하게 뒤죽박죽인 모습이었다.

방을 정리하면서 우리는 또다시 이 방이 무덤인지 아니면 왕실 창고에 불과한지 의문을 가졌다. 우리가 발견한 무덤의 구조는 일반적인 왕족의 무덤 배치는 아니었고, 파라오의 무덤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조그마했다. 궁금증을 마음 속에 꾹 쟁여놓고 계속 유물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던 중, 나는 의자 아래쪽, 벽이라 생각했던 부분 아래에 구멍이 뚫려 뒤에 있는 방으로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바위벽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알고보니 회반죽을 발라 뒷방과 막아버린 벽이었던 것이다. 나와 카나본 경은 의자 아래를 기어들어가 옆방으로 들어갔다. 그 방에도(이제부턴 '별실'(Annexe)라 부르겠다.) 전실처럼 보물들이 가득했지만 크기는 약간 더 작았고 어지럽혀진 정도는 전실보다 더 심했다.

도굴꾼들이 이 방으로 통하는 입구를 낼 때 돌 파편이 떨어져나와 쌓여있던 유물들 위에 그대로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내부에는 돌 파편에 맞아 깨진 도자기 조각들과 유물들이 널려 있었고, 도굴꾼들이 값나가는 가벼운 보석류들을 찾기위해 설친 탓인지 모든 게 폭탄 맞은 듯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별실 안에는 가구들이 가득했다. 침대, 의자, 상자, 상아류와 화병, 조그만 조각상들, 원통형 보관함, 그리고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도구들이 별실 안에 온통 쌓여있었다. 다만 도굴꾼들이 보석을 찾기 위해 온통 뒤져대면서 제자리에 있는 물건들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추가적으로 조사한 결과 별실로 향하는 문에도 역시 회반죽 위에 투탕카멘의 인장이 찍혀있었다.

2개의 방을 조사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미라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자 우리는 이 곳이 무덤이 아니라 왕실 창고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의심을 풀어줄 유일한 해답은 앞서 말한 두 수호신상 사이에 있는 문 뒤에 있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뒤져본 방들은 모두 보물과 사후세계에서 쓸 부장품들을 보관하는 방이고, 저 수호신상 뒤에 있는 방이 미라와 관이 있는 매장실 아닐까? 우리는 조심스레 수호신상 사이의 문을 조사했다. 역시 수많은 인장들이 찍혀 있었고, 크기는 앞서 본 문들과 비슷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에서조차 작은 남성이 드나들만한 크기의 구멍이 바닥과 가까운 아래쪽에 뚫려있는 것을 보고야 말았다. 조심스레 다시 재봉인한 흔적이 남아있지만, 과연 누가 이 구멍을 드나든 것일까? 도굴꾼인가? 부디 미라만은 보존되어 있기를.

현재까지 우리의 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이 무덤은 파라오의 무덤이고 단순한 보물창고는 절대 아니다. 2) 우리는 지금까지 오직 부장품 저장고와 보물을 보관하는 방들만 조사했다. 3) 무덤에서 가장 중요한 매장실에 누군가 무단으로 침입한 흔적을 발견했다. 온전한 미라를 찾을 수 있을지 불안한 느낌이 든다.

11월 28일 : 오늘은 관리들이 무덤을 방문하는 것을 준비하는 데에 대부분의 시간을 쏟았다. 내일 정오 열차를 타고 케나에서 돌아올 엥겔바흐 차관이 무덤을 방문한다. 오후에 오토바이를 타고 계곡을 방문해 현재 우리의 발굴 진척 상황을 보고받을 것이다.

11월 29일 : 오늘 관료들과 함께 공식 만찬 비슷한 자리를 가졌다. 만찬에 초대된 인사들은 다음과 같다. 엘렌비 부인, 케나의 지방관이자 룩소르의 마무르인 압델 아지즈 베이 예히야, 모슬레이 부부, 보이드 부부, 게리스 데이비스 부부, 엥겔바흐 부부, 다운스 부인과 그 딸, 농업부에서 근무하는 압델 라지크 베이, 타임스지에서 파견나온 머톤 부부, 케나 지구의 수로 관리인이자 경찰서장, 군사령관인 브런톤과 그의 부인, 룩소르의 차관이자 경찰서장인 이브라힘 에펜디. 12시 30분에 왕가의 계곡 15번 무덤 근처에서 점심 만찬을 함께 즐겼고, 3시 쯤에 룩소르로 타임스에 보낼 특별 보고서를 작성했다.

11월 30일 : 수 십명의 이집트 관리들이 찾아와 무덤 내부 관람을 요청했다. 우리는 그들의 방문을 전혀 대비하고 있지도 않았고, 그 많은 인원들이 한꺼번에 들어간다면 유물들의 안전은 물론이거니와 혹시모를 도둑질마저도 장담할 수 없었기에 정중히 거부했다. 대신 다음에 발굴 작업이 모두 완료되면 와줄 것을 권유했다.

어제 만찬에 참여하지 못했던 라카우와 토튼햄이 오늘 11시에서야 도착했다. 나는 그들에게 정식으로 무덤 내부를 둘러보게 해주었고, 그들은 대단히 신기해했다. 특히 라카우가 더욱 내부 관람에 즐거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점심 때까지 계곡에 머물렀고, 나에게 발굴 작업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고, 카나본 경이 그동안 해온 후원이 마침내 빛을 발했다고 칭찬하며 이젠 영국 정부 차원에서 나와 카나본 경에게 기사 작위 수여와 함께 우리의 발굴 작업을 재정적으로 도와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2월 3일 : 철제 문틀을 달아 첫 번째 문을 보강했다.

12월 22일 : 영국과 이집트 언론기자들을 위해 무덤을 다시 열었다.

2월 18일 : 벨기에의 왕비가 참석한 가운데 수많은 참관인들 속에서 공식으로 투탕카멘의 무덤을 열었다.

3월 14일 : 카나본 경의 병세가 악화되어 그는 카이로로 돌아갔다.

4월 5일 : 안타깝게도 불쌍한 카나본 경이 오늘 사망했다.

5월 30일 : 지중해를 건너 베네치아, 을 경유해 마침내 런던에 되돌아왔다.




6.2. 묘실 발굴[편집]


[ 펼치기 • 접기 ]

10월 3일[1]

: 런던을 떠나 11시 발 심플론 특급을 타고 이탈리아 트리에스테로 출발했다.

10월 4일 : 저녁 11시 30분에 트리에스테 항에 도착했다. S.S 헬로우안 호를 타고 바로 트리에스테를 경유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향했다.

10월 8일 : 저녁 4시에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해 카이로까지 이동하니 어느새 밤 10시 30분이었다.

10월 11일 : 카이로 박물관에서 퀴벨을 만나 투탕카멘 무덤에 대한 향후 계획에 대해 상세히 논의했다. 특히 언론의 집요한 취재와 시도때도 없이 찾아오는 방문객들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난 발굴 과정에서 이 문제로 지나치게 골치를 썩여서 이번에는 확실한 대비를 해놓을 작정이다.

10월 12일 : 알렉산드리아에서 아브드 엘 하미드 파샤 슐레이만 장관을 만나 퀴벨과 미리 상의했던 계획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나는 슐레이만 장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1) 나는 내 발굴단에 소속된 머튼을 시켜 영국 본국의 타임스지와 이집트 신문에 격일 단위로 발굴 경과와 사진을 부치도록 해놓았다. 늦저녁에 그날 있었던 발굴 작업의 내용들을 모두 영국으로 전보로 부칠 것이고, 그 다음날 이른 아침에 조간 신문을 발행하기 직전 이집트 신문사에 같은 내용을 발송할 것이다. 이렇게하면 사실상 영국이나 이집트나 정확히 똑같은 날 아침 조간 신문으로 나의 발굴 과정을 보도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슐레이만 장관을 설득하기 위해 미국이나 기타 유럽 신문사들에게 하는 것과 달리 이집트 신문사들에게만큼은 자료 제공에 대한 대가를 받지 않겠다고 부연했다.

2) 나는 장관에게 지금처럼 1주일에 한 번씩이나 정기적으로 관람객들을 맞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했다. 관람객들이 방문하기 적어도 하루 전날부터는 모든 채굴 도구, 전기 장비를 해체하고 무덤 안에 깔끔하게 길을 만들어놔야하고, 정교한 발굴 도구들을 모조리 빼내고 프로젝트를 중단해야하는데, 이걸 또 관광객이 떠나고 재설치를 해야하고.... 이렇게 되면 사실상 하루가 아니라 3일 넘게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장관에게 작업이 완전히 끝나기 전까지는 그 어떠한 관람객들도 받을 생각이 없다고 못을 박았다. 내가 관을 빼내고 더이상 무덤에 추가적으로 발굴할 것이 없을 때가 돼서야 완전한 개방식을 치르고 관광객들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그대로 전달했다. 대신 이집트 정부가 판매하는 티켓을 사야만 무덤 내부에 입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안을 제시해 장관을 설득했다. 어찌되었든 내가 발굴하고 있는 동안만큼은 그 어떠한 관광객들도 무덤 내부를 함부로 들락날락거리지 못할 것이다.

장관은 다행히도 내 제안을 받아들였고, 관저로 가서 그의 서명이 담긴 문서를 받아내었다. 장관은 무덤 발굴 도중 관람객들이 무덤을 보지 못해서 발생할 관광 수입 손실을 적잖이 아쉬워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관광 사업가도 아니고 그쪽 분야와 전혀 상관도 없었으므로 그냥 신경쓰지 않았다.

10월 18일 : 캘린더와 버튼과 합류해 룩소르를 거쳐 왕가의 계곡으로 돌아왔다. 11시에 내 집에 도착한 다음 바로 짐을 풀고 계곡을 한바퀴 돌아보았다. 투탕카멘의 무덤, 창고, 유물 보관실 등 모든 곳을 빠짐없이 둘러봤고 모든 게 내가 떠나기 직전처럼 제대로 갖추어져 있는지 확인했다.

10월 25일 : 지난 발굴 작업 이래로 멈춰있었던 투탕카멘의 무덤 발굴 작업을 재개했다. 레이스 아흐메드에게 10명의 장정들, 그리고 레이스 후세인 아부 오와드에게 20명의 소년 인부들을 딸려주었다. 무덤을 채우고 있던 자갈과 모래들은 다시 파낸 다음 근처의 오두막 유적이 드러난 구덩이에 그대로 쌓았다. 레이스 아흐메드는 일꾼들을 데리고 투탕카멘의 무덤 근처 아케나텐의 무덤에 구멍을 뚫고 정리하는 작업을 재반복했다.

10월 29일 : 투탕카멘의 무덤 인근의 15번 무덤, 세티 2세의 무덤을 개봉했다. 이미 오래 전에 도굴당한 무덤이어서 자세히 둘러보지는 않았고, 안에 남아있는 부장품 조각들과 파편들을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오늘 1주일 동안 고용한 인부들의 채용 기간이 끝난다. 레이스 형제들에게 인부들의 월급을 나누어주도록 했다.

11월 2일 : 6시 기차를 타고 카이로로 가서 토튼햄, 퀴벨, 슐레이만 공공부 장관을 만나야만 한다. 내가 이전에 공공부 장관과 언론, 관광객들과 관련해 지은 담판이 언론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퀴벨이 미리 보내온 편지에 의하면, 로이터 통신의 발렌타인 윌리엄스 기자와 모닝포스트의 브래드스트릿이 타임스에만 발굴 경과를 전달하기로 한 내 결정에 불만을 품고 이집트까지 쫒아왔다고 한다. 나는 이미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에서 내 입장에 대해 분명히 밝혔다. 내 주장은 이성에 근거한 합리적인 것으로, 분명 그들도 내 의견을 들으면 이해할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강경한 태도를 취해서 내 입장을 관철시키는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퀴벨의 편지를 보면 나와 정부에게 불리한 쪽으로만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 같아 불안감을 감출 수가 없다.

11월 4일 : 10시 30분에 이집트 공공부에 도착했다. 상황을 보니 공공부 장관이 변호사를 고용하고 온갖 법적 조치를 철저히 준비했다고 한다. 정부는 정확히 8시에 나에게 전달받은 발굴 경과와 내용에 대해 공표할 독점권을 지키고 싶어했지만 기나긴 토론 끝에 결국 모든 언론사들에게 이 권리를 나누어주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는 소문이 돈다. 짧게 말하면, 내 발굴 상황에 대해 시민들에게 공표할 독점적 권리를 정부 측에서 포기했다는 것. 심지어 작업 현장에 방문객들의 출입을 막을 수 있는 권리마저 빼앗겼다고 한다.

11월 14일 : 토론이 지나치게 지지부진해지자 멘슨에게 모든 대리권을 맡기고 나는 룩소르로 되돌아왔다. 결국 메이스와 베셀이 정부의 최종 결정안을 들고 룩소르로 왔다. 생각보다 정부의 최종 권고안은 나쁘지 않았다. 물론 정부는 내 발굴에 대한 독점적 언론 공표권을 포기해야했지만, 여전히 나는 발굴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인정받았고, 언론에 나가는 모든 내용은 오직 내가 허락한 것들만이 공표될 수 있었다. 하지만 협의의 내용은 둘째치고 협의가 또 뒤집어엎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었기에 나는 카이로로 가서 법률 고문의 말을 들어보아야 하나 고민했다.

11월 15일 : 마침내 논의가 끝났다. 11시 30분에는 카이로에서 앨런비 경을 만났고, 4시 30분에는 토튼햄을 만나 협상의 내용을 모두 전달받았다. 나는 법적 고문의 조언을 받고 법적 서류를 작성한 뒤 이집트 정부의 최종 권고안에 서명했다. 토튼햄은 이 권고안이 그대로 이행될 것이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이번 협상 과정의 모든 내용을 자세히 보기 위해서는 '언론 갈등과 이집트 정부에 관한 보고서 ; 8장'을 참고하라.

11월 21일 : 머리 복잡한 법적 다툼이 끝난 후, 드디어 관이 있는 현실[2]

의 문을 열었다. 현실을 열자 아마도 관이 들어있을 거대한 황금빛 사당이 눈에 들어왔다. 버튼을 시켜 사당의 모습과 그 외관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사진찍고 그림으로 남기도록 만들었다. 사당의 크기가 워낙 거대해 현실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11월 22일 : 현실 내부의 구조를 노트와 사진으로 기록해 남겼다. 한편 버튼은 벌써 사당의 북쪽 면과 벽 사이에 있는 물건들을 모두 정리했다. 현실의 사당 바로 앞에 그와 함께 앉아 지난 시즌에 정리했던 부장품들의 목록을 확인했다. 리 경, 스태크 부인이 케나의 마무르, 하킴다르와 함께 오후 3시 경에 무덤 발굴장을 방문했다.

11월 25일 : 현실 내부와 가장 바깥 사당에 대한 기록 작업을 계속했다. 가장 바깥쪽에 있는 사당의 문을 열고 안쪽에 두 번째 상자, 즉 두 번째 사당이 들어있는 것을 확인했다. 가장 바깥 사당의 기록 작업을 계속하는 한편 두 번째 사당의 모습을 조금씩조금씩 노트에 기록해 남겼다.

11월 30일 : 어제 현실 앞을 지키던 2개의 수호석상들 중 오른쪽 석상을 옮겨 창고로 쓰고 있는 세티 2세의 무덤으로 임시보관했다. 오늘은 왼쪽에 서있는 석상을 옮겨 세티 2세의 무덤에 보관했다. 관이 들어있는 사당의 크기가 현실 전체를 꽉 채울 정도로 워낙에 커서 전실과 현실을 나누는 가벽을 아예 허물어버리지 않으면 도저히 사당을 무덤 밖까지 빼낼 수가 없을 것 같다. 가벽의 세기와 강도를 알아내기 위해 전실과 현실 사이의 가벽을 따로 조사해본 결과, 얇은 석회암벽에 석고를 바른 것임을 밝혀냈다.

12월 1일 : 현실의 사당 옆에 나무로 임시 가벽을 기대 세워 현실의 벽과 사당 사이를 분리했다. 사당을 빼내기 위해 전실과 현실을 가르고 있는 가벽을 허물어 버릴텐데, 이 과정에서 혹시 모를 파편이나 부스러기가 떨어져 사당을 우그러뜨릴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가벽을 허무는 작업을 시작했다. 작업을 시작하고 보니 가벽 전체가 바닥부터 천장까지 속이 비어있던 것으로 드러났다. 대신 속에 석회암 부스러기들과 모래가 가득 차있어서 이를 치우는 데에 약간 곤란을 겪었다. 가벽 내부에는 석회칠이 돼있지 않았고, 오직 겉면에만 석회칠이 발라져 있었다. 가벽의 현실 쪽 면에는 채색된 그림이 그려져 있었기에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버튼에게 자세하게 사진을 찍어놓으라 지시했다.

루카스가 카이로발 아침 열차를 타고 무덤 발굴장에 도착했지만 무덤 내부에 들어가보진 않았다.

한편 메이스와 베셀은 세티 2세의 무덤에 옮겨놓은 투탕카멘의 부장품들을 정리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특히 전실에서 발견한 황금 전차를 왁스를 발라 복구하고 재조립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오늘 스콧이 카이로에서 도착하기로 했지만, 일정이 지체되어 내일에서야 카이로에서 출발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아마 월요일 3시 즈음이 돼서야 도착할 것 같다.

12월 2일 : 가벽의 큼직한 부분을 떼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제 내일 가벽 아래쪽 하단에 바닥과 붙어있는 목재 문틀 부분만 깔끔하게 떼어내면 가벽을 통째로 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가벽을 떼어내고 보니 가벽 자체가 무덤의 구조와 격에 비교해보면 놀라울 정도로 대충 만들어진 구조물이라는게 밝혀졌다. 가벽 속은 모래와 자갈 따위로 가득 차있었는데, 마감의 질도 좋지 못했고 특히 목재 문틀은 형식적으로 그냥 대충 붙여놓은 것 같다. 문틀을 굳이 붙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오히려 이 문틀이 시간이 흘러 뒤틀리면서 무덤 천장에 약간 파손이 생겼다. 전실의 벽 서쪽 끝 부분에 고대 석공들이 일부러 약간 벽을 쪼아낸 흔적을 발견했는데, 좁은 무덤 안에 크나큰 사당을 들여놓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벽을 약간 깬 것으로 추정된다. 내 생각에 저 큰 사당을 무덤이 완공되고 나서 들여놓았을 리는 없으니 아마 무덤 축조와 동시에 부품들을 가지고 안에서 조립한 게 아닐까 싶다.

왼쪽 문틀 근처에 있는 그림이 그려진 석회벽 부분을 온전하게 떼냈다. 이 정도로 깔끔한 절단 기술이라면 훗날 다시 복원하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인도 유물부 장관인 존 마셜 경이 오늘 무덤과 창고를 방문했다. 흥미로운 사람처럼 보인다. 수요일 날 함께 점심을 들자고 제안했다.

12월 4일 : 휴일.

12월 5일 : 드디어 전실과 현실 사이의 가벽 해체 작업을 완료했다. 가벽이 해체된 후 사당의 파손을 우려해 설치해두었던 목재 가림막도 함께 치워버렸다. 앞에서도 계속 언급을 남겼지만, 이 가벽의 상태는 정말 최악이다. 특히 바닥과 인접한 하단 부분은 중간에 붕괴하거나 금이 가지 않은 채로 어떻게 수 천년의 세월을 버텼는지 의심이 갈 정도다.

존 마셜 경과 점심을 함께했다. 영국의 후진적인 유물 관련 법률, 그리고 유물 분배에 대한 주제를 가지고 꽤나 오랫동안 즐거운 토론을 했다. 점심을 먹고 가벽을 완전히 덜어낸 무덤 내부로 들어가 이제야 드러난 현실 내부 사당의 완전한 자태를 감상했다.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그 무엇보다도 아름답다.

12월 6일 : 혹시 모를 낙석이나 파편이 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가벽을 해체하는 동안 사당의 남동쪽 모서리에 걸쳐 세워놓은 임시 목재 칸막이를 철거했다. 버튼이 가벽을 제거하고 난 직후 아직 우리의 손이 닿지 않은 현실 그대로의 모습을 몇 차례에 걸쳐 촬영해 필름에 남겼다.

가장 바깥쪽 상자, 즉 최외각의 사당의 문을 아예 떼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문짝을 떼어내지 않고 안에 있는 관이나 미라에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해보인다. 내부에 있는 목재 프레임을 건드리지 않고 작업하면서 시간이 예상 외로 오래 걸렸다. 작업 도중 현실의 벽화를 자세히 살펴보니 오시리스의 모습을 하고 있는 투탕카멘 앞에 그의 후임자인 파라오 아이가 서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마 아이가 제18왕조 시대에 투탕카멘과 공동 파라오였다는 의미가 아닐까? 아멘호테프 시대와 아마르나 시대에 파라오들은 공동통치와 섭정을 워낙 빈번하게 시행했으니 투탕카멘과 아이가 공동으로 이집트를 다스렸다고 추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투탕카멘의 시대 바로 직전에 건축된 와데인에 있는 아멘호테프 3세의 무덤은 신왕국 시대 파라오의 무덤들의 전형적인 구성을 취하고 있는데, 내가 발견한 투탕카멘의 무덤은 아멘호테프 3세의 무덤은 물론 다른 여타 신왕국 파라오들의 무덤 모습과 확연히 구조가 다르다. 오직 아케나텐, 투탕카멘, 아이만이 이렇게 비슷하게 생긴 무덤들에 안장되었다. 아이의 후임 파라오인 호렘헤브는 다시 아멘호테프 3세와 비슷한 양식의 무덤에 묻혔다. 아케나텐과 투탕카멘의 무덤은 파라오의 무덤이라기보다는 대귀족이나 왕비들의 것에 훨씬 더 어울린다. 아무리봐도 무덤의 규모나 양식이 도저히 파라오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작다.

투탕카멘의 무덤을 정리하던 중, 아케나텐의 재위기에 살았던 스멘크카레의 이름이 새겨진 작은 컵을 발견했다. 현실에는 호렘헤브에 의해 기록말살형을 당해 역사에서 묻혀버린 아이가 완전한 파라오의 모습으로 새겨져 있다. 투탕카멘은 죽은 왕이 오시리스와 합일(合一)을 이룬다는 믿음을 따라 오시리스의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이 벽화의 모습을 보아 아이가 투탕카멘과 함께 공동으로 이집트를 다스렸다는 나의 추정이 더욱 확고해진다.

12월 7일 : 사당의 문을 완전히 떼어내는 작업을 완료했다. 아침 8:45분부터 12:45분까지 무려 4시간에 걸쳐 진행된 대작업이었다. 생각보다 문짝의 하중이 굉장히 무거웠다. 문짝의 틀을 이루는 나무가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서 뒤틀리면서 황금으로 상감한 문의 보존 상태가 악화되지만 않았어도 훨씬 작업이 쉬웠을 텐데..... 문짝 표면에 새겨져 있는 섬세한 장식들을 손상시키지 않는데 온 신경을 다 쏟으면서 시간이 꽤나 많이 걸렸다.

'듀로프렌'이라는 보존제를 작업장에 가지고 왔다. 유기용매에 녹는 일종의 탄화 고무와 비슷한 물건인데, 오래된 천이나 직물 따위의 강도를 높여주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혹시나 해서 다른 무덤에서 발견한 천쪼가리를 듀로프렌에 묻혀서 시험해봤는데 예상보다도 훨씬 효과가 좋았다. 듀로프렌을 처리했더니 훨씬 만지기도 좋고 보존 기간도 하기 전보다 더욱 길어졌다. 뉴베리와 그의 아내가 룩소르에 도착했다.

12월 8일 : 첫 번째 사당의 문을 열어 떼어냈더니 두 번째 사당이 그 안에 약간의 틈을 두고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 틈 사이에는 여러 잡다한 유물들이 들어있었는데, 오늘은 남서쪽 틈에 있던 여러 유물들을 회수했다. 주로 막대기, 메이스, 지팡이 등이 들어있었다. 개중에는 고대 이집트의 왕들이 사용하던 황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금제 지팡이도 있었다. 지팡이 끝에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대단히 정교한 조각상이 붙어있었다. 이 지팡이를 보니 두 번째 사당을 포함해 관 안쪽에는 더더욱 귀중한 유물들이 깔려있을 거라는 기대가 가득해진다.

스콧 박사가 현실 안에서 벽화를 분석하더니 흥미로운 사실을 말해주었다. 벽화 표면에 약간 얼룩덜룩한 갈색 얼룩들이 번져 있는 부분이 있었는데, 알고보니 이 얼룩들이 모두 곰팡이란다. P.E 뉴베리가 오늘 룩소르에서 출발해 왕가의 계곡을 방문했다. 오늘 아침까지 떨어진 발판 부분 일부와 사당과 사당 사이의 틈 내부에 놓여있던 유물들 상당수를 발견했다. 참고로 상자의 두께와 크기를 토대로 계산해보니, 총 4겹의 사당이 가장 안쪽의 관을 감싸고 있을 것 같다. 람세스 4세의 무덤에는 관이 무려 5겹의 사당 속에 켜켜이 싸여있었는데....

12월 9일 : 첫 번째 사당과 두 번째 사당 사이의 틈에 들어있던 유물들을 모조리 거두어들였다. 지팡이와 오래된 화병, 메이스 등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 후에는 두 번째 사당의 잠금 장치를 제거한 다음 첫 번째 사당이 하중을 버틸 수 있을 만큼만 두 번째 사당의 문을 살짝 열어봤다. 오른쪽 문짝을 조금 열어봤는데, 그 안으로 전등 불빛을 비추어보았더니 세 번째 사당의 문이 희미하게 보였다. 잠금 장치나 장식은 두 번째 사당과 세 번째 사당이 거의 똑같아 보인다. 황금으로 표면을 씌우고 그 위에 정교하게 히에로글리프들을 새긴 모습이다.

12월 10일 : 현재 할 수 있는 한까지 첫 번째 사당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고 주변을 정리하는 작업을 모두 끝마쳤다. 여기서 더 관찰한다고 해서 새로운 게 나올 것 같지는 않다. 적어도 수요일부터는 첫 번째 사당을 해체해 바깥으로 빼내는 작업을 시작할 예정이다.

12월 13일 : 며칠간 모래 폭풍이 불어 제대로 작업을 하기는커녕 숙소 안에 처박혀있어야만 했다. 어제 받은 두 통의 편지에 예고했던대로 라카우가 오늘 아침 일찍 9시에 나를 찾아왔다. 편지 한 통에는 내가 부리고 있는 인부들과 관리인, 학자들의 모든 인적사항들과 이름들이 자세히 적혀있었고, 나머지 한 통에는 무덤 발굴 현장을 찾는 방문객들을 위해 만들어진 새로운 규칙과 안내사항들이 쓰여있었다. 참고로 이집트 정부가 무덤 발굴 현장에서 일하는 모든 관련자들에 대해 알아보고 이들을 승인하거나 거부할 권리를 주장했다고 한다. 무덤 내부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혹시 누군가가 국외로 몰래 반출할까 두려웠나보다.

이집트 정부가 나에게 요구한 내용이 이뿐만이 아니었다. 라카우가 말하길, 무덤 발굴현장에 친구든 단순한 방문객이든 현장에 출입하기 위해선 반드시 정부 소속의 엥겔바흐 차관에게 공식 서류를 작성해 제출하고 승인을 받아야 한단다. 내가 모든 사안에 관해 엥겔바흐 차관과 논의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나는 어떠한 사람도 정부의 허락없이는 고용할 수 없고, 내가 원하는 사람들을 엥겔바흐의 허락 없이는 마음대로 현장에 출입시킬 수도 없다.

내가 라카우에게 정부로 전달하도록 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평안하시길 빕니다. 오늘 저는 제 발굴 작업을 거의 진행불가능한 수준으로 만들어버리는 정부 지침에 관해 전달받았습니다. 지금 당신들의 지침 때문에 저와 제 발굴팀, 그리고 발굴 프로젝트가 중대한 난관에 봉착하게 생겼습니다. 일단 저는 해당 지침에 절대로, 절대로 동의할 생각이 없음을 명확히 밝히며 우리가 이전에 맺었던 계약 내용 그대로 이행하기를 바랍니다. 저는 저에게 정당하게 주어진 법적 권리를 포기할 생각이 없고, 현재 정부의 태도 역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당신들도 이전 계약서에서는 저에게 상당한 자율권을 주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워낙 강경한 태도로 나가자 라카우는 되려 당황한 것 같았다. 그가 늘 그렇듯이 횡설수설거리기 시작하자 나는 이런 조건으로는 협상에 나설 생각이 전혀 없다고 으름장을 놓은 다음 숙소에서 나와 발굴 현장으로 이동했고, 최근 며칠간의 작업 실태와 속도를 점검했다. 리스고, 하크네스, 메이스가 라카우와의 만남에 함께 참석했고, 캘린더가 통역을 맡았다. 이번 무덤 발견은 정말 대단하고 엄청난 대발견이기는 하지만, 그와 관련된 법적 문제들은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프다. 리스고와 하크네스에게 무덤 내부를 보여주었다.

12월 15일 : 가장 바깥 사당의 문짝들을 떼어 무덤 밖으로 옮겼다. 창고용으로 쓰고 있는 세티 2세의 무덤에 임시로 보관해 놓았으니,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이 알아서 보존 처리와 함께 고고학적 분석 작업을 할 것이다. 한편 라카우를 문전박대한 게 정부의 귀에 들어간 것 같다. 토튼햄이 말하길 카이로의 공공부 장관이 직접 나를 만나 내가 이미 거절했던 제안에 대해 상의하려 한다고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내 뜻을 굽힐 생각이 없다. 내 발굴 작업에 정부가 이래라저래라하는 것은 딱 질색이다.

12월 16일 : 내일 카이로에서 장관과 만나기로 일정을 잡았다. 한편 발굴 작업은 순조롭다. 가디너가 무덤 내부에서 상형문자 탁본을 떠갔다. 첫 번째 사당을 해체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하기 위해 시험삼아 사당의 지붕 부분을 들어올려 보았다. 그래보니 지붕 부분과 사당 처마 장식벽의 네 모서리가 은으로 제작된 거대한 못으로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게다가 이집트인들이 지붕 부분과 벽이 맞닿는 부분을 교묘하게 맞물리게 만들었다. 생각보다 사당 해체 작업이 어려울 것 같다.

내일 있을 기자들의 방문을 대비하기 위해 무덤 내부를 비웠다. 메이스는 월요일에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오늘 카이로로 떠났다.

12월 18일 : 카이로에 도착해 토튼햄의 집에서 함께 식사를 들며 현재 상황과 이집트 정부의 입장에 대해 전해들었다. 내용은 지난 두 통의 편지에 적힌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저녁 4시에 공공부 장관 아브드 엘 하미드 파샤 슐레이만을 만나 2시간 동안 회담을 가졌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정부의 요청이 알고보니 이집트 언론사들의 압력 때문이었던 게 밝혀졌다. 내 발굴대의 일원 자격으로 원할 때마다 무덤 내부 출입이 가능한 머튼이 타임스 신문의 기자인 것이 그들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한다. 장관은 제 얼굴을 봐서라도 머튼이 다른 신문사 기자들처럼 오직 허락된 날들에만 출입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나는 머튼이 기자이기 전에 내 발굴단원이며, 내 허락 없이는 타임스 본사에 그 어떠한 전보도 칠 수 없다고 항변했다. 내가 진짜로 두려워하는 것은 이집트 정부의 요청을 내가 받아들여준다면, 정부가 이를 계기삼아 무덤 발굴에 온갖 종류의 간섭을 해오는 것이다. 한번 성공했는데 두 번 하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은가? 나는 이 무덤에 대한 발굴권만은 온전히 가져가고 싶다. 하지만 장관의 면전 앞에서 딱 잘라 거절하기는 뭐해서 일단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했다. 내일 11시 30분에 다시 장관과 약속을 잡았다.

12월 19일 : 아침에 메이스와 머튼과 함께 간단히 조식을 먹었다. 아침을 먹은 후에 H.C 앨런비 경을 만나 현재 내 상황과 이집트 정부의 입장에 대해 알려주고 13일에 라카우가 나에게 준 편지의 내용에 대해 앨런비 경의 고견을 구했다. 앨런비 경은 내 의견에 거의 전적으로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앨런비 경을 만난 후에는 11시 반에 다시 슐레이만 장관을 만났다. 나는 장관에게 오랜 숙고와 고민 끝에, 나는 내 권리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정부의 요청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최후통첩을 날렸다. 장관은 달갑지 않은 눈치였지만 일단 내 입장은 분명히 전달한 것 같다. 다만 장관이 직접 면담까지 했는데 그 앞에서 내가 거절했다고 언론에 보도된다면 장관의 체면이 서지 않을 것이기에 무덤 발굴현장에 돌아가서 정중한 거절을 담은 편지를 공식적으로 보내주기로 제안했다. 장관도 이 제안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었고, 나는 당장 돌아가서 편지를 부쳐주겠다고 말했다.

앨런비 경과 늦은 점심을 먹었다. 앨런비 경은 비록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지만 100% 내 입장에 동의한다고 말해주었다. 아무리 봐도 내 입장에 동의한다기보다는 그냥 이집트 정부가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 좋아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영국의 타임스 본사에게 현재 내 입장과 이집트 정부와의 협상에 대해 자세히 전보를 쳐서 보냈다. 타임스지는 지금 내 의견이 관철되어야만 이득이니 어떤 일이 있더라도 꼭 내 입장을 지지해달라고 당부했다. 현재까지 정부와 나, 그리고 이집트 언론사 간의 갈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놓았으니 잘 알아들었을 것이다. 타임스에 보낼 전보를 친 이후 정부에게 공식적으로 제안을 거절하는 내용의 서한을 썼다. 토튼햄이 메시지를 보내 웬만하면 그 편지를 보내지 말라고 했지만 결국 거부했다. 카이로를 떠나 룩소르로 돌아간다. 다시 무덤을 발굴할 시간이다.

12월 26일 : 가장 바깥 사당의 지붕 부분을 살펴보니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서 제작된 것이 보였다. 좁디좁은 무덤 통로를 지날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당연히 여러 조각들로 나누어 운반해들어와 이 안에서 조립했을 것이다. 일단 가장 오른쪽에 있는 지붕 조각을 떼어내기 시작했고, 떼어낸 지붕 조각들은 전실로 옮겨 벽에 기대 세워두었다. 그러나 이 조각들을 전실에서 밖으로 옮기는 게 또 문제다. 밖에서 전실로 들어오는 계단과 통로의 폭과 높이가 너무 작아서 나갈 수가 없다. 문의 상인방을 절단하고 통로의 폭을 확장하기 이전까지는 어쩔 수 없이 조각들을 전실 안에 보관해야 할 것 같다. 메이스가 전실과 별실에서 발견한 황금 전차 부품들의 조립을 일부 완료했다.

12월 27일 : 가장 오른쪽 조각을 떼어내고 이제 두 번째 조각을 분리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작업을 진행하다보니 흥미롭게도 이집트인들이 이 조각을 조립할 때 거꾸로 조립한 게 눈에 띄었다. 조각 아래쪽에 매를 조각해놓은 부분이 있었는데, 이 부분이 첫 번째 부분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돌려져 있다. 매의 머리가 있어야할 부분에 꼬리가 놓여지게 조각을 조립했다. 메이스는 여전히 전차 부품 120번과 122번을 조립하고 있다.

12월 29일 : 사당 지붕 조각들을 모조리 떼어냈다. 지붕을 해체했으니 이제 벽과 바닥데 깔려있는 천과 가죽으로 된 깔개 부분을 들어낼 차례다. 일단 지붕과 벽을 고정하던 은제 못들을 모두 뽑아냈고, 벽의 상단부를 조심스럽게 들어올려 해체했다. 벽면 조각들을 해체하면서 동시에 사당의 문지방을 이루는 조각들도 하나하나 해체할 준비를 해야한다. 사당의 문지방 부분을 해체해 나무 위에 굴려 밖으로 빼냈다. 수많은 황금 꽃들이 바닥의 깔개에 장식되어있어서 이 꽃들을 하나하나 떼어내야만 했다. 몇몇 개는 아예 천에 꿰어져 있어서 천 자체를 뜯어내지 않고서야 도저히 빼낼 수가 없었다.

1월 2일 : 마침내 가장 바깥 사당을 어느 정도 해체하는 데에 성공했다. 물론 아직도 다 해체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서야 안쪽에 있는 사당들의 문을 제대로 열 수 있게 됐다. 두 번째 사당의 문은 이미 오래전에 한 번 열어봤고, 나머지 안쪽 사당들의 문은 내일 정식으로 개문할 예정이다. 내일 문을 열어 바깥 사당을 해체하는 동안 안쪽 사당들에 손상이 가거나 훼손이 되지 않았는지 가볍게 살펴볼 것이다. 또한 할 수 있다면 가장 안쪽에 있을 석관과 미라의 여부까지도 확인할 것이다.

1월 3일 : 아침에 사당의 문을 열 준비를 끝마쳤다. 버튼이 사진을 찍어 사당들의 문이 열리기 전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오후 3시, 리스고, 하크네스, 엥겔바흐 차관, 뉴베리, 메이스, 캘린더가 입회한 하에서 세 번째 사당의 문을 열어 안쪽에 있는 네 번째 사당의 문을 확인했다. 네 번째 사당의 문에는 손잡이가 달려있긴 했지만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사당처럼 자물쇠가 걸려있지는 않았다. 몸을 숙여 네 번째 사당의 문을 겨우겨우 열어보았더니 드디어 아름다운 사암으로 만들어진 투탕카멘의 석관을 마주할 수 있었다. 사당들에 대한 자세한 평가와 당시 현장의 분위기를 알기 위해서는 메이스의 일기를 참고하라.

이번 이벤트에 엥겔바흐 차관을 일부러 특별히 초대했더니 굉장히 들뜬 분위기다. 누가 보아도 엄청 흥분한 사람처럼 행동했고, 한 번도 보지 못한 정중함을 갖추고 우리를 대했다. 이런 중요한 행사에 참여시켜준 것이 엥겔바흐 차관에게 굉장히 효과가 좋았던 것 같다. 한편 뉴베리는 현실에서 발견한 곰팡이들과 식물 표본들을 분류, 분석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1월 7일 : 사당들을 해체하는 작업을 계속하기 위해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사당들의 문을 모두 다시 닫았다. 두 번째 사당의 지붕 부분 역시 첫 번째 사당과 마찬가지로 여러 조각들로 나뉘어져 있었다. 가장 오른쪽 부분부터 시작해서 하나하나씩 들어냈고, 지붕과 벽을 고정하는 고정 장치들이 구리로 만들어져 있고 그 위에 투탕카멘의 카르투슈가 새겨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당들을 해체하다보니 몇 천년 된 사당들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조금씩 기우는 것이 눈에 보인다. 아무래도 목수를 불러 사당들의 벽과 지붕을 고정할 목재 프레임을 만들어야 할 것 같다.

1월 15일 - 20일 : 꼬박 5일 동안 두 번째 사당과 세 번째 사당을 해체하는 데 씨름하느라 시간을 다 보냈다. 워낙 좁은 공간에 겹겹이 사당들이 겹쳐 있어서 해체하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게다가 이집트 정부가 다시 법적 문제를 들고 불거지면서 발굴 작업이 더욱 정체되게 생겼다. 일단 그것과는 별개로, 두 번째 사당의 지붕 조각들을 들어올리는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지붕 조각들이 너무 무거워서 제대로 들어올릴 수가 없다. 이집트인 장정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겨우 두 번째 사당의 지붕을 해체하는 데에 성공했다. 두 번째 사당의 지붕을 들어올리고 보니 그 아래에 있던 세 번째 사당의 지붕이 보인다. 혹시나해서 살펴보았더니 세 번째 사당 역시 은제 못들로 지붕과 벽면 사이가 촘촘하게 이어져 있다. 사당들의 장식을 우그러뜨리지 않고 안전하게 해체하는 작업이 너무나도 어렵다.

지금까지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사당들은 모두 지붕이 2개의 조각들로 나뉘어져 있어서 하나씩하나씩 따로 해체하면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네 번째 사당과 안쪽의 관을 확인해보니 이들은 지붕이 하나의 조각으로 만들어져서 따로따로 나누어 해체할 수가 도저히 없을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네 번째 사당을 제외한 나머지 3개의 사당들을 모두 할 수 있는 한 해체해 최대한 공간을 확보해야만 한다. 그래야 한숨 돌리고 네 번째 사당에 본격적으로 손댈만한 여유가 생길 것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좁은 현실 내부에서 도저히 네 번째 사당의 지붕조차 들어올리지 못할 것 같다.

한정된 공간 내에서 지붕 조각들을 해체하는 상당히 유용한 방법을 발견했다. 지붕 조각들에 밧줄과 롤러를 연결한 다음, 그대로 밀어서 매우 천천히 바닥으로 도르래를 이용해 내려놓는 것이다. 전실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통로와 계단이 너무나도 비좁아서 아직 그 어떤 조각도 바깥으로 내보내진 못했지만 통로 확장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전실에 가득 쌓인 조각들을 밖으로 방출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이렇게 도르래를 이용해 지붕을 걷어내는 작업은 정말 힘들다.

1월 23일 : 가장 바깥쪽의 첫 번째 사당을 완벽하게 해체하는 작업을 끝마쳤다. 이제 두 번째 사당을 본격적으로 해체하기 위한 작업에 돌입한다. 루카스와 베셀은 현실 앞을 지키고 있던 파라오의 조각상들을 보존처리하는 작업에 매달리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사당의 문짝을 떼어낼 것이다.

1월 25일 : 캘린더가 그에 대한 나의 태도를 비난하며 사직서를 제출했다. 겨우겨우 잘 달래서 발굴 팀에 남겨두는 데 성공했다. 메이스는 하크네스와 리스고에게 편지를 주고받았고, 캘린더와 버튼, 루카스는 무덤과 세티 2세 창고를 왔다갔다하면서 발굴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이집트 정부에서 내각을 개각했다. 내일 일요일까지 새로운 내각 구성원들이 임명될 지 관심이 쏠린다. 누가 내각 장관에 임명되냐에 따라서 내 발굴 작업에도 영향이 끼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것까지 내가 신경을 써야만 한다. 푸아드 국왕이 오늘 전임 장관들과 함께 오찬 식사를 한다고 하는데, 잘하면 오늘 오후까지 내각 장관들의 임명이 완료될 수도 있다는데 확실히는 잘 모르겠다. 한편 나는 이집트 정부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해 발굴 작업원들과 계속 의견을 나누고 있다.

1월 30일 : 뉴베리가 사당 해체 작업 도중 가지고 나온, 사당 바닥에 깔려있던 천과 가죽으로 만들어진 깔개를 복원하는 작업을 진행중이다. 깔개는 우리가 발견했을 당시 짙은 초콜릿색을 하고 있었는데, 시간이 너무나도 오래 지난 탓에 우리가 조금이라도 만지려하면 바로 갈색 가루가 되어버렸다. 이 깔개들을 어떻게든 다시 원상복구시킬 수 있는 방안을 고심 중이다.

두 번째 사당의 벽면부를 해체하는 작업이 왕성리에 진행되고 있다. 오늘 두 번째 사당의 북쪽 벽면을 떼어내 들어냈고, 사당의 틈들 사이에서 발견한 유물들을 계속 꾸준하게 밖으로 방출하고 있다. 오늘은 포장이 벗겨진 여러 개의 금속 막대기들과 화환을 사당 틈바구니 사이에서 발견했다.

1월 31일 : 드디어 두 번째 사당을 모두 온전하게 해체했다. 두 번째 사당과 세 번째 사당 사이의 좁은 틈에 들어있던 물건들을 모두 회수했다. 타조 깃털로 만든 정교한 부채 2첩, 그리고 활과 화살 등이 발굴되었다. 부채와 활화살들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관련 사진을 참고하라. 부채의 손잡이 부분은 황금으로 만들어졌고 굉장히 정교한 조각들로 장식되어있다. 내 생각에 지금까지 발견된 그 어떤 고대 이집트 유물들보다도 독특하고 희귀한 축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다만 타조 깃털들로 만들어진 부채의 깃 부분은 벌레나 곰팡이가 쉬었는지 너덜너덜해진 상태여서 약간 아쉽다.

2월 1일 : 갈수록 사당들을 해체하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일꾼들이 겹겹이 들어있던 사당들을 해체하는 작업을 거치면서 노하우가 쌓였나보다. 오늘은 세 번째 사당이 온전하게 해체되었다. 이제 우리가 해체해야 할 사당은 네 번째 사당만이 남았다. 세 번째 사당과 네 번째 사당은 굉장히 대충대충 조립된 것으로 보인다. 여러 조임쇠들이 제대로 고정되지도 않았고, 일부 잠금장치들은 아예 잠기지도 않았다. 사당의 외관 자체는 훨씬 더 화려하긴 하지만 벽면에 망치로 두드려 우그러진 자국도 있는 등 첫 번째 사당과 두 번째 사당에 비하면 훨씬 고대 인부들이 대충 작업한 티가 팍팍 난다.

2월 2일 : 오후에 드디어 네 번째 사당의 지붕 부분을 들어올렸다. 지붕을 들어내니 이제야 사당 안쪽에 석관의 모습이 제대로 보인다. 리스고와 하크네스가 동석했다.

2월 3일 : 네 번째 사당의 해체 작업을 완료했다. 이 작업이 끝나면서 석관의 고운 자태를 바로 눈앞에서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석관 자체는 굉장히 아름답고 섬세한 손길로 꾸며진 대작이 분명하지만, 정작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관뚜껑은 관 본체에 비해서 훨씬 완성도가 뒤떨어진다. 우리가 관뚜껑을 처음 확인했을 당시 2개의 큰 조각으로 깨져있었는데, 중간에 석관에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우리가 워낙 조심조심 작업한 것을 고려해보면 아마 만드는 과정이나 석관을 안치하는 과정에서 깨져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석관은 노란빛의 광택이 나는 사암으로 만들어졌다. 관뚜껑은 약간 기울어진 모양새를 하고 있고, 관의 몸체의 네 모서리에는 이시스, 네프티스, 네이스, 셀키트 이렇게 4명의 여신들이 팔에 달린 날개를 펼쳐 관을 감싸안아 수호하고 있는 모습이다. 석관의 윗부분 장식은 석관을 감싸고 있던 세 개의 사당들과 모습이 유사하다. 관 아랫부분에는 생명의 상징인 앙크파피루스 줄기의 모습이 새겨져 있으며, 본체의 여백 공간에는 빽빽하게 히에로글리프들이 새겨졌다. 관의 뚜껑 자체는 약간 기울어져서 한쪽이 더 위쪽으로 올라간 모습인데, 아마 석관 내부에 있을 관의 머리가 있는 부분이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어서 머리가 있는 방향을 일부러 더 높게 만든 것 같다. 뚜껑이 쪼개져버린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2월 6일 : 석관의 뚜껑을 열기 위한 예비 작업으로 석관의 폭과 높이, 너비 등을 측량했다. 이 수치들을 가지고 나무로 틀을 짜서 석관 뚜껑을 밀어옮길 받침대를 제작할 것이다. 석관이 공개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특히 언론 기자들이 석관의 사진을 찍기 위해 무덤 내부를 수 차례 드나들었다. 한편 드디어 이집트의 새 내각 장관들이 결정되었다고 한다. 나는 내일 카이로로 가서 신임 공공부 장관인 모코스 베이 하나 장관을 만나야 한다.

2월 7일 : 토튼햄과 상의한대로 오늘 아침에 언론 기자들이 무덤 내부에 입장할 수 있도록 조치해놓은 다음 카이로로 향했다. 카이로에서 아침에 가디너를 만나 신임 내각과 새 모코스 장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가디너는 장관이 예상외로 매우 협조적인 인물이라고 말한다. 과거 일은 과거에 묻어버리자고 말하기도 한다고 한다. 가디너는 내가 장관과 오후에 있을 만남에서 굉장히 성과있는 진전을 낼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도 장관과 말이 잘 통한다면 그 것만큼 바랄게 없을 것 같다.

5시에 공공부 부서 건물에서 장관을 만나기로 해 시간에 맞추어 약속 장소에 도착했지만, 장관이 일정이 지체되어 약 20여 분간 기다려야 했다. 그 시간 동안 토튼햄을 만나 어떻게 장관을 대해야 좋을지 논의했다. 토튼햄은 이전 이야기는 일절 하지말고 오직 관을 개봉하는 문제나 미라와 관련된 사안만 이야기하라고 조언했다. 얼마 전에 이전 장관과 한 이야기들은 꺼내봐도 좋을 것이 없고, 아마 문서도 다 파쇄되어서 내가 입에 올리지만 않는다면 그 쪽에서도 딱히 꺼낼 이유가 없을 거라는 것이다. 토튼햄은 그렇게 나를 안심시켜 놓은 뒤 현재 정부가 걸고 넘어질 수도 있는 문서 한장을 내게 건넸다. 문서에 정부가 발굴 작업에 관여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는 것이다. 깜짝 놀라 살펴보니, 카나본 경이 후원하는 내 작업에 대한 문서임은 분명했지만 왕가의 계곡이 아니라 저 테베 북부의 다른 계곡의 발굴에 관련된 문서였다. 나는 이 문서가 왕가의 계곡에서 발견된 투탕카멘의 무덤과는 아무 상관이 없음을 알려주었다.

토튼햄과의 짧은 면담을 뒤로 하고 나는 그와 함께 모코스 장관을 만나러갔다. 모코스 장관은 꽤나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는데, 나를 만나자마자 가디너를 그에게 보낸 것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았다. 내가 이집트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디너를 그에게 보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나는 가디너 본인이 공공부에 대학 동기들이 많이 있어서 협상이 더 쉬워질 것이라 생각해 그가 자원해 떠난 것이지, 내가 직접적으로 관여한 일은 전혀 아니라고 해명했다. 해명이 끝나자 장관은 꽤나 협조적으로 나왔다. 장관은 현재 유물부 직원들에게 불만스러운 부분이 있으면 본인에게 편지를 쓰라고 말했고, 나는 긍정적으로 답변했다.

장관이 협조적인 태도로 나오며 정부와의 법적 갈등에서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나는 내가 타임스지와의 계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실수가 생겨 타임스지에게 보기에 따라 특혜를 제공해 이집트 언론사들의 자극을 유발했다는 데 동의했지만, 장관에게 그 문제는 전적으로는 나의 잘못이 아닐 뿐이라고 해명했다. 또한 일단 한 번 계약을 체결했으니 계약기간까지는 그 약속을 지켜야하지만 계약 만료일이 다가오는 1924년 4월부터는 계약을 해지하고 다신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장관은 이후 내가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공무원들과 접촉한 일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려 들었지만, 나는 빨리 그의 말을 막고 석관을 개봉하는 문제로 말꼬리를 돌렸다. - 참고로 이 과정에서 토튼햄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장관에게 이전에 우리 측과 전임 장관 사이의 협상은 모호하고 가치없음을 부각하며 어서 묻어버리자고 설득했다.- 장관도 그 이야기에 동의했다. 이후 장관은 라카우를 회담에 배석시켜도 되겠냐 물었고, 우리가 허락하자 바로 라카우가 들어왔다. 아무래도 라카우가 전에 문전박대당한 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 있었나보다. 라카우는 들어오자마자 내가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을 무덤 현장에 초대했다고 쏘아붙였고, 나는 내가 초대한 사람들은 정부 측에서 초청한 인사들의 20분의 1도 안된다고 응수했다. 옆에서 토튼햄이 나의 말을 뒷받침해주었다.

내가 반론하자 라카우는 그냥 웃고 넘어갔다. 나는 다시 주제를 석관을 여는 일로 전환했다. 나는 석관을 여는 순간에 장관이 직접 참관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장관은 석관을 열면 바로 그 안에 있는 미라를 볼 수 있는것이냐 질문했고, 나는 고대 이집트의 장례식 절차상 석관을 열어도 그 안에 겹겹이 황금 관이 들어있고 그 관들을 다 열어젖혀야만 미라가 가장 안쪽에 있을 것이라 답변했다. 장관은 눈에 보일 정도로 실망스러워했고, 대신 장관대리를 보내 참관시키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만일 석관을 개봉했을 때 흥미로운 것이 나온다면 바로 장관에게 연락해줄 것을 약속했다. 장관도 이 제안에는 이견이 없었다. 또한 나는 최소한 11일 월요일까진 기자들의 출입을 통제할 것이고, 그 사이에 누군가 들어온다해도 7일에 보도된 내용 정도 밖에 건져갈 것이 없을 것이라 통보했다. 대신 12일에 석관의 뚜껑을 열고 바로 그다음날인 13일에 기자들의 취재와 촬영을 허가할 것이며, 14일부터는 최소 삼일 정도는 사진을 찍고 자세히 분석하는 작업에 들어갈 것이라 말해주었다. 하지만 이때에도 만약 정부에서 허락한 사람 한정으로 진척 상황을 보고 싶다면 무덤 출입을 허가할 것이라는 말은 남겼다. 이렇게 제안하자 장관도 어느 정도 만족한 것 같았고, 라카우를 시켜 우리와 계약서와 법적 서류를 작성하라 일렀다. 라카우는 내일 아침 11시까지 모든 필요한 서류를 구비해놓을테니 제 집에서 보자고 요청했다. 우리가 이에 응하며 면담이 끝났다. - 나는 이 부분에서 이번 회담 내내 적대적인 기운이 감돌았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장관은 겉으로는 웃으며 협조적이었지만 속에 적대심이 있는 것 같았다...-

우리가 장관의 사무실을 나와 집으로 향하는 순간, 라카우가 우리를 붙잡더니 자신이 들어가기 전 장관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추궁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답했고 토튼햄은 라카우더러 이런 식으로 사람을 추궁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항의했다.

2월 8일 : 11시에 라카우의 자택에서 토튼햄, 라카우와 함께 서류들에 서명을 했다. 대략적으로 관의 개봉, 언론 출입통제, 사진을 찍기 위해 배분해놓을 시간배정, 정부가 허가한 내빈객들에 대한 무덤 통행증 발급 등 굵직한 사안들에 대해서는 합의를 본 것 같다. 다만 내빈객들이 무덤에 출입할 수 있는 구체적인 날짜와 시간은 아직 확실히 정해놓지 않았다. 정부가 얼마나 통행증을 내 줄지도 모를뿐더러 관의 상태나 발굴 속도에 따라 얼마든지 일정이 변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 시간부터 관을 열어서 공식적으로 개방할 때까지 그 어떠한 사람도 무덤 발굴현장을 함부로 출입할 수 없다.

나, 토튼햄, 라카우가 여러 부의 문서들에 서명을 마쳤고, 토튼햄이 문서를 따로 한 부 복사하여 공공부 장관에게 갖다준다고 한다. 이 것으로 질질 끌어온 법적 문제가 일단락되었다. 서명식 직후 라카우가 무덤 내에 손님들이 출입할 때 혹시모를 파손을 방지하기 위해 보호용 깔개와 포장을 미리 해놓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또한 정부가 발급할 수 있는 통행증의 총 갯수가 750개 이하로만 해야한다는 것에도 동의했고, 하루에 70개 이상을 발급할 수 없다는 조건도 달았다. 라카우는 아침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하루에 200명까지 인원제한을 하자고 제안했지만 나는 하루에 200명을 수용하기에는 무덤이 너무 좁고 어수선하다고 거부했다.

2월 9일 : 드디어 지긋지긋한 카이로에서 벗어나 룩소르에 도착했다. 메이스를 만나 아침을 함께 먹고 우리가 체결하고 온 계약과 그 내용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었다. 우리가 관을 열고 하루 간은 언론 기자들에게 온전히 자리를 내주어야하며, 또한 정부가 통행증을 발급해준 사람은 그대로 안내해주어야한다고 말했더니 메이스가 썩 달가워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신임 장관과 내각에 대한 기대는 별로 없었지만, 막상 실제로 마주하고나니 더욱 그들의 불통과 관료주의가 눈에 들어온다. 아무래도 그들과 우리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사이인가 보다.




6.3. 석관 개관[편집]


[ 펼치기 • 접기 ]

2월 4일[1]

: 드디어 석관에 손을 댈 차례가 왔다. 두 조각나버린 석관의 뚜껑 조각들을 젖히니 거대한 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관은 탁한 검은빛 찌꺼기들로 뒤덮인 모습이다. 바로 관에 대한 보존처리 작업에 들어갔다. 관을 따뜻한 물과 암모니아로 살살 문질러 닦았다. 관의 표면에 습기 때문에 찌꺼기 비슷한 것들이 많이 묻어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황금 관에 촘촘히 박힌 유리들이 습기 때문에 더 많이 손상을 입은 것 같다. 내 생각에 이 습기가 발굴 과정에서 들어갔다고 생각치는 않는다. 물론 석관 뚜껑에 금이 가고 마감 석고가 갈라지긴 했지만, 내가 무덤을 개봉했을 당시만 해도 무덤 내부는 매우 건조한 편이었다. 따라서 황금 관에 맺혀있었던 습기는 아마 고대 이집트인들이 관을 안치했을 때 스며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관을 암모니아와 물로 닦아내는 일은 엄청난 집중력과 시간을 요했지만, 몇 차례 고비를 넘기고 나니 관을 닦아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탁한 찌꺼기들을 걷어내니 황금빛 광채가 관 전체에 감돈다. 이제야 관의 탁월한 예술적 자태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관의 이마 부분에 박힌 황금 우라에우스[2]

이 너무나도 아름답다.

석관 내부를 더 조사하기 전, 일단 석관을 덮고 있던 리넨 천들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총 2장의 천들이 석관을 덮어싸고 있었는데, 개중 엄청나게 큰 천이 한 번 접혀서 두겹으로 올려져 있어서 처음에 조사할 때는 3장의 천들이 있는 줄 알았다. 위쪽에 있던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의 천은 굉장히 촘촘하게 짜여있었고 아래쪽에 있던 큰 천은 훨씬 느슨하게 짜인 모습이었다. 면사로 만든 천연 모슬린이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다보니 결이 다 풀어져버린 것 같았다. 천에는 검은색 잉크로 무언가가 쓰여 있었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흐른 탓에 천이 삭아서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아마도 투탕카멘의 이름이 찍혀있었던 것 같긴 한데, 잉크가 묻어있었던 부분이 삭아내려서 확실하진 않다.

2월 6일 : 석관을 닦을 때 유리 조각들의 부식 정도가 심해 일부러 약간 빼두었다가 보존처리가 끝난 이제야 다시 끼웠다.

한편 석관이 들어있던 사당들에 대한 보존 처리작업과 동시에 사당에 찍혀있던 봉인자국과 왕명에 대한 분석작업에 들어갔다. 사당에 새겨진 정교한 조각들과 봉인들은 수 천년의 세월을 견뎌낸 것 치고는 굉장히 양호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사람 일은 언제나 모르는 법, 아밀 아세테이트에 녹인 셀룰로이드를 사당 외벽에 발라 혹여나 떨어지거나 금이 가지 않도록 처리했다.

전실에서 발견한 211번 화병을 보존처리했다. 병에 담겨있던 향유 때문에 내부가 약간 미끌미끌하고 기름 성분 때문에 보존 상태가 꽤나 좋지 않다. 기름 성분은 아직까지도 만져보면 약간 부드러운 느낌이 든다. 기름 때문에 생긴 녹과 침전물 때문에 화병 일부가 삭아 사라져버렸지만, 벤젠으로 전문가들이 복구하면 어찌어찌 원 모습을 되돌려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참고로 화병 자체는 대단히 아름다운 멋진 공예품이다.

2월 7일 : 211번 탄산광 화장품 항아리 복원 작업이 끝났다. 항아리에 파라핀 왁스를 붓기 전에 일단 얼룩들을 최대한 제거해놓는 것이 더 보존 효과가 깔끔하게 잘 나타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복원 작업이 끝난 항아리는 완벽한 모습으로 내 앞에 전시되어 있다. 특히 항아리의 목 부분을 받치고 있는 노예들을 조각한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답다. 두 명은 누비아의 흑인인 것 같고 나머지 두 명은 지중해권의 북방 민족들인 것 같다. 이제 남은 건 210번 화병을 어떻게 처리할지다. 나일 강의 신 '하피'의 모습이 새겨진 화병인데, 화병 안에 담겨있던 내용물들 때문에 화병 목이 여러 조각으로 쪼개져버린 것 같다. 속에 있는 찌꺼기들을 어떻게 제거해야할지 난감하다.

2월 17일 : 요즘 들어 우리는 무덤 발굴을 하기보다는 지금까지 발굴한 유물들을 보존처리하는 데에 대부분의 시간을 쏟고 있다. 210번 알라배스터 화병의 처리는 어저께 다 끝났고, 이제 아누비스의 인장이 새겨진 화병을 다룰 차례다. 아마 젖은 스펀지로 닦아준 다음 왁스를 부으면 될 것이다.

무덤의 현실에서 발견한 메이스와 전실 속의 상자 속에 들어있던 기다란 막대기가 알고보니 트럼펫인 거 같다. 나무로 제작된 트럼펫에는 정교하게 금으로 상감이 되어있고 위쪽에는 얇은 은박과 청동으로 뿔처럼 나팔 모양이 있는데, 이게 애당초 추측했던 것처럼 메이스의 용도였다면 이렇게 얇게 만들었을 리가 없다. 내 추정이 사실이라면 이 트럼펫은 세상에서 유일한 고대 이집트에서 제작된 트럼펫이다!

2월 18일 : 아누비스의 인장이 새겨진 화병에 왁스를 부었다. 왁스 처리를 하니까 모습이 훨씬 나아보인다. 점심에는 암스트롱 여사가 발굴 현장을 방문해 함께 점심을 들었다.

루카스가 꽤나 흥미로운 말을 해주었다. 우리가 석관을 개봉하는 작업을 할 때 현실 내부에서 붉은빛을 띠는 갈대 줄기들을 발견한 적이 있는데, 나는 그걸 처음 보고 의식에 쓰이는 제례용품 정도로 추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루카스 박사가 갈대 줄기들을 분석한 결과 속이 빈 줄기 안에 지방과 향유 등이 굳어져 채워져 있었다고 한다. 즉 빈 갈대 속에 향유를 채워 굳혀서 마치 즉석용 횃불처럼 썼다는 이야기다.

2월 21일 : 최근 며칠 간은 전실에서 발견한 여신 타와레트의 형상을 한 소파를 닦느라 온종일 시간을 보냈다. 타와레트는 고대 이집트의 대표적인 신들 중 하나로, 머리는 하마, 몸통은 악어로 굉장히 독특한 모습을 하고있다. 그녀가 들고 있는 물체의 모습을 보아서는 아마 왕의 무덤을 수호하라는 의미로 만들어진게 아닐까 싶다. 타와레트는 난쟁이 신 베스(Beth)의 아내였다. 베스는 유흥의 신으로 신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주 임무였다고 한다. 신왕국 시대에 타와레트는 굉장히 인기가 많았고 사람들은 경애의 의미를 담아 그녀를 '위대한 분'이라 불렀다.

우리는 타와레트의 모습을 한 소파 외에도 2개의 의자를 더 발견했다. 하나는 사자 모습이었고(사자가 아니라 치타일 가능성이 더 커보인다.) 나머지 하나는 소의 모습이었는데 아마도 호루스의 아내 하토르의 모습을 새겨놓은 것 같다.

3월 1일 : 2월달이 다 지나가버렸다. 타와레트 형상의 의자나 하토르 의자, 전실에서 발견한 조각상 1점을 정리하느라 시간을 다 썼다. 이제 왁싱 작업을 포함해 모든 보존처리가 다 끝났고 사진을 찍어 남기기만 하면 된다. 버튼이 다음 주 수요일에 사진을 찍어 공공에 공개할 것이다. 지난 27일에는 지와 파샤 총리가 무덤을 들렀다. 우리가 해놓은 작업에 꽤나 만족스러워하는 눈치였다.

3월 1일~31일 : 무덤에서 발견한 유물들을 사진 찍어 남긴 후 상자에 곱게 포장해 카이로로 향하는 특급열차에 실어보냈다. 여름에는 발굴 작업을 중지했다가 가을에 다시 발굴을 재개할 것이다. 가을에 있을 발굴 작업을 위해 무덤을 다시 폐쇄하고 인근의 연구소와 작업실도 모두 한동안 문을 닫을 것이다.




6.4. 미라 공개[편집]


[ 펼치기 • 접기 ]

9월 23일 : 이집트로 가기 위해 런던을 떠났다. SS 헬루안 호를 타고 트리에스테,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카이로로 향할 것이다. 채널 해협을 건널 때는 날씨가 영 좋지 않았지만 트리에스테에서 알렉산드리아로의 여정은 꽤나 좋았다. 좀 덥긴 했지만 지중해성의 따뜻한 기후 덕에 순조로운 항해를 할 수 있었다.

9월 28일 : 오후 3시에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고 오후 10시 15분에는 카이로에 도착했다. 아브드 엘 아시가 날 맞아주었다. 컨티넨탈 사보이 호텔에 짐을 풀었다. 내가 묵는 방이 알고보니 그 불쌍한 카나본 경이 머물렀던 바로 그 방이라고 한다.

10월 1일 : 카이로 박물관에서 에드가와 함께 미라를 개봉하는 일에 대해 논의를 했다. 10월 11일부터 투탕카멘의 무덤에 설치할 전등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도 얘기를 했는데, 특히 최대한 투탕카멘의 미라를 할수 있는한 빨리 개봉해야한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한 10월 25일 쯤에는 더글라스 데리 교수와 살레 베이 함디의 입회 하에 미라의 붕대를 푸는 게 어떻겠느냐 물어봤다. 미라의 붕대를 풀어헤치는 일은 최대한 빨리 해치워야하겠지만 혹시나 정부 고관들이 직접 왕의 얼굴을 보고 싶어할지도 모르니 다시 붕대를 감는 일은 조금 미뤄야할거라 본다. 라카우가 11월부터 출장을 떠날 예정이기 때문에 그가 붕대를 푸는 작업에 참석하기 위해선 최대한 빨리 일을 시작해야겠다. 라카우에게 전통을 넣어 왕의 미라를 공개하는 일정에 참석할 생각이 없냐고 물어봐야지.

10월 2일 : 이번 시즌의 작업을 시작하기 전 필요한 물품들과 일꾼들에 대해 상의했다. 짜증나게도 내가 작업을 재개하려는 모습을 보이자마자 지역 언론들이 냄새를 맡고 달려왔다. 전에 내가 합의해줬던 내용으로는 지나치게 보도량이 작다고 항의하는 게 대부분이다. 언론들은 더 많은 독점 인터뷰와 자료, 사진들을 개인적으로 제공해주길 원한다. 이전 정권 하에선 공식 보도국을 통해 연락하지 않는다고 불평하더니.... 이제 정권이 바뀌니 언론사들이 개인적으로 자기들에게 연락을 하길 바란다! 아무래도 이번 시즌의 발굴 작업도 그다지 편할 것 같지는 않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내가 정석대로 밀고나간다면 저 신경쓰이는 언론사들도 내게 왈가왈부하진 못하겠지.

10월 3일 : 아침 11시에 에드가와 만남을 가졌다. 에드가는 아직 라카우로부터 참석하겠다는 대답을 받진 못했다고 말했다. 루카스를 만나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보관하는 전시관을 함께 둘러보았고, 이 과정 중 투탕카멘의 왕좌가 매우 약간 검게 변색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내년 봄에 다시 왁싱하고 영구 보존처리를 하면서 색을 다시 원래대로 돌려놔야겠다. 나는 유리 케이스 안에 넣어둔 은제 막대기가 2조각나버렸다는 사실을 듣고 경악했다. 브뤼셀 박물관장에게 이 막대기를 보여주다가 직원의 실수로 두동강나버렸다는데, 어떻게 유물을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는 자에게 이처럼 귀중한 것을 만지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앞으로는 함부로 직원들이 유물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단단히 주의를 시켜야겠다.

10월 12일 : 아침 7시와 8시 사이 즈음 무덤을 열었다. 무덤을 열 때 워낙 단단하게 밀봉시켜둔 터라 개봉하면서 꽤나 애를 먹었다. 먼저 문을 가로지르는 수평 목재를 들어낸 다음 무거운 터키산 참나무 목재로 만든 빌보드를 치웠다. 그리고 맨 안쪽 전실 앞에 강철로 세워놓은 문짝을 치워내고 나서야 작업이 끝났다. 전실과 묘실을 샅샅이 훑어본 결과 먼지가 얕게 쌓인 걸 제외하면 우리가 떠났던 상태 정확히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걸 보고서야 마음이 놓였다. 석관 위를 감싼 검은 포장지에 천장에서 떨어진 석회 조각들이 군데군데 있었는데 별다른 상관은 없을 듯하다. 미리 기생충약을 뿌려둔 덕에 종이나 아마포를 갉아먹는 벌레도 보이지 않았다.

2000 칸델라의 밝은 전등을 무덤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그 전등으로 석관 속 들어있는 거대한 황금 관을 비추었더니 눈이 부실 정도로 무덤 내에 황금빛이 가득하다. 히에로글리프들이 찬란히 새겨진 석관이 전등빛을 받아 빛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감탄사만 나올 뿐이다. 무덤 내 모든 게 제대로 보존되어 있는 걸 확인한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무덤을 다시 닫았다. 무덤을 닫은 후에는 연구실로 향했는데, 여기도 그럭저럭 양호한 상태로 남아있었다. 나머지 시간은 연구실에서 석관의 개봉을 준비하며 인부들과 보냈다.

10월 13일 : 아침 7시, 드디어 황금 관의 덮개를 들어올리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석관 속 황금관을 유심히 뜯어본 결과 양쪽에 2개씩 총 4개의 청동 손잡이들이 붙어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경도와 보존 상태를 보니 이 손잡이를 우리가 이용해도 괜찮겠다는 판단이 섰다. 관 덮개와 관을 고정하고 있는 청동 핀들만 몇 개 뽑아내고 이 손잡이를 써서 들어올리면 될 것 같다.

관 덮개는 10개의 청동 핀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금으로 덮인 외관에선 보이지 않도록 목재로 만들어진 내부에 박혀 있었는데, 옆쪽에 각자 4개씩 총 8개, 머리쪽에 1개 발치에 1개씩 총 10개가 있었다. 석관 속에 황금 관이 꽉 채워서 들어가 있던 터라 공간이 좁아 핀을 잘 빼내지 못할까 걱정했는데, 관을 흔들어서 공간을 잘만 조절하면 쉽게 핀들을 뽑을 수 있다는 걸 발견했다. 다만 머리쪽의 핀 1개의 경우 아무리 빼내도 공간이 워낙 협소해서 겨우 반만 빠졌다. 그래서 핀을 반 정도 미리 빼내고 줄질을 계속 해서 핀을 갈아가면서 빼내느라 진땀을 뺐다.

10개의 핀들을 모조리 제거한 다음에는 호이스팅 태클을 설치했다. 관의 머리 부분에 설치한 비계에 고정된 3개의 도르래 블록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기계장치를 만들었고, 튼튼한 끈으로 도르래를 뚜껑에 박힌 손잡이에 연결했다. 혹여나 관이 떨어져서 파손되는 대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관 주위에 솜뭉치들을 가득 묶어 완충재로 썼다. 정오 쯤에 뚜껑을 매우 천천히 들어올렸고, 황금관의 덮개를 들어올리자 그 안에 들어있는 2번째 황금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보다는 비교적 쉽게 첫 번째 황금관의 덮개를 들어올릴 수 있었다. 덮개를 벗겨내자 그 안의 2번째 황금관을 볼 수 있었는데, 거미줄이 쳐져 있었고 검은색으로 변색된 세마포 융단이 관을 감싸고 있었다. 머리와 얼굴 부분엔 말라비틀어진 화환과 얇은 리넨 시트, 그리고 수의가 입혀졌다. 수의와 리넨 천이 상당히 얇아서 그 아래에 있는 색유리 상감조각들을 그대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2번째 황금관의 보존 상태가 예상보다 좋지 않아 걱정스럽다. 앞서 말했듯 해진 아마포 사이로 황금관의 윤곽이 흘끗 보이는데, 표면의 금 세공과 금박에 군데군데 부풀어오른 모습과 함께 심지어 백화 현상까지 보인다. 이런 현상은 관이나 내용물이 완전히 건조되지 않은 채로 묻혔을 때 나타나는 일인데, 만약 습기가 온전히 제거되지 않았다면 왕의 미라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을 가능성이 크다. 기대했던 것만큼 관의 상태가 좋지 못해서 너무 걱정이 크다.

10월 14일 : 첫 번째 관 덮개를 무덤 밖으로 빼내면서 아침을 다 보냈다. 덮개를 겨우겨우 무덤 밖으로 옮겨서 실험실에 갖다놨다. 덮개는 길이 2.30m, 너비 0.87m에 달하고 엄청나게 무겁다. 내일 사진을 찍을 해리 버튼 씨가 도착할 거라 한다. 그가 도착해서 두 번째 관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기 전까지는 모든 작업을 중단토록 했다.

10월 15일 : 오늘 아침 11시 반에 해리 버튼 씨가 작업장에 도착했다. 오늘은 버튼 씨가 사진을 찍을 준비를 하는 데 다 써야할 것 같다. 작업실과 무덤은 그대로 놔두었다. 대신 두 번째 관의 얼굴 부분 위에 올려져 있던 화환을 조심스레 꺼내서 보존 처리했다. 내일에서야 관 개봉 절차를 재시작할 것이다.

10월 16일 : 아침에 버튼이 사진 찍을 준비를 완료했다. 루카스는 맨 바깥쪽 황금관 덮개의 보존 처리에 들어갔다. 튜픽 에펜디 보울로스가 두 번째 관을 열 때 현장에 참석하고 싶다는 뜻을 비췄다. 튜픽은 라카우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황금관을 열지 말하야한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나는 라카우가 미라의 붕대를 풀 때만 현장에 참석하면 되고 관을 열 때는 오든지 말든지 상관이 없다고 오해를 풀어주었다. 카이로의 에드가와 연락을 해서 일단 관의 뚜껑을 모두 열어젖히고 미라의 붕대를 풀 때 다른 사람들을 부르기로 했다.

버튼의 나머지 사진 장비들이 카이로에서 작업장으로 도착했다. 튜픽 에펜디가 게시물을 공고할 게시판을 세웠다.

10월 17일 : 버튼이 두 번째 황금관을 사진 찍는 작업을 완료했다. 두 번째 황금관은 각종 화환들과 꽃잎들로 뒤덮인 모습이었다.

화강암 석관이 워낙에 깊어서 두 번째 관을 밖으로 꺼내지 않고서는 도저히 작업을 진행할 수가 없다. 일단 맨 바깥쪽 관을 포함해서 황금관들을 한꺼번에 석관 밖으로 꺼내기로 했다. 오버헤드 풀링에 고정되어 있는 도르래를 이용해 관 자체를 들어올렸는데, 하도 무덤의 공간이 좁아서 꺼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게다가 황금관의 장식이 워낙에 정교하고 파손되기 쉬운 탓에 정말 극도로 집중해 관을 들어올렸다. 정확히 석관 바로 위까지만 황금관을 끌어올렸고, 옆으로 옮긴 후 다시 아래로 내렸다. 황금관을 내려놓은 뒤 관을 덮고 있던 화환을 치웠다. 화환을 분석하면 고대 화환의 제작 방식을 알 수 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너무 썩어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다. 이제 온전한 관의 모습을 감상해보니 절로 찬탄이 나온다. 오시리스의 형상을 새겨놓은 모습이 섬세하기 그지없다.

룩소르의 유물부 장관 기르기스 엘리아스, A. 루카스, 버튼, 이집트인 인부들이 이 작업을 도왔다. 관을 꺼내자 어느새 날이 저물었고, 어쩔 수 없이 무덤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 무덤을 닫기 전 버튼이 관을 여러 장 찍어 사진을 남겼다. 우리가 작업을 하는 동안 루카스는 작업장에서 계속 첫 번째 황금관 뚜껑 보존처리 작업을 하고 있다.

10월 18일 : 두 번째 황금관의 모습을 감상할 시간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터키석, 홍옥수, 라피스 라줄리 등의 색을 띠는 다채로운 색색깔의 색유리들이 가득 박혀서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다. 전체적인 외양은 첫 번째 관의 모습과 비슷하고 장식 역시 색유리가 박혀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유사한 편이다. 다만 파라오의 머리 장식에 푸른색으로 가로 무늬 장식이 추가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이시스네프티스 대신 네크베트와 부토 여신이 날개로 몸을 감싸고 있는 장식이 들어간 점 등이 약간 다르다. 모습은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우리 모두 두 번째 관이 첫 번째 관보다 훨씬 정교하게 만들어졌다는 데 동의했다. 두 번째 황금관의 얼굴이 첫 번째의 그것보다 더 젊어보인다.

10월 19일 : 고고학 연구를 하다보면 난관이 항상 등장하는 것만 같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닥쳤다. 가장 바깥쪽 관에 들어올리기 위한 청동 핀과 고리가 붙어있었기에 두 번째 관에도 당연히 고리가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고리가 없으면 두 번째 관을 첫 번째 관 속에서 꺼낼 수가 없다. 게다가 워낙에 장식이 정교하고 많아서 조금만 함부로 다루면 바로 깨져버릴 것이 뻔하다. 두 번째 관은 첫 번째 관과 크기가 지나치게 딱 맞어서 작은 손가락 하나 들어갈 틈도 없는데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다. 두 번째 관의 관뚜껑도 첫 번째 관처럼 관 자체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기에 두 번째 관을 첫 번째 관에 놔둔 채로 작업을 진행할 수도 없다. 오늘은 이 고민을 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어떻게 해야 두 번째 관을 첫 번째 관에서 손상시키지 않은 채로 온전히 빼낼 수 있을까?

10월 20일 : 10월 20일 화요일은 장이 서는 날이고 인부들이 장에 가느라 작업이 없다. 그래서 오늘도 어제처럼 두 번째 관을 어떻게 들어올릴까 고민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매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유물을 다뤄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이게 얼마나 어렵고 신경이 곤두서는 작업인지 모를 것이다. 관 뚜껑을 들어올리는 일은 겉보기엔 별 것 아닌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만약 그 관이 정말 딱 맞는 또다른 관 안에 정확히 들어가 있고, 수 천년의 세월 동안 상당히 약화된 상태에다가, 엄청나게 무거운 주제에 좁아터진 무덤 속에서 작업을 해야만 한다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진다. 이정도로만 말해도 이 작업이 얼마나 민감한 작업인지 감이 올 거라 믿는다.

생각해보라. 만약 당신이 정말 며칠 동안 머리를 짜내서 겨우겨우 계획을 세워놓고, 정말 만반의 준비를 갖춘 다음 관짝을 들어올리는 와중에 무언가 쩍하고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리거나 조각이 쨍그랑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면 기분이 어떨 것 같은가? 그와중에 안그래도 좁은 무덤은 인부들로 가득해서 움직일 공간조차 없다. 게다가 현지인 인부들은 화려하기 그지없는 관의 외양에 정신이 팔려서 작업 도중 부주의해지는 경우가 잦다. 그래서 모든 작업을 덥디더운 무덤 내부에서 우리가 수작업으로 해야하는데 이게 정말 보통 일이 아니다.

10월 21일 : 루카스가 오늘 맨 바깥쪽 관뚜껑 보존 처리 작업을 마쳤다. 아주 훌륭하다. 이틀 동안 고민한 결과 두 번째 관을 들어올릴 기구들을 설계했는데, 카이로에서 주문한 부품들이 도착할 때까진 기다려야만 한다.

10월 22일 : 오늘 아침은 두 번째 관을 들어올린 직후 그 관뚜껑과 관 몸체를 받아낼 목재 받침대 2개를 제작하느라 바쁘게 보냈다. 두 번째 관이 워낙에 첫 번째 관에 착 달라붙어 있어서 이걸 꺼내긴 위해선 반드시 끈을 고정할 부분이 필요하다. 그래서 드디어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두 번째 관의 몸체와 관뚜껑을 고정하는 용도로 박혀있는 청동 핀을 이용하는 것이다! 하도 틈이 좁아서 핀을 전부 빼내진 못하지만 약 4분의 1인치 정도는 빼낼 수 있다. 그리고 그 빼내서 관 밖으로 삐져나온 부분에 밧줄을 달아서 들어올리면 충분하다. 핀이 관의 하중을 이기지 못하고 부서지는 일이 없도록 특수제작된 금속제 고정대를 부착했다. 카이로에서 특별주문한 부품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 준비가 완전히 끝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

10월 23일 : 드디어 카이로에서 물건이 도착했고 모든 작업 준비가 끝났다. 작업을 시작하기 직전 우리들 사이에서 감돌던 그 긴장감과 엄숙함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일단 제일 먼저 두 번째 관이 들어있는 첫 번째 황금관을 통째로 들어올려 석관 바로 위 공중에 띄웠다. 그리고 두 번째 관에서 미리 빼낸 청동 핀에 밧줄을 매단 다음, 두 번째 관은 그대로 놔두고 첫 번째 관은 그 아래로 천천히 내렸다. 이렇게 해서 첫 번째 관은 다시 석관 속으로 들어갔고 두 번째 관은 10개의 청동 와이어로 인해 공중에 매달린 채로 대롱대롱 달려 있는 상태로 만든 것이다. 처음에는 첫 번째 관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 같아 가슴이 철렁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첫 번째 관이 자체의 무게 때문에 내려가며 자연스럽게 서로 떨어져 나갔다. 옆에서 지켜보던 인부들이 빨리 나무 받침대를 아래로 받쳤고 두 번째 관은 안전하게 분리되었다. 두 번째 관을 분리했으니 이제 관을 열어젖힐 차례다.

두 번째 관의 관뚜껑을 열었더니 세 번째 황금관의 자태가 드러났다. 형태는 첫 번째와 두 번째 관과 거의 유사하지만 붉은 리넨 천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는 않는다. 세 번째 황금관에 새겨진 얼굴의 모습은 앞의 두 개의 관에 새겨진 얼굴들보다도 더 어려보인다. 가슴 부분에는 파피루스 꽃과 각종 구슬들로 이루어진 화환이 곱게 놓여있었다.

이 모든 작업은 오후 12시 45분에 진행되었다. 테픽 에펜디 보울로스, 상이집트의 유물부 장관인 모하메드 에펜디 샤반, 룩소르의 유물부 장관 기르기스 에펜디, 루카스와 버튼, 그리고 이집트 현지 출신 인부들이 이 과정에 참관했다.

10월 24일 : 버튼이 세 번째 관을 두 번째 관 속에 들어있는 상태로 사진을 찍느라 아침 시간을 다 보냈다. 붉은 리넨 천으로 꽤나 두텁게 가려져 있는데, 그 위에 구슬과 말라붙은 꽃들로 목과 가슴 부분이 온통 덮여있다. 사진을 다 찍은 후에야 리넨 천과 구슬, 꽃들을 치울 수 있었다. 이 천과 구슬, 꽃들을 제거하는 과정 자체는 이전 과정에 비하면 매우 간단했다. 천과 구슬 따위를 모두 들어올리고나니 꽤나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다. 이 세 번째 관이 알고보니 통짜로 순금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어쩐지 첫 번째 관과 두 번째 관을 제거한 후에도 딱히 하중이 줄어들지 않아서 의아했는데 알고보니 이 세 번째 관이 워낙에 밀도높은 금으로 만들어서 그랬다.

두 번째 관의 뚜껑을 들어올려 무덤 바깥으로 빼냈다. 여덟 명의 장정들이 달라붙어서 겨우 들어올릴 수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네크베트와 부토에 둘러싸인 오시리스의 모습을 묘사해놓았다. 목이고 가슴이고 온통 극도로 유려한 장식들로 꾸며져 있지만 신관들이 장례 당시 부어놓은 술과 향유가 검게 변색되어 아직 완벽한 모습을 알아보긴 힘들다. 이 향유가 검게 덩어리져서 두 번째 관과 세 번째 관 사이를 단단히 고정해놓은 탓에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이제 세 번째 관을 꺼낼 준비를 해야하는데 앞서 말했듯이 향유가 검게 변색되어 단단히 세 번째 관과 두 번째 관을 고정해놓고 있는터라 도저히 수가 보이지 않는다. 생각해보니 앞서 여러 관들을 분리할 때 보였던 습기의 흔적이 이 향유와 술 때문에 생긴 걸로 추정된다. 이 향유와 술들이 그 안에서 고여있었으니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게 왕의 안녕을 빌어준다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관과 유물의 보존 상태는 안녕하지 못했다. 이 술 때문에 세 번째 관을 덮던 천과 화환은 만지자마자 부스러져버렸고 관에도 습기 때문에 조그마한 실금들이 갔다. 게다가 단단히 굳은 향유를 어떻게 녹여 세 번째 관을 빼내야 할지도 또다른 난관이다.

10월 25일 : 세 번째 관을 두 번째 관에 들어있는 상태 그대로 전실로 옮겼다. 아무래도 좁은 현실보다는 훨씬 작업하기가 쉬워질 것이다. 이 관을 옮기는 데 8명의 장정이 달라붙어 옮겨야 했다. 대략적으로만 계산해봐도 중량이 934 소브린 금화 x 40 정도로 37,360 파운드에 달하는 순금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데, 이렇게 거대한 금덩어리가 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내가 지금까지 본 고대 이집트 유물들 중 가장 아름답고 멋진 유물이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10월 26일 : 어떻게 해야 검게 굳어버린 향유 찌꺼기들을 제거하고 세 번째 관을 빼낼 수 있을지 계속 고민했다. 한편 루카스는 두 번째 관의 관뚜껑을 닦고 있다. 연구 결과 세 번째 관의 뚜껑 역시 앞선 두 개의 관처럼 10개의 핀으로 몸체에 고정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차이점이라면 순금 관답게 세 번째 관은 고정용 핀도 황금으로 만들었다. 연구 도중 추가적인 문제점이 발견되었는데, 향유가 완전히 딱딱하게 굳은 게 아니란다. 바깥쪽만 딱딱하고 안쪽에는 여전히 상당량이 점성이 남아있다는 뜻이다. 전기 납땜 인두로 슬쩍 찔러봤더니 쉽게 표면을 뚫고 안에 거품을 만들었다. 일단 두 번째 관과 세 번째 관의 표면이 손상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천천히 작업을 해야겠다.

10월 28일 : 두 번째 관에 새겨진 섬세한 상감 장식들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며 작업에 재착수했다. 일단 표면을 가볍게 솔질해 먼지를 털어냈고, 뜨거운 물과 스펀지를 이용해 관을 조금이나마 닦아냈다. 그리고 파라핀 왁스를 부어서 일단 상태를 고정시켰다. 파라핀 왁스가 식으면 단단히 고정된 상태로 훨씬 안정되게 작업을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고대 이집트 신관들이 이 향유를 하도 많이 부어놔서 살짝 두 번째 관 바깥으로까지 넘쳤는데, 이 찌꺼기들을 가지고 여러 실험들을 해볼 수 있었다. 몇 번 실험을 하다보니 향유 찌꺼기들이 특정 용매에 녹기도 하고 열을 가하면 다시 액체로 돌아가기는 한다는 걸 알아내긴 했는데, 관 전체에 사용하기에 적당한 방법은 찾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뚜껑을 열고 하나하나 향유 찌꺼기들을 제거하는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일단 세 번째 관을 두 번째 관에 그대로 둔 상태로 세 번째 관의 뚜껑을 열기로 했다. 다행히도 뚜껑과의 접합선이 향유에 뒤덮이지 않은 채 그대로 드러나 있어서 들어올리기 편했다. 긴 스크루 드라이버를 사용해 조금씩조금씩 핀들을 빼냈고, 길고 지루한 작업이 끝난 끝에 드디어 세 번째 관의 뚜껑을 열 수 있었다.

몇 시간의 작업이 지나가고 드디어 아무런 손상도 입히지 않은 채로 세 번째 관뚜껑이 열렸다. 마지막 관뚜껑이 열리는 순간 모두가 숨을 죽이고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고, 마침내 고요히 마스크를 쓴 파라오의 모습이 드러났다. 젋은 파라오의 얼굴은 평안하고 약간 슬퍼보이기까지 한다. 이 미라가 우리로 하여금 수 천년의 세월을 깨닫게만 하는 것 같다. 상당히 키가 큰 걸로 보아 살아있을 당시 파라오는 꽤 키가 컸을 것이다. 마스크 끝부터 발끝까지 미라의 키는 약 6피트 정도이고, 마스크 아래 가슴 부분에는 거대한 3개의 황금 목걸이가 뒤덮고 있다. 양 팔은 갈고리와 도리깨를 들고 겹쳐진 채 가슴에 올라갔고 리넨 천이 덮여있다. 수호의 여신 네크베트가 금박으로 그려진 리넨 장식이 미라 전체를 넓게 휘감았다.

안타깝게도 사제들은 미라에도 술과 향유를 부어놓은 모양이다. 손 아래로는 검게 굳어버린 향유가 두텁게 미라를 뒤덮고 있어서 도저히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다. 미라를 감싼 리넨 천도 향유에 물들었는지 검게 변해있고 그 안쪽 금박 장식들과 구슬 목걸이들도 향유 찌꺼기에 묻혀있다. 향유로 인한 습기 때문에 미라에도 영향이 가지 않았을까 매우 우려스러울 뿐이다.

10월 29일 : 어제 저녁 1시 30분까지 계속 작업을 진행했다. 버튼이 투탕카멘의 미라를 관 속에 놔둔 그대로 사진 촬영해 여러 장의 사진을 남겼다. 미라에 대한 감상을 더 써보자면, 일단 미라 자체는 마치 오시리스의 형상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보인다. - 고요하고 평화로운 모습이다. 앞서 우리가 발굴한 조각상의 얼굴과 똑같다. 가면은 약간 뒤로 젖혀져 있어서 마치 미라가 저 천장 너머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가면은 통째로 순금으로 만들어졌다. 눈은 아라고나이트, 검은 눈동자는 흑요석, 눈꺼풀과 눈썹은 청금석으로 제작했다. 이마에 박힌 우라에우스와 네크베트는 금으로 상감한 판에 색유리를 박아 만들었고, 가면의 네메스 머리 장식 역시 황금에 푸른색 색유리를 박아 제작한 것 같다. 목에 붙어있는 세 겹의 목걸이들은 구슬들로 만들었고 태양 원반을 진 뱀들로 고정되었는데 매우 보기에 아름답다. 아직 뭔지는 모르지만 검은색 재료로 만든 스카라베 조각이 목에 달려있는데, 구슬로 장식된 상감한 금제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가슴 위에 겹쳐진 황금으로 만든 손 모양의 장식은 리넨 붕대 위에 붙여놓은 것처럼 보인다. 가면과 연결되어 있지는 않고 손목에는 구슬로 만든 팔찌를 찼다. 역시 손에 갈고리와 도리깨 기물을 들고 있는데 습기 때문에 심각하게 파손된 상태다. 손 부분 아래로는 가로로 3개, 세로로 상형문자가 새겨진 4개의 황금 끈들이 둘둘 둘러졌고 그 위에 네크베트의 형상을 한 거대한 황금 장식이 덮고 있다. 하지만 신관들이 미라 위에 향유를 지독히도 부어댄 탓에 검게 변색된 덩어리들이 네크베트 장식과 끈, 그리고 미라의 허리 아래를 시꺼멓게 뒤덮고 있다. 이게 미라를 아예 관에 붙여버렸을까 두렵다.

10월 30일 : 버튼이 미라 사진 촬영을 끝마쳤다. 사진 촬영이 끝나고 이제 미라에 손을 댈 차례다. 일단 완충재를 깐 나무 쟁반을 준비했고, 조심스럽게 미라를 감싸고 있는 상형문자가 새겨진 황금 금속띠를 풀어냈다. 풀어내면서 보니 원래 붕대에 꿰매져 있었던 듯하다. 향유와 함께 붕대가 대부분 썩어버려서 쉽게 뜯어낼 수 있었다. 풀어낸 금속띠와 띠가 붙어있던 붕대는 잘 떼어낸 다음 다시 복원을 위해서 보존처리를 해놔야만 한다.

미라를 보면 볼수록 확실해지는 것이 있다. 신관들이 하도 향유를 많이 부은 바람에 맨 바깥쪽 겹의 붕대는 거의 검은색으로 탄화되어 탄소 덩어리 비슷하게 되어버렸다는 사실이다. 붕대를 몇 겹 풀어내면 안쪽은 괜찮지 않을까 싶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한편 루카스는 두 번째 관의 관뚜껑을 보존처리하는 일에 몰두하는 중이다.

10월 31일 : 미라 바깥쪽에서 붕대를 풀지 않은 상태로 떼어낼 수 있는 것들은 모조리 떼어냈다. 이제 미라와 마스크를 떼어내려 시도를 했는데, 역시 예상했던대로 향유 덩어리에 굳어서 관바닥에 찰싹 달라붙어있어서 실패했다. 현재 상태에서는 완력을 사용하는 것 외에는 떼어낼 수가 없겠지만 그런 짓을 한다면 미라가 작살날 게 뻔하므로 당연히 할 수가 없다. 기껏 찾아낸 미라인데 그런 식으로 함부로 작업할 수는 없는 법이다. 향유가 굳어서 미라를 관에 붙여놓았기에 이 굳은 향유 덩어리를 제거해야만 한다. 일단 바깥으로 미라를 옮겨서 뜨거운 태양빛을 쪼여야겠다. 이집트의 작열하는 태양이 향유 덩어리를 조금이나마 부드럽게 해주지 않을까하는 생각이다. 태양열이 소용이 없다면 일단 향유 덩어리들을 조금씩 떼낸 후 그걸 가지고 따로 녹일 수 있는 용매를 찾기 위해 실험을 거듭하는 수밖에.

추신 :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하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보다 뛰어나게 하셨노라.

추신 2 : 시온에서 애통하는 자들에게. 그들에게 아름다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게 하시고 이는 그들을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바 그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하심이라

그 향유 덩어리를 면밀히 관찰해봤다. 약간의 나무 수액과 섞인 지방 혹은 유향 덩어리 같은데, 술보다는 오히려 연고 쪽에 가까운 듯 싶다. 미라의 머리와 발 부분은 피해서 향유를 조심스레 부은 티가 확연히 난다.

11월 1일 : 투탕카멘의 미라를 꺼내서 밖으로 옮겼다. 순금으로 만들어진 관이 하도 무거워서 옮기는 데 10명의 장정이 달라붙어야만 했다. 루카스와 버튼이 세 번째 관에 붙은 향유 찌꺼기 덩어리들을 조심스레 떼어내는 동안 관짝을 열고 미라를 태양빛 아래에 놔두었다. 태양빛이 생각만큼 강하지 않아 걱정이다. 수 천년 동안 굳어버린 향유 덩어리를 녹이기에는 도무지 역부족이다.

11월 2일 : 태양의 열기가 아무런 소용이 없다! 파라오의 미라를 다룰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일단 세 번째 관에서는 향유 찌꺼기들을 모두 청소했다.

11월 3일 : 일이 없는 날이다. 각종 보고서들을 써서 올리느라 시간을 다 보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22 22:09:48에 나무위키 투탕카멘의 무덤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위쪽 사진은 투탕카멘 무덤의 배치도. 아래쪽 사진은 투탕카멘 무덤의 매장실이다. 현재 투탕카멘의 미라는 강화유리로 보강된 황금관 내부에 들어있다.[2] 사실 역대 파라오 중 도굴당하지 않은 상태로 발굴된 무덤은 타니스에서 발견된 제21왕조의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 단 한 곳뿐이다. 그러나 21왕조의 이집트는 이미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기에, 투탕카멘의 무덤에 있는 유물과 비할 바가 못 된다. 오히려 전 왕조의 무덤을 약탈해서 재활용한 부장품들이 다수에 무덤 내부가 침수로 인해 상당히 많이 훼손되었다. 더구나 당시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였기에, 이를 발견한 프랑스의 고고학자 피에르 몽테는 하워드 카터에 비해 명성이 상당히 덜하다.[3] 다만 관리들이 부장품 정리를 성의 없이 해서, 영 좋지 못한 상태로 발견된 유물들도 있었고, 원 위치에서 벗어나 있던 유물들도 있다.[4] 조지 에드워드 스탠호프 몰리뉴 허버트 (George Edward Stanhope Molyneux Herbert), 1866~1923. 고고학을 좋아하는 사람답게 1921년 6월, 당시 일제강점기 조선의 경주에도 왔었다. 아내와 함께 시장을 둘러보는등 당시 사진도 남아있다.[5] 그나마 투탕카멘 외에 인지도가 높은 파라오라면 클레오파트라람세스 2세 정도가 있겠으나, 파라오로서의 대중적인 인지도는 투탕카멘이 넘사벽이다. 클레오파트라는 이름 자체는 유명해도 정확하게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의외로 잘 모르는 케이스가 적지 않으며옛날에 좀 예뻤던 여자, 람세스 2세는 냉정히 말해서 고대사에 관심 없는 일반인에게 물으면 "그게 뭐야?" 할 인지도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도 투탕카멘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알고 있는 것이 사실.[6] 다만 업적으로만 보면 요절하여 업적을 쌓을 기회조차 없었던 투탕카멘과는 달리 무령왕백제의 중흥을 이끈 성군이었다는 차이가 있다.[7] 그게 서쪽 골짜기에 있는 KV23(또는 WV23)인데 아이의 무덤은 그의 모습이 그려진 벽화가 모두 깎이고 관이 박살났으며, 미라도 어디 갔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도굴꾼들에게 박살났다. 부장품도 전혀 없고 정말 무덤 내부가 썰렁하다. 하지만 아이의 무덤은 훼손이 워낙 심해, 도굴이라기보다는 누군가 계획적으로 파괴한 냄새가 심하게 난다. 보물에 환장한 도굴꾼들이 미라 속 귀금속을 찾는다고 훼손하거나 관 아래 보물을 찾는다고 박살내는 경우는 꽤나 많았으나, 굳이 무덤 벽화를 이렇게 훼손할 이유가 없다. 어쩌면 아래의 '치세 조작'과 관련있을지도 모른다.[8] 람세스 2세의 무덤은 왕가의 계곡에서도 가장 거대한 무덤이지만 만든지 50~60년도 안 돼서 싸그리 털려나갔다. 게다가 침수가 잘되는 위치에 지어져서 내부의 벽화도 모두 씻겨 사라졌다. 현재는 그저 폐허일 뿐이다. [9] 아텐 신앙에 관여된 파라오들로 아케나텐, 스멘크카레, 투탕카멘, 아이가 이에 포함된다. 호렘헤브는 이 네 명을 존재하지 않았던 파라오로 만들고 아멘호테프 3세가 죽은 뒤 바로 자신이 즉위한 걸로 조작했다. 따라서 이 네 파라오의 치세 기간도 자신의 치세 기간에 포함시켜 자신의 재위 기간이 59년이라고 선언했다. 실제로는 30여년이었다는 게 정설인데 아케나텐을 제외한 나머지 파라오들의 치세가 짧아 큰 영향은 없었다.[10] 다만 안타깝게도 전실에 있던 훔치기 쉬운 가벼운 보석류들 대부분은 이미 도굴을 당해 사라져 있었다.[11] 고고학자들은 왕가의 계곡에 묻힌 무덤에 'KV'를 붙여서 구분한다. 'King's Valley'의 약자다.[12] 다만 네페르타리의 경우 이집트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람세스 2세의 정실 왕비이자 그의 사랑과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왕국의 2인자나 다름없었다.[13] 무덤을 발굴했던 하워드 카터는 처음에 무덤이 지나치게 작아서 파라오의 무덤이 아닌 일반 왕족, 혹은 귀족의 무덤이거나 보물창고 정도가 아닐까 착각하기도 했을 정도였다.[14] 다만 침수가 잘되는 장소에 지어서 물이 찼다빠졌다하는 과정을 수 천년 거치면서 내부 목재 부장품들은 모조리 썩었다. 게다가 프수센네스 1세가 애초에 혼란기 시절의 파라오여서 원래부터 부장품도 많이 없었다. 그나마 출토된 부장품도 질이 확연히 떨어진다. 결정적으로 발견된 시기가 하필이면 1939년, 시기가 시기였던지라 조용히 묻혔다. 유명하지 않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15] 가장 안쪽은 투탕카멘의 가면이다.[16] 향유가 굳어서 시꺼멓게 변해버린 모습을 볼 수 있다.[17]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투탕카멘의 미라를 만든 사제들이 미숙한 초보들이 아니었나 의심하기도 한다. 파라오의 미라를 만드는데 이런 실수를 저지르는 일은 보통 흔치 않기 때문이다.[18] 만약 머리뼈 조각이 투탕카멘이 살아있을 당시에 부서져 떨어져나온 조각이라면 이 뼛조각은 미라 제작 과정에서 부어진 향유에 묻혀있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뼛조각은 따로 떨어진 채로 발견되었고, 고고학자들은 아마 미라 붕대를 푸는 과정에서 실수로 떨어진 조각이라고 결론내렸다.[19] 투탕카멘은 열성 적혈구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서 말라리아에 상대적으로 더 취약했을 것이라고 한다.[20] 투탕카멘의 미라가 무덤 밖으로 나와있던 시간은 1922년 이래로 지금까지도 1년이 채 되지 않는다. 다른 부장품들은 모두 무덤 밖으로 꺼냈어도 미라만큼은 무덤에 고이 보관하는 중이다.[21] 고대 이집트 파라오들 중 유일하게 단 한번도 도굴당하지 않은 무덤은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 밖에 없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22] 투탕카멘은 처음에 투탕카톤으로 즉위했다가 종교 회귀와 함께 투탕카멘으로 이름을 바꾸었다.[23] 신관들은 전차의 중심축이 좁은 무덤 입구를 들어가지 못하자 아예 축을 반으로 잘라서 집어넣었고, 도굴꾼들이 쳐들어와서 보물을 찾다가 전차들을 모조리 헤집어놓는 통에 매우 어질러져 있었다.[24] 이집트 당국이 아예 유물 하나하나마다 사람을 붙여서 워낙 철저하게 투탕카멘의 무덤 발굴 작업을 감시한 덕에 유물들이 그나마 온전히 이집트에 남을 수 있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상당수 유물들이 카나번 경이나 유럽 수집가들의 밀실로 팔려갔을 가능성이 크다.[25] 플루타르크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트럼펫 소리가 마치 세트 신의 울음소리 같다고 불길하게 여겨 쓰지 않았다는 기록을 남겼다.[26] 다만 아마르나 시대의 전통인 귓불에 구멍을 뚫은 흔적이 있는 등 투탕카멘 본인의 것이라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