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rc~en~Ciel/역사

덤프버전 : r20200302

파일:나무위키+상위문서.png   상위 문서: L'Arc~en~Ciel


1. 1991~1994
2. 1994~1996
3. 1997
4. 1998
5. 1999
6. 2000
7. 2001
8. 2002~2003
9. 2004~2005
10. 2006
11. 2007~2008.06
12. 2008.06~2010
13. 2011~2012.06
14. 2012.06~2015
15. 2016
16. 2017~현재


1. 1991~1994[편집]


1991년 오사카에서 Byston-Well 출신의 tetsu를 중심으로 결성했다. 원년 멤버는 tetsu, hiro 그리고 Jelsarems Rod 출신의 hyde와 pero였다. 그들은 난바 로켓츠에서 열린 첫 결성 라이브부터 120~130명의 관객을 동원할 정도로 많은 인기를 몰고 다녔으며 데뷔부터 인디씬에서 광풍을 일으켰다. 그들은 오사카 지역을 빠르게 석권하고 92년 3월에는 관동 지역에도 진출했다. 그리고 콜롬비아에서 발매된 옴니버스 앨범 Gimmick에도 참가하여 현재 <Dune> 앨범 수록곡인 Voice가 수록되었다.

하지만 동년 6월, 앨범 레코딩을 앞둔 상태에서 기타 hiro가 음악성 차이를 이유로 돌연 탈퇴를 선언했다. 그러자 tetsu는 같은 Byson-Well 출신이자 의 학교 선배 겸 동네 친구인 ken을 영입했다. ken의 영입 전에도 tetsu가 ken이 만든 데모 테잎 등을 hyde에게 들려줬기 때문에 hiro가 탈퇴하자마자 바로 ken을 떠올렸다고 한다.

ken은 당시 휴학하고 취업준비생으로 대기업 건설회사의 1차 면접에 합격했기 때문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이내 밴드에 참가했다. 원래 hiro의 영향으로 상당히 어둡고 하드한 음악을 지향했으나 ken이 들어오면서 Claustro Phobia같은 곡들을 편곡하여 Shutting from the sky같은 곡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음악적 변화가 있었다. 그 후에 곧바로 싱글 Flood of Tears를 1,000장 한정 판매를 시작하였는데 예약만으로 모두 품절 되었다. 당시에 라르크는 나이트 갤러리라는 인디 레이블에서 Floods of tears / 夜想花를 발매했는데 완성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발매를 하지 않으려 했다가 위약금 문제에 발목이 잡혀, 어쩔 수 없이 발매를 하였다.


기억의 파편(1992)[1]
이후 하이도의 보컬이 마음에 들었던 X JAPAN요시키가 운영하던 EXTASY RECORDS와 오오이시 마사히로의 DANGER CRUE(현 MAVERICK DC GROUP)가 라르크를 영입하기 위해 접촉을 시작했다. 당시에 DANGER CRUE는 소속 밴드 4팀에 직원이 겨우 4명인 소규모의 사무소였으며, 엑스타시는 X의 성공을 발판으로 날으는 새도 떨어뜨릴 위세였기 때문에 팬들 사이에서는 엑스타시로 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라르크는 아티스트에 대한 대우가 만족스러운 DANGER CRUE를 선택했다. 물론 당시에는 DANGER CRUE행이 꽤 논란이 되었다.[2] 이후 엑스타시는 라르크 대신 다른 밴드를 영입하였는데 바로 GLAY.

당시 DANGER CRUE의 오오이시 사장은 같은 오사카 출신인데 라르크의 데모 테잎을 보면서 지역 번호가 오사카를 뜻하는 06임을 보고 좋은 예감이 들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라르크를 만나기 전에 점을 봤는데 '서쪽에서 귀인이 올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후 '관서'에서 온 하이도를 보고서 잘생긴 외모 등을 보고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동년 12월 30일, 드럼의 pero가 밴드 연습에 점점 결석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결국 멤버, 소속사와 상의하여 탈퇴했다. 그리고 tetsu는 해를 넘겨 93년에 새로운 드러머인 도쿄 출신의 sakura를 영입하고, 라르크는 앨범 DUNE을 발매했다. 앨범 DUNE이 오리콘 인디즈 차트 1위를 달성하면서 순식간에 3만장을 판매하며 인디즈를 장악했다.

CLOSE BY DUNE 투어가 성공적으로 마치자 메이저 레이블 회사들이 라르크와 계약을 하기위해 컨택했다. 하지만 그들은 바로 계약하지 않았는데 어정쩡하게 계약해서 상경하는 것보다 오사카에서 최고가 되어 몸값을 높이는 편이 더 눈에 띌거라는 tetsu의 전략이었으며 그것은 제대로 먹혀들었다. [3]라르크는 투어가 끝나자마자 또다시 FEEL OF DUNE 투어를 실시하여 입지를 굳건히 하고 이듬해에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 산하 레이블인 Ki/oon Sony Records와 계약을 체결, 노스텔지아의 예감(ノスタルジーの予感)을 마지막으로 인디 생활을 마무리하고 도쿄로 상경했다. 노스텔지아의 예감 마지막 라이브에서는 인디즈에서 제일 많이 고생했던 hyde와 tetsu가 서로 포옹했다. 그 해 7월에는 비디오 싱글 眠りによせて(잠에 기대어)를 발매 하면서 메이저에 데뷔했다.

2. 1994~1996[편집]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09cc487d035d70501814ff002849bc5e.jpg

같은 해, 그들은 D.N.A 2기의 타이업을 받으며 싱글 Blurry Eyes를 발매하고 성공적으로 메이저에 안착했지만 투어 Sense of time의 파이널 공연이 매진이 되지 않았다. 라르크는 지금까지 레코딩과 프로모션을 스스로 해오면서 대부분 공연들을 매진시켰다. 메이저로 진출하면서 효율적으로 밴드를 운영하기 위해서 프로모션 업무를 소속사에 맡겼으나 일처리가 시원찮아 결과적으로 매진을 하지 못했다. 이 때부터 그들은 초심으로 돌아가 인디즈 시절처럼 기획부터 레코딩, 프로모션까지 모든 일을 주도했다. 라이브 하우스 투어를 돌거나 레코딩을 효율적으로 단시간에 제작하는 등 멤버들이 총괄하는 체제가 이 시기에 완성되었으며 현재도 이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10월에는 Tierra의 수록곡 Blurry Eyes는 리컷 싱글화 되는 동시에 애니메이션 D.N.A 2기에 타이업 되어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려나갔다. 데뷔 싱글 <Blurry Eyes>는 이전에도 현재도 앞으로도 라이브에서 빠질 수 없는 곡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실 Blurry Eyes의 타이업은 소속사에서만 진행되었던 일이며 멤버들도 나중에 알았다. 멤버들은 애니메이션 타이업을 탐탁치않게 여겼지만 어쨌거나 이 타이업으로 대중적으로 이름을 알린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95년 초에는 팬클럽 Ciel이 정식으로 발족되고 동년 9월, 두번째 앨범 heavenly를 발매했다. 이때부터 그들은 <Tierra>까지 추구했던 신비로운 사운드에서 유럽 쪽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모던 록, 아이리쉬 록으로 스타일 전환에 들어갔으며 이전보다 화장도 많이 옅어지고 머리도 풀고 집시스러운 복장에서 탈피했다. 그 결과, <heavenly>는 처음으로 오리콘 차트 5위에 진입하면서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일본의 대표적인 음악 방송 뮤직 스테이션(약칭 엠스테)에 첫 출연을 했다. 당시에는 엠스테에 출연하면 앨범 판매량이 급증하는 일명 '엠스테 효과'가 있을 정도로 파급력이 컸다.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이 때 멤버들은 극도로 긴장한 상태라 모두 표정이 경직되었다.

heavenly로 가능성을 보게 된 라르크는 TOUR heavenly '95 FINAL에서 처음으로 일본무도관에 입성했다. 일본 음악계에서는 무도관에서 공연해야 그때부터 대외적으로 메이저 가수로 인정받았으며 현재도 일본무도관은 밤하늘의 별보다 많은 일본 가수들의 염원을 상징하는 메이저 시장의 등용문이다. 무도관 공연에서는 켄이 무대에서 크게 넘어지는 사고가 있었다.

하이도는 이전까지는 음악만 할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했기 때문에 대중적으로 큰 욕심이 없었다. 그러나 메이저 시장에서는 인기가 없으면 하고싶은 음악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결국 하이도는 이듬해에 회심의 역작을 만들게 되는데 지금도 일본에서 라르크 최고 인기 곡으로 꼽히는 flower였다. heavenly보다 더 밝으면서 본격적인 팝 록으로의 변신을 시도했던 첫 작품이었다. 라르크는 싱글 flower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첫 밀리언 셀러 작품인 앨범 True를 발매하면서 브레이크를 시작했다.

True 앨범은 이전보다 팝 성향이 많이 짙었지만 퀄리티가 뛰어나 대중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 첫 등장은 2위였지만 발매 6주만에 1위를 차지했다. 이후 110주동안 차트에 머물면서 97년에는 결국 밀리언 셀러를 달성한 역주행 신화의 앨범이었다. 앨범 True는 97년에만 100만장을 팔았고, 98년까지도 착실히 팔리면서 종합 140만장 이상을 팔아 치웠다. 그렇게 탄력을 받은 라르크는 처음으로 시도한 아레나 투어 Tour 96-97 Carnival of True를 성황리에 마치며 톱 아티스트를 향한 왕도를 걷고 있었다.그런데...


3. 1997[편집]


2월 말 드럼의 sakura가 각성제 소지 혐의로 긴급 체포되었다. 당시 투어를 마친 라르크는 새로운 작품을 준비하고 있었다. 훗날 하이도의 자서전에서는 sakura가 이전에도 약을 흡입했던 경험이 있었고[4] 이상하게 지각이 많았다고 한다. 결국 3월 발매예정이었던 the Fourth Avenue Café는 취소 되었고 타이업인 바람의 검심에서도 다른 곡으로 교체되었다. 뿐만 아니라 앨범 레코딩, 팬클럽 이벤트, 후지 록 페스티벌 등의 모든 스케줄이 모두 캔슬되고 당분간 활동 중지 상태에 들어갔고 언론은 매일 라르크를 공격했다. 하이도는 이 때 정말 큰 충격을 받아 눈물로 밤을 지새우며 원형 탈모에 몸무게가 45kg도 되지 않았다.

사실상 3인 체재가 된 라르크는 와신상담 차원에서 언론의 눈을 피하기 위해 같은 소속사 선배 yukihiro를 세션으로 영입하고 유럽에서 체류 및 레코딩을 진행했다. 다큐영상 reel1reel2 그리고 10월에 7번째 싱글 虹(무지개)를 발매했다. 이름을 虹(무지개)라고 짓게된 이유는 7번째 싱글이면서 새롭게 출발하자는 의미로 하이도가 밴드명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그렇게 지었다고 전해진다. 가사에 숨겨진 또다른 의미로는 '비(현재의 위기)가 개이고 하늘에 떠오르는 무지개'가 있었다. 싱글 <虹>는 70만장 이상을 팔아 치우며 대성공했다.

11월 4일 sakura가 정식으로 탈퇴하고 12월에 멤버들은 라르크의 카피밴드 the Zombies를 자칭하며 워밍업 차원에서 도쿄, 오사카에서 라이브를 개최했는데 DIVE TO BLUE, LORELEY, winter fall같은 신곡들을 일부 공개했다. 그리고 12월 23일에는 최초로 도쿄 돔에서 부활 라이브 1997 REINCARNATION을 실시했는데 55,000석이 4분만에 매진했으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날은 오프닝 곡과 엔딩 곡으로 모두 虹(무지개)가 연주되었다. 그리고 연말에는 톱 아티스트들만 나온다는 뮤직 스테이션의 연말 방송인 슈퍼 라이브 '97에 첫 출연하면서 성공적인 부활을 알렸다.


4. 1998[편집]


파일:external/img.auctiva.com/332765484_o.jpg

1월 1일에 yukihiro가 정식 멤버로 가입했다. 유키히로의 가입은 세션으로 들어올 때부터 이미 결정됐기 때문에 별도의 오디션은 없었다. 그의 가입으로 라르크의 음악은 큰 전환기를 맞이했다. sakura 탈퇴 전의 음악이 모던 록을 표방했다면 이후로는 장르의 폭을 넓히고자 하드 록, 펑크 록, 인더스트리얼, 테크노 등을 시도하거나 사이키델릭한 사운드를 넣는 모습을 보였다. 도쿄돔의 대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라르크는 재충전 기간동안 만들어놓은 신곡들을 차례차례 발매했다. 1월 28일에 8번째 싱글 winter fall을 발매하면서 오리콘 싱글 차트에서 싱글 첫 1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2월 25일에 5번째 앨범 HEART를 출시하여 오리콘앨범 차트에서 앨범 첫 1위를 차지했고 또다시 밀리언 셀러를 달성했다.

3월 25일에는 연이어 9번째 싱글 DIVE TO BLUE를 출시하여 오리콘 1위를 달성했다. DIVE TO BLUE는 우리나라로 따지면 KT급 통신사인 NTT의 타이업을 받아 대대적인 프로모션을 벌였고 처음으로 CM에도 출연했다. 여담으로 DIVE TO BLUE는 7년뒤에 윤하의 My Lover가 표절 논란에 휩쌓였던 사실이 있다. 3월 31일부터 4월 5일까지는 팬클럽 한정 이벤트 '하와이 앙 시엘'을 개최했다. 여기서 하이도는 호놀룰루의 석양을 보면서 라르크 최대의 히트곡인 HONEY를 작곡했다. 그리고 5월 1일부터 7월 21일까지 (총 37공연) 홀 투어 Tour'98 ハートに火をつけろ! 를 실시했다. HEART의 수록곡들과 신곡들을 위주로 연주했으며 True 이전의 곡들은 이때부터 비중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7월 8일에는 세 장의 싱글 HONEY, 浸食 ~lose control~(침식)[5], 花葬(화장)[6]을 동시 발매했다. 이 날은 같은 날에 출시되는 B'z의 Home과 정면으로 맞붙었는데 첫 주에는 B'z에 1위를 내주고 2,3,4위를 나란히 차지했으나[7] 바로 다음주 차트에서 HONEY가 1위를 탈환했다. 그리고 오리콘 차트 월간 1위, 2위, 4위를 기록하며 한 아티스트의 싱글이 한 월간 차트에 등장한 것으로는 최다라는 기록을 세웠다.[8] 침식과 화장은 오리콘 3,4위의 역대 최고 초동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다. 확실히 이 동시발매를 기점으로 밴드 커리어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한 편, globe코무로 테츠야가 이에 영향을 받아 9월부터 wanna Be A Dreammaker, Sa Yo Na Ra, sweet heart, Perfume of love를 연속으로 발매했다.

앨범 1장과 싱글 2장의 성공시키고 싱글 3장을 밀리언 히트, 홀 투어도 성공적으로 마친 라르크는 9월 1일부터 10월 21일까지 오사카 돔 공연과 요요기 제1경기장을 포함한 Tour'98 ハートに火をつけろ!의 추가 공연을 결정했다. 함께 10월 7일에 발매한 snow drop과 10월 14일에 발매한 forbidden lover는 나란히 오리콘 1위, 2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특히 snow drop은 globe의 4연작 마지막 싱글인 Perfume of love를 꺾음으로서 globe의 4연속 1위를 저지하였다.[9] 그리고 현재까지 HONEY, HEAVEN'S DRIVE 이후로 최고의 히트 싱글이 되었다.

Tour'98 ハートに火をつけろ!는 5월 1일부터 10월 21일까지 총 56회 공연, 23만명 동원을 하면서 성공적으로 투어를 마쳤다. 홀 투어로 시작했지만 워낙 반응이 뜨거웠기 때문에 급하게 추가 공연을 결정하면서 규모가 훨씬 큰 아레나, 돔에서 투어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1998년 한 해 동안 앨범 1장, 싱글 7장을 발매하고 모두 대히트를 쳤다. 특히 싱글 7장은 모두 오리콘 연간차트 30위 안에 드는 경이로운 성적을 이룩하기도.[10] 당시 일본에 불었던 록밴드 열풍은 라르크의 기세와 맞물려 그들의 상승세를 가속화시켰다. 그리고 98년 연간 판매량 2위의 성적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했다.[11]

97년부터 스노우 볼을 굴리기 시작한 라르크 앙 시엘은 점점 몬스터가 되어갔다. 멤버들과 소속사, 레코드 회사는 상업적인 성공을 밑바탕으로 여러가지 모험을 하면서 큰 재미를 보았다. 그들은 물불가리지 않고 미디어 노출을 최대한 많이 하는 등 프로모션도 활발했고 가장 의욕넘친 시기였다. 이 때부터 언론은 HOWEVER로 스타덤에 오른 GLAY의 라이벌 밴드로서 라르크를 띄우기 시작했다. 연말에는 제 31회 일본 유선 대상에서 전일본 유선 방송 대상과 골든 리퀘스트 가수상을 수상, 일본 레코드 대상 우수 작품상을 수상했다. 마지막으로 12월 31일에는 NHK 홍백가합전의 첫 출전의 영광을 누렸다.

5. 1999[편집]


파일:external/oi65.tinypic.com/2mdm6x4.png

라르크의 다음 행보가 궁금해진 언론들은 '올해에는 베스트 앨범을 발매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새해부터 방송에서 카운트다운 음주 라이브로 시작한 라르크는 유럽에서 충전의 시간을 가지고 HEAVEN'S DRIVE와 Pieces의 PV 촬영을 위해 미국으로 갔다. 그리고 3월 1일, 일본으로 돌아와 골든 애로우상 음악상과 대상을 수상, 3월 3일에는 일본 골든 디스크 대상에서 花葬(화장), HONEY, snow drop이 song of year상을 수상, 앨범 HEART가 rock album of the year를 수상했다. 4월 18일에 런던하츠에 고정 출연이 결정되고, 방송을 통해 새 싱글을 포함하여 sell my soul, trick, 죽음의 재, it's the end, butterfly's sleep같은 신곡들을 공개했다. 4월 21일에는 15번째 싱글 HEAVEN'S DRIVE를 출시했다. 논 타이업이었지만 곡 퀄리티가 좋았고 대중성도 있었기 때문에 무난하게 밀리언 셀러와 오리콘 1위를 달성했다. 당시 CM으로 소속사 탤런트 유스케 산타마리아, 카자마 모리오 등을 기용하여 화제가 되었다. HEAVEN'S DRIVE는 HONEY 다음가는 히트곡이 되었다.

6월 1일, 16번째 싱글 Pieces를 발매했다. <Pieces>의 드라마틱한 PV는 꽤 화제가 되었고 SPACE SHOWER Music Video Awards 99 BEST VIDEO OF THE YEAR를 수상했다. aiko가 라디오에서 이 곡을 커버하기도 하였다. Pieces는 라르크 최고의 발라드 곡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발매된지 20년을 바라보는 지금도 앵콜 파이널 넘버로 자주 연주되고 있는 곡이다. yukihiro는 이 시기에 오른쪽 팔을 잠깐 다치게 되는데 Pieces의 TV 프로모션에는 깁스를 하고 나왔다.

메이저 데뷔작 眠りによせて의 발매 5주년이 되는 99년 7월 1일에는 노스트라다무스의 대예언에 맞춰 일본뿐만 아니라 대만, 홍콩,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필리핀 등 아시아 7개국에서 앨범 ark와 ray를 동시 발매했다.[12] 싱글도 아닌 정규 앨범을 2장으로 동시 발매하는 파격적인 행보는 또다른 패러다임을 만들었다. 그렇게 두장으로 660만 이상을 판매하여 ark와 ray는 둘다 더블 밀리언을 돌파하는 위업을 달성하면서 전설이 되었다.

이어서 7월 17일부터 8월 21일까지 전무후무한 대규모 야외투어 1999 GRAND CROSS TOUR를 실시했다. 총 6개 도시, 12공연으로 총 65만명을 동원했으며 도쿄 공연에서만 이틀 25만명을 동원했다. 앨범이 동시에 2장이 발매된 만큼 세트 리스트도 특이점이 있었는데 지역별로 이틀을 기준으로 첫째날은 ark의 곡을, 둘째날은 ray의 곡을 중심으로 공연을 했다.[13] 투어 파이널은 채널V를 통해 아시아 7개국에 생중계되어 전세계적으로 1억 뷰를 돌파했다. 이 때 사용된 무대 세트는 카와사키 중공업에서 특수 제작하였는데 미러볼 모양으로 공연 개/폐장 때마다 열고 닫을 수 있어 매우 획기적이었다.[14] 하지만 티켓팅이 끝나고 오사카 공연때 코스모 스퀘어의 지형이 물에 잠기면서 지형이 바뀌어버리는 바람에 땅을 메꾸기 위해 투어 비용을 전부 투자하는 과정에서 유일하게 적자가 난 투어였는데 그 단위가 몇 십억엔이었다고 한다.

8월 11일에는 리컷 싱글인 Driver's High를 발매했다. GTO(만화)의 타이업을 받아 많은 인지도를 얻게 해준 대표곡이었으며 <반항하지마!>로 방영된 한국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과장을 조금 섞자면 라르크는 몰라도 GTO의 OST인 Driver's High는 안다고 할 정도라 할 수 있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라이브 필수 업 템포 곡이다. 10월 27일에는 싱글 LOVE FLIES를 발표, 캐논 WonderBJ의 타이업 되고 멤버들도 CM에 출연했다. 12월 7일에는 베스트 드레서 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12월 31일, NHK 홍백가합전에 2번째로 출전했다. 같은 날 홍백가합전 스케줄을 마치고 전세 헬기로 날아가 도쿄 빅사이트 전시장에서 카운트 다운 라이브 RESET>>LIVE *000를 실시, 총 5만명을 동원했다. 이 날, 신곡 NEO UNIVERSE와 finale가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불과 메이저 데뷔 5년만에 그들은 일본 음악의 주류를 대표하는 밴드로 성장했다. 또한 일본뿐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인기가 많아져 하이도, 테츠야가 태국에 방문하는 등 아시아를 위한 프로모션에 공을 들였다. NEO UNIVERSE와 함께 희망찬 미래를 노래하면서 새로운 밀레니엄을 그렇게 맞이했다.

6. 2000[편집]


파일:external/oi67.tinypic.com/28s7r44.png

1월, 공식 팬클럽 Ciel이 LE-CIEL로 개명하였다. 그리고 1월 19일, 더블 A면 싱글인 NEO UNIVERSE / finale를 발매하고 밀리언 셀러를 달성했다. 지금까지 이 작품이 그들의 마지막 밀리언 셀러 싱글이다. NEO UNIVERSE는 시세이도 삐에누의 CM송을 맡게 되었으며 finale와 커플링 곡 hole도 영화 링0 ~바스데이에 타이업 되면서 큰 화제를 모았다. finale의 PV는 하와이에서 촬영 하였는데 멤버들은 촬영 도중 고산병에 걸렸다고 한다. 3월에는 HEAVEN'S DRIVE가 일본 골드 디스크 대상 SONG OF THE YEAR를 수상, 싱글 NEO UNIVERSE와 앨범 ark, ray는 일본 골드 디스크 대상 ROCK ALBUM OF THE YEAR를 수상했다.

잠시 재충전을 가진 뒤 6월 28일, 그동안 yukihiro가 담당해왔던 리믹스 분야의 총 본산인 리믹스 앨범 ectomorphed works를 발매, 그리고 7월 19일에는 6개월만에 싱글 STAY AWAY를 발표했다. 발매 당일에는 사잔 올 스타즈의 Hotel Pacific과 GLAY의 Mermaid와 경합을 벌이게 되었는데 큰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결국 STAY AWAY는 오리콘 2위로 아쉬운 결과를 맛보았다. 하지만 판매량으로 따지면 밀리언은 못했지만 73만장 정도로 나쁜 판매량은 아니었다.

8월 30일에는 1년 1개월만에 앨범 REAL을 발매했다. 사운드는 훨씬 하드해졌으며 정확히 구분짓기 어려운 다양한 장르를 채용하였다.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하고싶은 음악을 마음껏 만들어낸 <REAL>은 ark, ray보다 확실히 대중성이 떨어졌기 때문에 당시 팬들 사이에서 괴리감을 느끼는 앨범이었으며 판매량도 전작에 비해 반토막이 났지만 퀄리티는 ark, ray에 견줄만한 명반이었다. 당시 tetsu 작사 작곡의 수록곡 bravery는 과거만 생각하는 팬들에 대한 질타성 메시지여서 많은 화제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REAL을 기점으로 hyde의 창법이 허스키한 중저음 창법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10월에는 5년만에 라이브 하우스 투어인 CLUB CIRCUIT 2000 REALIVE를 실시, snow drop의 PV에서도 쓰인 적이 있던 블렛 타임 기법을 라이브에서 활용하기 위해 200대의 카메라가 설치되었다. 이어서 11월 4일부터 12월 6일까지 4대 돔 투어 TOUR 2000 REAL을 실시하고 40만명 이상을 동원하였다. 이 때 hyde와 ken은 LE-CIEL 화보 촬용을 위해 카 레이싱 도중에 갈비뼈를 다쳐 투어에서는 둘 다 복대를 차고 나왔다. 12월 6일자 도쿄돔 파이널은 SKY PERFECT TV를 통해 생중계 되었으며 채널을 5개로 분할하여 L'Arc~en~Ciel Channel, hyde Channel, ken Channel, tetsu Channel, yukihiro Channel로 방송되었다. 도쿄돔 공연 중에 hyde는 당시 약혼자였던 오오이시 메구미를 위해 만든 신곡(新曲)인 Anemone를 첫 공개했다.

투어가 끝난 후 12월 23일, 싱글 STAY AWAY가 SPACE SHOWER Music Video Awards '00 BEST GROUP VIDEO와 BEST VIDEO OF THE YEAR를 수상했다. 당시에 라르크는 화보 촬영을 위해 해외에 있었기 때문에 위성중계로 수상소감을 전달했다. 12월 25일, 하이도가 98년 우타방에서 첫 만남을 가지고 오랫동안 교제를 하고 있었던 아나운서 오오이시 메구미와 크리스마스에 비공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에 하이도의 인기는 상상 그 이상이었기 때문에 비슷한 시기의 기무라 타쿠야의 결혼과 더불어 엄청난 화젯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12월 31일 NHK 홍백가합전에 3년 연속 출전하면서 20세기를 마무리 지었다.

7. 2001[편집]


갑작스러운 활동 중단

2001년 3월 14일, 베스트 앨범 Clicked Singles Best 13을 릴리스했다. 아시아 8개국(일본 , 중국 , 대만 , 홍콩 , 태국 , 싱가폴 , 말레이시아 , 필리핀)에서 투표를 실시하여 상위 투표곡을 위주로 수록곡이 이루어졌으며 돔투어에서도 공개된 바 있었던 신곡 Anemone가 포함되었다. 현재까지 이 베스트 앨범이 마지막 밀리언 셀러 작품이다. 그리고 3월에는 앨범 REAL이 일본 골드 디스크 대상 ROCK ALBUM OF THE YEAR를 수상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살인 스케줄로 인해 지친 멤버들은 누적된 스트레스와 함께 활동 의욕을 잃었다. 하이도는 라르크 앙 시엘에서 자신의 음악을 마음껏 할 수 없다고 생각, 솔로 활동의 욕구가 생겼다. 어느정도 궤도에 오른 밴드라면 한번쯤은 반드시 생기는 과정이었다.그리하여 hyde의 제의로 멤버 4인은 각자 hyde(hyde), TETSU69(tetsu), SONS OF ALL PUSSYS(ken), acid android(yukihiro)로서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베스트 앨범 발매 후의 일반적인 행보라고 할 수 있겠으나 hyde는 자서전을 통해 2001년 초에 휴가를 틈타 영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첫 솔로 앨범 작업을 마친 후에 밴드의 탈퇴 의사를 멤버들에게 편지로 전달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처음에 멤버들은 이에 수긍, 라르크 앙 시엘로서 마지막 투어를 가지고 해산을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으나, 도중에 멤버들이 마음을 바꿔 해산을 반대했다. 그럼에도 hyde는 탈퇴 의사를 꺾지 않았고, 기어이 tetsu가 나서서 hyde의 고충을 들어준 뒤 적극적으로 설득한 끝에 탈퇴를 번복시켰다. 결국 밴드를 유지하기 위해서 솔로, 라르크를 병행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만약 병행 활동이라는 처방이 없었다면 hyde의 탈퇴와 함께 라르크의 역사는 여기서 마침표를 찍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기한 내용은 10년 뒤에 밝혀진 사실이며, 당시에는 공식 홈페이지나 뉴스를 찾아봐도 REALIVE 영상화나 베스트 앨범 뿐 팬들은 말그대로 공황상태였다. 1년 스케쥴 알차게 꽉꽉 채우면서 활동하다가 갑자기 활동이 뜸해지니 그 상황에서 해체설이 떠오르는 것은 둘째치고 최소 밴드 내부적으로 문제가 생겼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시에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여러 밴드들이 이런 식으로 활동 중지를 하거나, 기약없는 솔로 활동으로 빠지거나 해산을 하는 일이 부지기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7월, tetsu는 TETSU69 명의로 가장 먼저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더블 A면 싱글 wonderful world / TIGHTROPE를 발매하고 오리콘 차트 5위로 데뷔했다. TETSU69의 69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69가 아니다 자신의 출생년도 1969년도의 69, 의 일본어 발음 록쿠과 비슷해서 차용한 고로아와세. TETSU69는 보컬을 담당하면서도 베이스와 기타 모두 담당하는 특이한 포지션이었다.

솔로 활동이 결정되고 깜깜 무소식이었던 라르크는 8월 27일, 파이널 판타지: 더 스피릿 위딘 상영회 마지막에 라르크 멤버들이 신곡과 함께 오랜만에 깜짝 등장하여 회장은 그야말로 흥분의 도가니에 휩쌓였다. 이 때, ken은 사비 직전에 기타에 불꽃이 나가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는데 그 불꽃이 옆에 있던 스태프에게 튀었다.

이어서 9월 5일, 1년 2개월만에 파이널 판타지: 더 스피릿 위딘 타이업의 일환으로 21번째 싱글 Spirit dreams inside -another dream-을 발매하고 뮤직 스테이션에도 출연했다. 그러나 그 것이 활동 재개까지 마지막 활동이었다. 사실 내부 사정으로 인하여 발매 자체도 불확실했던 작품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앨범은 팬들의 결집이 두드러지면서 초동 판매량이 매우 높았는데, 이때문에 같은 주에 싱글 Another World를 발매하며 정면대결을 했던 각트는 결국 싱글차트 2위를 기록하면서, 1999년 이후로 3년만에 찾아왔던 오리콘 싱글차트 1위의 기회를 다음으로 기약할 수 밖에 없었다.

9월 27일에는 yukihiro가 싱글 ring the noise로 두번째로 데뷔, 10월 17일에는 hyde가 HYDE라는 이름으로 싱글 evergreen을 발매하고 오리콘 차트 1위로 세번째로 데뷔하면서, 멤버 중에서 솔로 아티스트로서의 그 입지를 증명했다. evergreen은 이전에 라르크로서는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색다로운 발라드 록이었다. hyde는 이런 장르를 고요한 록이라고 평가했다. 싱글 HONEY, HEAVEN'S DRIVE같은 락앤롤 넘치는 곡을 만들었다고 믿기 힘들 정도로 잔잔하고 애수가 흘러 넘치는 발라드였다. 하이도는 이 때 유니클로의 CM에도 출연해서 evergreen의 사비 부분을 맛깔나게 불렀다.


유니클로 CM (hyde)

8. 2002~2003[편집]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0756b0d7fcd539808686758cee854f74.jpg

2002년 3월 13일에는 라르크의 베스트 앨범 Clicked Singles Best 13이 일본 골드 디스크 대상 ROCK ALBUM OF THE YEAR를 수상했다. HYDE는 솔로 활동을 계속 이어나갔다. HYDE는 2002년 3월에 1집 앨범 ROENTGEN을 발표, 오리콘 차트 5위를 달성했다. evergreen도 그랬지만 앨범 ROENTGEN은 10곡 모두 라르크 시절과는 판이하게 곡들뿐인 그런 앨범이었다. 얼마 안있어 HYDE는 영화 MOON CHILD를 제작에 참여하면서 2001년부터 이어오던 1집 활동을 마친다.[15]

HYDE의 1집 활동이 끝나자 다른 멤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2002년 여름에는 그동안 조용하던 ken이 SONS OF ALL PUSSYS라는 밴드를 결성했다. 이는 당시에 큰 화제가 되었는데, 함께 하는 멤버 중 하나가 전 드러머 sakura였다. sakura는 라르크 탈퇴 후에 ZIGZO라는 밴드에서 활동 중이었으나 2002년 해체 후에 ken과 함께 하게 되었다.

SONS OF ALL PUSSYS는 보컬과 기타의 ken, 베이스는 모델 출신이자 라르크의 뮤직비디오에도 출연 경력이 있는 ein, 드럼의 sakura로 라이브 활동을 하면서 인디즈에서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 2003년에 미니 앨범 GRACE를 발매, 섬머 소닉에 참전을 비롯하여 BUBBLE FESTiVAL을 열어 HYDE와 acid android가 참가하는 등 많은 라이브 활동을 했다.

TETSU69도 1년만에 싱글 蜃気楼(신기루)를 발표, 오리콘 3위로 데뷔했다. 원래 이 곡은 라르크의 신곡으로 염두에 두고 작곡을 했으나 활동 중지 상태였기때문에 부득이하게 솔로 활동의 곡으로 발표하게 된다. 여기서 TETSU69는 finale의 PV에서 쓰인 그 베이스를 사용했다. 베이스를 치던 TETSU69답게 베이스 솔로가 존재하는 곡이다. 이어서 2002년 11월에는 앨범 SUITE NOVEMBER를 발매, 오리콘 5위를 차지했다. 이후로 2003년 2월에 발매된 리컷 싱글 WHITE OUT ~memory of a color~ 이후로 TETSU69 이름으로 활동은 완전히 종료했다. 한 편, yukihiro는 솔로 명의를 acid android로 변경하고 본격적인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2002년 9월 25일에 앨범 acid android를 발매, 2003년 3월에는 투어를 실시했다. 2002년 11월에는 HYDE가 한국 엠넷의 초청을 받아 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드 참가를 위해 처음으로 한국에 방문했다.

2003년 3월에는 1년 반만에 라르크 소식이 나와 팬들을 설레게 하였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팬들이 기대했던 라르크의 활동 재개가 아니라 레코드 사에서 발매하는 추억 팔이용 베스트 앨범의 소식이었다ㅂㄷㅂㄷ 일은 라르크 멤버들이 솔로 활동에 전념하던 중에 은밀히 진행되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프로모션 활동이 전무했다. 나중에 이를 알게 된 tetsu는 이 앨범이 아니었으면 좀 더 빨리 활동 재개를 했을 거라는 여운깊은 말을 남긴다.망할 소니

영화 촬영으로 인해 1년 이상을 침묵해오던 HYDE가 GACKT와의 공동 주연을 맡아 수많은 여성팬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 영화 MOON CHILD의 개봉과 함께 6월에 싱글 HELLO로 돌아왔다. 이 때 HYDE는 TV 프로모션 중 각트와의 우정을 과시하며 화제가 되었다. 하이도와 각트가 이 때 찍은 화보는 15년이 지나도 사진으로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MOON CHILD에서 HYDE는 흡혈귀 케이 역을 맡았는데 이 때 생긴 흡혈귀 이미지는 몇년 후에 VAMPS의 컨셉 모태가 된다. 싱글 HELLO는 이전에 hyde가 많이 작곡해왔던 신나는 락앤롤이었으며 1년 반만에 오리콘 1위를 차지했다. 뿐만 아니라 S.O.A.P의 버블 페스티벌, ROCK IN JAPAN 2003 등 다양한 록 페스티벌에도 참가했다.

그리고 6월에는 HYDE의 소식과 함께 오랜만에 라르크의 진짜 소식이 찾아왔다. 그동안 기약도 소식도 없던 라르크가 6~7월 사이에 요요기 제 1 체육관에서 7일 라이브 SHIBUYA SEVEN DAYS를 실시하였다. 밴드의 내막에 대해 알지 못하던 팬들은 이 라이브가 해체전 마지막 라이브가 될 것이냐 부활 라이브가 될 것이냐 갑론을박이 있었다. 솔로 활동도 어느정도 2년째에 접어들었는데 아무 소식도 없던 라르크가 갑자기 레코드 사의 횡포로 그동안의 활동을 결산하는 느낌의 베스트 앨범 3장을 발매하더니 갑작스런 라이브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마지막 날의 커튼 콜에서는 진짜로 해산할 것 같은 느낌을 풍기면서 91년부터 2000년까지의 투어 목록이 주욱 나오면서 그렇게 끝나나 싶었지만 마지막에 2004년 라르크로서의 새 싱글과 앨범, 투어 계획을 발표했다. 당시 공연장은 그야말로 눈물바다였다. 다만 하이도의 목상태가 역대 최악이라 2006년까지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라이브가 끝나자마자 라르크 멤버들은 각자 솔로 활동을 마무리 지어갔고, 이어서 본격적인 새 앨범 레코딩을 시작했다.

2003년 11월 11일, hyde에게 아들이 생겼다. 남자아이로 2017년 기준으로 중2다. 이름이나 얼굴은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빼빼로 데이에 태어나 팬들 사이에서 일명 빼빼로군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2003년 12월에는 각트의 네번째 앨범 Cresent에 듀엣송 オレンジの太陽(오렌지 태양)에 참가했다. 그리고 2003년 12월 DANGER CRUE의 소속사 라이브인 天嘉[16]에서 라르크의 깜짝 출연과 함께 신곡 READY STEADY GO를 공개, 이어서 뮤직 스테이션 슈퍼라이브 2003에 3년만에 등장해 HONEY와 READY STEADY GO를 라이브하며 복귀 신고식을 마쳤다.

9. 2004~2005[편집]


파일:external/i65.tinypic.com/2u5ev0w.png

2004년이 밝자마자 라르크는 3년만에 활동을 개시했다. 먼저 2월에는 2년 7개월만에 발표한 싱글 READY STEADY GO로 오리콘 1위를 차지했다. 동시에 대한민국에서 제4차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계기로 Clicked Singles Best 13+2를 한국에 라이센스 출시하면서 이후에도 한국에는 지속적인 라이센스를 출시, 본격적인 해외 진출을 모색하게 되었다.

3월에는 tetsu의 첫 자서전인 哲学(철학, 테츠가쿠)를 발매했다. 그리고 READY STEADY GO에 이어 선행 싱글 瞳の住人(눈동자의 주인)을 발표, hyde의 아름다운 가성이 화제가 되었다. 이어서 31일에는 3년 반만에 앨범 SMILE을 발표했다. REAL 시절 레코딩되었던 곡들 + Spirit dreams inside + 2003년에 레코딩된 곡들이 모인 앨범으로서 라르크의 과거와 현재(?)가 모두 공존했던 그런 앨범이었다. 한 편, hyde는 3월 중순까지 앨범 666의 투어가 있었기 때문에 라르크와 병행 활동을 하였는데, 이로 인해 TV 프로모션에서는 심각하게 목상태가 좋지않았다.

이 날은 우타다 히카루의 베스트 앨범이 출시되어 오리콘 순위는 2위에 그치고 말았다. 하지만 앨범 SMILE은 복귀 이후의 앨범 중에서 가장 판매량이 높은 앨범이다. 하지만 너무 오래 쉬었던 탓인지 결국 SMILE은 앨범의 완성도가 이전보다 못하여 팬들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3년 반만에 발매된 앨범이었기 때문에 팬들은 발매해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앨범 SMILE의 발매와 동시에 4월에는 메이저 데뷔 10주년을 기념하여[17] Flood of Tears 싱글 버젼과 夜想花(야상화), 予感(예감) 등이 포함된 DUNE 10th Anniversary Edition을 발매했다.

그리고 초 여름에 접어들어 아레나 투어인 SMILE TOUR 2004를 시작했는데, DUNE의 재발매가 있었기 때문에 予感(예감)이 세트 리스트에 자주 올라오곤 하였다. 이 투어를 기점으로 P'UNK~EN~CIEL이 첫 등장했다. READY STEADY GO의 영향인지 이때부터 남팬이 눈에 띌 정도로 급격하게 늘어났다. 투어는 끝났지만 라르크는 계속해서 싱글도 발표하고 록 페스티벌 등에 참가하는 등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7월 말 미국 라이센스 레코드 사 Tofu두부의 일본어가 힘을 써준 끝에 OTAKON 2004에 라르크의 미국 공연이 결정되었다. Tofu는 당시 미국에서의 라르크 프로모션에 꽤나 공을 들이는 등, 10년 넘게 함께해 온 소니보다 일처리가 좋았다. 성공적인 북미 라이브를 계기로 북미뿐만 아니라 남미, 유럽 등지에서도 라르크의 해외팬은 더욱 급증하였으며 이미 존재하던 해외팬들은 해외 투어의 성사 가능성에 희망을 품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라르크 멤버들에게도 해외 공연은 그동안 염원하던 것이었다. 이 때의 성과는 나중에 라르크가 월드 투어를 돌 수 있게 해주는 밑거름이 되었다.

활동이 끝나고, ken은 SONS OF ALL PUSSYS로 돌아가 싱글 Paradise로 메이저에 진출했다. 동시에 밴드명의 선정성을 고려해 SOAP 명의로 프로모션을 돌게 된다. 해서 비누 밴드라는 별명이 생겼었다. 그리고 hyde는 꽤 예전부터 라르크의 팬이었던 쿠리야마 치아키나리미야 히로키와의 공동 출연의 영화 하현의 달의 개봉에 맞추어 ROENTGEN 영어 버젼과 PV 모음집인 ROENTGEN stories가 발표된다. 하현의 달에서는 이전 작품보다는 비중있는 역은 아니지만 메인 조연으로서 대사가 많이 없어서 다행인 분위기 있는 역할을 맡아 화제가 되었다. 그 중에서 흡연자 팬들은 극중 hyde가 피는 담배[18]를 따라서 사곤 했다. 이 영화를 끝으로 hyde는 영화출연에 대해서 창작에 대한 자극이 되었다고 하며 후회한 적이 없다고 밝혔지만 더이상 연기는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애니메이션 성우는 연기가 아닌건가

2005년에는 다시 정력적인 활동을 이어나가 1월은 싱글 Killing Me, 4월엔 New World, 5월엔 선행 싱글 叙情詩(서정시)를 발표했다. 연이은 싱글 발표를 통하여 작년보다 제법 퀄리티가 자리가 잡혔다는 평가를 받았고 특히 서정시는 ken의 역작으로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6월에 발매된 앨범 AWAKE는 hyde가 가장 공을 들인 앨범으로서 아직까지도 회자되고있는 앨범이다. 지금까지 라르크의 가사에는 공적인 주제보다 사적인 주제를 다루는 가사들이 대부분이었고, 앨범 컨셉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라르크는 처음으로 반전 노선를 테마로 잡아 앨범 컨셉으로 내세웠다. 앨범을 제작하면서 hyde는 음악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깨달았으면(AWAKE) 좋겠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앨범을 만들었다. 수록곡 중에 My Dear와 Ophelia가 인기가 많았는데, 이 곡들은 hyde가 원래 솔로 앨범 666에 넣을 생각으로 만들었지만 컨셉 문제로 제외시켰다는 뒷이야기가 있었다.

투어를 앞두고 7월에는 싱글 Link가 발매되어 오랜만에 20만장을 넘기는 히트곡을 만들었다. 2005년 8월에 앨범 투어를 마친 라르크는 9월이 되자마자 처음으로 해외투어 ASIA LIVE 2005를 실시했다. 라르크가 이번 해외투어를 대하는 마음가짐은 매우 전략적이었다. 오랜 시간동안 해외 라이센스를 통해서 각국의 인지도를 살핀 다음에 먼저 가장 인기가 가장 많은 한국과 중국을 공략하고 그 다음에 순차적으로 아시아 다음으로 유럽, 미국까지 노린다는 6~7년을 바라보는 계획이었다.

파일:external/pds1.egloos.com/c0057348_12272618.jpg

라르크는 ASIA LIVE 2005를 통해 대한민국 서울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첫 라이브를 가졌다. 라르크를 그동안 기다렸던 한국팬들이 많았기에 공항은 인산인해였고, 그 중에서 라르크가 타고 가는 차량을 택시로 쫓아가는 극성팬들이 있을 정도였다. 첫 한국 공연에서 라르크 멤버들은 열심히 한국어 MC를 준비해오는 등 성실한 모습도 보였으며 열광적인 반응에 많은 인상을 받아 다음에 또 올 것을 약속했다.[19] 한국 라이브에 이어서 상하이에서도 라이브를 가졌으며 일본으로 돌아와서는 5년만에 도쿄 돔에서 라이브를 실시했다. 이 라이브를 끝으로 라르크는 잠시 휴식 상태에 접어들고 hyde는 솔로 활동을 다시 시작해 싱글 COUNTDOWN을 발매했다. 그리고 나카시마 미카의 최고의 히트곡 GLAMOROUS SKY를 프로듀싱했다.[20]


10. 2006[편집]


파일:external/d2mdquvz3bkqq0.cloudfront.net/98d1c5ae.jpg

2006년은 라르크의 결성 15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러나 멤버들의 솔로 활동이 왕성했고 라르크의 소식은 잠잠했다. 이렇게 15주년이 조용하게 지나가나 싶었지만 8월 30일에 Blurry Eyes부터 forbidden lover까지 14 장의 싱글의 재발매와 미발매 싱글 the Fourth Avenue Café을 발매했다. the Fourth Avenue Cafe는 1997년 sakura 사건으로 취소되었던 리컷 싱글이었음에도 그 인기가 많았기 때문에, 이번 재발매로 많은 팬들의 염원을 풀어주었다. 이 재발매로 인해 15싱글이 모두 TOP30에 모두 진입함으로서 '동일 아티스트의 오리콘 싱글 차트 TOP30 진입'의 새로운 최고 기록을 갱신하였다. 이전 최고 기록은 2005년에 사잔 올 스타즈의 12 싱글 진입이었다.

그리고 데뷔 15주년을 맞아 11월 25, 26일에 도쿄돔에서 15th L'Anniversary Live를 실시했다. 이틀간 걸쳐지는 라이브의 110,000석을 2분만에 최단시간 매진시키며, 97년에 스스로 세운 기록을 스스로 다시 깨뜨렸다[21] 타임머신을 테마로 하여 볼거리도 매우 풍부했고, 발매조차 되지 못했던 인디즈 시절의 곡[22]부터 시대를 넘나드는 다채로운 라이브로 2004년 이후로 최고의 라이브 중 하나로 손꼽히며, 이 라이브를 기점으로 몰라보게 달라진 hyde의 라이브 실력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11. 2007~2008.06[편집]



15주년 라이브의 대성공으로, 한껏 기세가 오른 라르크는 2007년이 되자마자 폭발적인 릴리스를 시작했다. 그 해 5월에 발매한 SEVENTH HEAVEN, 8월에 발매한 MY HEART DRAWS A DREAM, 10월에 발매한 DAYBREAK'S BELL이 3연속 1위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2007년 6월 11일부터 8월 30일까지 9년만에 부활한 홀 투어 Are you ready?2007 またハートに火をつけろ!(다시 하트에 불을 지펴라!)를 실시했다. 전체적인 투어의 반응이 좋아 후지큐 하이랜드에서 이틀 동안 추가 공연을 실시, 양일 4만명을 동원했다. 파이널 공연은 98년 이후 9년만에 오키나와에서 공연을 가졌으며, 투어에서는 차기 앨범에 들어갈 신곡들이 대부분 공개되기도 했다. [23] 이 무렵에 hyde가 치아 교정을 했다.

또 투어 기간 중에 2007년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로 참전, 2년만에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 락 페스티벌 헤드라이너로서는 일본인은 최초였다. 원래 97년과 2000년에 후지 록 페스티벌의 오퍼가 있었지만 사쿠라 사건, 하이도/켄의 골절사고로 거절해왔다. 하지만 후지 록 페스티벌 측을 담당하는 공연기획사 스매쉬에서는 한국의 펜타포트와 협력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제안을 바꿔 펜타포트의 헤드라이너를 제안했고 라르크가 수락하면서 일본인 최초의 한국 락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였으면서 두번째 내한을 가졌다. 한국에서는 당시에 발매가 되지 않은 신곡인 MY HEART DRAWS A DREAM을 연주했다. 홀 투어 파이널 MC에서는 ken이 지난 한국 공연은 정말 최고였다고 따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ken은 당시 위염을 앓고 있었는데 만일에 사태를 대비해서 너무 큰 기저귀대신에 생리대까지 착용하고 공연에 임할 정도로 컨디션이 안좋았으며 한국 공연에서는 너무 무리해서 링거를 한방 더 맞았다고 한다.


인천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2007 (MY HEART DRAWS A DREAM)
2007년 11월에는 라르크만의 캐롤송인 Hurry Xmas를 선행 싱글로 발매, 그리고 1년 반만에 10번째 정규 앨범 KISS를 발매했다. KISS는 팝적인 느낌을 많이 살린 앨범이자 앨범 True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앨범으로, 2004년 이후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앨범 중 하나였다. 그리고 앨범의 발매에 맞춰 시부야에 멤버들이 서로 키스를 하는 광고가 화제가 됐다. L'Arc~ang?~Ciel 이어서 12월부터 2008년 2월까지 또다시 아레나 투어 2007-2008 THEATER OF KISS을 실시했다.

2007년에는 라르크의 앨범 소식 외에도 tetsu가 탤런트 사카이 아야나와 11월 18일에 결혼을 발표했다. 한때는 잡지 인터뷰 등을 통해 결혼은 미친 짓이라는 뉘앙스의 발언을 하던 죽을때까지 독신주의자일것만 같았던 tetsu는 이로서 hyde에 이어 2번째 품절남이 되었다. 사실 ken이 첫번째 품절남이지만 이혼남이므로 제외하자

12월 25일에는 소속사에서 주최한 JACK IN THE BOX 2007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hyde X GLAY라는 꿈의 콜라보레이션이 성사되었다. 양 팀의 히트곡을 서로 사이좋게 부르는 모습을 보이면서, 한 때는 신경전을 펼쳤던 라르크와 글레이의 팬들이 이 콜라보레이션으로 서로의 앙금(?)이 녹아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팬들만 사이가 안좋았지 멤버들간에는 계속 교류가 있었다. 영상 참조

THEATER OF KISS 투어가 끝나고 2008년 4월에는 데빌 메이 크라이 4의 테마송인 DRINK IT DOWN을 발매하고 6월까지 아시아 6개국과 유럽 1개국(프랑스)의 세계 투어, TOUR 2008 L'7 ~Trans ASIA via PARIS~을 실시했다. 이 세계투어를 통하여 1년만에 세번째 한국 공연을 가졌다. 그리고 기념비적인 첫 파리 라이브[24]에서는 ken이 폭죽 사고를 당하는 불상사가 있었지만 무사히 라이브를 마쳤다. 성과적인 파리 라이브로 고무된 라르크는 일본으로 돌아와 도쿄돔, 쿄세라 오사카 돔에서 개선 공연을 마쳤다. 특히 쿄세라 오사카 돔에서의 라이브는 라르크 멤버들 스스로도 가장 완벽한 라이브였다고 평가했다.[25] 일본 개선 공연에서는 8년만에 REAL의 TIME SLIP을 불렀다. 물론 영상화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재정비를 위해 2011년까지 라이브 활동 휴지[26]를 선언했다.


12. 2008.06~2010[편집]


이때부터 2011년까지 라르크로서 라이브는 없었지만 지난 활동 휴지를 반면교사 삼아 팬들을 위해서 싱글 발매와 프로모션만 가끔 있었다. 지금도 밴드 휴지 중에 간간히 싱글 발매, 라이브 등으로 활동하는 방침으로 하고 있다. 라르크는 라이브 활동휴지 이후 2008년 8월, 8년만에 더블 A면 싱글인 NEXUS 4 / SHINE을 발매했다. NEXUS 4의 PV는 빌딩 옥상에서 촬영했는데 난간에 발을 일부러 헛디디는 장면이 있었다. hyde와 ken은 와이어를 달고 촬영했으나 빌딩을 좋아하는 tetsu는 와이어 없이 촬영했다.

그리고 2008년 여름에 HYDE는 2003년부터 함께 일해오던 K.A.ZVAMPS를 결성했다. 그들은 인디 밴드임을 자처하며 동시에 싱글 LOVE ADDICT를 발매했다. 작년부터 라르크로 많은 투어 스케줄을 소화했기 때문에 지칠만도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8월부터 10월 말까지 46회 공연이라는 빡빡한 스케줄을 다시 소화했다. VAMPS는 지금까지 25년동안의 라르크의 라이브 횟수를 뛰어넘는 활동량을 자랑하고 있다.

2010년 1월에는 오랜만에 라르크의 신보의 소식이 들려왔다. NHK에서 중계를 담당하는 2010 벤쿠버 동계 올림픽에 맞춰 hyde 작사 작곡의 싱글 BLESS의 발매 소식이었다. NEXUS 4 / SHINE 이후로 1년 반만의 싱글이었다. 이어서 PEPSI NEX의 CM에도 출연을 계기로 The Arrows의 I Love Rock N Roll을 커버했다. 이 CM은 코다 쿠미, 코부쿠로, 퍼퓸 등 많은 아티스트들이 참여했던 CM이었다. 라르크가 커버한 I Love Rock N Roll은 이후의 베스트 앨범 TWENITY 2000-2010에 수록된다. 그리고 3월에는 멤버들이 직접 만든 베스트인 QUADRINITY ~MEMBER'S BEST SELECTIONS~을 발매했다.


PEPSI NEX CM

2010년 12월, 라르크는 뮤직 스테이션 슈퍼라이브 2010에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내어 winter fall, READY STEADY GO를 피로하고 앞서 2010년 1월에 발매했던 싱글 BLESS가 NHK와의 인연이 있어 그를 계기로 10년만에 홍백가합전에 모습을 드러냈다.[27] 2010년 12월 31일, 홍백가합전을 끝내고 곧바로 마쿠하리 멧세 전시장에서 11년만에 카운트 다운 라이브 20th L'Anniversary Starting Live L'A HAPPY NEW YEAR!를 실시했다. 멤버들에게나 팬들에게나 문자 그대로 전무후무한 스케일의 이벤트의 시작을 알리는 라이브였다. 이 날 공연에서는 13년만에 I'm so happy를 피로했다.

13. 2011~2012.06[편집]


파일:external/0cbfef9206ec05db294e41de9b660cbf43e7ea629c4500c17b5add8bb0e882ef.jpg

2011년부터 2012년까지 20th L'Anniversary는 계속 되었다. 2월과 3월 사이에는 인디즈 시대를 포함한 모든 시대를 결산하는 느낌의 베스트 앨범인 TWENITY를 발매하고 5월 28~29일 아지노모토 스타디움에서 20th L'Anniversary Live를 실시했다. 첫째날에는 DUNE부터 HEART, 둘째날에는 ark, ray부터 2011년까지의 곡만을 불렀으며 15주년 라이브를 뛰어넘는 최고의 공연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양일 비가 내리는 날이어서 라르크에 걸맞게 드라마틱했으며 그동안 오랫동안 불려지지 않은 명곡들이 총출동했던 라이브였고 TIME SLIP은? Singin' in the rain은? 이틀동안 총 10만명을 동원하였다. 더불어 hyde의 헤어 스타일 또한 큰 화제가 되었다. 5년동안 레게 지옥 시작 2011년 초에는 도호쿠 대지진이 있었던지라 수익금 전액을 지진피해 기부금으로 사용하였다.

20주년 라이브의 흥분이 가시지도 않은 채, 곧이어 결성 20주년 기념 싱글 3부작을 발표를 결정했다. 6월 29일에는 1부작인 GOOD LUCK MY WAY를 발표했다. 이 싱글도 READY STEADY GO부터 시작된 강철의 연금술사 타이업이었다. 이어서 9월부터는 12월까지 아레나 투어 20th L'Anniversary TOUR를 실시했다.

9월 23일에는 TV아사히에서 주최하는 드림 페스티벌 2011에 참가, 10월 12일에는 2부작인 X X X(키스 키스 키스)를 발표했다. X X X는 당시 많은 화제를 낳았는데 노래 자체도 지금까지 라르크가 전혀 시도하지 않았던 R&B를 혼합한 새로운 장르였다. 이 때부터 라르크는 상당히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또한 발매 당시, 일본 주간 찌라시 잡지에 라르크 멤버들이 또다시 서로 키스를 하는 파파라치 사진이 올라와 큰 화제가 되었다. 이는 노이즈 마케팅이었고 큰 효과를 보아 오랜만에 오리콘 1위를 달성했다.

X X X(키스 키스 키스)는 곡명부터 자켓, 노래, PV, 마케팅, 프로모션까지 하나에서 열까지 항상 화제를 몰고 다니는 싱글이었다. 그리고 이 싱글 무렵부터 P'UNK~EN~CIEL 대신에 L'Acoustic이 커플링이 들어갔다. 처음에는 솔로 활동의 곡을 커버하자는 tetsuya의 의견이 있었으나 hyde가 정체성을 문제로 기각시켰다. 이 여세를 몰아 12월 21일에는 마지막 3부작 CHASE를 발표했다. CHASE는 New World에 이어 공동 작품 싱글이었다.[28] 원래 타이업인 WILD7에 쓰인 곡은 ken이 만든 원곡이나, hyde의 희망에 따라 A멜로디와 B멜로디는 hyde가 전면 수정, C멜로디는 전반부가 ken, 후반부는 hyde가 만들었다.

2011년 12월 중순에 발표된 20th L'Anniversary Live DVD 판매량이 100만매를 돌파하며 남녀 밴드/그룹으로는 Mr.Children(155.9만매)와 B'z(143.3만매) 이어 3번째를 기록하였다.[29]

그리고 2010년에 이어 2011년에도 홍백가합전에 5번째로 출전하였다. 그리고 2012년 1월에는 hyde가 본명을 포함, 출생, 어린 시절, 라르크 등에 대한 모든 것을 밝히는 자서전 THE HYDE가 출간되었고, 2012년 2월 8일에는 11번째 정규 앨범 BUTTERFLY를 릴리스했다. 4년 3개월만에 발매한 앨범이었으며 정규 앨범 투어가 없는 유일한 앨범이었다.

라르크는 그동안 아시아 투어, 프랑스 투어를 하면서 착실히 인지도를 쌓아온 결실로 3월부터 6월까지 20th L'Anniversary WORLD TOUR 2012를 실시했다. 홍콩, 태국, 중국, 대만, 미국, 영국, 프랑스, 싱가폴, 인도네시아, 한국 등 10개국 14도시 17공연으로 일본 공연을 포함하여 총 45만명을 동원하는 지금까지 가장 큰 스케일의 월드 투어였으며 3월 21일에 동양인 아티스트 중에서는 사상 최초로 뉴욕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단독으로 공연했다.[30][31]

그리고 일본으로 돌아와 개선 공연인 20th L'Anniversary WORLD TOUR 2012 THE FINAL을 실시했다. 이 때 일본 아티스트가 아닌 세계적인 아티스트라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던 ラルク来日(라르크 내일)이라는 광고 문구는 꽤 화제를 모았다. 5월 12,13일에는 닛산 스타디움, 19,20일에는 유니버설 스튜디오 재팬에서 라이브를 마치고 5월 26, 27일에는 1년에 한 아티스트만 공연할 수 있다는 국립 카스미가오카 육상 경기장에서 파이널 공연을 가졌다. 라르크 이외에 단독 공연한 아티스트는 SMAP, DREAMS COME TRUE, 아라시, 모모이로클로버Z, AKB48까지 5팀뿐이었다. 록밴드로서는 라르크 앙 시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32]


WORLD TOUR 2012 in Tokyo National Stadium CM
투어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2012년 5월 31일, 하와이 호놀룰루 와이키키 셸에서 20th L'Anniversary Year Live in Hawaii을 실시했다. 하와이 주에서는 특별히 호놀룰루 시장인 피터 칼리슬까지 참석해 5월 31일을 Day of L'Arc~en~Ciel로 지정했다.[33] 2012년 6월 1일, 1998년 이래로 두번째 열린 팬클럽 한정 이벤트 하와이 앙 시엘을 끝으로 솔로활동을 위한 활동휴지를 선언했다.

14. 2012.06~2015[편집]


파일:external/www.m-on.press/13274_16809_main.jpg

활동휴지를 선언하고 hyde는 곧바로 VAMPS의 활동을 개시했다. 라르크의 월드 투어가 끝난지 보름도 되지 않아 6월 12일부터 10월까지 총 49회에 달하는 투어를 돌았다. 2012년 10월에는 tetsuya가 자서전 哲学2。(철학2, 테츠가쿠2)를 발표했다.

2014년 3월 21~22일, 라르크 앙 시엘이 국립 카스미가오카 육상 경기장에서 다시 한 번 공연을 가지면서 마지막 단독공연을 치룬 아티스트가 되었다. 양일 16만명 동원으로 국립경기장 최대 동원수 기록[34]했다. 라이브에서는 신곡 EVERLASTING을 공개했다. 5월 29일, 이벤트 라이브 'SAYONARA 국립경기장 JAPAN NIGHT[35] 공연에서 엔딩 공연을 맡으며 국립경기장 56년의 진정한 파이널을 장식했다.

8월 13일에는 라르크로서 2년 반만에 신곡인 -Memorial Edition- EVERLASTING을 발표했는데, 통상반이 없는 한정수주발매여서 공식 넘버링으로 들어가지 않은 유일한 곡이며 PV나 TV 프로모션 조차 없었다.[36] 2014년 9월에는 tetsuya가 결혼 7년만에 득남을 했다. 그리고 2014년 12월에는 WORLD TOUR 2012의 다큐멘터리를 다룬 영화 Over The L'Arc-en-Ciel이 개봉되어 단시간에 흥행 수입 1억엔을 돌파했다.

2015년 9월 21~22일, 오사카항의 인공섬 '유메시마'에서 음악관련으로는 최초의 공연인 2015 L'ArCASINO[37]를 이틀동안 실시하여 양일 10만명을 동원했다. 라이브에서는 신곡 Wings Flap을 공개하였다. 과거 그랜드 크로스가 연상되는 화려한 무대 세트와 무대 의상으로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12월 23일에는 싱글 Wings Flap을 발매했다. Wings Flap은 4년만에 hyde와 ken의 공동 작곡이었는데 hyde는 당시에 외국에 있어 ken과 서로 만나지 않고 영상 통화 등 원격으로 곡을 만들었다.[38]

15. 2016[편집]



Yoshiki와의 콜라보레이션. Say Anything은 10분 40초부터.
2016년 10월 14~16일 3일에 걸쳐 Yoshiki가 주최하는 VISUAL JAPAN SUMMIT 2016에서는 첫째날에는 yukihiro, 둘째날에는 hyde, 셋째날에는 ken이 MUCC와 함께 출연했다. hyde는 여기서 Yoshiki와 함께 Say Anything과 MY HEART DRAWS A DREAM을 연주하는 등, 영원히 안나올 것만 같았던 조합으로 꿈의 콜라보를 실현했다. 또 12월 16일에는 HYDE가 globe의 SPECIAL COVER BEST 앨범에 참여, DEPATURES를 커버하면서 코무로 테츠야와 함께 뮤직 스테이션 슈퍼 라이브에서 콜라보 무대를 가졌다.

12월에는 라르크가 오랜만에 활동을 시작했다. 12월 21일에는 소니 플레이스테이션 VR 바이오 해저드 X 라르크 앙 시엘 콜라보레이션으로 싱글 Don't be Afraid를 발매했고 소니 MDR-1000X의 CM에는 Don't be Afraid의 영어 버젼이 실린 CM에 출연하였다. 그리고 Don't be Afraid의 PV에는 여러가지 버전이 있는데 그 중에서 바이오하자드 7에서도 사용되는 최신기술을 채용한 RE ENGINE을 이용하여 좀비 버젼, 인간 버젼의 3D CG로 제작된 라르크 멤버들이 바이오 해저드 시리즈의 세계를 무대로 좀비들과 싸우는 지금까지 없었던 신기술의 VR PV가 제작되었다.

반면 뮤직 스테이션 슈퍼라이브 2016을 제외한 일체 TV 프로모션이 없어 판매량은 <Blurry Eyes> 이후로 가장 저조한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

2016년 12월 27일에 열린 JACK IN THE BOX 2016에서는 hyde, ken이 출연하여 ken은 MUCC와 합동 공연, hyde는 D'ERLANGER와 44 MAGNUM의 PAUL과 함께 콜라보 공연을 가졌다. 일본에서 연말을 보낸 hyde는 해가 넘어가자 VAMPS의 활동을 준비하기 위해 라스베이거스로 넘어갔다.


16. 2017~현재[편집]


2017년 4월 8일, 4월 9일 도쿄돔에서 25th L'Anniversary Live가 확정되었다. 라르크 최초로 한국, 중국(상하이/베이징), 홍콩, 대만팬들을 위한 2박 3일 패키지에 대한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 우리나라에서는 세방여행사가 업무대행을 맡았는데 그동안 넥서스 티켓을 통해서 라이브를 다녀온 팬들은 겨우 2박 3일 패키지는 둘째치고 이틀치 티켓도 아닌 하루치 티켓에 멤버들도 참석하지 않는 애프터 파티로 200만원에 가까운 터무니없는 가격에 '전형적인 외국인 호구잡아 뜯어먹는 패키지', '배려하는 척 뒷통수 치기'라며 원성이 들끓고 있다. 한마디로 멀쩡한거 괜히 건드렸다가 안한것만 못하게 된 꼴. 이런 창렬한 패키지 사정은 한국뿐 아니라 중국, 홍콩, 대만 등도 비슷하다. 게다가 '아시아 팬'만을 배려한 콘텐츠인지라, 아시아 외 해외팬들은 티켓을 구할 길이 전혀 없어 원성이 자자하다. 하지만 정작 오피셜 SNS 관리자는 해외 패키지를 사라는 광고만 매크로처럼 도배할 뿐. 3월 1일에는 25th L'Anniversary Live의 앰블럼이 공개되었는데 개떡같은 디자인으로 팬들에게 집중포화를 맞았다.

그런 와중에 매체로부터 ken이 이미 작년 가을에 3번째 결혼을 했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상대는 20대 일반인 여성으로 속도 위반 결혼에 이미 자녀 1명을 두고있다고 밝혀 팬들사이에서 많은 화제가 되고 있다. 팬들은 그저 켄의 결혼을 축하하는 반응이다. 그리고 3번째 품절남이 됨으로서 yukihiro만 남았다.

4월 8일과 9일의 티켓은 르 씨엘 선행에서도 낙선율이 대단히 높았을만큼 치열했다. 그리고 결성 25주년 기념 공연을 도쿄돔에서 4월 8,9일 이틀간 한국을 포함한 전세계 10개국에서 라이브 뷰잉으로 진행되었다.

파일:external/scontent-amt2-1.cdninstagram.com/17881427_1857769884447950_5113508201995698176_n.jpg

공연 전의 악재들에 대한 지나친 기우였을까. 오랜 휴식기 끝에 라이브였지만 그들의 실력과 인기는 결코 죽지 않았다. 25주년이라는 테마에 맞게 과거의 히트곡들을 부르면서 추억을 되살렸으며, 하이도는 화려한 의상들을 수차례 갈아 입으며 팬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또한 무엇보다 아라시의 마츠모토 준이 고안했던 무빙 스테이지를 착안함으로서 공연의 재미를 더했다. 이틀간의 라이브는 대성황에 막을 내렸다. 23곡씩 3시간 30분동안 진행되었는데 과거의 곡인 <風の行方(바람이 가는 곳)>, <Vivid Colors> 등의 초기의 곡들을 불러서 더욱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hyde는 만우절이 아니라 정말 눈썹을 밀고 나와 더 화제가 되었다. <Link>를 부르면서 9년만에 멤버 소개를 했다. 이 라이브를 관람한 하이도의 친한 아티스트들은 라르크를 '살아있는 전설(生ける伝説)'이라는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25주년 기념 공연의 영상은 6월 24일 WOWOW 프라임을 통해 방송되었다.

찌라시 사이에서 멤버들과 소속사의 갈등이 점점 사실이 되어가고 있다. 일단 확실히 밝혀진 것은, 보통의 인기 아티스트가 개런티를 3~5% 정도 받는다면 라르크는 메이저부터 줄곧 2.5%로, 매우 낮은 개런티를 받고 있었던 것. 그리하여 멤버들은 높아지지 않는 개런티에 불만이 많았고 사장 측에 회계 자료를 보여줄 것을 요구하자 '적자'라고만 말하면서 거부했다. 그러나 실제로 매버릭은 매년 15억엔의 매출, 2천만엔의 영업 이익을 남기는 흑자였으며, 오오이시 사장은 이렇게 뒷돈을 챙겨 22억엔이라는 거금으로 부동산 투기를 했던 것. 이 문제에 대해 오오이시 사장은 '협상은 다시 제대로 하고 있다'며 밝혔으며 테츠야는 '노 코멘트. 다만 팬들을 슬프게 하지 않을 것이다'라 밝혔다. 라르크가 매버릭DC에서 끼치는 영향력이 절대적인 만큼 오오이시 사장도 쉽게 무릎을 꿇은 듯.

파일:d324bfe4.jpg

2018년 VAMPS가 활동 휴지를 하기 때문에 라르크가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었지만 어른들의 사정으로 활동 휴지를 계속 이어가게 되었다. 그러다 8월 7일 크리스마스 라이브를 한다는 공지가 올라왔고, 2018년 12월 19-20일 2일간 도쿄돔에서 LIVE 2018 L'ArChristmas 라이브가 확정되었다. 헤이세이를 대표하는 일본 록밴드 중 하나인 라르크의 헤이세이 마지막 라이브는 LIVE 2018 L'ArChristmas가 되었다. 양일 공연에서는 靜かの海で, I wish 등 오랫동안 부르지 않은 곡들을 선곡했다.

2019년 9월 새 투어 계획을 발표했다. 제목은 L' Arc~en~Ciel ARENA TOUR MMXX(투엔티투엔티)로 2020년을 기념하여 계획 된 투어로 보인다. 기간은 2020년 1월 9일 부터 3월 5일 까지 오사카 홀, 아이치 스카이 엑스포,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 요코하마 아레나(팬클럽 회원 한정), 요요기 경기장 제1체육관 총 5장소에서 12회 진행한다. 2012년 월드투어 이후 최근 8년간 단발성 2회공연만 드문드문 진행하였는데 오랜만에 12회 공연의 투어를 진행하게되었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각트도 3년만에 콘서트 투어를 재개하기로 결정하면서 오리콘에서 싱글 동시발매로 맞붙었던 2001년 이후로 19년 만에 비슷한 기간동안 활동을 하게 되었다. 동시에 전세계에서 라르크의 음악들이 공식적으로 스트리밍이 가능해졌고, 또한 공식 유튜브를 개설하여 옛날 곡들의 뮤비들을[39] 고화질 버전으로 차례차례 업로드 하는 중.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2월 28일, 2월 29일 요코하마 아레나 공연과 3월 4일, 3월 5일 국립 요요기 공연 및 라이브 뷰잉이 전면 취소되었다.

[1] 기억의 파편은 hiro의 곡인데 기타리프를 heavenly앨범의 Cureless의 인트로에 차용했다[2] 하이도와 테츠야는 엑스타시 소속의 Gille de Rais의 앨범 등에 코러스로 참여하면서 간접적으로 분위기를 느꼈는데 아티스트에 대한 간섭이 너무 심하고 체육회계통같은 느낌이 싫었다고 생각했다[3] '오사카 대표 록밴드'라는 타이틀은 지금도 유효하다. 몇년 전 뮤직 스테이션에서 보여준 지역별 대표 아티스트 랭킹에서 오사카 지역에는 라르크가 1등이었다.[4] 팬들 중에는 은근히 각성제 소지 했던 것으로 알고있는 사람들이 많다.[5] 고질라 타이업[6] 원래 HONEY의 커플링 곡으로 수록 예정[7] 당시 8년 연속 오리콘 1위 행진을 기록중이었다[8] HONEY는 1998년 연간 오리콘 차트 7위[9] 4연속 싱글 이후 globe는 세일즈에서 급격한 하락세를 보였다.[10] HONEY 7위, 華葬 14위, snow drop 15위, 浸食~lose control~ 20위, winter fall 25위, DIVE TO BLUE 26위, forbidden lover 27위[11] 1위는 베스트 앨범 2장의 판매량으로 약 1,000만장을 판매한 B'z[12] 한국은 일본 문화 규제 정책으로 발매되지 않았다.[13] 꼭 첫째날이라고 ray의 곡이 아예 안나오는 것은 아니었다[14] 카와사키 중공업 홈페이지에는 아직도 그랜드 크로스 세트의 사진이 남아있다.[15] 활동 당시에 HYDE가 솔로라서 외롭다고 이야기한 사실이 B'z의 마츠모토 타카히로에 의해 뮤직 스테이션에서 언급되었다. 하지만 정작 타모리는 '근데 나한테는 솔로라서 좋다고 하던데?'라고 말하자 마츠모토는 '네? 그런 얘기는 처음 듣는데...'라고 하면서 당황했다.[16] 텐가(천가). JACK IN THE BOX의 모태[17] 당시에는 공식적으로 메이저 입성을 데뷔로 인정하고 있었다[18] 소브라니 블랙 러시안[19] 그리고 2년만에 약속을 지켰다[20] TV 프로모션에는 기타 연주까지 해준다[21] 현재는 2008년 X JAPAN 재결성 라이브 1분이 최단시간 기록.[22] I'm in pain[23] 오프닝 SE곡으로 쓰인 Hurry Xmas를 포함[24] 불어로 된 밴드이면서 지금까지 프랑스에서 공연을 하지 않았다는건 웃기는 일이라며 멤버들은 파리 라이브에 큰 의미를 두었다[25] 쿄세라 돔에서의 공연의 DVD를 편집하면서 tetsu는 눈물을 흘릴뻔 했다고 한다[26] 엄연히 활동 중지가 아니다. [27] NHK가 홍백에 거물급 아티스트를 부르기 위해 관련 타이업 송을 부르는 조건으로 섭외하곤 했다. 라르크도 그 중에 하나였다. 반면 2016년에는 아무로 나미에가 리우 올림픽의 주제가를 불렀지만 트러블이 생기면서 출연이 불발, NHK에 출연금지 조치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28] ken, hyde[29] VHS 총매상 역시 100.9만장을 기록하여 VHS+DVD 판매량은 더블밀리언 기록.[30] tetsuya는 인터뷰에서 메디슨스퀘어 가든에서 LOUDNESS가 Motley Crue의 오프닝 공연을 한 것을 어렸을 때 듣고 대단하다라는 생각을 했다면서 자신들이 최초의 단독공연을 하게된 것에 대한 기쁨을 밝혔다. 원래 미국 공연은 소극장 규모로 계획되었으나 미국 팬들의 청원으로 메디슨 스퀘어 가든으로 추진했다. 비록 적자를 감수하는 공연이었지만 장래에 그 상징성을 생각해서 공연을 추진했다. [31] 2번째 단독 공연은 X JAPAN. 원래 2008년에 라이브가 추진되었으나 요시키의 척추간반 헤르니아의 악화로 연기되었다.[32] 사실 B'z도 국립경기장에서 라이브를 추진했으나 음향 문제로 취소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33] 이때 촬영차 같이 하와이에 온 동료가 급사하여 라르크 멤버들은 앵콜이 끝나고 Bye Bye를 부르는데 hyde와 tetsuya는 눈물을 흘렸다[34] 무대 뒤 좌석까지 자리를 넓혀 360도로 스테이지를 둘러 쌌다[35] "1년에 한 아티스트만"이라는 시책이 무너진 것은 2020년 도쿄에서 올림픽이 개최되는 것이 결정되고 국립경기장이 공사에 들어갈 예정이기 때문이다.[36] 뮤직스테이션 슈퍼라이브 2014 제외[37] 유메시마는 관광산업촉진을 위한 카지노 도입이 유력한 곳이다.[38] 하이도가 켄과 영상 통화를 하면서 후렴구를 흥얼거리자 켄이 포복절도한 일화가 있다.[39] 여기서 업로드 된 최신곡은 Don't be afraid.